-서론-성결의 교리는 모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며,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교회의 승인을 얻어 왔다. 본 연구의 목적은 성결단체로서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과업을 명백히 하고 우리의 증거를 강화시킨다. 우리는 또한 구원의 교리에 있어서 우리와의 차이점이 있더라도 우리의 자매 교회들을 이해해야 한다.본 연구는 비록 전체 기독교의 흐름과 일치되지는 않더라도 웨슬레안이라고 불리는 요한 웨슬레의 정신에 일치하고 있다.웨슬레의 성결과 칼빈의 예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들 중에서 서로 다른 구원의 이론을 나타낸다. 성결과 예정은 모두 성경적 교리이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의 분리가 있어서는 안 되며, 단지 감정적 편견에 의하여 자주 가려지는 주제에 한 빛이 더해져야 한다.제 1장 개인예정 교리의 배경초기 기독교 교회는 매우 명백하고 분명한 노선에 따라 연합되어졌었다. 하지만 이 연합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개인적 체험을 근간으로 하는 기본은 같으나 그 전개 방식과정에서 견해차이가 발생하여 로마 카톨릭, 루터주의, 칼빈주의, 웨슬레주의 등의 분파로 나뉘게 된다.사도들의 죽음이후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교 사회 안에서 배교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자 올바른 행위, 회개, 성직의 형태, 올바른 믿음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들은 개인적 공로에 의한 구원을 믿음에 의한 구원보다 더 가르쳤으며 은총과 개인의 기독교적 체험을 무시하고 윤리를 지나치게 강조했다.이러한 맥락아래 A.D 409년 펠라기우스는 개인적 정결과 세상의 부패로부터의 절재를 가르쳤다. 교회는 그의 이러한 호소력 있는 엄격함에 신뢰했고 펠라기우스는 계속적으로 그의 논리가운데에 원죄부정, 죄와 관련없는 영혼 등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펠라기우스의 이론들은 사도 바울 이래로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어거스틴에 의하여 도전을 받게 된다.어거스틴은 위와 같은 인간의 자유와 완전성에 지나친 어거스틴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어거스틴의 지적인 지도력, 특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개념은 종교개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오직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한 구원은, 구원이 교회의 명령에 복종하고 선행과 재물의 기부를 통한 공로의 축적에 의하여 얻어질 우 있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칼빈은 어거스틴의 철학에 기초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전제는 어거스틴의 결론에 근거한다. 어거스틴의 사유는 하나님께서 일부의 사람들을 구원으로 예정하셨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논리를 더 이상 전개시키지 못했지만 칼빈은 어거스틴의 사유를 한걸음 더 전개시켰다. 결국 개인 예정 이론은, 성경으로부터 유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위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수호할 논리적 필요성에 의해 요구된 교리이다. 멸망에의 예정은 받아들인 전제로부터의 자연적이고 논리적인 발전이다.베자는 제네바 대학의 지도자가 되었다. 칼빈의 교의에 관한 그의 해석이 그곳에 공부하러 왔던 학생들을 통하여 유럽 전역에 칼빈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베자는 종교개혁의 논리를 또 다른 필연적 단계로 옮겨 놓았다. 어거스틴과 칼빈은 모두 헌신적인 기독교인이었고 또한 실제적이었으므로, 자신들의 추론이 논리의 궁극적 결론에 이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하나님께 대한 어거스틴의 믿음은, 하나님의 작정은 선택된 자들을 위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결론으로 만족한다. 공의로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지나치게 도취한 칼빈은 그의 2중 예정 교리 그 이상을 전개하지 못했다.베자의 칼빈주의에 관한 두 가지 요소는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그는 신적 작정의 연속에 동의했다. 이것은 그가 취한 극단의 신학적 위치를 뒷받침 한다.2)그는 성경적 교훈을 떠나서 올바른 순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가정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 칼빈의 의견과 조화 될 수 없다.타락 전 예정설 체계는, 인간 창조의 신적 작정 이전에 일부 사람들을 구원으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예정에 대한 배자의 해석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 깊은 주석을 통하여 보여 주었다.신적 작정에 관한 타락 전 예정 이론의 근원은 2중적이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지 않는 하나님의 활동 방법과 하나님에 관한 특정의 사항이 전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지식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기독교인의 믿음과 신학적 진리에 대한 최종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러므로 신학과 신조는 성경에서의 해석 작업을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역에 대한 권위 있는 주장을 하지 못한다. 그러할 때에만 하나님의 계시가 발견되어진다. 신학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의 심판 아래 서야 한다.제 3 장 칼빈주의, 아르마니안주의, 그리고 웨슬레주의의 신학적 특징-극단적 칼빈주의극단적 칼빈주의는 도르트 공의회의 주요 5대 교리에 의하여 정의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 사람들과 천사들은 구원으로 그 외 다른 사람들은 파멸로 하나님에 의하여 예정되었다고 말한다.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칼빈주의의 개념은,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떠한 반대 의지도 이 주권에 대한 위협을 구성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모든 인간의 독창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행한 일과 그들에게 다가올 일들이 모두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 계시지 않고 그 자신의 의지 아래 계신다. 하나님의 의지는 근원적이며 창조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는 자신을 그 의지를 성취하는 데 필요로 하게끔 하신다.-아르미니안주의아르미니우스 자신은 철두철미하게 복음적적이었고, 그의 개인적 통찰력은 웨슬레와, 그리고 신학적으로 이단의 성격을 조금도 가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펠라기안적 합리주의에 빠졌다. 이런 형태로 아르미니우스의 주장은 왜곡되어 인-웨슬레주의웨슬레의 신학적 공헌은, 믿음에 대한 일반적 견해를 바로잡아 발전시킨 것과, 또한 그 믿음의 교리를 기독교인의 삶과 모든 신학 분야에 구체화시킨 것이다.웨슬레에게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선택된 자들에게 특별히 부여되는 선물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길이다.웨슬레는 온전한 구원은 사랑과 순종의 완전이라고 가르친다. 사랑의 행위와 신실성 면에서의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 칼빈은 정적이며 웨슬레는 역동적이다. 믿음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으로 인간을 회복시키려는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믿음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웨슬레안-아르미니안주의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의 저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 자신이 수행하였던 것보다 한 단계 더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적 입장을 진전시켰다.웨슬레안- 아르미니안주의는 원죄와 자범죄로부터 우리들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필요를 주장함으로써 펠라기안-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한다. 또한 부패성으로부터의 구원 교리와 이 세상에서 의지적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은총의 교리에 의지하여, 극단적 칼빈주의의 도덕적 칼빈주의의 도덕 무용론을 반대한다.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의 통찰에 성령의 역사라는 본질적인 요소를 더한다. 그리고 오늘날 복음적 신학에서 새롭게 널리 퍼진 요소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역동성이다.제 4 장 정통 신학에 끼친 웨슬레안의 영향-신칼빈주의(온건 또는 수정 칼빈주의)아르마니우스와 웨슬레의 설교의 성경적 영향으로, o인 예정 교리가 대부분의 칼빈주의 분파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성경의 교리에 대한 강조점이 칼빈주의의 엄격한 전체 체계를 약화 시켰을 때 복음주의에 새로운 강조점이 등장했다. 이는 칼빈주의적인 입장 위에 웨슬레주의를 고무시킨 그러한 복음적 역동성을 결합시키고 있다.우리가 칼빈주의와 웨슬레주의 사이의 상이점의 근간이 되는 신학적 구조를 분는다. 복종은 보편적으로 승리로운 삶과 봉사에 대한 유익으로서만 강조되고 있다.인간의 죄 된 본성에 대한 칼빈주의적 입장은 웨슬레안 칼빈주의의 기초가 된다. 웨슬레안 칼빈주의자들은 죄 된 인간의 본성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영적 승리라는 중요한 성경적 개념을 부가시킨다.-칼빈주의적 웨슬레주의웨슬레안 칼빈주의는 인간의 본성과 육체적인 본성은 서로 구별될 수 없다 하여 성령에 의한 인간 본성의 정복을 강조한 반면, 칼빈주의적 웨슬레주의는 이와 반대로, 2중의 인간 본성을 이야기 한다. 떠한 웨슬레안 칼빈주의는 육체적인 본성의 점진적인 극복이나, 성장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칼빈주의적 웨슬레주의는 성장의 측면을 무시한 성화의 극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칼빈은 비록 그가 복음의 사회적 확산을 신학적 차원애서 성결에 관련짓지는 못했을지라도 그것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웨슬레의 가장 깊은 관심은 사랑의 확신에 있었고 그것은 성결과 기본적으로 관련된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확하게 성결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성결에서 분리되어질 수 없다, 성결은 성령의 열매에서 나타나야만 한다.-성경 해석의 견지에서 본 교리적 차이점하나님과 인간 책임성의 교리는 예정 교리와 성결의 교리가 사러 교차하는 곳에 놓여 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이 어느 정도의 도덕적 책임성을 갖는가 하는 이론적인 문제이고, 하나는 주권자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인간들에게 어느 정도의 도덕적 책임성을 부여 했는가 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의 전제들의 정확성을 점검해야 한다.성경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삶의 거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쉽고 논리적으로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들의 신학을 심판하는 위치에 서서 우리의 지나친 자만심을 억제하고 우리를 시정하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진리로 우리를 인도한다.제 5 장 특별 예정 교리았다.
내가 선택한 책은 제러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이다. 추천 도서 네 권의 내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서점을 가서 보니, 이 책이 가장 흥미 있어 보였다. 우선 제목에서의 ‘소유’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종말에 대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책은 또 어떤 것의 종말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했다.생각보다는 책 내용이 쉽다고 생각하며 흥미 있게 읽었지만, 읽고 나니 정리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알고 있던 부분이 많았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에서는 어렵게 느껴졌다. 이런 종류의 책을 접한 적이 거의 없어서 처음에는 ‘언제 다 읽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3일 만에 다 읽을 정도로 흥미로웠다.우선 저자는 ‘소유’의 개념과 함께 시작한 산업자본주의가 막을 내리고, 대신 ‘접속’이란 개념을 앞세운 문화 자본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고,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는 공급자와 사용자의 관계로 변화한다. 노동의 상품화가 산업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에는 문화와 놀이가 상품화 되고, 지적 자본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문화영역이 상업 영역으로 흡수되면 인간관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것은 사회의 앞날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문화 영역과 상업 영역의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어쩌면 접속의 시대가 해결해야 할 가정 어려운 과제인지도 모른다.인간관계는 금전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가 전통적 사회관계를 밀어낸다. 나는 이점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싶다. 전통적 관계는 친족, 만족, 지리, 공유하는 정서로부터 탄생한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책임감과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으로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상업적 관계가 밀어 낸다면 ‘우리의 모든 관계는 돈에 의해 결속되고 사람간의 정이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네트워크를 통한, 보이지 않은 관계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범죄 또한 늘고 있다. 이 또한 상업적 관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이런 문화 자본주의 속에서도 한 편에서는 전통을 다시 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길 수 있는 전통음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토착음악+현대적 음악=퓨전 음악을 만들어 내어 무조건 전통을 밀어 내기보다는 두 가지를 결합하여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음악은 문화 자본의 한 형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한 민족이 공유하는 가치와 역사적 유산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써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음악은 사회적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문화 형태의 하나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인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음악은 우리를 묶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산업자본주의 사회에는 부를 축척하기 위해 자본이나 생산도구를 사유화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혹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부를 축척하기 위한 자본이나 생산수단이 이미 더 이상의 부를 축척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거의 대부분이 고갈되어 가고 있거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다 소유하고 있어서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정보다.그런데 정보라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므로 정보를 사유화하기 보다는 수많은 정보제공자와 함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좋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갓이 바로 인터넷의 발달일 것이다. 인터넷은 정보의 공유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은 정보의 공유화에 기여하는 동시에 정보의 독점을 낳게 되었다. 소수의 사람들이 정보를 독점하고 앞장서간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곳에 다가가 접속할 권리를 달라고 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적당한 수수료를 받고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정보는 이미 시간이 지나 옛것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정보는 이미 소수의 손에 놓여 있다.이제 정보는 공유되는 것이 아니라 독점된다. 결국 정보의 독점은 정보의 획일화를 낳게 되고 결국 정보마저 고갈되게 만들 것이다.점점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이 시대에는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다중 인격체에 가까워지고 있고, 끈끈한 인간관계의 경험과 참을성 있는 주의력이 부족해지고 있다. 또한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성찰적이기 보다는 찰나적이다. 물론 창조적이고, 감성적이고, 유연한고 순간적인 삶을 추구함으로써 득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여기서 나는 나의 경험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 방에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게 된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인터넷을 안 하고 어떻게 사냐고 묻기도 했지만 난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바꾸면서 인터넷을 설치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변한 것이 많다. 부모님과의 대화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말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인터넷을 하고 있을 때 누가 말을 시키면 내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짜증을 많이 부렸다.물론 좋은 점도 많다. 자주 보지 못하는 친구들과 메신저를 통해 대화도 가능하고, 서로간의 사진 등의 정보를 교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 무엇보다도 가족간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인터넷 접속 시간을 좀 줄이고 예전처럼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한다. 내 마음을 대화와 감정으로 느끼고 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새로운 경제에서는 생각을 관리하고 파는 능력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하지만 나는 이 점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의 생각이 상업적인 측면으로 비중이 커진다면 우리는 삶의 중요한 무엇인가를 잃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존재의 거의 모든 측면이 유료 활동으로 바뀌면 궁극적으로는 인간 그 자체도 상품이 되어버리고 상업적 영역은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권을 쥐게 된다.이제 기업들은 공장을 소유하지 않고 브랜드만 갖고 운영하는 회사가 되고 싶어 한다. 포드는 차를 팔기보다는 임대를 통해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고객도 차를 소유하지 않고 임대를 통해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마다 바꾸기를 원한다. 기업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한번의 판매가 아니라 고객과 지속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다.기업은 시장 점유율 보다는 고객의 시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장소와 물건을 상품화 하고 그것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과 식견에 접속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미래 비즈니스의 성패를 가르게 된다는 것이다.이런 마케팅을 위해 경영 방법이 바뀌고 있다. 사무실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상호 위계적 구조가 아닌 훨씬 유연한 구조로 변화 되었다. 문제를 팀워크로 해결하면서 외부 환경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고 자발성과 창조성을 앞세움으로 첨단 기술 중심의 경제에서 집단적 우위를 도모할 수 있다.상품의 광고 또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허구를 창조하고 그것을 체험으로 판매한다. 또한 사회 행사에 참여하고 후원으로서 이미지를 높이고 그에 대한 효과를 노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 행사 후원은 보통의 상업적 광고보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다. 기업도 마케팅에 도움이 되고 국민들 또한 후원으로 인해 이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은 후원을 얻고자 하는 것, 목표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새로운 시대는 무조건적으로 네트워크에 의존하지는 않고 있다. 한 예로 미국은 가상현실 문화에 참여하면서도 현실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고민 중이다. 이런 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가상세계에서 입수하는 정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리적 공동체 안에 지식과 지혜에 접근하는 것을 보완하는 차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곡 명vespers 1610-작곡가몬테베르디[Monteverdi, Claudio, 1567.5.15 ~ 1643.11.29]이탈리아의 작곡가.국적 : 이탈리아활동분야 : 예술출생지 : 이탈리아 크레모나주요저서 :《멜로디아 Melodia》(1632∼1634)주요작품 :《오르페오 La fovola d’O》-곡 해설일반적으로 ‘몬테베르디의 저녁기도’라고 알려진 이 작품은 바하의 수난곡 이전의 교회음악으로는 실재하는 가장 풍부하고 내용이 충실한 작품임을 의심할 바 없다. 청중으로건 연주자로건 이 작품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작품을 처음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스러움마저 경험하게 된다.몬테베르디의 이 작품은 연속적인 예전적 구조이면서 전체적으로 예술적인 면에 두드러지며, 더욱이 음악적 다양성에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합창음악 부분은 1620년대 당시의 모든 기교적 장치의 정수를 보여 조고 있는 반면, 독창 모테트 곡은 매우 감성적인 표현에 능한 기교파 연주를 요구하고 있다. 기악적 부분에서는 매우 정확하고 정교한 기악적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매우 신중한 감정 표현과 극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울림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효과는 특히 두 개의 Magnificat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각각의 곡의 스타일을 당황케 할 정도로 변화시키면서 음악적 주장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대부분의 작곡가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몬테베르디는 두 시간이 넘는 작품을 머뭇거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 유지해 나가고 있다.(해설: John Elion Gardiner)-음반 소개이즘레코드사(2000년)연 주: 인천시립합창단, 인천시립오케스트라 (Cond. 윤학원)-곡 가사Ⅰ. Deus in adjutorium (주여 우리를 도우러 와 주소서)주여 나를 도우러 오소서/ 하나님이시여 자비로써 나를 도와주소서/ 주여 속히 나를 도우러 오소서/바라옵건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 있으라/처음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언제까지나 대대에 이르도록/ 아멘.Ⅱ. Dixit Dominus (주께서 말씀하셨도다)주는 말씀하셨도다/ 주님인 나의 주는 말씀하셨도다/ 그대 나의 오른편에 있을지어다/나 그대의 모든 적을 그대의 발밑에 있도록.주님은 그대의 힘의 지팡이를 시온에서 보내셨도다/ 그대의 모든 적 속에서 다스리라/그대의 힘찬 날에 왕이되어 성스러운 빛남 가운데 있으면서 나 새벽 별보다 먼저 그대를 낳았도다.주는 맹세하기를 이것을 바꾸라 하셨도다/ 그대는 멜시세덱의 위치에 있으며 영원한 사제로다.주는 그대의 오른쪽에 계시며 분노의 날에 왕들은 멸하리라/모든 나라에서 심판하시고 시체가 산을 이루고 광대한 땅을 통치하는 수령을 물리치시도다/그는 길가의 물을 깅어 마시고 그 멀리를 올리도다/ 원하옵건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있으라.Ⅲ. Nigra sun (나는 검도다)나는 검도다/ 나는 검지만 예쁘도다/ 예루살렘의 딸들아/그러면 왕은 나를 사랑으로 나를 그 방으로 인도하고 이렇게 고하도다/‘나의 사랑스런 자여 일어나 이리로 오라’ 라고/보라 겨울은 이미 지나 가고 비도 걷히고 멀리 갔도다/온갖 꽃들이 땅에 나타나고, 수확의 때가 왔도다.Ⅴ. Pulchra es (아름다와라)아름답도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감미롭고 화려함은 예루살렘의 딸이여/아름답도다 나의 사랑하는 자여 그대의 감미롭고 화려함은 예루살렘과 비슷하도다/그대의 두려움은 깃발을 세운 진영같도다/그대의 눈길을 내게서 돌리라/ 그것은 나를 두려워함이니다.Ⅵ. Laetatus sum (내가 기쁨에 찼도다)나 기쁨에 차서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가라고 말할 때/예루살렘이여 우리의 발, 그대의 문안에 서 있으라/예루살렘이여 그대는 도시처럼 구축되어 공고하도다/만백성, 즉 주의 백성들이 와서 예루살렘의 관례에 따라 주의 이름에 감사하도다.Ⅶ. Duo Seraphim (두 사람의 찬가)두 사람의 세라핌이 서로 날아다니며/ 거룩하도다 만군의 주/그 영광은 온 땅에 가득 찼고 하늘에 계시며 증거를 세우는 것, 삼위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니라/그러나 삼위는 하나로 돌아가도다 거룩하도다 만군의 주 그 영광은 온 땅에 가득찼도다.Ⅹ. Lauda jerusalem (예루살렘이여, 칭송하라)예루살렘이여 주를 찬양하라 시온은 그대의 산을 찬양하라/주는 당신의 아이들을 축복하도다 주는 그 말씀을 땅에 내리시고 그 뜻을 신속하게 퍼지도다/주는 양털처럼 횐 눈을 오게 하고 재 같은 서리를 내리게 하도다/빵 부스러기 비슷한 우박을 뿌리면 그 누가 추위에 견디랴?주님은 말씀을 내리시고 그것을 녹히시도다 미풍에 밀려서 물은 흐른다/주님은 말씀을 야곱에게, 여러 규정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도다/그러나 어떠한 국민도 조바심치도다/ 그 규범을 보이시도다/바라옵건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영광 있으라.-곡 감상과 설명첫 번째 곡 Deus in adjutorium 는 “신이여 우리를 도우러 와 주소서”라는 독송에 계속이어 폭발적으로 빛나는 합창이 시작된다. 짧게 반복되는 리듬과 선율로 경쾌하게 알렐루야로 끝난다. 두 번째 Dixit Dominus 는 처음에 멜리즈마가 나오며 그 선율을 오케스트라가 받는다. Bass선율 위에 Sop.의 멜리즈마가 나오며. 합창이 웅장하게 선율을 주고 받는다. 이 곡은 계속 2중창, 3중창+웅장한 합창이 연주된다.“주께서 말씀하셨다”가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선율로 하여, 6성과 6악기와 통주저음위에 대담한 변화를 계속 하면서 전개된다. 그 후 다시 안티포나) “그의 좌편에는”가 제창된다. 다음 곡 Nigra sun는 전통적인 저녁기도의 전례에서 2번째 시편은 “부하들이여”에 앞서는 경우가 많지만 몬테베르디는 제 1시편에 “나는 검도다”를 계속해 쓰고 있다. 이것은 테노르 독창을 통주저음이 받쳐주는 모테트가 있지만, 오페라 아리아에 못지 않는 기교적인 멜리스마 창법이 구사되고 있다. Pulchra es는 여성 2중창으로, 챔발로와 첼로가 반주한다. 2중창의 멜리즈마가 아름답게 어울린다. 8월 15일 동정녀 마리아가 승천한 대축일 저녁기도의 안티포나에 기초를 둔 2사람의 소프라노와 통주저음의 모테트이다. 제 1소프라노가 우세적이지만, 솔로, 호모포닉한 진행과 다채로운 변화가 전개된다. 그 다음의 Laetatus sum는 먼저 그레고리오 성가에 의한 안티포나 “네가 사랑하는 것은”(Dilectus meus)가 일제히 낭송된 후 시편 121편에 의한 “나는 기쁨에 찻도다”가 나온다. 6성과 통주저음에 의한 이 짧은 악장의 전주에 유도되는 테노르와 베이스가 동명의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선율을 unison으로 노래하기 시작하고 다른 성부도 가담하게 된다. 테노르의 2중창이 호모포닉한 진행 후 일단 종지하면 소프라노 2중창의 화려한 멜리스마가 번갈아 진행되면서, 다른 파트로 옮겨진다. 이윽고 호모포니, 폴리포니, 멜리스마 창법의 모든 것이 함께 힘을 다해 장려하게 끝 맺는다.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안티포나가 한 번 더 불려진다. 다음 곡 Duo Seraphim 는 2성의 테노르와 베이스와 통주저음을 위한 모테트로서 놀랄만한 멜리스마 창법이 구사되고 있다. 특히 아름다운 트릴의 효과와 에코 용법이 매우 아름답다. 곡의 중간부 까지 두 사람의 테노르가 천사(세라핌)을 부르고 “3개가 있다”(tres sunt)부터 베이스가 가세하여 곡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마지막 감상 곡인 Lauda Jerusalem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안티포나 “왕이 그의 테이블에 앉는 동안”(Dum essetrex in accubitusuo)가 노래되고 이어서 시편 147편 “예루살렘아 칭송하라”가 노래된다. 제 1합창 3성부, 제 2합창 4성부와 통주저음에 의한 노래이며, 제 2성부의 테노르가 정선율을 맡는다. 이 테노르는 시종 두 합창단의 축과 같은 역할을 하며 환희를 서로 응답하고 노래하면서 감명 깊은 종결로 이끈다. 그 후 한 번더 안티포나가 나타난다.
중세의 학자들은 책의 여백이나 행간에 원문의 내용을 보강하거나 해설하는 주석을 다는 일을 즐겨했다. 그 결과 원문의 내용이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일이 그레고리오 성가에도 9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새로운 유형의 성가가 만들어졌다. 즉, 정형화된 그레고리오 성가를 꾸미거나 확대하는 일이 스위스의 성 갈렌 수도원을 중심으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바로 이 그레고리오 성가의 변천으로 시작된 것이 트로푸스)와 부속가)이다. 이 중 더 확대된 트로푸스로 예수부활 대축전일 미사의 입당송 바로 전에 불렸던 10세기의 대화체로된 것이 있으며, 여기서 전례극이 유래되었다. 또한 초기 오라토리오에는 오라토리오라는 이름보다는 ‘디알로그’(Dialog:대화)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은 전례극이 오라토리오의 근원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전례극은 옛날부터 『마태복음』 중 수난 장면을 3종류 목소리 높이로 구분하여 썼던 것에서 시작되었고, 복음 전도자(에반겔리스트)의 말은 중간 목소리로, 예수의 말은 낮은 목소리로, 무리(군중, '투르바'라고도 함)는 높은 목소리로 나눠 불렀다. 그리고 이것에 다시 가사와 선율이 붙여지고 연기와 무대 배경이 덧붙여지게 되었다. 이런 음악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부활절에 연출되곤 하는 세 명의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이다.그 당초의 목적은 일반 신도 사이에 성서 이야기 등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라틴어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의 속어를 가사 중에 섞은 예도 있다.전례극은 주로 단성 성가에 의한 문답형으로 진행되었는데, 클라이막스에서는 즉흥적인 대위법도 사용되었고, 또 악기의 반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특정 축제일(주로 부활절, 성탄절)을 축하하기 위해 성경 속의 한 장면을 연극으로 상연한다.같은 시기에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 밖에서 연주되는 것은 "신비극"이라 불렸다. 처음에 교회 안에서만 했던 것이 후에는(13세기) 교회 밖에서도 행해진다. 최초의 전례극으로는 10세기서부터 있어온 부활절 트로푸스 인데, 이것은 예수의 무덤에서 천사와 예수를 찾는 여인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이 노래는 부활절 노래로 확대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가는 장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와 만나는 장면 등이 덧붙여졌고, 이것이 성무일도에 사용된다. 장면의 구성은 그러나 지역마다 차이를 보였다.전례극은 주로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행해지는 것이 많고, 11세기 이후 전례극의 소재는 더욱 다채로워져서 , , 등이 유명해졌다. 이 중 오늘날 잘 알려진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가 있다.13세기에는 전례극이 크게 번창하여, 부활절 이외의 절기, 즉 성탄절, 에피파니), 마리아 승천일, 마리아 축일 등으로 파급된다. 극적인 면이 점차 강화되어 전례와 분리되어 일종의 민속극이 된다. 그래서 지방어가 사용되고, 등장인물에 역할이 주어지는 일이 증가한다. 일반인에 의해 지방어로 불리는 전례극이 14세기초 이후 나타난다.
서론먼저 뉴 에이지를 정의하자면, 뉴 에이지(New Age)란 단어 그대로 새로운 시대, 새 시대 혹은 새 세대라는 뜻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그 용어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들은 사용하여 새 시대를 이룩하자는 것이다.뉴 에이지 사상이란 신비종교와 힌두교와 불교 등의 동양 종교를 근간으로 하여 진화론적 낙관주의와 사라져버린 과거의 문명들과 외계의 문명들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신비적 감정을 혼합하여 그것을 “과학”이라는 옷을 입힌 현대판 신화운동이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인간 속에 내재된 초월적인 능력을 계발, 고양하여 우주와 인간이 하나 되고, 인간과 인간이 하나 되며, 궁극적으로 신과 인간이 합일되도록 하자는 새로운 인본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이런 사상으로 만들어진 뉴 에이지 음악은 뉴 에이지 음악은 8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대중 음악계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뉴 에이지 음악은 분명한 철학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으며 반기독교적인 뿌리를 가진 음악이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고급 락 풍도 있고 째즈 풍, 클래식 풍, 심지어는 찬송가를 편곡하기도 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가장 편하고 안락한 상태로 만드는 음악이라고 알려 졌다.또한 뉴 에이지 음악은 반기독교적인 음악이다. 과거에는 악은 분명한 악한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분별이 가능했지만 최근 들어 사탄은 달콤한 사탕으로 자신의 모습을 뒤덮은 채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본론뉴 에이져들은 음악을 우주의 반영으로 보고 피조물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무한자의 영원한 선율로서 이해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을 통해 음악을 발견해 낸다.) 나무, 숲, 새 등에 깃들어 있는 리듬과 선율에 인간을 조화시킴으로써 그들은 인간의 정신을 계발하고 인간 스스로의 내면에 있는 신적 본질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특징을 지닌 음악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뉴 에이지 음악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여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조차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게 한발씩 빠져들게 마련이다.위에서 언급 했듯이 뉴 에이지의 음악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다. 반 기독교적이요, 적 그리스도적이다. 그런 가치관을 인정하고, 믿고 그 음악을 듣는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뉴 에이지 음악이 아무리 편안함을 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잘못된 영의 경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편함과 혼란함을 주는 것이다.하지만 뉴 에이지 음악이 모두 반기독교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뉴 에이지의 음악과 뉴 에이지 풍의 음악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뉴 에이지 풍의 음악은 그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뉴 에이지 풍의 음악이란 시끄러운 헤비메탈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음악이다. 그러므로 악기 사용이 소박하고, 소리가 부드럽고, 반복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의 음악을 모두 뉴 에이지 음악으로 몰아 부치는 것은 분명히 잘못 된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주자 야니는 그 자신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인도 등지에서 힌두 사상에 심취했으며 그 가운데 가지게 되었던 사상을 음악에 담았다고 하였다.) 그럼 그의 음악은 뉴 에이지 사상을 담은 뉴 에이지 음악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조지 윈스턴의 여러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조지 윈스턴은 자신의 음악이 뉴 에이지 사상을 담고 있다는 그런 부분에 대해 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만약 뉴 에이지 풍의 음악은 사용해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의 2악장은 모두 들어서는 안 될 음악일지도 모른다. 2악장은 대게 느리고 명상적이기 때문이다. 헨델의 '라르고'나 비발디의 '사계'는 뉴 에이지 음악이 아니다. '사계'의 작곡자 비발디는 천주교 신부이다.이것들은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 될 수 있다. 뉴 에이저가 자신의 목적으로 그런 음악들을 사용할 경우는 뉴 에이지의 음악이 되는 것이지만, 서양의 장송곡이 우리 찬송가에는 은혜로운 찬송으로 실려 있기도 하고, 교회 음악 중 코랄이 초기 루터교회에서 세속노래 또는 민속노래의 선율에 종교적인 내용의 가사를 붙여 사용했던 것처럼) 사용자의 활용 목적에 따라 그 음악의 정서도 바뀔 수 있다.뉴 에이지의 음악은 이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만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 음악을 듣고 있지는 않는다.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음악은 문화이다. 그리고 문화는 끊임없이 변한다. 언젠가는 뉴 에이지 음악이 주류가 될 수 있다. 그 때, 교회가 그 문화적 흐름을 거부한다면 교회는 사회적 영향력과 복음 전파력에 타격을 입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