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에 대하여...19c 조선은 지배체제의 부패로 인한 민심의 파탄, 그리고 서구 열강의 침입과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혼란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상이 발생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해 온 性理學을 기반으로 한 위정척사사상, 조선후기 實學思想을 계승·발전시킨 개화사상, 그 밖에 활빈당의 유토피아 사상, 나아가서 천주교 사상 등이 그런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위정척사파는 帝國主義 열강을 불의의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고 저항적인 태도를 견지하였으나, 이와는 달리 개화파는 제국주의 열강을 선진문명국으로 인정하고 通商開國을 통하여 국부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듯, 이러한 여러 사상들이 조선후기 국내외적인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각각 달랐다. 이 중에서도 우리의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개화사상의 기원과 그 내용을 알아봄으로써 역사 발전에 끼친 영향과 한계성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1. 開化思想의 기원위정척사사상이 道學思想에 입각한 것이라면, 개화사상은 實學思想에 기반을 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내외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개화파는 궁극적으로 서구 시민사회의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달성함으로써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또한 대외적인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도 위정척사파와는 달랐다. 서구 열강을 침략자가 아닌 선진국으로 인정하고 발달된 문화와 기술을 수용하려 하였다.이러한 개화파의 생각은 단순히 外來的인 것은 아니다. 이미 조선 후기 實學者들에 의해 민권사상 등 自由平等論이 싹텄고, 商工業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 그리고 通商開國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개화파들이 서구적인 이념과 제도를 수용하고자 하였을 때, 實學思想이 바로 그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사상적인 연관성은 실학사상의 기본정신이 그대로 개화파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우선 민족주의적 성격을 들 수 있다. 실학파의 경우 위정척사파와는 달리 우리 민족에 대한 자각이 구체화되었으며, 이것이 개화파에 의해 계승된다. 이들은 韓民族의 정체성을 中華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 그 자체에서 찾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우리 문화·우리 언어 등을 강조하게 된다. 또한 우리 민족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보다는 오히려 후진성에 대한 자각이 강하였는데, 이것은 선진적 외국문물 수용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단지 北學派는 그 모델을 淸에 국한시킨 것에 비해 개화파는 淸은 물론이고 서구 열강, 일본 등으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각을 들 수 있다. 위정척사파는 개인의 권리를 인정함에 있어서도 전체적 질서를 전제로 하였으나, 개화파는 전체적 질서를 떠나 개인의 권리 그 자체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實事求是의 경험적 방법론 또한 실학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성리학은 원리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을 중시한다면 실학파들은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방법론을 강조한다. 이러한 것은 개화파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다. 그 밖에 개화사상과 실학과의 연관성은 理念的 開放性, 利用厚生의 강조, 通商開國論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2. 개화사상의 주요 내용1個體重視의 논리개체중시의 논리란 보편적 전체보다는 특수한 개체를 중시하는 것을 말한다. 위정척사파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보다는 범인류를 지향하고 나보다는 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였으나 이와는 반대로 개화파는 사고의 초점이 개체에 있었다. 위정척사파는 항상 전체가 하나의 보편적 질서에 의해 통일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질서의 중심을 宗, 그 宗에 입각하는 것을 正統이라 하였다. 그러나 個體主義的 입장을 지닌 개화파에게는 모두가 宗이고 모두가 正統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相對主義와 多元主義로 연결된다. 따라서 전체에게 성립되는 보편적 진리라는 것은 없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달라질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 개화파에게 있어서 위계적 질서로서의 華와 夷도 존재할 수 없다. 기존의 華夷論的 세계관의 전제는 중국이 지리적으로 천하의 중심이므로 마땅히 천하의 宗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리에 있어서 모든 존재의 상대적 자기 중심성이 확인되었으므로 기존의 주장이 중요한 논거의 하나를 잃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개화파들은 무엇보다 민족의 自主獨立을 지향하였다. 그들은 기존의 韓·中간의 관계에서 벗어나 自主獨立하여야한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권리를 확고히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富國强兵이 필요하였고 外交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구의 신문물을 부지런히 수용하여 그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서구와 외교를 맺어 국가의 자주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 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을 주장하여 우리말·우리역사 등을 중시하였다.이렇듯 개화사상의 個體主義가 민족적으로는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였다. 개화파는 인간의 권리란 천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으로 그 권리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立法君主制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개화파의 個體主義란 국가와 개인의 권리를 확립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2功利主義와 狀況의 논리功利主義는 공리를 최고의 목적으로 하여 그에 따라 실천적 방향을 정하며, 그에 입각해 행위의 善惡을 판단한다. 위정척사파도 공리를 무조건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功利보다 義理를 우선시하였고 그들에게 功利란 義理의 부산물이었다. 즉 그들은 의리를 추구하면 자연히 공리가 따라오지만, 공리만을 추구하면 의리가 소멸되고 공리 또한 작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화파는 이러한 주장을 실용성이 없다고 인식하였다. 그들은 나라와 백성에 이익이 된다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익을 위해서는 大義名分보다는 시세나 상황에 따라 臨機應變하는 狀況論理를 주장하였다. 개화파들은 通商開國을 주장하고, 산업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구제도를 개혁하고 외국의 학술과 종교를 수용하자고 한 것의 저변에는 모두 富國强兵이라는 공리적 목적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개화파의 공리주의의 특성을 요약하면 첫째, 우선 富國强兵을 지향한다. 개화파에 있어서는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선이 되고 부국강병에 도움되지 않는 것은 악이 된다. 둘째, 개화파의 공리주의는 개인의 利己心에 입각한다. 공리주의는 모든 행위의 실천적 동기를 개인의 이기심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긍정한다. 이들은 개인의 이기적 경쟁심을 조장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복지가 증진되고 부국강병도 달성될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이상과 같은 특성을 지닌 개화파의 공리주의는 자연히 權變論과 연결된다. 위정척사파는 權道를 말함에 있어서 權道는 聖人이 아니면 不可하다 거나, 常經을 지키는 사람은 잃는 것이 적지만 權變을 쓰는 사람은 잃는 것이 많다 고 하여 行權의 여지를 매우 제한하였다. 그러나 개화파의 경우에는 大事經營에 權道를 쓰는 것이 흉할 것이 없다 고 하여 行權을 매우 긍정하였다. 즉 개화파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갑신정변이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모두 忠君愛國이라는 목적에서 갑신정변을 거사한 것이며, 외국의 힘을 끌어들인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으니,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 다고 항변하였다. 이러한 개화파의 변통론은 狀況論理로 귀결된다. 어떠한 원칙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상황논리는 구체적인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상황논리는 機會主義나 形勢論으로 타락할 가능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개화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親日派로 전락한 것은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고 상황에 따른 민첩한 변화를 강조한 상황논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왕충*왕충(王充)은 자(字)가 중임(仲任)이며, 한나라 광무제 건무(建武) 3년(서기 27년)에 태어나서 대략 한나라 화제(和帝) 영원(永元) 9년(서기 97년)에 죽었다. 지금의 절강성 상우 사람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가문의 누에치고 장사하는 일로 업을 삼는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소지주 계층에 속하였다. 왕충은 어렸을 때부터 근면하고 배움을 좋아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학자가 되었다. 왕충은 한 대 최대의 유물론 철학자이자, 신권에 반대한 무신론 전사 가운데 한사람이다. 하지만 역사적·계급적 한계로 그는 생사요수(生死夭壽)와 같은 자연 현상이라든지 빈부귀천 또는 길흉화복과 같은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과학적 해석을 내리지 않고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하여 중국 철학사에서 꽤나 체계적이고 전면적인 운명론을 전개하였다.*시대적 배경*왕충이 처했던 시대는 천인감응 및 도참·위서 등의 미신이 성행했다. 일찍이 한무제 때에 동중서가 중앙전제집권의 봉건제를 공고히 하였고, 이러한 취지로 백성을 굽혀 임금을 펴고 임금을 굽혀 하늘의 뜻을 편다 는 천인감응학설을 창립하였다. 서한 말년에 이르러 이러한 학설은 변천하여 일시적인 참위의 학문으로 범람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한이 개국된 이후 온 천하에 도참을 선포하였고, 장제(章帝) 건초 4년(서기 79년)에 백호관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천인감응 및 참위 의 미신은 황제가 제정한 지도사상과 국가법전으로 변화·발전하게 되었다.*왕충의 사상*1.천인감응론을 반대하는 자연관과 무신론.-왕충의 유물론적 자연관은 기일원론이며, 그가 제시한 원기는 천지만물의 시원적 물질기초이다. 기의 속성은 자연무위라 하여 자연계는 그 자신의 규율에 따라 운동 변화하며 사람의 의지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자철학의 자연무위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 천지가 목적을 가지고 인류를 만들어 낸다 는 유가적 입장을 비판.유가에서는 천지가 의도적으로 사람을 낳았다고 하나 이 말은 허망하다. 천지가 기를 합하여 어쩌다가 사람이 자연히 생겨난 것이다. 마치 부부가 기를 합하여 자식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물세]-천인감응론 부정.왕충은 사람을 자연본질상 물고기나 이와 같은 사물로 보고, 아울러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류는 기에 의해 생겨나며 종류가 서로 만들어진다 는 것을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것은 하늘과 사람 사이의 신비한 감응관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다.-유물론적 자연관에 근거->유심주의 천인감응 목적론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군권신수 등 참위 사상에 대해 비판. 무신론 사상을 발전시킴. 예)유방의 신화 비판.-견고(譴告)설; 통치자가 몰락하거나 부패할 때 견고설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말세에 쇠미하면 상하가 서로 비방하고, 재이가 이에 다르면 견고의 말을 만들어 낸다-일반적 사회 미신(복서, 제사, 귀신에 대한 믿음) 비판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는 설을 부정. 사람의 정신은 신체에 의지하며, 정신은 신체를 떠나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고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였다.사람이 죽으면 혈맥이 다 없어지고 혈맥이 다 없어지면 정기가 소멸하고 정기가 소멸하면 형체가 썩고 형체가 썩으면 흙이 되니 무엇으로써 귀신이 되겠는가. [논사]-의의-유물론 사상으로 천도와 인사를 구별하고 이론적으로 참위사상의 그릇된 점을 지적해내어 군권신수사상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동중서 이래의 천인감응 목적론에 크게 타격을 가하였다.2.인식론-유물론적 자연관에 기초->유물론적 인식론 정립.유물론적으로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정기는 반드시 신체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작용하며 신체를 떠나서는 흩어져 없어져서 어떠한 정신활동도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은 정기가 신체에서 발생한 작용인데, 정신작용은 신체를 떠나지 못하지만 정기는 신체를 떠날 수 있다고 하여 유심론자들이 반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사람의 인식은 감각기관과 외계사물의 접촉에 의하여 이루어진다.인식이란 눈과 귀를 사용하여 실상을 정하는 것이며, 듣고 보는 바가 없으면 형용할 바도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는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였으며 이것을 토대로 유심주의 선험론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감각계험을 중시하였으나 묵적의 경험론을 비판하면서 외부적인 효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보거나 들은 것을 믿는 것은 일면적으로 감각경험만을 중시하고 이성인식을 소홀히 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실제 경험이 인식에 미치는 영향 중시.수를 놓는 일은 여자라면 능하지 못함이 없고, 비단을 짜는 일은 우둔한 부인네라도 솜씨가 없는 이가 없다. 날마다 보고 날마다 그것들을 하기 때문에 손에 익숙하다. [정재]-의의-참위사상이 성행하던 시기에 왕충의 인식론은 신학 목적론을 반대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는 감성인식과 이성인식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각경험을 중시하였다. 그는 이성사유·추리·예견작용을 소홀히 함으로써 그의 인식론 이론의 수준을 그다지 높이지 못하였고, 그의 무신론사상을 관철하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3.역사관과 인성론.1역사관-복고주의에 반대, 역사는 진보, 발전한다는 관점. 그러나 그는 나라의 흥망성쇠가 천시(天時)에 달렸다고 하여 흥망성쇠의 교체현상은 보았으나, 역사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은 이해하지 못하였다.->숙명론에 빠짐.번창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흥하면 반드시 망함이 있다. 흥함과 번창함은 덕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쇠함과 망함도 덕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번창하고 쇠하며 흥하고 망하는 것은 모두 천시이다. [치기]-역사의 치난(治難)과 백성의 경제 생활과의 관련성 고찰.->일반 백성의 생활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관점.-성인이나 현인의 언론을 금과옥조로 받드는데 반대.->[문공]과 [자맹위]편에서 공자와 맹자를 비판하면서 공자의 언론에서 서로 모순된 곳과 맹자의 인의에 대해 대담하게 지적.2인성론- 인성을 셋으로 구분.(중인 이상, 중인 이하, 중인)-지주계급의 인성론.-선천적으로 선악의 차이는 있지만 후천적 학습 환경이 인성에 미치는 영향 인정.-의의-왕충은 비록 진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역사 계급적 한계로 인해, 역사의 치난과 사회정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으며 백성이 처한 경제 상황의 계급적 지배관계 또한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회현상 속에 내재된 역사 발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연 규율로 역사 발전을 해석함으로써 명정론(命定論)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인성론에 있어서는 선천적 도덕론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적극적 의의를 지니지만 인성의 선악을 가르는 척도를 여전히 지주계급의 도덕규범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가 말한 인성도 여전히 지주계층의 인성이다.4.명정론(命定論)-자연계에 사람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법칙이 있음을 긍정하였으나 자연에 대한 사람의 주관적 능동성을 소홀히 다루었고 자연계의 규율에 대한 인식과 자연 규율을 운용하여 인류에 복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나치게 되었다.-자연규율과 사회규율을 구별하지 못하였다. 사회현상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였으나 그 원인을 자연계의 규율이라고 생각하였다.->운명 결정론-부귀빈천의 차이는 자연의 기가 원인->사람의 부귀빈천이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미리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해석은 신비주의적이며, 동시에 그가 지주계급의 입장에 서 있음을 반영한다.->자신의 천도 자연무위 사상에 어긋남.
식민지 시대의 미국미대륙에 대한 식민활동은 당시 강력한 절대왕권과 카톨릭 교회의 종교적 권위를 갖춘 스페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스페인은 15세기 말 경에 포르투갈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부를 통일하는데 성공했고, 콜롬버스의 활동으로 새로운 영토를 얻게 되어 국운이 날로 번창해갔다. 이러한 국민적 기풍아 신대륙에 대한 식민활동을 더욱 재촉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스페인의 식민활동은 단지 원주민에 대한 약탈이 주를 이루었다. 스페인은 멕시코, 페루 등을 각각 정복하여 막대한 부를 획득하였고, 많은 양의 은을 유럽으로 들여와 왕실재정을 구축하였다.또한 스페인의 식민활동은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인디언들의 부족간의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고, 그들과의 통혼을 장려하여 흔히 다른 지역에서 일어났던 원주민의 멸족을 방지하였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교화사업을 벌이고 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목축기술과 수공업기술을 전달하여 원주민의 생활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이렇듯 스페인의 식민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프랑스, 네덜란드인들의 탐험이나 해적활동, 부분적인 식민활동이 있어왔으나, 이러한 경향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되면서 서서히 세력판도가 바뀌어 간다.신대륙에 대한 영국의 본격적인 식민활동은 17세기에 시작되었다. 영국은 봉건제도의 붕괴, 절대주의 민족국가의 형성, 시민계층의 성립 등 근대국가로의 발전과정에서 항상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앞지르고 있었지만 미대륙에 관한 관심은 심히 미미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 격파를 계기로 하여 수많은 죄수들이 신대륙으로 보내졌고 기독교적 이상향의 건설과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는 무리들, 그리고 부의 축적을 목적하는 신흥 상공시민들의 행렬이 대서양을 메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초에는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일대에 13개의 영국식민지가 건설되었다.유럽 식민활동의 배경1600년대 초에 유럽의 대대적인 북아메리카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후 300여년에 걸쳐 행해질 유럽인의 이주는 겨우 수백 명의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로부터 수백만 명의 대이동으로 발전했다. 강하고 다양한 동기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들은 아메리카의 북부에 새로운 문명을 이룩했다.최초의 영국 이민은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 서인도제도 및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난 훨씬 후에야 대서양을 건너왔다. 대부분의 유럽이민들은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또 종교의 자유를 찾아, 또는 고국에서는 그들이 누릴 수 없는 기회와 모험을 찾아 고국을 떠났다. 1620년부터 1635년 사이에 경제적 어려움이 영국을 휩쓸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으며, 숙련된 기술자들조차도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농작물의 흉작으로 그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뿐만 아니라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직조공업이 생겨났는데, 직조기를 계속 돌리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양모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주들은 농토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기르기 위해 농민들을 쫓아냈다. 식민지의 확장은 이들 쫓겨난 농민들을 위한 출구를 마련해주었다.제임스타운(Jamestown)-버지니아(Virginia) 식민지영국의 항구적 식민활동은 1607년, 버지니아(Virginia)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정부는 1606년 식민지 개척을 위해 두 개의 회사에 특허장을 준다. 그 한 회사는 London. Co(후에 Virginia. Co로 개명)로서 뉴욕 이남 지역을 담당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Plymouth. Co(후에 Messachusettes Bay. Co로 개명)로 뉴욕 이북 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이 두 회사에 의해 영국의 식민지 탐험이 이루어지게 된다.버지니아 식민지는 런던의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국왕의 식민허가를 받았고, 계약노동자들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북아메리카에 자리잡게되는 최초의 영국 식민지의 하나는 제임스타운이었다. 제임스 1세가 런던회사에 부여한 특허를 토대로 해서 1607년 100여명의 이민이 체사피크만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스페인인들과의 충돌을 피해 제임스강 하구로부터 약 60킬로미터 상류에 정착촌의 터를 잡았다.도회지 사람들과 농업보다는 황금을 찾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는 모험가들의 집단인 이들은 그 기질이나 능력에 있어서 황무지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이들은 정착민 간의 싸움, 굶주림 그리고 인디언들의 습격, 그리고 상이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의 절반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임스타운 경제에 획기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다. 1612년에 존 롤프가 서인도제도로부터 들여온 연초의 씨앗을 아메리카 토착의 식물과 교배하기 시작하여 유럽인의 취향에 맞는 신품종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 연초의 첫 출하물은 1614년에 런던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10년 이내에 이 연초는 제임스타운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제임스타운은 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말미암은 사망률은 여전히 높았다. 1607년~1624년간에 약 1만 4000명이 버지니아로 이주했으나 1624년 당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는 겨우 1132명뿐이었다. 영국왕이 위촉한 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영국왕은 런던회사를 해체라고 그 해에 그것을 왕립회사로 만들었다. 이후 제임스타운은 버지니아(Virginia) 식민지로 확대된다.플리머스(Plymouth) 식민지-메사츄세츠(Massachusetts) 식민지16세기에 종교적 격변이 일어났을 때 청교도라고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영국의 기성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하려고 들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로만 카톨릭 교회의 의식과 구조를 보다 간단한 신앙과 예배의 형태로 대치하기를 요구했다. 그들의 개혁 아이디어는 국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함으로써 국민을 분열시키고, 국왕의 권위를 저해할 우려가 있었다.1607년 영국의 국교를 개혁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청교도의 한 급진적인 무리인 분리주의자들의 한 소수 집단이 네덜란드의 레이덴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은 것이다. 그러나 칼빈파에 속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들을 주로 저임금의 노동직에만 종사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차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1620년 일단의 레이덴 청교도들이 런던회사로부터 토지 소유 허가를 받아서, 101명의 사람들은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서 버지니아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폭풍을 만나 북쪽으로 떠밀려, 목적지와는 다른 뉴잉글랜드의 케이프코드에 상륙했다. 어느 정부의 관할 구역안에도 들지 않는 곳에 왔다고 믿은 그들은 그들이 지켜야 할 정식 합의서인 정당하고 동등한 법 을 그들이 선정한 지도자들로 하여금 기초케 했다. 이것이 메이플라워 맹약 이다. 이 서약은 극히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아메리카 최초의 자치헌법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대륙에서의 생활은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비참하기만 하였지만 플리머스 식민지는 필그림(Pilgrim)들에 의해서 점차 건설되어 갔다.이러한 플리머스 식민지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필그림들에 의해 건설된 만큼 청교도적인 생활을 강조하였다. 1630년 여름에 약 1000명의 청교도들이 다시 신대륙으로 이주하는데 이들은 Boston 과 Salem에 정착하여 1691년에 이 세 지역을 합해 메사츄세츠(Massachussetts)식민지라 하고 앞으로 미국 식민지의 발전은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발전한다.'메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지방 전체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윈드롭이 이끈 이들 청교도들이 특허장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식민지를 다스릴 권한은 영국 아닌 매사추세츠에 있게 되었다.특허장의 규정에 따라 청교도 교회의 소속이어야 하는 "자유인"으로 구성된 '제지방집회'(General Court)에게 통치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해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청교도들이 종교는 물론 지배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이 보장되었다. 지사를 선출하는 것도 '제지방집회'였다. 다음 한 세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존 윈드롭이 지사직을 맡았다.청교도의 엄격한 통치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지방집회'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과 그리고 그 '집회'와 영국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그는 메사추세츠만 식민지로부터 추방당하여, 1636년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에 사는 나라가나세트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매입했다. 그는 그곳에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메사추세츠를 떠난 사람은 윌리엄스와 같은 세칭 '이단자'들 만은 아니었다. 다른 청교도들도 더 좋은 땅과 기회를 찾아 이윽고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코네티커트강 유역의 땅이 비옥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토질이 박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30연대초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이 평평하고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인디언들의 습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들은 흔히 교회의 신도가 아니더라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으며, 그리하여 선거권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되게 되었다.이 무렵 차츰 많은 이민들이 신세계가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땅과 자유를 찾아 이주해옴에 따라 뉴햄프샤와 메인의 연안에는 다른 정착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각 식민지의 특징미국의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각 식민지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미국을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보았을 때, 북부 식민지(New England)로써는 플리머스 식민지를 들 수 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후에 메사츄세츠 식민지로 합병되는데, 이 식민지는 미국 식민지 중 가장 종교적 성향이 강하였으며, 식민지 생활을 살펴볼 때, 철저한 정교일치화를 추구한 경향이 있다. 또한 정식 교인(성도라고 불리움)만이 참정권이 있었으며 이러한 정식교인들은 소명의식이 투철하였다. 이 소명의식은 City upon a Hill"로서 발현되었다.
-왜 동양철학인가?-왜 동양 철학인가? 라는 질문은 이 시대를 설명할 수 있다. 라고 묻는 것은 이 시대에서 동양 철학의 필요성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지금까지 동양철학의 연구가 소홀해왔음을 의미한다. 근, 현대를 겪으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이념과 사상, 그리고 철학에 흡수되기를 강요받아왔고, 더욱이 아시아권 국가들은 이러한 서구적 산업화와 근대화에 충실하게 따라왔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서구의 산업화와 근대화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점들이 하나씩 표출되면서 지상최대의 도구로 생각되어왔던 서양 철학과 과학 등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대신에 새롭게 급부상하는 것이 바로 동양철학인 것이다. 서양의 인간경시와 자연에 대한 무시, 그리고 황금만능주의 등의 문제를 동양철학으로 해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 곳곳에서 동양철학의 필요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서구화에 물들어 버린 지금, 조심스럽게 동양철학의 중요성을 외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 철학의 개념이나 효용성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이 책을 통해 그러한 것을 쉽고 간결하게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물론 방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양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핵심만이라도 파악함으로써 좀더 동양철학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 중 가장 이성적, 감성적으로 와 닿았던 부분이며, 현재 나의 고민에 가장 잘 부합하고 있는 불교와 장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1. 불교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이 책의 저자는 이 말을 통해 불교를 보았다고 했다. 이 말로서 불교를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런 소망도 없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삶. 정녕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사람으로선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교적 교리로서 이것이 채택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갈망하고 염원하는 것일까? 이러한 실현의 어려움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기도하고 수양하고, 또한 그 기도와 수양의 도구로서 종교가, 특히 불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또 불교는 진리란 없다. 특히 영원불변의 진리란 것은 없다. 혹 그런 것이 있다 해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전할 수도 없다. 라고 말한다. 저자가 그랬듯 이러한 말은 허무주의와 직접 연관된다. 그 옛날 서양의 소피스트들이 늘어놓는 궤변과도 같이 이 말 자체가 진리인 것도 같으며, 그와는 반대의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저자는 불교는 허무주의와 불교는 가장 멀리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 말은 어떠한 법칙과 도구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것은 고정적인 진리를 부정한다는 의미이다. 어떠한 논리도 진리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진리는 다른 어떤 이의 눈으로 보면 가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허무주의가 아닌 상대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말인 것이다.그리고 불교는 사성제(四聖諦) 를 통해 모든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일체개고(一切改苦) ,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이다 를 통해 인간이 존재하고 그 부수적인 실체가 존재하는 한 고통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고통이 현재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수도 있으나, 아예 그 고통의 존재를 살필 수 없을 만큼 습관화되어 있을 수도 있다. 또, 자신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즉,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윤회(輪廻)이고, 인연법(因緣法)에 의하면 타인이 불행한데 나만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의 개혁을 위해 붓다는 설법을 결심했고, 때문에 불교가 생겨났다.불교에서는 선(禪)의 개념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선 은 언어와 논리를 통한 적극적 교설의 방식을 타기하며, 이는 극단적으로 진리를 전하는 말씀까지도 부정한다. 불교의 진리는 가르침이나 언설로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이 위한 대답이 아니다. 이것은 전혀 질문과는 상관없는 대답이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을 발전시켜 진리를 획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선 은 이러한 진리에 직접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선 이란 질문자가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게 만드는 도구인 것이다.또한 불교는 삼계(三界)의 비참과 중생의 소외는 외부적 조건이나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근본 무명(無明)으로부터 온다. 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의 의지가 맹목적이기 때문에 인생은 고통과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로지 무상(無償)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의지는 욕망을 낳고, 이러한 욕망이 인식을 낳는다고 한다. 불교는 인간이 구성하는 인식이 모두 예외없이 실제로부터의 단절이고, 왜곡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그 구분에서 차별이 오고, 이러한 차별에서 감정적으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된다. 의 인용으로 이 개념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만일 세계의 모습을 이같은 오염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때 구원이 다가올 것이다.불교에서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나(我)가 없어져야 한다고 전한다. 우리 마음속에 질투와 시기, 선망과 기대, 욕망과 좌절의 흔적이 없을 때 마음속에 아무런 갈등과 혼란이 없이 안한(安閑)할 때 그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보람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이 없었다면, 인간의 발전도 그 발전으로 인한 행복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은 인간의 사회적 성향을 무시한 것이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다. 가족도 있으며, 친구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만일 혼자서 살아간다면 앞의 논리로서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하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이러한 불교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싶어지지만, 내가 인간인 이상 절대 나를 잃어서 얻는 행복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하면 불교는 전혀 어렵고 복잡한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통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철학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으며,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나도, 그리고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2. 장자장자(莊子)는 우화나 은유를 통해 자신의 사고방식과 이론을 설명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장자의 글에는 주로 세 가지 문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중언(重言), 이야기솜씨, 우화이다. 중언은 이름 그대로 근엄하고 무거운 글 즉, 중심되는 철학적 교의를 직설적으로 제시한 글이다. 또한 그의 탁월한 이야기솜씨로서 자신의 이론을 대중들에게 이해하기 편하고 쉽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직설적 표현, 중언으로 표현하기 힘든 이론은 우화라는 방법을 통해 전달하였다. 즉, 중언을 교의의 골격으로 하고, 이를 부연 해설하는 살인 치언( 言)을 입힌 것이다. 우언은 이렇게 이루어진 교설에 숨을 불어넣고 생기를 띠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깊이 있는 철학자이자, 뛰어난 산문작가로 기억된다.장자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그 고통을 해소해 주려 하지도 않았다. 장자는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띠고서 자신에 대한 적극적 무관심에서 오는 평정을 강조하였다. 그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를 불교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즉, 인간의 비극은 더 많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이러한 욕망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의 비본질적 소외이며, 이 소외를 극복하지 않는 한, 비극은 종식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장자는 무의식을 뿌리를 넘어서지 않는 한 해방이나 자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자는 불교와 더불어 나없음(喪我) 를 강조한다.이 책의 저자는 장자 매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다. 장자는 어차피 인간은 무(無)에서 왔기 때문에 죽음으로 또 다시 유(有)에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슬프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살아서는 죽음을 모르고, 죽어서도 또 죽음을 모른다. 죽음은 인간에겐 영원히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죽음은 공포스럽고, 슬프고 두려운 존재라고 믿는다. 하지만 에는 죽음에 대한 역겨움이나 공포가 거의 없다.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장자는 흔히 말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초월적 인격의 전제적 지배도 없고, 삶에 곤고한 영혼들을 다시금 심판하겠다는 으름장도 없다고 한다. 즉, 천당이나 지옥은 삶의 불확실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장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유쾌한 농담 한마디를 던질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다. 삶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말을 바꿔 생각하면 어떨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삶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인간은 원래 없었던 존재이다. 없었다가 새롭게 생겨난 것이기에 어떠한 고통이나 슬픔에 동요할 필요가 없다. 더 발전시키면 죽음까지도 두려운 존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의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가치가 없기에 지금 존재하는 나(我)는 모든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초월했기 때문일까?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인간은 항상 자연과 대립해왔으며, 자연을 이용하고 그 무한대의 도구를 이용하여 아직도 살고 있다. 물론 요즘 자주 내거는 슬로건 중에는 자연과의 동화를 강조하는 문구도 더러 있지만,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자연과의 동화를 원하는가? 한 명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 그것은 명목이다. 그러나 장자는 어떠한가? 장자.
목 차Ⅰ. 서론 21. 18세기 영국의 전반적 상황-안정의 시대 22. 18세기 영국의 Journalism의 탄생 23. Jonathan Swift와 풍자 문학 3Ⅱ. 본론 41. Swift 작품에 나타난 당시 영국의 정치사회적 상황 42. Swift 작품에 나타난 당시 영국의 종교 93. Swift 작품에 나타난 당시 영국의 학문적 상황 16Ⅲ. 결론 21※ 참고문헌 25Ⅰ. 서론1. 18세기 영국의 전반적 상황-안정의 시대영국의 18세기는 흔히 ‘안정의 시대’ 혹은 ‘평화의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1640년에서 1660년 사이의 혁명적 분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봉건주의가 붕괴되고 1688년 마침내 의회가 카톨릭을 신봉했던 James 2세를 몰아내고 프로테스탄트 신교도였던 William 3세를 옹립함으로써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에 권리장전이 선포되자 왕권이 제한되고 국왕보다 의회가 우위를 점유함으로써 실질적인 의회정치의 막을 열게 되었다. 이후 1700년대 초반 Anne여왕이 즉위해서 실로 평화의 시대는 제대로 막을 열게 되었다. 또한 신흥중산계급의 자유를 옹호한 휘그(Whig)당이 보수적 토리(Tory)당을 견제하면서 의회제도가 정착되고 중산계층의 사회적 신분이 상승되면서 중산층과 문학과의 관련성이 짙어진다.사회적으로는 18세기를 ‘산문과 이성의 시대’라 할 만큼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다. 중세적 전통은 사라지고 절제와 중용 그리고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은 중세적 전통을 종식시키며 삶의 전반적인 모습은 긍정적인 낙관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18세기 영국에서는 이미 산업화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로써 농업중심의 지주 중심의 경제체제는 후퇴하고 있었으며, 도시, 즉 런던을 중심으로 새로운 노동계층이 모여들고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안정적인 영국에서도 근대화를 위한 작은 규모의 갈등은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식민지에 대한 정책의 비일관성은 식민지국들의 반란을 야기하였으며, 불필요한 잦은 정쟁은 일반 시민들에게 웃음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또한 자 measure about the fourteenth part of an inch). The animosities between these two parties run so high, that they will neither eat, nor drink, nor talk with each other. We compute the Tramecksan, or high heels, to exceed us in number; but the power is wholly on our side. We apprehend his imperial highness, the heir to the crown, to have some tendency towards the high heels; at least we can plainly discover that one of his heels is higher than the other, which gives him a hobble in his gait. Jonathan Swift, Gulliver's Travels Part 1, The Project Gutenberg E-Book, p.33작품에 나타난 두 당은 각각 High heel과 Low heel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쉽게 구분이 가능하며, 이는 즉 토리당과 휘그당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George1세의 휘그에 대한 편애를 풍자한 것이다.또한 Part 3에도 정치풍자가 계속 되는데, 이는 Tribnia 왕국의 음모 조작에 관한 암호에 관한 설명이다.These papers are delivered to a set of artists, very dexterous in finding out the mysterious meanings of words, syllables, and letters: for instance, they can discover a close stool, to signify a privy council; a flock of geese, a senate; a lamery day dying, and rotting, by cold and famine, and filth, and vermin, as fast as can be reasonably expected. Jonathan Swift, ibid, p. 262위의 인용 부분에 나타난 그대로 아일랜드 국민들은 추위와 기근, 오물 등으로 매일 죽어나갔으며, 썩어 갔다.이렇듯 여러 작품 속에서 당시 영국 정부의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정책과 아일랜드에 대한 경제 정책, 그리고 그로 인한 아일랜드의 참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당시 Walpole 정부에 대한 반감을 적지 않게 갖고 있었으며, 이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반대되는, 특히 종교적 입장, 휘그당에 대한 비난과 그 당에 동조하는 George 1세에 대한 원망으로 작품 속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말년 동안 머물던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정부의 무책임한 경제 정책을 풍자라는 기법을 통해 신랄하게 비꼬고 있으며, 또한 그 와중에 아일랜드의 가난과 불행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 영국 정부의 만행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즉, Swift의 일련의 작품 속에는 당시 휘그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정책의 일면과 또한 휘그당과 George 1세의 관계, 또한 이 집권당에 의해 이루어지던 아일랜드에 대한 정책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2. Swift 작품에 나타난 당시 영국의 종교- A Discourse Concerning the Mechanical Operation of the Spirit과 An Argument Against Abolishing Christianity in England를 중심으로영국의 종교개혁은 다른 유럽국과는 달리 왕의 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특이하게도 영국 국교회 이혼문제를 둘러싸고 로마 교황과 갈등을 빚었던 Henry 8세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 딸인 Elizabeth 1세 때 확립된 영국의 국교회. 로마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영국의 국왕을 교회 수장으로 삼으며 카톨릭과 다른 기본 교리 항목들과 의식, performed with more dexterity than by the saints? Jonathan Swift, ibid, p. 171또한 An Argument Against Abolishing Christianity in England에서는 기독교 철폐안을 두고 기독교를 폐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 주장하는 자유사상가들에게 그 반대급부의 손실과 다른 형태의 이익을 설명함으로써 반박하고 있다.17세기 중반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그 방법론에 힘입어 등장하기 시작한 이들 이신론 자유사상가들의 주장은 대체로 “기독교에 들어 있는 계시적, 신비적 내용을 거부하고 기독교의 신을 이성에 의해 입증 가능한 새로운 신으로 대체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종교의 모든 교리를 합리적인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논증 가능한 신조들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면서 계시적, 신비적인 정통 기독교에 대해 회의하고 성직자나 성서의 권위 대신 개인의 이성을 신앙의 지침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또한 당시 이신론자들이 국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구실로 삼았던 심사법 Test Act, 1673년 Charles 2세의 치하에서 정권을 잡았던 국교회 고교회파(영국 국교회 내에서 교회의 의식과 권위를 보다 중시하는 파)에 의해 제정된 심사법은 “중앙이나 지방 정부의 공직 자리나, 군대의 고위직을 얻으려는 자들은 영국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성찬식을 받아야 하며 영국 국왕의 교회 수장권을 인정하는 맹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즉, 자신이 국교를 신봉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법안의 의도는 로마 카톨릭교도들과 비국교도(개신교도)들을 공직에서 배제시켜 왕권과 국교회의 교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은 이를 철폐하기 위해 애를 쓰던 당시 휘그당 정권 내 비국교도들에 의해서도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1707년 비국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장악한 휘그당은 이 심사법을 폐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관용정책을 관철시키려 애를 썼으며 의도적으로 영국 신교의 활동과 그 활동으로 인한 국교회에 대한 위협, 그리고 휘그당에 속한 비국교도 정치인들에 의한 심사법의 위협 등을 작품 속에 제시함으로써, 특히 개신교 설교자들의 허풍과 위선적인 몸짓, 교리와 상관없는 열광을 꼬집음으로써 국교회의 수호에 힘쓴 것이다.3. Swift 작품에 나타난 당시 영국의 학문적 상황- The Battle of the Books를 중심으로Swift가 학문에 관련한 풍자 작품을 썼던 시기는 1696년에서 1699년으로 추정하는데, 이 시기는 Swift가 당시 휘그당의 저명한 외교학자였던 William Temple의 자택 무어 파크에서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고전학문 대 현대학문’ 우열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때였다. 이 논쟁은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지식 세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어 오고 있었다.이러한 학문적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고용인인 Temple은 「고전 및 현대학문에 관하여」란 논문을 통해 현대 학문과 예술 및 과학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자들에 반대하고, 역사의 순환이론을 주장하면서 어떠한 형태의 진보와 발전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수많은 현대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로부터 반발을 샀으며, 이로써 Temple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에 Swift는 현대학문 학자들의 반박에 다시 반박하는 논지를 펼쳤는데, 이 때 나온 작품이 A Tale of a Tub과 The Battle of the Books이다. 또한 그의 작품 Gulliver's Travels에서도 Swift의 학문적 견해와 현대 학문의 부질을 비판하고 있다.There was a most ingenious architect, who had contrived a new method for building houses, by beginning at the roof, and working downward to the foundation; which he justified to me, by the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