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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문교육]하나의 길을 向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
    하나의 길을 向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道’국어교육과 안형남(4학년)Ⅰ. 序言‘敎學相長’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明瞭하게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敎師와 學生, 나아가 모든 人間關係에서 우리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형성한다. 일찍이 孔子는 “세 사람이 길을 갈 때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사람을 가려서는 그를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는 자신 속의 그런 잘못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스승을 삼아 늘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에게 경험과 지혜를 배우고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의 순수한 열정과 도전정신에 자극 받는다. 스승과 제자 간의 지적 긴장은 서로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가르치 면서 확실히 알게 되고, 배우면서 새로운 지혜를 얻는다.)‘敎學相長’을 吟味하는 김영 교수의 말처럼 ‘서로의 발전’을 이루는 관계를 형성할 때 진정한 師弟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서로의 발전’을 이룬다함은 교사와 학생, 즉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의 指向點을 두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 指向點은 무엇인가? ?大學?을 보면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애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현대적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학생들의 잠재능력을 계발하고, 민중들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해결하고, 고도의 지적 ? 도덕적 수준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指向點을 向하는 교사와 학생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즉, ‘가르침과 배움의 道’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本稿에서 논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가르침과 배움의 의미를 옛 聖賢들의 지혜에서 찾아보고 이를 현대적 의미에서 되새겨 보는 것은 교육의 위기에 直面한 현 우리사회에 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Ⅱ.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지금의 우리는 많은 위기에 直面에 있다고 한다. 의 일생을 보냈다.) 오늘날에 있어 孔子의 말씀은 많은 이들에게 지혜를 주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볼 때, 孔子는 大敎育者가 아닐 수 없다. 대교육자 孔子의 말씀 속에서 그의 ‘가르침과 배움의 道’를 찾아보도록 하겠다.Ⅱ.1.1) 孔子의 ‘배움의 道’孔子는 배움을 말함에 있어 그 즐거움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한다.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論語 述而-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안 자가 아니라,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탐구한 사 람이다.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論語 衛靈公-내가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며 생각해보았지만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論語 公冶長-10가구쯤 되는 조그만 읍에도 반드시 나처럼 진실하고 믿음성 있는 자는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이처럼 배움에 있어서 그 자체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리를 즐거워하는 사람만 못하다”)에서 즐거움을 찾는 배움의 자세는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재 우리 교육의 현장에서 과연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孔子의 말씀처럼 배움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교육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고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아닐까 감히 단언해 본다.朝聞道, 夕死可矣. -論語 里仁-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論語 公冶長-자공이 묻기를, “공문자를 어찌하여 文이라고 시호하였습니까?”하자,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명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 다. 이러한 까닭으로 문이라 부른 것이다.”지 않으면 다시 더 가르쳐주지 않는다.여기서 중시되는 것은 助力者로서의 교사의 역할이다. 학생 스스로 분발하게 하고, 알기를 애태워하며, 세 귀퉁이를 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한 귀퉁이를 잡아주는 ‘助力者’, 그것이 바로 교사의 역할이며, 교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인 것이다.또한 孔子는 교사가 先入見을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論語 子罕-나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런 선입견이 없다. 어떤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묻되 진실한 태도로써 한다면, 나는 그 문제의 自初至終을 듣고 성심성의껏 다 말해준다.즉, 선입견이 없이 학생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것, 나아가 “열린 마음을 갖고 학생을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孔子가 말하는 교사의 자세, 곧 가르침의 자세인 것이다. 더욱이 孔子는 가르침에 있어 4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학문과 행동과 진실과 믿음”)이 그것이다. 학문은 곧 지식의 전달일 것이며, 그와 함께 교사의 행동 또한 가르침의 방법이 된다.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대하며, 학생 개개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孔子의 ‘가르침의 道’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論語 雍也-염구가 말하였다. “제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 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니, 지금 너는 스스로 안된다는 한 계를 긋고 있구나.”앞서 助力者로서의 교사의 역할을 말하였다. 그러나 학생 스스로 깨우치게 하고 분발하여 힘쓰도록 도움을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그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이끌어 주는, 그리하여 더욱 힘을 북돋아주는 역할 또한 교사가 갖추어야 할 자세임에 틀림없다.Ⅱ.2. 老子의 ‘배움의 道’파멜라 메츠는 老子의 ?道德經?을 ‘배움’을 주제자유롭게 해줘야 함을 말하고 있다. 현 우리나라의 교사는 과연 어떤 교사일까? 슬기로운 교사는 아닐지라도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사는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슬기로운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지 조금 더 老子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슬기로운 교사는모든 부분들을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본다.전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그는 끊임없이 자기를 낮춘다.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지는 않지만스스로 자신을 돌처럼 반드럽고 단단하게 만든다.교사가 학생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낮추어 학생을 섬기는 자세를 가질 때 슬기로운 교사가 될 수 있다. 학생을 섬기는 교사만이 학생들을 ‘희망과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교사가 될 때 “학생들 위에 있지만 그들은 무겁다고 느끼지 않는다. 학생들을 앞에서 이끌지만 학생들은 조종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교사를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사의 권위가 무너졌다고들 한탄한다. 그것은 곧 슬기로운 교사가 드물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Ⅱ.3. 옛 聖賢의 지혜 ― ‘가르침과 배움’孔子와 老子 이외의 다른 성현들의 지혜에서도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慧眼을 얻어낼 수 있다. 여기서는 孔子와 老子를 제외한 聖賢들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명언들을 간추려 보도록 하겠다. 이 또한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지혜일 것임에 틀림없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大學-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명쾌하게 따져보고 돈독히 실천하다.)學莫貴於自得, 得非外也, 故曰自得. -程子-학문은 自得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므로 자득이라고 한다.)學問是自家合做底, 不知學問, 則是欠闕了自家底. -朱子-공부는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하나니,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스스로를 부족하게 만든다.)無往而非道, 無往而非工夫. -王陽明全集-어디 간들 도 아닌 것이 없으며, 어디 간들 공부 아닌 것이 없다.)學必以自得爲貴. -南冥集-학문이란 ?列子?의 우언 ?관윤자의 가르침?을 통해 이끌어 내고 있다.이러한 ‘自得’을 강조하는 우언으로는 姜希孟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도둑질이 직업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솜씨를 모두 가르쳐 주었다. 아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자기가 아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도둑질을 나가면 언제나 반드 시 아들이 먼저 들어가고 나중에 나오며, 가벼운 것은 아비에게 맡기고 무거운 것을 들고 나왔 다. 게다가 먼 곳에서 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어둠 속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 도둑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하루는 아비에게 자랑삼아서 말했다.“제가 아버지의 솜씨보다 조금도 손색이 없고, 억센 힘은 오히려 나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무 엇은 못하겠습니까?”“아직 멀었다. 지혜란 배워서 이르는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스스로 터득함이 있어야 하 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도둑이란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이 제일입니다. 저는 아버지보다 소득이 항상 배나 되고 나이 도 아직 젊으니 아버지 나이가 되면 틀림없이 특별한 재주를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그렇지 않다. 나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하기만 해도 겹겹의 성에 들어갈 수 있고 깊이 감춘 물건을 찾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화가 따른다.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고 임기응변하여 거침이 없는 그런 수준은 어느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다음 날 밤 아비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어느 부잣집에 들어갔다. 아들을 보물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아들이 보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때쯤 밖에서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자물통을 흔들어 주인이 듣게 하였다. 주인이 달려와 쫓아가다가 돌아보니, 창고의 자물 쇠는 잠긴 채 그대로였다. 주인은 방으로 되돌아갔고, 아들 도둑은 창고 속에 갇힌 채 빠져나 올 길이 없었다. 빠져나갈 방도를 궁리하던 아들 도둑은 마침내 손톱으로 박박 쥐가 문짝 긁는 소리를
    인문/어학| 2005.11.24| 9페이지| 1,000원| 조회(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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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 '희생'의 시적 형상화
    ‘犧牲’의 詩的 形象化Ⅰ. 緖論우리의 詩史에서 ‘희생’은 시적 주제로서 많은 시들을 통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나, 한용운 시인의 여러 시들에서 ‘희생’을 노래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희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나아가 전 우주적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자식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 자연의 그것을 통해 인간들은 풍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의 많은 일들은 그 ‘희생’을 전제로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현실 속에 ‘희생’이 있는 이상, 시적 주제로서 ‘희생’을 노래하는 시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희생’은 각각의 시들에서 다양한 성격의 ‘희생’으로 주제화된다. ‘희생’이 필요한 이유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을 통한 결과와 모습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희생’이 주제화된 두 편의 시를 통해 그 ‘희생’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르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각의 시를 분석적으로 독해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Ⅱ. 本論“詩者持也, 持人情性”(劉?,『文心雕龍』)이라는 말이 있다. “시에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시에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 여기서 살펴볼 두 편의 시에는 ‘희생’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복 시인의 「금빛 거미 앞에서」와 김혜순 시인의 「추수(秋收)」두 편의 작품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대비해 보겠다.1. ‘强要된 犧牲과 아픔’으로의 形象化 ― 이성복의 「금빛 거미 앞에서」오늘은 노는 날이에요, 어머니오랫동안 저는 잠자지 못했어요오랫동안 먹지 못했어요 울지 못했어요어머니, 저희는 금빛 거미가 쳐놓은그물에 갇힌 지 오래 됐어요무서워요, 어머니금빛 거미가 저희를 향해 다가와요어머니, 무서워요금빛 거미가 저희를 먹고흰 실을 뽑을 거예요(이성복, 「금빛 거미 앞에서」,『남해 금산』, 1986)제목이 “금빛 거미 앞에서”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빛 거미”이다. ‘거미’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이다. 독거미의 공포감이나 그 잔인한 살인행위―먹이를 실로 감아 조이고 말려 죽여 먹는 그런 잔인한 행위―를 기억하기에 우리에게 ‘거미’는 매우 부정적 이미지로 고정되었다. “금빛 거미”는 그러한 ‘거미’의 이미지 덕분에 다소 아이러니하다. ‘금빛’이라는 색체 이미지는 정지용의「향수」에서 보이는 “금빛 게으른 울음”에서 보이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모순형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시적화자는 여성이다. ‘이에요’, ‘했어요’ 등의 어투에서 우리는 시적화자가 여성임을, 나아가 어린 나이의 소녀나 처녀 정도일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시적화자의 상황은 매우 처절하다. “잠자지 못했”고 “먹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울지’도 못 했다. 게다가 시적화자는 “갇힌 지 오래 됐”으며 무서움에 떨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다. “노는 날”에는 그저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음으로 하소연할 뿐이다.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금빛 거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금빛 거미”는 모순 형용이며 반어적 표현이다. ‘금빛’으로 치장된 ‘거미’를 생각해보면 아픔답다기보다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 이것은 ‘거미’의 이미지를 한층 공포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그렇다면 “금빛 거미”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의 두 행에서 이 “금빛 거미”가 시적화자를 먹이로 하여 “흰 실을 뽑을”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미’에게 이 ‘실’은 삶의 필수 수단이다. 집을 짓고 먹이를 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의 희생을 강요하여 취하는 것이다. 시적화자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시적화자가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를 착취하고 빨아먹는 악덕 자본가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이상을 정리해 보면 시적화자는 그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희생의 대가는 과연 무엇일지 알 수 없다. 시적화자는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분노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울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시적화자는 그저 마음속으로 울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2. ‘自然의 獻身的 犧牲’으로의 形象化 ― 김혜순의 「추수(秋收)」다 이루었도다 하면서드디어 드러눕는다 너른 들판다 싸웠도다 하면서드디어 목을 내어 주는 가을 열매절대로지지 않으리 하면서폭양(暴陽)을 안고 뒹글던 것절대로 울지 않으리 하면서칠흑(漆黑) 같은 폭풍우 밤에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소리 지르던 것어느 것 하나 내색하지 않고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지프라기 마른 가지 불쏘시게 잿더미로 스러져내려앉은 천만 년 묵은 어머니 품(김혜순, 「추수(秋收)」, 1994)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에게 가을은 ‘추수’의 풍경으로 많이 기억된다. 풍요와 축복의 계절인 가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질문의 해답을 제공한다.『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한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로서 그 구원의 사역을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희생의 결과이며, 그 희생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인 것이다.이 시에서는 예수의 말을 인유하며 시작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의 주체가 여기서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결실과 풍요를 주는 땅이요, 자연인 것이다. 그 자연은 예수와 같은 헌신적인 희생을 우리에게 바쳤기에 예수처럼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처럼 생을 마감한다. 우리에게 “목을 내어 주”고 “폭양(暴陽)을 안고 뒹굴”었으며,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를 감내 했던 자연, 곧 이 땅은 이제 “드러눕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이 땅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드러눕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5.06.18| 4페이지| 1,000원| 조회(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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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시의 이해]시와 서정적 슬픔의 연원 평가A좋아요
    詩와 抒情的 슬픔의 淵源Ⅰ. 序論시 속에는 시인의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다. 그것은 시적현실 속에서 시적화자의 감정과 정서로 드러나며, 우리는 그것을 찾아갈 때 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시에 나타나는 정서를 시를 읽는 독자가 함께 느끼고 동감할 때, 시를 읽는 참된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대부분의 시에서 우리는 그 시의 실체가 시적화자의 서정적 슬픔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시들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시를 말한다면 슬픔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마음이 울적할 적이면, 책장의 한 귀퉁이 꽂힌 한 권의 시집을 뒤적이며 시 속의 슬픔에 무언으로 동참하면서 마음을 달래는 것이 아니겠는가?시 속에 나타나는 시적화자의 슬픔을 서정적 슬픔이라 할 때, 이 서정적 슬픔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랑의 아픔과 이별의 슬픔, 그리고 그리움이 주된 양상이지만, 또 다른 모습의 슬픔은 끊임없이 시로 탄생되어지고, 또한 그 슬픔을 노래하게 된다. 슬픔을 노래한다는 것은 함께 동감하고 울어주는 것이라 함이 옳겠다.시를 읽으며 서정적 슬픔에 동감한다는 것은 시 이해의 가장 근본 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그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이 슬픔의 연원을 파악할 때, 진정으로 서정적 슬픔에 동감하게 되며 시의 분명한 이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는 세 편의 시를 통해 서정적 슬픔의 연원을 찾아가는 방법을 살펴보고자 한다. 슬픔의 연원을 찾아가는 방법은 우선 시의 분석적 독해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한 연후에 다양한 시적 표현과 정서를 파악하여 그 슬픔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홍종린의 「가을」, 노천명의 「고향」, 유정의 「램프의 시 5―내 갱생의 등불인 아내 추임(秋任)에게」를 살펴보면서 이제 그 시속에 담겨있는 슬픔의 정체와 그 연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각각의 시편들이 담아내는 슬픔을 찾는 것은 시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 슬픔의 연원을 찾아가보자. 우리는 어느 한 호적한 시골마을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산들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날, 중년의, 혹은 청년을 지난 시적 화자가 가을을 그리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가을은 초목이 물들고 곡식이 익어가는 풍요와 만족의 계절이기에 ‘天高馬肥의 계절’이라 일컬어왔다. 시에 그려진 가을 또한 ‘꽈리 익고’, ‘파꽃이 피는’ 익숙한 가을이다. 헌데 시적화자는 ‘쓸쓸한 가을’이라고 직설적으로 고백한다. 그 쓸쓸함의 원인은 아무래도 ‘너’에게서 연유하는 듯 하다.‘너와 심’었던 ‘꽈리 익’는 가을이 왔어도, ‘너와 가꾼 파포기에 파꽃이 피는’ 가을이 왔어도, 시적 화자에게는 ‘쓸쓸한 가을이란다’. 아무래도 ‘너’의 부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리는 2행의 구절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3행의 구절을 읊어본다면 우린 자연스러움을 느끼며 쉽사리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너와 심은 꽈리남게 꽈리 익고”의 대목에서 고개가 기울어진다. ‘파포기에 파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꽈리남게 꽈리’가 어찌 익는다는 말인가?문제는 ‘꽈리남게’라는 시어인데, 단순히 머리를 굴려본다면 ‘꽈리 나무에’라는 말로 풀이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설득력 없는 풀이이다. 그렇다면 ‘꽈리가 남게’라고 풀어보자. ‘꽈리가 남게 꽈리가 익’는다. ‘꽈리’라는 말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3개의 다른 풀이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 중 둘을 선택함이 바람직한데, 하나는 ‘가짓과의 다년초’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열매의 속을 우벼 낸 다음, 입 안에 넣어 소리가 나게 한 것’을 뜻한다.문제의 해결이 가까워 진 듯 하다. 후자의 것을 앞의 ‘꽈리’에 넣어 해석해 본다면, “입에 넘어 장난삼아 불 꽈리가 남게 꽈리 열매가 넉넉히 익었다.” 정도의 풀이가 이 시행의 바람직한 해석일 것이다. 이 시행의 해석의 문제가 해결된 지금, 우리는 시적 화자의 ‘쓸쓸한 가을’의 원인의 실마리를 잡았다. 이 ‘꽈리’란 것이 ‘너’와의 어린 시절 즐거웠던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어둡도록 기계 밑에서 / 실 뽑아서 살아가”고 있는 궁핍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살림’을 살고 있다. 어쩌면 ‘너’는 딸린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동생들을 키워야만 하는 처지, 궁핍하고 고달픈 ‘네 살림’이 시적화자의 ‘너’에 대한 그리움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그런 ‘네 살림’에, 함께 ‘꽈리’를 불며 노닐던 추억도, 함께 가꾸었던 ‘파포기에 파꽃이 피는’ 가을의 풍경도, 지난날 ‘호박잎에 햇수수떡 싸다’ 주던 정감도 느낄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는 ‘가을’이 있을 수 없다. 시적화자의 쓸쓸함과 외로움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을’의 추억과 정감조차 생각할 수 없는 ‘네 살림’과 처지에서 오는 것이다.마지막 행에서 시적화자는 괴로이 읊조린다. “시골은 지금 가을이”라고. ‘너’는 지금 ‘가을’을 맞지 못하는 ‘시골’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한다. 지금은 함께 할 수 없는 ‘가을’이 시적화자의 심정을 괴롭히고, 생활의 궁핍하고 곤궁한 ‘너’의 처지가 더욱 시적화자를 가슴 아프게 한다.이 시는 대체로 평이한 시어를 사용하여 쉽게 읽혀 진다. 대략 3음보의 안정감을 주는 리듬을 타기도 한다. 평이한 시어와 안정적 음보는 시적화자의 정서에 쉽게 동조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가장 큰 특징은 4행, 8행, 12행에서 반복되는 구조이다. “시골은 ~ 가을이란다”의 구절은 ‘너’에게 쓰는 편지 같기도 하고, ‘너’를 생각하며 늘어놓는 독백 같기도 하다. 이런 구조는 시적화자의 슬픔을 더욱 애상적이고 애절하게 나타낸다. ‘너’는 함께한 추억을 떠올릴 삶의 여유조차 없는 처지이지만, 시적화자는 전해질 수 없는 ‘가을’의 소식을 애써 전하고 있다. “시골은 지금이 가을이란다”는 시적화자의 가슴 속 깊은 안타까움의 탄식이라 할 수 있다.이 시 속에서 시적화자와 ‘너’는 왜 함께 할 수 없는 처지여야만 하는지, 무엇 때문에 ‘너’는 그런 곤궁한 ‘살림’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메밀 꽃이 하―얗게 피는 곳나뭇짐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서울 구경이 원이더니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 지키겠네꿈이면 보는 낯익은 동리욱어진 덤불에서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였다우리 현대시사에서 드물게 여성시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노천명 시인은 흔히 고독, 향수,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 운다. 이 시는 노천명 시인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이 시는 원래 「망향」이라는 제목으로 1940년 《인문평론》 6월호에 발표한 시이다. 1945년에 시집 『창변』을 낼 때에 조금 개작을 하였다. 그래서 판본마다 구절구절들이 조금 다르고, 제목 또한 혼동되어 표기되기도 했다. 처음 발표한 시에는 연 구분이 보다 많았고, 시행이나 시어는 다소 적었다. 여기서 이 시를 개작한 이유나, 개작인지 개악이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필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시 자체로서 그 안에 담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살펴보면서 서정적 슬픔의 연원을 찾으면 될 것이다.노천명 시인은 앞서 언급했듯이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주로 서울에서 성장했다.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보,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였고 , 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당시에 ‘여성기자’라 하면 당대의 최고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남자와 같은 사회활동 속에서 강인한 여성으로 이름나 있는 사람들이 그 내면에서 깊은 고뇌에 여린 감성이 잠재해 있는 경우가 많다. 당대의 엘리트 여성인 노천명 시인에게는 그 그리움을 풀어 놓을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시였을 것이다. 그 그리움의 결정체가 이 시가 아닌가 한다.“언제든 가리 / 마지막엔 돌아가리”라고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솔직히 나타내며 이 시는 시작한다. ‘언제든 가’고 싶은 고향이지만, 그리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은 아닐 것 같다.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고픈 고향인 것이다.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라도 ‘돌아가’겠노라고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그 속에는 깊은 그리움이 배어 있는 것이다.‘소녀들’이 나물을 따면서 '꽈' 소리를 찾는 것은 장연의 특이한 풍속인 것 같다. ‘소년들은’ 도깨비 얘기를 재미나게 ‘즐겼던’ 어릴 적 고향에서의 추억들은 세세히 시적화자의 그리움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고향의 추억들인 것이다. ‘산골’ 마을에 자리 잡은 작은 ‘교회당’에서 ‘목사’가 아닌 ‘전도사가’ ‘설교하’는 모습들까지 모두가 그리운 고향의 모습이다.이렇게 구구절절 시적화자는 그리움을 늘어놓는다. 그 절실한 그리움의 공간인 고향을 시적화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상상한다. 상상 속에서 고향에 찾아가 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적화자는 자신을 “‘아프리카’서 온 반마(斑馬)”같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의 ‘반마’는 다분히 이국적이다. 발표 당시 ‘아라비아’로 되어 있었던 것이 ‘아프리카’로 바뀌면서 더욱 이국적인 분위기를 띄우게 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시적화자의 ‘고향’은 가고 싶지 곳이지만, 추억 가득히 품고 있는 그리움의 공간이지만, 갈 수 없는 그런 이국의 공간처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적화자는 더욱 결연히 “마지막엔 돌아가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그 “마지막”에 시적화자는 고향에 돌아가 “살다 죽”기를 희망한다. 더 이상 이국의 공간이 아닌 돌아갈 수 있는 자신의 ‘본향’이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곳에는 여전히 추억을 간직하고 있길 또한 바란다. ‘총각들’이 ‘서울 구경이 원이’지만 고향을 지키며 추억 또한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시적화자는 이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환상에서, 그 꿈에서 깨어나 그 그리움에 눈물 짖고 있을 것이다. 이 시의 시인 노천명은 결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죽어서 혼이 되어 고향으로 날아가 그 추억의 공간들을 누비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둥글레산’에서 나물을 캐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이 시는 그 구조가 다소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앞서 「가을」에서도 1연의 행들이 길게 연결되고 있는데, 이 시에서는 29행에 달하는 시행들이 1연으로 묶여있다. 반면 2연그고
    교육학| 2004.10.02| 8페이지| 1,000원| 조회(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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