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사회의 수업중 레포트과제> 북한이 민족 공조를 주장하는 의도는 무엇인가?1. 민족 공조의 의미남한은 민족의 공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남과 북이 한민족, 하나의 민족이 되어 서로 돕자는 것으로, 어려운 북한을 위해서 식량 문제를 포함하여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다보면 언젠가는 북한이 스스로의 사회주의 체제를 개혁하고 통일의 문을 열 것이라고 우리는 희망적으로 생각 하고 있다.북한은 북한에서 생각하는 민족공조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민족공조와는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의 민족공조는 다름 아닌 외세배격과 선군정치 찬양이다. 외세 배격은 미국을 말하며 선군정치 찬양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위대한 영도력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그들 부자를 잘 모셔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다.2. 북한의 민족공조 주장의 의도는 무엇인가?민족공조란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도와야 한 다'는 말입니다. 6.25전쟁이후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체제 하에 분열되어 있던 북한이 60년의 세월동안 얘기치 않던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는 말이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얘기 일수 있으나 지금 북한의 상황을 보았을 때 북한이 최종적으로 주장해야할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예전에 북한이 우리에게 유엔에 공동 가입하지는 제의를 했었습니다.그 의미는 남과 북이 한 국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하지만 우리가 거절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 가 되어서 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국제적으로 내전으로 인정되어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북한의 남북 공조란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 인 것입니다. 미국을 끌어 들이지 말고 우리끼리 해결 보자는 뜻입니다.하지만 과연 외부의 도움 없이 우리들만의 힘으로 평화통일이 될지는 의문입니다.북한이 내세우는 '민족공조론'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그 하나는 정치공세로서의 민족공조라고 할 수 있다.북한은 동북아의 역학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뀐 환경 속에서 대외 협상력을 제고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북한은 1960년부터 핵개발에 관심을 갖고 노력해 왔으며 1993년 3월 NPT탈퇴선언으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그러나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문의 채택으로 미국이 KEDO를 통해 경수로 2기 지원, 중유공급, 대북관계 개선 약속 등의 교환조건으로 핵개발을 종결하도록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10월 북한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제로 북미간의 대치국면이 초래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핵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재처리 시설가동을 발표하였다.2003 년 4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미,중,북 3자회담에서 북측 인사는 핵보유를 발언하였고, 이에 대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차 PSI회의(미국, 영국 등 11개국 참가)에서는 의장성명으로 핵포기를 촉구하였다.북한은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한·미·일·중·러·북한이 참가하는 6자회담에 참가하여 다시 핵포기시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요구하였다.이미 미국은 2003년 4월 테러지원국에 대한 핵시설과 장비제공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서 KEDO활동을 정지시켰을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감시·견제 기능을 대폭 강화시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통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온 중국과 러시아가 더 이상 북한을 절대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자. 북한은 주한 미군과 전통적 한미공조를 민족자주성의 침해로 간주하면서, 한미간 결속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며 민족공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3.북한이 민족 공조를 주장하는 이유?북한이 민족공조를 주장하는 목적은 실리적 차원에서 남한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등 대남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하는데 있다.북한은 "상부상조는 우리 민족 전래의 미풍양속이다" 혹은 '동포애 적 차원에서의 지원'이라는 표현은 물론, 대북지원에 반대하는 사람은 '반민족적 집단'으로서 타도되어야 한다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을 자신들에 대한 지원을 확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물론 민족공조는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으나 지금 상황에서 볼 때 북한과의 민족공조와 미국과의 한미공조 관계 속에서 2가지 모두를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왜냐하면 민족공조와 한미공조는 서로 상반된 내용이기 때문이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북한이 민족공조를 주장하는 이유는 북한의 현재 상황에 비추어볼 때 일단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 내야한다는 것과 북한의 현재 경제, 정치, 외교 상황을 볼 때 도움을 줄수 있는 나라가 한민족인 한국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 -인간에게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가치는 어떤 것일까?돈·명예 등을 추구하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인가.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제리 맥과이어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잔잔한 감동을 얻게 되었다.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는 아니다.이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스포츠 에이전트인 제리 맥과이어와 에이전트회사의 경리직원인 도로시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만은 아니다.영화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포츠 에이전트로 회사에서 신임을 얻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로부터 갑작스런 해고를 당하게 되고, 방대한 고객보다는 소수정예의 고객들에게 진실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닌 인간이라는 점에 요지를 둔 리포트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해고를 당한 제리가 그를 따라 함께 직장을 떠나는 도로시와 인생의 시련기를 함께 극복해 가는 내용의 영화이다.이 영화 속에서 윤리적인 문제는 황금 만능주의화 되어 인간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고, 동료간의 우정보다는 동료간에 물고 물리는 경쟁의 관계로 삭막해져 가는 사회를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회사 속에서 회사를 구성하는 동료와 동료와의 관계는 내가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하는 경쟁의 상대이다. 서로 격려하고, 아끼는 관계가 아닌 어떻게 하면 저 동료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명예를 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한 회사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결국, 돈이고 명예이다. 돈과 명예를 위하여 동료를 밟고 올라서는 것이다.또한 에이전트라는 직업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스포츠 선수를 상품처럼 다루고 있다. 사람을 인격이 아닌 소비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과 실력보다는 잘 포장한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내가 판 상품이 가격을 잘 받게되면 회사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은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경기보다는 좋은 회사에 광고카피로 출연하는 것, 연봉이 얼마인가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 자신의 명예와 부와 가치가 걸려 있는 것처럼 알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과연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돈이 중요한가 아니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인가. 자신의 부와 명예인가 아니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정인가.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또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그러한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돈·명예 과연 돈과 명예로부터 행복은 오는 것일까.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가. 인간은 돈과 명예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과 명예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돈과 명예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영화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이고 진실이다. 진실한 것,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현대사회에서 돈은 중요한 것이다. 돈이 없으면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고, 살아갈 집도 없다. 돈은 그만큼 우리들 속에서 어느덧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우리 나라에서 겪고 있는 IMF의 금융구제도 돈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닌가.나는 앞에서 돈과 명예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돈과 명예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본다. 돈과 명예만을 위해 사람이 살아간다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믿음이 바탕이 된 윤기가 흐르지 않을 것이다.돈과 명예만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경쟁상대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돈을 벌면 내가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명예가 올라서게 되면 나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1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는 것이 경쟁사회에서 있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과 명예만을 좇다 보니 인간적인 면이 줄었다는 것과 함께 명예를 가진 사람이 부럽게 되고 1등이 부럽게 된다. 그래서 명예를 위해 노력하게 되고, 1등만을 하기 위하여 삶을 살아간다.결국 우리가 1등을 하고, 명예를 얻기 위한 목적은 무엇일까.행복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1등을 하고, 명예를 얻은 사람이 과연 행복할까.행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불안할 것이다. 왜냐하면 또 누가 나의 1등자리를 넘보고 있을 것이고, 내가 얻은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와 또 다시 치열한 경쟁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돈과 명예를 통해 우리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은 잠시 있는 것이다.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다.나는 이 영화를 통해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하는가.멀리 있으면 생각나고, 항상 함께 하고 싶은 것이 사랑인가. 물론 이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사랑은 서로 믿어주는 것이고, 걱정해 주는 것이고, 아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려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하고, 진실하여야 한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돈과 명예만을 쫓다보면 진실하지 못할 수 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여자를 사랑한다는 가면을 쓰고 그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명예를 부를 이루어가기도 한다.이 영화 속에서 제리가 약혼녀와의 관계가 오래가지 못하고 결혼 전에 파혼이 되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 결국 진실보다는 서로 명예를 가지기 위하여 이용하는 수단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제리가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자신과 함께 회사를 떠난 도로시와 사랑을 느끼지만 처음시작은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사랑보다는 자신의 에이전트 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사장과 직원과의 관계, 심하게 이야기하면 도로시라는 여자를 자신의 사업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사랑을 시작하여 결국 결혼을 하지만 서로 진정한 사랑이 되지 않았기에 서로 떨어지고, 서먹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서 제리는 자신이 명예를 얻었을 때 자신과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없었고, 자신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자리엔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부인인 도로시를 생각하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알게되어 진정한 사랑을 부인에게 고백을 하게 된다.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영화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다.물질 만능 속에서 삭막해져 가는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일 정도이다. IMF체제에 들었을 때 우리 나라의 국민이 서로 화합하고 단결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우리 나라 국민 전부가 그렇게 화합하고 단결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삭막해져 가는 사회현실속에서 보는 잔잔한 감동 이였다. 요즘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몇칠전 모 TV프로그램을 보고 있다가 사랑이 없는 사회에 대하여 느끼게 되었다. 어느 할머니께 인터뷰간 사람이 할머니 좋은 세상이 곧 올거에요 라고 말하자 할머니께서는 안 와요 하고 말한다. 할머니께서 그 동안 자손들에게 버림받고, 이웃 주민들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서로 믿을 수 없고, 서로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자 좋은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계신 것이다.
1. 팀이름: ROTCian2. 팀원: 체육학과-우길수, 체육학과-신윤철, 전자공학과-차희탁3. 주제: 기독교 역사발견과 이슬람 문화 체험4. 탐방목적“ 앗 살람~ 알레이쿰 ”, “안녕하세요” 라는 아랍의 인사로 아랍어를 접해 보지 않은우리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언어들이다.이집트 하면 대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들은 미이라,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일 것이다.다른 나라들은 떠올릴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들만으로도 이집트는 충분히 여행자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곳이다. 여행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시간이나 경제적인 이유도 결정요인으로 작용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여행지의 매력도 한몫을 하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를 방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이집트 여행지의 매력이라면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환경들이나 사막, 거대한 땅 , 그리고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풍부한 역사문화 유적, 자국에선 경험하기 힘든 이색체험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이런 요인들은 이집트를 방문 한 여행객들의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곳으로 이집트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우리는 이렇게 신비하고 오랜 문화가 잘 묻어 나 있는 이집트라는 곳에서 기독교 문화와 그 오랜 문화들이 어떻게 남아 있는지 그리고 있는이 곳에 이집트는 또한 성지로도 많이 알려 져 있는데 이스마일리아에 있는 성 캐더린 수도원이나 출애굽이 시작 된 고센 땅, 시내산 홍해가 내려다보이는 동굴,원래 이집트는 모래 바람 너무 더운 기후들 등이 좋지 않아 여행시기를 잘 맞춰 가야하는데 우리가 가게 될 1월쯤에는 모래바람도 불지 않고 기후 또한 너무 덥지 않아서 더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은 기대감마저 들게 만든다.5. 이집트에 대하여1. 이집트의 수도카이로2. 이집트의 인구약 6,524만명3. 이집트의 면적99만 7690㎢4. 언어아랍어5. 인종 및 민족 변천원주민 함족이 99%이며 이들과의 혼혈이 생겼으며 지중해 연안에는 유럽인과의 혼혈인이 많다.지금의 이집트인은 수많은 혼혈이지만 대부분 백인(코카이슬람 사원이 건립되었고, 하루 5회의 예배와 단식월(斷食月:라마단)의 준수 등 주민의 일상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이집트인들의 생활양식과 풍습에 이슬람 문화의 종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남녀격리의 습관·남존여비의 경향 등이 있으며 일부다처제가 인정되었으나 국민생활의 근대화와 더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에는 고대의 가족제도가 있고, 메카 순례자를 존경하는 등 아직도 이슬람의 계율이 충실히 지켜진다.이집트는 아랍세계의 교육·문화의 중심으로 아즈하르 대학과 같은 10세기 이래의 이슬람학술의 본거지와 가장 새로운 교육·문화시설도 있다. 6∼12세까지는 의무교육이고 학비는 국가가 부담하지만 문맹률은 40%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학은 아즈하르대학 외에 카이로·알렉산드리아·아일샴 대학 등이 있고, 카이로에 미국계의 아메리칸대학이 있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유물을 보존·관리하는 박물관과 연구기관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10. 이집트의 경제 및 화폐국민총생산량 : $713억(1996) (1인당 $805)계획 및 중점정책 : 낫셀에 의해 채택된 사회주의헌법(1971년) 병폐에 따른계속적인 경제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환율현실화, 공공기업축소, 민간분야 확대 등 경제개혁 추진 주요자원 : 석유(매장량 34억배럴, 일산 86만배럴), 인광석(년간 1.6백만톤,국내소비 50만톤), 철광석(년 140만톤, 전량국내소비)무역(1996) : 수출 $ 47억불, 수입 $136.8억불11. 이집트의 물가이집트의 물가는 산업구조를 보면 보는데 이집트는 관광 국가이고 또 산유국 즉 자급자족의 생활들을 하고 있다. 제조업의 발전이 미미하므로 많은 물건들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없고 상황에 따라 물가 변동이 자주 있는 편이라서 저급품의 경우는 저렴한 가격이나 질이 좋은 것은 타국에 비해서도 결코 싸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보면 될 것 이다.물(1.5 리터) : 1.5-2 LE(일반 상점), 4LE(관광지). 6LE(식당)택시 요금 : 기본 요금 2 L트를 정복(1517)- Ottoman 왕조에서 파견한 총독 Pasha가 이집트 지배(후기에는 군출신 귀족 Bay들이 사병의 힘을 토대로 Pasha의 권위에 도전)- 이집트는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쇠퇴하였으나, 이슬람 종교 중심지로서의 중요성확보라. 근대 이후(1) 19세기의 변천프랑스의 이집트 지배(1798-1801)-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1798)- 프랑스 학자들에 의한 'Rosetta Stone' 발견(1799) 등 많은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 발굴이집트 근대 왕조 성립-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는 원래 프랑스의 이집트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터어키 왕조에서 파견한 장군이었으나 이집트 정착후 정치, 군사, 경제개혁 단행, 근대 이집트 건설의 기초를 닦고, 수단 정벌(1820), 팔레스타인 지역 및 아라비아 반도 파병 등을 통해 세력 확장- Ali의 장손 이스마일(Ismail the Magnificent, 1863-79)은 대규모 국토개발계획(수에즈 운하건설, 철도, 통신, 공장, 관개수로 등)을 추진함으로써 외채가 누적(1875 영국 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43% 매입)- 1876년 외채 상환이 정지됨에 따라 공채정리위원회(영, 불, 독, 이, 오)에 의한 국가 재정 관리 실시(식민지화의 길)영국의 군사점령과 통치(1882-1936)- 1882 영국군의 알렉산드리아 상륙(Arabi 등 민족주의 그룹이 주도한 알렉산드리아 반영 폭동 진압) 및 카이로 점령 이후 영국 총영사에 의한 실질상의 국정 수행- 1914 영국 보호령 선포(1차 대전중)- Wafd당(Saad Azgloul 등이 주도)의 범이슬람주의, 입헌제 운동(1919 혁명)-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쟁취, 국제연맹가입(1936까지 영국의 실질적 지배 지속)(2) 독립 이후2차 대전 당시 영국을 도와 연합군에 참전- 1942년 Al Alamayn 전투에서 독일군 침공 저지1948년, 제 1차 중동전쟁 참전-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1947 UN의 팔레스타인 분taenus, Heraclas 등 기독교 이론가 배출)- 로마에서는 기독료 박해가 심하였으나, Alexandria에서는 상대적으로 평온 유지284년(콥틱 순교 원년) Diocletial이 로마 황제로 즉위 후, 이집트 지역을 점령하고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하였으나, Constantine 황제는 312년 밀란 칙령을 발표, 종교의 자유 허용- Athansius파(3위일체설 주장)와 Arius파(예수의 신격 부인)간의 종교재판에서 Athanasius파가 정통으로 인정됨에 따라 Athanasius파가 Alexandria 교구 관할(2) 수도원 문화 발생서기 270년경 성 Anthony가 최초로 홍해 연안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수도원 창시- 성 Makarius, 성 Palemon 등은 Nile Valley쪽에 수도원 설립성 Pachomius 이래 수도원 조직에 군대식 규율이 도입되고, 노동교육, 신에 대한 헌시 등을 사명으로 하는 수도원 생활 확립- 이집트에서 발생한 수도원 문화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이디오피아)등지로 파급성 Shenute, Theophilus 등은 이교도를 배척하고, 기독교를 수호하기 위해 폭력행사 및 파괴활동도 불사(3) Alexandria와 Constantinople간의 종교 분쟁Alexandria(예수의 인성보다 신성 강조)와 Constantinople(예수의 인성과 신성 양면성 인정) 간에 예수의 신성문제를 둘러싼 종교분쟁 발생- Alexandria의 Cyril과 Constantinople의 Nestorius간의 종교 재판(431년)은 Cyril이 승리(예수와 성모의 신성 강조)- 로마의 Marcian 황제가 451년 종교재판에서 Constantinople의 종교적 우위를 인정하고 Alexandria의 Dioscorus 대주교를 추방한 이래 Alexandria의 일체주의(Monophytism)가 쇠퇴- Justinian 황제는 Christianity를 유일한 종교로 인정하고 이교도 및 Monophytism 박해(4) 콥틱 교회구에 위치하고 있다. 에베소는 로마 당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다.특히 정치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어 ‘아시아 최대의 도시’라는 명예를 누렸던 곳이다. 당시 에베소에는 25만명의 인구가 살았었다.에베소 도시의 서쪽 언덕에는 ‘사도 요한의 교회’와 ‘박해의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셀축성과 이사베이 모스크가 있다. 그 밑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이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다. 도시의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피온산(Panayir Dagi) 기슭에는 고대 에베소의 유적들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또한 피온산 남쪽의 코레소스 산(Bulul Dagi) 꼭대기에는 ‘마리아의 집’이 있다.③사데사데는 리디아(Lydia)왕국의 수도이며 역사적으로 처음으로 금화를 제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에 금화를 제조했던 건물은 아직도 작은 시내가 흐르는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금과 은을 섞어서 만든 이 금화는 마치 달걀 모양의 타원형이었다.'사데'라는 이름은 리디아 왕국 때부터 불려졌다. 리디아 왕국은 다섯 왕조로 이어졌다. 리디아 왕국이 성장하게 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 부터였다. 기게스 왕이 리디아의 새 통치자로 등장하면서 리디아는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리디아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크로에수스 왕이다. 그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으로서 관대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엄청난 부를 가진 왕으로도 유명하다. 크로에수스 이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크로에수스 같은 부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크로에수스 왕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금과 은, 두가지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금화를 제조한 인물이다. 그의 엄청난 재산은 주로 세금과 무역으로 인한 수입과 사데 지방에서 수거한 금으로부터 축적한 것이다.기원전 547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들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소아시아 역시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사데 역시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한때는 공포의 분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막강한 군대를 가진 페르시아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게이다.
1. 팀이름:2. 팀원:3. 주제: 기독교 역사발견과 이슬람 문화 체험4. 탐방목적터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만으로도 터키는 여행자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곳이다. 그리고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만큼이나 여행매력 또한 풍부한 곳이기도 한다. 대개 사람들이 여행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시간이나 경제적인 이유도 결정요인으로 작용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여행지의 매력도 한몫을 한다. 여행지의 매력이라면 수려한 자연경관 , 풍부한 역사문화 유적, 자국에선 경험하기 힘든 이색체험,. 친절한 국민성 등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이런 요인들을 두루 만족시켜주는 곳으로 터키만한 곳이 또 있을까싶다. 역사 문화적으로 풍부함을 자랑하긴 하지만 너무 잘 정리된 듯 해 숨막힘도 느끼게 하는 유럽 ,신비함과 모자람의 매력을 갖추긴 했지만 보통의 여행자들에게 아직도 벽을 느끼게 하는 인도, 자연경관도 빼어나고 사람들도 친절하지만 역사 문화에 있어서는 허전할 수밖에 없는 호주나 뉴질랜드, 그러나 터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다양하다. 에게 해 연안에는 로마제국시대의 유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 셀주크와 오스만 터키를 거쳐온 파란만장한 역사의 흔적들이 곳곳에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거대한 돔의 이슬람 사원에선 알라를 외치는 경배소리가 높지만, 성모 마리아의 사도 바울의 전도지를 찾아 터키를 방문하는 기독교도들의 발길 또한 이어진다.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암괴석들이 화려함과 장대함을 느끼게 해주는가 하면, 에게 해 내륙의 푸른 초원 위로는 양떼들이 평화롭게 흩어지고 지중해 연안의 해변들은 유럽 어느 곳보다도 맑은 물색을 자랑한다. 무뚝뚝한 듯하지만 속내는 친절하기 그지없는 터키인들은 어리숙하지만 아름다운 친절을 베풀 줄 알고 타이트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허술하게 드러나는 여행체계들은 오히려 여유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진다.이렇게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프리즘 같은 터키에서 우리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되어 공존함에 초점을 맞추고 여행하려 한다.터키의 초대 불로 개명하고 그의 떠오르는 제국의 수도로 지명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다. 술탄 셀림 1세(1512-1520)의 통치기간은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강력한 군 지도자이자 영민한 정치가였던 셀림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이집트로 영토를 확장했고, 카이로의 이전 칼리프로부터 "이슬람의 칼리프"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셀림의 아들인 위대한 슐레이만(1520-1566)은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그의 부하들에 의해 "법제자"라고 알려진 슐레이만은 제국의 법전을 편찬했으며, 오스만의 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성지 예루살렘과 모스크, 육교, 수로, 학교 등, 공공근로사업을 재건했다. 이 대부분의 건축은 뛰어난 거장인 시난에 의해 이루어졌다. 슐레이만의 군대는 로드와 비오그라드, 부다페스트를 점령했고, 그의 해군은 바바로스 하이데린과 알제리아, 튀니지를 영역에 영입했다. 술탄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합스부르그 왕가의 찰스 5세가 유럽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영국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군사적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슐레이만 이후, 오스만 제국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제국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전성기인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크리미아, 코카서스와 중동,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를 지배하였다. 흑해와 홍해, 지중해의 절반은 오스만 제국의 호수였다. 그러나 술탄제 구조의 변화는 왕조의 약화를 초래했고, 제국의 통치는 술탄의 "수상"인 그랜드 피지에에 의해 위임되기도 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팽창하는 러시아에 군사적 공격을 받았고, 발칸의 그리스도교 신하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제국의 관세는 유럽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몇 술탄들은 제국의 힘과 문화적 영향력이 쇠퇴해 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19세기 정부와 군대, 학교, 사회 체제 속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투르크족의 연합이 와해되었다. 그러나 11~14세기 투르키스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형성된 대제국인 대셀주크 제국에 의해 투르크족은 이슬람 세계로 재통일되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투르크족들은 무슬림 아랍 국가들을 침입하기보다는 성전 원리에 따라 이교도인 비잔틴 제국을 공략하여 1071년에는 대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아슬란이 비잔틴 제국의 접경까지 진출하였고, 말라즈기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의 디오게네스를 격퇴하여 비잔틴 지역의 핵심 지역을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게 하고 아나톨리아에 새로운 터키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이란 지역에서 형성된 셀주크 왕조는 일반적으로 대셀주크 제국으로, 그리고 소아시아 지역의 셀주크 왕조는 소아시아 셀주크 국가라 구분하여 지칭되고 있다. 비잔틴 제국 영토의 일부를 기점으로 하여 서부 아나톨리아까지 확대한 소아시아 셀주크 국가는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원정으로 군사력을 소모하는 등 심각한 위협을 받았으나 12세기 후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의 등장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1176년의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승리는 말라즈기르트 전투에 이어 아나톨리아에 투르크족의 근거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이후 비잔틴과 투르크의 대결에서 투르크에 유리한 입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셀주크족은 스스로 성자임을 자칭하며 추종자를 모으는 바바 일리야스라는 사람과 바바 이샤크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해졌고 이 틈을 타 침략해 온 몽골군과의 쾨세다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소아시아 셀주크 국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1308).(5) 오스만 제국셀주크 국가의 패망 이후 몽골의 종주권이 확립되어 가자 몽골 치하에 점령되지 않은 아나톨리아 일부에서 여러 독립된 투르크멘 공국들이 등장하였다. 이 공국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스만 베이가 통치하던 1299년에 수립된 오스만 공국이다.오스만 공국은 비잔틴 제국과 소아시아 셀주크 제국의 접경 지대에 위치하여 다른 투르크 부족 국가와의 직접적인 대결 옛날에 이들 산들은 차례로 용트림을 치며 용암을 분출시켜 주변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 바람에 의한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매혹적인 대작품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화산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지역이 강도가 약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산에 의해 그 위로 강도가 강한 검은 용암이 뒤덮어졌다. 세월의 비, 바람은 강도에 따라 이 지형을 깍고 다듬어 전 세계에서 유일한 특수한 경치를 이 카파도기아 지역에 선사한 것이다.이러한 특수한 지형은 인간들이 손쉽게 거주할 수 있는 거주지를 제공해 주었다. 즉, 그들은 이 천연의 바위 속에 있는 약한 사암을 파내기만 하면 훌륭한 집이 되었다. 그 겉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용암은 지붕이나 벽이 되어 주었다.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기초공사나 골조공사는 필요 없었다.2) 카파도기아의 역사적 배경주변의 매혹적인 경관은 이미 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고대의 신화나 전설에도 자주 오르내렸을 뿐 아니라, 이른 시기부터 인간은 이곳에 거주했다. 고고학적 발굴은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뚜렷한 문명을 전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500-5,500년 경의 신석기 시대로서 소위 차탈회육(CATAL HOYUK - 코냐 남동쪽 Cumra옆)문명이다. 이들이 남긴 벽화는 인류 최초의 벽화로도 유명하다.이들의 고대문명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핫티(HATTI)및 내사(NESA)문명을 이어받아 내려오다가 결국 중동 및 소아시아 반도의 융성한 힘이었던 힛타이트(HITTITES, 헷족속)제국에 융합된다.힛타이트인들은 인도-유러피언 계통의 일파로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이 지역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HATTUSAS(앙카라 동쪽 Bogazkale옆 지역)를 수도로 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약 700년간 훌륭한 문화를 이룩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당시의 유적들은 현재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 불려졌다. 리디아 왕국은 다섯 왕조로 이어졌다. 리디아 왕국이 성장하게 된 것은 기원전 7세기 말 부터였다. 기게스 왕이 리디아의 새 통치자로 등장하면서 리디아는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리디아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크로에수스 왕이다. 그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으로서 관대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엄청난 부를 가진 왕으로도 유명하다. 크로에수스 이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크로에수스 같은 부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크로에수스 왕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금과 은, 두가지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금화를 제조한 인물이다. 그의 엄청난 재산은 주로 세금과 무역으로 인한 수입과 사데 지방에서 수거한 금으로부터 축적한 것이다.기원전 547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들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소아시아 역시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사데 역시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한때는 공포의 분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막강한 군대를 가진 페르시아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게 되었고, 이어서 등장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기원전 334년에 아나톨리아반도 대부분의 영토가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사데를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로부터 퇴출을 맞게 되었다.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인 셀레우코스가 사데의 새 통치자 되었다. 그후 사데는 베르가마(버가모) 왕국의 통치(기원전 180-133)를 받아 오다가 대제국인 로마의 등장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사데의 옛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길 모퉁이에 서있는 장엄한 유대교 회당 건물이 눈에 띤다. 기원후 3세기 건물로 여겨지는 이 회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유대교 회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기둥은 물론 벽들도 대리석 재료를 사용했다.유대교 회당 바로 옆에는 무너진 도시의 흔적들 속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이 있다. 하맘 옆에는 더운물을 이용해서 사용되었던 수영장의 흔적들도 대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져 있다.된다.
핵 문제와 관련, 북한이 민족공조를 주장하는 의도는 무엇인가?먼저 민족공조란 말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족공조란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6.25전쟁이후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체제 하에 분열되어 있던 북한이 60년의 세월동안 얘기치 않던 같은 민족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는 말이 어떻게 보면 어이 없는 얘기 일수 있으나 지금 북한의 상황을 보았을 때 북한이 최종적으로 주장해야할 마지막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예전에 북한이 우리에게 유엔에 공동 가입하지는 제의를 했었습니다.그 의미는 남과 북이 한 국가가 된다는 의미 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절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남과 북이 하나의 국가 가 되어서 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국제적으로 내전으로 인정되어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북한의 남북 공조란 의미는 바로 그런 의미 인 것입니다. 미국을 끌어 들이지 말고 우리끼리 해결 보자는 뜻입니다.하지만 과연 외부의 도움 없이 우리들만의 힘으로 평화통일이 될지는 의문입니다.북한이 내세우는 '민족공조론'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그 하나는 정치공세로서의 민족공조라고 할 수 있다.북한은 동북아의 역학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뀐 환경 속에서 대외 협상력을 제고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북한은 1960년부터 핵개발에 관심을 갖고 노력해 왔으며 1993년 3월 NPT탈퇴선언으로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었다.그러나 1994년 10월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문의 채택으로 미국이 KEDO를 통해 경수로 2기 지원, 중유공급, 대북관계 개선 약속 등의 교환조건으로 핵개발을 종결하도록 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10월 북한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제로 북미간의 대치국면이 초래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핵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재처리 시설가동을 발표하였다.2003 년 4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미,중,북 3자회담에서 북측 인사는 핵보유를 발언하였고, 이에 대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1차 PSI회의(미국, 영국 등 11개국 참가)에서는 의장성명으로 핵포기를 촉구하였다.북한은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한·미·일·중·러·북한이 참가하는 6자회담에 참가하여 다시 핵포기시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요구하였다.이미 미국은 2003년 4월 테러지원국에 대한 핵시설과 장비제공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서 KEDO활동을 정지시켰을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한 감시·견제 기능을 대폭 강화시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통적으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온 중국과 러시아가 더 이상 북한을 절대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자. 북한은 주한 미군과 전통적 한미공조를 민족자주성의 침해로 간주하면서, 한미간 결속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며 민족공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