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구성?서론 : 문학이 주는 이점에 대한 문제제기본론 : 문학이 주는 이점에 대한 설명결론 : 문학이 주는 이점을 스스로 찾자는 주장주장문학작품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추구하자.사람들은 주고받는 것에 민감하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있어서 ‘이익’ 과 ‘효율’ 이라는 말만큼 친숙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이 정책이 주는 이점은 무엇일까? 얼마만큼의 효율을 기대할 수있을까? 등등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문학작품은 우리에게무엇을 줄까? 지식이나 정보? 아니면 좋은 팁? 인생의 길을 제시해주거나 교훈을 줄까?문학은 첫 번째로 우리에게 정보를 준다. ‘줄 수 있다’ 는 말은 꼭 모든문학이 그렇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정보를 줄 수도 있지만 어떤작품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류의 정보든간에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유용한 정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두 번째로 문학은 우리에게 교훈도 줄 수 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의 일생을 담은 소설을 통해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다. 혹은 우리는 부자인 채로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죽은 사람의 일화를 통해서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은 정보나 교훈이 아니다. 때로어떤 문학이 정보가 적은 사람에게는 정보로, 또 동기가 필요했던 사람에게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문학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좋은 말을 주기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 문학은 그 자체로 문학이다.다른 이의 삶을 보여주든 어떠한 현상에 대해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든간에 문학은 문학이다. 그 다음은 독자의 몫인 것이다.하지만 대부분의 문학이 주는 이점은 ‘감정의 성숙’ 이다. 우리는 지금껏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지혜롭고 슬기롭게 사는 것을 배우는데 초점을맞춰왔지만 사실상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한 것은 감정의 성숙일 것이다. 지금 현대사회에 발생하는 수많은 사회문제 중에는 감정의 결핍이나 잘못된 함양으로 인해 벌어지는 것들이 많다. 우울증, 강박관념, 애정결핍 등 개인적인 정신문제로부터 그것이 커져서 벌어지는 수많은 범죄들에 이르기까지 사회는 감정의 비성숙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호소해왔다. 그러나 왜 굳이 감정의 성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또 그 필요성을 충족하는 곳도 없었다. 그것을 대신 해주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웰컴투 동막골을 보고.전쟁 그 원인과 결과웰컴투 동막골을 보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바로 이념이 무엇인가, 와 전쟁이란 필요한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이었다.이념은 인간들이 믿는 바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이 서로 상충되거나 다를 경우에 전쟁이 발발한다.이념, 이데올로기 [Ideologie] :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제형태.왜 이념이라는 것이 탄생했을까?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원인을 찾고 결과를 규정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발전하는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그렇다면 왜 인간은 이념에 집착하는가?그것은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뭉치고 어울리고 반목하고 싸우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패를 만들고 또 패를 가르고 또 그 패간에 싸우면서 누가 더 나은지 누가 더 강한지를 따지며 자신의 우월성과 생존성을 느끼고 싶어한다. 마치 동물들이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의 위치를 재상기시키는 것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이념이란 중요한가?이 질문에 이르러서 나는 오랫동안의 고민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내 생각에 이념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자연이나 사회 그밖의 것들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는 것은 그 인간의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념이 상반되는 이념을 가진 사람들과 100% 반목되어 공존할 수 없을때 전쟁으로 번지고 그 속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 역시 발생한다. 그것 역시도 나는 내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론 인간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일도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그 이념에 대해 동의하고 추구하는 존재’에 한해서이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은 어떤 단체의 수뇌자에 의해 일어나고 그 결과로 이념을 제대로 갖지도 못한 - 혹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강제로 세뇌되어진 - 하위 사람들까지도 피해자로 만들기 때문에 불공평하다.동막골에서도 남한과 북한의 병사가 잠시나마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서로에 대한 ‘진실된 증오’의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정말로 서로를 미워했고 서로의 이념이 달랐다면 그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둘은 대체로 명령을 전달받는 하위의 존재로서 이념이 무엇인지 그것을 왜 지켜야 하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어린양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전쟁은 무의미하며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크로싱을 보고.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하나님의 사랑은 남측에만 있고 북측에는 없는 것입네까?이 질문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과연 그런 것일까?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말은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북측에는 -대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없거나 매우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측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신도자들이 존재하지 않는가?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단순히 신도자에게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다 내려지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다를 것이다.나 역시도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있는가? 라는 질문을 속으로 던진 적이 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그 교회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이나 목사님들의 말을 다는 아니어도 상당수는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고난이 닥친다는 사실이 못내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말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나에게 왜 고난과 시련을 주실까?주기도문에도 있듯 우리는 늘 고난과 시련을 주지 말것과 악에서 구할 것을 간청드리지 않았나?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답을 명확히 내리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남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비하면 너무도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그들 개개인에게 그들의 행복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면 행복하다는 답변은 매우 적을 것이라 예상한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인 빈곤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그런 면에서 생각해봤을땐 북한의 사람들이 비록 물질적인 빈곤이 그들을 매일 괴롭히고 있지만 정신적인 풍요의 면에서도 보다 더 풍요롭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본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신적인 풍요가 더 좋다라는 것은 아니다.
임포스트를 보고서로 다른 자아에 대하여임포스트란 영화는 진실한 자아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올햄이 지금껏 살아온 자신과 나중에 알게된 스파이로서의 자신은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갭(Gap)이 존재하는 두 개체였다. 그에게 있어 ‘그동안의 자신’은 ‘스파이로서의 자신’과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차마 박사로서 살아오고 믿어왔던 스스로의 신념을 한순간에 바꿀 수 없었던 그였기에 마지막에 폭발을 함으로서 ‘새로운 자신’을 거부한다.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자아와 수용’은 조금 다르다.사람은 누구나 여러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자아 [自我, ego] : 사고, 감정, 의지 등의 여러 작용의 주관자로서 이 여러 작용에 수반하고, 또한 이를 통일하는 주체.사람이 하나의 자아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행동은 일률적인 행동 패턴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순된 행동을 종종 저지른다. 작게는 당연히 사람은 정직해야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작은 물건을 훔치는 행동에서부터 크게는 하나님을 믿는 목사가 어린아이를 성폭행한 기사 등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위의 사건에서 그 목사가 가진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어린아이를 범하고 싶은 욕망’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일찍이 간음하지 말라, 라는 기본 수칙을 강조하셨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여자를, 그것도 어린아이를 간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저질렀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거짓이기 때문일까?나의 생각에 따르면 - 그가 스스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 그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어린아이를 범하고 싶은 욕망’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고 어린아이를 범하고 싶은 욕망 역시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개의 마음은 모두 그의 내면속에 존재하였지만 평소의 그는 두 개의 마음이 서로 위배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의 마음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자아는 모두 진짜였기 때문이다.물론 위의 사건처럼 자신의 내면의 자아가 비윤리적인 행동을 갈망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자아는 매우 모순적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일하고 싶어하면서도 쉬고 싶어하고, 또 평범해보이고 싶어하면서도 독특해보이길 원하는 것처럼 항상 그 마음이라는 것은 한끝 차이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적인 틀 안에서 순응하고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비틀린 자아를 억누르고 절제한다. 또 때론 타협한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는 분출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비틀린 자아를 가장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