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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계열]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평가A+최고예요
    Ⅰ 서론‘토론은 지식을 교환하는 것이다. 무지의 교환은 말싸움일 뿐이다.’ 미국의 작가 로버트 퀼렌의 말이다. 토론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생각 된다. 우리는 흔히 토론을 일종의 싸움으로 여겨 꺼린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나 친구, 지인 간에는 토론을 하는 것을 상대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토론은 싸움이 아니다. 토론은 보다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한 지적 스포츠이다. 지구상에 있는 국가의 대다수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 - 토론 광장에서 시작 되었다. 이 국가들의 대부분은 토론을 통해 원칙을 정한다. 토론 문화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전제 조건이자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재는 바로미터인 것이다.토론을 지적(知的)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규칙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규칙을 잘 지켜야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토론은 스포츠 중에서도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이다. 그렇다보니 승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떻게 하면 토론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쇼펜하우어가 [토론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답을 들려준다.쇼펜하우어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철저한 회의주의자였던 그가 과연 토론이라는 지적 스포츠에서 어떤 발견을 이루었을까? 분명 그는 토론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토론의 법칙]이라는 글을 발표했다.사실 얼핏 생각하기에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정확하고 올바른 근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주장을 펼쳐 상대의 논리를 무너뜨리면 된다. [삼국지]의 한 장면을 보자. 제갈량은 남침하는 조조의 군대를 막기 위해 옛 오나라 지방의 손권과 손을 잡고자 한다. 그래서 직접 교섭을 하러 손권의 진영으로 건너간다. 그 자리에서 손권 휘하의 내놓으라 하는 당대의 명사들과 유비, 손권 연합군 형 거둔다. 이에 반해 육적과의 설전에서는 육적의 소실 적 효행에서 근거를 얻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학문적 권위를 이용하려는 설종은 한 술 더 떠 한신, 장량, 태공망 등 선현의 권위를 내세움으로써 눌러버린다. 제갈량은 올바른 근거로 합리적인 주장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논리를 역이용하거나, 심리적인 전술을 통해 토론에서 승리를 거둔다. 결과적으로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엄연히 말해 손권이 유비와 손을 잡는 것은 무모한 동시에 불필요한 행위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다소 불합리한 주장을 세치의 혀를 이용해 상대에게 관철시킨 것이다. 토론의 승패가 결코 주장의 합리성과 당위성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나는 본문을 둘로 나눌 것이다. 먼저 책 내용 자체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적고, 뒤에는 쇼펜하우어가 주창하는 토론술에 대한 나의 견해를 적을 것이다. 책 내용을 옮겨 적기 보다는 나의 생각을 적음으로써 이 책을 평가하고자 한다.Ⅱ 본론(1) 책 내용에 관한 소고[토론의 법칙]은 글자 그대로 토론의 법칙(=규칙)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38가지의 토론 ‘기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론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효용적인 기술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과연 쇼펜하우어는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하던 지성인인가, 아니면 토론의 승리에 목숨을 걸고 세치의 혀를 휘두르던 소피스트에 불과 한가’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든다. 예를 들어 그가 추천하는 토론의 기술로는 ‘불합리한 반대 주장을 함께 제시해 양자택일하게 한다.’, ‘틀린 증거를 빌미삼아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거짓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낸다.’, ‘방법이 없을 경우 인신공격을 해라’ 등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토론 장면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더구나 당대의 지성이라 불리는 쇼펜하우어의 입에서 버젓이 나온 주장들이니 기가 찰 노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비합리적이고 치사한 방법까지 사용한다. 따라서 이런 공격들로부터 자신의 논리를 보호하려면 먼저 정확히 그것들을 파악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점은 이 책이 단순히 기술서나 지침서가 아니라 개론서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앞서 제시한 토론 기술들을 사용해야 하는 당위성을 정확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둘째, 현실적이고 놀라운 관찰력, 분석력을 보여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38가지 기술들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결코 우리가 몰랐던 것들이 아니다. 토론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왔던 것들이다. 가령 토론에서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저자 :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이 있다. ‘통계청의 통계에 따르자면...’, ‘공학박사 김OO 박사님의 견해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라고 말을 시작하면 우리는 주눅들 수밖에 없다. 그 분야에 권위를 가진 사람 혹은 기관이므로 그 근거를 철썩 같이 믿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근거들은 그다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물론 권위자들의 말이 근거로써 효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그 권위를 변칙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통계청의 통계 수치가 근거로 제시될 경우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또한 공학박사가 신형 선박의 동력 기관에 대해서 설명할 경우 역시 그 진위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수치나 설명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것들이다. 실제로 작년 겨울 ‘NASA의 데이터 분석 결과, 2005년 여름 통계청 관측 역사상 최고의 무더위 예상’이라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언론과 전자제품 업체들은 이 보도를 과장하여 퍼뜨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에어컨 장만에 정신이 없었다. 에어컨 매출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실제로 2005년 여름은 특출 나게 덥기는커녕 평년 수준의 여름에 불과했다. 이유를 따져보니 한 NASA의 직원표인 것이다. 이런 일상적인 것들을 쇼펜하우어는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모아 체계화, 이론화 시켜 ‘토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정립한 것이다.셋째, 시간, 공간이라는 환경적 요소까지 고려해 명료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토론을 하는 시간대가 언제인지, 어떤 상황인지, 토론을 듣고 있는 청중은 누구인지, 어떤 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감안하여 이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흔히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주장, 바꾸어 표현하자면 그 논제에 관해 가장 적합한 진리를 주장한다면 당연히 토론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옳은 주장을 하는데 시간, 공간 등의 외적인 요소를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령 성범죄 발생에 인간의 성욕이 원인이 된다는 주장을 국회에서 하면 옳고, 여자 대학 강의실에서 하면 옳지 않다는 결과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서양 철학 사상 전반에 흐르는 암묵적인 불문율에 기인하는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 옳음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이고 칸트의 물자체이며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부인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무리 합리적인 주장을 하더라도 시간, 장소에 따라 토론에서 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은 진공 상태를 싫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지구상 대부분에서 옳은 주장이었지만 해발 10.96M 위의 지역에서는 틀렸음이 밝혀졌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중세 교회의 법정에서는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진리의 상대성 내지는 진리의 허구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니체의 니힐리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과 맥을 같이 한다. 오히려 이런 생각들보다 수 십 년 앞서 나온 것이니 쇼펜하우어의 탁월한 안목을 엿볼 수 있다.이런 장점들에 반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단점들도 발견할 수 있다.첫째,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방법들은 객관적으로 효과가 증명되대에게만 가능한 방법이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교묘하게 반박한다.’ 는 방법은 지적당할 경우 유치한 사람으로 몰려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겨 줄 가능성이 크다.둘째,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넓게 해석해 과장한다.’ 는 방법과 ‘상대적 주장을 절대적 주장으로 바꿔 해석한다.’ 는 방법은 그 경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예‘ 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는 방법은 ‘상대방의 대답을 근거로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는 방법의 선행 과정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내용이 없는 말을 심오하고 학술적인 말로 둔갑시킨다.’ 는 방법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 는 방법이 특화된 것에 불과하다. 심오한 말 자체가 자신의 학문적 권위에 의존하고자 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셋째, 토론술과 궤변의 차이점을 명확히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논리학이고 거짓된 주장을 화술을 통해 관철시키는 것이 궤변이다. 토론술은 사실을 주장할 경우, 아니 주장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주장을 보호, 관철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궤변과는 다르다면서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의 대다수가 사실의 과장, 축소, 왜곡, 유도 등 거짓의 영역에 해당하는 내용을 이용한 방법들이다. 예를 들어 ‘틀린 증거를 빌미삼아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거짓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낸다.’, ‘근거가 되지 않는 답변마저도 결론의 근거로 삼는다.’,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등이 있다. 심지어 저자는 대놓고 ‘상대방의 궤변에는 궤변으로 맞서라’, ‘인신공격은 최후의 수단이다.’ 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런 방법들이 궤변과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보니 충실히 이 방법들을 따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넷째, 구체적인 사용에서는 상대, 환경, 상황에 따라 가변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저자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 소고
    독후감/창작| 2005.09.25| 7페이지| 1,000원| 조회(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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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 사상] 쓸모있는 바보들 - 모나 채런
    쓸모 있는 바보들-미국 진보주의세력에 대한보수주의자의 비판200301011 윤리교육도대영Ⅰ 서론 - p. 3Ⅱ 본론(1) 아주 잠깐 공산주의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다 - p. 4(2) 1960년 대, 미국 내에 반미주의가 만연하다 - p. 5(3) 피의 대학살 의 원인을 미국에게 돌리다 - p. 6(4) 소련 뿐 아니라 미국의 진보세력도 전 세계 공산주의자의 후원 세력이었다 - p. 7(5) 미국이 핵전쟁을 부추긴다 고 공격하다 - p. 8(6) 각양 각색의 공산 정권을 환영하다 - p. 9(7) 한 자리에 맴도는 쓸모 있는 바보들 - p. 10Ⅲ 결론 - p. 11Ⅰ 서론[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유신 정권 시절부터 수많은 反체제적 저술 활동으로 유명했던 리영희 교수의 책제목이다. 그는 군사 정부의 독재와 비합리성, 폭력성에 대해 열렬히 비판해 재야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그를 한국 젊은이들의 사상적 은사 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군부의 눈에 그는 눈엣가시였기에 그의 저서 대부분은 금서가 되었고, 공안 기관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통해 그를 탄압했다.그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일신의 안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보적인 사상을 펼쳐서가 아니라 놀라운 사상적 균형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제목처럼 새는 결코 한 쪽 날개로 날 수 없다.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온 점에 대해서는 칭찬하면서도 인권의 탄압이나 체제의 경직성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비판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지식인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나 진보와 보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념적 스펙트럼의 정 중앙을 기준으로 서로 좌우로 이웃하고 있는 이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존재이다. 변증법적 논리나 허울 좋은 상생의 논리로도 결코 결합하거나 새로운 체제로 거듭날 수 없으며, 설사 거듭난다 해도 이내 둘로 나뉘고 만다. 그렇기에 둘은 항론 소련이고, 악의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 경쟁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도덕적 도전 이라고 찬양하고 있다.나는 이 연설문을 읽으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 2001년 9. 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했던 악의 축 발언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레이건의 이 연설문은 명백한 흑백논리이다. 너무나도 선명한 이분법적 사고이다. 사실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는 플라톤의 이데아 론에서 그 뿌리를 찾을 만큼 유서 깊은 것이다. 이런 자기 암시를 통해 그 동안 그들은 기독교 VS 이교도, 선 VS 악 이라는 단순한 대립구도를 정당화 시켰고 십자군의 동방 침략 등 수 많은 역사적 과오를 범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레이건의 이런 발언의 기저에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 이상의 것, 즉 패권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 절대적인 일인자가 되기 위해 소련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악마로 설정한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군비 경쟁을 하여 무력, 전쟁으로 악마를 타도하려 한다. 과연 레이건의 말처럼 소련의 공격 본능 때문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군비를 증강해야만 했을까? 군비 경쟁 대신 군비 공동 감축, 상호 체제 인정을 통한 안정적인 방법의 시행 가능성은 없었을까? 사실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레이건은 공산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철하게 따져 보았을 때 그의 그런 패권주의는 결코 평화에 대한 보장이 될 수 없었다.저자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통해 다시 한 번 레이건을 찬양한다.(소련이라는 국가가 영원히 사라진) 지금 생각해보면, 소련의 국가적 정통성을 부인한 일은 뛰어난 예견력과 통찰력을 지닌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 p. 32이런 저자의 주장은 지극히 결과론 적이며 논리적이지 못하다. 공산주의가 먼저 붕괴되었고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이것이 민주주의의 우위를 증명하거나 공산주의의 정통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나면 집은 부서지고 사람들은 살해당하기 마련이다. 베트콩의 행위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베트콩들만이 저지른 악독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베트콩의 잔인함은 과장, 강조하면서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 사건은 예외적인 일이라도 치부해버리는 것은 그가 비판한 언론의 편향성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미군의 베트남 전 참전은 결코 남베트남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정의로운 목적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은 2차대전 후 민족 자결 주의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을 외치면서 베트남은 프랑스 정부의 통치하에 남겨두어 제국주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후 1954년 베트남 민족해방세력의 독립 전쟁 승리로 총선거를 통해 호치민 정부가 들어서지만 미국은 CIA의 비밀 공작을 통해 조약을 파기해버리고 만다. 이후에도 남베트남 공산주의자의 공급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 라오스를 침공했다. 민주주의의 교사 를 자처하며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삼는 미국, 미국식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인디언들을 몰살시켰던 미국. 그들의 베트남 전 참전의 목적은 베트남 - 대만 - 필리핀 - 일본 - 남한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연안의 군사적 요충지를 차지하여 중국을 견제하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풍부한 자원을 지배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들의 야욕을 동료를 구하는 람보의 모습으로 미화시키려는 노력은 가장 편향적인 미디어조작이 아닐 수 없다.(3) 피의 대학살 의 원인을 미국에게 돌리다이 챕터는 캄보디아 대학살에 관한 챕터이다. 챕터 2와 비교했을 때 챕터 2는 분명히 비이성적인 언론의 편향성에 초점을 둔 합리적인 비판이었지만 챕터 3은 미국이 지원하던 독재 정부가 무너지자 결국 공산정권이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것 봐라 라는 식의 결과론 적인 비판이다. 그렇다면 똑 같이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가 무너진 후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쿠바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코 저자의 말처럼 비극적 탈선으로 보는 것이 합아마도 5만 내지 15만 명 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Ben Kiernan, "The American Bombardment of Kampuchea, 1969-1973저자가 진보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가장 큰 요점은 두 가지이다. 1 왜 캄보디아만 반미세력이 광폭해졌나? 2 폭격 후 스무 달이 지난 후 크메르루즈는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늦다. 따라서 미국의 폭격과는 상관 관계가 없다.먼저 주장 1을 보자. 크메르루즈의 광폭성 자체와 미국 폭격의 상관 관계는 적다는 데 동의한다. 분명 크메르루즈의 전체 공산주의를 향한 미증유의 폭주는 모델이 되었던 중국, 북한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광폭성을 가진 집단이 손쉽게 캄보디아 전체를 점령하는 데에 미국의 책임이 컸다. 미국은 북베트남인들이 캄보디아로 피신했기 때문에 북베트남과 캄보디아 두 공산 단체가 연합했다고 판단했고, 닉슨 대통령은 1969년 3월 캄보디아 폭격 명령을 개시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인을 찾는데 실패하자 폭격과 지상전의 확전으로 캄보디아와는 상관없는(적어도 대다수의 캄보디아인) 이 침공을 1973년까지 더 끌었다. 그 과정에서 54만 톤의 폭탄을 떨어뜨려 5~ 15만 명의 캄보디아인을 죽였다. 결국 이것이 큰 역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미국의 폭격에 분노한 캄보디아인 들은 크메르루즈의 평화와 반미주의 선전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크메르루즈의 광기에 대해 스스로 지각하고, 이 때문에 미국의 폭격을 견딜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결국 크메르루즈는 손쉽게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했고, 미국의 폭격이 크메르루즈의 정권 장악을 도운 셈이 되어버렸다.주장 2는 옳지 못한 생각이다. 미국의 폭격은 약 4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캄보디아인들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반미 감정이 확산되었다. 크메르루즈는 점점 늘어나는 미국의 폭격 지대의 범위에 따라 그 세력을 확장하기만 하면 됐다. 따라서 미국이 뿌린 씨앗을 크메르루즈가 하나 둘 씩 수확한 것이라 세웠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군비 축소 정책을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저자는 진보주의자들이 핵전쟁의 위험, 군비 경쟁의 부작용에 대해 과장하여 비판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논리를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1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기를 손에서 놓는 것이 아니라 악당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2 미국이 군비를 축소한다고 해서 소련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거울이론) 3 미국 내 진보주의자들의 핵무기 확대 반대, 군비 축소 운동은 소련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에 의한 것이며, 소련의 선동에 의한 것이다. 4 핵무기 보유 확대가 전쟁의 위험성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수로 인한 핵전쟁 발발 가능성과 소련을 자극하여 선제 공격을 유도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5 무기 자체의 위험성은 없다. 전적으로 무기를 가진 자의 의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악의 제국인 소련과 달리 평화의 수호자 미국이 핵을 가지는 것은 정당하다.우선 2는 1의 근거가 되는 논리이다. 2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저자도 지적하듯 어떠한 구체적이고 공신력 있는 협약 없이 스스로 방위력을 해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예를 들어 2차 대전 때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에 대해 자국에 편한 대로 마음대로 상상하고 방치하다가 결국 큰 화를 부르고 말았다. 협약을 하고도 어길 가능성이 있는데 하물며 심리적인 기대만으로는 무리인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당장 주한 미군의 전면 철수가 불가능한 이유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1에 전면적인 동의는 할 수 없다. 1에서 말하는 안전은 힘의 균형에 의한 것이 아닌 적을 제압한 이후의 안전을 의미한다. 결국 적이 순순히 항복 할 리가 없으니 적과의 전쟁을 각오한 안전이다. 만일 적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만 하는 상태의 안전(일종의 과잉방어)을 주장한다면 이는 현실성이 없다. 강한 힘은 상대를 위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하고 도발하기 마련이다. 결국 군비 경쟁의 가속화를 촉발시킬 것이다. 만리장성은 방어를 위해 만든 것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09.25| 11페이지| 1,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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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 리처트 세넷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200301011 윤리교육도대영목차Ⅰ. 서론Ⅱ. 본론(1) 표류(2) 일상(3) 유연성(4) 이해불가능성(5) 리스크(6) 노동윤리(7) 실패(8) 우리, 그 위험한 대명사(9) 경쟁과 혼란Ⅲ. 결론Ⅰ. 서론내가 어렸을 때 즐겨보던 TV 프로그램 중에 [손자병법]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대기업의 한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 비즈니스 드라마였는데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인간관계, 세태에 대한 풍자 등이 주 내용을 이루었다. 그 드라마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왔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故김성찬씨가 분한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는 매일 지각에 농땡이를 일삼고 업무 능력도 떨어지지만,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과 분위기 메이킹 능력 때문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캐릭터였다. 직속 상사인 원로 배우 오현경씨는 매번 사고를 치는 그에게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지!” 하면서도 그를 항상 아끼고 챙기셨다. 그와 대립되는 캐릭터가 디자인실 실장(이미영 분)이었는데 매사에 철두철미 하며 탁월한 업무능력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모든 부하 직원을 실력으로 평가하고 업무에 감정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차가운 캐릭터였다. 어린 나에게만이 아니라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김성찬씨 캐릭터를 사랑했고, 디자인 실장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드라마는 IMF사태 이전의 드라마였다. IMF 이후 그 동안의 라인강 모델의 경제 정책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터져 나왔고(물론 그 근거는 다분히 결과론 적인 것들이었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물밀 듯이 밀려 왔다. ‘경쟁’, ‘효율성’, ‘유연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더 이상 우리의 수많은 김성찬 씨는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경제적인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자신의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미움 받던 디자인 실장들이 차지하게 되었다.‘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이 책에서 저자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의한) 불확실성이 우리 삶의 장기적인 윤리적, 정서적 가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미국에 [앨리 맥빌] 이라는 인기 시트콤이 있다. 한 로우 펌을 배경으로 한 이 시트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비결은 바로 현실에서 존재하기 힘든 회사이기 때문이다. John&Fish 라는 이 로우 펌을 설립한 두 변호사 John과 Fish는 ‘어린 시절의 놀이터 같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회사는 수많은 현대인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는 거의 모든 이해 관계가 배제된 순수한 만남을 즐길 수 있었다. 능력에 따라 차별하지도 않고, 머리 굴리지 않고도 즐겁게 함께 놀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는 서로 간에 끊임없는 경쟁과 결과를 강요함으로써 우리의 순수함을 앗아가고 있다. 북미 5대 스포츠 중 하나로 손꼽히는 WWE 프로레슬링 쇼의 최고 유행어가 “You`re fired!" 라는 점이 씁쓸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2) 일상(구자본주의의 문제점)자본주의의 체계가 성립되기 시작한 18세기에는 반복적인 노동, 즉 일상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반복적인 노동에 대해 긍정하는 디드로의 의견과 부정하는 애덤 스미스의 의견이 그것이다. 디드로는 저서인 [백과전서]에서 반복적 노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인간성을 함양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핀 공장의 사례를 통해 분업에 의해 생산성은 향상되지만, 반복되는 노동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노동자가 작업 통제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며 그 예로는 포드의 하이랜드 파크 공장, 윌로우 런 공장 등이 있다. 이런 논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전자는 일상적 노동 자체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나 노동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는 쪽이고, 후자는 반복적인 노동 자체에 대해 비판하는 쪽이다. 결국 이런 일상적, 반복적 노동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유연성’ 이라는 개념이 급부상 하게 된다.나는 개인적으로 애덤 스미스쟁적으로 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손 안 데고 코 푸는 것이다. 결국 이는 자유로 포장된 고도의 통제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유연성과 자유를 매개로 한 함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능시험에는 학생의 학문적 다양성을 인정하여 여러 선택 과목이 있다. 학생은 이 중 마음에 드는 과목을 선택하여 시험에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과목마다 배점이 달라 결국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학생들은 한 두 개의 과목에 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먹거리도 이런 좋은 예가 된다. 우리는 돈만 있다면 원하는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패스트푸드 음식점들은 엄청난 자본력과 마케팅을 바탕으로 길거리의 먹거리를 전부 정리해나간다. 결국 우리의 선택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KFC냐 맥도날드냐’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그럼에도 애덤 스미스는 유연성은 사람을 윤리적으로도 풍요롭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보스 산에 모인 신자유주의의 정점에 선 세계 정치, 경제 거물들도 유연성을 찬양한다. 그들은 과거와의 단절 능력, 분열을 받아들이는 자신감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런 항목들이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윤리적으로 훌륭한 것은 아니다. 이 덕목들의 기저에는 강함에 대한 맹목적 찬양, 경쟁심, 승리주의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니체의 위버맨쉬 개념을 부정적, 변질적으로 극대화시킨 아돌프 히틀러의 생각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그 표현 방법이 물리적 폭력이냐, 경제적 폭력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연성이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윤리적 가치를 지니려면 경쟁에서의 승리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배려의 정신을 수반해야 한다. 물론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성공 덕목이 무조건적인 경쟁, 즉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은 존재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경쟁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선의의 경쟁과 배려는 올림픽 정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4) 이해불가능성(현대적 형태의 노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이 챕터에서 저자는 결국 술집으로 돌아오게 된다.이 이야기를 매개로 저자가 리스크에 관해 비판하는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과장된 모험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모험성이 적다는 이유로 이루어지는 중년층 소외에 대한 비판이다.나는 저자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모험은 수많은 문학 작품, 신화, 음악, 만화 등의 필수적인 주제이다. 모험이라는 것은 리스크를 감수하고(위험이란 뜻이지만 저자가 리스크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므로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리스크라고 표기) 역동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가치 있는 행동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모험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원하는 대로 믿으려 하는 본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한 모험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모험의 리스크에 대한 감을 잃어버리고 있다. 영화처럼 포커 경기에서 마지막 히든카드가 스페이드 A여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용이 지키는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가는 왕자는 수 천 구의 시체를 밟고 넘어 가야했을 것이다. ‘성공하면 용기, 실패하면 만용’ 이라는 말처럼 모험의 리스크는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그럼에도 로즈의 경우처럼 현대인은 모험을 쉽게 행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험을 요구받는다. 그 이유는 바로 인력의 과잉 공급에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단순한 기술자로써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가 되었고, 따라서 고급 인력으로 거듭나기 위해 학력에 목숨을 걸고, 이에 따라 인력이 과잉 공급되는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철저한 실적주의, 능력중시사회, 경제적 가치 최우선 사회가 이루어졌다. 이런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한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Winner take-all markets 현상이 두드러진다. 따라서 몇 안 되는 승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날 가만히 있다는 것은 도태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노동 윤리를 '만족을 자제하고 시간을 가치 있게 사용하기 위한 자기 훈련' 이라고 정의한다. 이 노동 윤리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저자는 대표적인 문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가 묘사한 노동자는 근면하고 절제하며, 시간을 통해 자기 훈련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베르길리우스의 묘사에서 더욱더 영웅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후 피코는 노동윤리를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보고, 계획적인 경험을 통해 자아 발전을 기하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반해 막스 베버는 그의 명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만들 수 없다고 하며 자아를 부정했다. 따라서 세속적 금욕주의를 강조하며 노동이란 일종의 엄격한 자기 처벌이라고 주장했다.현대에는 피라미드식 조직 구조가 사라지고 팀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윤리도 시대에 맞게 변했다. 권위자가 사라지고 서로 평등하다는 의식이 강조되었다. 자유롭고 유연한 분위기를 의도한 것이지만 이에 따라 업무에 대해 책임지려는 사람도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아니면 어때’ 라는 기형적인 노동 윤리가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농구 경기에서 연장 마지막에 서로 패스만 할 뿐 자신이 마지막 슛을 던지려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만일 그 슛이 들어가면 영웅이 되겠지만 슛만 안 던지면 실패했을 경우의 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사실 네트워크형 팀 시스템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다수가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기 때문에 경직성은 사라지고 대신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이 보인다. 분명 권위적인 리더가 없다는 것은 자유로운 자기 의견 표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프로젝트팀의 일원이라고 가정해보자. 두 가지 상황을 설정하겠다. 첫 번째는 개인의 프로젝트 성공 기여도에 따라 팀 내에서 보수나 여러 면에서 차등 대우하는 경우이다. 이는 실상 당연해 보인다. 비록 하나의 다.
    독후감/창작| 2005.04.17| 15페이지| 1,000원| 조회(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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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자 플라톤 - 미하엘 보르트
    철학자 플라톤200301011 윤리교육 도대영목차Ⅰ. 서론Ⅱ. 본론(1) 플라톤의 정치1) 플라톤의 철인 정치에 대한 소고2) 플라톤의 교육 사상에 대한 소고(2) 플라톤의 철학1) 대화체에 대한 소고2) 이데아론에 대한 소고3)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1 그릇의 이데아2 이데아의 인식3 이데아 추구의 삶Ⅲ. 결론Ⅰ. 서론"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1995년 여름, 서태지는 우리 나라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강렬한 스래쉬 메탈(Trash Metal) 곡을 발표했다. 그 노래의 제목은 교실 이데아 였다. 이것이 내가 이데아 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idea', 아이디어의 발음을 잘못 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이데아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플라톤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플라톤의 이데아論은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였다.시간이 흘렀고 나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다시 플라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상 학자이신 윤리 선생님 덕분에 철학, 특히 서양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철학을 공부할수록 플라톤이라는 인물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었다.현대의 위대한 지성,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2000년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 哲學史에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위치를 적절히 표현한 말이다. 서양 철학의 큰 흐름인 이성주의 , 이원론 등을 정립한 인물이 바로 플라톤이다. 따라서 철학을 이야기할 때 플라톤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어떤 이야기도 이루어 질 수 없다.나 역시 이 글을 통해 플라톤을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일반 서적이나, 재미없는 리포트처럼 그의 사상, 인생 등을 정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플라톤에 대한 나의 생각 을 이야기하려 한다. 마치 그가 즐겨 사용했던 대화의 방법처럼 말이다. 그 중에는 동의의 내용도 있을 것이고, 비판의 내용도 있을 것이다. 감히 내가 어떻게 이 위대한 인물을 비판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성과 노예는 참정권조차 없었다. 재판이 이루어졌지만 재판관은 제비뽑기에 의해 선출되기 일수였으며, 모든 시민이 개인적 자질과 상관없이 모든 일에 대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설득을 통해 다수의 동의만 얻는다면 정의를 획득 할 수 있었고 이에 수사학에 능한 소피스트들이 활약했던 것이다. 그에 따른 비극적 결말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었다. 이에 심하게 회의를 느낀 플라톤은 철인 정치를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비판했다.그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그 당시에만 옳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의 정체가 확립되지 못하고 독립된 정치 영역조차 없던 시절에 그의 걱정과 비판은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철인 정치, 즉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 는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될 것이다. 그의 주장은 자질과 인격을 갖춘 사람 이 정치를 해야한다는 뜻이다. 당시는 사회가 고도화, 전문화되지 못했고, 학문도 체계화, 분류화 되지 못했다. 따라서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없던 당시에는 철학자가 가장 자질이 증명된 적절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의 주장은 현실에 반영 될 수 없었다. 고대로 정치란 이상이 아니라 힘을 가진 자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죽음을 봐도 이는 잘 드러난다.철인 정치의 한계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 나는 철인 정치라는 것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보았다. 말 그대로 철학자가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과 앞의 경우처럼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첫 번째 경우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쉽게 드러난다. 현대는 고도로 전문화 된 사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수 천 가지의 학문이 탄생했고, 우리 나라에만 약 만 이천여 개의 직업이 있다. 의사라 하더라도 치학 박사는 최신 산파술을 알지 못하고, 성형외과 전문의는 바치스타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철학자는 더 이상 자연과학과 수학에도 능하던 고대의 철학자가 아니다. 오늘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도 결국 귀족의 자제라는 시각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오늘날엔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일등들의 엘리트주의를 조장한다. 서울대 출신에 금 뱃지 달고 100억 재산을 가진 자들의 철인 정치 가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당신의 암울한 현실보다 조금 더 나은 진통제일 뿐인 것이다.2) 플라톤의 교육 사상에 대한 소고플라톤은 교육을 통해 시민 전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詩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1 시인은 자신들이 묘사하는 사물을 알지 못한다.2 모든 형식의 시는 반드시 비이성적이고 나쁜 성품을 만들어내는 경향을 띤다.{) p. 175이런 그의 주장은 옳지 않다. 당시의 시란 오늘 날로 치자면 시 외에도 영화, 연극, 소설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보자. 먼저 첫 번째 주장은 시를 기능론적 측면에서만 이해한 것이다. 안다 는 것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시에 담긴 내용이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이데아를 표상할 필요는 없다. 시는 그에 담긴 의미 뿐 아니라 운율, 표현법 자체도 중요한 문학적 요소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에서 님의 내포적 의미가 무엇인지, 갔다 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갔습니다. ,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등의 구절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감동도 느낄 수 있다. 이는 결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정서적 순화와 풍부한 감수성을 가르칠 수 있다. 두 번 째 주장은 플라톤의 편견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방호자들이나 시민의 이성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p. 174그러나 그것이 정말이라면 그들에게도 이성이 존재하는데 왜 시에 영향을 받을 것을 걱정하는가? 결국 그들의 이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무지하기에 훈육시켜야 하는 대상이라는 엘리트 사관이 드러난다. 이는 현대의 심의 라는 형태 이성중심주의는 인간을 맹목적이고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이성을 절대 가치로 인정하면서 이성적인 것은 뭐든지 용서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전쟁, 파괴된 자연, 맹목적인 서구중심주의 등이다.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결과이다. 결국 니체 이후 신은 죽었기에, 신이 죽은 이 세계에서 우리는 스스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하는 창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플라톤은 시민을 통제할 필요가 있고{) p. 177모든 사람은 본성 상 부여된 일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p 178여기서 그가 꿈꾸는 우생학적인 요소와 전체주의가 드러난다. 결국 중세 절대왕정 시절(플라톤의 표현으로 따지자면 참주정) 왕이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 것이나 플라톤이 주장하는 철인 계급이 이데아론을 근거로 통치를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은 개인의 자유, 능력이 사회적 삶에 제한적으로 반영되며 개인을 전체의 일부분으로써만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2) 플라톤의 철학1) 대화체에 대한 소고플라톤의 저작 중 대부분은 대화체를 사용하고 있다. 주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상대가 대화하는 형식이다. 플라톤이 대화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작가는 여러 가지 해석을 보인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영향이라는 것이 첫 번 째이고{) p. 52미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것이 두 번 째이다.{) p. 54또한 어떤 확고한 주장을 펼치지 않고 대화라는 상황을 묘사만 함으로써 제 3자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철학은 가르침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마지막 주장이다. 철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끝없는 추구라는 것이다. 따라서 논고를 외워서는 안 되고, 논고가 있을 수도 없으며 이는 전혀 발산적이지 못한 것이다.나는 마지막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이란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이전의 철학자들의 업적을 정리하고 주석을 다는 철학자들을 경멸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철학적 주장을 바로 그 기둥의 존재하게 하는 콘크리트 그 자체라 할 수 있다.우선 이데아론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부터 살펴보자. 플라톤은 에우티프론 에서 이데아의 전제를 이야기한다. 이데아는 객관적인 가치라는 것과{) p. 87특정 이데아를 이야기하면서 특정한 모든 것에 단일의 규정과 같은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p. 88작가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에서 주장되는 반론도 동일 표현의 다의성과 차별 화된 용법을 플라톤이 명시했으므로 옳지 않은 것이라 반박한다.{) p. 88~89즉, 작가는 특정한 것이라고 정의되어지는 모든 것에 단일한 규정, 즉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때때로 그것은 다의적인 표현이나 특수한 용법 때문에 없는 것처럼 비칠 뿐이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는 어떠한 반례도 제시하지 않는다. 어떤 공통점이 어떻게 특수하게 표현되었는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없다. 작가가 말하는 다의성을 가진 표현의 의미 중 하나가 그 표현의 기본적인 의미 외의 관계성 속에서 우월성을 가진다는 주장이나 과학에서의 특정 개념의 다의성 배제에 관한 이야기는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이다. 논점은 공통점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명이 없다. 사실 나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간단한 언어 지식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인간 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작가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이데아가 존재하며 인간이 가지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국어 사전에는 인간이란 .사람. 인류(人類) 라고 정의된다.{) http://krdic.naver.com/krdic.php?where=krdic&docid=102825그러나 이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어적으로 내린 정의일 뿐 원래부터 존재하는 공통점은 아니다. 가령 A와 B라는 두 생물이 있다고 하자. 둘 다 눈, 코, 입 등이 있고 생식기도 존재한다. 인간 이라는 개념의 범주에 눈, 코, 입, 생식기가 있어 들어간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인간 의 공통점을 언어라는 정의가 내려졌다 122
    독후감/창작| 2005.04.17| 9페이지| 1,000원| 조회(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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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대한민국사를 읽고 평가D별로예요
    대한민국사를 읽고...200301011 도대영우리는 국사시간에 고조선부터 시작하는 찬란한 우리 역사에 대해 배운다. 삼국시대의 무용담이나 고려시대의 항쟁의 역사, 조선시대의 찬란한 문화 등을 배우며 자연스럽게 우리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근, 현대사는 양적으로 제일 많이 공부한다. 하지만 양적으로는 제일 많을지 모르나 그 질적인 면에서는 결코 우수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국사 교과서는 국가에서 발간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사관이 반영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고대나 중세사와 달리 근, 현대사는 현재 우리 정부 자체에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국익에 부합하는 내용이 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이 책은 정부의 사관에 길들어진 우리에게 좋은 일침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우선 나는 이 책을 읽고 굉장히 과감한 문체에 놀랐다. 거침없는 비유와 직설적인 현정부나 수구언론에 대한 비판이 날카로웠다. 그러면서도 논리적으로 타당한 비판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역사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풍부한 사진 자료도 내용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이 책을 통해 얻은 점은 우선 알지 못했던 근, 현대사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체제 옹호적인 교과서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내용들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며 과연 우리에게 있어 대한민국 이란 어떤 나라인지 질문하고 있다.저자는 대한민국 법통부터 비판하고 있다.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라고 시작하는 문구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 권력을 쥔 친일파들이 정통성이 떨어지는 이승만 정부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만든 문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와 임시정부는 질적으로 다르다. 임시정부가 내걸었던 토지 국유화, 주요산업 국유화, 파업의 자유 등의 정책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정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를 3년의 투쟁 끝에 광복군의 군사 주권을 찾아 온 임시정부와 정부 수립 후 아직도 미군이 군사 지휘권을 쥐고 있는 현실에 비유한다.그리고 친일 잔재 청산에 실패한 것에 대해 분개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해방 직후 정치, 사회적 여건이 거의 없었던 한국에 실무를 볼 재원이 필요했다. 그것은 일제 시대에 실무를 맡았던 친일파들이었고 결국 그들은 모습을 바꾼 채 또 다시 이 나라의 권력을 쥐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 잔재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고, 오히려 반민특위 사건 등을 통해 올바른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만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또한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진보적 지식인을 사회주의자로 몰고, 좌, 우익 대립을 부추겨 결국 민족에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태생하게 한 것이다.군사정권 시절에는 더욱 심했다. 박정희는 반공을 국책으로 삼았다. 그는 반공을 이용해 자신의 체제를 굳건히 했고, 젊은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을 빨갱이 로 몰아 제거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는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라 지나친 국가주의, 집단주의에 불과하다.또한 나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민간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전쟁 전후에 정부에 의해 처리 된 사람이 100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 4.3 사건 등 해방 직후 자행된 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 동안 알 수 없었던, 은폐되어 왔던 사실들을 보며 그 자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것을 철저하게 은폐해온 이 국가, 이 정부이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 역사 교과서는 당연히 전부 진실이고 진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사관, 정부의 사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만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접하며 내가 느낀 것은 몰라서는 안 된다 는 것이었다.그리고 개인적으로 저자의 지적 수준이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보수주의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다. 저자는 보수주의와 수구, 반동, 파시스트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보수주의는 자신의 영달을 지키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구일 뿐이다. 진정한 보수주의는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고, 개혁조차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예로 이건창 선생이나, 황현 선생을 들 수 있다. 조선 말 최고의 문장가였던 이건창, 황현 등은 동학교도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그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현실체제를 더욱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개화에 긍정적이었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개화 자체가 아니라 개화파의 부박함이었다. 김옥균의 경솔함, 미국 시민이 되어 돌아온 서재필이 고종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는 등의 뿌리 없는 행동 이었다.허나 그들은 위정척사파류의 폐쇄주의자가 아닌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이건창은 고종의 부름에 계속 응하지 않다가 벼슬과 귀향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말에 귀향을 택한다. 또한 황현은 나라가 망하는 날 수치스럽다 며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으로 표현되는 보수주의에 너무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점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한 역사의 상대성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라쇼몽 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 관점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라쇼몽 은 한 사실에 대해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 그 표현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말해준다. 알카에다의 전투를 성전 이라고 부르는 것과 테러리즘 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미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고 그렇기에 역사는 골치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책 자체도 객관적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얻을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보는 다양한 관점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생각 된다.사실 근,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짧은 나의 입장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은 못된다. 이미 객관성을 장담하지 않은 채 내놓은 사실에 대해 말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히 사실 자체보다는 그 사실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대한민국은 결코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다. 사회 저면에는 아직도 수구적인 세력들에 의한 반 진보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내모는 나라, 정부 수립이후 단 한 번도 군사 지휘권을 가져보지 못한 나라, 미국에 비굴할 정도로 의존하여 반미는 입에 담지 조차 못하게 하는 나라, 외국인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일제의 악습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인정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아직도 사회 각지에서는 진보주의자들을 반 체제자, 혹은 사회주의자로 매도하여 올바른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것이 현실이다.흔히들 객관적인 역사는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역사의 객관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실 자체가 왜곡되고 은폐된, 말하자면 역사 자체를 모독한 것이다. 사실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한 가지 사실을 단순히 전하기만 하는 과정에서도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거늘 하물며 평가야 말할 바도 못 되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사료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조작되지 않은 진실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 근, 현대사에 관해서 많은 그렇지 못했다. 권력을 잡은 기득권 층, 말하자면 친일파에 뿌리를 둔 그 무리들은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했다. 그리고 그 것을 우리의 역사라 하여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 왔다. 우리는 태어난 후 20여년의 세월 동안 그 것을 믿고 의심 없이 공부해 온 것이다. 그런 우리가 당장에 주관적이고 올바른 사관을 가지는 것은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책을, 그리고 대학에서 새로운 역사 수업을 통해 하나씩 익혀나가야 할 것이다.우리는 대한민국을 성공한 나라라 생각한다. 흔히 한강의 기적 이라 하여 서구의 선진국들이 100~200년에 걸쳐 이룬 경제적 성장을 불과 수 십 년 사이에 이루었다고 자랑한다.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도 꼭 빠지지 않는 장면이 산업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적, 문화적 수준이나 정치 수준이 경제 성장에 어울릴 만큼 높아진 것은 아니다. 서구의 선진국들이 긴 시간동안 시민의 피를 대가로 민주주의, 시민사회를 얻어낸 데 반해 우리는 정당한 대가없이 그 것을 이루었다. 이루었다고 해서 질적으로 같다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어딘가 잘못된 쭉정이 민주주의 같은 것이다. 물론 5, 18 민주화 항쟁 등 직접 피를 흘린 사례도 있다. 그 것은 분명 숭고한 희생이고 용기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체보다도 왜 그 용기가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 당했는지, 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왜곡되었는지에 주목하고 싶다. 정당성 없는 권력자들은 올바른 목소리가 두려웠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4.06.08| 4페이지| 1,000원| 조회(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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