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민당과 공산당목차1.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성립(1) 국민당의 성립(2) 공산당의 성립2. 제 1차 국공합작(1) 국민당의 개조와 국공합작(2) 5.30운동3. 국공분열(1) 장개석의 북벌과 남경정부 수립(2) 국공분열(3) 공산당의 발전(4) 국민당의 포위공격과 공산당의 대장정4. 제 2차 국공합작(1) 일본의 대륙침략(2) 서안사건과 제 2차 국공합작5. 항일전쟁과 이후 중국의 상황1.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성립(1) 국민당의 성립청조를 멸망시킨 원세개의 돌연한 죽음으로 북경정부는 중심을 잃고 분열하였고 제 1차 세계대전 참전문제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에 중국의 참전군을 편성하려 한 단기서에 대해 여원홍은 의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참전을 반대하고 단기서를 파면하였다. 이에 단기서는 무력으로 여원홍을 협박하였고 단기서에 의해 북경에 들어온 안휘성의 군벌 장훈은 여원홍을 압박하여 대총통에서 물러나게 하고 국회를 해산시킨 후 군사변란을 일으키고 이른바 復?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군사변란은 곧 실패하고 단기서는 다시 국무총리에 복귀하였다. 단기서의 이러한 독주는 다른 군벌과의 대립을 격화시켰고 중화혁명단을 거느린 손문은 서남군벌이 북경정부에 대해 자주노선을 선언함에 따라 대원수로 추대되어 1917년 제 1차 광동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광동정부 역시 대립이 끊이지 않았고 서남군벌이 연합지도체제를 형성하자 손문은 대원수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났는데 손문은 이를 통해 민중의 거대한 힘을 인식하게 되고 대중의 역량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하고 민중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적 정당으로 발전시켜나갔다. 손문은 1920년 4월 환직전쟁을 틈타 광서성과 서남군벌과 연합하여 광동을 차지하였고, 11월에 복건 장주의 진형명의 군대가 광주를 재점령하자 12월말 광주로 귀환하여 1921년 4월 정식으로 제 2차 광동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북벌문제로 손문과 진형명이 갈상해로 쫓겨나게 된 손문은 소련의 지원을 예상하면서 1922년 9월부터 국민당의 당세 확장을 위한 개진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개진 준비작업에는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이대조, 진독수 등도 포함하여 개최되었다. 공산당원이 국민당의 일원으로 개진에 참가한 것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소수지식인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 공산당이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에 들어가 조직기반을 확대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리하여 1923년 1월 1일에 손문은 「중국 국민당 선언」을 발표하여 삼민주의의 실천계획과 정책을 밝혔고, 손문은 개진준비에 착수하기 전에 소련정부 대표인 요페와 공식적인 교섭을 하여 소련이 중국의 통일과 독립달성을 원조한다고 약속한 손-요페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 이후 2월 진형명을 몰아내고 광주로 돌아와 제 3차 광동정부를 수립한 국민당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본격화하면서 국공합작을 위한 준비를 진척시켰다. 소련은 중국에 군사, 정치고문을 파견하고 재정지원과 함께 국민당의 군관학교 건설을 돕기로 하였고 국민당은 소련의 주도 하에 당을 개편하기로 하였다. 보로딘을 고문으로 하는 국민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가 조직되어 국공합작과 국민당의 개조가 본격적으로 토의되었다. 이러한 준비 끝에 1924년 1월 20일 중국 국민당 제 1회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됨에 따라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국민당은 국민당의 정강을 밝히는 대회선언과 중국국민당총장을 통과시켰으며 반제국주의 대중정당으로서의 정책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新三民主義를 강령으로 채택하여 민족주의에서는 반제국주의를 명확히 하고 민권주의와 민생주의에서는 평민의 권리와 생활보장 방침을 밝혔다. 또한 당의 집행부로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여기에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이 함께 참여하여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공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조직적 기반을 확대하고 대중조직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당은 당의 조직을 위원제로 고쳐 중앙의 집행위원회로 하여금 일체의 당무를 처던 손문은 광주로 돌아와 풍옥상의 북상요청을 수락하고 11월 북상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손문은 국민과 무력을 결합시켜 국민의 무력으로 만들어야 국민혁명은 비로소 성공할 수 있으며 전국민의 대표가 참여하는 국민회의를 개최하여 평화통일의 문제를 토의하고자 국민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1925년 손문의 북상으로 국민회의 운동이 북방으로 확산되어갔고 이 과정에서 각지의 학생, 노동자, 시민 등의 단체가 결집되었다. 국민회의소집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북경으로 간 손문이 간암으로 사망함에 따라 이 운동은 구심점을 잃었으나 운동으로 결집된 역량이 있었기에 이어 상해에서 5?30사건이 일어나자 조직적 반제국주의 운동이 가능하였다.5?30운동은 1925년 2월 상해에서 일본자본으로 운영되는 면방직공장의 노사분쟁 중에 노동조합 지도자를 일본인 감독이 살해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다수의 학생과 민중이 대중적인 항의 시위를 벌였고 도중 영국인 경찰의 발포명령으로 십여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상해의 전체 노동자가 총파업을 단행하고 학생은 동맹휴학을 하는 등 상해시가 마비되었다. 이에 열강은 육군을 상륙시켜 무차별 발포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반제국주의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공산당은 상해에서 노동자조직인 총공회를 조직하였고 총공회는 학생, 상인단체와 함께 공사학연합회를 조직하여 불평등조약의 철폐와 상해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고, 국민당의 근거지인 광주에서도 상해사건에 대한 반향으로 6월 23일 10만 명이 참가하였다는 군중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홍콩에서는 16개월에 걸친 노동자의 총파업으로 도시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반제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좋은 사례로 5.30운동이 장기간에 걸쳐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의 후원과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국민당 역시 민중 속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여 대중정당으로서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공산당 또한 5.30운동을 통해 노동운동이월 공산당원 지휘하의 군함 중산함이 황포에 회항한 것을 자신에 대한 쿠데타로 본 장개석이 지휘관 등의 공산당원과 소련 고문을 체포, 연금한 중산함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붕괴되었고 이후 장개석은 당내 지도력이 강화되어 국민 혁명군 총사령으로 임명되고 군과 당의 실질적 지도자의 지위에 올라 북방의 군벌을 정벌하는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1926.7).북벌의 진척에 따라 국민정부군의 점령지역이 호남, 호북, 강서로 확대되면서 점령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이 당내에서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2월 13일 反장개석파 국민당 인사와 호남, 호북 군벌 및 공산당원들은 회의를 열어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무한에 두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장개석은 1927년 1월 3일 회의를 열어 중앙당부와 국민정부를 자신의 근거지인 남창에 두기로 하였다. 양자간의 공방이 계속되던 가운데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의에서 장개석이 장악하고 있던 국민혁명군 사령부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무한정부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자 4월 12일 장개석은 상해에서 반공적 입장을 밝힌 이른바 4?12쿠데타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장개석의 反중앙적 조치는 직계의 군사력과 광서파의 동맹을 중심으로 한 浙江諸軍의 지지와 상해상업연합회로 대표되는 강절 상공업자의 지지로 가능했다. 4?12쿠데타 이후 장개석은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웠고 무한정부는 4?12쿠데타 이후에도 한동안 국공합작을 유지하였다.(2)국공분열좌우파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1924년 6월로 등담여, 장계, 사지 등이 ‘공산당 탄핵안’의 제출한 이후부터이며 이어 6월 18일 공산당 탄핵대회가 개최되었다. 중산함 사건으로 당내 실질적 지도자가 된 장개석은 요중개 암살사건의 처리를 위해 1926년 4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북벌을 건의하였으며 이어 5월 국민당 2기 2중전회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 개선을 명분으로 ‘당무정리안’을 제출하였고 이에 따라 인사이동이 일어나 국민당 우파는 당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7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시작한 이후, 서 무장봉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에 의해 실패하였고 8?7회의를 통해 중앙의 당 노선을 우경기회주의라며 비판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당 노선을 제정하였다. 당 계획에 따라 광범위한 지역에서 농민폭동을 준비하고 추수기에 농촌에서의 계급갈등이 고조된 것을 이용하여 추수폭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호남을 비롯한 호북, 하남, 섬서, 광동 등지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나 역시 국민당군에 의해 실패하였다. 1927년 광주에서의 도시폭동을 마지막으로 농촌과 도시에서의 폭동은 끝이 났고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농촌지역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확보하기로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근거지가 모택동과 주덕의 정강산 근거지였다. 먼저 모택동이 군대 안에 공산당 지부를 두어 전군을 당의 前敵위원회가 통일적으로 지휘하도록 개편한 후 1928년 4월 주덕이 이끄는 남창봉기에서 패한 부대와 호남의 남쪽 농민이 합류하여 5월 4일 중국공농혁명군 제 4군을 조직하게 되었고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부대를 紅軍 제4군이라 명명하였다.공산당은 1928년 모스크바에서 제6차 전체대표회의를 열고 당내 우파의 노선을 맹동주의라 비판하였고 이때부터 이립삼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혁명 근거지 구축과 홍군양성 등에 기반한 농촌무장활동으로 공산당의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이립삼은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한 도시혁명론을 주장하고 홍군과 농촌혁명 근거지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6월 공황의 여파와 반장전쟁으로 혁명적인 정세가 조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장사점령을 포함한 대도시 공격지령을 내렸으나 각 도시에서의 무장폭동은 큰 손실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공산당은 회의를 열어 이립삼노선의 착오를 비판하고 홍군의 도시공격을 중지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도 공산당은 꾸준히 근거지를 확보하고 강서성 서금을 수도로 한 임시중앙정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중국 내에 남경정부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정부가 수립되었다.(4) 국민당의 포위공 한다.
《中國의 紳士》Ⅰ. 들어가며Ⅱ. 본문1) 신사의 구성과 규모2) 신사의 특권과 역할 및 활동3) 신사의 과거생활Ⅲ. 마치며Ⅰ. 들어가며신사(紳士)란 ‘신(紳)’이 관복에 착용하는 허리띠의 일종이며 ‘사(士)’는 선비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관직 경력자 및 그에 준하는 위상을 지닌 사람들과 미입사학위소지자(未入仕學位所持者)를 통칭하는 의미이다. 명?청 시대의 지배계층인 신사들은 宋代의 사대부와는 달리 그 수적인 규모도 매우 컸으며 지역사회에서 지방관의 행정공백을 보완하며 지역사회의 실제적인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본고에서는 신사층의 형성 및 구성과 성격을 살펴보고 지배계급으로서 이들이 향유했던 사회?경제적 특권, 그리고 이들에게 신사의 지위를 부여하고 관리로 진출하는데 가장 깊이 관련되어 있는 과거제도를 살펴봄으로써 19세기 중국사회에서 사회 지배세력으로서의 신사의 모습을 조망해보도록 하겠다.Ⅱ. 본문1) 신사의 구성과 규모-신사의 구성신사의 지위는 칭호?학위?관위 등을 취득하면서 자동적으로 부여된다. 학위취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당시는 과거제도가 교육수준을 입증하는 공식적 통로로써 과거를 통해 신사가 된 사람을 ‘정도(正途)’집단이라 하고 연납(捐納) 등 과거 이외의 방법으로 신사가 된 사람들을 ‘비정도(非正途)’집단이라 하였다. 과거를 통해 지위에 오른 ‘정도’의 교육수준과 사회적 지위는 ‘비정도’에 비해 훨씬 높았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비정도’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征途’집단이 신사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 첫 교육의 단계는 생원(生員)이었다. 생원은 향시 응시자격이 주어지며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되고, 나아가 회시(會試)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향시에는 합격하지 못했으나 학문적 명망이 있는 이들에게 공생(貢生)의 칭호가 주어져 생원, 거인, 진사, 공생은 ‘정도’의 신사집단에 속하였다. ‘비정도’의 방법으로서 연납(捐納)을 통해 칭호를 취득함으로서 신사가 되기도 하였다. 주로 국자감의 학생인 감생(監라 3등급으로 구분되고 각 등급의 이동은 시험으로 결정되었다. 학정의 감독 하에 3년에 1회 실시되는 세시(歲試)와 과고(科考)의 결과에 따라 생원의 등급이 이동하였고 과고(科考)는 향시에 참가할 생원을 결정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이처럼 하층 신사들은 지위의 유동성 때문에 늘 시험에 대비해야 했고 계속적인 시험의 통제 하에 있게 되었다. 세시?과고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낼 생원들을 장학생을 받는 학생이라 하여 늠생(?生)이라 하였고 늠생의 수는 제한되었다. 늠생 다음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 학생들을 증생(增生)이라 하여 늠생 결원시) 우선적으로 충원의 혜택을 주었다. 그리고 세시?과거에 응한 적 없는 신진 생원이나 성적이 부진하여 3?4등급으로 분류된 생원인 부생(附生)들이 생원층의 최하층을 구성하였다.연납으로 지위를 획득한 예감생 가운데 늠생이었다가 감생이 된 자를 늠감(?監), 증생이었다가 감생이 된 자를 증감(增監) 부생이었다가 감생이 된 자를 부감(附監) 등이라 하였고 감생 중에는 예감생 외에도 은감생, 음감생, 우감생 등이 있었다. 연납을 통해 하층신사 집단에 진입한 경우에는 예공생(預貢生)도 포함된다. 공생의 지위는 생원뿐만 아니라 감생, 평민에 의해서도 구매가 가능했다. 공생이 관직과 매우 근접한 칭호라는 점에서 연납제도 자체에 대한 반대 논의도 종종 있었고 연납을 통해 공생이 되더라도 경서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갖춘 늠생 출신만이 학관이 될 수 있는 규정이 생겨나게 되었다.상층신사는 그 자신이 관리이거나 관리로 임명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로 관리임용에 있어서 하층신사보다 유리했으며, 더 많은 특권을 향유하고 일반적으로 향촌에서의 각종 역할에서 하층신사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도?비정도의 구분 없이 하층신사는 모두 향시(鄕試)를 통해 ‘정도’적인 방법으로 상층신사가 될 수 있었다. 향시는 3년에 한번씩 모든 성도(省都:성의 서울)에서 동시에 실시되었고 조정에서 파견한 고관(考官)에 의해 실시되었다.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되어와 평민 모두 가능했지만 신사에게 기회가 많았다. 보거나 추천을 담당하는 자들이 신사들이거나 고위관리들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신사 가운데서 그 대상자를 선발하여 올렸기 때문이다. 또한 생원으로서 학생을 인정받아 학정에 의해 특별추천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고 군공을 통한 관직?관호 획득은 신사?평민에 대한 문?무관직의 임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병졸들의 장교승진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상층신사 속에서도 진입통로가 다른 다양한 집단들이 존재했고 이들을 상층신사로 구분하는 법적 규정은 없지만 이들이 소유한 명성이나 영향력, 사회적 지위 등은 하층신사와 뚜렷이 구분되었다.-신사의 규모와 그 성격변화신사층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을 토대로 대체로 정부에 대해 협조적이었고 국가 통치를 위해 유용한 존재였으나 이 강력한 특권집단은 중앙 권력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때문에 청조의 통치자들은 신사의 규모를 통제함으로서 이들 세력을 제한하였다. ‘정도’신사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과거제도를 통해 이뤄졌고 시험의 빈도와 그 합격정원을 조정함으로써 각 지역신사들의 수를 통제할 수 있었다. 여기에 보조적인 안전장치로서 연납제도를 유지시켰다. 이는 재정상의 목적보다는 ‘정도’집단과의 균형유지라는 측면에서 ‘비정도’집단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19세기에는 신사층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세기 신사의 규모는 상당히 컸고 이들 신사층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많은 사익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일반평민들의 부담을 크게 했다. 청조는 처음 ‘정도’신사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연납을 이용한 ‘비정도’신사를 양성했고 이후 ‘비정도’신사는 상당한 규모의 집단을 유지하였다. 태평봉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군비충당을 위해 군비연납을 통한 ‘정도’신사의 정원을 확대시켰다. 이로서 신사 정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권은 지방정부가 쥐게 되었다. 군비연납을 통해 확대된 ‘정도’신사의 규모는 태평봉기군 진압 후 정부의 정원 증가에 대한 엄격한 규정에도 꾸준히 증가않았다. 하지만 신사층은 그 지위를 이용, 영향력을 발휘하여 세액을 줄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신사들은 모든 역, 즉 정세(丁稅)와 실역(實役)으로부터 자유로웠다).건륭 5년(1727) 황제의 지시로 정세가 지세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면정세라는 신사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었고, 오히려 신사들에게 지세를 적게 낼 수 있는 구실만 제공하였다. 정세는 그 자체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세라는 요역의 은납화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요역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신사들은 그 요역을 면제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우면의 특권은 신사 개인뿐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허용되었다. 또한 지세 등 기타 재산에 부과된 세금은 일체 면제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신사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납세 지연의 특권 등을 이용하여 정규세 이외의 부가세를 납부하지 않고, 지세에 있어서도 그 양을 줄이거나 전부를 탈세하기도 했다. 그밖에 신사들 가운데 늠생과 국자감 정규학생인 감생은 매월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또한 정부로부터 받는 공적 보조금 이외에도 문중 혹은 신사들이 출자한 문인단체가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다.이와 같이 19세기 신사들은 다른 사회집단으로부터 분명하게 구분되는 공적인 특권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지위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신사의 지위와 특권을 이용한 이익은 실제적으로 공적 특권에 머물지 않았다. 이들의 지위 남용은 세 부담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원칙상 신사는 평민과 동일한 지세를 납부해야 하지만 실제로 세 부담은 불균등하였다. 이러한 세 부담의 차이는 신사와 평민간의 호칭의 구별로 나타나 신사들은 스스로를 신호(紳戶)?유호(儒戶)?관호(官戶)?성호(城戶)?대호(大戶)라 불렀고 반면 평민들에 대해서는 민호(民戶) 혹은 향호(鄕戶)라 불렀다. 신사들은 때로 지세를 면탈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납부를 연기하기도 했는데 이는 결국 세금을 내지 않고자 함이었다. 이에 정부도 여러 방지책을 마련하였는데 인부(印簿))와 천표(串票)) 작성에 하였다. 신사들은 지역사업의 관리에도 참여하였고 여기에도 경제적 이득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상평창의 본래 목적과 달리 진대(賑貸)의 혜택을 받는 것은 가난한 농민이 아닌 신사나 지방 무뢰배인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신사들은 자신들의 우세한 지위를 이용하여 공적 특권을 능가하는 사적 경제적 이익?혜택을 향유하였다.-신사의 역할 및 활동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신사들은 또한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신사들은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이익보호와 복지증진에 관심을 가지고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며 복지?중재?조세징수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런 기능들은 행정단위와 관계가 있었다. 하층신사들은 현 단위활동이 효과적이었고 넓은 지역 즉, 부?성을 대상으로는 대부분 상층신사들이 활동하였다. 신사들의 이 같은 역할은 정부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원래 정부관리들이 수행해야할 일이었으나 관리 수와 재정의 부족, 짧은 지방관의 임기로 인한 지방행정의 효율성 저해 등의 이유로 어려움이 많았고 따라서 신사들이 정부 활동을 대신하였다. 관리와 신사 사이의 협조는 그 사업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고 관리의 임무 처리능력이 약하거나 문제점이 누락되는 등 위기시에는 신사들의 활동영역이 더욱 확대되었다.신사들은 지역의 지도자로서 도로보수, 다리건설, 관개사업 등 실제 지역 사업의 많은 부분이 신사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와 같은 사업에 신사들은 개인 재산을 기부하거나 지역 주민이 모은 기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신사는 지역사회에서 전통윤리의 수호자 역할도 했다. 신사들은 도덕 원리를 가르치고 사례를 제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물질적으로는 서원설립에 크게 기여하고 금전?토지 등을 기증하고 그 수익을 학생들의 보조금으로 사용하였으며 공자묘나 사당의 보수 등 문화사업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신사들은 지역주민들 간의 분쟁 해결의 중재자 역할을 했지만 정부와 지역주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신사들이 지역의 이익을 대표할 때는 오히려 관리다.
캐롤 길리건의《다른 목소리로》를 읽고삶의 순환(과정)에 대한 관점이 형성되는 양상은 행위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행위자가 여성일 경우 삶의 순환에 대한 관점이 남성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별 생각 없이 남성적인 삶을 기본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성들을 남성적 삶을 기본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성들을 남성적 삶의 방식에 끼워 맞추려고 했다. 이렇게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진 각종 연구는 심리학 분야에도 적용된다. 남성적 관점을 투영하여 발달 이론을 전개한 최초 심리학자는 프로이트였고 콜버그도 남성 중심적인 인간의 발전단계를 연구한 대표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은 남성 중심의 인간 발전 단계 모형을 이론으로 정립하고 그 틀에 맞지 않는 여성의 발달 단계를 비정상적이거나 남성보다 발전단계가 떨어지는 것으로 규정했다. 남녀의 발달 단계는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이들은 남녀의 발달 단계상의 차이를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여성들은 인간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짓고 보살핌의 능력을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하는 반면 남성들의 발달단계는 ‘독립’이 핵심적 요소이며 이것은 개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기존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발전 단계를 몇 단계로 나누고 그 기준을 자아의 개인화 혹은 독립성의 정도에 두었다. 때문에 그 발전 단계에서 벗어난 여성의 발달 단계를 남성보다 발전되지 못한 혹은 미성숙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남성적 삶의 순환 단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자기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남성의 삶에 토대를 둔 발달관에서 독립, 자율, 개인화 자연권 등의 개념이 강조될 때, 남성적 삶의 순환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은 사람들간의 애착, 즉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시각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삶의 순환에 관한 위와 같은 이론가들이 여성들에 대해서도 남성들의 그것과 같이 연구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양성의 경험을 고루 포괄하는 진정한 삶의 순환이론의 성립이 가능할 것이다.여성들은 인간관계속에서 자신을 규정지을 뿐 아니라 보살핌의 능력을 기준으로 자신을 측정한다. 남상의 삶의 순환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은 양육자, 보호자, 보조자 등인데 이것은 여성 자신의 자아 규정에 미치는 인간관계를 짜 나가는 직조자로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렇듯 여성들이 남성들을 보살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경제구조에서와 마찬가지로 발달심리이론 속에서도 보살핌을 당연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의 삶으로부터 발달 이론을 구성해 나간다면 도덕 문제들이 일어나는 원인은 권리의 충돌이 아니라 책임의 충돌을 들것이며, 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맥락적이며 이야기적인 사고 방식을 둘 것이다. 공정성으로서의 도덕관이 권리와 규칙에 대한 이해를 도덕 발달의 중심에 두는 것처럼 보살핌과 관련된 도덕관은 책임과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덕 발달의 중심에 둘 것이다.인간 관계에 대한 남성 위주의 관점이 여성의 발달을 가려 버릴 수 있으며, 인간 발달 연구에서 여성들을 포함시킬 때에 인간관계에 대한 기술 또한 불가피하게 변할 것이고, 따라서 인간 발달 이론의 전반적인 구성도 달라지게 될 것이다. 길리건은 남성과 여성이 인간관계를 서로 다르게 경험한다는 사실을 11세의 남아와 여아의 도덕판단을 살펴봄으로써 알아보았다. 이들에게 콜버그가 만든 도덕성 발달을 측정할 수 있는 일련의 가상적 상황 시리즈 가운데 하나를 해결해야할 딜레마로서 제시하였다. 남아와 여아의 유아기에 하인즈 딜레마는 ‘하인즈는 자신의 아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떤 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약의 값은 너무 비싸고 하인즈는 약값을 절반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는 절망에 빠져서 약사의 가게에 침입하여 약을 훔쳤다. 그것은 옳은 행위인가 혹은 그른 행위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의 제시이다. 이를 제시하여 남녀의 인간관계를 보는 두 관점에 대해 규정하고자 하였는데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아는 하인즈가 아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약을 훔친 행위를 옳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즉 절도를 선택 후에 일어날 분쟁을 중재받기 위해 법에 호소한다. 남아는 아직 콜버그의 3, 4단계가 혼재하는 인습적 수준에 속하지만, 도덕적 딜레마의 해결을 위해 연역 논리를 이용하고, 도덕과 법을 구분하며, 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점에서 콜버그가 도덕적 성숙과 동일시하는 원칙주의적인 정의관의 이행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적인 논리와 법 체계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반면, 여아의 경우 이 계층 구조를 연결의 그물조직(network), 즉 대화를 통해서 유지되는 인간관계의 그물조직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조직하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불평등한 지배관계, 즉, 생명보다 재산이 선호되는 처사가 아니라 하인즈의 아내의 필요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약사의 부도덕성이다. 즉, 여아는 사적인 관계 속에서 대화를 통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된 여성의 맥락적, 그물조직망적 삶의 방식은 새로운 형태의 것이다. 하인즈 딜레마를 통해 남성들과 여성들이 보여주는 상이한 환상과 사고방식을 분석함으로써 그들이 각각 서열구조적 인간관계관과 그물구조적 인간관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성들과 여성들은 인간관계를 이렇게 다르게 인식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뿐 아니라, 도덕이 무엇인지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게 이해한다. 서열구조적 이해 속에서는 남들이 행위자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반해, 그물구조적 이해 속에서는 행위자 자신이 인간관계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양자의 인간관계관은 인간의 삶의 순환에 본래적인 것이며, 이것이 갈등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관을 기존의 인간관계관에 맞서는 새로운 것으로 정립하고, 양자의 독립된 가치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가 서열 구조일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지만, 그 구조가 그물의 모습을 지니게 되면 불평등한 서열성은 상호 관계성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이 두 인간관계관이 모두 호소력이 있는 이유는 인간 삶의 순환에 본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불평등의 경험과 상호 연결의 경험은 본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경험은 각각 인간관계의 다른 이상들로 여겨지는 정의의 윤리와 보살핌의 윤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자에 따른다면 자아와 타아는 평등한 가치는 지는 존재로 대우받아야 하며, 권력의 분배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회는 정의로울 것이다. 후자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도덕적인 고려에 포함되어야 하며, 그들의 필요에 적절한 응답이 주어질 것이고, 어느 누구도 소외되거나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남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한에 있어서만 우리 자신을 개별자로 볼 수 있으며, 자아와 타아를 구별하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관계를 경험 할 수 없으므로 두 인간관계관은 서로 보완적이며 인간 경험의 역설적인 진리를 반영한 다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상이한 인간관계관의 수립을 통해 남녀는 각각 자아와 도덕에 대해 다른 개념을 수립한다. 길리건은 ‘임신 중절 결정 연구’를 통해 이를 확인한다. 도덕적 결정에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수반되는데 그동안 도덕적 문제에 대해 여성들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선택과 책임의 문제가 모두 부여된 임신 중절 결정은 여성의 도덕적 판단의 인식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여성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인식의 단계를 살펴보면,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만을 보살피는 첫 단계, 첫 단계의 판단이 이기적임을 인식하고 자기비판을 통해 여성이 자신의 자아와 타아의 연결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형성되는 과도기를 거친 후 두 번째 단계에서 여성은 책임에 대한 인식을 하고 이러한 책임관은 자신에게 의존하는 사람에 대한 모성적 도덕과 결합하게 된다. 여성은 자기희생과 보살핌의 윤리를 혼동하여 자아와 타아 사이의 불평등을 받아들였음을 깨닫고, 자아와 타아의 연결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이기심과 책임의 대립을 해소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성들은 도덕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를 ‘책임의 충돌’로 이해한다. 남성들은 상호 무관심을 중요시하며 남들에 대한 의무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이에 반해 여성들은 남들에 대한 보살핌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자기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강조를 통해 자신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성 모두에게 성장이 이루어지는 때는 그들의 입장이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권리와 책임과의 화합이 이루어질 때이다.
‘필사본’『花郞世紀』의 진위 문제『화랑세기』는 1300여 년 전 김대문에 의해 저술되었다. 6년 전 공개된 필사본『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저술한 책의 필사본이라면『화랑세기』는 현존하는 최고 사서의 필사본이 되며 신라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면에서『화랑세기』의 진위여부가 중요하다 할 수 있다.『화랑세기』의 사서로서의 신빙성에 관하여 그 신빙성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견해, 위작이거나 그 내용의 허구성을 들어 이를 통한 역사의 재구성은 불가하다는 견해, 위작 또는 조작이라 단정할 수만은 없으며 위작이라 하더라도 신라사 연구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견해 등이 있다. 1989년『화랑세기』가 공개된 이래 한국사학계는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주도적이었다.『화랑세기』의 사서로서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견해에서는,『화랑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혼인과 통정관계에 대한 내용이『삼국사기』와 다르다는 점에서 위작 가능성, 후대 사람들이 신라사회를 헐뜯기 위해 쓴 악의에 찬 위작일 것이라는 추측, 『화랑세기』에 나오는 자체와 용어에 대한 비판, 서술의 사고 양식 자체의 근대적 면모,『화랑세기』전래과정의 불분명,『화랑세기』의 신빙성이『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2차 사서에서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을 제기하며 보다 구체적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화랑세기』의 신빙성을 인정하는 견해에서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서도 문란한 혼인과 통정관계가 제시되고 있다는 점,『화랑세기』는 화랑, 왕족?귀족, 왕위계승, 골품제도, 친족제도 등 신라인이 아니고서는 저술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구조적 이해를 요한다는 점, 오자나 탈자 등 존재가 오히려 위작이 아니라는 반증이 될 수 있다는 점, 『화랑세기』의 내용이『삼국사기』의 그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사실들을 전하기도 하고『화랑세기』의 내용이 더 정확한 것도 있음을 들어 위와 같은 견해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화랑세기』의 사서로서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그 내용을 재구성하면 중고시대의 화랑제도는 물론 왕위계승, 친족제도, 골품제도, 불교의 발전 등에 대한 사실을 해명할 수 있다. 또한『화랑세기』는『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것도 있다. 따라서 신라 중고시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도 인정되어야 하며, 『화랑세기』가 신라시대 신라인에 의해 저술된 책이라 본다면『삼국사기』나『삼국유사』보다 신빙성이 더 큰 1차 사료적인 사서가 될 것이다. 1989년 『화랑세기』가 공개되면서 『화랑세기』가 위작이 아니라면 그동안 연구되어져 왔던 신라사는 다시 씌어져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연구가 잘못된 것을 뜻한다. 그러나『화랑세기』의 내용을 통해 얻게 된 연구 성과가 기존의 연구 성과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오히려『화랑세기』의 발견이 지금까지의 견해의 타당성을 확인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화랑세기』는 지금까지의 신라사에 대한 연구에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전혀 다른 내용을 많이 전하고 있고 『화랑세기』가 신라 시대 당시에 신라인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는 주장을 견지했을 때, 필사본『화랑세기』의 진위여부가 그 사료적 가치와 신라사 연구의 위상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新羅의 國家 形成들어가며Ⅰ.신라사 연구의 의의Ⅱ.시대구분을 통해서 본 신라의 변천Ⅲ.사로국의 성립문제와 초기 발전Ⅳ. 육부체제의 성립과 전개Ⅴ. 신라의 발전 단계와 전쟁Ⅵ. 진한의 철산과 신라의 강성마치며들어가며三國의 초기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新羅의 국가형성이나 그 발전 단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특히 史料의 부족문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高句麗는 국가의 성립 때부터 중국의 여러 왕조와 항쟁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중국사서 속에서 많은 정보가 실려 있어서 新羅와 百濟와는 좀 다르다. 백제와 신라는 국내사서도 빈약할뿐더러 국외사서 또한 빈약하여 초기사를 복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초기 신라의 사정을 전하고 있으면서 전혀 상반된 기록을 보이는 『三國史記』 「新羅本紀」의 초기 기록과 『三國志』 「魏志」 漢傳의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하는가 하는 문제로 학자들간의 의견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있고, 정설이 될 수 있는 학설은 현재까지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문에서는 신라사 연구의 의의를 잠시 검토하고 사로국의 성립문제와 초기의 발전을 살펴본 후 신라의 국가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세력이었던 六村六部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신라 花郞徒의 기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신라의 발전 단계를 戰爭을 기준으로 하여 나누어 보며 마지막으로 辰韓의 철산과 신라의 관련성을 생각해보도록 하겠다.Ⅰ.新羅史 연구의 의의고대는 共同體的관계가 광범하게 잔존해 있고 국가권력이 지방사회의 말단인 촌락까지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여 촌락을 단위로 한 집단적 지배에 만족한 시대로 血緣的?族制的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신라의 골품제도는 血緣的?族制的인 성격을 잘 나타내주며 신라는 신라 통일기까지를 고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삼국 중에서 가장 후진 국가인 신라는 국가로서의 성립이 가장 늦었다. 그래서 고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고구려?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의 영 그리고 그 이후를 下古라 하고 있다. 즉,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시대구분에서 일치하는 것은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太宗 무열왕으로 즉위한 해인 654년이다. 이 연대를 가지고 국왕의 혈통상의 변화를 중시하여 김춘추의 즉위 이전은 국왕의 골품이 성골인데 반해 이후는 진골이라는 인식에서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시대구분을 모두 존중하여 신라사를 6시기로 구분해 보았다.제1기(B.C57~A.D356)는 신라가 성읍국가로 발족한 이래 연맹왕국을 형성하여 이를 완성시킨 시기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사로국이 진한의 동료국가들을 병합하여 통일한 시기가 되겠다. 제2기(356~514)는 연맹왕국으로서의 신라 발전기로 이 시기의 왕호는 ‘麻立干’이다. 내물마립간의 즉위를 시작으로 연맹왕국의 신라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제3기(514~654)는 『三國遺事』에서 말하는 中古時代이다. 이 시기에는 신라가 520년에 중국의 律令을 수용하여 法制化?組織化를 이루어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한 시기이다. 신분제도에 입각하여 관등제도를 만들고 정연한 신분체계로서의 골품제도를 제정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며 또한 불교를 공인하여 骨品體制的인 국가 권력을 합리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하게 한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제4기(654~780)는 『三國史記』에서 말하는 중대로 이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뒤 약 100여 년 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태종무열왕 계통의 국왕들이 거의 전제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또한 신라문화의 수준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제5기(780~887)는 무열왕 계통의 혜공왕의 죽음 이후로 진골귀족세력들의 자립성이 높아지고 왕위계승쟁탈전이 벌어져 국가권력이 쇠퇴해간 반면 지방의 호족세력이 꾸준히 성장한 시기이다. 제6기(887~935)는 전국적인 내란기로 진성여왕 3년 농민반란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이후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는 이 기간 중에 전통의 힘으로 겨우 지탱할 수 있었을 뿐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을 검토해 보면, 대체로 이 시기에 墓制나 토기 등에서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변화의 양상은 이 시기에 외부로부터의 강한 문화적 충격이 있었음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실제로 『三國志』「東夷轉」 韓條에 의하면“환제(146-167)와 영제(167-189)시기의 말에 한세가 강성하여 군현이 능히 제어할 수 없었다. 인민들이 한국으로 많이 흘러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는 바, 이 시기의 고고학적 변화상은 결국 이러한 유이민의 남하파동과 직?간접적 관련이 있을 것이며 혁거세의 박씨 족단은 바로 이 같은 정세의 변동에 편승하여 경주로 유입한 집단이었으리라 추정된다. 혁거세의 박씨 족단은 2세기 말 내지 3세기 초에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앞선 문화를 가지고 새로이 경주로 유입하여 이들을 통합시킨 것으로 추정되는바, 삼국지에 등장하는 ‘斯盧國’은 바로 그 통합의 결과물이라고 하겠다. 삼국지 東夷轉에 ‘사로국’이 辰韓 12국의 하나로 기재된 것은 바로 그러한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경주의 사로국은 南解次次雄代에 이르러 보다 비약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脫解로 대표되는 석씨 족단과 박씨 족단 간의 결합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석씨 집단은 駕洛國과 세력싸움에 패배하게 되고 결국 부근의 유력한 소국, 즉 사로국에 통합되어 들어가게 된다. 박씨 족단과 석씨 족단의 결합은 그간 辰韓聯盟體의 일원으로서 경주지역과 인근지역에 세력이 한정되어 있었던 사로국을 비약적인 발전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씨 족단은 소백산맥 철산과 관문을 장악한 채 진한연맹체를 주도하고 있었는데, 3세기 중엽에 이르러 馬韓聯盟體를 주도하던 目支國 세력이 신흥 百濟國에 의해 타멸된 것이다. 목지국의 멸망과 백제의 소백산맥 일대 진출은 그 때까지 목지국과의 우호관계를 기반으로 진한의 맹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던 김씨 족단에게는 엄청난 정세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제의 공격 가능성도 있지만 보통 몇 개의 지리적 취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6개의 촌락이 각기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고 있음과 동시에 6촌 전체가 이보다 더 넓은 범위의 community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왕위계승이 子, 女, ?, 親孫, 外孫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육촌?육부의 부계혈연자의 사람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고 하겠다. 국정은 건국 이후 5대 파사왕까지는 주로 6부에서 행해지고 점차로 그 기능이 6부 아닌 중앙부서에서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한편 육촌이 육부로 변하였다는 것과 육촌과 육부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에 대해 대체로 견해가 일치한다. 언제 육촌이 육부로 되었는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를 살펴보면, 유리 9년(32), 자비 12년(469), 소지왕대(479-489), 지증왕대(500-514)의 크게 4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본래 생활의 자족권으로서의 육촌의 각촌이 촌보다 더 큰 범위의 지역집단으로서의 community의 성격이 있으므로 해서 왕을 선출한 것으로 안다. 왕의 선출이라는 시각에 있어서는 이 촌과 community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각촌이 신라국왕의 행정조직으로 재편된 이후로는 주요 행정적?정치적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된다.2.육부체제의 성립시기와 성립요인麻立干 시기 신라의 정치체제에 관해서는 비교적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1980년대 후반에 발견된 두 개의 金石文, 즉 지증왕대의 ‘울진봉평비’와 법흥왕대의 ‘영일냉수리비’는 이 분야의 논의를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구체적인 금석문의 내용은 차치하고 두 금석문의 공통점은 6세기 초 왕을 비롯한 유력인사들이 정치를 운영해 가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이미 이 기록에서 육부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육부란 쉽게 말하면 대표자들이 모여 중요 사안을 처결하는 당시 신라사회를 움직이던 주된 단위 정치체였다. 이 기록을 볼 때 육부는 6세기 초반 처음 나타난 것이 부적으로 3성 족단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외압은 내부 족단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석씨 족단이 먼저 거세되자 박씨 족단은 아예 김씨 족단과의 경쟁을 포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기존의 관행, 다시 말해 유력족단의 대표자들의 회합과 그들 간의 합의에 의한 정치 운영 자체가 곧바로 소멸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 상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되, 김씨 족단의 힘이 강하게 미칠 수 있는 체제를 구사하게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3성 족단체제가 육부체제로 바뀌게 된 데에는 고구려라는 외부세력의 힘이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김씨 족단은 여타 족단 특히 석씨 족단을 굴복시킴에 있어 당시 신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병을 적절히 이용하였고, 이를 통해 3성 족단 사이의 세력의 격차가 현저해지자 새로운 지배체제로의 육부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고로 육부체제는 성립시부터 김씨 족단의 헤게모니 독점을 위해 기능하였으며 그 자체가 이미 김씨 족단의 압도적 우세를 반영하는 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Ⅴ.신라의 발전 단계와 전쟁이제 정복전쟁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던 이 시기를 전쟁을 통해 신라사를 국가발전단계별로 구분해보고자 한다.신라는 『三國志』弁辰傳에 나오는 弁辰韓의 소국인 斯盧國이 모체이다. 그러나 弁辰傳에서는 초기 신라사회의 구성과 발전 정도에 관한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신라의 국가형성에 관해서는 『三國史記』新羅本紀의 초기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본적인 모습을 갖춘 시기는 破娑王代(80-111)로 추측하고 있다. 파사왕대에는 閱兵을 통한 신라왕의 軍事統帥權이 비로소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전쟁수행능력의 제고에 따른 공격전쟁이 본격화된 시기이다. 신라는 농경사회에서 군사훈련의 의미를 갖는 열병과 전술적으로 연결되는 공격전쟁을 秋季 7,8월에 실시하였다. 상대적 농한기에 열병과 공격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농민에게 영농시기를 보장해 주려한 것이었다. 이는 농경사회형으로 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