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의 천황제’를 읽고2004년 4월 11일이 책을 처음 접할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책이 ‘천황’이 아닌, ‘천황제’를 다루고루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책을 통해서는 ‘천황’ 개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제’라는 제도를 중심으로 ‘천황제’라는 독특한 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관련되어질 수밖에 없는 일본의 근대사 형성 과정과 일본의 특이한 국민성, 특히 태평양 전쟁을 전후로 한 일본인의 행동양식의 당위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제도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이 책에서는 ‘천황제’를 다루기 위해 기본적으로 ‘제도’, ‘헌법’, ‘황실전범’이라는 개념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법에 대하여 문외한인 나로서는 당시 일본 법학자들의 논리 싸움이 생소하게 느껴지면서도 신기하기도 하였다. 단순한 말장난 같은 논리 속에서 앞으로 일본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 ‘천황제’가 탄생한 것인데, 그들이 그렇게 해서 탄생시킨 ‘천황제’는 세계의 역사를 뒤바꿀 만큼 엄청난 힘(혹은 파괴력)을 지닌 ‘제도’였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집단의식과, ‘가미가제’ 등으로 잘 알려진 비정상적인 충성심 등은 사회가 만들어 낸 제도로서의 ‘천황제’(천황 개인이 아닌)와 ‘국체’를 중심에 놓지 않고 본다면, 그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또한 우리는 일본이 왜 다른 동양의 국가들보다 더 먼저 근대화를 행할 수 있었으며, 왜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이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제도로서의 ‘천황제’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일본 사회 내에서의 제도 속의 천황제는 근대화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당시의 일본 사회의 중심축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일본 사회의 정신적 결집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책은 ‘천황’이 제도 안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에서부터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제도 안에서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의 뜻은 책에서 다루어졌던 ‘황실전범’이 헌법에서 독립 유해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정한논쟁에서 승리한 쪽조차도 군민공치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때 정부 내에서 군민공치의 구상을 보면 두 가지 중요한 논점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헌법의 제정이 군민협약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런 움직임이 입헌군주제를 위협하는 ‘인민정부론’까지 이르게 되자 정부는 다시금 천황을 주권자로 부각시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시급한 과제로 생각하게 된다. 비록 ‘메이지 유신’으로 ‘메이지 천황’이 일본 사회에 실질적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 민중과는 동떨어진 존재였고, 일반인들에게는 그 존재조차 잘 인식되지 않았던, 어찌 보면 그야말로 신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근대국가에 알맞은 ‘근대 군주로서의 천황상’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천황을 공가로부터 분리시켜 군주로서 자립할 것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민중과 좀더 친숙해지기 위해 천황의 대대적인 ‘전국 순행’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민중들 속에서 천황이 실제적인 군주로서의 ‘이미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이러한 실질적인 천황의 이미지를 발판으로 그들이 바라는 일본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군민공치, 천부인권을 부정하고 천황주권과 ‘국부인권’을 선택한다. 이렇게 하서 천황친정의 방침이 다시 확립되는 듯이 보였다.그러나 ‘군민공치’의 부정과 ‘천부인권’의 부정은 심각한 저항을 맞게 된다. 이것은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주권논쟁으로 이어지고, 다가올 헌법제정을 의식한 정부의 천황주권론과 민권파의 군민공치론 간의 싸움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1882년 주권논쟁이 한창이던 때에 주권재민론으로 오이시 마사미가 주장한 ‘주권론’에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최대 권력을 주권이라 한다.”고 하며, “주권은 사회 인민의 행복과 안녕을 포괄하여 이를 잘 보전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주권이 마약 인민의 수중을 벗어나게 된다면 이 이상 마음대로 자리를 떠날 수 없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으며, ‘여제’에 대한 규정은 여러 가지 이유를 근거로 부정되었는데, 첫째로, 고대의 여제는 황자가 제위하기 전 중계자 역할만을 했다는 것, 둘째로, 일본은 남존여비국가라는 것, 셋째로, 여제의 남편이 정치에 관여하여 일본국에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항하여 남녀의 지위와 관련한 논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남존여비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소극적인 입장뿐이었고, 여제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제에 대한 의견대립이 일어났다는 점 자체와, 여제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남녀 동등권론에서 찾았다는 점’, 여제와 관련한 외국 왕족과의 혼인을 인정하자는 논의가 일어난 점 등으로 봤을 때 당시의 일본 사회가 점차 남존여비 사상에서 탈피하여 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제에 관한 문제는 후일에 여자섭정을 둘러싼 논쟁에서 모순점을 드러내게 하는 요소가 되는데, 전례에 ‘여자섭정을 토대로 여자섭정을 인정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전례에 있는 여제도 인정해야 한다는 형평성의 문제는 당신의 황실전범이 가진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으로 여자 섭정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것은 인정되지 않았다.다음으로 활심전범에서 중요하게 다룬 것은 황족 혼인 범위에 관한 것이었다. ‘만세일계의 황제’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는 천황가의 입장에서 그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인범위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을 것이다. 혼인의 범위는 구체적으로 황족, 공,후작과 그 가족에 한하였는데, 이후 공,후작이라는 한정사항이 사라지고 화족에 한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앞에서도 언급한 황실과 천황 통치의 정당성 확보 차원에서 ‘혈맹의 귀종성’이 문제되어 논란의 대상이 된다.이후 황실의 혼인범위에 관한 문제는 이왕가의 왕세자와 일본의 왕녀의 혼인 문제에서도 걸림돌이 되어 황실전범이 수정되어 증보되기에 이른다. 메이지 헌법과 함께면서 궁중, 부중 일체론도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근대화를 지향하던 일본 사회가 천황이라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안고 가기 위해서 얼마나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계속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모순 속에서도 이러한 법이 채택된 이유는 당시의 일본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은 동양에서는 가장 먼저 근대화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근대화의 정도와 사회의 발전 정도는 근대 서구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낙후되어 있었고 서양을 따라 잡아, 불평등한 서양 세계와의 조약 등을 개선, 일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당시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세계의 대세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정체성 확보의 노력도 근대화의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지조개정이나 사유재산과 같은 서양의 근대 법리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근대화의 상징, 민주주의의 정반대 개념인 통치권의 독점은 일본에 있어서 천황의 권력 독점과 관련하여 매우 모순되고 예민한 문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천황이 순수하게 공적인 존재’라는 서양식의 논리를 따라야 했다.이노우에의 ‘관=황’이라는 논리에 반대하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제실론’에서 황실의 권위를 정치적 권력에서보다 정신적 권위에서 찾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지향해야한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시라스형 통치론과 현실의 황실과 정부의 관계에 있어서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고와시는 자우민권운동에 대항하여 천황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시키는 헌법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쿠자와의 ‘제실론’을 반대하였다. 이것은 이노우에가 제시한 교육칙어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교육칙어가 종교상, 철학 상의 논쟁에 의해 황실의 권위에 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심했으며, 내용은 물론 그것의 발표 방식에서도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천황이 직접 교육칙어를 발표한 것은 ‘사회 속에 군주’의 성격을 부여한 것으로 신기제전 문제와 함께 이노우에가 생각한 ‘시라스형 통치(공적인 존재로서의 천황)’와도 모순되는 것이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상당한 지출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황족의 신적 강하의 필요성을 개기로 황실전범에 대한 증보가 필요했으며, 1904년 성씨를 하사받아 신적으로 강하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작성했다.메이지 이래 한국의 병합에 외교적, 군사적으로 큰 공을 들이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한국을 병합한다. 그 후 일본의 한국 황제 일가를 ‘왕족’으로 그 친족을 ‘공족’으로 칭하였는데, 1916년 이왕세자와 황족여왕 마사코와의 혼인 문제와 관련하여 제도적인 미비점을 드러내게 된다. 황실전범에서는 ‘황족의 결혼은 동족, 또는 칙지에 따라 특별히 인정된 화족에 한한다(제 39조)’는 규정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원칙상 이왕세자와 황족 여왕은 결혼할 수 없었다. 때문에 황실전범의 개정이 필요했고 1918년 ‘황족 여자는 왕족, 또는 공족에게 시집 갈 수 있다’는 황실전범의 증보가 공포되었다.황실 제도를 정비함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었던 황실전범은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성격상 근대적인 법리와는 맞지 않는 전근대적인 ‘천황제’ 자체가 가진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황실전범에 포함되지 못한 재판에 관한 조항에 있어서도 ‘모든 인간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재판에 관한 조항은 근대 법제에서는 항상 그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황실 자체가 인간이 아닌, 신으로 규정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황실의 범죄 가능성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고 있다. 이것은 황실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 보는 비현실적인 관념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인 것이다. 이외에도 황실의 혼인범위에 대한 제한에 있어서도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급하게 만든 흔적이 보인다. 때문에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의해서 개정되거나 증보되기도 하는 것 같다.6 . 새로운 황실상1903년 포츠머스 강화 조약 체결은 러일전쟁으로 상당한 피해와 물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일본 국민들을 폭도로 만들었다. 사실상의 총력전으로 막대한 희생을 감내한 일본인들에게 전쟁 배상금을 기대할 수 없다는 내용의 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