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을 껴안아 조화를 이루다 - 고구려 문화1. 들어가며나는 ‘고구려’를 떠올리며 광활한 영토와 그 당시의 국력을 생각하고는 곧, 한숨을 쉬곤 했다. 고구려만 망하지 않았어도……. 그러나 고구려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특별히 생각하면서도 고구려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고구려 문화에 대한 총론을 쓰게 되면서, 나는 이를 통해 고구려 문화에 대한 나의 왜곡된 생각들을 수정하고 몰랐던 사실을 보탤 수 있었다.단지, ‘고구려’하면, 큰 영토를 획득한 광개토대왕만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던 지난날을 청산하며.2. 고구려를 보는 시각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계를 해석한 틀을 가지고 우리의 삶과 미래를 규정짓기 쉽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문화를 ‘한의 문화’, ‘정의 문화’, ‘은근과 끈기의 문화’ 등의 표현으로 불러왔는데 이것은 우리가 만든 표현이라고 보기 힘들다. 일본이나 중국인들은 우리를 타율적이고 사대적이고, 모방을 잘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민족이라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은 근거가 없으며, 실험이나 검증작업이 미흡한 잘못된 결론이다. 남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비하하는 해석은 지양해야 한다.흔히들 고구려를 군사동원체제에 능숙하고 약탈경제를 영위한 정복국가로만 알고 있다. 한마디로 문화가 천박한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고구려의 적대국이었던 중국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고구려 문화는 다양성 있고, 매우 개방적인 문화였다. 세계의 여러 곳에서 살았던 민족이 모였던 만큼, 다양한 생활과 문화를 누렸고, 고조선과 부여의 전통을 이어받아 출발부터 문화적인 성숙함이 있었다.3. 고구려의 건국문화를 말하기 전에 먼저,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살펴보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찾으려는 고구려인의 노력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은 말하고 싶은 내용이나 후손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를 가장 적절하고 기질에 맞는 표현을 통해서 나타낸다. 특히 고구려처럼 항상 주변의 종족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신화는 뭔가 특별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몽의 건국신화는 극적이고 신기에 가깝다. 주몽의 건국신화와 과정은 고구려 문화가 하늘을 숭배하는 유목문화집단을 주축으로 ‘하백’으로 상징된 토착집단과의 결합에서 성립된 문화임을 상징한다.4. 고구려의 영토와 자연환경고구려는 넓은 영토와 다양한 자연환경을 가졌다. 자연 환경과 땅은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고구려는 연해주와 흥안령의 대 삼림, 요동 평원, 강, 초원, 호수, 남쪽의 비옥한 농토 등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환경도 다양했다. 이에 따라 식생대도 아주 다양했는데,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경제형태나, 거주하는 종족들과 그들의 언어 관습도 역시 다양했다.이렇게 고구려는 동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수렵 삼림 문화’, 동 몽골과 북방 방면의 ‘유목문화’, 중국의 ‘한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 남방 문화’, ‘한반도 남부 문화’ 등이 모여 또 다른 하나의 문화를 형성한 것이었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다양한 자연환경과 문화, 그리고 색다른 종족들이 하나로 모인 곳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5. 말 타고, 배 타고, 자유로운 민족우리 민족은 여러 다른 지역에서 출발하여 오랫동안 이동을 한 끝에 한 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민족이다. 멀리 북방시베리아에서 연해주를 거쳐 들어왔고, 바이칼 지방에서 한 무리가 남진을 시작했고, 몽골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도 이동해왔다. 가장 중심세력이었을 그들은 초원과 대 산맥, 강 그리고 사막과 평원을 통과하여 이 땅에 닿았다. 화북에서도 들어왔고, 저 멀리 남방과 일본열도에서도 배를 타고 험난한 바닷길을 헤치며 들어왔다. 이렇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온 사람들이 바로 우리민족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이어받은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 인들은 끝없이 너른 만주벌판에서 말을 달리고, 동해와 황해를 자유로이 항해하였다. 이러한 기마 민과 해양 민의 피와 문화가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앞에서 말한 대로 고구려 인들은 세계의 여러 곳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생활과 문화를 누렸었다. 또한 이동하면서 숱한 사람들과 다양한 자연환경과 문화를 보고 체험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을 존중할 줄 알았고, 다른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할 줄도 알았다. 많은 종교가 들어왔고, 또 차별 없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러한 문화적 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6. 고분 속의 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 문화의 다양성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불교적?도교적?전통 신앙적 요소가 한 공간에 골고루 표현되어 있다. 표현양식도 한족, 북위, 남조, 중앙아세아 등 여러 문화의 요소가 동시에 표현되고 있다. 또한 외국인들도 여러 번 등장하고, 다양한 소재들이 차용되어 고구려의 문화가 국제적임을 느끼게 한다.7. 고분 속에 나타난 고구려 인의 세계관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 인들의 사상과 정신을 담고 있어 건국신화 내지 신앙과의 관련성이 깊다. 천손 민족을 표방하는 고구려 인에게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나 지하공간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하늘(天)을 재현한 것이었다.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여러 종류의 수렵도와 씨름도가 포함되어 있고, 역사 등 현실적인 소재들이 화려한 색상과 거침없는 붓길로 역동성 있게 표현되었다. 벽화 속에는 인면조?일각수 등 반수 반인의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하늘을 나는 신선들과 인간들, 동물들은 화려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사물과 사건은 운동하고 있으며 다양하다는, 고구려 인들의 인식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모든 것을 하나로 인식하는 공존과 조화의식은 벽화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벽화 속에는 신인의 존재가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인간은 짐승 혹은 신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어 인간과 신의 구분이 때로는 모호하다. 이는 신인의 존재를 설정하여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짐승과 인간 등 대립적이고 경쟁적인 관계를 없애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합일과 조화를 지향하는 고구려 인들의 우주관이 작용한 탓이다. 고분 안을 하나의 우주로 설정하고, 땅의 세계와 하늘의 세계는 구분하여, 각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를 설정하였다. 이것은 또한 고구려 인들이 우주와 인간세계를 질서화 시키고, 사물에 대한 합리적인 정신을 소유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소재 면에 있어서는, 소재를 다양하게 창조하고, 빌어 온 소재도 자유롭게 변형시켜 사물에 대한 통념을 깨뜨리고 있고, 동일한 소재라 해도 고분에 따라서 변형한 것을 보아 그들의 창조적 예술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소재와 주제라 할 지라도 전체적으로 일관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수정’에 보내는 남녀의 찬사- 홍상수 감독의 ‘오!수정’어둠 속에 떠 있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동안 오로지 그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 수 있는 시간은 즐겁다. 관객의 입장으로 감독이 연출해 낸 풍경을 감상하는 일이란 아주 쉽고 편안한 유희인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은 그런 영화적 취향을 가진 관객들의 뒤에 서서 집중이 될 만하면 뒷통수를 한 대 때리곤 할 그런 영화다. ‘이제 그만 감정에서 헤어 나와 상황을 똑바로 보시지.’ 하면서.관객으로 하여금 극중 인물과 동일한 정서적 체험을 느끼게 하기를 포기한 이 영화는 화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흑백 화면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영화의 흑백 화면은 낯설음을 준다. 마치 기록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낯선 화면 설정은 영화의 주제와 연관된 사실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에 적절하다.대부분 정지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객관적 시점 하의 카메라도 사실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치 창문처럼 전방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가능한 한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는 기법. 감독의 이러한 앙큼한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의미심장한 세부사항들을 스스로 발견해 새로운 영화적 시선을 얻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영화 속에는 감독의 철저한 사상이 깔려져 있다. 카메라의 객관적 시점은 그대로 감독의 시점이며, 이러한 객관적 시점이 말하지 못하는 편집자적 논평은 나누어진 시퀀스와 짤막하게 처리된 자막으로 다루어져 감독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영화는 재훈이 ‘수정’을 기다리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온종일 기다리다’라는 자막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지루하게도 ‘수정’을 기다리고 있다. 몰래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 침대의 쿠션 상태는 괜찮은지 주도면밀한 검사를 하면서 그 철저히 은폐된 공간 속에서 ‘숫처녀’ 수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면은 바뀌고, 영화는 수정과 재훈이 처음 만난 장소로 시?공간적 이동을 한다.‘어쩌면 우연’이라는 자막과 함께 제시되는 이 장면부터는 재훈과 수정가 만나게 되는 과정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그리고 우연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여기에서 영화감독 영수는 (본의 아니게) 그 둘 사이에서 가교적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수정과 재훈을 만나게 하고 같이 영화작업을 하게 한 장본인이 그인 것이다. 그렇게 진행된 그 둘의 관계는 정사의 약속 날짜를 앞둔 수정의 망설임으로 ‘매달린 케이블카’처럼 잠시 멈추어진다.여기에서 다시 장면은 바뀌어 ‘어쩌면 의도’라는 자막과 함께 수정과 남자가 처음 만나게 된 장소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이 장면은 앞서 제시한 장면의 시간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황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앞의 장면들에는 없었던 장면들(재훈이 돈을 내는 것을 수정이 지켜보는 장면, 수정과 친오빠와의 성적인 관계, 수정과 영수와의 성적인 관계, 영수가 카메라감독에게 맞는 장면, 재훈과 다른 여자와의 키스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가 하면 아예 다른 것(수정과 재훈이 나누는 몇몇 대화들)도 있다. 여기에서 수정은 앞의 장면에서와 같이 수동적이면서 정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갑에서 꺼낼 수 있고 비싼 카메라를 소유한 남자에게 호감을 느껴 영수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어보는, 내숭에 가려진 적극성을 가지고 있는 여자이며, 친오빠와 영수와의 성적인 접촉에 선을 둘 만큼 어느 정도 남자의 본능과 심리를 꿰뚫고 있는 여자이며, 카메라 감독에게 맞고도 허풍을 떠는 영수를 속으로 조소하고 넘어가 줄만큼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여자이다. 이러한 그녀가 남자와의 정사를 앞두고 고민에 빠진 채 케이블카를 탄다. 그러나 정지된 채 매달려 있는 케이블카 안에서 그녀가 우는 아이를 달래는 아주머니로부터 아이를 받아 안고 나자 케이블카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이를 바라보던 수정의 미소는 재훈을 우는 아이 달래주듯 달래주겠다는 뜻을 담고 있기라도 한 듯 자못 의미심장하다.수정이 탄 케이블카가 다시 올라가게 되면서 또 다른 케이블카가 내려오고, 두 케이블카가 잠시 마주쳤다가 비껴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짝만 찾으면 만사 형통’이라는 자막이 뜬다. 이것은 수정과 재훈의 정사와 그 후 비껴 가게 되는 두 남녀의 관계, 즉 ‘우연’과 ‘의도’의 비타협적인 관계를, 그 어찌할 수 없는 엇갈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다시 장면은 바뀌어 수정을 기다리던 재훈과 수정의 정사씬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은 이어진다. 정사가 끝난 뒤, 수정은 처녀막 파열의 흔적을 보이며 재훈에게 ‘처녀’임을 입증해 보인다. 이에 그 둘은 육체적으로 완전히 결합되었다는 관념 아래 서로 안고 행복감에 빠져든다. 남자는 처녀와 관계를 맺었다는 만족감에, 여자는 남자에게 순결성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에. 그러나 그 둘의 마지막 포옹 장면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순결을 상징하는 하얀 잠옷을 입은 수정을 재훈은 뒤에서 안고 있는 것이다. 결국 수정의 등을 안고 있는 재훈은 수정의 앞을 보지 못한다. 그는 그녀의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폭력적인 남성을 위협하는 독화살안드레아 드워킨의 소설 ‘신에게는 딸이 없다’에는 한 여자의 깊은 내부로부터 건져 올려진, 피에 물든 통한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 그리고 삶에의 용기가 담겨져 있다. 작가 안드레아는 아홉 살에 강간당한 후 많은 남자들에게 유린당했던, 보통 여자라면 꺼내 보이기 쉽지 않을, 가슴 밑바닥의 기억들을 끌어 올려 독자들 앞에 펼쳐 놓았다.공포에 질린, 과격한 그녀자서전과 비슷한 이 소설 속에는 작가의 이름과 동일한 인물이 존재하는데, 작가는 소설에서 그 인물이 가상의 인물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임을 떳떳이 밝힌다. 그녀는 나이와 연도를 기록한 일기 같은 형식으로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며 내용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이 때의 생각과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정연히 나열해 놓은 연대기 형식이 아니다. 이러한 독특한 서술방식은 성공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녀는 짤막짤막한 문장 속에 독소를 집어넣어 독화살을 쏘듯 하고 싶은 말들을 마구 쏘아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 속의 문체와 문장들은 그녀의 과격한 의식세계를 보여주고, 두서없이 나열되는 짧은 문장의 호흡 속에는 강간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담겨져 있다. 이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고통을 느끼게 한다.한 발작 물러나 바라보기아홉 살 때 혼자 극장에 앉았다는 이유로 성인 남자에게 당한 성폭행으로부터 시작해서 거리에서 수없이 당한 남자들의 야만적인 공격과 폭행들, 그리고 그에 따른 공포와 환멸, 안드레아는 그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방랑자의 밤 속에 추위보다 더 추운 고통을 받으며 굴욕을 느껴야 했던,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강요하는 남편에 의해 한층 더 큰 상처를 입어야 했던 그녀는 회색 시멘트 위에 피를 흘리고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삶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끝내 살아남았고, 소설을 썼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린다 마르치아노라는 포르노 배우의 ‘목구멍 깊숙이’ 라는 영화는 그녀에게 개인적인 불행의 원인을 바로 볼 줄 알게 하는 넓은 시각을 깨우쳐 준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폭력이 개인의 운명이 아닌, 사회 구조 속의 보이지 낳은 조작임을. 이런 깨달음이 그녀를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던 것이다.여자, 폭력의 조건그녀는 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폭력이 공기 중에 난무한다. 상징도 아니고 은유도 아니다. 그것은 두텁고 운치 가 있다. 공기는 폭력으로 차있고 네 머리 주위에서 딱딱 소리를 낸다. 그러면 너는 집안에 틀어 박혀 있던가 밖으로 나간다. 안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딜 수 있 는가, 아니면 바깥 거리를 좋아하느냐에 달렸다.」낮에 자고 밤에는 깨어 있어야 하는 상황, 어둠 속에서 거세게 문 두드리는 소리를 공포에 떨며 들어야 했던 그 공간 속에서 그녀는 폭력과 억압을 처절하게 경험 했다. 어떻게 그런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는지 의문스러우리만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에게서 끊임없이 성교를 강요당했다. 그녀에게 성교를 요구했던 그 모든 남자들은 자신이 한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여자 혼자 사는 집 문을 두드리면서, 여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밥을 요구하고, 또 그 여자에게 당연하다는 듯 성교를 강요하면서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 속 남자들은 폭력을 즐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그녀의 소설은 이렇게 자신이 성적으로 우세하다고 생각하며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거만한 남자들을 고발한다. 그가 적어도 여자라는 존재를 자기와 같은 한 생명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폭력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녀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인간’이 아닌, 단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여자’란 폭력을 정당화해 주는 하나의 조건과도 같은 것이었다.「신은 남자들에게 가슴을, 정신을 넣어 주는 걸 잊어버렸다. 남자들은 전사정신이 나 명예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그들은 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바보 멍청이 들이다.」그녀는 남자들을 싸잡아 ‘약자를 못살게 구는 바보 멍청이’라고 표현한다. 문을 모두 잠근 채 안에서 자고 있어도 들어와서 어떤 심한 상처라도 입힐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여자들에게 행해지는 남자들의 행동은 모두 강간이다. 너무 남성을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남성에 의해 폭력을 당한 피해자로서 그녀의 이야기는 절실하고 진실하다.화내는 약자의 글쓰기그녀는 피해자로서 글을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토로한다.「책을 쓰려면 얘기를 지어내야 한다. 그러나 난 얘길 지어내기가 두렵다. 현실에 서는 모든 것이 증발해 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다. 네 몸에 새겨진 것 외에는 없다. 너는 빌어먹을 보이지 않는 유령이다. … 난 이야기를 지어낼 수 없다. 얼마 후면 뭐가 피고 뭐가 잉크인지 구별 못 할 테니까. … 궤도를 벗어나 면 길을 잃는다. 기억할 수만 있다면 정확해야 한다. 대부분은 기억할 수 없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 시점에서 그들이 단숨에 해치웠다는 말을 할 방법은 전혀 없다. 네게 강요하는 남자를 묘 사는 할 수 있지만, 그가 네게 강요했다는 말은 할 수 없다.」그녀는 이미 여자가 쓴 강간에 대한 이야기는 힘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가 한 강간에 대한 묘사도.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다른 각도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그녀의 강간 경험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파헤친다.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빠르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에게 행해지는 성폭행과 성추행을 그녀는 아이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삽입’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더 먼저 따지는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그녀는 견딜 수가 없다. 그녀는 기억을 헤집어 어린 자신이 받았던 정신적인 고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자처럼 생겨먹은 사람만 보이면 가차 없이 뒤따라가 성폭행을 하던 거리의 남자들에게도 그녀는 희생물이었다.그러나 시멘트 위에 흘린 피를 보며 그녀는 자유를 생각한다. 뉴욕행 버스를 타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시’를, 그리고 ‘자유’를 갈망했는지는 그녀의 청소년기가 말해준다. 여자의 ‘약함’을 이용하여 폭력을 가했던 남자들에 의한 상처는 그녀에게 분노 그 자체였다.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편의 변태적 성교행위를 참아야 했던 아내로서의 참담한 심정까지... 그녀는 끊임없이 남자들에게 화를 내고 그들을 질타한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독단적이면서도 열려있다. 그녀의 글을 읽었을 때 꾸며진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는 척하고, 고고하게 보이려하고, 글 속에서 장난을 치고 싶어하는 작가의 본능을 멀리했다.그녀의 언어는 은유와 직유의 차이를 부정한다. 그래서 그녀의 언어는 그녀 머릿속과 가슴속에서 마음껏 활개치고 있는 생각과 감정들을 그대로 쏟아 낸 듯한 신선함과 열정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그녀의 사상과 감정을 생생히 나타내기에 적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강간’이라는 폭력을 아주 가깝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녀는 그것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시치미 떼듯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남자들의 항변이 결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호소한다.「미끼가 이론을 만들었다. 응용법을 발견했다. 그것을 적용한다. 미끼가 그것을 써 내려갈 것이다. 말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피로 기호를 만들 것이다.」강간은 힘의 문제그녀는 강간을 섹스가 아닌 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우리가 성적 쾌락의 범위를 넓히면 의식 속에서나 실생활에서 사실상 강간을 몰 아낼 수도 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섹스본능이 있다. 그리고 그 본능은 태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식본능으로 여겨지며 당연시되어왔다. 문제는 공격적인 섹스마저 여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작가는 이러한 여자들의 익숙해진 의식을 꼬집는다. 여자들은 남자로부터 섹스를 ‘당하며’ 끊임없이 아이를 낳는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공격성이 생식본능이나 여자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명’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아이를 낳아 줄 여자에게 공격적으로 섹스를 요구하는 것, 이것은 여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공격적인 섹스는 생명 탄생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오랜 기간 남성우월주의는 남자들에게 공격적인 섹스를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서부터 여성의 성적 억압은 시작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강간에는 여자들이 겪어 온 성적 억압과 남자들이 고수해 온 성적 공격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불교의 자아관 에 대한 나의 생각나에게는 가끔 나 를 인식하고 싶어질 때 일기장을 펴보는 습관이 있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일기장을 펼치는 순간, 일기장 가운데 매달린 흰색 끈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굳건히 가르고 있다. 그리고 어제의 나는 난삽하고 산만한데 비해, 오늘의 나는 늘 백지 상태다. 나는 그 백지인 오늘의 일기를 채우기 위해 오늘을 떠올려 보지만 떠올려지는 오늘은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늘의 나는 왜 항상 그렇게 공허한가. 그리고 늘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백지 위에 흩어지곤 하는가. 나는 본연의 나 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애써 생각들을 정리하려 하지만 그것은 또 어느 새인가 나 에서 탈피한 또 다른 무엇이 되어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이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 사이에서 나는 변화 를 느낀다. 변해가고 있다는 자각만이 요즘 내가 가진 나에 대한 유일한 자각일 것이다.내가 일기장을 펼치곤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 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안정을 찾고 싶기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생각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표류하는 배처럼, 나는 내 감정과 욕망이 일으키는 물결을 따라 흔들리며 살고 있다. 좀 더 깊이 있고 깨어있는 생각을 하며 살 수는 없는가.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생각들을 이끌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가 너무 가벼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자문해 본다. 너의 편견과 생각에 갇힌 채 사람들을, 사물을,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나는 대학에 들어 와서 지금까지 나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왔다.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특성, 즉 원만하지 못한 대인 관계와 편견으로 가득 찬 세계 인식...나는 내 그런 성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대학에 갓 들어왔을 때의 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다. 이것이 내가 가진 딜레마의 첫 번째 이유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는 자각. 나는 내가 바라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 변화된 세계 속에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며 내 가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나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은 올바른 것인지. 그래서 나는 참 자아 를 깨닫기 위해 불교의 자아관을 살펴봄으로 해서 나의 자아 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불교의 근본불교는 처음부터 무아 를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후세에 대승불교에서도 강조된다. 무아(無我) 는 자아를 아주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무아 는 아 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아의식 가운데 있는 아집 같은 성격의 것들이 없어진 상태인 지(知) 를 주장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번뇌에 속박된 자아를 식(式) 이라 하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아를 지 라고 부르는데, 식 을 지 로 바꾸는 일이 바로 선(善) 이다.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 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가 남을 의지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한 서로 서로 의지해서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것이라도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해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저 것이 있으므로 이 것이 있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명백히 자기 혼자서 생존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인연에 의지하여 생겨나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명백히 혼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 혼자 라는 것은 단순히 혼자라는 것이 아니라 생생히 연기의 이법 위에 움직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혼자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혼자 는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가장 중요하고도 귀중한 존재이다.불교의 기본적 교리를 나타내는 말로써 무상(無常) 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다분히 감상적인 염세주의에서 나온 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무상 이란 끝없이 쉬지 않고 변천하면서도 활발하게 약동하는 양상을 표현하는 아주 적극적인 뜻이 들어 있다. 태어나서 시시각각으로 늙고 병들어 죽는 인간, 대자연의 삼라만상, 심지어는 생멸하며 끊임없이 변천하는 무상한 존재 속에는 진보와 발달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변하여 바꿔지고 달라지는 모든 것 가운데서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라 는 가르침을 주셨다. 현재에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피하려 하지 말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진지하게 맞서서 성의를 다해 정열을 기울여 그것을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진 이며, 주어진 환경에 전신 전력을 다해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무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내가 일기장을 펼칠 때 마다 오늘의 공허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오늘의 내가 무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 이란 이렇듯 가장 적극적으로 인생을 사는 안목이라 볼 수 있다. 오늘을 보람차게 힘껏 살았다는 만족감이야말로 삶에의 기쁨과 안심을 안겨주는 것이다. 보람찬 오늘을 살았다면 오늘의 내 일기장은 더 이상 공허한 표정을 짓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