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타고라스』 요약소크라테스가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프로타고라스와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힙포크라테스라는 청년이 날이 밝기도 전에 소크라테스를 찾아왔다. 힙포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지혜를 얻고 싶지만 그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을 프로타고라스에게 소개시켜주기를 부탁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엔 힙포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서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며 막연한 기대만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힙포크라테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프로타고라스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려는지, 무엇이 되기 위해 그에게서 지혜를 얻으려는지, 프로타고라스의 지혜가 어떤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힙포크라테스는 적잘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프로타고라스를 찾아가려는 의도가 경솔했음을 깨닫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상업적으로 학문을 이용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영혼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이 프로타고라스의 집에 동행하여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한다.프로타고라스가 묵고 있는 칼리아스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소피스트로 알고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 했다. 본인들이 소피스트들이 아니며 프로타고라스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목적을 밝히자 그때에야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안에는 칼리아스와 파라로스, 카르미데스, 쿠산티포스, 피리피데스, 안티모로이스 등 많은 사람들이 프로타고라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프로타고라스의 앞을 막지 않으려고 우스꽝스러운 대열을 만들며 프로타고라스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히피아스, 탄탈로스, 아가톤, 알키비아데스 등의 훌륭한 청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힙포크라테스가 그에게서 지혜를 얻어 자질이 뛰어난 사람으로 이 나라에서 이름을 떨치길 원하고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해 대화할 것을 청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소피스전보다 훨씬 슬기로워 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면에서 더욱 슬기로워진다는 것인지 프로타고라스에게 묻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힙포크라테스가 원하는 학문 즉, 국가나 사회를 위한 정치 능력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능력은 직접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 근거를 제시한다. 현명한 아테네인들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전문가의 의견만 듣고 나라의 일반적인 일들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은 가르쳐 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명한 페리클래스의 경우에도 가장 소중한 지혜를 직접 아들에게 가르쳐줄 수 없었고, 다른 누구도 그에게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을 예로 든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덕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소크라테스는 이야기한다.프로타고라스는 신화 이야기를 시작한다.에피메테우스와 프오메테우스가 지상의 생명체들이 태양 앞에 설 수 있도록 종족마다 제각기의 재질을 나눠주기로 했다. 에피메테우스가 재질을 나눠주면 프로메테우스가 이를 검사하기로 했다. 에피메테우스는 한쪽이 강하면 다른 한쪽은 약한 방식으로 각 종족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재질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계절에 순응할 수 있도록, 먹이사슬에서 종족이 끊이지 않도록 다양하게 능력과 제한을 두어 태양 앞에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에게 그 능력을 다 나눠준 바람에 사람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했다. 이에 프로메테우스가 헤파이스토스에게서 불과 지혜를 훔쳐 인간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감금당하게 된다. 인간들은 불과 지혜로 도구를 만들어 생명을 유지하지만 부족한 면이 있어서 다른 동물들에게 곧잘 잡아먹혔다. 그래서 인간들은 한데 모여 서로 의지하며 생명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정치술이 없던 그들은 충돌하게 되고 결국 다시 흩어져 종족이 멸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에 제우스가 헤르메스에게 ‘정의’와 ‘분별’이라는 덕을 인간에게 고루 나눠주라고 명령한다. 이리하여 모든 인간은 나람으로서 지녀야 할 덕성의 결여 즉, 부정하거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노여워하고 징계를 가하려 한다. 이는 덕성은 마음가짐과 배움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프로타고라스는 말한다. 옳지 못한 사람을 징계하는 것도 미래에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며 가르침으로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절제와 경건과 같이 누구나 갖추어야 할 덕성이 있다면 모두들 이 덕성을 배우고 행하려 노력한다. 제도나 법을 통해 이러한 덕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징계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이 은연중에 사람들이 덕성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프로타고라스는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이에게 이러한 덕성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또한 아이들을 고상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선율과 화음 등을 가르쳐 행실이나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고 했다. 이러한 것이 ‘바로잡음’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인간의 덕성에 많은 배려를 하고 있음을 프로타고라스는 밝히고 있다. 또한 프로타고라스는 덕의 기준이 낮다는 점을 설명한다. 훌륭한 아버지에게서 저능한 자식이 나오는 것도 누가 더 낳고 조금 뒤떨어 진다의 문제일 뿐이며, 소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보다 유능한 사람이 나오는 것이라며 모든 이들이 자질 곧 덕성을 고루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한 가지 의문점을 던진다. 덕이라는 것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러 부분이어서 정의 ? 절제 ? 경건과 같이 제각기 구분되는 것인지, 오직 하나이지만 다른 여러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에 프로타고라스는 얼굴의 눈, 코, 입과 같이 덕은 하나이며 다른 여러 가지들이 그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가질 수 있지만 하나는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얼굴의 기능은 제각기 다르며 그것이 덕과 같다면 덕을 이루는 정의 ? 절제 ? 경건 또한 그 기 없는 것임을 묻자 프로타고라스가 수긍하였다. 그렇다면 하나에 반대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고 덕을 이루는 부분인 정의? 절제 ? 경건들의 기능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정의와 절제가 상반되는 것이고, 절제와 경건 또한 상반되는 것이 아니냐고 프로타고라스에게 묻는다. 분별과 상반되는 것은 정의며 절제며 모든 것 포함되는 것이며 그렇게 보면 무분별한 사람도 정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한 정의와 절제는 같은 것이고 경건 또한 이러한 부분들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어느 논증을 따라야 하는지, 두 가지 논증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이에 프로타고라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것에는 동조할 수 없다고 말한다.소크라테스가 이어 선에 대해 프로타고라스에게 묻는다.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냐고 물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더라도 선일 수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사람이 누구에게나 유익하지 않은 존재인가, 전혀 유익하지 않은 존재인가, 유익함이 없는 것도 선일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이에 프로타고라스는 올리브나 퇴비의 예를 들며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동물에게는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뿌리에게는 유익하지만 싹에는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신체의 내부에는 유익하지만 외부에는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선이라는 것이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라고 말한다.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자신은 기억력이 부족하니 짧게 대답해주기를 부탁한다. 지자이고 짧은 대화나 긴 대화에 모두 능통한 프로타고라스가 양보를 해주어야만 자신도 대화를 계속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그러하지 못한다면 자기는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한다. 이에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를 계속해 줄 것을 부탁하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양보하며 중용을 지킬 것을 부탁한다. 이에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질문한 것에 대해 프로타고라스가 대답 대신 질문을 하고 이에 소크라테스가 대답하면서 프로타고라스가 자 구절이 모순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된다’와 ‘있다’의 차이를 두고 이를 설명한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면 앞에서 겪은 어려움은 나중에 쉬워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프로타고라스가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소크라테스는 ‘무섭다’와 ‘어렵다’라는 말을 악한 것으로 해석하여 시모니데스의 시에 대한 프로타고라스의 의견이 바뀌지 않나 시험해보기도 한다.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가 이 시를 지은 의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파르타인들이 철학과 변론에 있어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스파르타인들은 경우에 따라 마음에 새길만한 짤막한 말을 잘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지혜 있는 사람들이 칭송해온 피타코스의 ‘뛰어난 인간으로 있기란 어려운 것’이라는 말을 시모니데스가 반박하여 그를 능가함으로써 지자로서의 명성을 얻으려는 야망을 품었다는 것이다. 시모니데스의 말인즉, 뛰어난 사람으로 있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온전히 허물이 없는 뛰어난 인간이 되는 것이 실로 어렵다는 것이다. 뛰어난 인물이 된다 해도 어느 기간 동안만 가능한 것이며 언제까지나 지속시킬 수는 없고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신의 은총을 입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막을 길 없는 재앙’ 앞에서 쓰러지게 마련인데, 여기서 쓰러지는 사람은 문외한이 아니라 어떤 기술이나 학문을 가진 사람이다. 악한 사람은 더 이상 악해질 수 없고 선한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더 선해지고 기분이 안 좋으면 악해지는 법이다. 이렇듯 뛰어난 자가 언제까지나 뛰어나기란 매우 힘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진하여 범죄를 저지르거나 추악한 짓은 하지 않는다. 단지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자신을 채직질하고 마음에 없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시모니데스도 마찬가지로 독재자나 폭군들에 의해 마음에 없는 칭찬과 찬양을 했을 것이고 그러한 심정으로 피타코스에게 말하는 것이다. 자진하여 추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그.
강한 생명의 꿈틀거림~ 이덕규 시인,『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자취방에 가면 퀘퀘한 냄새가 난다. 특히 남자들의 방은 더욱 그렇다. ‘노총각 냄새’라는 말이 있듯이 남자들 특유의 냄새가 있다. 물론 여자들도 여자들만의 냄새가 있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덕규 시인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젊은 미혼남자의 방에 들어갔을 때 콧속을 후비는 그 냄새가 느껴진다. 향기롭지는 않지만 강하다. 수더분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게 있다. 적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그리고 시인이 이 소리를 들었을 때 기분나빠할지도 모를 것이 걱정도 되지만) 내게 이덕규 시인의 시는 그렇게 다가왔다.어떤 것은 장난기가 가득하고 어떤 것들은 처절한 아픔을 담고 있다. 마치 순진한 시골 꼬마 같으면서도 포효하는 짐승 같기도 했다. 쉽게 읽히면서도 어려운 시. 이덕규 시인의 시가 그렇다. 그동안 봐왔던 시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좀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나의 친 오빠처럼 시골에서 상경하여 세상풍파를 겪어가면서 살이 되고 피가 된 것들을 시로 담아놓은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아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농촌총각 같은 수더분한 맛도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총명한 눈초리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섬뜩하기도 했다.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신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진지하게 읽지를 못한 것 같아 후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 시인들의 힘이 내 안에 조금씩은 남았다. 이덕규 시인은 그 중에서 기성시인(?)들의 시들과 가장 가까운 느낌을 주는 시를 쓴다고 생각했다. 어딘지 도전적이면서도 패기를 잃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굉장히 가슴에 팍팍 꽂혔다. ‘무엇 때문이다’라고 확실하게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덕규 시인의 시가 훌륭하다고 읽혀졌던 시인들의 시를 많이 닮고 있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답습’이라는 안 좋은 말이 살짝 끼어들기도 하지만, 이덕규 시인에게 적용되는 말 같지는 않다. 그가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한 생명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와 시를 읽는 내내 즐거웠다.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시인들 중에서 나희덕 시인과 이덕규 시인의 시가 가장 잘 읽혔으며 느껴지는 것도 많았다. 내가 나중에 제대로 시를 쓸 수 있게 된다면 이덕규 시인처럼 써보고 싶다. 무턱대고 좋다고 하는 내가 좀 우습지만, 이제는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강하고 파릇한 생명력을 나도 한번 시로 담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가슴이 떨린다. 그리고 부럽다.
나무를 닮은 시인~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얼마 전 시를 발표하고 쓰디쓴 고배를 마셨다. 평소에 ‘꼴불견이다’ 싶었던 추태를 다보이면서 나는 얼마나 부끄러워했던가. 내가 시도하는 것이 매끄럽지 못하고 어쩌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인 줄 미처 몰랐었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실력이고 내가 쓴 시였다. 이제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하나하나 배우는 자세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선생님이 골라주신 시인이라 타의적으로 접하게 됐지만, 손택수 시인의 시를 읽고 느낀 점을 몇 자 적으려 한다. ‘죽으란 법은 없다’고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내게 아주 작은 빛이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시를 차근차근 되짚어 본다.손택수 시인의 『호랑이 발자국』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여느 젊은 시인들에 비해 굉장히 차분하고 모범적이라는 것이었다. 감히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게재가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어쩌면 내가 갖지 못한 부분들을 찾다보니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 헤매거나, 자신이 가진 사랑을 온건히 베풀고자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비쳤다. 언젠가 광고를 봤는데,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한 숲에 사람이 혼자 있는 장면이었다. 시집을 읽으면서 손택수 시인의 모습과 그 광고의 화면이 매치되었다. 나무는 언제나 겸손하고 아낌없이 퍼주며 절대 남을 해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서로 부비며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이 항상 제자리이다. 자연의 진리이기도 하고, 진정 참세상의 진리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그 나무들 사이에서 사람은 베푸는 것들을 감사히 받고, 그들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손택수 시인은 그러한 과정을 조근조근 밟고 있는 듯 하다. 과장되지 않으며 딱 필요한 만큼의 표현과 생각들을 말끔하게 정리해 놓은 듯 하다. 어려운 말도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진부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다. 딱 정량의 양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는 생각을 했다. 깊은 사유가 전제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정말 모범적인 시를 쓴다는 생각이 든다.
고향에 대한 묵상어린 시절, 타향에 나가 연휴마다 찾아오는 친척들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하루씩 걸려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히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뭍으로 나와 조금씩 나의 삶을 부려놓으면서 타향살이가 매우 쓸쓸하고 적막한 생활임을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벌써부터 눈물을 찔끔거리며 힘들다고 느낄 때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향이다. 보길도라는 특별한 곳을 고향으로 두어서인지 힘든 심신을 고향에 기대는 부분이 남들보다 유별나다. 나는부모님 세대의 감성은 아니지만 지금 또래에 비해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자부한다.아름다운 섬 보길도. 사람들은 이 섬을 특별하다고 말한다. 다시 가고 싶은 곳이라며 절절한 눈빛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감성과 내가 느끼는 보길도에 대한 애정은 조금 다를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어머니의 음식 맛을 보고 ‘그것 참 맛있더라’고 말하는 것과 평생을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자란 내가 느끼는 어머니의 손끝의 감미로움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정지용 시인이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스물 둘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보길도였음을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내가 자라는 동안 보길도는 부모님보다도 더 크게 나의 보호자가 돼 주었다. 그리고 보길도 안에 있을 때보다 뭍으로 나왔을 때 보길도는 내게 더욱 절실한 존재였다. 사람들에게 치이고 바쁜 나날에 눌려 숨쉬기가 갑갑할 때는 언제나 햇살과 바람을 가득 안고 있는 보길도를 생각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빨래를 널던 기억, 작은 산등성이에 갖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던 기억, 바다를 보며 한참을 앉아있던 기억 등. 보길도의 기억은 힘들 때마다 내게 ‘화이팅’을 외쳐주던 든든한 벗이었다. 또한 나태해지거나 마음이 병약해질 때마다 폭풍 속의 검은 바다가 나를 꾸짖어 주었다. 이렇듯 고향은 부모 이상으로 나를 지켜주었다. 그 동안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내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고향이 것이다. 나는 마음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이 어디이든 어떤 모습이든 내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사박 오일간의 여행 속에서 나는 나의 고향을 확인했고, 발견했고, 고향을 찾는 이들을 보았다. 메마르고 차갑게 굳어있을 줄로만 알았던 이들의 가슴에 따뜻한 빛이 스며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미니버스를 타고 비가 내리는 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눈에 익은 산과 들이 창가에 어려 있었다.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낮게 내달리는 산등성이와 붉은 흙으로 덮인 들녘의 키 작은 풀들. 빳빳하게 긴장되어 있던 내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것을 본 것처럼 신기하고 경이롭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여행이 시작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이 일상에서 멀어져 버린 지금의 나. 예전에는 붉은 흙과 따뜻한 바람 속에 파묻혀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지도 아름다운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스팔트와 먼지로 가득한 대기가 익숙해져 버렸고, 예전에는 몰랐던 푸근하고 맑은 느낌을 이제는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이 참 반갑기도 했지만 씁쓸하기도 했다. 버스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제는 내 것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만 같아 조금은 불안했고, 숨을 쉴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나의 고향 보길도로 가기 전에 해남을 들른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혼자서 보길도로 들어가던 것과 낯선 외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등에 업고 보길도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다른 기분이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마치 내 속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서 두렵기도 하고 초조했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거나 해남은 한 걸음 쉬게 해 주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고, 또한 해남이 가지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곳은 지척이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아주 미묘하고 애틋한 사랑을 심어주는 곳이었다.흐르는 강 위에 떠내려가면서 바라보는 하늘. 분명 하늘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쳐가는 바람과 지나치는 나무의 잎사귀들, 잔에 떠서 그렇게 밤하늘을 지켜보면서 순간 가슴에서 막 하나가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가 열린 것이다. ‘앤틱’하다고나 할까. 섬세하고 세련된 나무의 잔가지들이 지그재그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투박하거나 아니면 조촐하다고 생각했던 우리나라의 나무들이 그토록 섬세하고 화려할 수 있는가 하여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밤하늘에게 열어버린 나의 마음으로 참나무의 딱딱한 결에 수줍게 붙은 이끼의 촉촉함과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시냇물 소리와 산마루를 타고 넘는 바람의 숨 가쁜 호흡과 차갑지만 부드러운 숨결이 꽉 들어찼다. 참나무와 대화할 때, 나는 이토록 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했던 적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더 넓은 면적으로 참나무를 껴안고 더 자세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면서 그런 사소한 생각은 이내 스쳐지나가고 없었다. 내가 나무인지, 나무가 나인지 알 수 없던 순간 저 높은 곳에서 바람이 불자 발끝까지 ‘뻐그덩’하고 몸을 추스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껍질은 단단하고 차갑지만 그 껍질이 오늘날 저 큰 키의 우람한 나무가 되기 위해 감내했던 시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는 내게 ‘자신은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으니 너 또한 네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지금도 쑥쑥 자라기라도 하는 듯 ‘뻐그덩 뻐그덩’ 소리를 내고 있었다.참나무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여 나무를 더욱 꽉 껴안았다. 그리고 나무와 내가 하나 됨을 느꼈다. 나의 마음은 끝없이 고요 속으로 침잠했고, 한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운 기분에 취해 있었다. 보길도가 아닌 곳에서도 이렇게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등을 토닥여 주며 내게 용기와 평화를 불어넣어 주는 이를 낯선 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집 앞 방파제에 나가 불이 꺼진 마을을 볼 때, 혹은 덜봉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느껴지던 아득한 행복감이 이 곳에서도 느껴졌던 것이다. 내 마음이나는 이곳을 나의 제 이 고향으로 삼기로 하였다. 물론 그 곳은 내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스무 해가 넘도록 어떤 연고를 가지고 있던 곳도 아니다. 하지만 사흘도 되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나는 두륜산과 두륜산의 밤과 너무나도 깊게 서로를 어루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열려버렸고 그 안으로 이곳의 산과 바람과 향기가 가득 들어차 버렸다. 나는 또 하나의 고향을 얻은 셈이었다.보길도에 당도했을 때 주뼛거리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그래, 보시오. 여기가 바로 내가 자란 곳이오.’이렇게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나의 고향을 소개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장난도 치고 질문에 대답도 하고는 했지만 마음은 잔뜩 긴장돼 있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등대를 다녀온 후, 보길도에서의 첫날밤을 보내면서 나의 구겨진 마음은 부드럽게 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내게 젖어들었던 보길도가 함께 온 사람들에게도 이미 젖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들에 비해 보길도에 대해 아는 것이나 조금은 더 낫다고 할 만한 것이 조금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것은 집 앞에서 늘 가지고 놀던 한줌의 모래 만큼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산을 오르고 길을 걸으며 나는 다른 내가 되어 보길도를 바라보고 있었다.예송리라는 마을은 내 친구네 동네이다. 그리고 여름이면 우리 집 앞 해수욕장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름난 해수욕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하필 자리를 잡으신 곳이기도 하다. 나는 보길도 안에서도 내가 나고 자란 마을보다 더 풍광이 아름답다는 예송리 마을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송리에 묵으면서 물이 갯돌에게 장난을 거는 듯한 돌 구르는 소리와 키가 작고 구불거리는 나무들,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집들을 보면서 분명 보길도 안에서도 으뜸가는 마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하물며 이제야 보길도의 매력에 흠뻑 취한 사람들에게 오죽하랴! 붉은 재에서 명상을 하 훤했고, 굽이굽이 아름다운 섬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함께 걷는 사람 중에 그 사람의 진중함을 좋아 늘 가까이 한 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새색시에게 새신랑이 하는 것처럼 서로 쑥스러워하면서 다가서서는 함께 가자고 말을 붙였다. 막상 걸으면서는 별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먼저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 내가 부럽다며 입을 떼었다. 나는 되도록이면 묵묵히 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였다. 달빛에 취해 마음이 충분히 가라앉아 많은 생각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던 참이었는데, 그 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 사람은 나보다도 더 많은 생각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무도 행복한 생각에 젖어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사실 내게 고민이 생겨도 그것은 조금만 땅을 박차고 일어서면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내 안에 건강하고 때 묻지 않은 유년의 기억들이 알차게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의 근저를 이루는 것이 너무도 빈약하고 메말라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었다. 그만큼 그 사람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고,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만 하면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누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부럽다면 당신도 보길도를 고향으로 삼으라는 말을 정말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 비해 나는 행복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이 그 사람에게는 가볍게, 상처가 되게 들리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를 못했다. 보길도가 분명 나의 사랑하는 고향이기는 하지만 나만의 것이 아닌 것처럼 누구나 보길도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는다면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기대고 싶다면 보길도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라도 그 사람을 포근히 감싸 안아 줄 것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보폭을 맞추어 걷고 또 걸었다. 내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아마 그 사람도 알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
1+1=1′~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타로카드의 예언이 앞에서 로빈슨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은 매우 낡고 얄팍한 글쓰기 수법일 것이다. 그러나 투르니에가 그리 만만한 작가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뭔가 다른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짐작해야 할 것이다. 고전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쓰게 되기까지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특별한 이야기에서 내가 포착한 것은 혼자가 아닌 ‘혼자’였다. 로빈슨이 스페란차에서 작은 문명을 일구는 것은 단지 ‘인간의 무자비한 문명화’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수단이랄까. 로빈슨의 집요한 문명화 작업은 곧 스페란차라는 섬을 한 존재로 놓고 그와 ‘하나 되기’의 작업으로 비춰졌다.로빈슨이 표류하여 가장 먼저 한 것은 또 다른 생존자를 찾는 것, 그리고 인간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음에서 오는 공허와 절망감을 온몸으로 채득하는 것이었다. 로빈슨이 가족을 비롯한 여러 대상을 추억하는 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것과도 비슷했다. 말을 한다는 것 또한 그랬다. 대상이 있어야 말은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언어란 수많은 타인들이 가득히 들어살고 있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대상이 없자 그는 자기 내부로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자 그의 속에는 스페란차가 있었다. 이미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스페렌차와 하나 되는 작업이었다. 스페란차 역시 로빈슨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부표와 같은 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빈슨이 파괴적이든 건설적이든 간에 스페란차에 들어와 뭔가를 끊임없이 하면서 온전한 별개의 두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다. 스페란차라는 이름 역시 그 섬의 본디의 것이 아니었듯이 말이다.그는 점점 자리를 옮기는 일이 드물어졌고 몸을 움직였다가는 곧 진창 속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곳에서 그는 육체를 잊어버렸고 진창의 물기와 따뜻함에 싸인 채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스페란차와 로빈슨의 하나 되기 과정이 표 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진창에 몸을 묻는 장면이다. 그가 처음부터 순순히 섬과 하나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을 좇느라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진창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과거의 추억만을 좇는 행위는 엄마의 배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태아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의 몽상이 곧 환각으로 이어져 갑판의 죽은 누이동생을 보게 되면서 그의 허황된 몽상은 절정을 달린다. 그리고 거기서 몽상과는 작별을 한다. 그리고 그는 건설을 시작한다. 난파된 배에서 ‘문명’을 가져와 스페란차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운다. 스페란차의 모든 동식물을 비롯하여 어떤 기운마저도 로빈슨에게 길들여지고 그에게 지배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로빈슨 역시 원시의 모습에서 자유와 쾌감을 느끼며 자연화 되어 간다. 즉 섬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서서히 길들여지는 로빈슨과 스페란차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스페란차의 중심부에서 로빈슨이 모성을 느끼고 나중에는 스페란차의 여성성을 착취하는 로빈슨 자신에 대한 반성까지 이르게 되는 모습이다. 마치 가임의 여성을 유린하여 임신시키고 지엽적인 모든 생산력(본문에서는 생리로 표현됨)을 중지시키고 마는 것처럼 로빈스 스스로 절감하고 있다.나를 잉태한 스페란차는 마치 임신한 어머니에게서 월경이 중지되듯이 더 이상 생산을 하지 못한 것이다. …… 내 영혼과 내 생명과 스페란차의 순수성을 위험 속에 몰아넣으면서 나는 어머니인 대지의 길을 답사한 것이다. 아마도, 훗날 내 몸이 노쇠하여 불모의 상태로 변하면 나는 다시 구멍 속으로 내려가리라.-『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p. 140여기서 우리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과 사람. 어떤 대상을 향하여 탐욕적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게 되고 또 상대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간다. 섬과 로빈슨은 다소 거칠지만 본연에게는 솔직한 방식으로 접촉하고 하나가 되어간다. 로빈슨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이 가능한 스페란차와 스페란차에서 삶의 방식이 바뀌어버린 로빈슨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또 다른 하나를 창출한다. 이미 그 둘은 온전히 원래의 섬이 아니고 원래의 로빈슨이 아니다. 서로를 변화시킨 로빈슨과 스페란차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이 있다면 방드르디이다.방드르디는 로빈슨과 스페란차와의 교합 사이에서 생긴 존재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로빈슨에게 있어 방드르디는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게 하는 동반자이자 노예로 등장한다. 그러나 무모하리만큼 자유분방하고 로빈슨이 세운 제국과는 전혀 반대로 움직이는 방드르디는 그의 고민거리로 떠오른다. 방드르디는 노예의 위치가 아니라 그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세계인 듯 했고 나중에는 로빈슨보다 더 위력을 발휘하는 중심인물로 여겨진다. 잔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순수한 열정을 가진 그의 모습은 스페란차가 가진 성격들의 결정체를 골라 담은 신기한 그릇과 같았다. 모성인 스페란차의 성격들을 그대로 옮겨온 셈이다. 그런가하면 방드르디의 그런 모습들은 로빈슨이 내부 깊숙한 곳에 둔 채 부정하려 했던 본원적인 힘으로도 보이고 한편으로는 로빈슨의 쓸데없는 껍질을 벗기고 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으로 비춰졌다. 결국 로빈슨의 제국이 무너지고 방드르디와 친구 관계로 나란히 섰을 때에는 놀라울 만큼 빨리 받아들여지고 물들게 된 하나의 개성이기도 했다.여러 해를 두고 그는 방드르디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그는 그의 형제가 되어버렸다. …… 이리하여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어렴풋한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육체는 단순히 외부 세계의 짜임새 속에 끼어 들어가는 가장 좋은 도구일 뿐만 아니라 충실하고 강력한 동반자 구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