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백규의 농가구장(農歌九章)충북대학교 ○○○○과 △△△Ⅰ. 들어가기1. 위백규 (魏伯珪)) : 1727(영조3)~1798(정조22)존재 위백규는 전남 장흥군 관산면 방촌리 출생이다. 장흥위씨의 본향인 방촌은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벽항. 어려서부터 남달리 명민하였던 그는 이미 10세에 천문, 지리 등을 열람하는 열성을 보였고, 14세 부터는 독서는 물론 기예에도 남다른 특기를 나타냈다. 그러나 벽항에서의 궁핍한 환경은 학문적으로 청년기를 맞은 위백규에게 있어 결코 달가운 것이 못되었다. 청년기의 존재는 멀리 충청도 덕산의 윤봉구(尹鳳九,1681-1767)문하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학문을 하게 된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윤봉구는 향리에서 자습했던 존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5세에 문하에 들어 윤봉구가 별세한 41세까지 자신의 학문적 포부나 경륜을 실현시킬만한 외적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던 존재는 많은 저술을 준비, 구상해 스스로 남은 생애를 향리라는 기반 위에서 천착하기로 결심한다. 43세부터 향리에 은거하면서 향촌선비로서의 교화활동에 전력, 지위에서의 현실에 근거한 생활은 그에게 사실적이고 실용적인 인식태도를 심어주었고 목민의 기회를 얻지 못한 불우한 자신의 포부와 경륜을 실천한 계기가 된 듯하다. 현실문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지가 담긴 경세적 저술의 대부분을 이때 완성, 생활경험의 소산을 비판적으로 쏟아냈다.존재는 68세가 되는 1794년에야 관과 인연을 맺는다. 이 해 남해연안의 화재민을 위무하고자 파견된 서영보(徐榮輔)는 존재의 향촌활동과 저술을 보고 정조에게 등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그의 저술을 보내도록 지시하고 종9품과 정8품을 제수했다. 그러나 존재는 모두 사양했다. 정조는 엄명을 내려 상경을 독촉했고 존재는 부득이 만언봉사(萬言封事) 를 올렸다.봉사를 접한 정조는 경남 동래감사에서 태인으로, 다시 고향에 가까운 옥과현감에 특배했다.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옥과현감에 부임한 그는 즉시 향악을 실시하고 勸學과 講式에 힘쓰며 민력을 고갈케하는 각기의 향촌 사족층이란 대략 이상과 같은 사회적 조건 속에 놓여 있던 계층으로서 그 지역적, 연대적인 편차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재지적 기반을 확대하여 사호(士豪)로서 군림해가던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출사의 길이 막힌 상태에다, 종래 그들이 누려왔던 중소지주로서의 사회경제적 기반마저 허물어져 자영농적 처지로 기울어가는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위백규의 경우도 이러한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대표적인 개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시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향촌사족의 구체적인 사회 경제적인 조건에서 울어나온 현실적 삶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3. 「농가구장」창작 배경 및 제작 시기「農歌九章」의 작자 위백규는 전라도 장흥 향촌사족의 후예로 태어나 비교적 풍족하지 못한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주로 인하여 문중의 촉망을 받으며 일찍부터 독서인으로 자리를 잡아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 철이 들면서 20대 전반에 이르기까지 독서장수처(讀書藏修處)이기도 했던 천관산의 장천재(長川齋)에 묻혀 독서에 몰두하였고, 25세경부터는 당대 유명한 노론 산림의 하나였던 충청도 덕산의 윤봉구에게 나아가 성리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40세 경 스승 윤봉구의 죽음과 어려운 가정 형편을 이유로 관직을 포기하고(계속되는 과거 실패가 이유라는 평도 있음) 향촌에 머물면서 학문과 농사를 병행하는 삶을 선택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가 취한 방안은 바로 학문과 농사를 병행하는, 이른바 독경병행(讀耕竝行)의 문중 결사인 ‘사강회)’ 활동이었다.사강회는 18세기의 사회 변동 속에서 실세(失勢)의 위기에 처한 향촌 사족층이 자신들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결성한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사강회를 기획한 위백규의 핵심적인 취지는 무엇보다도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항산(恒産)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강규(講規)와 함께 별도로 농규(農規))를 마련하여 업농의 실천적 규례를 상세히 규정하였으며 아울러 후속으로 농가를 첨부하였던 아둘러내쟈 耘草쳐 내자 쳐 내자 꽉 찬 고랑 쳐 내자잡초를 도랑마다 쳐 내자잡초 짙은(무성한) 긴 사래는 마주 잡아 쳐 내자제 3장 운초 : 3장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논매기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둘러내쟈 는 논의 김을 논의 김을 한 골씩 매어나가자고 서로 독려하는 내용으로 김을 맬 때 부르는 노동민요의 한 관용구이다. 둘너내쟈둘러내자 의 반복은 노동요의 a-a-b-a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이 시조가 노동요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여럿이 줄줄이 서서 한 골 한 골씩 논을 매고 잡초인 바라기를 골라내는 모습에서 협동성과 공동 노동의 흥겨움이 베어있으며, 노동요를 부르면서 잡초를 쳐 내는 농민들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계절적으로 농번기의 중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러내자 : 김을 매자, 또는 (잡초를) 쳐 내자? 길찬 골 : (잡초로) 꽉 찬 고랑, (잡초) 무성한 고랑? 바라기, 역고, 쉬 : 잡초의 방언?은듣?대로듯고 볏슨?대로?다 청풍의옷길열고긴파람흘리불제 어?셔 길가?손님???시머무?고 午憩땀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햇볕은 쬘 대로 쬔다맑은 바람에 옷깃을 열고 긴 휘파람 되는대로 불 때어디서 길가는 손님은 마치 나를 아는 듯이 주저 없이 머무는가제4장 오게 : 오뉴월 대낮의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들녘에서 허리 굽히고 김을 매다보면 땀은 비 오듯이 쏟아져 온 몸을 적신다. 땀을 닦아낼 짬도 없이 김매기에 열중하다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향해 젖은 옷깃을 열고 허리를 세워 바람을 즐기며 휘파람을 불고 있다. 즉, 열심히 일하고 나서 잠깐 쉬는 모습이 생동감있게 그려진다. 그런데 종장에 보면 어?셔길가?손님???시머무?고 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길 가던 손님이 간섭을 하게 된다. 이는 길을 가던 사람이 화자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잠시 서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기분을 이해할 리 없는 양반이 마치 자신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바라보는 데 대한 은근한 빈정거림이 나타나 있다.? ? : 땀? 듣?대로 겉절이나물(김치)? ?예 : 즈음에, 때에? 밥들이고 : 밥을 들여오고? 잔자불?에 : 술잔을 잡을 때에? 豪興계워 : 흥에 겨워醉??니늘그니요 웃?니아희로다 흐튼슌?흐린술을고개수겨권??예 뉘라셔 흙쟝고긴노래로?례춤을미루?고 飮社취하는 이는 늙은이오, 웃는 사람은 아이로다.어지럽게 술잔을 돌려 탁주를 고개 숙여 권할 때에흐르는 장고, 긴 노래에 누가 자기 차례의 춤을 사양하여 미루는가제 9장 음사 : 취흥이 오른 늙은이와 아이들이 웃음소리, 그리고 장고소리가 어우러져 흥취가 고조된 가운데 서로가 술을 권하며 한해의 풍년을 자축하는 태평스런 정경이 그려지고 있다.? 흐튼 : 흩어진, 어지러운? 슌? : 차례대로 돌리는 술잔2. 구조적 특징「農歌九章」의 내용은 각 수의 표제 내용 그대로 아침에 집을 나서서, 농구를 갖추고 들에 나가, 김을 매고, 점심 때 잠깐 쉴참을 즐기다가, 점심을 먹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과정 을 앞의 6수에서 먼저 읊고, 초가을에 들판을 순례하는 감회, 햇곡식의 맛을 보는 감회, 음주회(飮酒會)의 감회와 흥취 를 뒤의 3수에서 잇대어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여섯은 한여름 농번기의 하루일과를 그린 것이고, 뒤의 셋은 이러한 농업노동의 결실태로서의 풍성한 가을을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農歌九章」은 前六首가 그것 자체로 상호 긴밀한 한 편의 구조로 완결되어 있고, 그 위에 긴밀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느슨하게 한 편으로 묶일 수 있는 後三首가 첨가된 구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農歌九章」은 농번기의 하루일과 에 가을의 충만함 을 얹어 놓은 구조를 이루고 있다.3. 형상적 특질이 작품의 시적화자는 농군이다. 그는 실제로 꽉 짜여진 노동의 일과 속에 자기 자신을 맡기고 있는 몸이며(1-6수), 그 농업노동의 결실태인 가을 들판을 순례하며, 棉花?세?래네?래요 일은벼???모개곱?모개 五六月어제런?七月이??이다 아마도 하?님너?삼길제날위?여삼기샷다 (제7장:初秋) 라고 오뉴월의 수고를 생각하며 감회에 젖기도 하는 생활인이다. 화자품이 사강회운동 속에서 이 운동 ( 農 -耕 의 운동)에 기여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 운동의 양대 목표였던 항산(恒産)의 확보와 항심(恒心)의 유지를 달성해 나가는데 있어, 이 작품은 항산의 확보를 위한 영농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농규」에 후속하여 이 「農歌九章」이 수록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이 작품은 사강회운동 속에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 것일까?첫째는 내부결속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중 생활공동체라는 내집단 속에서의 공동노동과 내적 연대감을 노래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내부결속의 기능을 띠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둘째는 督農 및 勸農 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개가 書生 출신들인 이들 사강회 회원들에게 농경의 의의와 보람을 일깨움으로 해서 노동의 흥취와 열의를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이 「농가」의 기본취지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농가」는 수평적인 상태에서 평교간에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화자나 청자 모두가 작품세계로서의 노동현장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상호간에 공동체적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진술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는 「농가」의 제작은 위백규 한사람의 순연한 개인 창작이라기보다는 사강회 회원들의 공동체험과 공통적 정서가 한데 어울려 이루어진 공동창작의 성격이 짙다. 그들 스스로 스스로를 규율하는 노래로써 「농가」를 필요로 했던 것이고, 위백규는 그들의 구심적 위치에서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그들과 같이 이 작품을 고안해 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결국, 「농가」는 농부화의 추세 속에 놓인 향촌사족층이 서생의 자리에서 자영농의 자리로 이전해 가는 단계를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스스로의 처지와 운명을 영농의 질서 속에 내맡기고, 그러한 질서로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문중 집단을 규율해 나가고자했던 18세기 장흥 방촌 위씨 일문의 영농의 노래 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래의 산출에는 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