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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찰스 다윈의 진화론
    찰스 다윈목차1. 들어가며 4. 다윈의 자연선택설2. 다윈의 생애 5. 다윈의 영향3. 다윈의 진화론 6. 마치며1) 진화론의 배경2) 진화론의 내용1. 들어가며동식물의 종(種)이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다윈이 아니었다. 그에 앞서 18세기 후반에 이미 그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이 진화 에 관한 글을 썼으며, 또한 그 얼마 후인 1809년에 프랑스 박물학자 J. 라마르크는 생물학적 종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찰한 동물학 을 출판하였다. 사실상 다윈 스스로 진화에 관한 글을 쓴 선배들을 20여명이나 꼽고 있다. 그러나 현대 진화론은 명실상부하게 다윈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은 왜일까? 그 이유는, 다윈은 이 문제에 관한 온갖 증거를 대단히 끈기 있게, 실로 면밀하게 체계적으로 조사하였다는 것과 종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메커니즘, 즉 자연 선택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제창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이론은 성숙되고 설득력을 가진 최초의 설명이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진화론의 내용과 그가 남긴 영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2. 찰스 다윈의 생애영국의 생물학자인 찰스 다윈(1809-1882)는 의사인 아버지 로버트 다윈의 아들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 중퇴하고 켐브리지 대학으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동식물에 관심을 가졌고 켐브리지 대학의 식물학교수 J. 헨슬로와 친교를 맺어 그 분야의 지도를 받았다. 31년 22세 때 헨슬로의 권고로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 제도)과 호주 등지를 두루 항해, 탐사하고 36년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에 널리 동식물의 상이나 지질 등을 조사하여 후에 진화론을 제창하는데 기초가 되는 자료를 모았다. 특히 갈라파고스 제도에서의 관찰, 즉 다른 환경의 섬과 거기에서 생활하는 같은 계통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변이와의 관련은, 다윈으 대해 그는 신중했고 불편해했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830년대 말 영국은 심한 경기 침체에, 비참한 구빈원을 활용하는 구식 구호 방식이 새로운 구빈법으로 대체되고, 민주주의 개혁을 요구하는 집회를 여는 인민헌장운동(노동계급의 권력이 강화되는 토대가 되었다)이 벌어지는 등 몹시 어수선한 상태였다.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와 에티엔 조프루아 생틸레르 같은 프랑스 동물학자들이 주장한 종들 사이의 점진적인 변화라는 초기의 진화 개념들을 영국과 스코틀랜드 급진주의자들이 받아들여서 진보적인 사회 변화를 주장하는 논거로 삼음으로써, 부와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던 의회를 장악한 휘그당과 국교를 좌우하는 성공회 고위 성직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심기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공회 지도자들이 해석한 기독교 신앙은 영국에서 그냥 우세한 종교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교였다. 영국은 1688년 이래로 혁명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인민헌장운동과 경기침체가 결합되자 새로운 혁명이 임박한 듯이 보였다. 전통과 진화의 경계선을 따라 첫걸음을 내딛고 있던 다윈은 자신이 계급과 종교 전쟁의 최전선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자신이 변절했음을 선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종이 ‘다른 종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전체 장막이 흔들리다가 흘러내린다’. 다윈은 세계를 둘러보라고 자신에게 조언했다. 중간 형태들의 단계적 이행을 연구하라. 지리적 분포를 조사하라. 화석기록과 멸종한 생물들과 비슷한 현생 종들의 지리적 분포 범위가 겹치는 양상을 살펴보라. 이 모든 증거들을 살펴보면 ‘장막이 흘러내린다’. 그 장막은 자연신학이었다.맬서스의 『인구론』1838년 9월 그는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6판을 접했다. 『인구론』은 1798년 익명으로 처음 출간되었으며 후속 판들에서는 내용이 더 추가되었다. 그 책은 한 정치경제학자의 냉정한 분석을 담고 있었고, 그 내용은 휘그당의 강경한 복량은 2,3,4,5,6,7,8 하는 식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식량 공급은 오직 기근이 들 때에만 인구를 직접적으로 제한한다. 자발적인 억제 요인들도 있다. 혼인을 안 하겠다거나 늦게 하겠다거나 피임을 하겠다는(빅토리아 이전 시대의 교구 사제였던 맬서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결정이 그렇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억제 요인들도 있다. 인구과밀, 건강에 나쁜 직업, 극도의 가난, 육아 소홀, 풍토병, 전염병, 전쟁 등과 불임, 금욕, 때 이른 죽음을 불러오는 요인들이 그렇다. 맬서스는 대체로 그것들을 ‘도덕적 억제, 악덕, 궁핍’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썼다. 그 대목을 읽을 대 다윈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그는 도덕적 억제와 악덕보다는 ‘궁핍’이 흉내지빠귀, 거북, 원숭이, 더 나아가 회향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는 ‘종들의 싸움을 맬서스의 이론으로부터 추론’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들도 그런 맬서스 억제 요인들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썼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유럽의 새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연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개체 수는 비교적 안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매년 각 종은 매의 포식, 추위 등으로 일정한 수준의 사망률을 유지하고 있으며, 새로 새끼들이 부화하는 비율과 거의 들어맞아서 순 개체 수는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식량 공급과 둥지를 지을 공간도 제한되어 있지만, 번식 알 낳기, 부화는 계속 그 한계를 밀어 놀리려 애쓰는 수준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들은 상호 연결되고 불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매의 수가 줄어들면 먹이인 새들의 개체수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것이다. 다윈은 새로 얻은 명쾌한 깨달음을 토대로 포식, 경쟁, 지나친 번식, 죽음, 그리고 그 결과를 살펴보았다. “십만 개의 쐐기 같은 힘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힘은 ‘더 약한 구조를 밀어냄으로써 틈새를 형성하기보다는 모든 적응된 구조를 자연의 경제에 난 틈새로 밀성들을 조절한다. 엄청난 수의 유전자들은 계속적인 결합 과정을 거쳐 다양한 개체를 낳는데 정확하게 똑같은 두 개의 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은 진화가 아니며 단순한 변이로, 개체성의 중요한 현상으로 간주될 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이 멸종하지 않고 환경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도 한다.진화의 역학구조에 대해서는 많은 추론이 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으로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다윈의 자연선택설, 드 프리스의 돌연변이설, 여러 가지의 정향(정향)진화설, 골드슈미츠의 있음직한 괴물이론 같은 돌연변이설, 그리고 최근의 신다윈주의에서 논의되는 현대 진화적 합성과 보다 최근의 이론인 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등이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이론의 다양성과 그 제안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내부적 논쟁들이다. 이것은 누구도 진화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관해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동식물에 있어서는 돌연변이 현상에 의해 현저하게 새로운 특성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변이란 이미 존재하는 유전적 인자들의 단순한 재결합을 나타낸다. 반면에 돌연변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유전인자가 포함되는 것이다. 적자생존에 의해 여러 세대 동안 간직되어온 유리한 돌연변이의 축적으로 새로운 종이 진화된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유리한 돌연변이는 없다는 것이다. 알려진 모든 돌연변이는 치명적이거나 해롭거나 중성(중성)이거나 가역적인 것이었다. 유전자 암호에 있어서 돌연변이란, DNA분자 구조의 임의의 변화에 의하여 유전 정보가 실수로 전달된 것을 의미한다. 실험실에서의 돌연변이는 화학약품, 열, 방사선 등의 인위적인 충격에 의해 발생되었다. 반면에 자연계에서의 돌연변이는 매우 드물고, 돌연변이가 일어나도 생존 경쟁 세계에서 우성적 존재이기보다는 병적이거나 중성적인 것으로 빨리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유전적인 부담을 주게 되어 전체적인 생존도는 낮아진다.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믿기 위다. 만약 바다를 가운데 두고 고립되어 있는 섬들과 같이 지리적인 장애로 인해 한 종이 두 개의 집단으로 격리되어진다면 각 집단들은 자신들이 서식하고 있는 환경 요건들에 적응함으로써 외형적으로 더욱더 달랐다. 많은 세대에 걸쳐 그 두 집단들은 다른 종으로써 분류될 수 있을 만큼 많이 변형되었다. 13종의 갈라파고스핀치 새들은 각기 환경에 의해 변형된 부리를 볼 수 있다.다윈은 그와 같은 진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자손들의 변형이나 진화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은 다윈으로 하여금 적응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의 자연선택 이론을 진화의 한 메커니즘으로써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다윈은 난해하지도 않고 독창적이지도 않은 두 가지 관찰 결과로부터 자연 선택 이론을 이끌어 냈다. 낱낱이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을 맞춤으로써 큰 퍼즐의 그림을 다윈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버드 출신 진화적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굴드가 말했듯이, 다윈은 두 가지의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과 불가피한 결론 을 바탕으로 자신의 자연 선택 이론을 발전 시켰다.1) 사실1 : 과잉 번식과 생존 경쟁어떠한 종이던 먹이나 서식지와 같은 환경자원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까지 번식을 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과잉 번식은 생물계 내에서의 개체들 간에 치열한 생존 경쟁을 초래하게 된다.2) 사실2 : 각 개체의 다양화어떠한 종이던 간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각 개체들은 처해 있는 환경 요건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한 집단의 것은 동일한 지역에서 서식하고 있는 같은 종의 개체들로 이뤄져 있다.) 같은 집단 내에는 결코 똑같은 개체가 있을 수는 없다. 이러한 점은 인간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심스러운 관찰자들은 모든 종의 집단의 다양성을 발견한다. 불평등한 번식의 성공률. 생존 경쟁에 있어서 주변 환경 요건에 가장 잘 맞는 특성을 지닌 개체들이 평균적으로 더 높은 번식 성공률을 가진다. 이들은 가장 많은 수의 강한 자손들을 남기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생존과 번식의 기능을 강화하
    자연과학| 2011.01.30| 9페이지| 1,500원| 조회(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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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1. 아테네의 철학1) 희랍의 소피스트들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0~410 B.C.) : 아브데라 출신고르기아스(Gorgias, 483~375 B.C.) : 레온티노이 출신히피아스(Hippias, 420 B.C. 활약함) : 엘리스 출신프로디코스(Prodikos, 420 B.C. 활약함) : 케오스 출신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 420 B.C. 경에 활약함) : 칼케돈 출신이소크라테스(Isokrates, 436~338 B.C.) : 아테네 출신1?2세기 동안 희랍인들 사이에는 우주론적 사색론과 함께 또 하나의 철학적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움직임은 기원전 5세기 후반동안에 국력과 부가 절정에 달하였던 아테네가 그 중심이었다. 이 시기는 일반적으로 페리클레스)의 시대라고 불리어지는 시대로서 정치적 업적, 문화의 전성(全盛), 그리고 예술의 숭고성에 대한 인식의 보급 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저한 시기였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본토인이 아니라 희랍의 여러 도시로부터 온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은 사람들 가운데는 이른바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일파가 있었다.소피스트(sophist))라는 말은 전통적으로나 또는 현재에 있어서나 보통 비난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즉 수사학적 허식(虛飾), 지적 천박성, 심지어는 도덕적 불성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옛 문구가 단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좋지 않은 이론을 좀 더 좋게 만들고자 하는”사람을 대체적으로 소피스트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라는 것을 평하여 “부유하고 뛰어난 젊은 사람들을 돈을 받고 낚는 사냥꾼”이라고 하였으며, 소피스트는 자신이 궁극적인 실재로 여기는 것을 부정했고 우주를 그것의 현상적인 양상만 가지고 설명하려 했다. 플라톤에게 현상계는 가짜 세계로서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고, 따라서 앎의 참된 대상이기 위한 본질적인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의 특징을 “피상적인 지혜를 농(弄)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소피스트들이 하되었다.소피스트들의 학문도 철학인가? 이들의 학문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형이상학에 나타났던 지혜도 아니며, 엄밀한 뜻의 학문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의 정신적인 태도에서 두 가지의 근본적인 사상을 이끌어낼 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의 회의주의적인 상대주의와 권력론이다. 「규약」(Nomos), 「자연」(Physis)이라는 표어와 같은 대립 속에서 우리들은 구체적인 상대주의를 보게 된다. 소피스트들은 온 세상을 다 돌아다며 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습관과 법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노모스는 영원하지도 않고, 보편타당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노모스는 규약에 의해서 생겨나며, 합의에 의해서 존속된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는 소피스트의 활동이 전성기에 달해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지자(智者)’라고 자처하면서 오만을 부리기로 이름이 높았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자기들은 훌륭한 태도, 사회적 성공의 기술, 웅변에 의해서 집회를 좌우하는 방법, 정치적으로 출세하는 데 필요한 술책 등을 가르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그들의 활동은 희랍의 철학 발전에 있어서 지대하고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 공헌이란 그들이 문화적?예술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점차로 증대해 가는 식자들의 진정한 관심에 대하여 필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찬란한 사회적 성취와 관련된 철학적 성취였다. 그들의 활동 중점은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적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희랍인의 생활에 미친 영향은 철학적 탐구의 대상을 옮겨 놓은 점)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인 것은 문법과 수사학이요, 웅변술과 시학(詩學)이요, 여러 가지 문학적 스타일의 장단점이요, 교육과 정치학이었다.소피스트들은 예의 바르고 세련되고 세계주의적이었으며, 또 번영을 사랑하고 잘 사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잘 산다는 말의 두 가지 의미, 즉 안락하게 또는 심지어 호화스럽게 산다는 의미와 점잖게 또는 훌륭하게 산다부를 얻었다는 것이다. 덕을 가르친다고 자칭하면서 실제로 그들은 거짓된 담화술을 가르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도덕한 실용적 학설들을 퍼뜨렸다. 그들은 그리스의 프리타네움(모임의 중심지)인 아테네로 이끌렸고, 거기서 소크라테스를 만나 격파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의 공허함을 드러냈고, 그들의 궤변을 내보였으며, 그럴 듯하지만 해로운 그들의 소피스트술에 맞서 건전한 도덕적 원리들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따라서 소피스트들은, 짧은 성공 후에, 받아 마땅한 경멸을 받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들의 이름은 이후 세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소크라테스 및 플라톤과 주요 소피스트들 사이에 공통 지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그들 모두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었다. 둘째로 그들은 어떤 대답이든 전통적으로 ‘용기’로 번역된 남자다움이나 지혜 등과 같은 덕들을 통해 표현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셋째로 그들은 덕들의 총합이 기능의 수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 (단수의) 덕 또는 Arete)를 구성하는 것으로 가정했다. 인간의 경우 이 덕은 인간 능력의 완성이며, 이 능력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은 것으로 간주되었다.① 프로타고라스‘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라는 명제로 유명하며 우리가 프로타고라스에 관하여 아는 것은 모두가 이 명제 속에 내포되어 있는 사상의 부연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을 따름이다.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을 인간 자신에게 나타나는 대로,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 문제에서 맡아보는 구실에 의하여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같이 보인다. 그는 엘레아학파나 피타고라스학파나 그 밖의 식민지 철학자들의 우주론적(宇宙論的) 내지 수리적(數理的) 사색과 같은, 자기에게는 환상적인 과장처럼 여겨진 것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모든 까다로운 이론에 반대하여 소박한 인간의 입장에 서서 실제로 눈으로 보거나 만져 보는, 또는 그 밖에 여러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들만이 실재적이라고 주장하려 하였다. 그는 인간이란 취한 소피스트이다. 가령 A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B에게는 씁쓸하게 느껴질 수가 있으며, 이편에서는 참인 것이 저편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 그러므로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좀 더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진짜 진실이다. 누구나 그렇게 믿도록 설명하는 것이 쓸모 있는 변론인 것이다. 이밖에 고르기아스는 회의주의적인 사상도 표명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존재하는 것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설사 그 존재하는 것이 인식된다 해도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 설령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나의 생각을 완벽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2)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아테네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조각가였고, 어머니는 산파였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철학이었다.(옛날 이오니아의 철학이 아님) 그의 사고의 중심이 된 것은 인간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시적인 환상의 직관이나 영원히 흐르고 있는 형상을 구체적으로 채워나감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냉철하고 퇴색된 도식적인 사상이 갖는 보편적인 유형을 가지고서 세계를 파악한다. 이 보편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덕을 덕이게끔 해주는 바의 것이다. 보편개념은 여기서는 이렇게 보이고 저기서는 저렇게 보이는 그런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하는 주체에 좌우되지 않고 항상 꼭 같은 것으로서 나타나는 지식의 내용을 형성한다. 이오니아학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재료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순수하고 확실한 앎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적 논리적인 문제였다.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중의 후기의 몇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 가운데에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주도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서 말한 것 중에서, 어디까지가 역사적인 소크라테스의 말이며,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문학적?철학적 천재에 의해서 보태진 것인가 하는 것은, 오늘날 확신을 가지고 단정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기준에 의해서 옳다고 인증되지 않는 한 인간의 욕망을 신뢰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좋은 것을 제시하는 지침으로서 신뢰를 두려고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넘어서, 그 목적을 판단하는데 의거할 보편적 기준에다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소크라테스는 언제나(그에 대한 플라톤의 묘사를 보면) 그의 겸허한 무지의 고백 속에서, 보편적인 것은 장시간에 걸친 진지하고 또 한결같이 지성적인 탐색을 통하여 밝혀질 수 있다고 하는 자기의 확고한 신념을 암시하여 주었다.소크라테스의 주장에 의하면, 한편 특수한 사물들이나 행위들은 관찰할 수는 있어도 정의 내릴 수는 없으며, 반면 보편적인 것은 정의 내릴 수는 있어도 감각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도덕적 인식을 얻는 수단으로서 감각을 경시하고 이성을 중시하였다. 그렇지만 보편적인 것은 귀납적인 일반화에 의해서 도달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보편적인 것이 나타나 있는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의 공통적 요소를 이끌어 냄으로써 발견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피할 수 없는 하나의 난점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것이 나타나 있는 경우 우리는 어떠한 것들인가를 알기 위해 이보다 앞서 그러한 경우들을 선택하고 기록하는데 있어 기준으로 삼아야 할 그 보편적인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기준의 탐색을 거의 끝없는 탐구라고 여겼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결코 자기가 그 탐구를 끝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고정적으로 구체화된 도덕적 지식의 옹호자가 되지는 않았다. 비유적인 말로, 그는 아테네라는 둔한 짐승을 자극하여 보다 성실한 성찰을 행하게 하도록 신에 의해서 보내어진 ‘등에(gadfly)'였다. 또 다른 비유로 말한다면, 부인 대신 청년을 보살피고 어린이의 분만 대신 사상의 분만을 도와주는 하나의 산파였다. 설령 사람들이 탐구하는 보편적인 것의 정확한 한다.
    인문/어학| 2011.01.30| 8페이지| 1,500원| 조회(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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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터와 칼뱅
    루터, 칼뱅목차1. 들어가며 6. 칼뱅의 종교개혁2. 16세기 유럽 7. 종교개혁에 대한 평가3. 종교개혁의 배경 8. 마치며4. 루터의 종교개혁5. 종교개혁의 영향1. 들어가며16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럽에서는 중세와 같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로마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의 교회 대신에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고, 하나의 신학 대신에 여러 신학 이론들이 성립되었다. 유럽에서 교황의 절대권을 거부하는 종교적 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적 문제만으로 이해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에게 구원을 전해준다는 개인적인 측면도 있지만, 종교적인 원칙에 따라 사회 구성원의 질서를 규정하고 있었다. 국가와 지방 영주와의 정치적 갈등, 신분 계층 간의 불신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위기 요소(인구증가, 물가상승 등)가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키며 종교문제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는 온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회의 개혁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다양한 요소가 서로 얽힌, 즉 종교적 모순과 세속적 대립관계가 상호 작용하며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루터와 칼뱅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배경과 과정 그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다.2. 16세기의 유럽16세기 유럽사회는 출생 신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정해진 혈통 중심의 사회였다. 성직자, 귀족, 시민, 농민 등 모든 신분에 위계적 서열이 주어져, 신분에 따라 권리와 의무, 생활방식 및 직업까지도 제한되어 있었다. 사회적인 신분 상승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유동성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으며, 그나마 하위 신분 계층에게는 그 기회마저 거의 없었다.신분제 사회와 더불어 공동체 생활이 당시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시민계급은 자신을 단순히 ‘시민’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국한된 ‘도시시민’으로 자각하고 있었으며 농민계층도 스스로 자기 고장의 ‘마을 농민’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집단의식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혼란의 시기를 벗어나기에 교황의 권위는 너무나도 큰 폭으로 실추되어 있었다. 이는 공의회에 참가한 주교들이 교황권에 대한 공의회의 지배를 주장하며 교황들의 정치적인 특권과 탐욕,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실랄하게 비판을 가한 것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14세기 말 기독교도들의 정신적인 혼란은, 예를 들어 교회의 대분열 이후 아무도 천당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소문이 난무하고, 도처에서 천년복지설의 신봉자들이 목격된 것이 잘 말해준다. 실제로 1513년 강림절에는 프란체스코회의 한 수사가 피렌체 사람들에게 말세가 임박했다고 경고하고 회개할 것을 주장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1514-1516년을 교황권이 무너지고 로마가 붕괴된 기간으로 선언한 얀 힐텐 같은 이들의 영향으로 적그리스도가 도래했다는 소문이 수많은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기독교도인들은 하느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위안을 얻기 위해, 삶의 위험에서 보호받기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예정된 심판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점점 신의 대리인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성인과 성모에 대한 예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성 세바스찬, 성 로수, 성 길, 성 아드리앙 등이 페스트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주고, 성 앙투안은 화난(火難)을, 성 크리스토프는 비명횡사를 막아준다고 믿었다. 또한 자비로운 성모의 옷자락 아래로 보호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이와 비슷한 생각에서, 연옥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에서 영혼을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켰다. 유언장에서 자선 기부금을 많이 적는 것과 면죄부를 구입하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것으로 사람이 죽은 후에 연옥에서 영혼이 머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너무 많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그들로부터 지나친 보장을 얻으려는 생각은 경건한 신앙심과 미신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었고, 신자들은 죄와 공로에 대한 손익을 철저하게 따지게 되었다. 교황의 특사가 금지령을 내렸는데도 순례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교황은 새로이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자 교황은 돈을 기부하는 자에게 속죄를 약속하였다. 루터가 머물고 있던 비텐베르크 도시의 사람들도 면죄부를 구입하였다. 교회가 판매하고 있는 면죄부)가 허구임을 주장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를 담당하던 마인쯔 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면죄부의 오용을 금지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알브레히트 자신이 면죄부 판매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까닭에 루터의 요청은 무시되었다. 루터의 요청이 거부되자, 그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주교들에게 보내어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직접 호소하면서, 이에 대한 공개토론을 요구하고 나섰다. 조목조목 반어법과 역설로 자기주장을 편 루터는 기독교 신자들이 면죄부로 얻을 수 있다고 본 잘못된 확신감과 연옥에 미치는 교황의 권위에 대해 두 가지 유명한 비판을 전개했다 제5조에서 “교황은 자신에게 통상적으로 허용된 것 이외에 다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며 용서해서도 안된다.”고 강조하며 세속적인 것에 대한 교황의 야욕을 비난했다. 또한 제 49조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게 하는 더 차원 높은 병폐인”교황의 사면권에 대한 위험을 강조했다. 즉, 마틴 루터는 당시의 주교들이 참다운 신앙의 길로 들어서려 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서 95개조의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의 실체에 대해, 그리고 면죄부가 무엇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으며, 면죄부란 어디서 비롯된 것이며, 그 효능이 어느 정도인가”를 놓고 학자들과 토론하고자 하였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길, 속죄하라 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속죄 과정이다. 교회에서 말하는 속죄는 살아 있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따라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성직자들이 이를 구입한 사람에게 모든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돈이 모금함 속으로 떨어지며 소리를 내면 바로 그 순간 영혼은 하늘로 날아간대해 가톨릭 신학자 요한네스 콜호이스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루터가 번역한 신약성서는 인쇄술을 통해 재단사, 구두수선공, 여성 그리고 다소 어수룩한 사람들까지도 소지할 정도로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이들이 약간의 독일어를 배우면, 마치 지혜의 샘이 솟아오르듯 신약의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외우는 사람도 있었다. 몇 개월 만에 성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아, 가톨릭의 평신도뿐만 아니라 성직자나 수도승 심지어는 성서를 전공한 학자나 교수와의 토론에서 머뭇거림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평신도나 개인뿐만 아니라 신학박사나 대학인과도 토론을 할 정도다.’)보름스의 칙령 발표는 결국 중세의 이단 처벌법에 따라 교회와 국가가 루터 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루터의 개혁정신은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은 제2의 국면에 접어들었다.루터는 인간이 만든 제도인 유형 교회에 대해 보편적인 사제단에 토대를 두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공동체인 무형 교회를 대립시켰다. “모든 신자들은 사실상 성직자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 간에는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례, 복음,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누구에게나 성직자의 신분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의 제기는 성직자들의 하느님에 대한 종신서원제와 독신 생활 폐지, 고인에 대한 미사 금지, 면죄부 판매 중지 같은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동반하도록 했다.루터의 저서들은 독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루터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처와 츠빌링 같은 장래의 종교개혁자와 원로들, 멜란히톤 같은 인문학자들, 울리히 폰후텐 같은 제국의 기사들, 그밖에 상인들과 제후 등이 결속된 대규모 개혁운동이 한 인간의 운명의 언저리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독일인이 아닌 사람들(즉, 로마)이 루터를 재판하는 것을 거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목적을 위해 대규모 집단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농민전쟁은 지배계층의 갈등에서 빚어진 결과였다. 즉, 악화된 생활조건을 극복하고, 부역과 조세의 가중에 저항하며, 삼림과 목초지 사용권, 사냥과 어업권의 박탈 문제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루터는 교회의 개혁에서 일반 평민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1522년 농민들이 무력으로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자, 루터 자신은 신의 말씀을 무력으로 강요하거나, ‘아래로부터’관철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오직 국가에 의한 합법적인 방법을 따르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종교개혁을 사회적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강력히 거부하였다. 특히 그는 농노제의 폐지와 관련해 강력히 비판했다. 루터가 제기했던 ‘기독교인의 자유’는 분명 개인의 종교적 양심이나 도덕적 실천에 있어서의 자유를 불러일으켰지만, 그에게서 ‘자유’란 내용적으로 볼 때 명백히 종교상의 것으로서 그 자유를 그 이상 정치적으로 연관시키기를 거부했다. 국가권력과의 갈등에서 정의로운 심판자로 추앙받던 루터는 평화를 촉구하고 나섰으며, 그의 이러한 호소가 반향을 얻지 못하자, 농민전쟁을 무자비하게라도 강력 진압하라고 영방군주에게 충고를 하게 되었다. 그는 교황에 반대하여 자신의 개혁 사상이 성공적으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당시의 귀족이나 제후에 호소해서 힘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현실주의자였다.5) 영방교회의 성립루터가 결국 농민전쟁을 진압한 군주의 편에 서게 됨에 따라, 농민 전쟁이 진압된 후 영방 내에서는 개신교 세력과 영방군주가 서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교회를 자율적 힘으로 개혁하려는 초기의 목표는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영방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방군주가 주교의 지위까지 차지함으로써 관할 지역의 교회에 관한 모든 일을 직접 통제하게 되었다.6) 루터파 교회의 출현1521년 루터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멜란히톤은 자신의 저서 에서 루터 신학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종교개혁
    인문/어학| 2011.01.30| 12페이지| 1,500원| 조회(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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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형과 변용
    「원형과 변용」 - 박 태 균 -이 책은 한국의 4?19혁명에서 5?16쿠데타로 이어지는 시기를 정치 뿐 아니라 경제적인 부분까지 확장시켰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역사적 관점이 같이 인식되어야 함을 주장함으로써 한국현대사 인식의 폭을 넓히고 있다. 특히나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학문적 비판은 그동안의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한 경제사상적 논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지금까지의 연구 중 본서에서 다루고 있는 경제개발계획과 관련하여 사회적 공감대에 주목한 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카이야 다다시와 세터와이트의 연구는 경제개발 계획을 입안했던 사람들이 어떠한 생각과 경험 속에 계획을 입안하였는가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연구들에는 이전의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기재를 통해 재현되는가에 대한 실증적인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다. 반면 차머스 존슨의 연구는 과거의 경험이 이후의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재현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존슨의 연구는 특정한 성격의 정책이 입안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추적하였다. 지금까지 경제정책에 대한 연구는 발표된 정책안을 분석하는 수준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경제사 관련 연구들은 수치를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 결과의 분석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1950년대 경제개발론자들의 생각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경제개발계획의 내용에 나타난 특징을 밝히고 있다. 미국의 대한정책과 관련해서도 케네디 행정부의 저개발국 정책결정자들의 생각을 분석함으로써 1960년대 미국의 저개발국 경제원조의 특징을 밝힐 수 있었다. 한국에 경제개발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 한국이 경제성장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한국적 상황에 맞는 경제개발이 필요하다는 전략 등이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밝히지 못했던 알파와 베타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혀냈다는 의의가 있다.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이 전근대적인 조선을 근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의 배경이 일제시기의 사회, 경제구조의 따른 밑거름이 되어 성장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도 다른 식민지국가에 비해 경제성장이 두드러짐을 근거로 일본제국주의 지배에 따른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로 주장한다.이에 저자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며 식민지시대의 경험이 해방 이후 경제성장의 일정부분 역할을 한건 사실이지만 경제성장의 원천적인 힘은 조선사회가 축적한 내제적인 힘의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경제 질서에 강력히 개입하는 전통적인 공(公)개념, 교육과 법률 제도를 정비한 식민지시대의 경험과 유산, 1950년대 다른 동아시아 개발국가들의 동향, 미국의 영향, 교육열로 대표되는 한국국민들의 자발적인 힘을 그 원동력으로 꼽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 사상의 기초인 公(공)개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50년대 이승만 정권조차 미국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만큼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은 당시 한국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파악하며 전통적인 공개념이야말로 경제개발계획을 이끈 주요요인임을 강하게 주목한다.저자는 공개념과 더불어 50년대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의 주목했다. 영국의 식민지에 있었던 인도, 이집트 등 국가들의 경제개발계획을 실시했다. 경제적 자립 지향의 모델로 인도를 주목하였는데 박정희 정권 초장기 경제정책을 주도한 박희범 정 문교부 차관은 인도경제 전문가로 인도를 경제 개발의 모델로 삼았다고 말하기도 했다.이와 더불어 미국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이 제공하던 무상원조가 줄어들고 차관이 도입되면서 경제개발계획의 필요성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케네디정부가 들어서면서 바뀌게 되는 미국의 정책변화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역할과 박정희의 역할이 확대되고 과대 포장되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대한 비판과 그 맥을 같이한다.또 하나의 문제제기는 한국의 경제는 애초의 수출주도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한국의 수출주도형 경제가 일제식민지시기부터 내려왔다고 주장하지만 해방 후 문제가 되었던 미국의 원조 감축과 환율 문제 등이 나타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출주도형경제체제가 중요시되었음을 지적하고 60년대 초의 경제개발계획은 균형 성장론이었음을 지적한다. 수출 중시는 73년 이후에나 강조되었고 경제개발에 대한 일본의 영향도 65년 한일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나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그것이 저자가 내세운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반박이다.
    독후감/창작| 2009.08.19| 2페이지| 1,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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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서평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박 태 균]한?미관계는 과연 국가적인 평등(동맹)관계에 입각한 수준일까? 그 시작부터 오늘까지 미국주도의 일방적 관계는 아닌가? 일방적 관계라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본 책은 미국주도의 한미관계가 성립된 원인과 현 실태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앞으로 한?미관계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본 책에서는 미국이 한국의 중요한 정책과정에 빠짐없이 개입해 왔고 특히 군사문제 즉, 비상시 작전지휘권을 주한미군 사령관이 아직도 장악하고 있는 아주 특수한 관계임을 전제하고 이를 규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해방직후 한미관계를 분석하는 시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 미국의 개입은 한반도에서 혁명적인 역량을 파괴했고, 세계질서 속에 미국이라는 중심의 주변부에 위치한 한국은 미국의 질서에 종속되었다는 것과 둘째, 냉전이 격화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한반도는 어차피 분할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한국의 보수적인 학자들의 주장이 그것이다. 45년 이전 미국의 한국의 대한 인식은 부정적인 시각이 일반적이었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비해 미국은 한반도를 거의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또한 한국인들의 자치능력을 의심했으며 통치의 기틀을 마련할 때까지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분석한다. 해방 이후 재미한인들의 분파적 독립운동은 이러한 한국관을 더욱 악화시키게 된다.미국은 왜 패전국 일본이 아닌 한국을 신탁통치하려 한 것일까? 저자는 한국의 자치능력 부족과 경제적 이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과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적 성향 등을 그 이유로 제시한다. 해방 후 38선 이남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등 좌익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우익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미군정은 이승만과 임정세력을 주목했고 모스크바3상회의에 신탁통치안을 제출했지만 우파세력으로 하여금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야만 대소련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중도파(김규식, 여운형)를 주목한다. 그러나 좌우합작위원회는 입법의원 문제를 둘러싸고 결정적인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결렬된다. 과도입법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조직이 될 수 없었고 또 다시 김구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의 연합체가 되고 말았고 이에 미군정은 우파세력을 계속 지원하면서 좌익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미국과 소련의 압력속의 한국의 정치세력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좌우로 갈린 정치세력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하는지 생각지 않는듯하다. 정치의 목적이 국가의 미래보다 좌, 우로 갈린 이념을 더 중요시 한 정치인들의 태도는 미군정아래 현실적으로 한 측의 입장이 관철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타협점을 찾았어야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고 한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면에서 여운형, 김규식의 판단은 일면 옳은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현실정치가 반드시 최고의 정치방향은 아닐지라도 최악을 피하는 최선의 정치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최상의 방향이 되는 것이다.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도 사라져 버렸다.1945-48년까지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반도 전역의 신탁통치 실시였다. 이런 시점의 이승만은 38선 이남의 친미정부수립을 강조했다.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자마자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으며, 38선 이남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필자는 한국의 정치적인 힘이 미국의 대한정책으로 인해 일방적인 방향으로 진행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허나 한국의 정치세력이 타협점을 찾아 한목소리를 내고 저항했다면 그런 일방적인 방향으로의 진행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미국의 대외원조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해외 군대 유지비였다. 미국은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정부 생존을 의심했고 한반도 전체에서 미국의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49년 6월 한국전쟁 등으로 미군정의 경제정책은 실패했지만 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을 고려해보면 경제적 성장을 수단으로 하는 봉쇄정책이 얼마나 성공적인가를 잘 알 수 있다. 미국은 군사적, 이념적 정책도 중시했지만 경제적인 관계를 통해 한국을 대미종속관계로 만들었다. 현재 한국과 미국의 경제관계를 보면 미국의 의도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한국전쟁이전까지 미국은 소극적인 대한정책을 펼쳤으나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 후 태도가 달라졌다. 공산주의에 대항할 최후의 보루는 일본이었고 한반도는 일본의 안보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된다. 이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이 일본에 대한 안전판으로서 개입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의 혁명성공으로 한반도는 미국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정책적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미국은 당연히 한반도 파병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결국 원조라는 것은 미국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경제발전도 그와 동일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부분이다.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국내정치세력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에도 국내의 정치상황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특히 이승만은 분단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의 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없음을 간파하고(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반공과 안정) ‘발췌개헌안’이라는 초유의 개헌안을 마련하고 사사오입 개헌 등을 거쳐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에도 미국과 이승만은 끊임없이 대치하는데 미국입장에서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가 없다는 판단과 미국의 개입시 세계 언론의 비난, 국내의 사회적 혼란, 미군부내 강경파의 반대 등으로 이승만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러한 이승만 제거계획은 이승만에게 한미관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학습효과를 가져왔으나 이후 대한정책은 협상보다는 설득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이후 60년대 이후에도 미국은 협의보다는 설득과 협박을 더 선호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미국은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점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특히 한미방위조약에 따른 군사작전권을 유엔군에 넘겨 준 것은 당시 이승만의 입장에서 남한의 안전을 확보하고자(저자는 더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 후 한국에게 어떤 영향과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는 저자는 이승만의 행동이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잃고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한미관계에 있어서 정상적인 관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은 한국에 대해 이해관계가 없었다면 한국과 어떤 관계를 맺었을까? 냉전체제는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였고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현실을 한국의 입장에서 이용하지 못한 한국내부의 있는 것은 아닐까.60년대 들어 한미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50년대 무상원조 시기에는 경제성장을 못하다가 왜 60년대 차관을 도입하고 나서야 한국은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를 강요하던 미국이 합헌정권인 장면정부의 몰락을 왜 바라만 보았을까? 먼저 경제성장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로스토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야 한다. 로스토우는 경제학자이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의 대외정책은 근대화이론이라 말할 수 있는데 근대화론의 특징은 먼저 근대화과정이 만들어내는 ‘안정’과 ‘불안’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점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안정은 결국 한 사회가 겪어야만 하는 불가피한 요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민주주의를 뒤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경제성장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되며 이 과정에서 국민통합의 힘으로 민족주의를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을 위한 실험장이었을까? 이러한 인식위에 한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너무도 잘 맞아떨어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홍보하는 것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미국의 근대화론은 대 성공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로스토우의 저개발국가 원조는 그 사회의 발전단계에 맞도록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도약이론) 한국에 있어서는 사회개혁의 강조와 일본과의 관계정상화가 중시되었다. 특히나 한일관계를 정상화 시켜야 하는 이유로 한국의 빠른 개발계획을 위해서는 일본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점과 수출을 위한 일본 시장의 필요성, 북한정권과의 경쟁에서 한국의 권위가 그 이유였다. 한국의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결에서 자유진영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고 이는 곧 대외적인 미국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스토우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 세력으로 군대(더 나아가 군인과 상인, 지식인 사이의 연합체)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는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무시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경제를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것이다. 이후 한국의 모든 역량은 경제발전에 모아지게 된다. 이러한 로스토우의 주장은 마치 한국의 5?16쿠데타를 이끈 군부세력의 등장을 예견하는 듯하다. 실제로 미국은 5?16쿠데타 배후에 있었던 것일까? 저자는 현재까지 공개된 문서만으로는 배후에서 직접 쿠데타를 지원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쿠데타를 진압하고 묵인할 수 있는 권한이 워싱턴(에서 유엔군 사령관에게 조언 또는 훈령)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즉, 개입하지 않은 것은 그 자체로 쿠데타군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는 조치가 될 수 있다. 미국 관료들은 민주당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5?16쿠데타에 대해 모호한 태도가 그 성공의 큰 요인이라 분석한다. 또한 윤보선의 태도도 쿠데타가 성공하는데 중요한 명분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한국인들의 무관심과 민주당 정부에 대한 정치인들의 혐오가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아도 되는 가장 중요한 명분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왜 4?19를 일으켜 독재정권
    독후감/창작| 2009.08.19| 5페이지| 1,000원| 조회(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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