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오래 전에 텔레비전에서 중국 드라마 '측천무후'를 방영한 적이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상인의 딸로 태어나 중국의 황제에 자리에 오른 한 여성의 일대기로서 흥미 있게 보았던 것 같다.중국은 긴 역사와 그 만큼 수많은 변화의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측천무후라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그 긴 역사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행적들을 통해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에 일대를 살펴보고자 한다.Ⅱ.본론1. 재인에서 황후가 되기까지..측천무후 즉, 무측천의 본명은 무조이며, 당 고종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5년간 재위하여 집권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이다.장안에서 태어났고 목재상이었던 아버지가 당시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로 인해 거부가 되어 권문세족들과 교분을 쌓은 결과 하급 군관으로 들어갔다.무측천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후 태종 이세민이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녀가 14세때 황궁으로 불러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낮은 등급의 후궁인 재인으로 삼았다.무측천이 어린 시절 대사가 찾아와 그녀를 보고 장차 천하를 호령할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장차 황제가 될 것임을 암시하였다.드라마에서 보았을 때는 무측천이 활발하긴 하지만 매우 여성스럽고 애교많은 여자로 묘사되었었는데 책을 찾아보니 실제 그녀의 성격은 다소 거친 성격이었고 그 때문에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태종의 아들인 이치가 태자인 시절부터 그녀의 아름다움을 흠모했었다고 한다.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황실의 법도에 따라 후궁들은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고 무측천 또한 예외가 되지 않았다.이듬해 황제가 된 고종 이치가 태종의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무측천을 보고는 다시 궁궐로 데리고 오게 되고 정이품 소의의 자리까지 올랐다.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여자를 예법을 어기면서 다시 자신의 후궁으로 맞이했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웠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 하는 점도 의문이었다.무측천은 황후와 고종의 총애 받는 후궁 소숙비의 신경전 사이에서 교묘히 줄타기를 하며 점차 태종의 총애를 독점하기 시작했으며 12명의 자녀 중 6명이 그녀의 소생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태종의 사랑이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소숙비와 황후를 제거, 황후자리에 오른 무측천은 장손무기에게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명을 둘러씌워 외지로 추방한 다음 자살을 강요하였으며, 그 후 장손무기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제거하여 후환을 없앴다. 성씨록을 개편하여 자신의 성씨 무씨를 최상에 놓고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풍토 속에 자신의 가문에 대한 위치를 확고히 해 두었다.이러한 무측천의 전횡을 막기 위해 고종은 재상 상관의를 비밀리에 불러서 그녀의 폐위 문제를 논의, 폐위에 관한 조서를 작성하였으나, 황제 측근에 심어둔 무측천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재빨리 그것을 무측천에게 보고하고 이들을 처형하였다.드라마에서 보면 환관들이 뇌물을 받고 정보를 빼주는 역할을 많이 하였는데 이는 황제와 늘 함께 있는 환관들의 역할이 그만큼 지대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물려줄 혈연지간도 없는 환관이 재물에 눈이 멀어 사리사욕을 채우려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2. 황제가 되기까지...무측천은 자신의 권세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자식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4명의 아들중 처음 이홍이 권력을 물려받게 되자 무측천은 자신이 공들여 닦아놓은 권력의 기반을 뺏기지 않기 위해 675년 24살의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 버린다.이에 쇠약해진 고종은 황위를 무측천에게 주려하나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녀의 계획은 무산된다. 후에 둘째 이현이 태자에 책봉되고 결국 무측천은 태자가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여 태자의 신분을 박탈하고 추방시켜 죽였다.셋째는 중종으로 나약하였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를 과소평가하고 황위의 일족들을 재상에 임명하였다. 이에 무측천은 중종을 유폐시키고 막내 이단을 예종으로 옹립시키고 그의 정사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기에 이르렀다.무측천은 먼저 낙양의 명칭을 신도라 고치고 향후 새로운 왕국의 도읍으로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당 왕조에서 사용하던 문무백관의 명칭도 새롭게 바꾸었다. 즉 상서성은 문창대, 좌우복사는 좌우승상, 문하성은 난대, 시중은 납언, 중서성은 봉각으로 바꾸고, 상서성 소속의 6부도 이부는 천궁, 호부는 지관, 예부는 춘관, 병부는 하관, 형부는 추관, 공부는 동관으로 각각 그 명칭을 바꾸었다.이러한 쇄신의 단행은 모두 그녀가 황제에 오르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그녀의 의도를 미리 눈치챈 일부 대신들이 격렬한 반발을 때문에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다.684년 9월 무측천에 의해 추방되었던 서경업이 양주에서 군대를 일으켜 10여일 만에 10만대군을 결성하였으나 이효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서경업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에 서경업은 난을 일으킨지 40여일 만에 평정되었다. 이 난 때 유명한 시인중의 한 사람인 낙빈왕이 무측천을 토벌하기 위한 격문을 썼는데, 무측천은 그 격문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인재가 자신의 휘하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무측천의 인재등용에 대한 넓은 포용력과 인재를 아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무측천은 서경업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 다시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각을 개편하였다.또한 순조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미신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형성해 나갔다. 예를 들면 그녀의 조카 무승사는 사람을 시켜 "황제의 모친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니, 황제의 업적이 영원히 번성하리라"라는 글귀가 새겨진 흰돌을 낙수에서 가져왔다고 하면서 바치게 하였다.690년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 연호를 천수라 하고 도읍지를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 라 일컫는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로 중국역사상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3. 정치적 능력과 업적무측천은 심성이 거칠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건언12사라는 12조의 건의서를 올렸는데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되어 있었고 고종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후에 고종이 정사를 처리하는 권한을 무측천에게 넘겨주려 하였던 것에는 어느 정도 그녀의 이러한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무측천은 황제에 즉위한 후에 수구세력의 반항을 제지하기 위하여 색원례 주흥 내준신등과 같은 악독한 관리를 임명하여 참혹한 형벌로써 수천명에 달하는 당 왕조의 종실과 대신들을 주살하였다.1) 폭넓은 인재의 등용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다지기 위해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과거제도는 위 진 이래로 신분에 따라 관리를 임용하던 악습과 그로 인한 폐단을 타파하기 위하여 수 양제 시기에 처음으로 시행되었으나 무측천 시기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새로 임용된 관리들 중에는 미천한 집안의 출신들도 많았다. 이로써 많은 문인학사들은 무측천의 지지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무측천은 수구세력을 타파하여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굳건히 다지는데 그들을 이용하였다.새로운 인재들을 초빙하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낙양의 궁전에서 친히 공사의 과거시험을 주관함으로써 최초로 '전시'(과거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궁전의 대전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관)제도를 정착시켰다. '무거'를 설치하여 무예에 뛰어난 사람을 관리로 선발하였으며, 각급 관리와 백성들이 직접 천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서적을 편찬한다는 명분 하에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조정을 위해서 정책을 마련하거나 상소문을 처리하게 하는 등 재상의 업무를 보좌토록 하고, 그들을 '북문학사'라 하였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인재의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고루 잘 등용하였다.당시에 재상을 역임하였던 이소덕 소량사 적인걸 요숭 등은 모두 뛰어난 재상으로 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녀는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관리를 발견하기만 하면 즉각 그들의 직위를 강등하거나 파면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살하기도 하였다.
1.잠재적 교육과정가. 발생동기(1)학교의 역기능을 분석하고 이를 계획 속에 표면화시킴으로써 학교교육의 순기능을 확 대·강화시키려는 교육적 노력에서 비롯되었다.(2)학교생활을 통해 아동들은 단편적 지식이나 무용지식을 배우는 반면, 가치관이나 도덕관 의 확립을 올바르게 하지 못해 인간교육에 실패하고 있다는 각성과 함께 교육이라는 제도 자체 속에 인간교육을 해치는 요소가 있으므로 학교제도를 근본적으로 제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가) 일리치의 :상급학년으로의 진급을 교육으로, 졸업증서를 능력으로 혼동하도록 교육되고 있고,학생들은 그들의 학습 대부분을 교사없이 때로는 교사와 관 계 없이 배우고 있다. ⇒학교무용론(나) 라이머의 :부모들이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목적은 지적인 성취에 있 는 것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잡자는 데 있다. ⇒인간교육이라는 측면에서 학교가 지닌 문제의 심각성을 들어 학교유해론을 제기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교육의 전 사태에 관련된다. 학교의 물리적 조건과 제도 및 행정조직뿐 아니라 사회 심리적 상황 등을 포함하여 잠재적 교육과정의 요소를 담고 있다. *잠재적 교육과정의 운영첫째, 상호보완적 운영-표면적 교육과정과 서로 상충되어서는 안된다.둘째, 학교의 문화적 풍토에 주의-학교의 문화적 풍토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셋째, 교사는 학생의 모방대상임을 인식-교사가 솔선하여 바람직한 태도와 습관을 기르도록한다.나. 잠재적 교육과정의 개념(1)잠재적 교육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는 많으며, 이것은 머튼이 사회제도의 적응에 관련된 의 도되지 않았던 결과를 잠재적 기능 이라고 부른 데 기인한다. (호피족의 기우제 관찰)(2)잠재적 교육과정은 학교나 교사가 계획한 바 없으나 학교의 물리적 조건, 제도 및 행정 조직, 사회적·심리적 상황을 통하여 학생들이 은연중에 가지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학교에서 계획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학습의 결과를 초래하는 교육과정으로, 학생이 은연중에 학습하는 것.즉, 학생들은 학교의 의도적인 계획에 담겨있지 않은 것을 학교생활을 통하여 배우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는 비계획적이고 비의도적이며, 단편적이지만 주로 정의적이며 가치적이고 도덕적인 측면과 관계되는 학습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크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중심 교육과정에서는 잠재적 교육과정을 중요시한다. 이 교육과정은 문서화되지 않은 비공식적인 교육과정으로 교사의 인격, 학급의 분위기, 인간관계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잠재적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은 비교적 영속성이 있으며 학생의 정의적 도덕적 인격적 면에 영향을 크게 미치기 때문에 표면적 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중요성을 지닌다.이런 잠재적 교육과정의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났으며, 이는 종래의 학교지도상의 계획적 의도적인 학습경험의 총체인 표면적 교육과정의 개념과 대비되어진다.잠재적 교육과정에서는 학교를 단순한 교육의 장이 아니라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간주한다. 즉, 학생들의 인지, 태도, 행동변화는 공식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학교안의 눈에 띄지 않는 힘, 즉 학교의 물리적 조건, 제도 및 행정조직, 사회 및 심리적 상황에 의하여 일어난다. 이러한 힘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잠재적 교육과정이란 다른 사람에 의해 인식되지 못한 학교의 기능이나 학교생활의 영향으로 학생들이 갖게 되는 경험으로써 학교생활을 하는동안 주의도적으로 학습되는 것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예)교실의 지정좌석·교사·학생과 함께 공부하는 상황에서 성격,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교장·교감·교사·학생에 이르는 행정조직적 권력 구조속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익히며 각 직업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능력을 알게됨-잠재적 교육과정: 숨은, 비구조적, 비공식적, 내현적, 비가시적, 내면적, 비조직적, 기대되지 않은, 비형식적다. 잠재적 교육과정의 원천A. 학교의 생태(김종서)1목적성...학교는 교육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설립된 곳이다.2강요성...아동은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 인내, 순종, 반항, 초연, 불안 등과 같은 것을 학 습하고 강요받는다.{3군집성...학교는 개인적 기질과 가정적 배경이 서로 다른 아동이 모인다는 점에서 계층문 화의 융해적 기능을 담당한다.4위계성...학교도 하나의 사회조직이기 때문에 그 구성원간(학생과 교사간, 학생집단간)에 위계질서가 있다.{B.학교의 생태:(잭슨)1군집성(crowd):아동들이 어울려서 배우게 되는 것2상찬(praise):여러 가지 형태의 평가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3권력(power):학교 조직의 권위관계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2.표면적 교육과정가. 개념표면적 교육과정이란 학교나 교사가 계획적으로 의도했던 학습의 결과를 초래하는 교육과정으로 교과목, 즉 국어·수학등과 같이 문서화된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다.이러한 교육과정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강한 의도를 포함하며 가시적 표출적이며 인지적 영역을 주로 다룬다. (교과중심, 경험중심, 중핵교육과정, 학문중심 교육과정등은 학교나 교사에 의해 계획된 표면적 교육과정에 속함)학생의 행동을 계획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학생의 행동을 어떤 조건에서 얼마만큼 변화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의도적인 내용을 계획해서 설계한 문서화된 교육과정인 것이다. 즉 교육과정의 구성, 교과서 편찬, 교수요목의 작성등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므로 이를 표면적 교육과정이라 한다.-표면적교육과정: 계획된, 구조화된, 공식적, 외현적, 가시적,조직화된, 기대된, 형식적3.잠재적 교육과정과 표면적 교육과정과의 관계(가)표면적 교육과정에는 항상 잠재적 교육과정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표면적 교육과정이 3R's, 즉 읽기(Reading), 쓰기(Writing), 셈하기(Arithmatic)를 다룬다면, 잠재적 교육 과정에서는 또 다른 3R's인 규칙(Rules), 규정(Regulations), 일상생활(Routines)을 다 룬다고 할 수 있다.(나)표면적 교육과정과 잠재적 교육과정이 서로 조화되고 상보관계에 있을 때, 학생 행동 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만약 양자가 갈등상태에 있을 때에는 잠재적 교육 과정이 우세해 진다.(다)의도와 무관한 학습결과를 잠재적 교육과정이라 부를 수 있다해도 교육과정과 학습결 과의 구별이 그 만큼 흐려진다고 생각하거나 잠재적 교육과정은 표면적 교육과정고 함 께 두 가지 교육과정이 동등한 범주를 이루는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교육과정은 여전 히 학생들에게 가르칠 가치가 있는 것을 지칭한다. 그 내용은 학생이 결과적으로 학습 했는가 아닌가 하는 사실과는 관계없이 교육과정으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구성주의란...구성주의는 인지주의적 사고를 확대시켜 발전하게 된 패러다임으로서 지식이 무엇이며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인식론이다.구성주의 학습이론의 출현은 기존의 행동주의, 인지주의에 기초한 객관주의적 입장의 수업 설계가 많은 제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부각된 학습이론으로서 기존 패러다임인 객관주의에 대한 대응패러다임이다.객관주의 관점에 의하면 지식은 개인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객체로서 내부로 전달되는 것이며 학습은 교사에 의해 이미 존재하는 지식이 전달되는 것으로 모든 학습자들은 획일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교수의 목적은 학습자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알리거나 전달하는 것이 된다.반면 구성주의 지식은 세계에 대한 개인의 경험의 재해석이라고 가정한다. 즉 객관적인 실체는 존재를 부정한다. 학습은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의미가 개발되는 능동적인 과정이며 의미는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경험으로부터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의 구성과 습득은 개인의 인지적인 측면과 사회적 상호작용 측면의 상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지식과 기능은 그것이 사용되는 환경으로부터 고립되어 가르쳐질 때 그 지식과 기능의 전이는 방해를 받을 것이며, 학습내용이 유의미한 맥락에서 획득되었을 때는 맥락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도록 보조해 주기 때문에 보다 전이가 가능하게 된다. 즉 지식이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과 재구성의 과정을 반복하며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지식 혹은 의미는 학습자 개인마다 개별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개인은 그가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게 되고 사회적 경험과 배경, 개인적인 인지적 활동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식을 구성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현실 상황 속에서 개인에게 의미 있고 타당하게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특정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으면 가치 있다고 보는 것으로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지닌 것이다2.구성주의 학습의 특성첫째, 지식은 학습자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 학습은 지식 구성과정이며 지식은 정보의기록이 아닌 정보해석에 의해 일어난다. 즉 학습자가 교수학습전략의 초점이 되며 학습자가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교수행위: 정보제공, 지식구성화 과정을 자극, 안내)둘째, 학습은 경험에 대한 개인의 해석이며 기존 지식에 의존한다. 새로운 지식구성을 위해서 기존 지식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지식의 형성과정은 학습자가 어떻게 그 경험이나 능력을 학습에 투입하는가 하는 개인차의 영향을 받는다.셋째, 지식은 지적·물리적·사회적 맥락에 의존하므로 학습은 실제 관련 상황에서 연습하고 습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실제상황과 유사한 상황학습이 효과적 교수형태이며 공동으로 협력하는 학습이 효과적이다.⇒ 구성주의에 대한 특성은..·지식은 학습자에 의해 구성된다.·학습은 경험의 개인적 해석이다.·학습은 학습자에 의해 능동적으로 일어난다.·학습은 공동으로 협력하여 일어난다.·학습은 실제 세상과 유사하게 상황화 되어야 한다.·학습의 측정은 학습의 맥락 자체에 통합하여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구성주의는 학습자들의 요구와 흥미, 관심등 에 가치를 두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많은 자율성과 선택권을 줌과 동시에 책임감을 주자는 인본주의적 입장과 학교교육은 학습자들이 실제 사회에서 직접 경험하게 되는 상황이나 환경이 잘 연계된 능력을 갖춘 사회인으로의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는 기능주의적 관점을 지녔다.3.구성주의 학습원칙과제의 성격, 학습자의 역할, 학습방법, 교사의 역할, 자아성찰적 실천 등으로 제시하였다.1실제 상황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복잡함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담겨 있는 '구체적 상황을 중심으로 한 실제적 성격의 과제'를 다룬다.2학습자는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지식의 형성자로서 스스로 자율학습을 할 수 있는 인지적 기술과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지식은 개인의 인지적 구조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 되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형태로 선택 변경되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서 '학습자의 학습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강조한다.3자신의 모든 개인적 경험, 일상적 사건이나 현상에 대하여 그 의미와 중요성에 의문을 가져보고 분석하는 인지적 습관 즉, '자아 성찰적 실천'을 통하여 지식을 구성한다.4지식의 습득과 형성은 단지 인간의 개인적인 인지적 작용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고 반드시 개인이 속한 사회, 문화적 배경과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학교 환경 에서는 동료들 혹은 교사와 학생들간의 '협동학습 환경의 활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5교사, 강사의 역할은 학습자가 필요로 할 때 학습에 대한 도움을 주는 조언자의 역할을 한다. 즉 질문을 통해 학습자의 인지적 활동을 자극하도록 한다든지, 학습자가 풀어야 하 는과제의 전 과정을 먼저 시연해 주어서 개념적 틀을 제공해 준다든지, 여러 자료들을 제시해 준다든지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4.구성주의에 입각한 교수방법구성주의는 학습을 개인의 경험에 근거해서 의미가 개발되는 능동적인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경험에 근거해서 의미가 개발되는 능동적인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개인이 아이디어를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경험이 제공되어야 한다.그러므로 구성주의자들은 구성적 과정이 학교나 교실의 훈련을 넘어 발생하고 전이되기 위해서는 학습이 반드시 실제세계의 맥락을 반영해야 한다고 본다.즉, 지식이나 기능수행상의 문제는 실제 문제해결과정에서 관련된 맥락적 지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구성주의에서는 탈맥락적 지식은 개인의 의미있는 지식구성을 방해하며 비록 핵심적인 내용이 정해져 있고 설명될 수는 있으나 여타의 학습내용은 학습자 스스로 탐색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화폐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대부분 사망 후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계속 존경을 받으며 위대한 업적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각 나라를 빛낼 수 있는 대표자로써 화폐에 인쇄하게 되므로 실로 각 나라의 역사를 통한 자존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존 인물을 화폐에 인쇄하는 경우는 독재주의 국가등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으며 아무리 위대한 업적이 있다 하여도 그의 행동이 모범적이지 못하면 대상에서 제외된다.현재 세계 각국의 통용 화폐는 약 2000종으로 추정되며 이들 화폐에 실린 인물 중에서 과학자는 약30명 정도가 되며 OECD국가의 화폐 중에서는 과학자가 약20명 정도로 전체인물 가운데 16.7%(문화예술인 38.5%, 정치인 35.9%)를 차지하고 있다.따라서 화폐의 생성부터의 변천과정과 화폐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중 과학자에 대해서 그리고 화폐에 가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Ⅰ.화폐의 변천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막론하고 돈(화폐)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생활수단으로, 때로는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인류역사와 함께 존재하여 왔다. 물론 인류 최초의 화폐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은행권 또는 주화와 같은 돈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당시에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 교환의 매개가 가능할 정도의 이동성과 내구성을 지닌 직물, 곡물, 농기구 등이 그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이를 물품화폐(物品貨幣)라 한다. 그후 적은 양으로도 고유의 가치를 가지면서 보관, 휴대 및 운반면에서 편리한 금, 은, 동 등의 금속이 화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금속화폐(金屬貨幣)라 한다.물품화폐와 금속화폐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재가치(素材價値)가 있어 어느 누구의 지급보증이나 유통을 위한 법적 강제력이 수반되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금속화폐의 주조권을 군주 등 국가권력이 소유하게 되면서 주조차익(鑄造差益)을 얻을 목적으로 귀금속 함유량을 감소시켜 화폐의 소재가치가 액면가치보다 낮은 주화를 제조하게 되었다.이와 같이 화폐의 소재가치가 액면가치보다 낮은 화폐를 명목화폐(名目貨幣)라 하는데 오늘날의 화폐는 명목화폐가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은행권(지폐)이다.물품화폐, 금속화폐 그리고 명목화폐로 발달해온 화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은행권과 주화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나 최근에는 정보통신 및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신용카드, 전자 자금이체 등 현금대체 결제수단의 이용이 더욱 보편화되면서 머지 않아 전자화폐(電子貨幣)가 현재의 은행권과 주화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여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상도 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전자화폐가 화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미래에 일반대중이 애용하는 결제수단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일반대중의 확고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이러한 점에서 전자화폐는 아직까지 위조 및 도용(盜用) 등 보안상의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돈 세탁 등 범죄에의 이용 가능성, 국제간 자금이동 파악의 곤란 및 개인정보의 집적에 따른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 등 아직도 해결하여야 할 문제점이 많이 남아있다.아울러 인간의 성향은 원래 손에 잡히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형의 자산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무형의 전자화폐보다는 유형의 현금화폐에 대한 매력을 더 크게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이와 같은 점에서 은행권과 주화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인류의 중요한 지급결제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특 징종 류물품화폐자체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 교환의 매개가 가능할 정도의 이동성과 내구성 보유직물, 곡물, 농기구금속화폐적은 양으로도 고유의 가치를 가지면서 보관, 휴대 및 운반면에서 편리금화, 은화, 동화 등명목화폐화폐의 소재가치가 액면가치보다 낮은 화폐은행권, 주화전자화폐IC칩이 내장된 플라스틱 카드나 PC 등 전자적 매체에 화폐가치를 전자기호로 저장한 화폐IC카드형(몬덱스,비자캐시등), 네트워크형(E-캐시,사이버캐시등)Ⅱ.화폐속에 등장하는 과학자1. 코페르니쿠스(N. Copernicus, 1473-1543)1975-1982년에 사용되었던 폴랜드 1000츨로티(Zloty)- 우리 돈으로 약 40원 가치기존의 천문체계와 다른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꾸준한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는 마침내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일은 수천 년간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자리잡은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는 일대 변혁이었고, 자칫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이단으로 몰릴 소지도 있었다. 1510년경 지동설과 관련하여 썼던 논문은 친구들에게 개인적으로 돌렸고, 1533년에 이르러 교황 앞에서 논문 내용을 강연하여 비공식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계속 주저하다가 친구들과 제자들의 권유로 1540년에야 자신의 원고를 출판하도록 허락했다. 태양이 정지해 있다는 가설은 행성운동의 계산을 쉽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서문에 삽입하고 출간했다.는 전체 6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오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지구 - 달 - 수성 - 금성 - 태양 - 화성 - 목성 - 토성으로 이어지는 천동설의 행성배열을 태양 - 수성 - 금성 - 지구 - 지구 주위를 도는 달 - 화성 - 목성 - 토성의 순서로 바꾸어 놓았다. 제2부에서 그는 태양이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지구의 운동 때문임을 밝혔고 3부에서 지구의 운동에 대한 설명을, 4∼6부에서는 다섯 행성들과 달의 운동에 대한 설명을 전개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오늘날 과학이 입증하는 태양계의 모습과 완전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우주관의 대변혁이 이루어졌으며 근대과학이 태동하게 되었다.2. 갈릴레오 갈릴레이(G. Gallilei, 1564-1642)1973-1990년에 사용되었던 이탈리아 2000리라-우리 돈으로는 1000원 정도이다.스스로 제작한 망원경으로 달과 목성을 관찰하여 관찰의 대상을 목측에서 거시의 우주로 확대하였으며 지동설을 주장한 학자이다.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기도 하여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제1차 재판). 1618년에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그 경과를 《황금계량자》라는 책으로 1623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 수학문자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수량적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다.《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의 저술에 힘썼으며, 일단 정리되자 신교국인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3. 뉴턴(L. Newton, 1642-1727)1978-1990년에 사용, 영국 돈 1파운드- 우리 돈 2000원에 해당역학의 원리, 만유인력법칙, 유체역학, 태양계의 운행, 조석현상에 이르기 까지 많은 내용을 계통적으로 논술하였으며 행성계의 구조해석을 하였다.망원경 제작도 연구, 굴절광은 스펙트럼을 만들지만, 반사광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기초로, 반사식이 수차와 효율면에서 한층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1668년 뉴턴식 반사망원경을 제작했다.《빛과 색의 신이론》이라는 연구서를 협회에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백색광이 7색의 복합이라는 사실, 단색이 존재한다는 사실, 생리적 색과 물리적 색의 구별, 색과 굴절률과의 관련 등을 논한 것이었다. 1675년 박막의 간섭현상인 ‘뉴턴의 원무늬’를 발견하였으며, 빛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광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뉴턴의 최대 업적은 역학에 있다. 일찍부터 역학 문제, 특히 중력 문제에 대해서는 광학과 함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구의 중력이 달의 궤도에까지 미친다고 생각하여 이것과 행성의 운동과의 관련을 고찰한 것은 울즈소프 체류 때 이루졌다고 한다. 167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당시 사람들도 행성의 운동중심과 관련된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수학적 설명이 곤란해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는데, 뉴턴은 자신이 창시해낸 유율법을 이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였다.1688년 명예혁명 때는 대학 대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1691년 조폐국의 감사가 되었으며, 1696년 런던으로 이주, 1699년 조폐국 장관에 임명되어 화폐 개주라는 어려운 일을 수행하였다. 1703년 왕립협회 회장으로 추천되고 1705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다.근대과학 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며,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역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4. 가우스(C. F. Gauss, 1777-1827)1989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독일 10마르크에 등장- 우리 돈으로 6000원 정도이다.수학자·물리학자·천문학자. 아르키메데스와 뉴턴에 버금가는 가장 뛰어난 수학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브라운슈바이크에서 벽돌구이를 직업으로 하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살 때 등차급수의 합의 공식을 창안하는 등 학교에서 신동으로 알려진 수학의 천재였다.브라운 슈바이크공의 후원을 받아 1795∼98년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했다. 19세기 초 17각형의 기하학적 작도에 성공하여 수학 전공을 결정하였다. 95년 2차 형식에 관한 상호법칙의 발전, 그해 최소제공법의 발견, 96년 복소수평면의 도입, 99년 대수학의 기본 정리의 증명, 1800년 타원함수의 발견 등 일찍부터 크게 업적을 쌓았다. 1801년에 대저
1.우리나라 유아교육기관의 발전과 현황(1)초창기 유치원 교육(1897~1921년)최초의 유치원이 세워진 해를 기준으로 법적인 규제가 생기기 직전까지를 한국 유치원 교육의 초창기로 본다.1897년 부산유치원-일본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설립. 이 유치원은 일본인들의 자녀만 입학 할 수 있었고 교사도 모두 일본인으로 해방전까지 계속되었다.1900년 인천유치원- 부산유치원과 같은 취지.1909년 나남유치원-함경북도 경성군 나남읍에 설치. 함경북도 정토종 포교위원에 의해서 세 워졌으며 원아는 약 60명으로 이는 한국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유치원이었다.1913년 경성유치원-일본에 동화하는 친일 사립 유치원. 경성부 인사정에 백인기씨가 한국어 린이만을 위해 세웠으나 친일파 인사들의 자녀를 일본인화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당시 교사는 한국인 3명, 일본인 1명이었으며, 만3세부터 학령전까지 원아가 3학급으 로 총 120명이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24시간 하루 평균 4시간이었으며, 보육료는 월 1명당 2원 50전으로 무척 비싸 부유층 어린이만 다닐 수 있었다.1914년 이화유치원-미국인 선교사 Brownlee에 의해 설립, 한국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유치원으로 16명의 원아와 조수 1명으로 이화학당부설의 유치원이다. 특히 Brownlee는 1940년 미국인 선교사가 철수할 때까지 27년간 오직 유치원 사업에 전 력하였다.*Brownlee의 한국유아 교육계에 남긴 공헌*첫째, 전문가에 의한 본격적인 유치원 교육을 도입했다.둘째, 유치원 교사 교육의 틀을 잡아주었다.셋째, 유아교육 관계의 교재 소개 및 개발에 공헌하였다.1915년 최초의 유아교사 양성기관인 이화유치원 사범과가 설립됨1916년 중앙유치원-한국인 설립자(박희도)가 민족독립을 위하여 설립.1919년 개성 호수돈에 동, 남, 북 세 개의 유치원을 왕래씨가 설립하여 선교사 ClaraHoward가 운영했다.점차 한국어린이들을 위한 유치원이 전국에 보급되면서 1921년까지는 전국에 47개 유치원이 설립되었다.연도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유아교육계에서는 유치원 교육의 의의를 규명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내적 충실을 기하고자 하는 새로운 자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1922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기초한 유치원규정-조선교육령은 일본인이 제정하였으나 유치원에 관한 최초의 법적 근거로 유치원 인허가 관계에 관한 조항을 다루고 있으며, 유치원 교육내용을 유희, 창가, 담화로 함을 나타내고 있다.※해방전의 유치원 프로그램은 아동중심주의적/ 발표행사활동중심의 프로그램으로 나눈다.·아동중심적: 프뢰벨과 듀이의 교육철학과 방법에 의한 유아의 흥미와 발달을 존중하고 놀 이를 통한 교육활동.- 유아교육의 본질·발표중심적: 유아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활동해방전의 유치원의 양적발전은 미미한 상태였다. 유치원 144원중 141원이 사립이었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휴원과 폐원이 잇달았으며 재정마련을 위해 발표행사인 재롱잔치를 열어 지역유지들의 후원금으로 겨우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해방◀…대한민국정부수립(3)교육법과 유치원(1945년 해방후~1962년)1945년 대한민국 수립 후부터 유치원 설치 기본령이 공포되기 전까지를 이 시기로 본다.1945년 해방되기까지 남한에 39개 유치원이 설립되었다.1946년 보통교육국 초등교육과에서 유치원 업무를 담당1949년 「교육법」-유치원 관계규정을 만들면서 공립유치원의 설립과 확대를 계획, 유치원 교원자격을 규정하고 유치원 교육적 환경개선을 위한 시설 기준령 제정·공포되었 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6.25동란과 사회·경제적 침체로 유치원의 양적 발전은 거의 없었다.1950년 5월 국가가 '국립유치원 설치 계획'을 발표하여 유치원 발전의 발돋음을 시작하려할 때 6.25사변이 일어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의 유치원은 모두 159개에 불과했 다.1952년 교육법 시행령이 공포-유치원에 관한 설립인가와 원아수, 보육 과목, 보육 일수등이 정해졌다.1955년 문화국 사회교육과에서 유치원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1962년 336개의 유치원에서 186680*************010481112(4) 유치원 설치 기본령과 유치원(1963~1980년)1962년 유치원 시설 기준령 마련, 문교부령 제106호1963년 보통교육국 교육행정과에서 유치원 업무 담당 (12.16)유치원 시설기준령 공포- 무질서하게 설치되고 운영되었던 유아 교육에 시설 기준 을 정함으로써 유치원의 교육적 환경이 개선되었다.1968년 유치원 수업료 및 입학금 정액표1969년 유치원 교육과정의 제정-60년대에 이르러서야 유아교육발전의 기초를 형성.2.19- 제1차 유치원 교육과정제정: 유아 교육에 대한 장기계획을 세워 취학적 교육 의 교육적 의의를 중시하고 지금까지 전적으로 가정에 의존해 왔던 취학전 교육을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설정했다.※해방 후 약 20년간 유아교육의 잠재기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아교육에 대한 사회인식의 부족과 제도적 정비가 불완전했던 상황으로 유치원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정체현상을 면하기 어려웠다.1970년대 국가경제발전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의 노동력이 요구되고 이에 따라 유아교육의 필 요성과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민간주도형의 유치원 교육이 정부주도형으로 전환되 었다.1976년 최초의 공립유치원인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으로 서울 4개, 부산1개 총 5개 유치원을 설치하고 4년제 대학 유치원교사 양성기관외에도 2년제 유아교사 기관인 전문대학 보육과를 설치하였다. 유치원업무는 의무교육과에서 담당하게 되었다.1979년 3.1- 제2차 유치원 교육과정 제정. 유치원 교육의 대중화를 위한 교육과정의 근거마 련을 위해 삐아제의 인지 중심 유아교육과정의 흐름에 따라 발달영역 중심의 유치원 교육과정령을 개정하여 재능교육, 특기교육, 조기교육, 취학준비교육의 유아교육 개념 에서 벗어나 유아의 발달 과업을 충실화하자는 취지에 따라 개정되었며 당시 유치원 취원율은 2%정도에 머물렀다.1980년대는 산업화와 가족구성의 변화, 취업여성 증가로 유아의 보호와 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게 됨. 따라서 유치원이 901로 증가되었다.연하고 이에따 라 유치원수와 취원율이 급증하였다. 이에 따 유아교육활성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12.31일 제3차 유치원 교육과정 제정이 제정되었다.1982년 유아교육진흥법을 제정하고 공포하였다. 유아교육진흥법에 의해 유아교육의 변화와 발전의 계기. 유치원(교육부)과 새마을유아원(내무부)의 2원화 체제가 성립, 새마을 유아원이 신설되어 증가하기 시작.유아교육기관 정비통합계획을 수립했는데 통합 정리하기 전 공·사립유치원에서부터 선교원, 골목유치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형의 기관이 난립하고 교육프로그램, 기관 의 질도 다양하여 일관된 정책결정이나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1982년 「아동복지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어린이집 설치근거를 삭제하고 유아교육진흥계획 은 5세아의 취원율을 끌어올렸다.- 1980년대 제5공화국은 조기교육의 중요성인식 공 ·사립유치원의 확충을 도모하였다.(정부차원)1983년 최초로 유아교육의 정부 행정 부서인 유아교육 담당관실을 설치하였고 시도교육위원 회에서 유아교육 담당 장학관을 배치하였다. 유아교육의 일원화를 이룬 시기1986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취원율(57.1%)을 보였다.1987년 6.30- 제4차 유치원 교육과정 제정1990년대 접어들면서 우리나라 유아교육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데 유아교육 사설기관으로 일원화 되었던 새마을 유치원이 다시 유치원 또는 탁아소로 전환되었다.1991년 「교육법」에 의한 유치원, 「유아교육진흥법」에 준하는 새마을유아원,「영유아보육 법」에 보육시설로 분리된다.1992년 9.30- 제5차 유치원 교육과정 제정1993년 내무부 산하의 새마을유아원은 교육부의 유치원과 보건사회부 어린이집으로 전환1998년 6.30- 제6차 유치원 교육과정 제정-현재까지.현재 우리나라 유치원은 1991년 12월 31일 교육법 제148조를 개정하여 1992년 3월부터는 만3세부터 취학전 시기까지 유아들을 대상으로 전인적 발달을 강조하고 있다.연도유치원수원아수교원수*************9871989199119931995199729584276상교육이 단계적으로 실시될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원화 체제가 계속 문제점으로 남으며 재원확충과 세부시행규칙이 과제로 남아있다.*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에 대한 견해*그 기준을 기관설립 자체로 볼 것인지 설립자와 교육대상인 유아의 민족성으로 볼 것인지 기관의 설립동기로 볼 것인지에 따라 각기 다르다.·1897년 부산유치원-우리나라 유치원의 효시를 유치원의 명칭을 갖고 처음으로 이땅에 설립되었다는 점에서(이영석,1997)·1914년 이화유치원-전문가에 의한 본격적 유치원교육이며 뒤이어 유치원사범과가 개설되어 유치원교육의 모델과 유치원 사범과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이상금,1995)2. 우리나라 유아교육과정⑴ 제 1차 유치원 교육과정 (1969. 2. 19 문교부령 제 207호)유아기의 중요성 및 바람직한 성장, 발달을 강조하는 아동중심 교육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치원 교육의 목적은 건강한 신체와 건전한 정신으로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는 유능한 한국인의 양성에 있다.⑵ 제 2차 유치원 교육과정 (1979. 3. 1 문교부 제 424호)조국 근대화의 성취, 평화적인 국토 통일, 민족 중흥을 이룩하려는 이념 하에 국민적 자질의 함양, 인간교육의 강조, 지식, 기술 교육의 쇄신이 기본 방침이다. 인지발달과 국가발전을 강조했다.⑶ 제 3차 유치원 교육과정 (1981. 12. 31 문교부 고시 제 442호)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의 개정에 발맞춘 것으로, 민주·복지·정의사회 건설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국민을 길러내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유아들에게 알맞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줌으로써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교육목표이며, 각 영역별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관련 영역끼리의 통합 하에 지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⑷ 제 4차 유치원 교육과정 (1987. 6. 30 문교부 고시 제 87-9호)제 3차와 동일한 교육과정 이념아래 전인 발달을 위한 교육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각 발달영역별 내용은 제시하지 않고 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