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본문 요약제 1장 역사의 개념1. 원초적 역사1) 역사의 원초적 개념2) 역사의 주체와 원초적 역사의 내용2. 서술로서의 역사제 2장 역사를 알면 무엇이 좋은가? - 몇 가지 예제 3장 역사의 발생1. 원초적 역사의 발생(1) 인간의 출현에 대한 창조설과 진화설(2) 지구와 생명, 인간의 탄생(3) 원초적 역사의 발생 - 양적 확대와 질적 전환 및 그 예2. 서술로서의 역사 발생 - 역사의식과 역사서술1) 역사의식2) 역사 서술의 발생 참고문헌 요약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 개인적 고찰*참고문헌*-역사이야기 1?2?3장 요약 및 비평 -본문 요약제 1장 역사의 개념1. 원초적 역사1) 역사의 원초적 개념역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는 등의 것들은 알기 전에 먼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물어볼 때면 사람들은 ‘역사란 과거를 알아서, 현재를 알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역사를 배우는 목적에 대한 대답, 즉 역사를 목적론적 측면에서 설명한 대답이다. 다른 측면에서의 역사의 정의는 우선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우리는 ‘원초적 역사’ 또는 ‘1차적 의미의 역사’ 라고 한다.2) 역사의 주체와 원초적 역사의 내용위에서의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실 혹은 사건’ 이라는 정의가 엉성해 보이는 이유는 역사의 주체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역사의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자연재해(지진이나 해일 등) 같은 자연 현상에 의해 일어난 일이나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에 의해 일어난 일들, 공룡의 소멸 등의 인간 이외의 존재에 의해 일어난 일들도 역사의 범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초적인 역사를 최종적으로 정의하자면 ‘과거 인간에 의해 일어난 모든 행위?과정?형상’ 이라고 할 수 있다.2. 서술로서의 역사역사는 크게 두 가지 정의로 볼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난 모든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과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은 것이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는 것 역시 참고할 전례가 전혀 없었으므로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 속에서 무언가 참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사마천의「자치통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시행하는데 드는 시간과 노력, 그 후 일어날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나 이에 대한 기록이다. 이처럼 앞선 시간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이나 기록이 곧 역사인데 역사를 아는 것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더 좋을 것이다.몽고군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강화도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과 일본 침략을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바닷길에 무지한, 해전을 해보지 않은 몽고병사들의 역사적 경험의 결핍 탓이었다. 이런 예도 역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우리가 어떤 일을 시행할 때 작은 일이건 큰일이건 1차적 의미의 역사를 이미 반복했거나 그 일들을 반복하면서 서술해 놓은 2차적 역사가 있다면 일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처음 하는 것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역사는 망망대해를 항해한 경험이나 그것을 기록한 해도와 같은 것이다.위의 사례들은 역사의 현실적 효용성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를 통한 인간의 ‘자기 발견’과 ‘세상 이해’가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과 사회, 세상을 발견하는데 다른 사람의 충고와 비판도 들어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필수적이지만 역사를 아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자기와 인간과 사회와 세상의 시간적 좌표를 찾아내고, 정체성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제 3장 역사의 발생1. 원초적 역사의 발생⑴ 인간의 출현에 대한 창조설과 진화설인간이 언제,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 고대인들은 신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의식을 만들었다. 이런 창조설은 고대 문명지역에서 많은 종류와 신화들이 존재하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의 사색이 반영된 와 대기가 존재하게 되며 무생물과 생물이 진화되는 과정도 이 무렵부터 시작하게 된다고 한다. 단세포 생물들이 단백질이나 핵산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이 성장하여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생물이라는 존재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생물 중 포유류는 겨우 1억 5천만 년 전에 출연하고 그 중 영장류는 7천만 년 전에야 등장하였다. 인간은 지구상 수많은 생명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짧은 생명체이다. 인간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약 390만 년 전 출현하였고 이어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 현생 인류의 직접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약 4만 년 전에 출현하였다. 이들이 인간의 역사 중에서 선사시대의 주인공들이다.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인간과 동물의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임이 드러나며 인간은 점차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 대세이다.(3) 원초적 역사의 발생 - 양적 확대와 질적 전환 및 그 예역사가들은 역사를 기록할 때 ‘양적확대’와 ‘질적 전환’을 생각하게 된다. ‘양적확대’는 기본 패턴 자체에 별 변화가 없는 변화를 뜻하며 ‘질적 전환’은 종전에 없던 전연 새롭고 엄청난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현생인류가 출현한 후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은 기껏해야 양적확대에 불과했다. 선사시대의 몇 가지 질적 전환들은 예로 들어보면 먼저 1만 년 전 간석기를 만들고 농경과 목축을 하여 식량을 생산하며 토기를 만들어 음식을 조리하고 움집을 지어 정착생활을 한 것은 그 어떤 동물들도 해낼 수 없는 대단한 진보였기에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 한다. 한편 우리나라는 기원전 1000년 전후에 청동기 단계에 접어들었다. 청동기의 사용을 통해 지배와 피지배 관계, 국가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인류 최초로 철기를 만든 메소포타미아의 히타이트가 멸망하면서 철 생산 기술이 확산되고, 철기를 농경에 사용하면서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증가와 인간 삶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야기했다에 인간 개인이나 집단의 자아 발견의식을 추가해도 좋을 듯하다. 인간의 역사의식에는 상당한 허구가 개입하기 마련이므로 역사서술에도 당연히 상당한 허구가 개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후세 사람들은 허구적 역사의식의 소산을 마치 실제적 역사사실의 소산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의식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흐름에 대한 의식이며 결국 시간적 변화에 대한 감각이자 시간적 흐름에서 존재의 좌표를 찾는 정신활동이다. 역사의식은 객관적이면 객관적일 수록 논리적 설득력을 얻고 진정한 역사지식의 바탕이 될 것이다.2) 역사 서술의 발생서술의 역사도 개인이나 집단, 국가의 자기표현 욕구와 통치 수단의 요구에서 출발한다고 보이는데 역사의식이 발달하여 자신들의 의도에 맞는 사실들을 선별하여 기록하는 ‘서술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보다 체계적인 역사 서술은 공자의 『춘추』와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나타난다. 한편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자신들이 타도한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세웠다. 신라를 포함한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중국의 청나라 역시 원나라처럼 망한 이전 왕조인 명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역사도 모르는 오랑캐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문화민족임을 과시하고 명의 지식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명나라의 유신들이 참여하여 완성된 『명사(明史)』는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역사는 남겨져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에게 가장 큰 재산을 물려준다는 것, 그 안에서 통치에 필요한 여러 역사적 사실을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고문헌 요약 - E.H.카 역사란 무엇인가1830년대에 랑케는 역사의 도덕화를 규탄하는 정당한 항의를 제기하여 “역사가의 임무는 그것이 진정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을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역사가가 정확하게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그의 일의 필요조건이지 본질적인 기능은 아니며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그것을 찾아줄 때에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고 어떠 한 역사는 쓰여 질 수 없는 것이다.셋째,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비로소 과거를 볼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이해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과거에 소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속해 있다.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써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역사 서술에 있어서의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것을 논리적 귀결점에까지 끌고 나갈 경우 결국 객관적 역사란 것이 전연 배제 당하게 되고 역사란 역사가가 만들어 내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역사가는 임시로 선택된 사실과 그러한 사실 선택을 이끌어 준 임시적인 해석, 그것이 타인에 의한 것이건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건 양자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역사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한편 사회와 개인은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필요한 보충 관계에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하나의 사회 속에 태어나서 사회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역사가의 지식이란 오랜 세대를 거친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참여하여 축적시킨 것이다. 역사가들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과거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사회적?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란 분명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비전이 현재의 재문제에 대한 통찰에 의하여 빛을 받을 때에만 씌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사회 속에 있는 개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실이며 또한 개인행동으로 행위자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이거나 정 반대의 결과까지를 초래하게 되는 사회적인 힘에 관한 사실이다.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빌린다면 역사는 한 시대가 타 시대 속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일들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인간이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의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인 것이이다.
고전문학사 과제*목차*1. 조선 전기의 문학1.1 조선 전기의 시조문학 - 시조의 발전1.2 조선 전기의 가사문학 - 가사의 발생과 정착2. 조선 후기의 문학2.1 조선 후기의 시조문학 - 시조의 변모2.2 조선 후기의 가사문학 - 가사의 변모3. 조선 전기와 후기의 시조와 가사문학 비교1. 조선 전기의 문학조선 전기의 문학은 조선 건국으로부터 임진왜란까지의 약 200년간의 문학을 의미한다. 엄밀히 말하면 훈민정음 창제부터 임진왜란까지의 문학이다. 그 이유는 이 때부터 우리의 사상과 생활감정을 우리 고유의 문자로 표현한 본격적인 우리 문학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태조는 조선을 창건하여 고려 말의 문란했던 기강을 바로 잡아 민심을 수습하고 관료 체제를 확립했다.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왕권과 관련된 여러 분쟁이 거듭되고 사화(士禍)나 당쟁 등 정치적 격변이 끊임없이 이어지다가 급기야는 임진왜란을 겪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대부들은 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상층부로 자리 잡게 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문학 활동이 활기를 띠게 된다.이 시기의 문학사상 가장 의미 있는 일은 훈민정음의 창제로서, 이에 따라 본격적인 국문학이 가능하게 되고 새로운 양식들이 많이 등장하게 된 것은 물론, 구전 문학이 정착되고, 외국 문학이 번역되는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조선 전기는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아 성리학 중심의 유교 문화를 확립하였고, 따라서 문학도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귀족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를 계기로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양식인 시조, 가사, 소설 등이 우리글을 표현매체로 하여 창작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1.1 조선 전기의 시조문학 - 시조의 발전고려 말기에 이미 형태가 갖추어져 있던 시조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 훈민정음이 제정됨에 따라 우리 국문학의 대표적인 문학 양식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에 이르러 시조가 더욱 발달하게 된 것은 간결하고 소박한 것을 외에도 무신으로서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하는 김종서의 호방한 시조나 폐위된 단종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드러나는 이개와 왕방연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한편, 16세기에 들어와 정국이 안정되고 왕조의 기틀이 잡힌 뒤로는 유교 사상과 함께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영향을 받아 자연 속에서 한가롭고 평화로운 자연미를 노래한 한정가, 강호가 등이 지어졌다. 그러나 초기 작품은 순수한 자연을 노래한 것이라기보다는 유교적 충의 이념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대다수였다. 이현보, 송순, 성혼, 정철 등의 시조에서 발견되듯, 자연적 배경을 통한 비유적 표현이나 한가로운 삶의 서정에 대한 주제로 영역이 전환되었다.또한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비롯하여 학자들 간에도 시조를 짓는 사람이 속출하게 되었으며 시조가 일반에게 널리 확산되면서 작자층도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유학자들이 작품이 대부분 관념적인 경향으로 흐른데 비하여 황진이와 같은 기녀들의 작품은 고독과 한에 젖은 정서를 진솔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여 시조의 문학성을 심화시켰다. 기녀들의 시조에서는 일상적인 생활 감정과 남녀 간의 애정 표출이 나타나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송강 정철이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은 ‘훈민가’를 통해 평민들에게까지 시조가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 시기의 시조 작품들은 창(唱)을 위한 문학이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단형시조, 평시조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단형시조가 중첩된 연시조로 발전하였다. 연시조의 효시가 되는 작품은 맹사성의 ‘강호사시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자연을 즐기며 임금을 생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시조의 형식을 가진 작품으로는 삼강오륜을 노래한 주세붕의 ‘오륜가’와 어부가 되어 즐기는 안빈낙도에 대해 노래한 이현보의 ‘어부가’, 인격수양 및 학문 정진의 흥취를 노래하고 권유하는 ‘도산십이곡’과 ‘고산구곡가’, 백성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은 정철의 ‘훈민가’ 등이 있다.고려 중기부터 발아하기 시작하여 전승되어 오던 시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훈민정, 나아가 자연에 한 걸음 접근하는 과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독자적인 양식으로서 자아를 드러내는 개성의 문학으로 성장한 것이다.그 후 연산군 대의 사화 발생으로 정계에서 몰락한 선비들이 산림학파를 형성하게 되면서 자연은 한층 인생에 접근되고 이해되어 문학 작품 속에서 그 참다운 미가 노래되었다. 이현보의 어부사, 송순의 자상특사황국옥당가 등은 이런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시조는 비단 가객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은 도산십이곡이란 연시조를 지었고 그와 쌍벽을 이룬 이이도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이렇게 학계의 거장들이 시조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창작하자 그 영향은 곧 학계 전반에 미쳐 학자들 간에도 시조를 짓는 사람이 속출하게 되었다.시조가 이처럼 일반에게 널리 확산되면서 작자층도 사대부를 넘어서 폭넓게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중요한 시조 작가로 개성의 명기 황진이가 있다. 그는 6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 절작으로 다른 도학자들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꾸밈없는 생활감정과 인정을 엿볼 수 있으면 정교한 수사를 발견할 수 있다.가사 문학의 거봉인 송강 정철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 곳 백성들을 위해 훈민가를 지었는데, 이는 시조가 평민들에게까지 통용되는 문학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시조는 이제 명실상부한 국민 문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1.2 조선 전기의 가사문학 - 가사의 발생과 정착가사는 가사(歌辭)와 가사(歌詞)의 두 가지 명칭 중 가사(歌辭)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데, 4음보 연속체로 된 율격이 우리 민족의 호흡에 자연스럽게 일치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유교적 교훈적인 이념을 표현하는데 알맞은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시조와 더불어 조선의 시가 문학을 대표하는 국문시가로 일컬어진다.가사의 형식은 운문문학에 속하지만 그 내용은 개인적인 정서의 표현만이 아니라 교훈적인 훈계나 여행의 견문 및 감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시가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사-결사의 짜임을 갖추고 마지막에는 시조의 종장과 흡사한 낙구를 덧붙이고 있다.왕조 창업의 시대에 크게 요구되었던 악장의 기능은 조선이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거의 사라지고 개인의 서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그 가운데 시조가 확대되고 가사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가사는 경기체가가 쇠퇴하면서 발생하였는데,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정서를 시조보다는 좀 더 긴 형식 속에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고안해낸 형식이다.가사의 효시를 조선 초 정극인의 ‘상춘곡’으로 보는 입장과 고려 말의 승려 나옹의 ‘서왕가’를 효시로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서왕가’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창작되어 후대 문헌에 수록된 점으로 보아 나옹의 작품인지 의심스럽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는 ‘상춘곡’을 효시로 보는 입장이 우세하다.이렇게 시작된 조선 전기의 가사문학은 양반층이 창작을 주도하였던 만큼 시조와 비슷한 내용이 많다. 송순의 면앙정가(?仰亭歌)를 다리로 하여 송강 정철에 이르러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가 지은 성산별곡은 공교하고, 관동별곡은 웅장한 서사시이며,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섬세한 서정 시가이다.즉, 이 시기에는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과 같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혀 살아가면서 안빈낙도하는 군자의 미덕을 노래하는 한편, 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성격을 지닌 작품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시기의 정철의 가사 작품은 아름다운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밖에도 내방가사로서의 면모를 갖춘 최초의 작품이기도 한 허난설헌의 규원가 또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가사는 조선 전기에는 주로 양반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졌지만 조선 후기에는 작자층이 확대되어 서민과 양반 사대부 계층의 부녀자들이 가사 창작에 참여하여 그들의 애환을 표출하기도 하였다.2. 조선 후기의 문학조선 후기 문학이란 임진왜란(1592)에서 갑오개혁(1894) 이한 평민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외적의 무력 앞에 너무나도 무력했던 양반 사대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불신 풍조가 일어나고, 일반 서민의 자아 각성에 의한 평민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양반 지배층의 무능과 허식이 폭로되고, 평민 계층이 사회의 표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2.1 조선 후기의 시조문학 - 시조의 변모조선 후기에 와서 시조는 학자와 일반인의 교양이 되었고, 생활의 일부부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시조의 향유 계층이 사대부에서 평민층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내용도 관념적 유교적 내용에서 다양한 현실적 삶을 표현한 내용으로 다양해졌다. 또한 형식은 각 장 4음보의 정형성이 파괴되어 시조의 장형화를 이루었으며, 이에 따라 사설시조가 등장하게 되었다. 전문 가객 중심의 가단이 형성되고 시조집이 편찬되는 등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시조는 국민 문학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윤선도의 시조는 전원생활의 멋과 흥겨움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그림같이 묘사한 주옥같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윤선도 이후의 시조 문학은 정리기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고 평민 계층에 속한 인물들이 시조 창작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조선 후기의 시조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임진 병자 양란 직후에는 전란의 흔적을 노래한 시조들이 나타나 시대적 고뇌를 보여주었다. 또한 기존 체제와 평시조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긴 시조가 나타나는가 하면,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전원생활의 멋을 노래하는 이전의 전통을 계승한 시조도 나타났다.또한, 조선 후기 산문 정신의 영향으로 평시조의 정형성에서 탈피한 엇시조와 사설시조가 등장하였는데, 사설시조는 대부분 작가와 창작 연대를 알 수 없다. 사설시조는 당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세태에 대한 풍자와 서민들의 소박한 생활 감정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크다.한편, 이 시기의 시조창은 전통적인 가극창과 비교할 때 곡조가 좀 더 빠르며 초?중?종장의 3장 중 종장은 생략하기도 한다. 대중적인 창법으로 18세기다.
▶ 고대소설(古代小說)이란고대소설이란 옛날 설화를 바탕으로 중국 소설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산문 문학의 한 종류로 갑오경장(1894) 이전까지 쓰여진 옛소설을 말한다.조선시대 소설에 대한 개념은 소설을 비평, 수필, 실기, 설화, 야사류 등과 거의 동일시하였고, 픽션과 논픽션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역사와 비역사적 기록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에는 소설을 독립된 양식의 장르적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소설은 허황된 이야기로 기이하고 음란한 것이어서 자녀교육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사회교화에도 약영향을 끼치므로 이를 국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유용성을 인정하는 등 소설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학자들 사이에 퍼져갔다.가. 소설 무용론-사대부들은 소설이 허황한 이야기,풍속을 어지럽히며,체제 비판적이라고 배 척.나.김만중 등 일부 사대부의 긍정적 반응 -소설이 다른 역사책보다 오히려 감동의 폭이 크 기 때문에 읽을 만한 것▶ 발생과 발달고대설화 → 패관문학, 가전체 → 고소설 → 신소설 → 현대소설※설화(신화.전설 민담) * 신화-'영웅의 일대기'(고전 소설의 주요 요소)고조선의 건국서사시에서 고려 후기의 가전체에 이르기까지의 서사문학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 자체가 우리 고전 서사문학의 전개양상을 보여준다는 데에 제일의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이 서사양식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장르를 달리한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설화시대에서도 신화가 앞장을 서고 그 뒤 전설과 민담을 주축으로 한 설화의 새대가 전개되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서로하가 소설에 접근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는 바 그것이 傳奇와 같은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대설화와 패관문학, 가전체들은 고전소설, 나아가 한국소설의 원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민간설화기원: 고소설이 민간설화로부터 기원한 경우, 즉 원래의 하나의 설화 또는 여러 설화의 결합으로 일정한 전승과정을 거치면서 누적, 첨가, 개산되어 후대에 이르러 소설로 이루어진 고소설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춘향전: 열녀설화, 염정설화, 암행어사설화, 관탈민녀설화→ 불전설화기원: 넓게는 설화기원 고소설에 해당하지만 불전설화가 특수한 종교적 문헌설화인데다 이들 대부분이 인도설화적 근원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을 달리해 볼 수 있다. 예) 안락국전, 금송아지전, 토끼전, 두껍전→ 중국설화? 소설기원: 중국의 풍부한 설화, 소설을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 들어와 많이 읽혔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설화, 소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중국설화, 소설에 근원을 두고 파생되었거나 영향을 받아 창작된 고소설이 상당히 많다. 예)태평광기, 삼언이박, 금고기관, 서유기, 삼국지연의→ 傳계 소설의 형성: 한문문체 양식인 전으로부터 이루어진 고소설의 경우이다. 전은 원래 한 인물의 생애를 기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사전(史傳), 家傳, 託傳,假傳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그 전개과정에서 소설로 변모되든가 소설의 형성에 기여하게 되면서 고소설의 한 갈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 사건 및 인물기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이 처음에는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다가 관련 야담이나 전설, 민담 등과 융합, 후에 소설로 진화된 경우이다. 대체로 역사소설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이들 고소설은 사실을 토대로 하되 여기에 허구적 창작이 가미되고 작자나 작자층의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예) 임진록, 박씨전, 정향전, 임경업전→ 작자에 의한 창작소설: 고소설의 작자는 많지 않은데, 그 특정상 위 5가지 계기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때문도 있으나 그외 소설을 경시한 문화 풍토에서 작자가 있어도 밝히기를 꺼리거나 있다해도 무명인이기에 밝힐 수 없었거나 또는 후대의 필사과정에서 누락되었을 거승로 보인다. 작자층의 성분은 한가로운 지식계층, 몰락 양반, 문학과 한글에 능한 서민층, 여류층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600편으로 추정되는 고소설 중 이의 작자로 알려진 사람은 김시습, 허균, 권필(주생전), 김만중(구운몽, 사씨남정기), 박지원(양반전) 등 2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발달 과정가.최초 본격 소설:홍길동전나.소설 수준 상승:구운몽.사씨남정기다.지식인 한문 소설 등장:허생전.양반전(실학 사상.당대 사회 강하게 비판)라.판소리계 소설 탄생:춘향전.흥부전마.낙선재본 소설(궁중 소설) 창작:완월회맹연.명주보월빙(장편 대하 소설)*고전 소설 성장 이유①임병 양난으로 많은 변동 체험(신분 질서.사회 구조의 변동) -세력 잃은 양반 속출 -서민들의 자각 급속도로 진행 ---->산문화 경향②실학 등장③조선 후기 영리 목적으로 창작 -18,9c 양적 확산▷고소설의 전개과정고소설 전개의 시기는 일단 광의의 개념으로 보아 고소설의 원류라 할 구비설화시대 즉 삼국시대 이전인 1세기경부터 고소설이 쇠퇴하고 신소설이 등장하는 20세기초까지로 잡을 수 있다. 물론 본격적 의미의 협의의 고소설로부터 보아 삼국사기 열전이나 수이전의 문헌설화로부터 시작된다 할 때 대략 12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로부터 보아도 15세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나 고소서의 특정상 그 시초를 설화시대까지 소급하기로 한다.?구전신화시대는 종합예술에서의 서사무가에 해당, 천지창조나 생명의 유래, 건국이나 시조의 유래가 그 내용이었을 이들은 그 구성이 영웅의 일생, 곧 전기적 유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서사유형이 후대에 소설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신화에서 전설, 민담으로 변모되는 삼국시대는 불교 전래에 따른 설화의 다양한 변용과 신화적 영웅이 아닌 민간적 영웅담의 출현.?삼국사기 열전이나 신라말 이래 전승되던 수이전의 유행은 고소설의 모태를 더욱 확고히 하는 터전이 되었다. 특히, 김유신과 도미등 유명,무명의 명장, 학자, 효녀, 충신 등 86명의 열전은 역사적 사실의 토대 위에서 흥미로운 설화적 요소가 가해져 후대 서사문학 중 傳記소설의 근원이 되었다. 수이전에 기록된 승전이나 최치원설화, 수삽석남설화, 심화오탑설화 등은 한편의 傳奇소설 내지는 傳記소설로 볼만한 것도 있어 이 시기가 소설의 모태임을 잘 말해준다.?고려 후기에는 본격적인 서사시(이규보의 동명왕편, 이승휴의 제왕운기), 家傳(이색의 정씨가전, 이규보의 노북정전등), 假傳(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託傳(이규보의 백운선생전)의 전기문학, 그리고 역시 고승전류(각훈의 해동고승전)가 활발히 지어졌다.?조선시대 김시습의 금오신화 창작과 최초의 불전계 한글소설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소설이 성립되었다.연산군대에서 선조 말을 전후한 시기에는 여말 이래의 가전(정수강의 포절군전, 송세림의 주장군전)의 계속적인 창작과 몽유록(심의의 대관재몽유록)의 출현,그리고 새로운 고소설 작가(허균, 권필, 임제, 신관한 등)의 탄생.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거푸 일어났던 시기는 무엇보다도 한글소설류인 군담계소설(유충렬전, 임진록, 박씨전, 임경업전 등)이 쏟아져 나와 소설 문단을 풍요롭게 하고 이에 따라 독자층이 크게 확산된 때이다. 또 이시기의 작자로 김만중,조성기등을 들 수 있다.영조대에서 정조 말을 전후한 시기로 조선후기에 해당전대의 군담소설, 가정소설, 염정소설 등이 계속 나오고 또 그 독자층이 확대되는 한편, 판소리계소설의 등장과 전계소설이 다수 창작되는 등의 두가지 변화가 있었다. 또 몽자류 소설과 대하가문소설, 그리고 문헌설화집이 다수 출간되었다.19세기에는 전시대의 전성이 계속되는 한편, 일부 새로운 작가의 출현과 판소리류 소설 등의 방각본 출간 그리고 야담집의 출간 이외에는 구 후반에 이르러 대체로 침체되어 가는 국면에 접한 시기이다.▷한문소설우리 나라 소설은 전기적(傳奇的) 요소를 간직한 한문소설에서부터 출발한다. 전기적이라는 말은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닌 진기한 것(일상적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을 허구적으로 짜 놓은 것을 말한다.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한국 고대 소설의 효시인데, 이 작품은 민중 사이에서 구전되던 설화, 고려의 패관 문학, 가전 등의 서사적 전통 위에 중국의 전기소설인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전기적 요소를 간직한 한문 소설은 고대 소설의 출발을 보여주며 국문 소설이 나오기 전에, 임제의 '원생몽유록', '수성지', '화사' 등의 가전과 몽유록 양식의 전통 속에서 전개되었다.※김시습의 금오신화소설시대를 연 첫 장에 해당되는 금오신화는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설화문학의 축적과 전기의 발달을 바탕으로 출현된 것이다. 물론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의 영향도 고려할 수 있으나 외래문학의 충격에 의한 것보다는 우리 서사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축적된 힘이 금오신화를 출현시켰으며 이로써 본격적인 소설시대가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김시습이 경주 금오산에서 은거할 때 이 금오신화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현전하는 다섯편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전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가 있다. 주로 지상계와 천상계을 넘나드는 주인공의 꿈과 행적을 중심으로 하면서 수많은 삽입시를 동원하여 서사를 진행시키는 특이한 구성으로 된 작품들이지만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김시습의 갈등에 찬 내면의 형상화이기도 한 작품이다.2) 국문소설한국 문학사에서 진정한 국문학으로서의 소설 문학은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서 비롯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사회 구조의 근간이었던 신분 질서에 큰 동요를 가져왔다. 양반 계층, 평민 계층 모두에서 신분의 분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평민들의 자각 의식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평민 계층의 문화적 참여와 함께 문학에서 산문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이에 따라 소설의 융성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설은 몰락한 양반 내지 평민들의 환상과 꿈, 그리고 시대적인 요구와 개혁의 의지 등을 반영하였다.※연암 박지원의 한문단편소설연암 박지원의 소설들은 이용후생을 주장한 북학파의 리더답게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실력을 축적하면서 불의를 배격하는 민중들의 건전한 세속주의와 예속적인 신분의 귀천에서가 아니라 실제적 능력에 인간평가의 기준을 두려는 경향 등, 당대의 시대정신을 보다 체계적으로 구현한 작품들이다.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대륙의 딸」을 읽으면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가깝고도 먼 나라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시피 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큐멘터리 소설답게 외할머니, 어머니, 자신까지 3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쓴 이 소설은 거대한 중국의 파란만장한 성장기를 보여주었다. 감상문을 쓰기 전에 나가 1994년 대흥출판사에서 출판된 「대륙의 딸」을 읽었음을 미리 밝히고 싶다.1.줄거리이 글은 가장 나이 많은 주인공인 저자(장영)의 외할머니(유방)로부터 시작한다. 만주의 주도권을 일본이 장악하던 시절인 1909년에 태어났다.외할머니는 봉건주의 사회하의 전형적인 중국여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외증조부는 의현이라는 작은 마을 하급경찰의 딸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출세의 도구로서의 삶의 가치를 부여받았다. 100여년 전 중국여자들의 삶에서 '전족'은 빼놓을 수가 없다. 출세의 도구로서 딸을 상납하려면 예쁜 것은 기본이고 가장 큰 매력은 작은 발이었다. 전족으로 뒤뚱거리며 걷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준다는 것이다. 그녀는 두 살 때 발이 묶였다. 외할머니는 사 선생과의 재혼 이후 전족을 풀었지만, 전족 때문에 평생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다.외증조부는 입신출세와 부를 꿈꾸고 딸을 수지행이라는 군벌장군의 첩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외할머니는 하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수인과 같은 생활을 한다.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후에 떠난 남편이 6년 후에야 잠시 들렀을 때 그녀는 작가의 어머니(더홍)를 임신한다. 장군이 죽게 되자, 본가로 소환된 그녀는 본부인에게 딸을 빼앗기고 사창굴에 팔리게 될 위기에 놓인다. 그녀는 어린 딸을 데리고 탈출한 지 얼마 후, 장군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자신도 첩으로서의 신분에서 풀려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녀는 다시 친절하고 학식이 높은 의사인 사선생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사선생의 가족에게 런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성도에서 태어난 소해까지 다섯 명의 아이들은 주로 외할머니의 손에서 길러진다. 그들의 부모는 처음에는 너무 바빴고 나중에는 시련을 겪으면서 아이들을 보살필 수가 없었다.한편 중국 대륙은 모택동의 위선적인 정치 캠페인과 환상에 가까운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러한 와중에서 작가는 고위관리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는 세계 속에서 자라난다.아버지는 수많은 탄핵대회에 끌려 나가야 했다. 그러한 시간을 지나면서 저자의 아버지에게 정신이상이 찾아왔다. 그가 온 몸으로 헌신하였던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와 잦아들지 않는 문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예리한 지성은 분열되고 말았다. 정신이상이 된 아버지는 밤이면 집에서 잠을 자고 낮이면 조반파에 이끌려 탄핵대회에 나갔다.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1백여 차례의 탄핵대회를 겪어야 했다. 그녀는 남편을 비판하는 데 동의하고 국민당 스파이임을 자인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는 거절했고, 자녀들의 목소리에 응답할 수 없었다.중국의 전역에서, 소수의 사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고 성을 바꾸고, 가정은 깨어지고, 이웃 간의 유대도 깨어졌다.장영은 자신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밤 총알이 들어와 박히는 방에서 잠을 자다가 생각하였다. 그 역시 모를 신처럼 받드는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고, 모에 열광하였고 비록 난폭하지 않았지만 홍위병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총소리와 조반들이 스피커에 대고 떠들어대는 소름끼치는 욕설을 듣고 있던 장영은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곳이 천국이라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정권을 증오하고 다른 선택을 갈망하는 것을 깨달았다.모의 방법은 미움이었다. 적대계급을 만들어 감옥으로 보내지 않는다. '적'을 만들고, 그를 사람들 속에 두고, 언제나 보면서 미워하게 하는 것이었다. 계급투쟁도 그러한 기조 위에 있는 것이다. 열여섯 영국인 경찰의 발포 명령으로 중국인 파업 노동자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상하이에서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6월 23일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황푸 군관생도들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를 냈고, 공산당에 의해 지도된 파업은 16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은 국민적 지지를 얻게 되어 1926년 1월 당원수가 2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25년 5월 1,000명에 불과하던 공산당의 당원수가 1925년말에 이미 거의 1만 명이 되었다.그러나 국공합작 아래 공산당이 급속히 당세를 확장하고 공산당이 지도하는 대중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국공합작을 계속 지지해온 좌파와 국공분리를 주장하는 우파 사이에 분열이 심화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뒤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8월에 우파가 서산 회의파를 형성했다.1926년 3월에는 장개석이 공산당원들을 탄압한 중산함 사건을 일으켰다. 1926년 7월 장개석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혁명의 당면목표인 북방군벌의 타도, 즉 북벌을 개시했다. 북벌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국민혁명군은 2개월 만에 후난·후베이를 장악하고, 1927년 3월에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했다.장개석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난창으로 옮기고, 우한으로 옮긴 광둥 정부와 대립했다. 그는 1927년 4월 12일 대대적으로 공산당원을 살해했다. 또한 국민당 우파를 이끌고 난징 국민정부를 세워 우한 정부와 대립했다. 난징 정부가 강화되면서 우한 정부도 동요하다가 7월에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끝이 났다.(3)난징 국민정부 시기장개석은 4·12사건을 일으킨 후 다시 북벌에 나서 1928년 6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베이징 정부는 무너졌지만 여러 지역에 군벌이 남아 있어 전국 통일을 실현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난징 정부는 산서의 옌시산, 서북의 풍옥상, 동북의 장학량 등의 군벌과 타협하면서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들 공동의 적인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국공분백단대전을 행하고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폈다.그러나 1941~42년에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군대와 지배지역이 모두 크게 위축되었다. 근거지는 국민정부군, 왕정위 군대, 일본군에게 봉쇄되어 재정경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1942년부터는 군사공작보다 정치공작에 주력하고, 근거지의 정치·경제를 정비하여 힘의 축적을 꾀했다. 전후의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공산당은 국민당의 일당 지배의 폐지를 요구하고 항일정당 대표로 이루어진 연합정부의 결성을 요구했다.(5)국공내전시기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물러나자 국·공 양당의 군사적인 충돌이 공공연해졌다. 결국 1946년 여름 전면 내전이 시작되었다. 1946년 후반에서 1947년 전반까지 국민정부군의 공세가 계속되었지만 모택동은 전세를 낙관했다. 모택동의 확신대로 1947년 후반에는 공산당이 역공세를 펼 수 있게 되었다. 국민정부군의 주력이 동북·화북·산시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사이 류보청과 천이의 야전군이 황허 강과 양쯔 강 사이에 새로운 해방구를 만들었으며, 동북에서는 임표의 군대가 도시를 봉쇄하고 농촌의 대부분을 장악했다.모택동은 1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게릴라전을 기초로 하여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수행하는 인민전쟁전략을 명확히 했다. 또한 지주의 토지를 경작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독점자본을 국유화하며, 민족 상공업의 활동을 제한적으로 보장한다는 성명을 냈다.중국공산당은 동북·화북·화동의 농촌지대를 장악하고 난 뒤인 1948년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도시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해 가을에는 동북지방의 진저우·선양·장춘의 세 도시를 장악했다. 이때 산둥·장쑤에서는 회해전역이라는 내전 최대의 전쟁이 벌어져 쌍방 모두 50만 이상의 대군이 참여하는 접전을 벌였다. 중국공산당은 회해전역에서 승리했으며, 1949년 1월 톈진·베이징도 점령했다.1949년 3월 중국공산당은 제7회 전국대표대회(7전대회) 2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2중전회)를 허베이 스 토지출자를 특징으로 하는 농업생산 합작사인 초급합작사로 조직을 확대해가는 것이었다. 당내에서 이 운동의 성급한 전개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호조합작화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특히 1954년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초급생산합작사의 수가 10만으로 증가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합작화운동의 지나친 과속화를 비판하고, 일시 축소하는 경향도 보였지만, 1955년 7월 이후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고급합작사 조직이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이것은 산업화에 필요한 농업잉여를 국가통제 아래 둘 수 있게 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급합작사의 조직으로 자신의 토지를 보유한 중농들이 불리하게 되자 그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합작화는 크게 진전되어 1956년에는 거의 소련의 집단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7)대약진 운동제1차 5개년계획이 전반 3년간 순조로운 전개를 보이자 1956년초 공산당 중앙 일부에서 지나치게 높은 목표와 계획이 제기되었다. 주은래·진운 등이 이 제기의 수정을 주장하자 모택동은 이들을 반모험주의자로 낙인찍고 신랄한 비판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대약진'이라는 구호를 들고 반모험주의를 비판하는 모택동을 지지했다.1957년 말부터 모택동은 중국 각지에서 지방당 서기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합작사를 통합하여 대형화하는 대약진 운동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나아가 1958년 8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인민공사 운동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인민공사 창설의 명령이 나온 지 1개월 만에 전국 74만 고급합작사가 2만 6,500여 개의 인민공사로 개편되었다.인민공사는 행정권력과 농업합작사가 결합된 조직으로서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기초조직 역할을 했다. 인민공사에서는 집단노동이 장려되고 노동점수제에 의한 수확의 분배가 이루어졌으며, 여성의 노동력을 사회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공공식당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규모가 커서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의 노동의욕을 저하시켜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렸다. 1960, 1961년에 발생한 자연재해로 인해
제 10장 - 역사 인식을 위한 구분법서론역사 인식을 쉽게 하기 위해, 역사서술을 쉽게 하기위해 우리는 역사를 일정한 구분법에 따라 나눌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공간이나 시간적으로 나누는 방법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막연히 나누어 살펴본다는 생각만을 가지고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장에서는 역사인식을 위한 구분법에는 어떤 것이 있고 이런 구분법을 이용하면 역사가 이렇게 나누어진다는 것을 살펴보도록 한다.본론1. 공간적(지리적) 구분역사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전개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 모든 지역의 역사적 전개를 한꺼번에 이해하기보다, 우선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통상적 방법이다.중등학교의 세계사는 동양 각 지역의 역사와 서양 각국의 역사를 분리해 서술하고, 이를 그냥 붙여 놓은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화학적 결합이 아니라 물리적 통합인 셈이다. 이런 구분은 세계사의 범위가 너무 넓어진다는 단점이 있으므로 대학에서는 중등학교와 다르게, 역사적 공간을 크게 한국사, 세계사가 아니라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의 3개영역으로 구분한다.역사를 전공하는 전문가들은 모두 자기가 전공하는 역사적 공간을 설정한다. 공간적으로 구분된 한 지역 역사에서 전문가가 되는데도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자신의 연구 공간을 설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연구하는 공간의 역사적 특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여타 지역 공간의 역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는 매우 필요하다.2. 시간적 구분1) 시대구분의 필요성역사는 본질적으로 시간적 변화에 관한 지식이며, ‘시간 속에 있는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흐름 속에서 역사를 인식한다.과거 역사를 몇 단계의 시기로 구분하여 인식하는 방법을 ‘시대 구분’이라고 한다. 역사적 성격이 비슷한 일정시기를 하나로 묶고, 역사적 성격이 크게 다른 일정시기와 구분하는 방법이다. 그 목적은 역사를 일정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변화의 모습을 단계적, 것은 굴곡이 없어 보이지만 먼 훗날의 입장에서 살펴보았을 때 많은 변화가 관찰된다면 이를 어떤 변화를 중심으로 시기를 몇 단계로 구분하면 그 변화를 살펴보는데 유용하다. 그리고 동일한 행동의 사건이라도 그 일이 발생한 시기의 성격에 따라 인식되는 점이 달라질 것이다. 이는 그 어떤 사건의 성격도 그것이 일어난 시대의 성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정확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만약 우리가 역사를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놓고 보면, 어느 시대에 일어난 일들이 그 자체 독립적 사건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큰 시대적 성격 하에서 일어났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2) 시대구분의 흐름(1)초보적 시대구분과거의 역사저술에는 시대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별로 없었다. 그해 그해의 중요한 일을 충실히 기록한 역사서술을 연대기라 한다. 연대기는 중국이나 우리의 개념으로 편년체(編年體)인데, 연대순으로 편집했다는 의미이다. 공자의 가 대표적이다. 공자는 중국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노나라를 역사적 공간으로 설정하고, 시간적으로는 노나라 은공 원년부터 애공 14년까지의 242년간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봄여름가을겨울 별로 충실하게 기록하였다. 이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시대의 큰 변화를 인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한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 지역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다. 우리가 통사라고 부는 것이 이러한 유의 역사이다. 사마천의 가 대표적이다. 이는 중국 고대의 오제시대로부터 시작해 하-은-주-진-한 왕조 초기까지의 역사를 통사로 서술하였는데, 사마천 자신이 살던 한 무제 당시까지를 다루었다. 사마천의 는 지리적으로 중국이 중심이긴 하였지만 중국과 관계있는 다른 지역의 역사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왕조의 교체를 중심으로 한 서술에는 권력자의 변동 이외에 다른 사회전반적인 변화는 보여주지 못한다.하나의 왕조에 충실한 역사서를 단대사라 한다. 김부식의 와 반고의 가 국들과 결부시키기도 하였다. 시대가 대재난으로 인해 다시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순환론적 역사인식이 있었고 또 로마는 국가의 흥망을 탄생→흥기→성숙→강성으로 역사를 한 인간의 생애에 비유하기도 했다.(2)3분법과 4분법3분법을 정착시키는 데는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시대와 시대의 단절성을 인식하고 이를 역사서술에도 반영하였다. 이들에 의해 출발한 3분법은 이성을 중시하고 낙관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의 진보를 확신한 17,18세기 계몽주의자들의 역사관에 의해 확립하게 된다. 원래 문예 분야에서 시작된 3분법은 역사학 분야로 파급되어 고대사-중세사-근대사로 시대를 구분한 서적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후에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중세가 관심을 받기 시작하여 3분법은 확실한 역사구분법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이렇게 구분된 3시기는 시기 순으로 가장 멀리 존재한 고대, 자신들의 시대는 근대, 그 중간에 있는 시대는 중세라고 불렀다. 이렇게 성립된 고대, 근데, 중세의 시대개념은 역사적 연속성보다 그 단절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대 명칭에 어떤 내용과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내용과 성격이 부여되면서, 가령 고대는 고전문화와 노예제 사회, 중세는 기독교 사상과 문화 및 봉건사회, 근대는 시민사회와 자분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3) 시대 구분의 기준역사 인식을 위해 시기를 구분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면 좋을까. 시기를 구분하는 일이니 만큼 중요한 변화가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런 변화에는 큰 갈래로는 양적 확대와 질적 전환이 있다. 양적 확대는 말을 한 마리만 사용하여 마차를 몰다가 3마리나 4마리로 늘여 마차를 몰았다는 단순한 양이나 수가 변화한 변화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질적 전환은 종전에는 없던 전연 새롭고 엄청난 변화이다. 질적 전환은 여러 측면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추가하거나 제외할 수 대표적인 인물이 마르크스이다.(4) 마르크스의 시대구분마르크스는 흔히 엥겔스와 함께 유물론의 대표자라고 한다. 이들 역사적 유물론의 창시자들은 그 어떤 변화, 특히 정신적 변화보다도 물질적 변화를 훨씬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존재의 변화를 질적 전환의 최고 자리에 앉힌 것이다. 사회의식과 사회적 존재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 유물론의 창시자들에 의하여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간의 관계로서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다. 사회의식(상부구조)이 생산양식(하부구조)에 종속된다는 이 이론은 의식발생에 있어서의 제약성을 강조한다.유물론자들은 이러한 신조에서 인류의 역사를 원시 공동체 사회-노예제 사회-농노제 사회-자본주의 사회-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한다고 보았다. 이 중에서 의미를 크게 두지 않는 원시 공동체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제외하고 3단계로 구분하였다. 각 단계는 시대순으로 각각 고대-중세-근대가 된다.헤겔은 ‘자유’를 기준으로 인류의 역사를 동방사회-그리스 사회-로마 사회-게르만 사회의 4단계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의 물질주의적 역사관에 상반되는 이상주의적 역사관이다.3) 시대구분의 실제(1) 3분법의 실제고대의 종말과 중세의 시작에 대해, 19세기 이래 영국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를 통일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323년을, 프랑스에서는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년을, 독일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을 고대 세계의 기반을 흔들어 놓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으로 잡았다. 8세기 이후에야 프랑크 왕국과 이슬람 충돌로 8세기 이전의 고대 지중해 경제가 중단되었다고 보고 이 시점을 고대의 종말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 말을 보기도 한다.우리나라는 삼국 통일을 고대 세계의 완성으로 보고 이것이 무너진 때, 즉 고려 성립을 고대의 종말, 중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 통일의 시점으로서 고대의 종말, 중세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일본의 중국사학계에서는 한 왕조가 망하고 삼국시대가 문화』라는 저서에서, 르네상스의문화가 근대사회의 출발점이 된다고 주장하였고, 호이징가는 르네상스를 새로운 문화 내용을 가진 시기이나, 중세의 특징이 쇠퇴하는 중세의 가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15세기의 르네상스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서양사에서는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견대립이 많고, 오늘날에는 종교 개혁이나 그 이후의 프랑스 대혁명, 산업혁명 등을 근대의 시작으로 설정하기도 한다.비서양지역의 경우, 서양의 충격이 가해지는 시점을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나라는 1876년의 개항 중국은 아편전장(1840-1842)을,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을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기점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서양 중심주의, 식민사관, 오리엔탈리즘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2가지 측면에서 대항 할 수 있는데, 먼저 서양의 영향 없이도 자체 사회 내에서의 근대적 요소, 근대성을 증명하는 일과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그들의 수탈을 강조하는 것이다.(2) 4분법의 실제3분법 하에서는 종말과 시작에 대한 여러 견해가 엇갈리게 된다. 예로 조선은 고려 사회와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함께 묶여 중세로 파악되고, 일본의 3차례의 바쿠후 중에서 도쿠가와 바쿠후가 앞의 두 바쿠후와의 단절성에도 불구하고 중세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근대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의 직접적 기원이 되는 어떤 시기로부터 오늘날까지를 포괄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그 이후의 세계도,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와 오늘 시대도 많이 다르다. 이러한 3분법의 무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나온 것이 4분법이다. 4분법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고는 있지만 3분법의 역사구분 시기와 일치하지 않는 점은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장원의 이해와 관련하여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그것은 장원의 발생과 구조, 전호의 신분 문제가 송을 중세로 둘 것인가 근세로 둘것인가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고대-중세-초기근대-근대, 고대-중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