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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주의와 항존주의
    진 보 주 의&항 존 주 의[1]진보주의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시대 상황-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미국이 사회, 문화, 정치, 경제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로인해 교육계의 중심도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대륙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게 된다.-서양사상의 주도권을 유럽에서 이어받은 미국의 특징은 과학의 발달을 기초로 한 선진 사회이다. 즉, 관념적 세계에서 과학적 세계로 이행이었다. 이로 인해 실용주의가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거기에 기반을 둔 진보주의 철학이 대두되기 시작했다.1. 진보주의의 개념-진ː보―주의(進步主義) (pro·gres·sive)[명사] 사회적 모순을 변혁하고자 꾀하는 전진적(前進的)인 사상. ↔보수주의(保守主義).-진보주의란 20세기 초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개혁운동으로 자연주의, 실용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아동중심, 경험중심교육을 표방한 교육사상이다.2. 진보주의의 등장 배경1) 시대적 역사적 배경①진보주의의 역사-19세기 말에 발단하여 191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융성기를 맞이했으며, 50년대 중엽에 소멸한 미국의 신교육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총칭한다.교육을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기본적 수단>이라고 보고 교사중심주의·교과만능주의에 반대하여 아동의 자유·활동·흥미·자발성을 존중하는 아동중심주의의 입장에 서서 구체적인 생활경험을 통한 학습을 강조하였다.②진보주의의 시대적 관점에서 본 발생 배경-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사상 유래 없는 풍요와 인간다운 생활을 확보해 준 반면에 비인간화 현상이 사회의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교육적인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현재 서양 각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개혁학교 및 대안학교 운동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③ 진보주의의 교육 역사적 관점에서 본 발생 배경-교사중심의 전통학교에서는 아동의 인격이나 자발성 그리고 개인적인 특수상황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교육개혁운동은 `아동으로부터의 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 행위도 또한 새로운 뜻과 질서를 가진 사태를 자아내는 도구이다.’ 이는 Pragmatism을 도구주의라고 칭한다.3. 진보주의의 교육목표교육은 생활의 과정이므로 경험의 끊임없는 재구성을 통해 아동을 성장시키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4. 진보주의의 교육원리1. 교육은 현재의 생활 그 자체이다.2. 학습은 직접적으로 아동의 흥미와 능력에 관련되어야 한다.3. 교육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해 익혀야 할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하다.4. 교사는 지시하고 지휘하는 감독자가 아니라 도와주고 안내하는 조력자이며 안내자이다.5. 학교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협동적 생활을 배우는 공동체 사회이어야 한다.6. 민주주의만이 바른 성장을 가져오는 사상의 교류와 인격의 상호작용을 달성할 수 있다.** 위에서 우리는 진보주의의 교육원리를 여섯 측면에서 보았는데 이것을 항목화해서 요약하면 ‘ ①일상생활 ②자기활동 ③문제해결 ④교사의 조성 ⑤민주방식의 중시‘라 할 것이다.5. 진보주의의 이론① 모든 학생에게 자연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한다.② 교육은 활동적이어야 하며, 또한 아동의 흥미와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③ 교육은 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④ 교육과정은 아동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교수하기 위하여 만든 교재를 해서는 안 된다.⑤ 교사의 역할은 아동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충고하는 것이다.(조력자로서의 교사)⑥ 학교는 경쟁보다 오히려 협동을 장려해야 한다.⑦ 교육에는 보편적인 목적이나 궁극적 목적은 있을 수 없다. 교육은 계속적인 성장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개개인의 성장·발달을 돕는 특수한(개별적인)목적을 갖는다.⑧ 교육과 민주주의는 서로 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육은 어디까지나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⑨ 아동의 발달이란 단지 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그의 육체적·지적·도덕적·사회적 발달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기록하여 지도의 중점을 아동 한 사람 살아가기 위한 '도구' 일 때만 가치가 있다는 도구주의에 입각해 생활에 더 많은 유용함을 가져오는 '더 나은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함.3) 아이들은 태양, 그 밖의 것은 혹성-실험학교 설립②듀이의 교육사상1)교육목적- 교육은 곧 성장: 교육의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며, 교육의 과정은 끊임없는 경험의 재조직, 재구성의 과정이라는 것2)교육사상-그의 교육사상은 한마디로 "변화"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교육목적과 아동관, 학습관, 사회와 교육의 관계에 대한 그의 관점을 제시ㄱ.교육은 생활이다.ㄴ.교육은 성장이다.ㄷ.교육은 경험의 재구성 과정이다.ㄹ.교육은 사회적 과정이다.③듀이학교미국의 교육자 J.듀이가 자신의 교육이론을 실험하기 위하여 1896년 시카고대학에 개설한 실험학교이다. 발족 당시 교사 2명, 아동 16명으로 시작하였으나, 6년 후에는 교사 23명, 대학 출신의 조수 10명, 아동 140명을 수용하는 학교로 발전하였다.설립목적은 학교행정 교과 선택 교수법 훈육 등에 있어서 학교가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각자의 능력을 발달시키고 욕구를 충족시켜가면서 공동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인가를 발견하는 데에 있었으며, 진보주의 교육의 진지한 실험장이 되었다.학교교육은 사회의 진보에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등의 가설에 입각하여 운영되었다. 그는 이 실험학교에서 초등교육의 커리큘럼(교육과정)에는 3개의 기초적 학과 그룹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목공 재봉 요리 등의 활동작업으로서 아동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나 지리와 같은 사회생활의 배경을 취급하는 것이며, 셋째는 읽기 쓰기 문법 산수와 같은 지적 발달과 지적 연구의 형식이나 방법에 관한 것이다.그는 학교란 사회생활을 준비시키는 곳이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생활의 전형적인 조건들을 축소시켜 재현하는 곳이라고 하였다.2) 킬 패트릭①킬 패트릭의 일생조지아주(州) 출생. 1891년 마사대학교 졸업 후 존스홉킨스대 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연구한 후 마사대학교 교수를 거쳐 1918년부터 베드퍼드 출생. 1853년 16세에 교사가 되었으며, 1858년 일리노이 주 캐롤튼에서 교장에 취임하고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연방군에 종군하여 육군 중령으로 승진하였다. 1872년 독일로 건너가서 J.페스탈로치, J.헤르바르트, F.프뢰벨 등에 의해서 개발된 새로운 교육방법을 공부하였다. 1875년 귀국하여 매사추세츠 주 퀸 시의 교육장에 취임, 자유과학?미술?공작을 학과과정에 도입하고 아동의 개성을 존중하는 인간적이고 자유로운 수업을 장려하였다. 1880년 보스턴 장학사, 1883년 시카고 쿡카운티의 사범학교장에 취임하였으며, 1899년에는 기부를 받아 사범학교(시카고 인스티튜트)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그가 시카고대학교 초대 교육학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동 대학의 부속시설이 되었다.저서로는 《How to Study Geography》(1889) 《Uncle Robert s Geography》(전4권, 1897~1904) 등이 있다② 파커의 교육학교교육에서의 직관교육, 자율적 훈련, 교과통합, 단원법 등 초등교육의 커리큘럼 개조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진보주의 교육운동의 창시자로 평가되어 시카고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진보주의적인 사립학교가 있다.7. 진보주의의 영향한국교육에 미친 영향진보주의 교육 사상은 20세기 최대의 교육 사상으로서 한국의 민주적 교육이념의 수립, 민주적 교육방법의 도입, 아동 존중 사상, 한국의 학교 제도의 수립 등에 영향을 주었다.1) 제도적 변화 - 소수정예주의 교육(복선형)에서 기회균등의 원칙에 입각한 교육(단선형)으로 바뀜. 만인을 위한 교육·교육의 보편성이 보급 ⇒ 공교육 개념이 등장.2) 교육 내용과 방법의 변화* 학교 교육 내용 : 학술적 내용 → 대중적 내용 (직업교육까지 포함).* 과거에는 지적 측면만을 중시 → 전인적 측면도 중시.* 교육내용과 방법의 혁신을 가져옴 : 교육 내용의 대상이 다양해지고 계속 변화,교육 방법을 끊임없이 혁신.3) 우주나 교육 그 자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갱신의 추세에 관심을 기력이 상실되었다.5) 개인주의 경향은 사회적 요구를 도외시 하고 문화적 전통 무시6) 사회복지이론을 정리하는 데 실패하였다.7) 아동이 배워야 할 학습 내용에는 무관심함9. 진보주의의 의의① 교육이념을 민주화 시키고 교육 방법을 도입하였다.② 학제 수립에 공헌③ 폭이 좁은 형식주의와 아동부재(兒童不在)에 빠져 있던 전통적 교육에 과감하게 도전④ 아동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교육관을 정착♤참고 문헌이제는 자유를 말할 때 - 한국 하이에크 소사이어티 (율곡출판사, 2001)월간조선 - 황용길 (조선일보사, 1999. 1월)매일경제신문 2001 (학습혁명 현장을 가다) , 매일경제신문사김정환, 강선보 공저 교육철학 박영사 p.166~ 170진보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교수)인터넷 조사 등..=========================================[2]항존주의1. 항존주의 개념- 영원, 불변이라는 변화의 원리를 강조하고 주장한 교육철학교육의 목적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장소에서 같아야 한다- 교육목적이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영원주의(Perennialism)라고도 불려짐- 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바는 일상적인 생활수준의 향상이 아니라 도덕성, 지성, 이성, 영 혼의 함양이라고 믿었다.- 영원불변하는 진리와 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 그리고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도 덕성을 계발하는 것이 바로 교육의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진보주의에 가장 대립적인 입장에 있는 교육사조로서, 현대 교육의 과학지상주의, 세속 주의, 물질주의, 현실주의, 사회밀착주의, 활동숭배주의 등을 배격하고 `영원불변하는 진리`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폈다.2. 항존주의의 등장배경1)시대적 역사적 배경세계사의 전환을 초래하게 한 현대 미국 교육사상의 배경은 과학의 발달이었다. 즉, 관념적 세계에서 과학적 세계로 변천되었음을 뜻한다. 생물학적 진화 사상을 근거로 하는 실용주의의 풍요로운 옥토 위에 미국의 교육사상이 개발전함
    교육학| 2008.08.25| 9페이지| 1,500원| 조회(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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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 함께 토론할 주제, 9주차 -14주차
    9주차.1. 의병창의가의 전통은 현재 어떤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가?민족항일기에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하여 조직된 독립군들이 불렀던 노래를 흔히 라고 칭한다. 이는 1907년 군대가 일본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자 의병들이 불렀던 와 가 그 효시가 되었다. 국권상실 후 항일운동이 격해지면서 등이 나왔으며, 14년에는 , 3.1운동 무렵에는 임시정부에 의하여 지정된 를 비롯한 등 15곡 정도의 독립군가가 국내외에서 불렸다. 그 뒤에도 등 다양한 내용의 곡이 불려졌는데, 모두 독립 쟁취와 광복을 위한 애국심의 고취와 독립군의 사기진작에 역점을 둔 노랫말이었다. 곡은 음악적으로 단순하거나 음역이 넓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의 경우, 민요조의 가락으로 불러졌다.(자료출처 : 독립군가보존회)조국이 광복 된지도 올해로 60주년이 되었다.지난날 그 수난 시절에 독립투사들과 애국동포들이 때로는 서광과 희망을 안고서 하늘에 메아리치도록 목청을 높여 불렀고, 때로는 비분과 절망에 겨워 몸부림치며 울음 섞여 불렀던 항일민족의 노래이며 노래로써 애국애족에 불타는 투사들의 피를 끓였고 적개심을 불태우며 과감하게 싸웠고 처절했던 싸움으로써 우리들의 옛터를 다시 찾았고 오늘과 같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군가야 말로 온 겨레에 힘을 주었고, 신념을 주었고, 정열을 주었고, 사기와 투지를 드높여 주었던 것이었기에 독립군가는 소중한 역사적 보배로써 영구히 간직해야 하겠으며 또 널리 보급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1895년 을미사변 이후 일어난 의병의 항일투쟁 기간 중에는 등의 노래가 있기는 했으나 극소수에 속하는 편이었고 곡은 민요조의 가락으로 불러졌다.1910년 경술의 국치 이후에는 일본의 노래들이 거침없이 흘러들어 왔다. 일본 창가를 번역한 노래들이 판을 쳤고 가사는 우리말로 지었으나 곡은 일본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편 남북만주의 독립군 진영에서는 군가의 필요성을 느끼고 간부급들이 직접 가사를 지었다. 내용은 일갔다. 후에는 군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깎고 다녔으며 그의 집에는 일본 신을 숭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광수에 관한 현재 평가는 너무도 관대했던 것이 아닐까. 육당과 춘원은 기본적인 정신에서부터 일본을 흠모하고, 동경했던 탓으로 문학이 점차 친일노선으로 기울었던 것 같다.3. 시조부흥운동의 허점을 말하라.먼저 ‘시조부흥운동’은 국민문학파가 민족주의 문학운동의 실천방법으로 제시한 현대시조의 창작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계급문학에 대항하여 최남선, 이광수가 중심이 되어 활동한 국민문학운동의 핵심운동이 ‘시조부흥운동’이었다. 초기에는 고시조의 형식을 3장(章) 6구(句)라고 하여 양장시조(초장, 종장만 있는 시조)와 사장시조(초장과 종장이 하나 더 있는 시조)를 만들었으나 고시조의 연장 혹은 재현을 넘지 못하였다. 시조부흥론 덕분에 시조가 제대로 알려지는 좋은 계기가 마련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조 인식이 부당하게 극단화되는 폐해가 빚어졌다. 시조가 민족문학인가 하는 논란은 양단논법으로 판가름할 것이 아니고 문학사의 전개를 고찰해 판가름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었으며 능력도 모자랐다. 내력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시조를 절대시해서 신앙고백 같은 것을 요구했다. 시조는 처음에 사대부문학이었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서 작자층이 확대되고 사설시조로 바뀌기도 하는 변화를 겪었다. 애국계몽기에는 민요와 다시 접합되어 현실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민족문학으로서 소중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시조는 사대부문학으로 고착되어 있다는 주장과 계습을 초월한 민족문학이라는 주장은 둘 다 그런 사실을 무시했으며, 시조가 근대 민족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서로 다른 쪽에서 침해했다. 시조를 특수한 전문과의 소관으로 맡겨두지 않고 누구나 즐기면서 교양으로 삼는 것이 바람직했다.시조부흥운동의 허점은 첫째, 역사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과 당대 사회현실과의 연계성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이 부족하였고, 둘째, 이미 생명을 잃은 시조장르를 되살린다는 것은연주의 작가는 플로베르나 공쿠르의 사실적 방법을 배운 탓으로 자료연구에도 열심이었다. 졸라는 《선술집》을 쓰기 위하여 몇 년간이나 파리의 변두리 노동자 촌을 조사하였다. 그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대항하여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20권에 달하는 종합소설을 썼다. 루공, 마카르 두 집안 인간의 복잡한 운명을 삽입하여 제2제정기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것인데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다. 졸라뿐만 아니라 자연주의 문학은 대체로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전체적으로 어둡고 염세적이다.발자크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승기(上昇期)를 그렸고, 졸라는 그 절정기에서 하강기를 그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졸라 쪽에 현대성이 한층 강하게 나타나는 면도 지나칠 수 없다. 철도나 해운의 발달, 농민의 도시집중, 도시노동자 생활의 비참상, 탄광쟁의(炭鑛爭議), 패전(敗戰), 기타 19세기라기보다 현세기의 생동적인 세태가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졸라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 경향은 달랐고 뒤에는 스승으로부터 흩어졌지만 모파상, 위스망 등이 자연주의에 공명하여 그 산하에 모였던, 당시의 젊은 작가들을 졸라의 집 주소를 따서 '그루페 드 메당(메당파)'이라고 불렀던 일이 있다.한국에서 자연주의 문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염상섭(廉想涉)이다. 그는 1921년에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다음해에는 평론 《개성과 예술》을 발표하여 자연주의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겸한 자연주의 문학의 포고자(布告者)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자연주의 문학을 말할 때 문제가 되어온 것은 개념의 모호성과 혼돈, 자연주의와 개성, 자연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 자연주의와 프로 문학,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문제 등이다. 염상섭은 전기 논문에서 '자아의 각성', '개성의 발견', '창작상의 개성'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첫째 자아의 각성에 대하여는 인간 정신의 가장 본질적인 의의는 자아의 각성 및 그 회복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인의 특색이며 그 가치관으로 볼 때 곧 문예부흥이다. 개 것으로 보아, 그들이 독자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학 단체로서의 정체성을 밝혀줄 특정한 문학 이념이나 주장을 내걸지도 않았다. 더구나 가정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은 구성원들의 문학적 경향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구인회는 1930년대 모더니즘의 핵심적 단체로서 뿐만 아니라 이후 신진(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받으면서 문학사적으로 의미있는 위치를 차지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문학사 속세서 중효하게 취급되어왔던 것에 비하여 이제까지 ‘구인회’라는 집단에 주목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사실은 다소 납득하기 힘든 감이 있다.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연구도 ‘구인회 연구’라는 제목을 내걸었을 뿐, 개별 작가론이나 작품론의 취합 이상이 아닌 것으로, 구인회와 작가간의 구체적 관련성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은 아마도 그 조직을 구성한 작가 개개인의 문단적 위치가 상대적으로 매우 컸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인회 소속 작가들의 문학적 경향이라는 것이 하나의 틀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다.구인회는 순수문학을 표방하고 문단의 중견급 작가 9명에 의하여 결성된 문학동인회이다. 1933년 문단작가 김기림,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정지용, 이무영등 9명이 결성하였다.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 조용만 대신에 김유정, 김환태로 교체되어 항상 9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당시 순수문학의 가장 유력한 단체로 활동하였으나 3~4년 만에 해체하였다.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 되어 《시와 소설》이라는 기관지를 펴냈다.3. 오장환 시의 변모과정을 탐색해 보라.오장환은 1933년 [조선문학]에 을되고 획일화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압구정동의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야말로 90년대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 모두의 모습에 해당된다. 인간의 상품화와 물신화가 만연하는 시대 상황에서 더 이상 사회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제 상품 기호 내지 정보 메커니즘의 한 기호로 전락해 있다.직육면체의 벽지 속에 누군가가 숨어 산다 종이 한 장 두께만큼의 나의 얇은 고독도 굳은 담벼락에 풀칠해진 흐린 벽보마냥 한없이 흔들린다 아침 밥상이 꼭 제사상 같구나 얘야. 주간지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금년도 미스 코리아의 얼굴에 오랜 허무의 엑기스를 사정했다 짙은 밤꽃 냄새가 확, 무릎을 끓은 채로(세계와 나와의 통로를 차단하지 말자)(……) 8)세계와의 통로는 차단되어 있다. ‘직육면체의 벽지’처럼, 사방이 꽉 막힌 감방에 살면서 상품기호로 전락해 가는 것, 그것이 90년대 온갖 화려한 상품기호로 치장한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실체이다.(i)저것은 거대한 욕망의 성채다이성을 살해한 음울한 중세의 성벽과빛나는 P. C. 자기질 타일 외장의 롯데 월드그것은 무엇을 방어하고 있나요당신을, 우리를, 무산 대중을?꿈과 희망의 동산이요, 사랑과 행복의당신의 휴식 공간 롯데는우리를 모두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에 빠지게 한다욕구의 끓는 기름과 조갈의 불화살을 쏴끊임없이 당신을 상품화하고끊임없이 당신을 당신이 소비하도록구애한다(……) 9)(ii)너나 가져라, 여의도나는 여의도에만 가면 항상 한강의 수위가 걱정되더라 63빌딩은 거대한 남근 숭배의 신앙이다 올림픽을 앞둔 1988년 이전의 한국인들은 어떤 종류의 번식을 바랐을까 소유의 확대를? 자본의 증식을? 섹스의 강화를, 繁雜을, 어차피 자본주의의 탄생 자체가 리비도적 충동의 산물이라면 저 황금빛의 연출은 충분히 암시적이다 그것은 그대로 피로한 짐진 자들의 아이맥스 화면이고 여의도의 수위를 가시적으로 높여준 해발의, 금방, 쓰러지기 쉬운, 봉우리다(……) 10)입구와 출구의 구분이 모호한 롯데 월드를 두고 흔히들이다.
    인문/어학| 2008.08.25| 40페이지| 3,500원| 조회(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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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 함께토론할주제,(중간)
    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 1주차.1. 문학사의 개념은 무엇인가.문학사란 문학 작품에 나타난 특정한 민족의 ‘정신적 흐름’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즉 민족의 상상력, 풍속, 사회상, 생활상, 양식, 율격, 구조, 주제, 원형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민족정신’이라 하는데 이를 흐름에 따라 기술한 것을 문학사라 한다.?참고.문학사는 19세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근대적인 문학사의 서술이 이루어졌는데, 프랑스의 문학사가인 H.A.텐이 실증주의 철학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엮어낸 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문학사가 한 민족의 변천사를 반영할 뿐 아니라 사회의 변천 또한 문학사를 좌우한다는 철저한 실증주의적 견해를 취하였고, 민족성과 환경과 시대가 문학을 결정하는 3대 요소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문학작품을 비롯한 모든 문헌과 유물, 유적을 섭렵하고 조사하여 민족성과 환경 시대가 밝혀지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 시대의 문학이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과정이 판명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학사의 방법에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즉, 한 나라의 민족성이라는 것이 간단하게 몇 마디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문학사를 서술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는 것에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서술된 문학사란 다만 시대나열의 설명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문학사의 중심에 작품평가를 앞세워야 하는데, 문학사의 시대구분에서도 그것이 일반 역사와 마찬가지로 통치자의 교체에 따른 정치사의 시대구분과 같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문학작품의 평가기준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그 시대구분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인데, 어떠한 문학적 경향이 주도적 흐름이 되고, 또 그것이 다른 경향으로 바뀌어 나가는 과정을 살피는 가운데서 그 시대구분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문학사의 서술에는 사회의 영향을 비롯한 문학과 환경,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가 개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문학은 다른 분야의 영향을쇠퇴의 윤회적 반복과 동시에 속도, 농도, 질, 방향 등의 변화를 기술한다.8. 실증주의적 문학사의 한계를 설명하라.근대에 이르러 과학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투철하게 자리를 굳히자 자연과학의 정신과 방법이 문화에 적용되고, 문학사에서도 경험을 바탕으로 철저한 증명과 분석을 해나가는 방법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연구자로서 어떤 태도와 방법에 역점을 두느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태도라든가 실증주의는 어느 시대 어떤 연구자든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기본 단계가 된다.선배 연구자가 자료정리를 다 끝냈다고 해서 나는 실증주의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선배가 해놓은 작업의 도움을 받아 실증주의 단계를 빨리 거쳐나가는 것일 뿐이지 실증주의를 근본적으로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지금까지 나온 작가연보, 작품연보, 각종 문학사전 중에 100%의 정확성을 보여주는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맞지 않는 자료를 제시해놓은 것도 있고 자료를 소루하게 제시한 것도 있다. 또 실증주의적 문학사에서 정리된 민족성은 결코 간단하게 정리되기 어려운 관념이다. 실증주의적 문학사에 관해 연구 하는 연구자들도 문학적 사실들을 단순히 시대적으로 나열하며 설명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또 대부분의 실증주의적 문학사서들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그 힘에 압도되었다는 점 등이 그 한계라고 볼 수 있다.9. 문학사의 의미를 현재성에 두는 까닭은 무엇인가?-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는 현재성 그 자체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개인의 역사를 관찰해야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었던 당위성이나 명분은 자신의 역사를 관찰해서 나쁜 역사는 반복시키지 않고, 좋은 역사는 새롭게 창조해 나갔기 때문이다.- 인간의 개인의 역사를 관찰해야 한다. 역사의 의미는 항상 우리 자신의 현재에 있다.- 우리는 역사를 관객의 눈으로 보지 말고 역사에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해야,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현실의 모순과 과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모순과 과제를 해결함으로써 바람직한 미래를 건설하려는 데 있다.7. 문학사를 비평의 한 갈래라고 보는 견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학사는 비평의 매우 중요한 갈래의 하나이다.”라는 견해에는 반드시 동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비평은 문학사에 중요한 기능의 바탕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비평에서는 문학사를 자꾸 끌어들여 자신의 하위범주로 두려고 하고, 문학사에서는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의 경우에는 굳이 문학사를 비평의 갈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비평은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데 비해 문학사는 굳이 좋고, 나쁨의 판단보다는 우리 문학의 역사로서 큰 줄기와 같은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8. 문학연구와 문학사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문학연구(literary scholarship)는 학문적으로 문학작품을 연구해 가는 것으로 학술적이며 문장자체가 건조한 편이다. 주로 대학 교수들의 학술적인 논문이 문학연구에 해당된다.? 문학사(litery history)는 문학사를 수행해나가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다. 논문과 비평이 있다.? 흔히 이 두 가지를 문학비평의 한 분야로 소속시키는 사례가 있으나 그것은 합당치 않다. 오직 비평을 위한 방계 수단으로 이해될 수는 있을 것이다.(1) 문학연구(literary scholarship) -------- 대학교수들의 학술적 논문 ?평론(2) 문학사(litery history) ---------------- 논문, 비평 ?9. 문학을 상부구조로 해석하는 루카치의 관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라.? 루카치의 설명: 과거작품의 재해석으로 유력한 이데올로기적 거점을 확보함 (자기 토대의 강화), 어떤 작품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항시 과거에 대한 현대의 관계이지 그것이 진리로서 현재 불변하는 적극성은 아니라고 함. 그리고 예술 고전이 갖는 진리는 항시 상대적, 간접적, 상징적, 절대적, 구체적, 정신적 흐름을 시대별로 서술해 놓은 것으로 왜곡된 채로 두어서는 안 된다. 왜곡되고, 소외 된 작품이 존재하는 문학사는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과 다름없다. 지속적인 재평가 작업으로 잘못된 것은 수정하고, 시대별로 추가해야 할 문학작품과 시인들은 문학사의 공간에 끊임없이 편입시켜야 한다.4. 전집발간 활동이 문학사 작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집발간 활동 중 이동순 교수님의 백석 전집 발간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다. 1987년 이동순 교수님은 백석 전집을 발간하셨다. 재북 시인었지만, 월북 시인이라는 오해로 백석시인은 우리의 문학사에서 지워졌었다. 하지만 백석 전집의 발간으로 백석의 시인의 존재는 우리 문학사에서 자연스럽게 복원되었고, 현재 우리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복원 된 상태이다. 이처럼 한 시인의 전집발간은 문학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또 그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참고로 백석 시인이 우리 문학사에서 소중한 시인인 이유는 그의 시를 통해 함경도와 평안도에 대한 지역의 정서를 폭넓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학사는 후세의 문학교육을 위해서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폭넓게다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시인의 전집은 문학사에 있어서 몹시 소중한 자료이다. 이 때문에 전집발간 활동은 문학사 작업에서 중요하다.5. 친일문학은 기존의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전형적 사례이다. 그 소외의 원인은 무엇이며, 왜 이것이 앞으로의 문학사 정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친일 문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더구나 친일문학 또한 당시 시대상황을 잘 알 수 있고,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이런 친일문학을 기존 문학사에서 소외해버린 것은 안일한 대처 방법이다. 우리의 문학사는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시대별 작품과 시인을 공정하게 편입시켜야 한다. 특정 유명 시인들과 그들의 작품이 전부인 마냥 문학사를 정리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문학사에서는 친일문학도 소중한 문학 자료 이므로 이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볼 수 있을 것이며 우리 문학사에 소중한 자료로 남을 것이다.(3) 조명암- 조명암의 문학은 혹독한 분단의 금제(禁制)를 강요받으며 항시 음성적 유통과 변조 상태로 험난한 세월을 통과해왔다. 그리고 전집이 발간됨으로써 조명암 문학이 지니는 민족문학사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규명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됐다.'조명암 시전집''을 편집한 이동순(영남대 국문과) 교수는 "시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 근현대문학사에 1930년대 활동한 뛰어난 모더니즘 시인을 한 명 더 추가하는 의미가 있다"면서 "조명암의 민족주의 성향은 만해 한용운에게 배운 영향일 것"이라고 말했다.중앙일보 월북시인 조명암 詩전집 나왔다. 배영대 기자 2003.05.22(4) 이찬- 시집으로는 ,, 등 세권이 있다. 이찬의 시가 우리들에게 아직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남북분단 이후로 반세기 이상을 이찬의 시작품을 이른바 월북시인이라 하여 남한 사회에서 금지해 왔었기 때문이다. 이찬은 해방 이전부터 함경도 지역에 거주해 왔으므로 굳이 명명하자면 재북 시인이었던 것이다. 이대로 잠들어 버렸을 이찬의 시 전집을 펴내 우리의 문학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다.(5) 조벽암- 본명 중흡(重洽). 충북 진천(鎭川) 출생.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 중에 《문학 타임즈》를 간행하였다. 구인회(九人會) 동인으로 활약하던 1930년대 중반부터 시와 소설을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했다. 1930년대의 《실직(失職)과 강아지》 《구직(求職)과 고양이》 《취직(就職)과 양(羊)》 등의 작품들은 실업지식인과 전과자 지식인의 불우한 처지를 동물에 비유, 표현한 것으로서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비판과 지식인적 윤리의식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8 ·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밖에 시 《새아침》 《황성(荒城)의 가을》 《침체(沈滯)》, 시집 《지열(地熱)》, 소설 《결혼 전후》 《풍차》 《불멸의 노래》 등이 있다. 조 한다.
    인문/어학| 2008.08.25| 25페이지| 3,200원| 조회(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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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대중가요와 생활사
    함께 풀어 볼 과제 1주차.1. 일제강점기 가요시는 왜 중요한 분야로 떠오르는가?예전에는 가요시가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까닭은 순수문학에 비해 가요시가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것 등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상당히 편협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고지식한 이분법에 의존하여 대중예술을 저급한 것으로 규정하고 무조건 매도하는 태도는 더 이상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 일제강점기 가요시는 문학에서 중요한 분야로 떠오르며 연구되어 지고 있는데 이는 가요시가 당시 민중의 생활사를 지켜볼 수 있는 창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고,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도구이자 수단이 바로 가요시인 것이다.일제강점기 시가에 관한 그동안의 비평적 논의는 대개 창가, 신체시, 시조, 자유시 등 이른바 대표 장르들에 국한되었다. 그 논의들도 기왕에 알려진 자료의 일정한 범위 이내로만 한정되어 있어 분석 대상의 상투화, 고정화를 초래하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그러나 연전에 한국 고음반 연구회가 편집 발간한 , 등에 수록된 많은 분량의 일제강점기의 가요시, 즉 ‘유행가’의 노랫말의 자료들을 대하면 매우 큰 놀라움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이 풍부한 시가 자료의 발굴을 토대로 맨 먼저 일제 강점기 시문학사 서술의 상당한 보강과 수정을 기할 수 있으리라는 즐거운 예측과, 논의의 제한성, 상투성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범주의 확대에 대한 일정한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가요시는 우리네 조상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우리가 이 시기에 창작 보급된 노래들을 발굴, 정리하고 옳게 평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정리하고 역사적 자료로 남기는 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냥 편협된 생각으로 삐딱하게 가요시를 바라보는 자세를 다잡고 옛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가요시를 가슴으로 진정 느껴보아야 한다. 또한 이 시기의 음악을 더듬어보면, 당시 우리 민족의 비참했 비탄에 젖게 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처분을 내리고 못 부르게 탄압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정서를 맑게 정화시켜줄 만한 참신한 가요가 별로 없었던 탓에 우리 겨레는 이 노래를 마음의 벗으로 부르면서 망국의 한을 달래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 침략자들은 이 노래에 담긴 슬픈 감정이 반일의 애국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금지곡’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에 반영된 망국의 한은 우리 민족의 상당수가 공감을 했고, 노래에 관해 동질감을 느꼈기에 많은 대중들에게 불려지고 유행했을 것이다. 와 관련된 일화를 알게 되면서 내 가슴이 찡해짐을 느낀다. 나라 잃은 고통을 몸소 체험하지 못한 나도 이런 비탄에 젖는데 당시 대중들은 자신들의 현실과 닮아 있는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한을 조금이라도 달래려고 했을 것이다. 는 나라 잃은 설움, 경제적 실패, 곤궁함, 유랑민들의 참담한 심정, 신분 차별로 인한 여러 가지 고뇌로 힘들어하던 대중을 조금이나 위로하는 기능을 가졌기에 모두가 그토록 불렀던 것이 아닐까.2. 서로 다른 가수가 부른 를 들은 느낌을 말하라.는 여러 다른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다. 이 노래는 온갖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우리 옆에 자리하고 있는 노래 중의 하나이다. 노래가 나온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듣고, 불렀기에 몇 번이고 다른 가수들이 리메이크 했을 것이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노래는 어떤 큰 힘을 작용하고 있는 듯 지금에 와서 듣고 있는 도중에도 신기하면서도 찡한 것이 느껴진다. 먼저 경남 울산 출생의 가수 ‘고복수’가 부른 를 감상했다. ‘고복수’의 목소리로 듣는 는 원곡보다 더 처연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노래의 상황이나 비애감이 더욱 돋보였다. 다음으로는 경남 진주 출신의 가수이고, 당시 인기 가수였던 ‘남인수’의 를 들어보았다. ‘남인수’ 특유의 카랑카랑하고 금속적인 느낌의 목소리와 독특한 창법은 이전에 들어왔던 노래와는 조금 색다른 느낌을 전달해준다. 1960년대 후반에 나와서 1970지 못하던 무궁화 꽃은 을유년 팔월십오일에 만발하였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쪽이 나는데 삼팔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로 뭉친다. "이와 같이 몇 가지의 노랫말을 나열해 놓은 것만으로도 아리랑이 근세의 민족사를 반영하고 있음이 일목에 드러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뗏목꾼은 뗏목꾼으로, 광부들은 광부들대로, 심메 마니는 또 그들대로 각기 그들 생활의 애환의 순간순간을 아리랑에 담고 있다. 민족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아리랑은 민족적 동질성을 지탱하는 소리였다. 아리랑은 거시적으로 민족의 독자성에 이바지하였으나, 그보다 좀 작은 규모의 지역공동체이며 이익공동체의 독자성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다. 아리랑은 애원성이나 한탄의 소리였으며 항거요 비판의 소리이기도 했다. 이런 아리랑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노래로 인해 민족 감정을 선동해서 조선 사람들이 단결을 해서 반발이 일어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으로 일제는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지정했을 것이다.아리랑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는 가요인들의 엄청난 수난시대였다. 또 하나의 아픔을 말하고자 한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가요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서울 안국동 네거리의 레코드 상점은 가요인들의 울분과 원한이 서린 눈물의 장소가 되었다. 일본에서 고학을 하고 돌아온 이면상은 처녀작으로 를 창작하였는데, 채규엽이 이 노래를 콜럼비아 레코드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 레코드가 상점에 나오자마자 일제 총독부 학무국 검열계는 ‘금곡령’을 내리고 음반들을 모두 압수하여 구둣발로 밟아 깨버렸다. 작곡가 이면상은 자기의 처녀작이 취입된 레코드가 나왔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축음기 상점으로 달려갔으나, 그런 장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당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깨진 음반 조각을 움켜쥐고 식민지 민족의 설움을 토해내며 통곡하였다. 이것을 본 레코드 상점 주인은 울고 있는 청년이 ‘금지곡’ 처분을 받은 의 작곡가임을 알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백일홍은 피었다가 시들었는데들국화야 너의 웃음 맑기 되도록 이그러졌는가” 라는 뜻이다.'발리고(發離苦)'라는 말은 고생길로 떠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시난임(可視難任)'이란 언제 임을 다시 보고 만날 수 있을까라는 뜻이다. '십리도목가서(十里到鶩可徐)'라는 말은 십리길도 채 도달하지 못하고라는 뜻이다. 이 말은 아장아장 걷는 집오리가 멀리 갈 수 없는 것처럼 힘든 길을 갈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발병난다(發病難多)'라는 말은 어려움이 많아 병이 날 것이다라는 애절한 가사이다.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노래 가사로 부르는 아리랑의 음은 본래 아리낭에서 유래되었다. 아리낭은 노래 가사로 부르면서 아리랑으로 음이 변형된 것이다. 물론 아리랑(阿里浪)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단지 고향을 떠나면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리낭(阿里娘)이라고 하는 것은 젊디 젊은 어린 계집아이가 아리(阿里)의 고향을 떠난다는 슬프고 슬픈 사연이 담긴 한자 특유의 깊은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리낭 아리낭' 하는 음이 그대로 내려오면서 음이 아리랑으로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흔히 생각하기로 아리랑 가사는 순우리말 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토록 한자로 시작되었음을 잘 생각 해보면 우리말의 기원이 중국어와 다르지 않음도 느끼게 될 것 이다. 천축국은 불교 나라이다. 불교 나라의 제후국이었던 아유타국의 공주(公主)로 태어난 사람이 보주태후 허황옥이다. 당(唐)나라 때 불교가 인도로 건너갔다고《오백나한(五百羅漢)》이란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서역의 천축국〔天竺國〕에서 불교가 융성하여 중원으로 인도로 불교가 전파되었다. 천축국이 인도로 잘못 알려진 것은 18세기 때 일본이 번역을 잘못하여서 생긴 오류인데 오늘날에도 이를 앵무새처럼 따라서 외는 사람이 적지 않다.함께 풀어 볼 과제 5주차.1. 일제 강점기와 관련하여 유랑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정책에 의해 농촌 파괴 현상은 농민층의 몰락과 도시 유이민의 증가를 가져왔다. 설사 농촌에 남아있다 하더라도 농민의 상가 엿보인다. 중국을 배경으로 했지만 굉장히 친일적 성향이 보이는 노래이다.오빠라고 부르리까 선생님이 되옵소서사나이 가는 길에 가시넝쿨 넘고 넘어난초 피는 만주 땅에 흙이 되소서- 이화자, 중에서.[사나이 가는 길에 가시넝쿨 넘고 넘어]라는 대목에서 친일적 성향이 짙어 문제가 제기됐다. 또한 만주를 복된 땅으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있으며 이 곡에서는 춥고 썰렁하고 척박한 만주 땅의 흙이 되라고 말한다. 이는 조국, 즉 일본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라면 그 곳에 묻혀도 슬퍼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친일가요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내선일체’라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조선을 일본에 복속시키려는 강한 의도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고운봉의 , 이해연의 등 에서도 친일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인들의 지배 하에 작사. 곡자들에게 친일적인 성격의 가요를 짓게 하고, 가수에게는 노래를 부르도록 강제적으로 시켰을 것이다. 이 때 식민지 시절, 일제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친일가요를 짓고, 불렀던 이들은 이완용과 같이 맹목적으로 일본을 선망에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던 경우와는 다르므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이들을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 최근 중국이 야욕을 갖고 있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대하여 조사하고 그 대응방안을 말하라.동북공정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공정)'이다. 간단하게 말해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이다. 중국은 2001년 6월에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기로 하고, 8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이듬해 2월 18일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연구는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둥베이삼성의 성 위원회가 연합해 추진한다. 연구기간은 5년이며.
    인문/어학| 2007.06.07| 20페이지| 2,000원| 조회(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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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원 이광수에 대하여
    ? 춘원 (春園)이광수 (李光洙)? 1892 (고종 29) ∼ 1950.10.251. 서론이광수는 문학사적인 공로와 민족사적 반역이라는 두 입장 사이에 서서 평가받고 있는 데 그의 작품 「무정」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춘원 이광수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생각해보자.1) 생애? 가계아버지는 종원(鍾元)이며, 어머니는 충주김씨(忠州金氏)이다.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어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유학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일을 맡아보다가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메이지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경시간에서 익힌 기독교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 奴隷〉, 18일에 일문 〈사랑인가〉, 24일에 〈호 虎〉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귀국후 문필활동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그러나 11월 중순경 윌슨 미국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 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으며,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 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고, 이때에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단종애사〉(1928)·〈혁명가의 아내〉(1930)·〈이순신〉(1931)·〈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2) ‘이광수’를 바라보는 시각이광수는 최남선과 함께 언문일치의 신문학 운동을 전개하여 한국 적 명성을 굳혀준 작품이 되었다. 자아의 각성을 바탕으로 한 남녀간의 애정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민족에 대한 각성으로까지 확대된 {무정}은 신소설에 비해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구체화했고, 섬세한 심리 묘사로까지 발전하였다. 전반부는 '형식'을 중심으로 '영채'와 '선형'으로 이어지는 애정의 삼각관계가, 후반부는 민족을 위해 헌신하리라는 정신적 각성이 중심을 이룬다.? 무정 줄거리경성학교 영어 교사인 형식은 김 장로의 부탁을 받고 그의 딸 선형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선형은 정신 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가려는 지식인 여성이다. 선형을 처음 대한 형식은 그 고운 자태에 호감을 느낀다. 그날 형식의 하숙집에서는 박영채라는 기생이 형식을 찾아온다. 영채는 형식을 길러준 은인의 딸이다. 부친과 두 오라비가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힌 뒤 외가에 가서 갖은 고생 끝에 자기 아버지를 구하고자 기생이 되고 말았다. 그런 고생을 겪으며 그는 형식을 마음 한 가운데 두고 정절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형식의 앞에서 자기가 기생이 되었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하고 되돌아간다. 형식은 한편으로 영채의 순결을 의심하며 불쾌함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달콤한 그리움을 느낀다.그러던 중 형식은 경성 학교 학감 배명식의 추문을 듣는다. 평양에서 온 기생 계월향의 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거였다. 그는 영채가 계월향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가 다시 영채를 만나려고 찾아갔을 때 영채는 배학감과 김현수에게 이끌려 다른 곳에 가고 없었다. 형식은 신문기자인 신우선의 도움을 받아 이들의 행방을 찾아냈으나 영채는 순결을 잃은 뒤였다.영채는 형식을 위해 지켜온 자신의 정절을 빼앗긴 것이 수치스러워 죽으려고 평양으로 향하고, 편지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형식은 영채의 뒤를 따라 평양으로 간다. 그러나 영채를 찾지 못하고,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서울로 되돌아온다.한편 영채는 병욱이라는 처녀를 만나 인생을 새롭게 살기로 결심하고, 병욱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병욱의 오빠에게 연고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나 그대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신기하고 받아들이고 싶고 동경의 대상이지만 분명히 알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형식의 태도는 일관성을 잃고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다.- 박영채: 작품 안에서 ‘옛 관습’을 대표하는 인물. 과거 열녀들을 본받아 제 몸을 바쳐 감옥에 갇힌 가족을 구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기생이 된 인물이다. 옛날에 아버지가 ‘너는 형식에게 시집가라.’ 라고 한 말에 기생으로서 7년간이나 정절을 지키다가 겁간 당하자 죽으려고 대동강을 찾아간다. 하지만 평양행 기차 안에서 병욱을 만나 처음으로 ‘자신’을 자각한다.- 선형, 병욱: 이 둘을 묶은 이유는 새 관습의 세례를 받은, 이른바 신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인물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선형은 신식 학교를 다니고 신식 집에서 살고 신식이 되려고 노력하는 부모를 둔 것 이외에는 여타의 고전 소설에 나오는 얌전한 귀족 가문 소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반면에 병욱은 작품 중 가장 현대의 여성에 닮아 있는 인물이다. 의 여성 중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무정에서 ‘교육’이 가지는 의미두 여자를 둔 형식의 갈등과 더불어 작품의 다른 축인 '교육'은 작품의 또 다fms 주를 이루고 있다. 형식은 교육을 통해 이 나라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몽매한 민중을 일깨우기 위해 가르치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의 마지막 부분에 그런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저들에게 힘을 주어야 하겠다. 지식을 주어야 하겠다. 그리하여서 생활의 근거를 완전하게 하여주어야 하겠다. '과학! 과학!'하고 형식은 여관에 돌아와 앉아서 부르짖었다.(중략)"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들을…….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이외다. 저들을 구제할까요? “하고 형식은 병욱을 본다. 영채와 선형은 형식과 병욱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병욱은 자신이 있는 듯이,"힘을 주어야지요! 문명을 주어야지요.""그리하려면?""가르쳐야 이념 : 급박한 시대 변화에 대응하려는 지식인의 계몽 의식이 확산되었다.④ 근대적 민족 문학 : 개화기의 애국 계몽 운동이 일제 강점 이후 민족 독립 운동으로 전환되어 민족적 수난에 대응하는 문학의 근대적 양상이 태동되었다.- 문화적 배경 : ‘개화 계몽사상’이란 주제를 살리기 위해 종교는 유교와 기독교를, 지적 수준은 지식층을, 경제적 수준은 중산층을, 직업은 교사, 기자, 학생, 기생 등의 다양한 직업을 선정하였다. 실제 작품에서는 구체적인 시대난 역사적 사건이 드러나지 않았고, 내적 배경으로 작자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등이 나타나 있지만 서구 지향적 측면이 강한 작가의 사상적 배경이 반영되고 있다.2) 민족개조론과 친일 행적? 민족개조론춘원의 [민족개조론]은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 1922년 5월호(제23호)에 발표되었다. [민족개조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춘원은 조선민족의 쇠퇴 원인을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지배라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조선 민족의 타락된 민족성이라는 내적 조건에서 구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조선 민족성을 허위 · 비사회적 이기심 · 나타(나태) · 무신 · 겁나(겁이 많고 마음이 약함) · 사회성 결핍 등으로 보고, 그것이 바로 조선 민족의 쇠퇴 즉 식민지로의 전락을 결과하였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민족이 부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민족성을 개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민족성 개조운동은 정치성을 배제하고 문화운동 차원에서 민족개조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장기간에 걸쳐 전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와 같은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필연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조선 민족의 쇠퇴의 원인을 민족성의 결함에서 찾고 있는 점, 둘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의 결여되어 있는 점, 셋째는 민족개조운동에서 정치성의 배제를 역설하여 독립운동 혹은 민족해방운동 등 정치운동의 않다.
    인문/어학| 2007.06.07| 5페이지| 1,000원| 조회(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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