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찾아서를 보고.시작하면서.‘불을 찾아서’를 보면서 원시 인간의 모습들을 보며 그들의 생활과 삶에 대해 느끼는 점이 많았다. 현대의 인류는 불을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다. 라이터, 성냥, 가스레인지등으로 언제든지 원할 때 불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는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불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 영화를 보며, 불의 가치와 인간이 동물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한다. 인간도 처음 불을 접했을 때에는 두렵고 신비한 자연현상으로 느끼고 일종의 신성으로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불을 통제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은 직립보행을 한 것만큼이나 큰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고, 밤을 밝히고, 거주지를 따듯하게 할 수 있었다. 야수들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도 있었다. 인간이외의 동물들은 불을 두려워한다. 인간은 불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해 권력을 얻었다. 동물들은 인간을 해하기 힘들어졌고, 인간의 생존은 불로 인해 더욱 쉬워졌다. 비로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불을 통해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생태계 피라미드의 가장 상위 층에 서서 다른 동물들의 생사를 주관하는 것은 불을 통해 가능했다. 부족사회에서도 불을 통제하는 자, 불을 보관하는 자는 그 막중한 의무와 함께 부족 내에서 남들과 다른 지위를 부여받았다. 불은 인간의 친구이며 무기이며 생존과 직결되는 존재였다. 불은 인간에게 불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감상평화롭던 네안데르탈인으로 보이는 종족들에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족이 습격을 하여 마구 네안데르탈 족들을 죽이고, 전투를 한 후 우두머리로 보이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잿더미를 뒤져 불씨를 찾으려 한다. 전투에서 패해버린 네안데르탈 족들은 늪지대위에서 불을 잃은 것을 슬퍼하고 있는 중, 마치 불을 보관하는 것 같은 장로가 불을 보관하는 물건을 들고 나타나자 네안데르탈 족들족간의 분쟁에서 호모 사피엔스 즉, 현생인류가 살아남았다는 설을 이 영화가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장로가 가져온 불은 결국 꺼지고, 주인공은 다른 두 명과 함께 불을 구하러 떠난다. 나무를 깎은 창 여러 개와 가죽으로 만든 옷, 불을 담을 물건이다. 열악한 장비를 들고 그들은 무작정 길을 떠나고, 곧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된다. 곧 그들은 토끼 한 마리를 보며 침을 흘리는데, 이 모습은 우리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동물은 곧 먹이라는 등식은 수렵채집단계를 거친 후에는 거의 없어지지 않았나 싶다. 동물을 그대로 먹거나 익혀먹던 습관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처럼 동물만 봐도 침을 흘리고 먹고싶다는 욕구를 자극하지만, 죽은 동물의 고기만 보던 우리로서는 동물은 동물로서 이상 이하도 아니고, 음식 또한 그렇다. 사자에게 쫓겨 나무에 올라가던 모습도 참 재미있었는데, 직립보행을 하는 네안데르탈인도, 자기보다 강한 짐승을 만나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 그 위험을 피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도 역시 원숭이와 같은 유인원이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덧붙여, 졸다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떨어지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었다.더 불을 찾아 여행을 하던 주인공은 불의 연기를 보고 다른 부족을 찾아 가게된다. 그 부족의 떠난 자리에서 불씨를 찾다가 고기의 뼈를 보게 된다. 배고픈 세명의 용사들은 그것을 들고 남은 살점을 씹다가 인간의 해골을 발견하고 도로 뱉어내며 증오의 행동을 한다. 인간이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식인금지는 선천적인 것인가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데, 인간은 식인을 선천적으로 금지하는 유전자는 없다.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의 저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서진영옮김)를 따르면 식인을 위주로 한 사회는 유지하기가 힘들다. 사냥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인간이 대상이라면 사냥감이 많을 수록 도리어 사냥당할 가능성이 높다. 사냥하기에도 힘들다. 사냥감은 사냥법을 모두 알고 있기때문이다. 식인은 인간의 생산물이 인간자체에서 얻을 수 있는 열먹어도 된다면, 평소에도 사람을 먹는 것을 꺼리지 않고 자연스레 먹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주인공은 네안데르탈의 식인부족을 쫓아 영리한 전술로 두 명의 동료들에게 부산을 떨게한 후 자신은 불씨를 뺏으러 간다. 그 와중에 잡혀있던 호모 사피엔스의 여자를 구하게 되고, 호모 사피엔스 여인과 동행을 하게 된다. 불을 들고 주인공의 부족으로 돌아가던 주인공은 갈림길에서 호모 사피엔스 여인은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가고, 세 명의 영웅들은 의기양양하다. 그러나 불은 도착하기도 전에 꺼져버리고, 다시 불을 찾는 여정은 계속된다. 주인공은 호모사피엔스 부락근처에 다가갔다가 해자와 같은 함정에 빠져버리고, 호모 사피엔스들은 그를 놀리고 괴롭히지만, 그가 구해준 여인 덕분에 살아나고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잠자리에는 뚱뚱한 여자가 시중을 든다. 선사시대와 고대에는 날씬하고 마른 여자 보다는 추녀였고, 뚱뚱한 여자가 곧 미인이었다. 중동지역에서 발굴된 여인의 상을 본적이 있는데 커다란 유방과 엄청난 복부비만의 여인상이었다. 몸 안에 엄청난 지방을 품고 있는 여자가 자손을 많이 남기고, 먹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 고대에는 미인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그런 장면을 보며, 식습관, 미인관등의 습관은 언제나 시대에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최고의 접대인 듯한 호모 사피엔스의 접대는 성욕, 식욕, 수면욕을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호모 사피엔스 부족은 불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인공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우리가 자동차를 눈앞에서 창조해내는 마법을 본 것 보다 더욱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주인공은 그 모습을 지켜보지만 스스로 기술을 배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많은 과학기술이 과거에 마법으로만 치부되어 전수되지 못하고 소멸된 것이 불현듯 생각난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부족과 확연히 다른 점이 보이는데, 앞서와 같이 불을 만들어 내는 기술 이외에도 전신에 흙을 발라 치장을 호모 사피엔스 여인과 동행하여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간 주인공 일행은 기쁘게 불을 들고 부족에게 달려가다 그만 불을 꺼뜨리고 만다. 주인공은 호모 사피엔스 부락에서 본 대로 나뭇가지를 이용해 불을 만들려 하지만, 쉽게 되지않고, 동행하였던 호모 사피엔스 여인은 기술로 불을 만들어 낸다. 그 여인은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결국 주인공의 아이를 가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부족은 불을 얻었고, 주인공은 불과 함께 여자를 얻었다.이 영화의 오류는 네안데르탈인과 인간은 종이 달라 성적으로 결합은 가능하지만, 아이를 잉태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근래의 학설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네안데르탈인은 과연 인류의 조상인가, 아니면 공존하였던 다른 종류의 인간인가에 관해서도 학계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고 들었으므로, 이 영화에는 여라가지 무리가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사피엔스 보다 엄청난 차이를 두고 존재했던 인류였고,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일 것이라 생각한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관해1925년 R.A.다트가 남아프리카에서 출토한 유아두골(幼兒頭骨)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 africanus)라는 학명을 주었던 것이 속명의 시초이다. 다트는 유인원의 화석인 줄 알고 이 이름을 붙였던 것이나 그 후 수십 년을 지나는 동안에 이것을 화석인류인 것으로 인정하게 되었는데, 학명은 그런 의미를 떠나서 최초의 명명을 존중하게 되어 있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가장 후대의 자료는 S.B.리키 부부가 동아프리카의 올두바이 협곡(Olduvai Gorge)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진잔트로푸스(Zinjanthropus boisei)로 명명하였으며, 그 후 별개의 인류화석 5체를 발굴하였는데,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능력있는 사람)라 명명하였고, 진잔트로푸스보다 진화한 것으로 호모 사피엔스(H. sapiens)의 조상형이라 했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일반적으로 아파렌시를 씹는 기능을 가진 어금니가 매우 크다는 점이 이 종의 특징인데, 극단적인 경우 그 크기는 현대인의 4배에 달한다. 큰 어금니에 비해 앞니와 송곳니는 작은 편으로 전체적인 치열 형태는 뒷부분이 크게 벌어진 포물선형을 이루고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아파렌시스와 로부스투스보다 현생인류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로부스투스와 상당기간 공존하였지만 로부스투스보다 일찍 소멸하였는데, 이에 대하여는 아프리카누스의 일부가 사람속(屬)으로 일찍 진화하였기 때문이라는 가설과 이미 발생한 사람속과의 생존경쟁 속에서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소멸하였다는 가설이 있다.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주변의 식물을 채집하거나 육식동물이 먹다 남긴 찌꺼기를 먹으면서 작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였다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들은 유인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다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생활근거지의 확보, 성에 따른 노동의 분담, 의사소통의 수단, 친족관계 등의 문화적 요소를 지니고 생활하였으며,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 등이다. 이들이 만들어 사용한 석기군을 흔히 올두바이 공작(Olduvai Industry)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석기는 자갈돌 끝을 간단히 가공한 석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기능적으로 전문화된 도구의 제작은 아직 뚜렷하지 않고 석기는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의 조상임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으나, 구체적인 진화의 과정에 대하여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네안데르탈인에 관해이 무리에 속하는 화석은 1848년 지브롤터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856년에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의 네안데르 골짜기(네안데르탈)에서 발견된 두개골이었다. 발견 당시에는 두개골이 작은 데서 대형의 유인원(類人猿) 또는 백치(白痴)의 유골이 아닌가 하는 설까지 있었으나, 영국의 해부학자 킹은 이것을 원시적인 인류의 두개골로 인정하여, 1864년에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neanderthalensi되었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고시작하면서수업시간에 지구를 지켜라를 보기전 DVD로 미리 집에서 지구를 지켜라를 봤었다. 제목이 Save the Earth 가 아니라 Save the green planet 라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약간 궁금하게도 만들었던 영화였다. 세 번정도 봤는데 마지막 반전에서 괜히 웃음도 나오고 속도 시원했었더랬다. 광기와 현실, 천재와 미친놈, 진실과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준 영화 이기도 하다. 병구의 생각과 현실에서 줄타기 하는듯한 영화 구성은 아슬아슬하다. 대체 무엇이 진실인가를 놓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중반까지는 병구는 제 정신이 아니라 말해주기도 하고 왜 미친놈이 됐나하고 말해주다가 중반이후에는 모호한 느낌을 준다. 대중예술론 강의를 들으며 상식을 깨버리고 형식을 벗어나 생각을 하게만들어주는 것이 예술이라 들었고, 그렇다면 ‘지구를 지켜라’는 예술이다.천재와 바보에 대해병구는 영화속에서 천재이기도 하고 바보이기도 하다. 보통의 ‘상식적인’ 사람인 우리가 보기에 병구는 확실히 미쳤다. 특정인물을 외계인이라고 믿는다는 건 상식적인 사람이 보기엔 제정신이 아닌거다. 그러나, 역사 속의 인물들 중에는 미친사람 취급받았지만 끝내엔 천재로 임명된 사람이 꽤 있다는 것이 또한 아이러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카톨릭 교회의 천동설에 눌려 미친사람 취급을 받았고, 케플러와 갈릴레오 또한 그랬다. 진실은 때로 존중받지 못하고 ‘상식적인’ 일반 대중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했었다. 예술분야에서도 평생 빛보지 못하고 놀림 당하던 인물이 사후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가 되기도 했지 않은가. 역사에서 볼때 현재의 광인이 후세의 천재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병구가 아무리 미치고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그가 진실이고 현실이고 믿을만한 존재일 수 도 있을 것이다. 다른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처음볼 때인지 두세번째 볼 때인지는 모르겠다.) 천재와 바보는 종이한장 차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실감 하게 되었다. 정말 진실과 광기는 종이한장 차이 아닌가. 병구는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다. 어떻게 해서 믿는지는 감독만이 알것같다. 감독은 그에 대해 아무런 부연설명이나 자료를 들이 대지 않고 단지 관객에게 알아서 생각하라 한다. 산더미 같이 쌓인 외계인 관련서적과 비디오 테잎들만을 제시해주고 그저 ‘알아서’ 생각하라고 한다. 우리로서는 외계인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챌 작은 단서도 주지않는다. 그런 황당한 사실은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에게 무시당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병구가 정말로 왜 강만식 사장을 납치했는 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병구는 미쳤고 그걸로 우리는 강만식사장의 납치라던가 하는일 들을 합리화 해버린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병구는 수사장면에서는 일반적인 수사영화의 장면으로 사람들을 유도해 관심을 자꾸 다른데로 돌린다. 관객의 시선을 진실에서 떨어뜨리고 상식적인 사고로 돌아가게 하는 장치인지도 모른다. 외면받는 진실은 상식적이지 못하고 소수만의 생각으로 판단되어지고 쓰레기가 돼어버린다. 사실은 다른데도 말이다. 이런 면이 지구를 지켜라가 나에게 재밌는 영화로 생각되는 이유이다. 이중적인 성격과 뜻을 가진 병구의 과거는 또한 관객과 서울대출신 형사에게 병구의 광기를 합리화하고 진실을 은폐하게 만든다. 우리는 병구를 조롱했고, 그 댓가를 마지막장면에 가서야 치뤘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의 진실이라도 무시하지못할 가치가 있다. 시멘트 틈새의 잡초라도 함부로 뽑아 버리는 것은 진실을 무시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무시되고 잊혀진 보잘것없는 자들의 고통을 이영화는 말해주고 있는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면에선 사회고발 영화라고도 생각된다.반전결국 주인공인 살인마 병구는 죽어버린다. 강만식과의 사투를 벌이고 순이를 결국 살리지 못하고 죽는다. 보통영화 같았으면 약자가 이기고 기계에 목이 졸리는 순이도 구했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권선징악적 요소가 없다. 병구는 순이도 못구하고 자신도 죽는다. 차디찬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한 구성이다. 그대로 끝날 수 있는 상황에서 강만식은 갑자기 외계인이 되어버린다. 안드로메다 왕자인 강만식은 지구를 파괴하고 지구는 파멸한다. 보통영화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적자생존만이 남아있다. ‘펄프픽션’이란 영화가 생각이 났다. ‘펄프픽션’은 길에서 파는 펄프로 만든 잡지에 쓰인 싸구려 소설들을 말하는 것으로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일어나는 일은 결코 영화적이지 못하고 차디찬 인과율과 악의적인 우연만이 가득차있다.‘펄프픽션’이나 ‘지구를 지켜라’ 영화속의 해피엔딩은 관객의 마음을 안심시켜주고 보수적으로 만들뿐이라는 감독의 생각이 느껴졌다. 감독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한 생각을 강요한다. 이런 가혹한 반전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뒤엎어 버린다. 결국 병구가 거의 맞았고 틀린 점은 강만식이 외계인 왕자인줄 몰랐다는 것이다. 지구는 결국 멸망해 버리고 병구는 지구를 지켜내지 못한다. 병구가 지키려 했던 지구는 무엇이고 외계인이 없애버리는 지구는 무엇인가? 병구는 그동안 당했던 불행, 고통을 유지하는 사회를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 병구는 그런 고통을 주는 외계인을 상정하고 그들을 제거해서 지구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고, 병구의 행동은 그것을 보여준다. 병구가 약국에 들러 불량배를 때려눕히는 상상을 하는 장면을 보면 병구의 목표와 의지를 알 수 있다.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잔인한 동심어린아이는 자신만의 세계에 산다. 다른대상에 대해 가혹한 행위를 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병구의 고문방식도 상당히 유치하다. 때를 벗긴다거나 이상한 팬티를 입혀놓거나 묘한 증기뿜는 기계를 쓰거나 전기 고문을 하거나 한다. 아무런 죄책감은 없어보인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듯 행동한다. 그에게는 외계인은 그에게 고통을 준 대상이고 그에겐 없어져야할 존재다. 그러나 그는 바로 죽이지 않고 복수하듯이 고문을 가한다. 그런 면에서 병구의 정신 상태는 아동의 정신 상태라고 생각된다. 가혹했던 성장의 고통을 억누르며 마음속에 쌓아두고 산 병구는 어찌보면 어린아이의 정신상태를 유지했을 수 도 있을 것같다. 병구는 자신과 자신을 이해해주는 어린아이같은 순이이외의 사람들과는 소통이 전혀 없는 듯 보이고 폐쇄된 생활을 하고 기존의 어른들의 사회와는 담을 쌓고 사는듯싶다. 고립을 선택한 병구는 그 안에서 어린아이의 사고와 행동을 일삼고 자신에게 가혹한 행위를 한 사람들을 어린아이의 잠자리나 메뚜기 같이 잡아 고문하고 감금해 죽인다. 이런 병구의 어린아이같은 행동은 그의 고통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회에 대한 증오를 보이기도 한다. 그가 적으로 삼은 것은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순이라는 존재는 병구에게 있어서 외줄을 타는 천사이기도 하고 병구와 소통이 가능한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진 존재이다. 순이는 병구를 사랑하지만, 병구는 순이는 그저 동지나 세상을 향한 유일한 통로일뿐이라고 생각된다. 병구는 지하에서 마네킹들을 만들고 마네킹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병구에게 친구가 되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장난감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인간의 형체 이면서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상이며 바비인형 같은 마네킹은 불완전한 인간사회에 대한 구원을 더 멀게 느끼게 할뿐이다. 병구에게 마네킹은 이상향이고 그가 도달해야 하는 곳이다. 마네킹은 말도 없고 누구를 괴롭히지도 않으며,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저 항상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서 웃고있을 뿐이지 않는가.
▶근대 일본 정치 전개과정에 있어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적 역할과 한계그리고 이후 광기로의 필연적 이행1.머리말2.메이지 후기의 천황제 형성과정과 국내 자유민권운동의 고양 그리고 해외침략의 개시1)19C말기 일본 사회의 변화와 정국 상황가)근대화의 발전과 국외 정치적 상황나)개혁에 대한 민중의 불만과 지배계급 기초강화2)근대 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립과정가)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성립의 배경나)근대 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립과정-고대와 근대의 결합 속의 모순과 자연스러움3)자유민권운동의 전개와 좌절가)자유민권운동의 발생과 전개나)의회 개설운동과 자유민권운동이 좌절4)천황제 침략국가로의 이행과 해외침략의 개시가)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의 강화와 확립나)침략국가로의 이행과 해외침략의 개시5)러일전쟁 후 일본 제국주의 성립과 사회운동의 발전가)러일전쟁과 일본제국주의의 성립나)노동운동 사상의 성장과 사회운동의 발전다)중산계급의 성장 및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의 증대3.다이쇼 시대의 정치적 환경1)1910년대 일본의 정치적 상황2)헌정수호의 움직임과 다이쇼 정변가)다이쇼 정변과 1차 헌정수호 운동나) 지멘스 사건과 민중 운동의 발흥3)워싱턴 체제의 성립과 협조외교의 전개가)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대전중의 호경기나)워싱턴 체제의 성립과 협조외교의 전개4.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발흥과 전개1)민주주의와 대중 민권운동의 확산가)쌀 소동과 그 영향-소동에서 민중투쟁으로나)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사상적 기저2)다원적 사상과 사회 운동의 활성가) 노동 운동나) 농민 운동다)기타 사회 운동3)의회 민주주의 확립과 정당 내각의 출현·전개가) 정당내각의 출발과 성립나) 2차 호헌운동과 정당 내각의 확립 - 제 2차 헌정옹호운동다) 헌정의 상도 - 2대 정당시대4)정당의 특성과 변화와 정당의 타락과 정당정치의 퇴보가)정당의 특성과 변화나)정당의 타락과 정당정치의 퇴보5.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적 역할과 한계1)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사상과 역할2)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대적 의의와 통일강화가 불가결하다고 판단된다면 신화적 역사관에 의해 통합인 인식의 산물을 지정하고 자국의 역사와 현재를 절대화(絶對化)하는 것 이외에는 서구제국에 대해 자기를 정립할 수 있는 방도가 특별히 없었을 것이다.이렇게 힘의 논리를 앞세운 서구열강의 압력 속에 일본 메이지 권력자들의 의해 의도적으로 자연스럽게 천황이 권력과 의식의 통일정점에 수렴되면서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신하여 새로운 차원의 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가 창출되었다.나)근대 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성립과정-고대와 근대의 결합 속의 모순과 자연스러움일본을 위협하는 서구열강의 힘의 논리에 대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일본의 우위성을 확보할 수 있는 논리로서 등장한 국체사상은 그 성격 자체가 극히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국가의 탄생과 더불어 근대 일본의 통치 이념으로서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신봉되고 제도화 되어가면서, 근대일본을 관통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의 의식세계를 장악하게 된다.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 그것을 제도화하여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메이지 권력자들의 의도였고 그 일관된 의도는 지배계급의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근대국가의 지배이념으로서 서서히 뿌리내리게 되는 것이다.그 첫 번째가 제도가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정책의 실시이다. 당시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던 불교를 비롯하여 기타 제 종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탄압하여 신도(神道)에 의해 국민의 종교생활을 장악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국민을 통합하고자 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정치화된 국가신도는 신화에 의거하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는 국체관념을 바탕으로 정책적으로 만들어진 국가종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신도가 국가종교로써 쉽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들이 정서적 기반이 이미 고대 이래로부터 형성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군대국가 형성기에 있어서 신화라는 것은 종교 내지는 문화유산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으로서 신화가 직접적으로 정치적 기능을 담체결, 문무대신의 임명동의에 관한권등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못하였다. 통제와 간섭이 없는 천황의 권력은 ‘법률’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策命’이라는 이름으로 의회를 통하지 않고도 법을 제정할 수 있었다. 의회에 관한 소집, 폐기, 해산권도 천황에게 있었으며 국민에 의해 선출된 중의원도 천황직속의 귀족원과 추밀원의 일정한 통제를 받았었다. 국민의 기본적 인권은 ‘칙령’에 의해 언제든지 유린할 수 있었고 이러한 무소불위의 천황의 대권을 제도화하여 천황제권력 확립을 위한 물적 기반 구축도 이루어졌다. 이미 언급했지만 일본의 자본주의는 국가권력에 의한 국가자본과 정상특권자본(政商特權資本)이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1885년 불황이 가라앉은 후 자본주의 산업은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시기 전국의 회사자금은 1.340엔에서 1억 8.900엔으로 14배나 뛰어오르고 당시 대표적 산업인 방적업에서 방직공장이 19개에서 30개로 5만사에서 약 30만사로 생산량이 급등하였다. 수공업과 소규모 영세업은 몰락하고 기계제 대공업화가 진행되었고 그 자본의 상당량이 국가자본이었다. 민간산업과 함께 철도, 항만, 건설등 대규모 기간산업이 부흥하면서 국가와 결탁한 정상들의 자본이 거의 완전하게 독점하였다. 미쓰이 미쓰비시등은 이러한 거대 정상재벌로써 성장하였고, 따라서 모두 정부의 통제와 국가자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천황제는 이러한 산업의 모든 부분에서 국가자본을 통해 통제하면서 물적 기반을 확보하였다.당시 일본의 대일본제국헌법을 기반으로 한 절대주의 천황제는 국민에 대한 정신적 지배의 체계로부터 경제적 기초를 포함한 갖가지 세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완성되어갔다. 최신 근대의 이기와 다양한 사상과 조류가 넘치는 시대에도 고대적인 신성불가침한 천손의 권위와 결합시켜 지배세력의 능률적인 고도의 중앙집권기구로서 전국민의 개개인에게까지 직접적으로, 그들의 일상적인 물질 및 정신 생활의 구석구석까지도 천황의 이름으로 지배되는 체계를 완성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와같이 확립된 근대 천황제국가악화되어 1907년 이후 두 나라의 신문과 잡지에는 미일전쟁의 가능성까지 게재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양국은 관계도모를 모색하는 일본은 미국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러시아와의 관계조정에 나가는 이중성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기생지주제(寄生地主制)가 확립되고 농민이 몰락하는 상황 속에서도 대 자본세력과 결탁한 지배세력은 각종 이권과 특혜를 불허하여 자본가의 재벌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러일전쟁 후에도 일본은 러시아의 보복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중국침략을 위한 군비확장이 계속되고 특권 대재벌은 천황제 군국주의를 기본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에 군비확장은 그만둘 수 없는 사업이었다. 군비확장은 대재벌에게 짧은 기간안의 큰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1907년과 1908년의 공황에 따라 중소기업의 도산하고 대기업사이에서 인수·합병 진행되어 본격적인 독점 자본을 성립시켰다. 조선에 대해서도 합방(1910)을 단행하여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한민족의 힘을 말살하려 하였고 경제적으로 미쓰이, 미쓰비시, 애스다등 대 재벌이 일제의 국가독점자본을 가지고 조선의 모든 재화와 시설을 약탈·장악하였다. 조선을 독점적 식민지로 만들고 난 뒤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침략으로서 그들의 제국주의적 욕구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시기에 만주시장을 노리던 미국이 있어 또다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대하여 남만주의 군대를 증파 하고 철도부설권을 넘기는 협박을 가하는 등 노골적인 침략적 제국주의국가로서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후 1911년 2월 미국과의 사이에서 조약개정을 4월에는 영국과의 사이에서 조약개정을 통해 메이지 시대의 숙원사업이었던 불평등 조약이 개정되었다.러시아의 보복대비와 중국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무력의 수단으로서 군비확장은 계속진행 되고 있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이 기회에 중국의 내정간섭에 착수할 움직임을 보였다. 1912년에는 만주에 자국민 보호라는 구실로 1개 사단을 파견하였으며, 중화민국 성립 후에도 이를 공식 하라 다카시는 그의 일기(1918년 11월 3일)에서 '인민은 어느 새 국외의 공기에 감염되어……사회주의의 전파는 이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동시에 쌀 소동은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일반 민중들에게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준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쌀 소동은 무산 계급의 자비심(自卑心)을 일소하고 자굴심(自屈心)을 불식시켰다. 그리고 강한 자신감과 자존심을 가져다주었다." 우애회(1912년 8월 결성된 전국적 노동 조합)의 창설자 스즈키 분지(鈴木文治)의 말이다. 다이쇼 정변에서 드러났듯이 기성 정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 움직여왔던 노동자 계급과 민중은 이제 스스로의 조직과 이론으로 전진하기 시작한 것이다.나)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사상적 기저명치시대가 끝나고 다이쇼 시대가 접어들면서 일본은 점차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로 발전해 갔다. 이 같은 사회적 변화는 멀리는 자유민권운동에서 다이쇼정변과 노동·농민운동, 호헌 운동, 쌀 소동운동에서 나타나듯이 ‘민중의 각성’을 바탕으로 한 민중의 정치적 대두라는 구체적인 민중운동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메이지 시대의 운동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이쇼 시대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된 민중운동과 이를 뒷받침하는 민주의 각성은 일본 특유의 현상이면서 근대 세계의 공통된 보편적 현상인 것이다. 민중의 정치참여라는 대정 데모크라시는 당시 일본사회에 수용되었던 사조에 의해 더욱 확대되어 나갔다. 이러한 사조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이 천황제 지배상황 속에서도 국민의 정치참여와 권리신장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상을 바탕으로 한 민중운동, 특히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1920년대 말 국가주의 사상이 움틀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겉으로 보이는 현상과 달리 현상의 이면의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당정치와 관련되어 기술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먼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커다란 사상적 3가지 사조에다.
조선시대 유교적가족윤리에서 본 여성의 지위머리말Ⅰ. 조선시대 유교윤리에 나타난 여성관Ⅱ. 혼인제도로 본 여성의 지위Ⅲ. 法俗에서 나타난 지위Ⅳ. 禮俗에서 나타난 지위맺음말머리말오늘날 전통의 현대적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측면은 여성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근대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급격한 계층 간 이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과거의 다양한 신분질서, 위계질서, 권위체계, 억압구조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남녀간의 차이, 남녀관계에 대한 의식과 구조는 급격한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가장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들이다. 그러한 여성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儒敎文化의 정착이다.조선전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여성의 권리와 자유로운 생활에 관한 사료보다는 여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자 하는 기록이 더 많다. 이것은 조선 초기 여성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반증하는 자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와 같은 규제를 통하여 여성생활이 점차 통제되어지고 규제되어 갔음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하다. 이렇듯 성리학적 생활관과 가치관 정착을 위한 조선 정부의 노력은 건국 초부터 여성 권리 억압과 생활통제의 모습으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초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 기반이 안정되기 시작하는 세종 조부터는 남성중심의 家父長的 질서가 권력과 강력히 연합하여 七去之惡, 三不法, 烈女不事二夫, 등의 다수의 윤리들이 점차 실현되기 시작하였으며, 성종조를 전후하여서는 『經國大典』에 이를 현실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강제적 조치들이 법제화됨으로써, 예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사회규범이 법적 구속력을 획득하게 되었다.이 논문을 통해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여성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유교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여성관을 알아보고 이어 여성들의 지위와 관련하여 婚姻제도와 여성의 지위, 法俗에 나타난 여성의 지위, 禮俗에 나타난 여성의 지위를 살펴봄른 차별적 여성생활과 문화를 지키게 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그 유교사회를 떠받치는 定礎가 되기를 강하게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용옥, "유교적 여성관의 재조명," 『한국 여성학』창간호 p.7이는 바로 여성에 대한 차별의 논리가 실제화된 것을 의미하며, 사회적인 강제와 장려를 통해 조선사회에 작용함으로써, 당시 사회를 유지하는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유교에서는 남녀관계를 모든 인간관계의 근원이라고 본다. 남녀간의 구별이 있은 후에 부자간이 친해지고 부자간이 친해진 뒤에 義가 생기고, 의가 생긴 뒤에 禮가 이루어지고, 예가 이루어진 뒤에 만물이 편해진다고 하여, 남녀란 人倫의 根本이며 萬歲의 시작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정도전,『조선경국전』상, 혼인. 삼봉집그리고, 남녀 또는 부부간에 가장 중시해야 할 점으로는 禮 즉 서로 삼가서 예의를 지키고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논고 한다.) 『禮記』, 券12, 內訓.이것은 남녀 모두를 동등하게 여기며, 상호 예절을 지키며, 역할 분담에 따른 조화를 유지함으로써, 매우 이상적인 남녀관계와 부부관계를 제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남녀 또는 부부간에 조화와 상호존중을 명분으로 내세운 차별과 구별의 윤리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성리학에 나타난 남녀관의 논지를 정리해 보면, 조화를 내세우고는 있지만 결국 차별이 강조되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즉, 우주자연의 원리인 陰陽은 본래 불평등한 것으로서 陽은 剛하고 尊하며, 陰은 弱하고 卑한데, 양은 歲功을 주재하고, 음은 양을 도와 歲成을 가져올 뿐이다. 남녀 역시 음양과 같은 것으로서, 여기에는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낮다는 차별의식이 성립된다. 그런데 이것은 운명적이고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거역할 수 없다. 여기에 순종하는 것은 만물의 생성 발전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하고, 이를 부부관계에 적용하면, 婦는 夫에 대한 순종을 德과 正으로 삼고, 夫唱婦隨해야 하며, 남자의 뜻에 順할 뿐 專制의 뜻을 가져서는 안 된를 다하지 못하고 급히 내치고자 한다면 박한 데 가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조광조, 『정암짐』, 부록 제2권, 語類.하였다. 차별과 구별이 있는 가운데에도 서로의 노력에 의해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함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되나, 여기에서도 여성은 기본적으로 어둡고 지각이 없는 존재로, 또한 감화의 대상으로서 파악되고 있는 점이 엿보이는 것이다.혼인제도로 본 여성의 지위조선시대에는 혼인을 인륜의 가장 큰 대사로 보았기 때문에 婚禮를 행하지 않으면 혼인으로 인정하지 안았다. 사대부들은 '朱文公家禮'를 수용하여 이에 의한 혼례를 거행하고자 하였다. 혼례는 주자 6례 가운데 議婚·納采·納幣·親迎의 혼인 4례가 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 가운데 성례의식인 친영은 시행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어 끝내 잘 성사되지 못하였다.혼인은 반드시 중매를 요하고 혼인 결정은 결혼 당사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의 婚主 즉 가장의 의사에 따라야 했다. 이것은 가부장권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혼례의 의식은 부모나 長親에 의하여 주관되었다. 혼인은 이성의 결함이라기보다는 두 가문의 결합을 통해 가문을 높이거나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혼인은 조혼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조혼은 가임 기간을 일찍 당길 수 있기 때문에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많은 자식을 낳으려는 목적과 관련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산모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王政의 이념에 의거하여 여자의 혼기를 놓치지 않도록 사족의 딸로서 나이가 서른이 가깝도록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한 자는 禮曹에서 혼인비용을 도와주도록 하였고) 『경국대전』권 3 예전 혜휼조.반면에 문호가 가난하지 않은데도 나이가 서른이 넘도록 출가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가장을 엄중히 논죄하는 등) 『경국대전』권 3 예전 혜휼조.국가적인 조치를 취하였다.혼인은 대게 같은 신분 내에서 이루어졌지만 양천간의 혼효를 막기 위해 양인과 천인간의 혼인은 금지되었으나 양반과 양인과의 혼인은 행해지고 있었다. 모계친족에 대한 배려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성리학자인 혼인풍속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계속적으로 힘쓴 결과 점차 여자가 결혼 후 남자의 집으로 옮겨와 남자의 집에서 사는 親迎制가 섞여서 시행되다가 17세기를 전후하여 성리학적인 사회윤리가 일반민에게까지 보편화되자 친영제도도 왕실과 양반층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가진 모계중심의 남귀여가혼은 뿌리깊게 유지되고 있었다.) 柳馨遠은 "지금 국가에서 왕자·왕녀 혼인은 모두 친영례를 행하고 있으나 사대부가에서는 나쁜 옛 습관에 젖어 사위가 부인의 집에 머무르는 고로 이것을 취한다고 할 수 없고 入丈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양이 도리어 음을 쫓는 것이니 남녀의 의를 크게 잃음이다. 마땅히 예법을 밝히어 인륜의 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柳馨遠, 『磻溪隧錄』권 25 續編 申明親迎之禮條).한편 조선시대의 일반적 법정 이혼은 『大明律』에 규정된 '七去') 『大戴禮記』에 의하면 七去와 三不去가 있는데 七去는 '不順父母去, 無子去, 淫去, 妬去, 有惡疾去, 口多言去, 竊盜去'를 말한다.와 그 제한인 '三不去'에 근거하고 있다. 이른바 '七去之惡'에 해당하는 七去 가운데 이혼의 가장 큰 요인은 시부모에게 不順한 것과 아들을 낳지 못한 문제였는데 이것을 보면 여성이 가부장적인 가족질서에 매우 예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칠거지악은 여성의 지위를 극도로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法俗에 나타난 여성의 지위조선시대의 유교 윤리적 남녀 관계는 사실상 우리 나라의 전통적 사회관습과는 다른 중국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만 해도 남녀의 지위는 동등하여 재산 소유와 처분, 奉祀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권한을 충분히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료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여성들의 다양한 활동모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남녀의 접촉 역시 비교적 용이하였다고 추측된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이자 위정자들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당위로서 수용한 유교 윤리를 사회에 정 비하시키는 등이 그것이다.직접적인 여성의 활동제한은 女性의 性犯罪 豫防을 목적으로 하여 모두 그 바깥출입을 제한하거나, 출입시 남녀의 자유로운 접촉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婦女의 上時禁止 및 行樂禁止, 轎子사용의 의무화, 여성의 再嫁, 三嫁에 대한 제한 및 금지, 姦通罪 처벌 등이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행동상의 규제는 곧 수절과 정절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관습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정절 이데올로기로서, 조선조 후기로 갈수록 그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특히 양반여성에게는 절대 도덕률로서 사회화 과정 속에서 철저하게 주입되었다.법전에는 이러한 禁制만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禮典 奬勸條에는 三綱行實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士族의 家長, 父老 혹은 敎授 訓導 등으로 하여금 부녀자,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만약 대의에 능통하고 몸가짐과 행실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포상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이미 건국 초부터 烈女轉을 수입, 보급하고, 孝婦와 烈女 등에 대한 표창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이 지속되어 법률화하고 있으며, 표창과 더불어 각종 役의 免除와 旌門 建立등을 통해 여성에 대한 통제를 철저화 하였다. 숙종대와 순조대에까지 이러한 정책이 계속되었던 데에서도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숙종 6년에도 풍습을 격려한다는 차원에서 『三綱行實』을 北道에 보급하고 있으며,) 숙종 6년 6월 16일 계유.7년에는 金正國이 지은 『警民編』과 鄭澈이 지은 『勸民歌』를 함경도 각 고을에 보내어 부녀들이 尋常하게 외우고 익히도록 하는 조치가 있었다.) 숙종 7년 7월 21일 임신.禮俗에 나타난 여성의 지위조선시대 여성에 관한 예속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女性 敎訓書이다. 여기에는 당시 여성에 대한 인식과 또 여성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의식교육 내용들을 잘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성 교훈서로는 『小學』을 중심으로 『三綱行實圖』, 『女訓』, 『五儒家』,『內訓』『언문삼.
▶들어가며우리의 역사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큰 역사의 책임자이자 주체자는 다수 민중이었다. 반면 지배층이라 불리는 기득권세력은 단지 그들의 기득권의 이해에 사상에 근거하여 진보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반란과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지으면서 민중의 요구를 억제하고 옭아매고 억압했다. 이런 기득권층의 퇴영적이고 근시안적 행태를 무너뜨리고, 발전적 진보적 역사를 창조해내는 일은 언제나 민중의 몫이었다. 변혁을 위한 진통의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다만 민중이었다. 구조나 체제의 모순으로 일어난 상황이나 현상에도 언제나 강제나 강요함으로써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일들을 보면서 19세기 우리 나라와 중국의 동학농민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은 그 민중적 질곡의 속박을 자각을 통해 해방을 이루어내는 모습에서 오늘의 산적한 문제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두 민중운동의 구체적인 정책과 과정을 시대적 요구인 평등의 이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태평천국운동과 동학혁명운동의 성격과 평등이념1. 태평천국운동의 전개와 평등이념1) 변동하는 중국사회와 민중운동중국에 있어서 19세기는 구체제의 이완현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흐름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만주족의 청조정권은 집권한 지 1세기 동안에 안정적 사회질서를 회복하여 강희·건륭기의 '盛世'를 맞이했다. 부분적으로 반(反)만족 폭동이 분출한 적도 있지만 만한(滿漢)간의 민족모순은 매몰되어갔다. 만주족의 정치적 특권에도 불구하고 18세기는 중국적 전제 지배체제의 절정기라 할 수 있고, 외견상 고도의 사회적 평정을 구가한 시대였다. 사회경제적 발전 양상도 중국 본부와 변방간에, 해안 및 대수로변의 중심지대와 그 주변 내지의 변경지대간에 지리적 입지조건의 차이에 따라 달랐지만, 지주제에 기반한 농업과 상업, 수공업의 양적 발전은 중국사회의 양적 발전은 중국사회의 질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말 사천, 호북, 섬서 등 후진적 3성 변경지대에서 발발하여 10년간 휩쓸었던 백련 관병인 팔기(八旗) ·녹영(綠營) 등의 군사적 기능이 약해지자 향촌의 치안을 유지하고자 토호(土豪)와 지주(地主)들에 의하여 무장자위단의 조직이 성행하였다.18세기 중엽 이후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반란에 대항하려고 정부에서도 관병에 대신해서 향병(鄕兵)을 이 용하고자 단련을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유력한 지주나 지방관의 통솔하에 장정을 징집 훈련하고 양 식을 자담(自擔)하면서 지방의 방비에 임하도록 하였으며, 19세기 중엽 이후 태평천국의 난(1850∼64)을 진압 할 때 대대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때 관부에서 양식과 무기를 공급하며 향촌의 경역(境域)을 떠나서 다른 지 역으로까지 출정시키는 사례까지 생겨 병역의 모병제를 방불하게 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때 활약한 증국번(曾國藩)의 상군(湘軍)이나 이홍장(李鴻章)의 회군(淮軍) 등도 각기 후난[湖南] 안후이성[安徽省]의 단련 을 개편한 것이다.과 향용(鄕勇)을 조직 무장하였지만, 객가는 해지(該地)의 한인사회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박하고 분산된 지편에서 경작하고 있었던 관계로 응집된 주거형태도 갖추지 못한채 객가어(客家語)라는 공통의 방언을 매개로 결집하여 본지인과 대응하고 있었다. 어떤 이념적 조직적 대변세력도 갖지 못하였던 이들 한인 소외계층에게 침투하여 이들을 대변, 조직하고 정치운동세력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은 단순히 그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경제적 상황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적대세력인 본지인들의 향촌공동체의 이념적 토대인 유교의 권위까지 비판할 수 있게 한 민간종교의 역할과 그 종교의 기저에 깔린 평등적 이념 때문이라 하겠다.그리하여 이 농촌사회의 생존경쟁에서 열세의 위치에 있던 객가는 결국 패배하였고 이후 정치적 결사와 반란을 통해 그 패배를 일거에 역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선이주(先移住) 한인집단인 본지인들과 경쟁 해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열세에 처한 경제적 불평등, 기존사회의 지연적·학연적·정치적 차별과 기존 정치권력의 무능과 무책임을 절감했다 빈농과 무산계층이 태평군에 참여한 것은 자신들이 속해있던 농민과 무산자의 지위를 제고하기 위한 계급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청조와 지방엘리트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반발이나 기아적 생존위기로부터의 탈출 혹은 신질서 내에서 신분적 변신을 기대했던 데 따른 것이다. 태평천국 정권 역시 피치자로서의 농민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근본적인 변혁을 모색하지는 못하였다. 결국 태평군은 무산 농민군 이었으되 농민적 지위를 초극하려 했으며, 재촌 소농민은 고향을 떠나 혁명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까지 느끼지는 못했고, 태평군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의 조직체인 태평천국 정권과 일반 농민간에는 엘리트적 지도층과 피치자라고 하는 전통적 세계관) 태평천국 지도층과 일반 성원들간에는 엄격한 차별이 설정되었다. 정권조직상 그들은 천왕예하의 분권적 왕으로서 분봉되었으며, 신분적 威儀를 드러내기 위한 복잡한 의례가 만들어지고 신분이 세습되었으며 금욕적 평균주의적 원리에 저촉받지 않았다. 그들은 교리상 일반성원과 함께 천부를 가부장적으로 하는 보편적 일반가정의 형제임과 동시에 천부와 예수에 직결되는 배타적·폐쇄적 소가정의 성원으로서 설정되어 있었다. 이런 특권적 차별이 지도층이나 일반성원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결국 유교적 전통주의에 입각한 가부장적 전통위계질서에 태평천국정권이든 회당이든 종족적이든 익숙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이 관성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본래 비밀 회당적 상부상조 집단의 차원에서 출발한 배상제회는 청조와 지방세력의 탄압 과정에서 홍수전을 천왕(天王)으로 하고 국호를 태평천국(太平天國)으로 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권적 종교·사회 복합체로써 출발하였다. 태평천국이 보편적 개방적 정치집단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종교적 규율과 평등적·보편적 이념을 견지함으로써 지방적 한계를 탈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평군의 공적 재정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교리에 기초하여 원칙상 교인의 재산과 전리품의 사유권을 부정하고 중앙에 집결 민중봉기였다.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새로운 동력에 의해 낡은 체제가 부정되고 극복되는 과정에서 생산관계의 변화와 더불어 성장한 일부 민중이 자신들에 합당한 사회적 위상을 요구하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요구가 다수 농민과 민중의 이해에 맞게 충실히 관철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 건설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19세기는 조선후기는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경영의 개선등으로 생산력의 증대를 꾸준히 이루어왔고, 생산력이 발달함에 따라 생산관계와 더불어 분배관계 그리고 지배구조에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봉건 지배세력은 이러한 역사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잉여생산물을 독점하고 민중의 요구를 탄압하고 억제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19세기의 역사적 과제는 잉여생산물의 사회적 분배와 지배구조의 변화를 놓고 직접생산자인 농민과 기득권세력인 봉건 지배층 그리고 봉건왕조권력 사이에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문제였다.19세기 조선후기로 갈수록 부세 운영의 문란과 군사력·치안의 공백까지 겹쳐 봉건질서 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이에 따라 통치기강은 날로 헤이해졌고, 농촌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농민항쟁과 변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와해되어가고 있던 체제에 재차 타격을 가했다. 조선사회는 이런 내적 도전뿐만 아니라 외적 충격에까지 노출되어 체제붕괴가 점차 가속화되었다. 이즈음 잦은 외국선박이 출몰하고 조선사회를 긴장시키는 가운데, 19세기 중엽에는 이런 배들의 출몰이 점차 늘어나 1802∼1860년 동안에 20∼30여 차례로 증가하였다. 이런 배들은 상품을 싣고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을 뿐만아니라 때로는 약탈행위까지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자본주의 상품은 19세기 중엽부터 벌써 중국과의 밀무역을 통하여 침투해 있었고, 여기에 전염병의 만연이라는 자연적 재해까지 겹쳐 농촌인구를 앗아감으로써 사회적 위기의식을 부채질 하였다. 국제정세 또한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어 동아시아의 종주국으로 군림해 왔던 중국이 서구세력에 의해 침략을 당하면서 곧이에 이르러서야 여타의 양반지배층도 이러한 상황을 큰 위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종친인 이하응을 내세워 세도정권에 이끌려 다니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부의 기강을 바로 잡아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하응은 그의 아들이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자신도 대원군의 지위에 오르게 되자 전제권력을 휘두르고 권력을 재편하였으며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 위한 시책을 펴나갔다. 부패한 관료들을 몰아내고 일부 개혁적인 조치를 취하여 한때는 민중에게 호응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봉건질서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하려는 수구 보수정책이었고 당시 민중과의 요구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또 다른 대응 세력으로 개화파가 있었다. 그들은 외래의 새로운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를 위해 서양의 기술문명과 근대제도를 수용하는 일이 당시로서는 가장 중요한 시급책 이라고 보았고 개화파 가운데 일부는 이 일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일본의 힘에 의지하여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왕권 강화론이나 척사론 그리고 개화파는 모두 근대사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조선사회가 앉고 있는 근본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한결같이 기존 체제를 보호·유지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렇게 19세기 후반 지배층의 현실인식은 봉건왕조의 지배권을 강화하고 봉건 지배이념의 규정력을 높이거나 혹은 외래 문물이나 외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지배력을 계속 확보하려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다.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층 대중이나 지식인은 각자의 입장에서 대응방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학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의해 창립(1860년, 철종 11년)되었다. 따라서 동학 성립에는 일정한 역사의식이 담지 되어 있었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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