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국제 면을 통해서 본 ‘인간안보’(2005년 9월 27일 ~ 12월 7일)국사학과 2002630019 서승완1. 머리말과거의 신문 국제 면에서는 국가안보의 관련된 문제들이 주요 기사로 실렸지만 냉전이후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라 인간안보에 관련된 문제들이 주요 기사로 실리고 있다. 이에 따라 한겨레신문의 국제 면에 실린 국제 기사들 중 인간안보에 관련된 기사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2. 인간안보에 관련된 신문 국제면 기사의 유형분류와 분석※기사가 실린 크기와 중요성에 따라 (3) - (2) - (1)로 구분. 숫자가 클수록 중요1)경제안보,①미국 내의 복지 정책(3) - 공화당은 경제 성장을 위해 복지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정책과 민주당은 빈곤층의 복지에 대한 예산은 사회의 기본적인 안정망이기 때문에 유지해야 한다는 정책을 주장하며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는 신자유적인 노선의 동조하는 공화당과 이와는 다른 민주당의 기본적인 이념의 차이로 해석할 수 있다. 10/12②인턴사원은 값싼 노동력일 뿐 (2) - 독일의 기업들이 구직난을 기회로 이용해 많은 직원을 인턴사원으로 채용 이윤 창출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 인턴사원들은 값싼 임금에 착취당하는 ‘피해자’이면서 기존의 정규근로자를 없애는 ‘가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연맹에서 권리구제 등 적극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기업들의 이윤의 창출과 노동유연성의 확보를 위해 非정규직을 확대해 나가면서 발생한 문제이며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더욱더 확산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회이슈가 될 것으로 보이며, 이미 비정규직의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5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11/42)식량안보①케냐의 그린벨트 운동(3) - 단순한 식량지원이 아닌 주민들의 자립을 위해 시작된 이 운동은 1970년대 처음 시작되어 30년이 지난 지금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케냐도 여느 개발 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빈곤과 인구폭발로 인해 많은 녹지가 파괴도괴 사막화가②식량지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3) - 기본적으로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은 늘어나고 있지만 매년 수백만 명이 아사함으로써 지원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다. 지원 방법과 대상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는 기본적인 아프리카 문제에 대한 중요한 비판으로 단순한 지원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 즉 기술 이전과 같은 방법이 병행되지 않는 다면 식량사정은 나아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2/23)보건안보,①유럽 ‘조류 인플루엔자 치료제 확보’ 줄다리기(3) - 터키에 이어 그리스까지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가금류가 집단 폐사 하면서 치료제 확보를 위한 경쟁이 과열되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의 인체 감염 위험성이 전해지면 각국에서 치료제로 알려진 타미플루를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전염병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대국과 특권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치료제 생산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타미플루의 특허권 개방 등을 요구하지만 과연 실제로 가능할지는 미지수 있다. 10/19②에이즈 환자 4천만 넘었다(2) -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이 세계보건기구(WHO)와 공동으로 21일 발표한 ‘세계 에이즈 현황 보고서’는 올해 전 세계 에이즈 환자가 4030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과 아시아 지역에서의 감염자의 증가를 경고했으며, 여성 감염자가 급증했다고 전했다. 이는 에이즈가 이미 어느 한 나라에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주요 에이즈 환자 다수 보유국이 제 3세계 국가라는 것인데, 경제의 후진성과 위생이나 성에 대한 인식이 비례함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경제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11/224)환경안보①북극이 녹으니 도시가 잠긴다.(3) - 100년 안에 북극의 얼음이 모두 녹고 북 자원만 확보하면 된다는 경제만능주의가 나타난 예이다. 이미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나 아직 교토의정서의 발효와 같은 구체적인 대책은 부재한 것이 사실이다. 10/21②지구 경작지 더 늘릴 곳 없다(2) -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지난 300년 동안 지구의 경작지는 6배나 늘어 전체 육지면적의 40%에 달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지속적인 식량자원 생산을 위해서는 더 이상의 환경파괴는 없어야 한다고 경고하며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성장 중심의 경제발전에 대해 비판하는 것으로 더 이상 환경파괴적인 식량생산은 중단되어야 한다. 특히 선진국에 의해 주도되는 식량주권에 대한 논의도 다른 국가들과 함께 이루어 져야 한다. 12/75)공동체안보①13년새 분쟁 40% 줄었다. (2) -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인간안보센터가 18일 발표한 ‘인간안보보고서’는 냉전이 종식된 1992년 이후 지난 13년간 전 세계에서 전쟁 등 무력분쟁은 40% 이상 감소했다고 밝혔다. 특히 같은 시기 1000명 이상 사망자를 낸 대형 분쟁 건수는 70% 이상 급감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UN이 분쟁의 발생을 억제한 것이 아닌 재발만을 방지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며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이 보고서에 대해서 과연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분쟁이나 특히 제 3세계의 일을 제대로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직은 인간안보에 대한 문제가 전 세계적인 중요한 이슈가 될 것 같다. 10/19②“파키스탄 지진 사망자 최대 10만 명”(3) - 파키스탄에서 이러한 최악의 지진으로 5만 4천명이 사망 확인되었으며 실종자도 수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러나 도움이 안 닿는 지역 20%에서는 2차 재난을 걱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원인에는 무샤라프 정권의 무능이 원인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파키스탄의 국한된 문제이며, 현 정권의 무능에 대해 비판할(2) - 벨로루시 정부가 아프간과 체첸의 피난민을 과거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지역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어서 암과 같은 큰 질병의 발병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6배나 높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인 피난민에 대한 인간안보를 무시한 행동으로 이러한 오래전부터 큰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따라서 피난민의 인권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 19/176)정치안보,①중국 민권운동가 테러 뒤 실종(2) - 부패관리 파면 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중국의 인권 운동가가 괴한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 뒤 실종, 관에 의한 개입을 의심하고 있음. 이는 중국내의 민주주의와 정치 자유화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에 대해 중국 공산당에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한 한 가지 예이다. 앞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사람들의 정치적인 권리에 대한 요구가 더욱더 빈번해 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정부와의 마찰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것이다.②“CIA 비밀 수용소 협조국 중징계”(2) - 9.11 테러 이후 테러 용의자들은 유럽의 여러 국가에 존재하고 있는 CIA 비밀 수용소에 감금하고 고문을 가하는 등 비인권적인 행위를 일삼는 것에 대해 EU에서 이에 협조하는 국가에 대해 중징계를 내리겠다는 결정을 했다. 이는 테러방지라는 명분아래 자행된 인간안보를 침해한 미국에 행동에 대한 EU의 이유 있는 간섭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앞으로 이에 관련된 문제는 양 쪽 진영간의 첨예한 논쟁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11/30③“인종차별 그만”(3) - 지난달 말 프랑스 파리 교외에서 경찰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10대 청소년들이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소요사태가 실탄발사 사실이 공식 확인되는 등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또한 이슬람 이민자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퍼져나가면서 전국적인 사태로 번지고 있다. 겉으로는 경찰의 과잉 대응의 문제로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프랑스 사회내부에서의 이민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수 록 더 큰 사회문제가 될 것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11/4중 ‘1국 2체제’ 다시 시험대에(3) - 홍콩 25만 명 직선제 요구 시위 ‘민주화 열망’ 폭발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이러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본토로 번질 것을 염려하여 타협안으로 협상을 하고 있다. 이는 홍콩 반환 때부터 예상되었던 문제로 본토의 인권신장과는 다른 의미로 이미 민주주의에 익숙해 있던 홍콩의 시민들을 1국 2체제라는 불안전한 체제로 끌어안는 데 한계가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2/67)군사안보①미국 “팔루자서 백린탄 사용”(2)- 미국은 이미 이라크 전쟁에 대한 명분이 사실상 거짓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이라크 전쟁 중에 민간인에 대한 학살 의혹과 함께 백린탄 사용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백린탄은 화학무기로써 특히 민간인에게 사용한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라고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여론의 악화로 나타날 것이며,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전쟁명분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11/17②미국 잉글랜드 일병 유죄 평결(2) - 이라크인 포로를 학대하고 또한 이를 기념사진으로 남겨 큰 파문을 일으켰던 미군 병사에 대해 10년형을 선고 했다. 이는 기존의 수없이 자행되었던 ‘패전국’ 병사에 대한 인권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던 문제로 아무리 패전국의 병사라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9/28③열대의 낙원이 방사능 지옥으로(3) 과거 프랑스에 의한 핵실험은 30년 전에 중단되었으나 그로 인한 영향이 타히티 섬 주변에 계속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핵실험으로 인한 폴리네시아의 경제체계가 핵의 의존하는 기형적인 체제로 바뀌면서 농산물까지 수입하게 되었다. 또한 핵실험의 후유증으로 인해 매년 300명의 사람들이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프랑스 정부는 어떠한 공식입장도 밝히지 않았으며 보상이나 대책은 전무한 상태다. 이는 프랑스가 과거 냉전시대에 국가안보를 위해 실시했던 핵실험이 30년이 지난 오늘까지5
과학과 제국주의가 만났을 때...국사학과 2002630019 서승완1. 머리말한 학기 수업을 마무리 하면서 과연 근대의 과학이란 서구 유럽의 발전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단순히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서구 유럽의 발전이 이루어 진 것인지 아니면 서구 유럽의 발전과 과학의 발전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가져보았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과학의 발전과 서구 유럽의 발전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경우에는 어떤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지지하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보완해 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과학과 유럽의 발전의 연관성이 비약적으로 나타나는 시대는 바로 제국주의 시대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과학과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2. 근대 과학와 제국주의의 만남이전의 논의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중세의 과학과 근대의 과학의 가장 큰 차이는 과학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함께 자연을 파악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확신이다. 이는 단순한 과학의 양적인 측면의 발전이 아닌 질적인 측면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전 까지 과학은 단순한 과학을 관찰하고 반영하는 것에서 근대 과학에서는 이제 자연을 해석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하지만 어떤 학문이라 할지라도 그 학문의 성과와 객관적인 우수성을 입증하기 보편적인 기준이나 다른 학문과의 비교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근대 과학은 다른 학문과의 비교를 시도하게 되는데 이는 제국주의 팽창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과학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천동설을 기본으로 하는 우주관으로 인해 원거리 항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원거리 항해기술의 발달과 지동설의 보급으로 인한 원거리 항해에 대한 확신은 기존의 단순한 호기심에만 머물렀던 동방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되었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육로를 통한 동방으로 진출의 어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은 바다를 통한 동방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따라 원거리 항해를 통한 동방진출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의해 처음 시도된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까지 많은 서유럽 국가들이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콜럼버스에 의해 서인도 제도)가 발견되고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에 나서게 된다.이를 통해 상업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사람들은 이후 식민지 개척에 나섰던 사람들의 지식을 통해서 그들이 동경해 오던 동방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많은 사회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결국 영국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이루게 된다.그러나 필연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발달은 새로운 상품시장과 원료산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많은 서구 유럽 국가들의 자신들의 식민지 개척을 위해 더욱더 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욱더 많은 선박의 건조와 항해술의 발달을 통해 과학기술은 발달하였고, 무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 인해 무기기술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제국주의와의 관계의 가장 보편적인 한 가지 예로서 더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제국주의의 팽창은 결국 서구의 근대 과학의 팽창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한 자생적인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써 이러한 관계는 현대에 까지 유지, 지속, 강화되고 있다.3. 과학과 제국주의의 상호협력앞에서는 대략적으로 과학과 제국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는 과연 과학과 제국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이용하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1)제국주의 침략논리의 정당성의 도구로서의 과학제국주의 침략은 서구의 독점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한 수탈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평화적인 방법보다는 당연히 무력적인 수단을 통한 강압적인 식민지 진출과 지배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구 유럽 내부에서의 이러한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한 식민지 진출을 정당화와 함께 자신들이 다스리는 식민지인들에게도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할 논리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이다.)실제로는 생물학적인 이론으로 출발한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계의 현상이라면 인간세계에도 적응시킬 수 있다는 사회학자들의 의해서 사회진화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그중에서도 스펜서의 ‘적자생존’이론)은 제국주의 침략의 논리를 정당화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서구의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식민지 지배과정은 적자생존의 하나의 과정으로 강하고 우수한 서구 유럽의 백인들이 그렇지 못한 非유럽과 非백인을 다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 순응하지 않고 반항하는 식민지인들에 대해서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관철해야 한다는 논의가 널리 퍼지게 된다.또한 이와 함께 문명진화론이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게 되는데, 세계의 문명의 중심이면서 善의 상징은 서구유럽과 유럽인들이 미개의 수준이거나 심지어 야만의 수준의 머물러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 자신들의 문명을 전파해줄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여기에서 서구인들이 말하는 문명의 상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바로 기독교이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것으로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근대과학에 대한 깊은 신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물질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연을 단순히 관찰하고 반영하는 수준이 아닌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유럽인들의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의 힘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서구의 유럽인들의 다른 식민지 국가 특히 동양에 대한 문명화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논의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전근대적인 과학관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고 절대적인 진리인 과학의 힘이야 말로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구의 유럽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해 나갔으며, 이는 잘못된 동양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서 서구중심적인 동양觀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식민지와 그 피지배인들의 인식에도 자신들이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근대문명 특히 그 중에서도 근대과학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2)제국주의로 인한 과학의 변질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단순히 기존에 있던 과학의 이론들을 침략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이용하던 차원에서 이제는 과학이 제국주의의 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론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데 그것이 바로 생물학적 인종주의이다.인종주의는 원래 고대의 그리스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초기의 인종주의는 동양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 바탕하고 있었다.하지만 제국주의 이후의 인종주의는 단순한 무지와 두려움이 아닌 의도적인 차원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로써 절대적인 선이면서 우월한 백인과 그렇지 못한 非백인을 구분하는 담론이다.) 이를 통해 식민지 피지배인들의 열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골상학)이다.예를 들어 식민지인들은 유럽인들의 비해서 안면각과 두장폭시수가 커서 이것은 마치 인간이 아닌 하나의 원숭이와 다름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며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과 학자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는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합리적인 과학관‘에는 위배되는 것으로 순전히 인종주의측면에 입각한 편향된 논리라고 할 수 있다.간단히 정리하자면 몸을 읽는다는 것은 몸을 둘러싼 사회적 코드를 읽는 것으로 몸은 결국 보이는 외모를 통해 가치를 인식하는 표상이다. 그리고 이 표상은 다양한 권력 속에서 만들어지고, 인지되며, 해석된다. 따라서 타자의 몸에 대한 담론은 결구 그 몸을 통해 이 수반하는 가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따라서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유럽은 타자의 몸을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투영하고 싶은 가치를 몸에 연결시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19세기 생물학적 인종주의의 담론들이 구체적인 내용에서 많은 모순을 지닌다는 또 다른 예는 에 대한 논쟁이다. 이는 흑인의 외형적 표지로 알려져 왔던 내용인데 맨체스터 외과 의사였던 화이트는 하지만 실제로 흑인의 하악이 어떤 형태인가 하는 판단이 아니라, 하나같이 생겼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는 결국 흑인의 외형을 판단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이라는 열등한 가치를 부여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타자의 몸은 식민지인의 열등성을 나타내는 표지여야 했으며, 우선 은 그 자체가 관습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핵심적 공통분모가 된 것이다.이를 통해 과학은 기존의 가치중립적이고 합리적이었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모순 되는 주관적이면서 비합리적인 측면을 위해서 과학이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맺음말앞에서 알아보았듯이 과학과 제국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이용하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다. 과학은 제국주의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힘과 합리성을 보편화 할 수 있었으며 또한 문명화의 중요한 척도로써 이후에도 절대적 진리로써의 굳건한 지위를 구축하게 된다.제국주의는 비록 과학을 통해서 지배논리를 팽창시킬 수 있었지만 결국 과학기술의 비합리적인 발전과 서구 유럽 국가들의 대립으로 인해서 세계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사라지게 된다.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이 당시에 서구 유럽국가들이 파악했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자했던 것을 非유럽에 투영했던 오리엔탈리즘의 논리는 아직도 그 힘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이와 함께 서구의 근대과학의 논리도 아직 문명화와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많은 非유럽의 국가들의 뇌리에 보이지 않는 그늘로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비록 물리적인 힘에 의한 제국주의는 끝났다고 볼 수 있지만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경제 제국주의와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문화적인 과학제국주의는 그 생명력이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직 제국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윤치호와 근대적‘지식인’국사학과 2002630019 서승완Ⅰ. 머리말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 지식인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직 제대로 된 역사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실제로는 아직 그 당시의 사람들에 대한 지식에 대한 평가만큼 가치관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우리는 흔히 일제시기의 사람들은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을 정확히 구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친일과 반일 사이의 경계선 사이에서 어떤 때는 이쪽에 어떤 때는 저쪽에 가는 등 ‘경계인’으로서의 생활을 했었다.특히 친일을 하게 된 사람들 중에는 일제 식민지 초기부터 열렬한 친일 인사로서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도 많지만 많은 수는 격변하는 사회상과 국제상황 속에서 친일의 길로 변절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에 친일로 돌아서서 활동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라를 져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안에 복잡한 이론적, 현실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개화기와 일제식민지 시기를 통틀어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평가받았던 윤치호에 대해 알아본다는 것은 중요하다. 윤치호란 인물이 과연 어떤 한 시각으로 세상을 인식했고, 또 어떻게 세상을 변혁하려 했는지를 알아보고 그러한 인물이 어떻게 친일로 변절하게 되는지 그 과정과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다. 또한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지식인으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아는 것이 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Ⅱ. 윤치호 지식습득 과정윤치호를 이해하기 위해 윤치호의 지식습득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치호는 유길준과 함께 우리나라 초기의 ‘선구적 지식인’으로서 당시의 대표적 지식인의 중의 하나였다. 윤치호는 노론귀족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이미 한학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현실화하려 한다.또한 서구의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한 무기 및 물질적인 발달에 대해서도 기존의 조선의 양반들은 기술을 천시하는 ‘문치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고 비판하게 되며, 문명화 한다는 것은 바로 서구화한다는 단선적인 논리를 가지게 된다. 기본의 전통적인 조선의 가치는 모두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이러한 맥락에서 윤치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유교 중심의 가치관을 버리고 기독교 중심의 서구적 가치관으로 개종을 하게 되는데, 이는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는 고루하고, 정체된 것으로서 부정하고, 서구적인 것을 발전적이고 진보하는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서구문명에 대한 사대주의적 측면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윤치호가 믿고 있던 기독교라는 것도 단순한 종교로서가 아닌 서구의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윤치호는 당시의 기독교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구호아래 식민지 국가들에 침입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기독교 = 제국주의국가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윤치호는 인종주의적 측면에 입각해서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금과 같이 문명개화하게 된 되에는 인종적인 우월성이 있다고 생각을 가진다.) 이를 통해 윤치호는 기본적으로 이른바 ‘앵글로색슨족’ 예찬론을 피면서, 이들은 민족성에서부터 진취적이고 정복과 탐험심이 강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와 함께 아시아에서는 일본민족만이 이러한 서구의 백인종들과 비슷한 기질을 가짐으로써 지금과 같이 빠른 문명개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를 주장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체되고 타율적인 측면을 버리고 서구의 백인종과 같은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잠시나마 다른 우수한 민족 즉 일본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이미 윤치호가 생각하는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윤치호의 현실인식과 가치관의 변화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여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 3.1 운동과 윤치호3.1 운동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조선 민중들의 저항의식이과 독립의식이 표출된 가장 큰 항일운동 중의 하나로써 큰 의의를 지니며 이후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알고 있다하지만 3.1 운동기의 윤치호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독립운동 무용론’)을 주장해 많은 조선인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된다. 그 내용은 살펴보고자 한다.(1)조선의 독립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될 기회가 없을 것이다.(2)유럽의 열강이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그렇게 어리 석지 않다.(3)설령 독립이 주어진다 해도, 우리는 독립에 의해서 이득을 볼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1894년에 일본이 우리에게 독립을 주었다. 그런데 우린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나?(4)약소민족이 강성한 민족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자기보호를 위해 그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5)학생들의 이 어리석은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6)천도교 인사들 같은 음모꾼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이것은 윤치호가 3월 2일날 「마이니치 신문」의 방한승 기자와 했던 인터뷰의 내용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윤치호의 정세 인식과 가치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먼저 (1)과 (2)의 내용은 당시의 국내 독립운동세력이 믿고 있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윤치호는 날카로운 국제 정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이상재와 서재필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았던 윤치호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독립 문제를 공론화시켜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윤치호는 이러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과 같은 식민지 국가가 아닌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이해논리가 반영된 것으로서 조선에게는 그러한 제가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의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러한 일제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2)의 예에서는 일본이 평상시에는 조선과 일본인은 하나라는 논리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조선에 나타난 것은 평등한 천황의 은혜가 아닌 ‘천황의 악의’뿐이라며 민족적인 차별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윤치호가 가지고 있던 일본 통치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3.1운동이후 윤치호는 무단통치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게 된다.하지만 아직까지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통치 정책에 대한 ‘양비론’적인 성격을 띠면서 적극적인 친일에 대한 의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의 일제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대한 반작용과 조선인의 대한 부정에서 나타나는 열등민족으로서의 조선인관과 당시의 조선에 우호적이지 못했던 국제정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던 윤치호의 특성이 잘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직 윤치호는 문명개화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만주사변과 윤치호윤치호는 1930년대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현실인식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잘 나타나는데,(1)일본 정부는 자국의 식량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 쌀을 증식할 요량으로 조선인들에게 수리조합을 강요했다. 그러나 수리조합은 조선인 지주들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손실을 끼친 ‘수재조합’이라는 게 입증되었다. 이제 일본의 미곡시장에서 조선 쌀이 늘게 되자, 일본정부는 조선 쌀의 이입을 사실상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자국민들의 이해에 관련된 게 아닌 한, 조선인들의 이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냈다. 하지야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했던 소행과 독일 및 러시아가 폴란드에서 했던 소행에 비추어 본다면, 유독 일본만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본성이 본래 그런 거지, 일본인들이 나 영국인들이 특별히 악해서 이런 추행을 저리는 건 아니니까)(2)새벽 5시다. 시내?정치의 무대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이러한 무력 도발도 충분히 예상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함께 윤치호는 이러한 일본의 강화된 군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이로 인한 조선인들의 피해를 염려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일본의 전쟁 확대의 우려를 표하고, 일본이 만주에 평화와 안전을 회복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하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만주문제의 인식의 있어서의 모순된 측면이 나타나게 되는데 다음의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1)난 조선의 애국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만주정책이 성공하길 빈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게 되면, 그 광활한 땅의 도처에 살고 있는 수백만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이 안전해질 것이다. 2. 만주라는 큰 보고를 차치해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 일본인들은 조선에 있는 조선인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적잖이 관대해질 것이다. 3. 일본 치하의 만주는 조선인 고학력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2)미국과 영국은일본이 만주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어야 한다. 만주가 중국의 악정이나 러시아의 공산주의의 공포정치 하에 놓이는 것보다는 일본의 질서정연한 개발 하에 놓이는 게 서양의 ‘문호개방’ 정책에 좀 더 보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위의 예는 앞의 윤치호의 비판적인 시각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견해이다. 먼저 1)을 통해서 보면 기본적으로 윤치호가 생각하는 만주관이 엿보인다. 윤치호는 이미 만주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한다는 현실상황을 인식하고 이러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이 점령하는 것은 좋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는 이전의 만보산사건)에서 보이던 민족주의적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경제적인 이유로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경제적인 요인이 해소되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와 마찬지로 당시의 많은 조선 사람들이 생각하던 기회의 땅 ‘만주’라는 생각과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서 1등 국민인 일본인이 될 있다.
구비문학과 구비문학 답사에 대한 이해Ⅰ. 구비문학이란??1. 구비문학의 정의구비문학(口碑文學; oral literature)은 곧 '말로 된 문학'이다. 그것은 '글로 된 문학'인 기 록문학(記錄文學)과 상대되는 문학의 기본 영역이다. 구비문학 이외에 '민속문학'이라는 용 어도 많이 쓰이는데, 전자가 문학의 측면을 중시한 개념이라면, 후자는 민속의 측면을 중 시한 용어라 할 수 있다.)'구비(口碑)'는 '대대로 전해오는 말'이라는 뜻으로 '구전(口傳)'과 뜻이 통한다. 곧 '구비문 학'은 '구전문학'과 유사한 용어인데, 현재 전자가 학술용어로 정착돼 있다. 어의(語義)에 집착할 경우 말로 된 문학 가운데도 '대대로 전승돼 온 것'만이 구비문학이 되는 셈이지만, 일시적·현재적으로 창조·향유되는 것들까지도 한데 포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특정의 '말'이 구비문학이 될 수 있으려면 '문학'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곧 '미적 으로 형상화'되어 흥미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과연 '말로 된 문학'이 온전한 문학성을 갖출 수 있는가 하는 논란이 한때 없지 않았으나, 이는 이미 해소된 지 오래다. 구비문학이 가져다주는 재미와 감동은, 그 편폭이 기록문학보다 더 넓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다(기록문학이 대중적으로 보편화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2. 구비문학의 성격1)현장의 문학구비문학은 기록문학과 달리 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문학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고 호흡을 나누는 바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 자리는 노동의 현장일 수도 있고, 놀 이의 현장일 수도 있으며, 의식(儀式)의 현장일 수도 있다. 삶의 현장에는 어느 곳에나 구 비문학이 있어 생활의 일부를 이루었다.현장의 문학인 구비문학은 현재적이고 일회적이다. 구비문학에는 어떤 고정된 텍스트가 없다. 그것은 '가능태'로서 잠재해 있다가 구체적 현장에서 현재적으로, 일회적으로 실현 이 된다. 다시 말해, 구비문학 텍스트는 현장 속에서 그 성격이 규정된다. 누가 구연하입어 가능하게 되는 것으로 어떤 화자가 설화를 완전히 기억해서 전달할 수는 없으며, 핵심이되는 구조를 기억하고 여기에 화자 나름대로의 수식을 보태고 재창조를 거쳐서 전달하게된다. 이 때문에 보존과 전달 상태가 늘 가변적이다. 요컨대 구전성으로 인해서 설화는 기본적으로 세부적 측면에서의 가변성을 피할 수 없다.설화는 규칙적인 율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그냥 보통의 말로서 구연되는 것이다. 이 러한 산문성에서 설화는 율문으로 된 서사민요, 서사무가, 판소리 등 다른 서사장르들과 구별된다.설화의 구연기회에는 제한이 거의 없다. 여기서 구연이 특수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경우,이를테면 노동요, 무가, 가면극 등과 구별된다.설화는 화자와 청자의 직접적인 상호관계에서 구연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청자를 대면해서 청자의 반응을 의식하면서 구연한다.설화는 일반적으로 신화(神話; myth)와 전설(傳說; legend), 민담(民譚; folktale)으로 나 누어진다. 이 세 양식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바, 그 각각의 특징을 개관하면 다음 과 같다①신 화 : 신화는 '신성시되는 이야기'로 정의할 수 있다.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전적으 로 신봉하는(또는 신봉해야 하는) 이야기가 신화이다. 고조선 사람이면 누구나 단군신화를 믿어야 하고, 고구려 사람이라면 주몽신화를 믿어야 한다. 그 신화 를 거부할 때, 그는 집단에 속할 자격을 상실한다.신화의 기능은 개인과 집단의 두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화는 각 개인으 로 하여금 어떤 신성한 힘을 매개로 하여 자아의 한계를 초월하여 정신적 성취 감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신화는 특정 집단을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결집하면 서 집단의 정신력을 북돋우는 역할을 한다.②전 설 : 전설은 '속설(俗說)로서 전해지는 이야기'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믿기 힘든 기이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증거물과 결부되어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설이다.전설은 대개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된다. 좁게는 한 마을, 넓게는 비 감투, 금도끼 은도끼, 개와 고양 이의 구슬 찾기, 바리데기, 당금애기, 사마장자와 우마장자, 호랑이와 곶감, 두 더지 혼인, 호랑이와 토끼, 호랑이와 토끼와 수달, 두꺼비의 꾀, 토끼와 자라 ..희극적 민담은 웃고 즐기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는 소화(笑話)류의 이야기를 이른다. 현실적 가능성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희극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 여 사람을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상황을 뒤죽박죽으로 뒤틀거나 터무니없이 과 장하는 등의 방법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바보사위' 등의 수많은 바보 이야기, 건달형 인물들의 사기행각에 관한 이야기 등이 이에 속하며, 음담패설류의 이 야기들도 대개 여기 해당한다. 희극적 민담에는 짤막한 것이 많지만, 길고 진 진한 것도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바보 사위, 방귀쟁이 며느리, 떡보와 사신, 건망증 심한 사람, 새끼 서발, 거짓 말로 장가가기, 할머니의 호랑이 잡기, 부부의 떡 싸움, 장님 남편과 벙어리 아 내, 사돈과의 동침, 열두 바퀴째 돈다, 과부와 머슴, 주인딸에게 장가간 머슴, 내 병 다 나았다, 소박맞은 세 딸, 음흉한 소금장수, 스님 골린 상좌, 꾀쟁이 하인, 정승 골린 사람(꾀많은 평양감사), 봉이 김선달, 오성과 한음의 장난,이의 울음, 꼬부랑 할머니, 끝없는 이야기, 꽁지 따기 ...사실적 민담은 내용이 사실적(寫實的)으로 엮어지는 민담이다. 흥미 중심의 이야기로서의 민담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환상의 요소나 희극적 과장 같은 것 을 포함하지 않고 현실적 가능성의 테두리 내에서 내용이 엮어지는 이야기들이 다(이 중에는 실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둔 것도 많다). 사실적 민담은 그 폭이 넓고 이야기 종류가 많다. 수복(壽福)이나 애정(愛情), 출세(出世), 사회적 갈등 등 인간만사에 관계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은 특히 조선후기에 들어 크게 발흥한 것으로 보이는바, 야담집에 많은 자료가 수용돼 있다. 현전 구비설화에 있어서도 사실적 민담의 비중은 막대하다. 다음 과 같은 이설로 인정되지 않는다. 증거물이 인물인 경우와 유물이나 유적인 경우, 자연물인 경우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 우리는 이처럼 증거물이 있는 전설을 찾아 답사해보려 한다. 전설의 유형도 증거물에 따라서 인물전설, 유물전설, 자연물전설 등으로 분별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인물의 내력과 일생사를 말하고 역사 유물과 문화 유적들의 유래를 전하며 자연물에 얽힌 사실들을 구체적인 증거물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전설이다. 따라서 전설은 특히 역사와 긴밀하게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설은 곧 역사 이야기인 것이다.역사란 곧 사건사이자 인물사이며 문화사이기도 하다. 인물전설은 한결같이 인물사 자료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건에 관련된 인물의 삶과 사건을 다루는 것이므로 사실은 생활사이자 사건사에 관한 긴요한 정보를 알려준다. 유물전설은 문화사이면서 인물사이다. 인물과 관련되지 않은 문화적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이들 문화유산 관련 전설은 문화사 이해의 긴요한 구실을 한다. 훌륭한 인물과 탁월한 문화 유적들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역사이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삶이 있고 문화의 현장이 있다. 신(新) 역사학은 생활사와 문화사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들 이야기 자료들이 사료로서 아주 긴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우리는 설화 가운데서도 특히 역사성이 짙은 전설을 주로 다루며, 유물이나 유적, 자연물이 남아있는 전설을 찾아 답사할 것이다.2. 구비문학의 현재성과 답사우리의 구비문학은 현대에 들어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구비문학의 기반이었던 농촌공동체가 붕괴도면서 전통적 구비문학 양식이 전면적으로 약화 내지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현대의 구비문학은 구비문학 본연의 건강성과 주체성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제 구비문학은 ‘민중적’이라는 수사 대신 ‘대중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녀야 할 처지가 되었다.또 설화라고 하여 옛날에 관한 옛날의 이야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설화는 구비 전승되므로 이야기할 포에 대하여 지배층에 의하여 기록된 관변측 문헌사료는 그 공헌을 높이 받드는 쪽이라면, 민중은 이여송이 저지른 각종 횡포만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화의 민중성은 역사적 사건을 계급적 시각에서 대조적으로 포착하여 역사해석의 균형감각을 이루는 데 아주 긴요한 구실을 한다. 자연히 설화 사료는 역사가로 하여금 민중사관에 입각하여 역사해석을 하도록 만든다.셋째 속성은 전승성은 역사적 해석의 변모 양상을 포착하는 데 매우 긴요하다. 같은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설화가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변모되어 지금에 이르러 한 편의 설화로 자료화된다. 결국 전승적 실체인 설화는 사료의 역사이자 사료해석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때마다 다시 이야기되며 전승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같은 유형의 설화들을 그 구연 시기별로 선후관계를 설정하고 선후자료의 변화방향을 주목하면 설화를 전승하는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해석할 수 있다.넷째 속성인 설화의 공감성은 문헌사료에 비하여 객관적 사료로 인정받게 하는 특성을 말한다. 일정한 공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다름 사료들은 기록자 개인의 것에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설화는 어느 것이든 이미 이야기꾼 자신에 의하여 공감되고 수용된 것이다. 전승 과정에 역사적 검증을 거치고 긍정적으로 수용된 것이므로 지금까지 전승될 수 있는 것이다. 설화가 사료로서 공감성을 가지는 데에는 문학적 형상화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므로 문학적 허구성이 높고 구조적 작위가 이루어진 탓에 실증성이 떨어지며 역사적 사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다섯째 속성은 확산성은 지리적 분포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신화와 민담은 특히 확산성이 높고 전설은 상대적으로 지역성이 강하다. 그러나 전설도 지역적 범주를 벗어나서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전설을 특히 廣布傳說이라고 한다. 광포전설처럼 같은 유형의 설화가 널리 전파되는 경우 지역 상황에 따라 변이를 일으킨다. 때로는 지역의 역사적 사건이 설화의 변이를 .
이중환의 擇里志를 통해 본 조선후기의 朋黨政治1. 머리말〈朋黨政治〉이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다분히 부정적이다. 이는 붕당간의 정쟁에 의한 극한의 반목과 대립으로 비춰지는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던 붕당정치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일제시대에서부터 시작되어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인식이다. 또한 우리는 붕당정치가 직접적으로 행해졌던 조선 후기의 사람들이 붕당정치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붕당정치에 대한 인식이 정확한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고, 붕당정치란 정치제체가 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판단을 할 수도 없고 할 가치도 없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붕당정치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앎으로서 붕당정치가 가지고 있는 그 당대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는 과연 붕당정치를 어떠한 맥락에서의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 후기 붕당정치를 직접 경험하고 평가했던 이중환이란 사람이 쓴 『택리지』란 책의 인심조 편을 통해 조선 후기의 붕당정치에 대한 인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2. 이중환이 택리지를 쓰게 된 배경(1)개인적 배경이중환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익의 문인으로 남인계통의 사람이었다. 1713년(숙종 39)에 관직에 처음 나아가서, 소론계 주도하의 정국에 일부 남인계가 참여했던 경종간에 성균관 전적을 거쳐 정5품 병조정랑이라는 당하관의 직책을 맡아서 활동했었다. 그러나 을사처분) 때 묵호룡과의 친분으로 인해 파직 당하고 절도로 유배당한 후, 계속된 사헌부의 탄핵으로 인해 다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이중환을 다른 남인계 동료들이 노론 또는 소론과의 연결관계를 맺으며 다시 정계에 복귀했을 때에도 그의 금고상태는 풀리지 않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 저곳을 유랑하며 세상정하지 않고 小人黨으로 지목함으로써 상대방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위치를 부정하고 일당전제적 체제를 긍정한 의 형태가 반복되면서 정치가 운영되어 가던 시기였다. 특히 남인 세력은 숙종간의 경신환국과 갑술환국 그리고 장희빈 사사문제와 관련된 신사년과 병술년 옥사 등으로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숙종 말년부터 남인세력 일부는 노론 또는 소론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다시 정계진출을 시도하는 등 자체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는 당시 왕세자(경종) 보호에 주력하면서, 남인 붕당도 士類黨이므로 동등한 정치세력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으먀, 주로 남인과의 탕평을 표방하기도 했던 소론계와 가까운 입장을 가졌다.3. 택리지의 구성택리지는 크게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총론 네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중점은 팔도총론과 복거총론에 있다.사민총론은 소위 사대부의 신분이 농?공?상으로 달라지게 된 원인과 내력을 서술하였고, 팔도총론에서는 국토의 역사와 지리를 서술한 다음, 당시의 행정 구역인 팔도로 나우어서 그 지역의 산맥과 물을 말하고, 그 지역과 관계 있는 인물과 사건을 설명하여 인문 지리적인 성격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복거총론에서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을 조건을 들어서 설명하였다.4. 붕당의 정치적 구조(1) 이중환의 붕당론이중환은 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을 근본적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체제에서부터 찾고 자했다. 당하관 이하의 추천권을 가져서 삼사의 언론을 장악할 수 있는 吏曹郎官은 로서 선발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당상관 이상의 추천권과 정책 결정권을 가진 삼공육경을 로서 견제함으로써 “조정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공의를 중시여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서술하고 , 동?서분당과 남?북붕당의 분당의 원인은 이런 전랑의 선발 문제에 있다고 큰 비중을 두고 서술했다. 그는 동서분당과 남북붕당은 사대부들의 즉 에 의한 공론정치가 붕당이 생기게 한 원인이라 했다.또한 동?서분당은 명종 간에 있었던 김효원의 이조전랑 추천을 심의겸이 막은 데서 시작되었는데 특위해 남인을 주로 즉 언론을 주도하는 청요직 및 인사권에 참여할 수 있는 이조참판?참의에 등용하였으며, 효종은 김자점(공신계열)을 견제하기 위해서 서인계 산림처사인 송시열?송준길을 등용했다고 했다. 즉 숙종대 기해복제 문제로 송시열을 귀양보내기 전까지의 시기는 서인당과 남인당 사이에 쟁단이 없이 견제와 조정?보합을 이루면서 양 붕당 주도의 사림정치를 이루었다는 지적이었다.이후 남인과 서인간의 분쟁은 김석주가 송시열과 충돌이 생겨서 허적(남인)과 연합하여 송시열을 귀양보내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석주는 곧 남인과의 사이가 멀어져 허견의 역모를 정탐하여 당시 남인 지도세력을 다수 역모관련자로 몰아 죽였다.) 이후 정탐정치를 계속함으로써 결국 남인에 대한 처리 문제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고 그 때부터는 자신의 당의 공의가 아닌 상대방의 대한 인정이 없는 무고에 의한 분립과 상쟁만이 남게 되었다고 보았다.(2) 이중환이 중요하게 본 사림정치의 권력기반인 낭관권과 청요직이중환이 붕당론을 논함에 있어서 각 당파간의 분열을 조장하거나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이조전랑 자리에 대한 다툼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조전랑에 대한 설명은 따로 강조해 놓았다. 이중환의 택리지 인심조에 따르면조선시대의 관직제도에 있어서 관직을 임명하는 권한은 吏曹(이조)에 있는데 이조의 권한이 너무 큼을 염려하여 三司(삼사))의 관원을 추천할 때는 判書(판서)에게 맡기지 않고, 오로지 이조 낭관에게 맡겼다. 그럼으로 이조의 正郞(정랑)과 佐郞(좌랑)이 대간을 추천하는 권리를 갖게 되어, 삼공과 육경)이 벼슬은 비록 크고 높지만 銓郞(전랑))이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으면, 삼사의 여러 관원들을 시켜 논박하게 한다. 조정 풍속이 廉恥(염치)를 숭상하고 名望(명망)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에 한번이라도 탄핵을 당하면 그 직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전랑에게는 通淸權)(통청권)이 있어서 그 권한 또한 작지 않았다.이런 까닭에 삼사의 관원 중에서 반드시 명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였는데 이는 이른바 公論政治(공론정치)라는 명분 하에 삼사의 언론의 역할을 왜곡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삼사의 언론을 주도하는 정치적 구조에서 이조 전랑은 정국의 권력 구조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조 전랑의 자리를 두고 각 당파간의 싸움은 당연한 것이며 필연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3) 당폐론이중환은 당시 집권 관료를 배출하는 사류사회의 붕괴현상을 한마디로 의 붕괴라고 요약했다. 특히 신임옥사에서부터 무신변란에 이르는 시기에 노론?소론?남인 3당파의 상쟁이 몰고 온 폐혜를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 지적했다. ) 초기의 붕당간의 대결은 에 입각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러한 相爭을 부른 가장 중요한 발단은, 남인의 지도자였던 허적과 서인의 지도자였던 송시열이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사류세력의 공론보다는 외척 세력인 김석주?김만기와 결합하여 그들의 이해관계를 용인하면서 정국을 운영한 데 있다고 파악한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 결과 개인적인 원한관계를 당쟁에 투영시켜 정치적으로 갚으려고 한 점과 이러한 시도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다시 반대로 돌아서서 왕권강화를 빌미로 삼아 정탐 정치를 이용하여 공신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는 등 사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며, 또한 당쟁의 결과 사류세력보다 외척세력이 주도하는 특권적 정치집단이 형성되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탕평을 표방한다 해도 그 실제적인 폐단을 없애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는 정조 사후 실제로 외척세력에 의한 기형적 권력독점인 세도정치가 행해짐으로써 이중환이 우려한 일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 이중환은 영조대의 탕평정국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경신년(영조 16)에 당쟁의 원인이라 하여 300년간 지속되어 오던 이조전랑의 이 가지고 있던 후임자 自薦權(自代制)과 삼사의 관원추천을 전담하던 규칙을 폐지함으로써 “조정의 대권는 우리가 실학자로 근대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중환 자신도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고 다시 그 체제로 회귀하길 바라는 한 명의 사림정치가라는 것을 엿 볼 수 있다.5. 이중환이 본 지역에 따른 당색이중환은 서울은 사색이 모여 삶으로 풍속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한 지장을 말하면 서북 삼도는 물론이거니와, 동?서 오도에 사색이 나누어져 살고 있다고 보았다.경상도는 모두 李滉(이황)의 학문을 숭상하고, 유성룡 또한 그의 문인이었다. 남인이라는 명호도 유성룡 때문에 일어난 까닭에 온 도내의 사대부가 모두 남인이었다.하지만 이런 경상도를 제외하고는 사색이 섞여 살았는데, 김장생이 연산에 살면서 후진을 양성했는데, 이때 회덕 사람 송시열?송준길과 이산 사람 윤선거 형제가 되었다. 또한 윤선거의 아들 윤증 또한 송시열에게 배웠다.하지만 경신환국을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은 각각 노론?소론으로 나누어졌는데 이 때문에 회덕의 문인과 이산의 문인들을 서로 공격하여 물과 불과 같았다. 강원?경기도에는 강을 임한 정자는 남인의 옛집이 많고, 전라도에는 국조 중엽 이후로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드물어서, 인재를 능히 배양하지 못하였으므로 인물이 적었고, 사대부는 서울 친지에 따라 사색이 구별되었다. 까닭에 예전에는 남인과 북인이 많았으나 지금은 노론과 소론이 많다고 하였다. 이는 기대승?이항 이후의 학문의 맥이 끊어졌기 때문이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중환은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여 살기 좋지 않은 곳이라 하였다. 이는 사색간의 반목과 불신에 대한 이중환 자신의 견해를 드러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환 자신의 경험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중환은 사대부가 없는 곳을 가려서, 문을 닫고 교제를 끊고 홀로 착하게 살면, 비록 농?공?상이 되더라도 그 즐거움이 제일 크다고 하였다.6. 결론앞에서 보았듯이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생각이 반영되어있다. 이는 이중환 자신이 정권에서 소외된 양반이었으며, 억울한 누명으로 인하여 파직되고 유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