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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방송학] 현대사회미디어로서의 신문과방송
    현대 사회의 미디어로서의 신문과 방송- 각 매체의 특성적 차이점신문과 방송은 현대 사회에서 생활과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은 매체이다. 이는 단순히 보편적인 사항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숫자로서 입증되어진다. 2003년 8월 20일부터 9월 30일까지 전국 15~69세 8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 매체 조사 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의 47%가 일간지를 한 개 이상 구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우리나라의 텔레비전 보급률은 98% 이상으로, 1주일에 평균 21.4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에 소비한다고 한다. 이러한 수치는 즉, 급변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의 전달 매체뿐 아닌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신문과 방송, 양 매체가 현대사회의 매체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 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런데 이 문제를 살피기 이전에 흥미로운 사항은 최근 이 두 매체가 각기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3년의 매체 조사 수치가 2년 전에 비해 2%가량 하락했다는 것이 그를 뒷받침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비롯되었는가. 혹시 이는 방송미디어와 관련이 있으며 이에 더해 과연 방송미디어는 인쇄미디어를 공격하는 역할을 해내는 것인가. 이제인간사회와 미디어의 역사에 있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는 두 매체를 살펴보고, 두 매체의 특성을 나열함으로써 차이점을 알 수 있도록 하겠다.1. 인쇄미디어로서의 신문1) 인쇄 미디어의 특성신문은 대표적인 인쇄 미디어이다. 그러므로 인쇄 미디어의 보편적인 고유한 특성은 신문의 그것과도 일치함이다. 인쇄 매체의 특성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크게 분류된다.{ 이정춘,『미디어와 사회』,세계사,2000,p.118~119.첫째, 휴대가 용이하고 언제나 이용이 가능하다. 인쇄매체는 방송매체와는 달리 별도의 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수용자가 이용할 수 있다.둘째, 메시지의 심층성, 선택성, 재독성이 강한 매체이다. 즉, 인쇄매체는 심층적인 내용을 전달하기에 적합한 매체로서, 인쇄매체의 수용자는 필요한 내용만을 골라서 볼 수 있고 경우에 따라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이용할 수 있다. 특히 방송매체의 이용 후 인쇄매체를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셋째, 인쇄매체는 무한한 종류가 존재할 수 있고 수용자에게 거의 무한한 매체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기술적으로 무한한 양을 생산해낼 수 있는 인쇄매체의 특성을 이용한 것으로, 하나의 현상을 놓고도 얼마든지 다양한 입장을 표현함이 가능하게 한다.넷째, 인쇄매체는 기록의 영속성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 특히 신문은 그날의 역사라고 할 만 큼 인간과 사회의 무한한 변화 중에서 중요한 것을 수집하고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영구히 보존해낸다.2) 신문의 개념과 특성신문은 특정 또는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시사에 관한 뉴스를 비롯한 정보·지식·오락·광고등을 전달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또한 통상적으로 일간 또는 주간으로 뉴스 보도를 주로 하여 발행되는 일반지 전반을 지칭하며 매스커뮤니케이션 인쇄 미디어의 대표적인 매체이다.이러한 신문의 특성으로는 다음의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이정춘,앞의 책,p.122.1 예독 가능성(previewability), 2 재독 가능성(reviewability), 3 기사 선택의 자유성, 4 열독시간의 자유성 등이 그것으로 예독 가능성이란 신문의 내용을 미리 훑어 그 내용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정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기사를 선별해 낼 수 있다. 재독 가능성은 신문의 내용을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읽을 수 있는 매체의 속성을 말한다. 어떠한 기기적 보조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다는 점이 신문의 큰 장점 중 하나이다. 기사 선택의 자유성이란 독자가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기사를 골라 읽음을 의미하고 열독시간의 자유성이란 신문을 읽는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일정시간에만 정보의 수용이 가능했던 방송매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신문의 특성인 것이다.3) 신문의 변화 - 새로운 시대의 신문새로운 미디어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전통적인 신문의 모습도 새로이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뉴 미디어 시대의 온라인 매체들의 폭발적 증가는 앞서 언급한 통계 조사의 결과가 말해주듯 신문의 위치가 하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이제 신문산업은 인쇄신문의 발행에서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온라인 저널리즘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물론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최초로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신문에 의해 인쇄신문이 위기를 맞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급속적인 학산에도 불구하고 신문이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전파매체가 신문의 기능을 보완할 뿐,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세 매체의 특성을 모두 대체해낸다. 게다가 신문이나 방송이 갖고 있지 못하는 검색 기능과 쌍방향 기능까지 갖추었다.그렇다면 인쇄신문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약 300여년동안 인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제 몫을 해온 인쇄신문이 쉽게 막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인터넷의 도전에도 불구, 인쇄신문이 여전히 강세를 보인다. 아직까지는 대다수의 이용자들이 인터넷 신문을 기존 인쇄신문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미디어에서 입수한 정보를 보충·보완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2. 방송 미디어방송이라 함은 우리가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전파매체 일반을 지칭한다. 현행 방송법에는 방송을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편성 또는 제장하고 이를 공중에게 전기통신 설비에 의하여 송신하는 것 이라고 광범위하게 규정하고 지상파 방송, 종합유선방송, 위성방송을 하부개념으로 두고 있다. 여기에서는 방송에 대한 세부적 나뉨의 이해 보다 전반적인 특성을 살펴 비교할 수 있도록 하겠다.1) 방송미디어의 특성현대 사회는 정보의 시대이다. 정보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며 인간의 삶을 돕는다. 사회를 발전시키고 구축해나가는 근원이 된다. 이러한 정보사회에서 앞서 언급한 인쇄미디어와 함께 정보전달의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방송미디어이다. 방송미디어의 특성은 크게 다음의 세 측면에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김우룡,『현대방송학』,나남출판,2003,p.57첫째, 방송은 전파매체이므로 전송면의 특성이 나타난다. 즉, 즉시성과 광역성이 여기에 포함된다. 즉시성은 방송의 동시각성이라고도 한다. 이는 송·수신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쇄미디어가 일정한 주기에 걸쳐 발행되는 데 비해 방송은 종일방송 체제 이므로 매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시청자에게 신속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둘째, 광역성을 동시에 동일한 내용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단위당 전송경비를 감소시키는 효율적 측면과도 이야기되어 방송의 우수한 특성 중 하나로 뽑힌다. 또한 분포도가 넓은 시청자들이 동일한 정보의 혜택을 얻을 수 있으므로 방송의 동시성, 개방성 대중성, 경제성, 동소성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동시성은 타 미디어들과 비교했을 때 찾을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이다.셋째, 제작·편성면에 있어서의 방송의 특성이다. 방송은 연속성에 의해 끊임없이 정보를 추구한다. 이는 전송면의 특성과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전송지역과 내용을 필요에 따라 신축성 있게 조절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또한 방송의 특성을 신문과 비교하여 물리적, 생리적·심리적, 사회 문화적 특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첫째, 물리적 특성으로 배포하는 내용의 전달에 있어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동시성과 동소성, 신문과 비교할 때 기록성이 없다는 배타성과 송수신에 특별한 기계가 필요 없는 기계성을 들 수 있다.둘째, 생리적·심리적 특성으로 화면이나 녹음물을 사용하여 현실감을 더욱 높일 수 있는 현실성과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의 친근성이 여기에 포함된다.셋째, 사회 문화적 특성으로 수용자의 범위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대중성과 문화나 유행 등을 보급하거나 선도할 수 있다는 문화성이 그것이다.2) 방송의 변화 - 방송이 신문을 공격하는가방송 역시 변화하고 있다. 기술 미디어의 급진적인 발달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방송을 이끌고 있다. 다양한 유료방송 채널들과 케이블 텔레비전, DBS를 비롯하여 HDTV등 새로운 방송 미디어들이 방송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즉 단순한 전파의 송·수신이 이루어지던 시대를 벗어나 영상 커뮤니케이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그 중 눈에 띄는 변화가 미디어의 융합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전달의 방송에서 시청자가 참여하는 대화형 방송으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이러한 변화 과정을 미디어의 변화 과정과 결부시켜 본다면, 정보의 기록, 저장, 전달을 가능하게 했던 활자미디어 시기인 제 1기, 거리와 시간이 개념을 초월하여 정보전달을 가능하게 했던 제 2기의 전파미디어 시기, 음성 위주의 정보 전달에서 화상으로 정보전달을 가능하게 했던 제 3기의 비디오 미디어 시기를 지나 기술혁신이 이루어져 새로운 정보교환 혹은 통신수단으로서 대중매체의 지배적 존재가 되는, 또는 지금까지 존재하던 기존 매체가 다른 기존 매체나 그 기존 매체의 기술적 특성의 일부를 새로운 기술과 결합시켜 개별 미디어 상호간의 경계 영역에 등장하여 보다 편리하고 진보된 새 기능과 실용성을 갖게 되는 제 4기의 뉴미디어 시기임을 알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서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새로운 기술과 결합되어 개별 미디어 상호간의 지배적 미디어가 될 수 있는 것이 방송 미디어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인쇄미디어의 의존 추세가 낮아짐과 달리 방송미디어의 수용량은 크게 줄거나 변화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온라인 매체의 이용도가 높아지나 이는 아직은 방송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 방송을 보조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인문/어학| 2003.12.16| 8페이지| 1,000원| 조회(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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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카르트의 코기토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해하기Ⅰ. 서론Ⅱ. 본론1. 데카르트와 스피노자2. 코기토로 읽은 영화Ⅲ. 결론Ⅰ. 서 론우리가 보고, 존재하는 세상과 세상 속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의심해본 적 있는가. 이를 ‘존재하는’이 아닌 ‘존재하고 있는’ 세상과 우리라고 사유했던 철학자가 있다. 데카르트는, 이미 결정지어진 채 인식하는 대상이 아닌,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 절대적으로 보증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명제를 만들었다.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모든 것을 의심해도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는데 도달한다. 즉, 모든 것을 의심한다 할지라도 ‘의심하고 있는 나’ 그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심은 사유 활동이다. 데카르트는 사유활동을 존재의 보편적 진리로 이해하기 보다는 -사유활동을 하고 있는- 나의 본질로 이해한다. 이 때의 나는 생각의 나이며, 코기토(Cogito)의 주체로서의 나이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사상은 신이라는 절대자의 존재로 인한 ‘나’의 존재를 의심함이 없던 근대에 신에서 벗어난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것이었다.그런데 이러한 방법을 통한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 나를 찾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끊임없는 회의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어떠한 의혹 혹은 혼란이 제기될 수는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 참된 관념, 지성이라는 것을 통해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했던 스피노자와 비교하여 이해해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은 코기토에 대한이해의 과정으로, 한 영화를 읽어 봄으로서 코기토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데카르트의 회의는 결국 궁극적으로 자신의 현존만이 확실하다는 인식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된다. 이러한 회의는 방법적이고 임시적이다. 코기토는 어떠한 형태인가. 질적인 사유로 볼 수 있는가. 그보다는 일종의 정신주의적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은 논리적 연결로서의 전제와 결론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고로부터 연유한 존재의 확실성을 의미한다. 안쏘니 케니, 『데카르트의 철학』, 서광사, 1991그러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인식하는 사고와 행위의 관련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나의 사유를 방해하는 악마의 가설을 들어 나는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칭하였다. 이는 생각을 하는 것이 곧 인간일 수 없음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생물에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생각하므로 물건은 아닌 것, 또한 생각이란 나의 속성, 그러하되 나로부터 절대로 제거할 수 d없는 본질적 속성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나로부터 생각을 제거하는 순간에 나의 존재 역시 제거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김상봉,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한길사, 1998그러므로 생각하는 나 자신을 만드는 완전성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 아니, 단순히 생사 문제에 관한 본능이 아닌 어떠한 것에 대한 사유가 가능한 것은 곧 인간이지 않는가. 이에 대해 한 가지를 기억해냄으로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신에 관한 가능성이다. 데카르트가 신에서 떼어 낸 주체로서의 나를 증명한다고 하나 결국 이는 ‘나’를 주체로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신에 대한 부정은 아니라는 면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다시 말해, 신의 현존에 관한 체계는 분명히 따로 성립함으로서 ‘나’의 현존과 신의 현존을 다루는 것이 데카르트 사상의 두 체계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회의하고 있다는 나 자신을 깨달으면서 나 자신은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임을 의식한다. 그러한 결과, 나를 현존하게 하는 완전하고 독립적인 존재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이 신이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코기토를 발견하고, 다시 그로 인해 신의 존재를 이야기 하였다면, 스피노자는 이와 다른 방식에서 결론에 도달한다.끊임없는 의심이 코기토라는 참 진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스피노자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스피노자는 최초의 진리 자체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최상의 지각양식으로서 곧 참된 관념이다. 이를 위해 곧 지성을 개선하고 지성으로 사물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성의 인식은 마침내 참된 관념을 가능하게 한다. 그 관념은 대상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형상적 본질에서 보았을 때 다른 객관적 본질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 자체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최초의 관념으로부터 다른 모든 관념이 도출된다면 허구된 관념과, 명석하지 않은 모든 관념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진리임이 확실하기 위해서는 참된 관념을 갖는 것이 최우선이요, 이는 필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회의를 통하여 최초의 진리 자체에 대해, 그리고 최초의 진리의 규범에 따라 도출된 모든 것에 여전히 의심을 품는다면, 그러한 과정은 확실히 본심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웹 강의실의 『스피노자의 지성개성론』즉, 회의를 거듭하는 자들조차도 무엇을 긍정하거나 의심하면서 자기가 긍정하거나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 사상의 전개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비춰질 것이다. 회의라는 것 자체를 부정적인 행위로 봄으로써, 회의를 통해서는 진리의 추구가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피노자 역시 신에게 귀의한다. 아니, 나의 현존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데카르트와는 달리 모든 허위와 의혹을 사라지게 할 하나의 감각으로의 관념으로 결국 신이 등장한다.데카르트가 나의 사유를 방해하는 어떠한 기만자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같이 스피노자도 참된 관념에 의혹을 하게 되는 어떠한 기만자에 대해 언급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신에 대해 아무런 명확한 관념을 지니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데카르트의 사유, 코기토는 양적이고 셀 수 있는 개념의 것에서 비롯된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라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내가 삼각형의 특성을 인식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이와 같이 정당화된 참된 믿음으로서의 인식은 인식적 진리가 가능하게 한다. 또한, 스피노자 역시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이 180°라는 것은 최초의 관념으로부터 다른 명석한 관념들이 도출됨에 따라 그것 역시 명료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을 신에 대해서 가짐으로써 모든 의혹은 사라질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데카르트가 어떠한 기만자에 의해 의심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수학적 예를 든 것과 같이 스피노자는 기만자가 우리를 기만하는지 않는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이와 같은 인식은 가능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그렇기에 신에 대해서도 이러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혹이란 확실한 관념의 부재시에 생겨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의존자로서 바라보는 신과 절대적 관념으로서의 신은 미묘한 차이를 낳는다. 어찌보면 비슷한 개념이지 않을까 하는 그 둘은 사유 방법부터 과정, 대상을 인식하기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 결론이 똑같이 ‘신’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주체의 완전성을 위해 신을 필요로 하였고, 스피노자는 모든 것의 완전성이 곧 신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코기토 개념이 근대 최초의 주체적 사상으로 평가 될 수 있는 것이다.2. 코기토로 읽은 영화 - 매트릭스매트릭스는 동서양의 철학적 해석을 담은 영화로 알려져 있다. 동일한 영화를 보고 각계각층의 해석이 담기는 것, 그것도 철학적 의미에 대한 것이라면 코기토 개념을 통한 임의적인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코기토가 근대 최초로 신과는 별개로서의 ‘나’의 주체성을 증명해 낸 것이라면, 이는 곧 현대에서 말하는 자아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에 초점을 맞추어 매트릭스를 읽어보도록 하겠다.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공 앤더슨이 일상을 보내는 매트릭스의 세계는 데카르트에 따르면 철저히 감각에 의존한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모피어스 매트릭스 밖의 집단에 속하는 모든이를 ‘모피어스’로 통칭한다.는 회의를 거듭한다. ‘내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스푼인가.’ ‘이것으로 나는 무엇인가를 먹고 있는 것인가.’ 그 전까지의 세계에서 그는 그것이 스푼인 줄 알았고, 무언가 섭취하는 중이라고 ‘믿어’왔었다. 매트릭스 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사유를 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앤더슨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는 훗날 찾게 될 정체성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나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사회에 존재하는 해커였다. 매트릭스 밖의 생활을 하기 이전까지 그에게 생활이란 낮의 생활을 의미하였고 밤의 생활은 마치 꿈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실재인가 하는 물음의 답에 그의 생활은 뒤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는 성찰 제 1장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있으나, 그것이 꿈을 꾸고 있는 나인지, 꿈을 꾸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나인지, 꿈이라 믿은 것이 실재인지 회의하였다.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에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의심을 시작하기로 한다. 앤더슨이 보아온 세상은 감각의 토대 위에 형상된 믿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그러한 감각이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이루어 낸 앤더슨의 발견은 ‘여태까지 믿어왔던 세상은 실재 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단, 그런 사유를 해 낸 자신만은 존재한다. 영화는 더 나아가 친절하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 이들이 모여있는, 실재로 존재하는 세상을 제공한다. 그럼으로써 현실과 꿈의 경계를 모호하게 바꾸어버린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매트릭스 밖에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할 때 그는 눈을 감고 깊은 수면상태로 빠진다. 영화는 현실과 꿈이라는 소재를 통해, 실재를 파악하라고 재촉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인문/어학| 2003.11.12| 5페이지| 1,500원| 조회(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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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의 현실개혁사상
    플라톤의 현실 개혁 사상으로 우리사회는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가플라톤은 에서 철학자는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라고 말한다. 즉, 철학자는 사회현실과는 무관한 사상적 기반과 개념적 사유만을 연구하는 자가 아닌, 현실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 더 나은 현실을 위한 개혁을 이룸으로서 이상적인 사회건설을 목표로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플라톤은 현실 개혁의 근원, 모든 사유의 근원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였다. 플라톤은 인간이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진리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근거지움-hypothesis 사상으로 답을 대신하였다.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기에는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근거지움은 차차 형이상학적인 어떠한 실체가 원리 속에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사상의 기초가 된다. 그렇다면, 그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원형이다. 우리가 지금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은 실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속해있는 이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실체-real 이지, 그것을 실재하도록 한 존재, 원인, 원리가 진정한 실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체는 진정으로 있는 것이고 영원 불변하다. 그 실체를 플라톤은 이데아-idea 라고 정의한다.그런데 이러한 이데아에 관해 생각해볼 때 우리는 막연히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연연하게 된다. 이데아가 초감성적 존재로서, 순수이성에 의에 포착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데아 자체를 평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이데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상이다. 이데아와 대상의 관계는 그 대상과 대상을 바라보는 영상과의 관계와도 같을 것이다. 대상 즉, 사물은 이데아의 모방이며 동시에 이데아는 사물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종이로 만들어진 책의 경우, 책의 이데아는 나무의 이데아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성립될 수도 있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나무의 이데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책의 이데아는 나무의 이데아와 관련지어진다. 즉, 우리가 현대에서 어떠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할 때,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존재의 요소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이데아가 현실 속으로 비추어 내린 것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이데아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점차 다른 형태로 규정지어졌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개별적 사물의 공통된 모습으로서의 이데아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규정지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논해질 수 있는 것이 보편자 개념이다. 예를 들어, 포도주와 맥주, 소주는 모두 개별자로서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각 개별자들이 모두 내포하고 있는 공통적인 개념이 보편자 개념이다. 보편자 개념이 성립하면서 사물을 대할 때 넓은 안목으로 파악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사유능력이 향상될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중기 작품 이후부터 보편자 개념을 앞세운 앎이 완전한 앎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완벽한 앎은 영원 불변한 실체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원 불변이란 사물이 갖고 있는 개별자의 확정되지 않는 특수성을 정의한다. 이것은 보편자 개념으로 하나하나 풀이될 수 없는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데아 론에서는 보편자 개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데아의 그림자 격인 개별자의 특수성도 함께 파악해야 한다고 피력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플라톤의 보편자 개념의 분리는 형이상학을 제 1철학이라 명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입장을 피력하며 플라톤에 비판을 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원인 구실을 하려면 사물들의 본질로서 어디까지나 사물들 속에 내재 하고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플라톤은 이를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즉, 겉모습 형태에 해당하는 forma에 질료에 해당하는 materia(범주론적 의의)가 더해져야 비로소 하나의 개별자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것은 어디까지나 플라톤의 '사유 대상-특수성의 파악과 지각 대상-보편자 개념이 결합하여야 하나의 사물이 생성된다' 는 이데아 론이 바탕으로 깔려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현실 개혁에의 정신적 근원 혹은 의지로 이야기한 몇 가지를 짚어 현대 사회와의 연계성을 찾아보도록 하겠다.플라톤은 그의 저서 에서 현실개혁의 정신적 근원으로서 에로스를 주제로 택하였다. 그러한 에로스를 행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그는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고 하였다. 데미우르고스는 장인과 공인의 의미로 나뉘는데, 그 나뉘어짐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자세는 무엇인지, 대상에 대한 어떤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자각할 수 있다. 먼저 장인과 공인 중 우리가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은 공인의 개념이다. 데미우르고스는 demos-인민을 ourgos-위하여 일하는 것을 뜻한다. 즉, 정치가나 황제칙사, 음유시인등의 공직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데미우르고스는 당시 제일 높은 계층에 속한다 할 수 있는 집정관과 노동자의 계층인 공인의 계층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판단은, 동양철학의 '사농공상'과 견주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떠한 문화권을 불사하고 자연과 관련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을 하던 자들은, 지금과 같은 사회에서 그로 인한 경제적 이득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닌, 자연의 질서에 동참하는 그 자체로서 신성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장인을 지칭할 때 바나우소스-banausos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바나우소스가 천하게 구분되는 데는 가장 큰 한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들은 자기이익만을 취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은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를 지적한다. 인간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 역할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어서는 가치가 없다. 사적이익을 위하지 않고 공적이익을 위해 목숨을 던질 만큼, 자신의 존재보다 모두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즉 고대 사회의 시민 각자가 위와 같은 삶을 살며, 전체적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가 그토록 열망하던 이상 사회를 구현하는 방법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데미우르고스가 가진 참 뜻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임을 짐작해 미루어 볼 수 있음이다.그런데 이러한 플라톤의 지적은 너무나도 이상적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자익추구 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이기는 하나, 그것은 자익의 추구로 인해 공익에 해가 되지 않을 경우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플라톤의 논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는 너무나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행복 추구권이라는 것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법률적으로, 또 생활 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각 개인의 행복이다. 플라톤의 논의에 따라 곧이 곧대로 공익을 위해 사익을 포기하는 것이 개인에게 아무런 행복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을 옳은 일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상황을 인식해야 하는가에 따르는 문제일 것이다. 만약,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행동이 전체 사회의 이익에 해를 미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대사회에서도 법률적으로 금지된 사항일 것이다. 현대사회에 무조건적으로 플라톤의 이상논리를 끼워 맞추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고대 철학자의 사상으로서 플라톤의 논리는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그 기본 사상은 무조건 강요가 아닌,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셈이다. 현대 사회의 밑받침으로 어떻게 접해야 하는 가- 그것이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일 것이다.한편, 플라톤은 그러한 인간상을 통해 에로스의 철학적 의미와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저술들 중 에서 이데아로서의 본질적 근원을 에로스-사랑에서 찾았다. 흔히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찬미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인 찬미가 아닌, 사랑이 삶에게 가져다주는 진리를 찾고, 구체적인 실천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살폈다. 사랑이란 개념은 어찌 보면 그 보다 더 추상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데 비해, 정의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이가 말하는 사랑은 이성간의 에로스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이 비례하는 것이라 하고 어떤 이는 아가페적 사랑을 이야기하며, 또 다른 이는 동정심과 연민을 이야기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관습적인 것이다. 어떠한 면에서의 사랑이든 그것은 결코 계산적이거나 합리성을 띄지 않는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플라톤이 사랑의 철학적 의미에 관심을 비추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면에 주목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사랑의 철학적 개념에 관해 잠시 생각해보겠다.
    인문/어학| 2003.11.12| 4페이지| 1,000원| 조회(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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