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에서의 민족주의199920050 박성연들어가는 글지금은 공교롭게도 전세계적으로 민족주의의 열풍이 가장 강한 월드컵 기간이다. 유럽의 경우 유럽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탈민족주의적 경향을 갖는 것 같으면서도 자국팀을 응원하는 관중들을 보면 민족주의의 힘이 새삼스럽게 다가오곤 한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만으로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다소 도발적인 이러한 책제목이 또한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아마도 일종의 정신적인 충격이랄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민족주의는 반역이라고 못박을 수 없다. 다만 이 책의 필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민족주의’는 하나의 신화라는 것이다. 즉 우리의 민족주의는 ‘실제로 어떠했는가’하는 경험적 인식을 뛰어 넘어서 ‘마땅히 그래야 했다’는 규범적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남과 북이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체제유지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민족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미흡하지만 그러한 검토와 민족주의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을 해보고자 한다.1.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검토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는 민족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방향을 달리한다. 서양학계에서 민족에 대한 논의는 크게 두갈래로 나뉜다. 민족의 영속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원초론(객관주의적)’과 민족을 근대화의 부산물로 간주하는 ‘도구론(주관주의적)’이 그것이다. 전자는 인종적 공동체의 영속성에 주목하면서 민족주의가 종족, 조상, 언어, 영토라는 원초적 유대에 기초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맞서서 후자는 민족주의란 결코 영원한 실체가 아니며 근대화와 도시화라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현한 이데올로기라고 간주하며 그 역사성을 간주한다.주관주의적 민족 이론은 ‘국가민족’이라는 민족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민족 공동체에 기꺼이 자신을 귀속시키고자 하는 민족 성원의 주관적 의지가 민족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이론에 따르면 민족 공동체에 대한 인민들의 극적인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대혁명 시기 민족주의는 처음에는 절대왕정을 민족으로 대체하고 이를 민족으로 이름으로 정당화 시켰다. 여기서 인민 모두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프랑스 모든 지역을 진보적으로 통합 시켰고), 모든 계급의 이해조차 수렴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반동기에 들어서면 민주주의와 평등에 원칙은 재산과 자유의 원칙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부르주아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이제 국가와 관료제가 민족의 이름으로 인민과 민주주의를 몰아냈다. 인민과 민족의 자유로운 일치는 질서와 원칙의 명령으로 강요된 통합으로 질식했다. 민족 간의 인류애적 형제애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사명으로 둔갑했다.2. 남북한의 민족주의의 모습(1)북한의 민족주의북한의 민족주의 단계는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단계는 해방직후 국가건설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는 시기와 한국전쟁이후 민족주의가 퇴조하던 시기 마지막으로 80년대 중반이후 주체사상의 형성과 함께 ‘조선민족 제일 주의’로 나타나는 최근의 단계이다.첫단계에서 민족주의는 계급혁명과 국제주의적 연대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기본노선에 배치되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북한정권이 반식민지 민족운동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의 용기에 담으려 했던 것이다.두번째 단계에서는 민족주의가 퇴조했는데 특히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면서 과거 식민지시대의 다양한 민족운동이 분파와 전통을 부르주아민족운동으로 매도하고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을 합리화하는 사상으로 비판하였다. 이시기 민족주의에 대한 북한사회의 사전적 정의는 “민족주의는 계급적 이익을 전민족 이익으로 가장하여 내세우는 자본가 계급의 사상이다.”라고 정의하여 이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마지막 단계는 주체사상의 특성 가운데 민족주의적 특성이 나타나게된다. 김정일은 “주체사상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계층은 민족의 부분인 것만큼 어떤 계급과 계층도 민족공동의 이익을 떠나서는 자기의 이익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민족이 있고서야 계급이 있을 수 있습니다.”고 하여 민족이 계급 계층에 우선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계급에 앞선 민족우선의 원칙 위에서 남한과 해외동포들을 포함한 민족 대단결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표명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이 시기가 되면 “나는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다”)라고 규정한데서 전 단계와의 차이를 알 수 있다.김일성은 단일민족국가인 우리나라에 있어서 진정한 민족주의는 곧 애국주의임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와 참다운 민족주의로 구분하여 자신을 참다운 민족주의자라고 공언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리고 이를 통해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공존의 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의 이러한 경향은 남북한이 동일민족이라는 민족정서에 호소하는 경향을 보이며 이는 최근의 단군릉 발굴사업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역사와 문화 부분에서 민족적 색채를 부각시키는 일련의 노력들을 전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2) 남한의 민족주의1)국가주도 민족주의제 1공화국시대에 민족은 반공의 범주 내에서만 인정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19 혁명으로 인하여 통일 지향적인 민족이 부활되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군부정권은 전통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효율성을 강조하였다. 즉 근대화와 경제개발은 정통성이 가치를 상쇄시켜주는 대안적 가치로 부각되면서 ‘선건설 후통일'론이 제창되었다. 그에 따라서 경제발전이 지상명제로 설정되자 국민대중은 다시 집단 의식적 존재인 ’민족‘으로 불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을 산업화의 동력으로 전제하고, 산업화 주도세력은 스스로 경제이념을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 확신하면서 ’위로부터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나섰다. ’민족중흥‘, ’조국근대화‘ 등의 구호가므로 다른 신생국과는 성격이 다른 면이 반영된 측면도 있다.그러나 고도성장에 따른 산업구조의 심화와 관료적 권위주의체제의 강화는 오히려 그동안 권력분점에서 배제되었던 세력들의 거센 반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동원이 조직화되는 것을 원천 봉쇄하는 ‘유신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는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단연히 통일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민족주의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주도의 민족주의를 후발국가들이 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독점적 대기업 중심의 개발전략을 선택하여 국가 및 관료기구의 통제하에서 산업화를 추진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라고 변호하는 입장도 있다. 즉 국가가 기술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가격을 통제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시장형성 또는 시장 지배적인 개발국가로 역할을 자임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결과만을 두고 끼어 맞추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세계적으로 보면 우리와 같이 군부 독재를 경험한 나라가 많지만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는 겨우 한국과 대만정도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주의와 관련하여 볼 때,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국가’ 속에 ‘민족’을 매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족은 발전논리에 입각한 국가목표의 대상이자 객체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즉 ‘민족’이라는 이름 앞에 ‘민중’이 억압되었던 것이다.2)민중민족주의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남한사회만을 독자적인 단위로 놓고 자본주의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분단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 ‘반편’의 시각에 부과하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의 즉, ‘민족전체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이는 곧 ‘반국적’ 시각이 아닌 ‘일국 전체적’ 시각의 당위성을 환기시키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남한사회는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미해방된 지역이고, 북한은 그 지배로부터 벗어난 ‘민주기지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주의 담론을 통해 구성한 선택적 근대화의 논리를 보여준다. 남한은 이승만을 통해 반공주의를, 박정희를 통해 경제적 근대를 수용했다. 이것은 서구적 근대를 권위주의를 재생산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동양에 대한 선택적 수용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권위주의가 강화될 때마다 동양의 정신은 권위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재창조되었다. 북한 역시 이러한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북한 정권의 수립 이후 민족주의 근대사상인 사회주의 사상과 접목되어 권위주의를 재생산하였다.이러한 남북한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는 시민사회의 자율적 발전을 저지하였다. 이는 현재 남한 사회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국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이나 북한이 대외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유지하는 것에도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남북한 정권은 이러한 선택적 근대화 논리를 통해 사회의 저항세력을 억압함으로써 수동 위로부터의 시민사회의 재조직화에 지속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남북한 정권의 통일담론은 분단민족주의였다. 이것은 남북한 정권이 한번도 자신의 체제 이외의 방식으로 통일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과 남북한 정권이 지속적으로 타방을 흡수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북한 정권은 정권유지와 일방적 통일이라는 동일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남북한 양 정부가 민족주의를 앞세우고, 냉전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남북한 관계가 남북한을 둘러싼 외적 환경과 남북한의 힘의 역관계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때, 남북한 정권이 정권유지와 일방적 통일이라는 동일한 이해를 갖는 한, 통일은 어느 일방이 힘이 결정적으로 우세하고 그것이 주변 세력들이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분단체제 형성 이후, 한반도에 이런 기회는 오지 않았기 때문에 분단체제는 불안정 속에서도 유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들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 남북관계의 변화는 미흡하지만 이러한 분단체제의 문제점 극복에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햇볕정책을된다.
중세 서유럽 도시의 특색들어가는 글"도시들이야말로 이 작은 대륙 유럽을 위대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유럽의 도시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다른 지역의 도시들은 기나긴 부동성에 갇혀 있어 역사가 없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페르낭 브로델, 「제 8장 도시」,『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Ⅰ-2 일상생활의 구조 下』, 중에서근대 자본주의적 발전을 함에 있어서 유럽은 분명히 동아시아보다 앞서서 발전하였다. 그 이유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도시의 발달 과정이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도 첫 발제팀이 설명하였듯이 18세기에 서울에 발전은 놀라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도시의 발전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데 한계가 있었을까?필자는 여기서 3가지 이유를 들어서 그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유럽의 도시는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다. 둘째, 도시는 부르주아를 길러냄으로서 다음시대 변혁을 위한 세력을 길러내었다. 셋째, 유럽도시의 발전 결과 농촌사회까지 변동을 맞이하게 되어서 새로운 생산관계 수립을 촉구시키게 되었다.1.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서유럽의 도시 역시 처음부터 통일적이고, 자유롭고, 동일한 권리를 갖고 사는 시민층이었던 것은 아니다. 부단한 신분상승이 노력―소송사건, 심지어는 시민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들에 결과였다. 1111년에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슈파이어에 하사한 특허장 그리고 114년에 보름스에 하사한 특허장, 1182년과 1184년에 황제 바바로사의 주해와 승인은 상기한 두 도시의 모든 주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주해온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케케묵은 장원법에 규정된 일체의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런 조치로 말미암아 배우자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계 및 모계에서 자유로운 소유권과 상속권이 보장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양한 법률영역에 속해 있는 주민들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층이 창출되었다. 어떤 특정한 글에서 표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공기는 인간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말은 이러한 정황에서 유래되어 매우 잘 알려진 중세사회의 하나의 원리가 되었다. 물론 이 원리가 정착되기까지는 매우 다양한 변형과 예외가 시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12세기 초부터 유래된 로리스의 헌장 18조는 이런 내용의 고전적인 문구를 다음과 가팅 명시하였다. “그의 도망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1년 이상 도시에 거주하는 자는 앞으로도 계속 자유롭고 누구의 방해도 반디 않은 채 도시에 머물 수 있다. 12세기의 플란더른, 영국, 독일의 도시법들은 이 문구를 명시해 두었다. 마침내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그토록 오랫동안 누려온 영주의 권리들을 쓸모없게 만들었다. 휘 도시의 경우 1066년 도시영주인 뤼티히의 주교에게 상당한 액수의 재산공납을 바치고서 도시의 자유를 사들였다. 장원에서 도망쳐온 농노들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예속민 신분이었지만, 이에 대한 입증에 책임은 영주가 져야했고, 이 역시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또 도시법은 도시구역 밖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시안으로 들어와도 지방제판소로 소환될때까지 사적인 보복을 받지 않았고 재판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의 도시는 브르델이 말하였듯이 국가권력이 간섭이 너무 강했다. 조선의 도시들은 대부분 상업도시이기도 하지만 행정도시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국가권력의 개입이 더 강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 시민사회나 도시의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도시의 출현은 힘든 것이다. 유럽의 도시는 그 규모)나 상업의 발달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다음 시대인 시민사회를 열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2. 부르주아의 형성도시의 탄생은 서유럽의 내적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당시까지 사회에는 귀족과 성직자라는 두 개의 능동적 신분만이 있었다. 부르주아는 그들 곁에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사회를 완성하였다고, 아니 오히려 사회를 최종 마무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사회의 구성은 앙시앵 레짐 말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즉 사회에는 모든 구성요소가 갖추어졌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가 겪는 변형은 그런 구성요소의 비율이 바뀐 것에 불과했다.성직자나 귀족들처럼 부르주아도 특권신분이었다. 부르주아는 명백한 법적 계급을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특별법을 향유하였으므로 여전히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농촌대중들과 구분되었다. 더구나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부르주아는 그들의 특권적 신분을 유지하는데 노력하였고, 그런 특권적 신분에서 초래되는 이익을 독점하려고 애썼다. 부르주아는 인지하듯이 자유는 독점물이었다. 부르주아적 세력의 원인이었고 중세 말이 되면 부르주아의 약점 되기도 했던 특권계급 의식보다 더 보수적인 것은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들은 자유를 멀리 그리고 광범위하게 전파시켰고, 따라서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농민의 점진적 해방에 기여하였다. 부르주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농민에 즉시 영향을 끼쳤고 부르주아와 농민 사이에 나타났던 차이는 점차 완화되었다. 부르주아는 농민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애썼고, 농민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향유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들이 상업과 교역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소용없었다. 부르주아가 발전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그러한 발전을 중지시킬 수 없었고, 발전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런 발전을 억누를 수도 없었다.조선에서는 어떠한 세력이 부르주아와 비견될 수 있을까? 이 문제 역시 조선의 경우 강력한 국가 권력 자체가 부르주아적 세력 형성에 부정적이었고, 상인들 역시 부르주아와 같은 세력을 형성하기보다는 양반계급에 편입되는 모습을 보인다. 임상옥이 돈을 벌자 곽산군수가 되었던 것이 이러한 일면이 아닐는지? 하지만 이는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유럽의 경우 경제적 성공으로 귀족이 될 수 없어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신분을 형성하였지만, 조선의 경우는 양반으로 편입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유럽에 비하여 사회이동에 융통성이 있었다는 것에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음시대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세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즉 혁명은 세력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3. 사회관계의 변화중세도시의 형성은 당장에 농촌의 경제조직을 뒤흔들었다. 농촌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생산은 당시까지도 농민들의 생존을 유지하고 영주에 지불한 공조를 마련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상업이 중단되자 농민들은 잉여생산을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시장이 존재하지 않아서 농민들은 잉여농산물을 처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당장 필요한 식량과 장차 필요한 약간의 식량을 마련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 가능성을 인식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키비타스와 부르구스의 소규모 시장들은 너무 보잘것없었고 게다가 그 수요도 너무 미미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기존생활에서 벗어나게 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하도록 자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시장들이 새로운 활기를 띠었다. 구매자들의 수가 증가하였고, 따라서 갑자기 농민들은 그런 시장에 생산물을 가져가면 팔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되었다. 농민들은 당연히 이처럼 유리한 기회를 이용하였다. 농민들은 충분히 생산하기만 하면 파는 것은 그들 자신에 달려 있었으며, 따라서 이 때부터 그들은 여태까지 버려 두었던 토지를 경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노동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그들은 노동함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과 비례해서 더 많은 부와 더 안락한 생활을 누릴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토지로부터의 잉여수입을 농민들이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유리하였다. 영주의 권리들은 장원의 관습에 따라서 일정비율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지수입의 증가는 차지인(借地人)들에게만 이익이었다.그러나 영주들도 도시의 발전으로 농촌에 초래된 새로운 상황에서 이익을 얻을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영주는 거대한 미경작지?산림지?황야?습지?소택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영주는 그것들을 경작하였고, 당연히 이런 경작을 통해서 새로운 시장에 참여하였다. 인구증가로 인해 개간사업과 간척사업을 위한 인력이 확보될 수 있었다. 언제어디서든지 고용할 사람들은 충분하였다.이제 상업은 장원이 당시까지 자급자족하여 얻어야만 했던 모든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장원 각각이 자체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다. 인접한 도시로 가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면 되었다. 프랑스와 라인강?모젤강 유역에 위치한 포도밭을 기증 받아서 그 곳에서 소비에 필요한 포도주를 생산하였던 저지대지방의 수도원들은 13세기 초부터 그러한 포도밭을 매각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포도밭을 경작하고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포도주를 시장에서 구입해서 소비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어서 이제 그러한 포도밭이 쓸모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목 차논문 개요 … 2들어가는 글 … 31. 다산의 민주주의적 정치사상 … 3(1)‘아래로부터’의 민권 … 3(2)강력한 개혁 군주 … 72. 다산의 보수적 신분사상 … 8(1)보수적인 노비관 … 8(2)서얼 등용론 … 11(3)보수적 양반 비판 … 123. 다산의 ‘균부(均富)’론적토지 개혁 사상―여전제와 정전제 … 13(1)다산의 토지 개혁론의 공통점 … 14(2)조선 후기 사회경제 변화와여전제에서 정전제로 이행 이유 … 16(3)다산의 토지개혁의 특징 … 194. 다산의 '한국적 근대'의 청사진의 모색 … 20나오는 글 … 22참고 문헌 … 23논문 개요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는 큰 시련의 시기였다. 주지하다 시피 ‘식민지―분단체제’를 겪으면서 한국사에 있어서 자주적인 근대 이행이 실패하였다. 그렇지만, ‘자주적 근대화’의 책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자주적 근대화’를 시행함에 있어서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고찰이 필요할까? 이는 바로 조선 후기 ‘자주적 근대화’의 청사진을 복원하는 일이다. 본고에서는 우선 실학의 집대성자로 알려진 다산을 통하여 ‘자주적 근대’의 청사진을 복원하는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다산은 위대한 사상가이기는 하지만, 아직 전근대를 완전히 넘어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그에 사상을 검토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아래로부터’ 목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 사상과 비슷한 사상이 발견되며, 이를 수행하는 군주는 ‘아래부터’의 정통성을 가지는 강력한 군주에 의한 개혁 정치를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시대적 한계로 세습제에 대한 왕위 계승은 강한 비판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신분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이는 노비제에 대한 인정이나, 비판이 가해지기는 하였지만, 양반에 대한 특권에 인정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서얼에 대한 폐지와 능력 있는 평민에 등용에 주장한 한단계 앞선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토지 개혁 사상에서는 토지 제도 개편을 통해서 국가 전반적인 개혁을 주도하려고 하였다있는 것처럼 되어버린 조선 후기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던 것이다. 다산의 경우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생각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실행하려고 했던 노력이 보인다. 그 예로 자신의 곡산부사 재임 시절에 그가 이계심 사건을 처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계심 사건이란 군포를 대신 돈으로 징수하는데 이전들이 농간을 부려 과도하게 받아들이자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마침내 고을 백성들 천 여명이 관아로 몰려가서 시정해 줄 것을 청원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주도한 민물이 이계심 이었다. 청원과정에서 이계심은 전임부사에게 당당히 자기 주장을 펴고 관에서 체포하려 들자 백성들이 항의하며 몸으로 막아 몸을 피했다가, 다산이 곡산부사로 부임하자 스스로 백성들이 괴로워 하는 사항 10여 조목을 들고 다산 앞에 나섰다. 그러자 아전들이 칼을 씌워 끌로 가려 하자, 다산은 “그러지 말라. 한번 자수한 사람은 스스로 도망가지 않는다” 『여유당 전서』,「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며 만류하고 오히려 도임한 즉시 이계심을 불러서 엄벌에 처하기는커녕 격려하고 무죄로 방면하였다. 그 때 다산이 이계심에게 한 말은 다음과 같다.“관장이 밝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백성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폐막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 「자찬묘지명」당시 시대 상황에서 이계심과 같은 행동은 자칫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실제 다산에게 일부 고위층은 주동자를 죽야 된다고 까지 하였다. 하자만 다산은 여기서 보이는 것과 같이 자신의 ‘하향식’의 그리고 ‘민’을 위한 목이 되야 한다는 정치 사상을 실제로 행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목―천자를 포함한―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다산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뜰에서 춤추는 사람이 64명인데, 이 가운데서 1명을 선발하여 우보를 잡고 맨 앞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한다. 우보를 잡고 지휘하는 자의 지휘가 절주(節奏)서』,「탕론」그렇지만, 다산의 이러한 진보적인 정치사상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 사회는 선출에 의한 군주가 아닌 세습적인 군주제였다. 물론 다산 자신도 경전해석을 통하여 선양에 의한 군주의 교체를 ‘관천하(官天下)’로 세습에 의한 군주의 교체를 ‘사천하(私天下)’로 구분하기는 하였다. 『여유당 전서』,「상서고훈(尙書古訓)」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삼왕은 그 제사를 세대로 전하여 조고(祖考)의 핏줄이 전해지는 것을 중하게 여기지만, 오제는 그 제사를 선수(禪受)하여 신성함의 도통이 전해지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 … 그래서 대개 오제 때는 관천하이다.하지만 현실에서 세습제에 의한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안외순, 2001하지만 이는 시대적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2. 다산의 보수적 신분사상(1)보수적인 노비관다산의 신분제도 중에서 노비에 관한 사항은 진보적으로 보는 시각과 조성을, 「정약용의 신분제개혁론」,『동방학지』51, 연세대, 1987,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나뉘어 진다. 김영호,「다산의 신분제 개혁론」,『한국사론』1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특히 조성을씨의 경우 다산의 초기 문건은 노비제를 폐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경세유표나 목민심서 단계에서는 다시 노비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유는 다산 자신의 사상적인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 문건은 다산이 정말로 구상하고 원하는 사회의 모습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경세유표나 목민심서는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개혁안을 제시한 문건이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과는 달리 사상적인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러한 차이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그리고 경세유표나 목민심서의 과도기를 거쳐서 초기 문건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비록 그러나 내가 바라는 바는 따로 있다. 가령 한 나라 백성이 통틀어 양반이 된다면 이는 곧 한 나라에 통틀어 양반이 없는 것이다. 젊은이가 있어야 어른이 드러나는 것이고, 천한 자가 있어야 귀한자가 드러나는 것인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여유당전서』,「서얼론」여기서에서 보이듯이 다산은 서얼의 차별 폐지와 적극적인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서얼을 비롯한 차별 받는 지역 사람들을 등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10년마다 한번씩 무재이능과(茂才異能科) 『여유당전서』,「통새의(通塞議)」서북 지방과 개성강화의 중인서류로부터 일반 천민에 이르기까지 무릇 경학에 밝고 행실을 닦으며 문학과 정사가 뛰어난 자가 있으면 … 100여명 정도 천거한 다음 서울에 모이게 하여 경학을 시험하고 논책(論策)을 시험하여 … 10여명을 뽑아서 과거의 명목을주는 것입니다. 무릇 이 과거에 합격한 자는 아래로는 사헌부사간원과 홍문관, 예문관으로부터 위로는 의정부와 이조에 이르기까지 임명하는데 구애됨이 없 하요 소위 벌요열가란 집안과 같이 해서 그 자손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청명한 집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를 실시할 것을 제시하였다. 김영호의 경우 경세유표 단계에서 다산이 서얼에 대한 인식이 다소 후퇴하였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는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 그가 예를 든 외명부는 왕실의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와 다를 수 있다. 다른 예를 든 서류(庶流)의 승진 한계는 오히려 승진상에 불이익이 있을까봐서 12자리를 따로 만들었다고 판단될 수도 있다.이를 통해 볼 때 다산은 노비를 제외한 백성층에 대해서는 재능에 따라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여기 진다. 그리고 서얼의 경우 공정한 관리 임용뿐만 아니라, 현실 생활에서 적자와의 차별까지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보수적 양반 비판대저 선비란 어떤 사람이며, 선비는 무엇 때문에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고 남의 힘으로 먹고사는가. 대저 그것은 노는 선비가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전지의 이로움이 다 개척되지 못하게 된다. 선비가 놀고서는 곡식을 얻을 수 없음을 알게되면 또한 장차 직업을 바꾸어 농사를 짓게 될 것이다.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일을 하게 되면 전지의 이로움이 개척되고, 선비을 알 수 있다.(1)다산의 토지 개혁론의 공통점우선 여전제에서 정전제로의 사상의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살피기에 앞서서 북한 학계의 경우 다산의 최종적인 입장은 정전제가 아닌 여전제로 보고 있다.정성철, 1962두 제도의 공통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전제에서 정전제로 이행했음에도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이는 다산 자신이 전 생애에 걸쳐서 분명히 개혁하고자 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박찬승 박찬승, 「정약용의 정전제론 고찰」, 『역사학보』110, 역사학회, 1987씨에 따르면 여전제와 정전제는 다음과 같이 공통점이 있다.1. 토지사유를 부인하고 토지공유 내지 국유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2. 사회적 분업을 강조하면서 농민에게만 토지를 주는 ‘농자득전(農者得田)’을 원칙으로한다는 점3. 노동력의 충분한 이용으로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목표로 한다는 점.4.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다.1번에 대해서는 다산 자신은 ‘왕토(王土)’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왕토’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북한 학계처럼 바로 ‘봉건’ 질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듯 싶다. 현대에서도 아직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우리 나라에서의 ‘국립’의 의미로 ‘왕립’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러한 나라들이 아직도 봉건국가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정치상황에서 보았듯이 이상적이나마 왕토의 의미는 배분을 위한 중재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조항에서 더욱 중요한 점은 ‘지주제’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적 토지 제도’에 대한 개혁이 다산에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다산뿐만 아니라 토지 개혁론을 이야기한 다른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2번은 1번과 더불어 ‘지주제’를 개혁하고자한 다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즉 ‘농자득전’의 원칙 아래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는 ‘지주’의 존재란 상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분업이라는 측면은 여전제 단계에서는 다시금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분명 여전제 「원정」
갑오농민전쟁의 근대 지향성199920050 박성연농민군은 그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하였지만, 한국 근대사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고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남겼다.첫째, 1894년의 농민봉기는 조선후기 이래 지속적으로 전개해온 반봉건 농민전쟁의 총결이며 사회혁명을 지향한 농민전쟁이었다. 당시 봉기에 나선 농민들은 전근대)지배세력과 항전하기 위하여 사전에 필요한 일들을 준비하고 조직을 갖추었다. 조직적 연계를 통하여 국지적이고 분산적이었던 그 동안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역에서 농민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들 농민군은 전근대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면서 중앙정부를 상대로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는 농민층이 전근대지배층과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혁명을 추구한 ‘농민전쟁’이었다. 농민층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근대권력을 무력화시킨 후 집강소를 설치하여 스스로 통치의 주체로 나섰다. 그들은 집강소를 통해 신분제의 철폐와 토지의 평균분작 등 혁명적인 조치를 직접 실행하고자 했다.농민군이 이렇게 ‘민란’단계로부터 발전하여 혁명적인 농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밑바탕에 기층 민중의 사회?경제적 성장과 그에 따른 의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대사회는 중세사회와 달리 기층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시기이며, 1894년 농민전쟁은 한국사회의 민중이 그러한 근대사회를 열어가기 위하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농민전쟁은 반봉건 농민항쟁의 귀결인 동시에 역사의 진보를 향한 근대 변혁운동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둘째, 1894년 농민전쟁은 봉건 수구정권의 붕괴를 가져와 개화파정권의 성립을 가능하게 하였고 중세사회의 봉건적 신분제와 지주제, 그리고 수취체제를 해체시킴으로써 근대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역사적 기반을 조성하였다. 곧 이 농민전쟁은 중세사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최후의 일격인 셈이다. 조선 사회는 ‘신분제’와 ‘지주제’를 두 축으로 하여 유지되어왔다. 농민전쟁은 이 가운데 반상차별을 중심으로 유지된 신분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물론 조선후기 이래 신분제는 크게 동요해왔다. 그러나 신분제의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농민전쟁은 그 틀을 직접적으로 깨부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농민전쟁을 계기로 하여 향촌사회와 양반지배체제가 갖는 권위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양반제와 노비제도 등이 법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사실상 해체과정에 들어갔다.지주제에 대해서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명시적인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농민군들은 그해 가을에 지대 납부를 거부하였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지주제에 대한 농민들의 의도를 실질적으로 파악 할 수 있다. 또 농민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곳에서는 예전처럼 지주권이 확고하게 보장될 수도 없었다. 이와 함께 집강소의 폐정개혁안으로 평균분작)을 요구한 것은 궁극적으로 농민군의 주장이 지주전호제의 폐지와 농민의 토지소유를 실현하는 데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목표는 농민전쟁의 좌절과 함께 다시 잠복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농민전쟁은 대부분 농민들로 하여금 지주제에 대해 당연한 제도나 불가피한 관행으로 용인하기보다는 이제는 반드시 철폐해야 할 사회적 모순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하였으며, 또 아래로부터 농민들이 개별적으로 지주제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과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물론 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농민 대중들은 분명 지주에 대한 개혁을 바라였겠지만, 농민군이 국가에 제시한 폐정 개혁안에 이러한 요구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동학사』에 이러한 문제가 거론되기는 하였다. 하지만 2차 사료인 데다가 지은이의 입장과 관련하여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또한 당시 정황상 이러한 급진적 개혁을 할 입장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전봉준이 일본군의 취조시 “나의 종국의 목적은 첫째로 문벌을 타도하고 일당의 간신을 없애며 또한 전운사를 폐하고 전제?산림제를 개정하며...”) 대답한 내용을 보면, 분명 토지 제도에 대한 개혁을 구상하였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事”이다. 이는 그 정확한 구상은 알 수 없지만, 농민군이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을 염두해 두고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금 앞선 시기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이 균등한 토지점유와 균등한 생산물 향유가 태평천국 운동의 중심적 지향점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농민군은 사회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정권 장악에 뜻을 두고 전쟁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으로 인해 전근대 수구정권이 붕괴됨으로써 이후 개화파정권이나 대한제국의 성립 그리고 독립협회 운동 등이 가능해졌으며 이들에 의한 근대적 개혁이 추진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이 조산되었다. 결국 1894년 농민전쟁은 전근대 체제의 근간인 신분제와 지주제 그리고 전근대적 수취제도의 붕괴를 촉진시킴으로써 근대적 개혁의 실질적인 출발점을 열었다고 하겠다. 다만 이후 역사에서 이런 성과들은 개혁을 위한 기반으로 올바르게 활용되지 못했다.셋째, 1894년의 농민전쟁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주요한 과제로 제기된 반침략과 반외세 투쟁의 선구라는 의미를 갖는다. 당시 보수지배증은 외세의 압력을 오히려 전근대사회 해체기를 당하여 자신들의 쇠미해진 기득권을 보호?역사발전을 왜곡시키고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지체시킨다. 이와 같은 외세는 올바른 역사진보를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했으며 한국 근대사의 가장 큰 모순이었다. 그러므로 농민군은 외세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민족사적 요구에 가장 먼저 희생적으로 나섬으로써 근대 민족운동의 효시가 되었다.갑오농민전쟁은 자본주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오히려 좌파적 혁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 주체가 일반농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핀다면 충분히 근대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은 의식이 낮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만한 역량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살펴보았듯 농민군이 실패하고 또한 국가를 체계적으로 건설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다고 하여도, 이미 전근대적인 체제를 파괴 시켰다. 이는 새로운 즉 근대적인 국가 건설에 길을 열어놓았고 농민전쟁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를 부정하지는 않았다고 하여 전근대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에도 검토가 있어야 될 것이다. 문벌과 신분제가 타파된다면 왕을 제외한 특권자가 없는 국가는 될 것이다. 이 국가는 전근대적인가? 근대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