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자동차(주)( 豊田自動車 / Toyota Motors Corporation )설립년도1937년본사 소재지豊田市(도요타 시)대표자후지오 조(長 富士夫)종업원수69,753 ('98.3 기준)총생산대수/승용차3,165,805 / 2,669,975 ('98년)경영지표경영 결산 기준'98.3매출액(백만엔)7,769,486세후 순익(백만엔365,140총자산(백만엔)7,025,340자기자본(백만엔)4,874,155자본,기술 제휴업체- 다이하쯔(일,51.2%)- NUMMI(미,50%)- 히노(일,20.1%)- 國瑞汽車(대만,38.3%)- Kiruloska(인도,74%)- 호주 도요타(100%)주요차종TOYOTA (도요타)LEXUS▶ 크라운(Crown) - 1955년 도요타▶ 코롤라(Corolla) - 1966년 도요타▶ 2000 GT - 1967년 도요타▶ 셀리카(Celica) - 1970년 도요타▶ 셀시오(Celsior) - 1978년 도요타▶ 수프라(Supra) - 1993년 도요타▶ 프리우스(Prius) - 1997년 도요타▶ 셀리카(Celica) - 1999년 도요타대외적 도요타 평가※메이커 업체의 글로벌 신용등급1999년2000년2001년2002년2003년2005.3.21도요타AAAAAAAAAAAAAAAAAA포드A+ABBB+BBBBBB-BBB-GMAABBB+BBBBBBBBB-혼다AAA+A+A+A+현대B+BB-BBBB+BB+BB+※자료: STANDARD&POOR'S※주요 메이커별 미국 시장 점유율 추이 (단위:%)자료 : 세계 자동차 통계 ( K A M A )1도요타의 유전자를 만든 사람들도요타는 세습제의 환원이 아니라 세간의 누구나 납득하는 적임자를 선출한다.(1)도요타 사카치-도요타식 동력직기 발명(1897년)-기이치로에게 자동차 사업제시(2)도요타 기이치로-도요타 방직 입사(1920년)-도요타 방직내 자동차부 설치(1933년)-G1트럭발표(1935년)-전쟁패배로 인해 도산위기-JIT시스템-품직개선(감사 개량실, 감사 개량 위원회)(3)가미야 쇼타로-고객중공급 방식은 몇일분 재고량을 한꺼번에 창고에 입고시키고 생산량에 따라서 재고가 소진될 시점에 다시 발주를 주는 그런 방식이었다. 이 방법은 결품이 별로 없고 매우 안전하게 재고관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자동차회사 입장에서는 실제 생산대수보다 훨씬 많은 부품들을 구입해서 창고에 쌓아놓고 있어야 하므로 매우 낭비가 심한 방식이라 할수있다. 간판방식은 실시간으로 소비되는 부품수량에 대한 정보가 협력업체와 공유되고 모든 부품용기에는 간판(카드)이 부착된다. 이 카드는 그 부품에 대한 정보(바코드)를 담고 있다. 정보에는 예를 들면 품번, 품명, 업체명, 용기당 부품수량, 입고일자(시간) 등이 있다. 작업자가 그 부품의 박스가 비워지면 카드를 용기에서 떼어 수거함에 놓고 바코드 처리를 한다. 이 바코드처리는 해당 부품이 한 용기분 더 필요하다는 신호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보는 바로 협력업체로 보내져서 필요부품이 다시 도요다로 입고가 되는 방식이다. 입고된 용기에는 다시 카드를 부착하고 같은 일이 계속 반복이 된다. 도요다에서는 이런 방식으로서 재고량을 항상 "제로"에 가까운 상태로 유지한다. 이 방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협력업체와의 거리가 가까워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이때문에 도요다의 협력업체들은 대부분 가까운 도요타시, 나고야 주변에 몰려 있다.둘째, 다기능공 제도 역시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다른 자동차회사들은 한명의 작업자는 한가지 작업만 한다. 볼트만 조이는 사람은 항상 그 볼트만 인다. 볼트를 조이지 않는 시간에는 쉬는 것이다. 도요다에서는 이것조차도 낭비의 요소로 생각한다. 그래서 한 작업자가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하도록 철저히 교육한다. 도요다의 라인을 가보면 작업자가 여러작업을 차례대로 수행하느라 상당히 분주하다. 이 방법은 작업자의 지루함을 없애줄 수 있는 장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셋째, 헤이준카(작업부담을 평준화 하라)헤이준카는 생산량과 제품 구성에 있어서 생산의 균일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변화 폭이 큰 심한 고객 주문의 실제 흐름에 따라을 멈출 수 있게 하였다. 모든 팀 멤버들은 기준에서 벗어난 무엇인가 볼 때마다 라인을 멈출 책임이 있다. 그것은 품질에 대한 책임을 우리 팀 멤버들의 손에 넘긴 방식이다. 그들은 책임과 힘을 느끼며, 자신들이 중요한 사람들임을 안다.”다섯째, 냉정한 반성(한세이)과 지속적인 개선(카이젠)을 통해 학습 조직된다.도요타는 강한 힘은 개인이 올바르게 가지 않았던 상황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이 상황을 막기 위한 대책을 제안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도요타가 근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왜?’를 다섯 번 묻는 것이다. 즉 카이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도요타의 유명한 “5-Why” 분석이다. “왜?”를 다섯 번 묻는 것은 최초의 이유에 대한 해답을 넘어, 계속 파고드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근본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 물음으로써,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울 수 있다. 도요타에서 팀워크는 개별 책임을 결코 보호해 주지 않는다. 개별 책임은 비난과 벌이 아니라 학습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도요타뿐 아니라 일본 문화에서 학습하고, 성장하는 것의 핵심은 한세이(hansei, 反省)이다. 한세이는 최근 도요타가 해외의 관리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일본 문화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가르쳐야 하는 것들 중 가장 엄격하지만, 도요타의 조직 학습의 없어서는 안 될 구성 요소이다. 도요타는 1994년 한세이를 미국 경영진에게 소개하였다.“한세이 없이 카이젠은 불가능하다. 일본의 한세이에서는 무엇인가 잘못할 때, 먼저 진정으로 슬픔을 느껴야만 한다. 그 다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래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유형의 실수를 결코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한세이는 생각 방식이며, 태도이다. 한세이와 카이젠은 함께 간다.” “냉정한 반성(한세이)과 지속적인 개선(카이젠)을 통해 학습 조직이 되라”라는 것은 도요타에서의 지속적인 프로세스이다. 심지어 도요타 생산 시스템 그 자체가 계획-실행-검토-행동의 학~5년간에 불량이나 불편함 등의 품질문제를 얼마나 경험했는가를 차량 100대당 문제발생 건수로 나타낸 지표인 VDI(Vehicle Durability Index)에 대해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IQS나 VDI 둘 다 불량이나 고장이라고 하는 이른바 ‘있어서는 안 되는’ 당연한 품질이다. 그리고 당연한 품질의 개선은 도요타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분야이다.현재 도요타가 가장 많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APEAL(Automotive Performance, Execution & Layout)이다. APEAL이란 소비자가 차량을 구입하고 90일 경과 후에 차량의 디자인, 스타일의 개성, 차량의 승차감과 핸들링, 엔진 및 트랜스미션의 성능, 쾌적함과 편리성 등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APEAL 부분에서도 도요타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그리하여 미국 컨슈머 리포트가 신뢰성과 성능을 기준으로 선택한 2001년 판매된‘가장 우수한 자동차 10차종’을 발표하였는데, 도요타는 10차종에서 가장 많은 4차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컨슈머 리포트에서도 도요타의 압도적으로 높은 품질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J.D. Power사가 자동차에 대해 공표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표표1. 과거 IQS의 추이 (1위 획득부문 수 순위)1996년1997년1998년1999년2000년2001년1위획득부문1위도요타(6)도요타(3)닛산(3)혼다(3)도요타(3)포드(3)혼다(3)도요타(6)도요타(9)도요타(7)2위GM(2)혼다(2)닛산(2)혼다(3)혼다(2)GM(2)닛산(2)3위스바루(1)닛산(1)포드(1)그 외4사(1)부문수111013151416IQS (Initial Quality Survey) : 구입후 90일 최초만족도(초기품질 지표)주: ()안은 브랜드명에서의 평가결과를 메이커명으로 묶은 숫자이다.출처: J.D. Power 1996~2001년 IQS 조사표2.과거 VDI의 추이(VDI랭킹) VDI (Vehicle Durability Index).......... 87Honda Civic Hybrid ..81Mazda3 ..80FAMILY SEDANSToyota Avalon ........ 84Honda Accord ........ 82UPSCALE/LUXURY SEDANSLexus LS430 ...........92Acura TL 87Acura TSX ..............83Jaguar XJ Series .....81COUPES/CONVERTIBLESLexus SC430 ..........85%Mercedes-Benz SL .81%MINIVANSToyota Sienna .........86MIDSIZED SUVsLexus RX330 ..........85Honda Pilot ..............83Toyota Highlander ...81Lexus GX470 ..........81Toyota 4Runner ......80LARGE SUVsToyota Land Cruiser ................84Lexus LX470 ..........82PICKUP TRUCKSToyota Tundra ........83Nissan Titan ............822도요타의 브랜드 파워도요타의 브랜드 파워기업의 사회성이 중시되는 현대에서는 브랜드 파워의 비중이 점점
♣아편 전쟁♣중국의 근대사는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으로 시작한다. 그 승패에 의해 중국은 근대의 세계에 편입되고, 일찍이 볼수 없었던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이래 열강이 반 식민지로 화한 중국은 악전고투 끝에 자신을 해방시키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성립시키게 된다.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청제국말기의 국가와 사회는 대내적으로 동요가 일고 있었다. 청조의 지배체제에 금이 가게 한 여러 요인 중 인구의 급작스런 증가와 불경기의 도래, 관리기강의 현저한 해이, 그리고 지방반란이 속출등으로 인해 청 제국은 경제적 곤란과 사회적 불안이 누적되게 된다.첫째, 인구의 증가는 건륭22년(1757)의 중국의 인구는 에 따르면 139천 3십 4만명이었다. 그리고 약 70년 후의 도광10년(1830)의 에는 전국의 인구가 3억 9천 4백 8십만 여로 기록되어있다. 인구는 배로 늘어났는데 그 기간에 경지면적의 증가는 18%에 불과하였다. 총생산액은 그 당시 달라지지 않았는데 인구만이 배로 늘어났기 때문에 한 사람 앞의 할당 분은 그 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만큼 국민이 생활고는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둘째, 청국의 화폐제도는 은 본위제이다. 물건의 가격은 은 몇냥이라는 표현 방법을 썼다. 이경우의 ‘냥(兩)은 중량의 단위에 불과하다. 1냥은 37.3125그램이다. 예를 들면, 은 10냥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될 때 10냥 무게의 은괴 1개를 지불해도 좋고, 2냥의 은립(銀粒) 5개를 지불해도 무방하다. 정부 주조의 은화는 거의 없었고 은의 순도와 중량의 규정에 의해서 합당하지만 하면 된다. 청조는 동전의 구조에 대해서는, 완전한 국가 독점 정책을 채용했는데, 화폐의 본위로 삼는 은화에 대해서는 자유방임 정책을 쓰고 있었다. 이것은 동(銅)을 통제함으로써 무기 제조를 체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유통된 것은 멕시코의 은회인데, 이것은 마치 매의 형태를 닮았다 하여 `응양’이라 불리어졌다.셋째, 관기의 문란 이다. 관리의 부패가 심해지자 청조의 통치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관리들은 수탈이외에 더더욱 심한 불법 행위를 자행했다. 따라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가장 손쉬운 치부의 길이었으며 돈으로 관직을 살수 있게되어 몇사람이 합자해서 관직을 사서 이익금을 배분해 갖기도 했다. 그 예로 가경4년(1799)에 건륭제가 죽자, 건륭시대의 총신이던 화신이 처형되었다. 몰수된 그의 재산은 약 8억 량이나 되었다 한다. 당시, 정부의 세입은 7천만 량이었다. 화신은 일국의 세입 10년분 이상을 부정축재하고 있었던 것이다.넷째, 백련교의 난이다. 청조의 안정을 크게 뒤흔든 것은 백련교의 난 이었다. 일반 민중 특히 관리들로부터 착취의 대상이 되었으며, 관리들뿐만 아니라 관부의 서리나 복예까지도 농민을 착취하자, 이에 농민들은 민족적 불교의 한 분파인 백련교도에 가담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당시의 관군은 사기가 문란해져있었음으로 이를 평정하는데 9년여 세월이 흘렀다.다섯째, 은의 누출이다. 다엽을 대량으로 수출하고 이렇다 할 수입품이 없었을 때는 은화가 국내에 남아 돌아갔다. 그런데 아편의 수입으로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면서 민중의 생활은 힘들기 시작하였다. 인도제 아편의 수입이 청국의 무역형태를 역전시켰다. 영국이 청국에서 구입하는 다엽의 액수보다도, 청국에게 판매하는 아편의 액수가 월등하게 많아진 것이다. 이에 비로소 지금까지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고 청국측 으로서는 아편구입대금의 지불방법으로 ,다엽의 수출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어 마침내 현은으로 충당하지 안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로써 은(銀)은 비싸지고 불경기가 도래하게 된다.건륭 이전에는 동전 7백문(文)을 1냥으로 교환하고 있었는데 은 한 냥이 7백문에서 점차로 8백문, 9백문으로 올라갔다. 은이 귀해져 가고 희소해 가고 있었다. 아편을 수입하기 위하여 은이 국외로 유출되면 부족한 은의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광10년(1830)년 이 지나면서 은 1냥은 동전 1천 2백문이 되었다. 다시 10년가량 지나서 아편 전쟁이 일어날 무렵에는 2천문으로 뛰어올랐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은의가치가 상승하여 민중의 세금만이 무거워 졌다.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대외관계는 청국은 쇄국상태였으나 이것은 다분히 중화사상에 유 래한다. 청국과의 무역에 열중하고 있던 영국은 18세기말에도 건륭황제 80세의 축하사절단이라는 명목으로 마카트니경을 북경에 파견하여 통상개선을 교섭하고자 하나 청국은 영국에 대해 자선의 정신으로 교역에 응하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할뿐 평등호혜라는 통상의 기본정신은 없었다. 당시의 교역 실태를 보아도 청국의 수입상품은 대개 불요불급한 사치품(시계, 망원경)이 많은데 비하여 청국에서 수출하는 다엽은 영구의 생활필수품이었다.첫째, 광동무역은 광동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가 된다. 특히 이 지역에서의 무역이 명말과 청초를 지나면서 국내안정을 이루고자 1757년에 칙명(勅命)으로 광동을 무역항으로 공인하여 유일하게 외국선박이 출입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관이라 하여 광주성의 서쪽 약 200미터 떨어진 곳을 이국인거류지로 정하고 그 건물을 이관이라 하였다. 이관이 있는 나라는 덴마크,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이 동인도회사 사무실은 쓰고 있었다.이관 안에 있는 외국상인과의 거래는 특수한 상인만이 할 수 있는 규칙이 있는데 그들을 행상이라고 한다. 이 행상들이 공상이라는 일종의 길드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 구성원은 10개의 행상이내였다.둘째, 영국의 중국무역은 인도에 있는 동인도 회사가 주로 맡아서 했다. 영국은 영국인들이 차를 즐겨마시므로 생활필수품으로써 이차를 중국에서 가져가고 영국은 대신 자기나라에서 생산되는 많은 모직물을 중국에 팔기를 원했으나 광동항이 남중국에 있으므로 판매량이 증가하지 않았다. 따라서 차의 대금은 거의 은으로 지불해야했다.셋째, 아편의 출현이다. 명대에서 부터 약재로서 취급되어 아주미미한 수량이 수입이 되었지만 아편이 질병을 치료하는 약으로서가 아니라 기호품으로서 중국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 것은 청대에 들어선 다음이다. 영국 상인이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들여옴으로써 아편 흡음(吸飮)하는 습관이 신속하게 유행되어 대량의 아편이 중국에 유입되었다. 아편이 신속하게 만연된 사실에 대해서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편상인이 민주의 무지를 기회로 아편의 해독을 감추고 아편을 장수의 비약이라고 선전한 것, 또는 정치의 부패, 인구의 증가 등으로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 지고 있었는데 아편은 이러한 서민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게 해준다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아편이 동양인의 체질에 맞는 다는 사실도 간과 할 수 없다. 우울한 세상사를 잊어버리기에는 서양인에게는 알콜, 알콜은 양성이어서 떠들썩하지만 아편은 음성이어서 수동적이고 명상적이어서 동양인에게 더 맞다는 의견도 있다. 청국정부는 일찍부터 아편의 금지령을 내렸으나 실패하고 만다. 즉 아편이 무역은 지속되었다.넷째, 아편무역의 성행이유는 영국은 이러한 전매이익금이 국내의 재정난 해결에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으며 중국차를 사들이는 자금문제 해결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청조가 몇 차례나 금지령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은 지불되는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었다.다섯째, 아편문제는 아편이 날로 증가됨에 따라 은의 유출이 국내의 은 가격은 폭등되고 은 가격의 폭락을 초래함으로서 아편문제로 인해 청국은 망국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은의 가치가 최고조에 달한 것은 1838 ~ 1839년경이었으며 이 시기의 아편문제의 심각성은 급기야 아편전쟁을 일으켰다.이런 청조의 대내적대외적 상황에서 청조 내에서는 아편무역을 합법화하여 관세수입의 증대를 꾀하고 국내에서도 아편제조를 허가하여 수입을 억제시켜야 한다는 이금류와 엄금류가 대립하였다. 1839년 도광제는 소수파였던 엄금파에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발탁하여 광주에 파견하고 아편의 근절을 맡도록 했다.임칙서는 단호한 태도와 수단으로 외국상인에게 아편의 제출과 다음부터는 아편을 일절 가져오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을 명하였다. 아편의 재고량은 2만 2천 83상자로 보고 되었다. 쟈딘 마세손 상회가 소유한 것이 7천 상자로 단연 제일 많고, 덴트 상회의 것은 2위로 1천 7백 상자였다. 몰수된 아편의 중량은 1천 4백 25톤이나 되었다. 이렇게 방대한 아편을 몰수하는 데는 4월 11일부터 5월 18일가지 한달이 넘게 걸렸다. 호문의 임시창고에 넣어 두었다가 현지에서 소각하고 그것을 공개한다. 기름을 뿌려서 태워 보나 잔고 여력이 땅속에 스며들었다. 소각한 후 흙을 파서 다시 쪄 보니 2할 내지 3할의 아편을 채취할수 있음이 밝혀져서 사방 50미터의 인공늪을 두개 파서 널빤지를 박고 바닥에 돌을 깔아서 아편이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바다 쪽에 수문을 만들고 반대쪽에 도랑을 팠다. 인공늪에 많은 소금을 투입하고 아편을 거기에 반나절쯤 절여두고 소석회 덩어리를 계속 넣으면 마침내 연기를 뿜으며 비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후 다시 인공 늪 위에 널빤지를 걸어 놓고 인부들이 그위에 올라서서 마대기로 히 저으면 아편은 녹아 버린다. 그리고 썰물 때 수문을 열면 그 용액은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이 작업이 20여일 이상 매일 계속되어 아편을 모두 소각 시켰다. 이 철저함은 임칙서가 아니고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몰수한 아편을 호문해안에서 폐기처분 시켰다. 영국 의회에서 파아머스턴 외상은 손실의 보상과 이 사건을 이용하여 대중 무역을 안정된 기초위에 두는데 필요한 제 조건의 획득에 나서기 시작하여 청나라의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회에서는 아편 밀수출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편 밀수출을 주장이 대립했다.당시 영국은 휘그 당과 토리 당의 양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자리잡고 있었던 시기다. 휘그 당은 아편판매를 중국무역의 기회를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리 당이라는 이유로 아편거래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영국의회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휘그 당의 계획대로 하기로 결정했으며 중국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승인했다.
♣바다의 여왕 베네치아♣이탈리아에 있던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지형학상 가장 특이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찬란한 역사, 도시 구조상의 특이함,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관은 베네치아만이 갖고 있는 독창적인 성격이다.베네치아는 5세기 중엽 외적의 침입을 피해 브렌타 평야의 주민들에 의해, 말뚝으로 지반을 다진 수 백개 의 섬 위에 건설되었다. 카날레로 불리는 작은 수로는 일반 도시의 도로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 사이로 각종 배들이 다닌다.이탈리아 북부 지방 대부분이 롱고바르도의 지배하에 있었던 반면, 베네치아 시의 발전은 동로마 제국의 보호 하에 이루어졌다.바다에 접한 지리적인 이점과 동로마 제국과의 친분을 이용해 베네치아는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칠 수 있었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동양과의 활발한 교역과 예술의 발전의 극치를 이루는 대 영화를 누리게 되었다.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대 상인들은 무역활동으로 큰 재산을 축적하였고 호화로운 궁전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성당들을 건립하는 데 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15~17세기에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인 육지까지 진출하고 터어키를 점령하는 등 국가 권력이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코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수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페렌체 뿐 아니라 베네치아로도 대거 피신하였는데,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고딕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서유럽 문화와 동유럽 문화의 완벽한 용해의 결과물이 되었다.미술사적으로 볼 때 베네치아 화풍은 전통 이탈리아 화풍을 완전히 개혁하는 혁신이었고, 화가 벨리니, 까르파치오, 죠르지오네, 티찌아노, 틴토렛또, 베로네제 등을 배출하게 된다.1600년~1700년대의 짧은 회복기를 제외하고는 경제적이나 정치적으로 다른 유럽의 열강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한 베네치아는 1797년 오스트리아령에 속했다가, 1866년 마침내 이탈리아 왕국에 포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베네치아의 찬란한 역사는 도시의 구석구석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눈부시게 화려한 궁전들을 차지하고라도, 곤돌라가 스쳐하고 여전히 성상을 배례하고 있었다. 바로 후세에 유명해지는 베네치아인의 상인적인 냉정한 타산의 결과였다.그들에게는 통상의 자유를 침범하려고 하지 않는, 형식상의 지배로 만족하고 있는 비잔틴제국 쪽이 더 편리했던 것뿐이었다.그렇지만 페팽은 강경했다. 라벤나 바로 근처에서 베네치아를 공격할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민족들의 침입에 대비해서 들어간 소택지를 아무도 침략하지 않았는데 말이다.베네치아인도 방어전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비잔틴으로부터 구원 군이 파견된다 하더라도 콘스탄티노플은 너무나 멀었다. 그렇다고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쳐 온 곳이니 이 곳밖에 도망쳐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 비로소 그들은 달아나는 것을 그만두고 방위를 위해 힘쓰게 된다.베네치아인들은 배가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바닷속 여기저기에 세워두었던 말뚝을 전부 뽑았다. 소택 지대이므로 밀물 때라도 어지간히 숙련된 뱃사람이 아니면 배는 금방 얕은 곳에 걸려버린다. 썰물 때에도 항로를 잘못 잡으면 작은 배까지도 위험할 정도이다. 이런 방법으로 프랑크 군사들의 배가 앝은 곳에 빠지게 발을 묶어서 화전(火箭)법으로 승리를 이끌었다.그러나 진짜 승리는 그후 1년이 지나서 베네치아인에게 주어졌다. 서쪽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와 동쪽의 비잔틴제국의 황제 사이에 조인된 조약에 의해서이다. 그 조약에서 샤를마뉴는 공식적으로 베네치아에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고, 베네치아인이 비잔틴제국 영내에서의 교역의 자유와 함께 베네치아 상인에게, 그리고 이미 교역에 나라의 장래가 걸려있다고 재다보고 있던 베네치아 국가에게 이만큼 큰 승리는 없다고 해도 좋을 만한 일이었다.포 강을 거슬러 올라가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차비아 거리에 열리는 시장에 모습을 나타내는 베네치아 상인들은 무엇이든지 팔았다. 콘스탄티노플의 비잔츠 황제 전용공장에서 짜고 황제의 하사품이라 하여 유명했던 홍색의 비싼 피륙까지도 파비아의 시장에 가면 베네치아 상인으로부터 살 수 992년 비잔틴제국과 베네치아공화국 사이에 하나의 조약이 맺어졌다.그것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베네치아공화국은 그 자주성을 완전히 인정받는 대신 비잔탄제국에 속한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경제면에서는 비잔틴제국 연애에서 베네치아 상인은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할 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런 기존의 것 말고 또 다른 중요한 것은 비잔틴제국의 수토 콘스탄티노플의 항구에 입항하는 베네치아 상선은 입항할 때 2솔디 금화(이탈리아의 옛 금화. 20분의 1리라)를 , 출항할 때는 15솔디 금화를 기항요금(寄港料金)으로 지불하면 된다는 항목이었다. 제노바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상선들은 베네치아도 종전에 물어왔던 그대로 30솔디 금화의 기항요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에, 베네치아는 해양교역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기반 중의 하날 작용하게 되었다.매우 유리한 이 조항의 대한 베네치아 측의 의무라는 것이 또한 베네치아로서는 은근히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비잔틴제국은 서쪽의 방위에 베네치아의 해군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쪽은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 남쪽은 사라센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네치아로서는 슬라브와 사라센의 해적을 쫓아버리고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확립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런 판에 아드리아 해의 경찰 역할을 하라는 의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베네치아로서는 안성맞춤의 대의명분을 얻은 것이 되었다.먼 곳에 자기편을 갖는다는 그의 회교는 베네치아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만약 베네치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편에 붙어 있었더라면 그후의 서유럽을 동란의 땅으로 만든 황제파와 교황파의 싸움에 말려들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은 지리적으로 베네치아에 가까웠다. 그뿐 아니라 오리엔트로부터 가지고 들어온 상품을 많이 사주는 단골손님이었다.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아도 좋지만 적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오르세올로 2세는 비잔틴제국과 조약을 맺은 지 2개월 후에 국내의 친서유럽파의 어깨 너머도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한 것이 되어 베네치아 경제의 발전에 대단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1204년의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정복으로부터 시작되는 반세기를 베네치아가 동지중해를 그들의 독점체제하에 두었던 시대라고는 할 수 없다.확실히 제4차 십자군에 대한 투자는 충분히 본전을 뽑았다. 베네치아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를 잇는 ‘길’이 완성되었고, 베네치아 상인은 자기 나라 영토나 아니면 우호국에 설치한 기지를 징검돌을 밟듯이 기항하면서 항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이렇게 ‘길’이 완성되었어도 완전히 육지에 난 길처럼 이용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징검돌처럼 흩어진 영토일지라도 지중해 최대의 섬인 크레타를 비롯해서 네그로폰테 등 전부를 합치면, 베네치아의 해외영토는 본토보다 훨씬 광대해졌다. 그것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정치적`군사적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게다가 라틴제국은 통치의 무능도 겹쳐서 창립 당시부터 약체여서 베네치아의 해군에 의한 지원 없이는 방위조차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도 해안지방은 그럭저럭 베네치아 해군의 덕택으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내륙은 허술했다. 그것을 노리고 북쪽으로부터는 신흥 불가리아제국, 동쪽으로부터는 비잔틴제국의 잔존세력인 니케아지국, 서쪽으로 부터는 에페이로스의 참주가 라틴제국을 죄어오고 있었다. 남쪽만이 평온했던 것은 베네치아가 지배하고 있는 에게 해에 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인적 자원이 빈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베네치아는 이들 육지형 국가에 쓸데없는 싸움을 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유럽인 들로부터 지조도 아무 것도 없다는 비난을 받는 것도 개의치 않고, 라틴제국이 창설된 지 12년 후에 에페이로스의 참주와 우호통상조약을 맺고, 다시 그 3년 후에는 니케아제국 황제와 같은 조약을 맺었다. 에페이로스의 참주는 두라초로부타 파트라소스에 이르는 지역, 즉 아드리아 해의 출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니케아 황제는 소아시아연안과 흑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바다 위에 강적은 700여명이나 되었다. 남은 배도 사람도 틸로스로 도망쳤다. 육지 쪽의 싸움도 성당기사단의 활약과 그때까지의 제노바인의 전횡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던 지방민의 도움으로 우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프랑스 기사들도 고전하고 있었으나 해전이 베네치아 쪽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알려지자 제노바인들은 공격을 멈추고 틸로스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아콘은 완전히 베네치아의 것으로 되었다.그러나 베네치아의 완승으로 끝난 서전(緖戰)으로부터 겨우 3년 후인 1261년에 제노바는 멋지게 베네치아인에게 보복을 하는 데 성곡한다. 베네치아 상인의 오리엔트의 최대 근거지인 콘스탄틴노플을 베네치아로부터 탈취해버린 것이었다.1261년부터 1300년까지의 시기는 1261년의 라틴제국의 멸망, 1268년의 안티오키아 몰락, 1291년 아콘 함락 이라는 정치상의 3대 사건에 나타나듯이 서유럽 상인들, 특히 베네치아에게는 교역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상당히 힘든 시기였다.1261년의 팔레올로고스에 의한 비잔틴제국의 재건, 라틴제국의 멸망은 베네치아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것도 은밀히 제노바와 밀약을 맺은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를 활용해서 베네치아 함대가 멀리 외해를 항해중인 틈을 타 콘ㅅ탄티노플을 점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서둘러 되돌아온 베네치아 함대도 이렇게 완전히 기정 사실화된 일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시내 거주 구의 동포를 배로 피난시켜 네그로폰테의 기지까지 데리고 올 수가 있었을 뿐이다.팔레올로고스 황제와 제노바 상인들 사이에 맺어진 밀약이란, 제노바가 베네치아 해군과의 대결을 떠맡아 베네치아 함대를 콘스탄티노플로 접근시키지 않도록 하는 대신, 황제는 그때까지 베네치아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제노바 상인들에게 준다는 내용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시내가 이니랃 금각만을 사이에 두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낀 갈라타가 제노바인에게 주어졌다. 베네치아인은 시내는 물론이고 비잔틴제국 영내 전역에서 배제당하게 된다.여전히 베네치아는 에게 해의 대부분을 장악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