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서진규라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 사람도 있더라면서 흥분하며 나에게 그 전날 TV에서 봤던 한 여자의 일생을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흥미 있게 듣긴 했지만 단순히 흥미에서 그쳤다. 나와는 다른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책에서도 신문에서도 TV에서도 지겹도록 많이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신문이나 책을 보면 굉장히 멋진 사람들 투성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역경을 이겨낸 훌륭한 사람들의 수필집을 읽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다. 분명 흥미롭긴 하지만 거기에서 항상 끝이 났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도 있구나.나도 이렇게 멋진 여자가 되어야지.’ 이렇게 생각하기보다도, ‘도대체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나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겠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3인칭 시점에서 책을 읽게 되니까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주인공에 이입되지 못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바꿔보려 한다. 정말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자신은 잘난 것도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정말 노력 하나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온 한 여성의 눈물나는 사연을 읽었다.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도, 힐러리의 자서전을 읽었을때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썼겠지만 서진규 씨의 이야기는 무언가가 조금 달랐다. 앞서 얘기했듯 남들보다 우월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하버드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상아탑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희망이라는 단어가 많이 기억에 남는다. 희망은 이 책의 제목에서 그렇듯이 그녀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단어이며 그녀를 움직이는 힘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삶의 자세가 한 발짝 떨어져서 그녀의 삶을 구경하려던 나를 끌어들였다. 게다가 그녀의 삶은 고생을 이겨낸 하버드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엄마’로서의 역할과 ‘군인’이라는 점이 남달랐던 것 같다. 사실 엄마로서 자식을 제대로 키우는 것만큼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저번 학기에 아동심리학 수업을 듣고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진규 자신이 딸로서 자라난 환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 자신의 딸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기울인 노력들과 세심한 배려들이 정말 가슴에 뭉클하게 와닿았다. 딸 성아를 낳고 기르기까지의 그녀의 인생을 정말 가엾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녀가 번번이 유산하면서도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구박을 받았고 결국 남편과 이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가는 상황이 더더욱 성공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혀주지 않았을까싶다.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그러한 시련을 모두 이겨냈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한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성아에게 특별히 챙겨주거나 눈에 띄게 잘해주지 않아도 성아는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자식을 보고 서진규 자신은 얼마나 대견스러웠겠는가. 책의 앞부분에서 그녀가 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호랑이새끼는 호랑이가 기른다는 말이 절로 생각났다. 그녀는 성아에게 멋진 어미 호랑이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녀는 성아가 그녀 자신의 소질을 살리도록 충분히 도움을 주려고 노력해 왔고 도중에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그녀는 성아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신이 먼저 실천하여 성아가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본받도록 길을 이끌었다. 성아는 두 번의 이혼을 했던 그녀의 품에서 어렵게 자란 결손가정의 자녀이다. 하지만 성아는 현재 어머니의 뒤를 따라 ROTC 장교 훈련을 받고 있다. 어머니를 따라서 장교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어머니를 닮고 싶고 어머니를 존경한다는 표현이 분명하다. 서진규 씨는 그런 결심을 하는 성아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그녀의 삶에서 성아는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 하고 있었고 그녀는 성아의 이야기를 또 책으로 냈다. 이 책은 읽어보진 않았지만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과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라는 제목이라니, 참으로 그녀다운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어렸을 때의 성아는 언어장애에 꼴찌를 도맡았던 문제아였다. 그러나 서진규씨는 왜 잘하지 못하느냐고 나무라는 대신 '너의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기회가 날 때마다 일러줬다고 한다. 사실 나는 내 아들 딸이 성적이 좋지 않다면 흥분부터 하면서 공부 좀 하라며 야단칠 것 같은데서진규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다들 머리로는 차근차근 타일러야된다고 생각하지만 가슴으로 안되니까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는 것일텐데 정말 얼마나 딸을 위해 많은 생각을 했으면 이렇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을까. 그녀는 화가 난 상태에선 절대로 아이를 야단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사실 이 부분이 인간이고 게다가 어머니로서는 정말 제어하기 힘든 부분이었을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군인이라서 그런건지- 화가 나면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성아에게 최고의 어머니의 역할을 해주었고 성아또한 그녀의 노력에 부응하며 훌륭한 딸이 되었다. 서진규씨는 ‘성아는 나의 희망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영화 “엘리자베스”의1. 역사적 배경영화 엘리자베스의 처음 부분은 신교도의 머리를 깎고 교수형을 준비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처음에 그 잔인함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문을 외우며 화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들은 흡사 로마시대에 핍박받는 카톨릭 교도와도 같았다. 이렇게 강렬한 인상으로 영화의 처음을 시작한 ‘엘리자베스’는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메리 1세의의 막바지 통치기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1554년 영국, 질투심 많은 카톨릭 신봉자인 메리 1세의 치정 하에 있는 영국은 재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어려운 처지에 몰려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구교도 메리 여왕은 신교도 박해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그녀는 마치 도를 넘어서 종교에 의지하고 종교를 신봉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신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박해를 했다. 이 과정에서 메리 1세는 ‘피의 메리’(Bloody Mery)라고 불릴 만큼 많은 신교도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메리 1세에게는 배다른 동생 엘리자베스가 있다. 아버지는 헨리 8세로 같지만 메리의 어머니는 헨리8세에게 이혼당한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이었고,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앤 볼레인이라는 궁녀였다. 하지만 앤 볼레인은 왕비가 된지 천일 즈음에 헨리는 아들을 기대한 자신을 기만하고 여러 남자와는 물론 오빠와도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그녀를 교수형에 처했다. 앤 볼레인의 딸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신교를 믿고 있었고, 그녀는 공공연한 구교도들의 적이었다. 그 와중에 메리의 최측근들이 모함을 하여 그녀에게 반역의 죄를 씌워 사형시키려하지만 메리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그녀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우리 영국 국민들이 성모 마리아의 품에서 살아가도록 해주겠다고 나에게 약속해주면 너를 다음 여왕에 봉하겠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피의 메리라는 얘기만을 들어온 나에게는 색다른 충격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양심이 시키는 대로 영국을 통치하겠다고 완곡히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살아나고 종양 같은 병에 시달리던 메리는 임종을 맞는다.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공주 시절 사랑하던 로버트와 헤어질 것을 강요당하고, 윌리엄 경에 의해 정략결혼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영국은 당시 재정적으로는 적자를 면치 못한 채 군대도 없어 외세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나는 엘리자베스 1세가 처음부터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고 말하고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알았는데 처음부터 독신으로 지낼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죽은 메리의 남편이었던 스페인의 왕이나 프랑스 왕비의 조카인 앙주 공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로버트 더들리를 내세워 청혼을 물리쳤지만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엘리자베스에게 많은 충격을 주게 되고 스페인이나 프랑스와의 결혼을 생각하려 하지만 프랑스의 앙주 공은 여장을 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첫 만남부터 키스를 퍼붓는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거절당한 로버트는 스페인에게 매수되었고 스페인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과의 결혼을 거절할 경우를 걱정해 구교도인 노포크 공과 손을 잡게 된다. 게다가 그녀는 구교와 신교 간의 대립이 심한 영국을 정신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수장령과 통일령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영화에서 거울을 보며 연습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보면서 잘 해낼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훌륭하게 그녀의 의견을 제시하였고, 전 국민에게 국교회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여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교황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고 그녀를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녀는 이러한 격변의 중심에 서 있었다.영화 “엘리자베스”의2. 영화 분석, 영화가 말하려는 바영화에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처음 여왕이라는 자리에 오른 그녀는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항상 옆에서 그녀를 보필한 사람이 있었다. 월싱엄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메리가 여왕이었을 당시에는 추방되었던 신교도 중 한 명이다. 월싱엄은 처음에 어두운 이미지로 보였다. 말도 없고 엘리자베스 옆에서 그녀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용의주도하며 진심으로 그녀가 모두가 우러러 볼 수 있는 여왕이 되길 원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그의 충성심을 잘 보여준다. 조카의 청혼을 거절한데 대해 앙심을 품은 가즈 여왕이 독 묻은 드레스를 보내 암살을 기도했음이 드러나자 엘리자베스는 월싱엄 경을 스코틀랜드로 보내 가즈 여왕을 암살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화 초반부터 등장했던 궁의 시녀인 듯하면서도 여왕을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구교도 노포크 공과의 만남을 유지하는 여자의 숨은 주인이었다. 결국 그는 노포크 공의 반역 증거도 손에 쥘 수 있었고 노포크 공을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던 궁중 내 무리들을 숙청함으로써 엘리자베스는 마침내 왕좌를 안전하게 지켜낸다. 그리고 그녀는 음모와 배반의 소용돌이를 지나온 그녀는 자신이 영국과 혼약을 맺은 '버진 퀸'임을 선포한다.이 과정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처음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구교와 신교의 싸움은 엘리자베스, 그리고 그녀를 보필한 월싱엄 심지어는 메리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따라서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엘리자베스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이니까 주인공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그리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감독은 절제된 연출과 장면을 통해 그의 역할이 어디까지 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영웅 만들기의 영화가 아니라 역사를 충실히 재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영화에서 악역은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월싱엄은 엘리자베스를 보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와 영국을 위해서 행동한 것이다. 이런 월싱엄의 소망은 그녀와 월싱엄의 대사에서 잘 나타난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요? 돌덩이가 되어야 하나요?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지내야 하는 건가요?``예. 이 나라를 통치하시려면 그래야 합니다.``그런건 성모님이나 할 수 있어요.``사람들은 이 땅위에 또 한사람의 성모를 원합니다.`그 또한한 사람의 성모를 원한 것이고 그를 위해서 엘리자베스도 모르게 많은 험한 일들을 한 것이다. 또한 엘리자베스를 죽이라는 교황의 밀서를 가지고 있던 구교의 주교는 엘리자베스가 싫고 미워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구교, 즉 카톨릭이 행동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약속한 엘리자베스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영화에서는 영화 속의 인물들이 역사의 평가로만 규정지어진 정형화된 인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이었다. 우리가 소위 인간적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이 담겨져 있었다. 잔인한 장면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쟁이나 그 현실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그리고 영화가 엘리자베스, 이 한사람을 조명하고 있다면 우리가 엘리자베스라고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업적, 즉 그녀가 즉위 할 때만 해도 약소국이었던 영국을 강대국으로 만든 그녀의 업적을 조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가 영국과 결혼했다고 말하면서 그녀가 버진 퀸임을 선포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한 마디로 이 영화는 그녀가 왕위에 올라가기까지의 과정과 그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 그리고 신교과 구교의 갈등이 현실적으로 그려진 가운데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가 비로소 연약한 여자에서 굳센 국왕으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 담겨있다.영화 “엘리자베스”의3.역사적 의미(의의)영화 “엘리자베스”에서 그린 엘리자베스의 업적은 매우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그녀의 두드러진 업적 중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것,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무적함대를 만들어 영국을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만들고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른 부분 등 상당히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선녀여왕이라고 불릴 만큼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영국의 국력을 강화시킨 유능한 국왕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다른 업적까지 영화에서 다루었으면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 언급할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나타난 엘리자베스의 업적은 분열되어 있던 종교를 영국 국교회라는 종교로 하나를 만들고, 버진 퀸임을 천명하면서 영국의 기본을 탄탄하게 만드는 시작까지를 보여준다.
M. 스콧펙의끝나지 않은 길 을 읽고...한번 읽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읽었을 때는 어렴풋이 느낌이 왔다. 그리고이해가 안 가는 부분만 추려내어 읽고 나서야 대충 이해할 수가 있었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내용 이해보다는 교과서 같다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아마도 충고하는 듯한 책의 번역투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을 테지만 책의 내용이 그러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 그것이 이 책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내용을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난 후에는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줄을 그었다. 나는 사랑에 대한 내용 중 몇 가지강렬하게 다가온 부분을 집중적으로 말하고 싶다. 물론 대부분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특히나 앞부분은 처음 부분이라 그런지 더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부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성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필요성이 느껴지는 동시에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하길 꺼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울 수도 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와 사랑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의존에 대한 내용, 그리고 사랑의 행위에 대한 내용이 제일 관심 있게 다가왔다. 그러면 우선 사랑에 대한 정의 부분 부터 출발해 보는 것이 좋겠다.사랑. 좁게는 지금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가 될 수도 있고, 넓게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 중에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는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진정한 사랑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사랑은 일상에서부터 이상적 가치까지 아우르는 대단한 이념인 것이다. 나만 이렇게 사랑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 이다. 아마도 사랑은 자유나 평등과 같이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 중에 하나이니까 말이다. “사랑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입니다.” 이 문장은 스콧펙이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한 문장이다. 뒤에 나오는 수많은 내용을 이 한 문장으로 요약시켰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는 목적론적 정의와 사랑은 미묘한 순환과정이라는 것, 타인에 대한 사랑과 아울러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것. 그리고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음으로써만 자신을 확장시킬 수 있으며, 끝으로 ‘의지’라는 단어를 통해 욕구와 실제 행동을 구분 짓는 것을 저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히 규명 지은 후 사랑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로 빠져든다. 사랑에 빠지는 현상의 핵심은 개인적인 자기 영역 부분이 급속히 붕괴하여 자신의 자아가 남의 것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라는 존재와 함께 있었을 때처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퇴행행위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기간이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두 사람의 결합이 깨지게 되면서 별개의 두 개체가 다시 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의 사랑을 위한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이 때의 사랑을 거짓이라고 스콧펙은 생각한 것이다. 사랑의 환상이라고 불러두자. 진정한 사랑은 사랑한다는 느낌이 부족한 맥락에서 흔히 일어난다고 했다. 왜 이렇게 생각했는지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스콧펙은 위에서 분명히 '사랑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한..' 이라는 말을 했다. 사랑의 환상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성장을 가져다주지 않고 오히려 퇴보시킨다고 생각을 했다. 나도 사랑을 시작하는 첫 시기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온 몸을 지배하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스콧펙과 비슷한 의견이 생겨서 더더욱 공감하면서 이 부분을 읽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만 더 읽어보니 사랑의 환상이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의 사랑일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아까는 사랑의 환상은 사랑이 아니라 퇴보에의 의미라고 해놓고서는 말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는 그것이 바로 진실의 반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심오한 말인지 퍼뜩 머리가 굴러가질 않았다. 자기 경계의 확장 과정에서 자아가 점진적으로 발전, 확대된다면 이게 진정한 사랑이 될 수도 있단 말이었다. 사랑의 환상과 자신의 성장을 돕는 이성적 사랑이 결합된 것이 사랑이라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리고 스콧펙의 언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부분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부분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 사랑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볼 것이 아닌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이미 문제는 절반 정도 푼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이제는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완전한 사랑, 불완전한 사랑 등으로 나누며 "사랑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돕기 위해 자아를 확장 시키는 의지입니다."로 사랑을 정의 하고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면서 또한 사실상 진정한 사랑에 매우 가까운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우리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돼. 이 사람이 아니면 나는 살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에게 의존하려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의존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스콧펙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생존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그 사람에게 기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에는 선택도, 자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필요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선택의 훈련입니다. 그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 없이도 잘 살수 있지만, 상대방과 함께 살기로 선택할 때에 비로소 서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정말 이 말에 동의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누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법이 있는가? 스콧펙은 이 책에서 수동적인 의존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수동적인 의존증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를 열정적으로 좋아한다는 확신 없이는 적절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 또는 자기가 완전하다는 느낌을 경험할 수 없는 상태이다. 수동적 의존증인 사람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거나 상대적으로 자신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배반감을 느끼므로 항상 화가 나 있다. 누군가 날 확실하게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공허함을 느끼며 내가 돌보지 않아도 항상 날 챙겨주며 사랑해 주길 바라는 것은 수동적 의존증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수동적 의존증은 부모가 어렸을 적에 애정과 주의를 기울여 보살펴주지 않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강의 시간에 들었던 부분이 생각났다. 애착의 내용 말이다. ‘사랑의 심리학’ 강의를 들으면서 자주 접했던 내용이었다. 가정에서의 어릴 때 보실핌이 아이의 가치관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강의 시간에 이 부분에 대해 많은 흥미를 가졌다. 맞벌이가 대부분인 지금 아이에게 풍족한 사랑을 주기 위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보장에 대한 것과 머릿속에서 연관되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연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의 영향을 받아 사랑이라는 것을 나눌 줄 모른다는 사실은 숨기기만 하는 어른들이 강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 들었다. 사실 우리 집은 어렸을 적에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항상 내 옆에서 내가 원할 때 계셨고 나는 소위 말하는 ‘바람직한 보살핌’받았기 때문에 수동적 의존증은 적어도 나에게 해당되는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며 기르는 것의 의미는 '수동적 의존증' 의 의미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양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먹여주는 것 이상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며 정신적 성장을 길러주는 것은 본능이 지시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이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사랑을 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려 깊게 주고 사려 깊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나중에도 사랑을 줄 줄 모르는 부모가 된다. 그리고 악순환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도 안다는 사실은 사랑들이 짊어져야 할 숙명처럼 느껴진다. 사랑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나무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부모님께 사랑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더 베풀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오히려 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될 수 있는 것 같다.
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나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성차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페미니스트나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책이나 TV에서만 보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좋은 것 이구나’ 하는 단순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고 새 학년 새 학기에 나는 여성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나 자신이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이란 단어 뜻은 최소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듣게 된 여성학 강의는 의외였다. 내가 얼마나 성차별적인 문화에 젖어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여성의 낮은 지위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는지 스스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생각은 실로 진보적인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여성의 지위가 낮아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지위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말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아가던 중 교수님께서 한 가지 과제를 내주셨다.‘한국에 페미니스트는 있는가’제목부터 확 와 닿는 어떤 느낌. 그것은 책은 펼쳐보고 나서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있는가'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고 있는 6명의 필자들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페미니스트'로 선정한 8명의 인물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여기에는 필자들 각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고뇌, 그리고 혼돈스러움이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더욱이 대상인물에 대한 서술과정 속에서 스스로 변화되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엿볼 수도 있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있다. 내가 일상생활에서도 느낀 것이라서 특히 흥미로웠다.그 중 이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실 한국은 남아선호사상이 전통적으로 강한 나라가 아닌가.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남녀출산비율이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남자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그런 우리나라에 페미니스트라는 존재는 특별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나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책 앞부분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남자는 “내가 페미니스트인데-” 하고 말하면 진보적인 남자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여자는말할 때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하고 권리를 주장한다.사실 우리나라에서 여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압력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공무원시험에서의 군 가산점을 없애라는 주장을 하면 남성들의 가차없는 공격이 따른다. 이 공격은 대놓고 하지 않고 인터넷 상에서 그 주장을 한 여성에게 성적인 모욕을 퍼 붓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가져가려는 여성들을 달갑게 볼 리가 없다. 책에 나와있는 내용 중에 역사적인 맥락에서 페미니스트가 마녀로 오인받았던 부분에 대한 내용이 있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어떤 의미의 페미니스트 박해였다고 한다. 당시 마녀로 몰려 희생당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여성들이었다. 착한 여자는 정숙 신성하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남편에게 의존하는 현모양처를 의미한 반면 나쁜 여자는 공격적이고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남자의 보호를 거부한 여성들로, 현모양처의 반대 개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은 남자가 가지고 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쉽사리 권리를 놓지 않으려 하는 법이다. 그리고 여성은 희생자,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얻은 것이 많은 만큼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있는가?'라는 문제제기를 왜 하는지 그 동기와 의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나처럼 이런 패미니즘적인 책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궁극적인 질문이 아니라 할 수 없기 때문에 동기와 의도가 없는 점이 아쉽다. 그리고 제일 아쉬웠던 점은 이 것이다. 이 책에서 페미니스트라고 소개된 여성들은 하나같이 성공한 여성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나도 은연중에 ‘페미니스트=사회에서 성공하여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여자’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필자 중 한 사람이 비판하고 있는 바대로, "신 중산층 여성을 겨냥하는 슈퍼우먼 신드롬이 상품미학과 결탁하여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를 긴장시킨다. 힘겨운 가사노동은 전담하고 있는, 혹은 고된 공적 노동을 하고 여성들을 오히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소외시키는" 일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즘이 정말로 성공한 여성들의 전유물이라면 페미니즘은 여성학이 될 수가 없고 여성주의라는 말이 통용될 수 없다. 여성들은 남성의 밑에 억압되어 있다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생긴 학문이 여성학이다. 그런데 그런 여성학이 보통의 여성위에 존재하는 성공한 여성들의 학문이라면 우리는 여성학을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정의로움이라는 규범적 기반이 없이는 의미가 없는 이념이며 실천인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이들에게는 그 책임의 무게를 더욱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 감수성이 요구된다."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말하고 글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적 정직성과 정치적 책임감에 대해 항상 숙고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토록 남성중심적이고 상업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단순한 에피소드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조심스럽고 긴장된 행보를 내딛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해 페미니스트들에게 던져지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물음일 것이다.
여성학 - 학기말 페이퍼시각적 대중매체에 나타난 여성차별들어가기 전1.CF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광고를 본다. 미국의 한 광고회사에서 집계한 바로는 관심을 가지고 보든 아니면 스치면서 보든 그 광고의 양이 1인당 240개라고 한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광고에는 성차별적인 광고가 상당히 많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고 광고를 본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도 은연 중의 광고내용은 어느새 우리의 뇌리에 박히기 마련이다. 사실, 짧은 시간 안에 알리고자 하는 바를 알려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더 과장된 부분이 많은 것이 광고이다. 드라마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한 장르라고 한다면 광고는 리얼리티에 구속 받지 않고도 원하는 내용을 알릴 수 있다. 이런 것이 광고라는 걸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광고에서 성차별적인 내용이 드러날 가능성은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언론정보학생으로서 광고에서 나타난 성차별에 대해 알아보고, 좀 더 바람직한 광고를 생각해 보았다.광고에 나타난 성차별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마치 실제 생활에서도 성차별이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것처럼.①여성이 무능한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②여성은 집안일에만 매달려야 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은연 중에 풍기는 경우③여성이 시끄럽거나 목소리만 크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대상으로 묘사되는 경우④남성에 비해서 활달하거나 진취적이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분위기를 풍기는 경우이 밖에도 세세하게 나누자면 끝이 없다. 사실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된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광고가 이렇게 많은 지 새삼 놀랬다. 속히 여성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방식으로 매스미디어에서 먼저 성차별 의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연구 방법: 직접 CF를 시청하고 문제점을 찾아냄. 그리고 예전부터 말이 많았던 CF들을 중점적으로 연구 조사. 처음에는 차별적으로 묘사될 만한CF품목을 찾은 후 직접 CF를 보면서 문제점 발견. HYPERLINK 고 한다. 군대가 어떤 곳인지, 남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면 쉽사리 이런 광고를 찍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2. 디오스여자라서 행복해요. 여자와 냉장고는 어떤 관계인가 왜 송혜교는 냉장고를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인가. 남자와 냉장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인가. 사실 냉장고하면 부엌이 떠오르기 마련이고, 부엌일은 여자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이 디오스 CF는 그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 같다. 만약 이 CF에서 신혼 부부가 서로 기뻐하는 모습으로 나왔다면 ‘요새 부부들은 가사일도 공평하게 부담하는군.’이런 생각이 들어서 실제로 부부들의 가사일을 공평히 부담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왜 이 광고는 냉장고를 여자의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3. 백세주위의 두 사람은 부부이다. 광고를 보면 부인은 열심히 청소를 하고 분주히 집안을 왔다갔다 한다. 그러는 와중에 남편을 보면서 ‘빨래 좀 개어줘.’, ‘청소 좀 도와줘.’ 라고 하지만 남편은 듣는 척도 안 하고 뒹굴 거리다가 아내가 술을 사오라고 하니까 얼른 나가서 사온다. 이 광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그 술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게으른 남편을 나갔다 오게 만드는 것이다-뭐 이런 것 같다. 하지만 은연중에 여자만 집안일을 하는 모습은 마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안에서 희생당하는 여성이 보인다. 물론 희화스럽게 그 모습을 표현하긴 했지만 여자가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보인다.4. 스타우트이 광고의 컨셉은 ‘스타우트 = 남자의 흑맥주’이다. 강인하고 거친 남성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약간 씁쓸한 흑맥주의 맛을 나타내었다. 처음 TV에서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안 들었는데, 광고비평사이트에 가서 보니까 남자의 흑맥주라는 부분에 대해 상당히 많은 반발이 있었다. 주 고객층이 20대 남성뿐만 아니라 20대 남녀인데, 왜 남자의 흑맥주라는 컨셉을 이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왠지 거부감이 든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런 전략은 상품을 많이 팔기 위. 좀 더 적극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드러냈다면, 레쓰비의 이미지 또한 능동적인 여성의 이미지로서,적극적인 신세대- 이런 모토로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왜 하필이면 수동적인 이미지를 택했는지 아쉽다.◊ 대중문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자.현대를 대중문화 시대라고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TV나 라디오를 켜고 출근하면서 신문을 보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대중매체를 통해 보고들은 것을 가지고 이야기 꽃을 피우기 일쑤다. 집에서도 TV드라마가 아침 시간대에 주부들의 눈을 잡고 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가족들은 TV를 보는 것이 중요한 일과이다. 대중매체 없는 일상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쯤이면 대중문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대중매체가 등장하기 이전을 상상해 보자. 지금 우리가 대중문화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선조들은 어떻게 보냈을까? 우선 마을 사람들과 둘러앉아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누구네 개가 병이 났다 더라" 에서부터 시작해 새로 부임한 고을 관리 인물평까지 그 주제는 다양했을 것이다. 그러다 무슨 특별한 때라도 되면 각종 행사가 마을 단위로 펼쳐졌을 것이다. 밖을 나다니기에는 체면이 마음에 걸리는 양반들은 사랑방에서 책을 읽고 주안상을 앞에 놓고 시조 짓는 모습이 떠오를 법하다.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세상은 가족이니 마을이니 하는 것이 '문화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적어졌고, 그 자리를 대중매체와 대중문화가 대신 차지하고 있다. 대중문화란 말은 아마도 '넓게 일어나고' 많이 배우고 여유 있는 엘리트가 아닌 일반 대중의 문화' 라는 뜻일 것이다. 유한계급의 고급 문화가 그 시대를 대표했던 과거와 비교해 현대에는 보다 많은 사람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이런 대중문화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중매체를 타고 오는 문화의 내용이 그것을 보고 듣고 즐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염려이다.대중매체는 시설을이 문제가 되는가? 이런 내용들이 단지 한번 즐기고 마는 데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을 계속적으로 보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될 위험이 있고, 따라서 현재의 왜곡된 질서가 앞으로도 계속 재생산되고 심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할 때 대중문화를 보는 우리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이제 더 이상 TV수상기가 내보내는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즐기는 인형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 화면을 내보내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의 대중문화가 방송국과 신문 잡지사에서 만들어져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보고 읽는 우리도 그 내용을 만들어 가야 한다.이러한 자세를 키우기 위한 대중매체 수용자 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종교단체, 사회단체, 여성단체 등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가운데에서 YWCA, 여성단체협의회, 주부클럽연합회, 한국소비자연맹, 색동 어머니회 등 여성단체에서 주최가 된 교육이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교육의 내용으로는 수용자 교육의 필요성, 대중매체를 기술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내용(영상 언어의 이해, 인쇄매체의 기술적 언어, 매체산업의 구조 등), 광고의 문제, 매체와 가정생활, 대중문화의 속성과 문제점, 수용자 운동 등으로 짜여져 있다. 이외에,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에서는 'TV 시청일기쓰기' 프로그램을 개발해 학생과 부모를 대상으로 시행한 예가 있다. 이러한 교육은 단순한 의식계몽차원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모니터 사업으로 확장되는 추세이다. 강의와 실습을 통해 깨우쳐진 새로운 눈으로 프로그램을 새롭게 보고 분석해 내는 조직적 감시 활동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 모니터 운동은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YMCA나 여성단체협의회 등 단체가 중심이 되고 그 안에서는 주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모니터 결과를 보면 내용의 선정성과 폭력성화서울 여성영화제에서 나타난 여성영화를 알아본다.조각하늘은 여성 죄수들과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에 관한 이야기이다.공장과 감옥 사이를, 사적 입장과 정치적 입장을 오가며, 두 여인은 자신들 내부에 타협을 거부하는 힘이 존재함을 발견한다.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깨닫는다. 감옥에 수감된 조안나는 그녀를 구금시킨 자들의 권위에 도전한다. 한편 조안나와 과거에 우정을 나누었던 클로딘은 공장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조안나의 변호사는 그녀의 친구 클로딘이 왜 폭력 사태를 벌이게 되었는지 증언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노동조합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공장과 감옥, 사적 입장과 정치적 입장을 오고 간다. 조안나는 처음에는 흔들리지만, 마침내 자기 내부의 힘을 발견한다. 즉 그녀에게는 작게는 스스로의 존엄, 더 나아가 여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권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클로딘은 공장에서 자기가 투쟁을 이끌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나서 조안나와 의기투합한다. 그 후 노동조합이 클로딘에게 타협하라고 제안하게 되지만, 클로딘은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 두 여인은 타협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의 우정을 더욱 돈독히 다져간다.사랑은 트럭을 타고 극과 극은 통한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부유한 남성이 성장배경이 전혀 다른 말괄량이여성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 젊고 유능한 사업가인 앤드류는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마가리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길에 마가리타와는 정반대 성격인 안야의 트럭과 접촉사고가 발생한다.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후에 앤드류가 자신이 운영하는 운송회사의 큰 고객임을 알게된 안야의 초대로 두사람은 저녁식사를 하게 되고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물과 기름처럼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과연 난관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을까? 여인 3대로 설정한 안야의 가족과 이복 동생들, 자유분방한 어머니캐릭터 설정이 이 영화가 다른 로맨틱 코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