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별 언어학 연구의 현황심리언어학1.연구의 현황인간 정신활동의 중심인 언어의 처리가 뇌에서 일어나므로, 뇌를 직접 관찰하고 연구함으로써 언어 처리의 매커니즘을 밝히려고 하는 분야가 신경언어학(neurolinguistics)이다. 반면에 뇌와 신경을 직접 관찰 대상으로 삼지 않고, 언어 처리의 메커니즘을 행동과 기능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것이 심리언어학(psycholinguistics)이다. 심리언어학을 인간의 언어 처리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분야로 넓게 규정한다면, 신경언어학을 심리언어학의 일부로 간주할 수도 있다.1.1.실어증 연구1.1.1.뇌 손상과 실어증뇌의 언어 중추에 대한 최초의 발견은 1861년 브로카(P. Broca)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왼쪽 뇌의 앞쪽에 손상을 입은 환자가 말을 할 때 장애를 가지는 것에 주목하여, 왼쪽 뇌의 앞부분을 언어 중추로 추정하였다. 브로카 이름을 따서 뇌의 이 부분을 브로카 지역(Broca's area)라고 하고, 이 지역의 손상 때문에 말할 때 장애를 가지는 병(실어증 aphasia)을 브로카 실어증이라고 부른다.약 10년 뒤인 1873년 베르니케(C.Wernicke)는 왼쪽 뇌의 뒷부분을 다친 환자가 브로카 실어증과는 다른 종류의 언어 장애를 가짐을 발견하였다. 이 환자들은 브로카 실어증 환자들과는 달리 겉으로는 유창하게 말을 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어휘 선정에 문제가 있고,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보인다. 이러한 환자들을 베르니케 실어증 환자라고 하며, 베르니케 실어증과 관련된, 왼쪽 뇌의 뒷부분을 베르니케 지역이라 한다.브로카와 베르니케의 발견은 뇌의 좌우 두 개의 반구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이후 계속된 실어증 연구로 밝혀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오른손잡이의 경우는 대부분 왼쪽 뇌에 언어 중추가 있지만, 왼손잡이의 삼분의 일 가량은 오른쪽 뇌에 언어 중추가 있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에 비해 많지 않고, 또 왼손잡이들 중에도 왼쪽 뇌에 언어 중추가 있는 사람이 두 배로 많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언어 중추는 왼쪽 뇌이다.일반적으로 언어의 손상, 즉 실어증은 전반적인 인지 능력의 손상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실어증과 인지 능력의 손상이 같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두 가지가 독립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또한 언어의 소리를 내는 능력의 상실이 실어증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언어중추에 손상을 받으면 실어증 증상이 나타난다.1.2. 뇌 연구 방법1.2.1. 실험언어의 신경학적 기반을 이해하기 위해 뇌를 연구하는 방법은 실어증 환자의 뇌의 손상을 관찰하는 것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양반구가 분리된 특수한 환자에 대한 연구이다. 보통 사람의 뇌는 두 개의 반구가 뇌량이라는 신경 다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심한 간질 환자의 치료를 위해 뇌량을 절단하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 이러한 양반구 분리 환자에게 여러 언어 실험을 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왼쪽 뇌는 언어 기능 이외에 박자의 지각, 시간적 순서 인식, 수학적 사고 기능을 담당하고, 오른쪽 뇌는 패턴 매칭, 사람의 얼굴의 인식, 공간적 지각의 기능을 담당한다.실어증이나 양반구 분리 환자와 같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정상인을 대상으로 언어와 뇌의 관계에 대해 연구할 수도 있다. 피험자의 양쪽 귀에 다른 소리를 들려주고 들은 소리에 관해 들려주는 실험(dichotic listening)이 있다. 들려주는 소리가 언어일 경우 오른쪽 귀로 들려준 소리가 더 잘 인식된다. 오른쪽 귀로 들어온 언어 정보가 왼쪽 뇌로 전달됨을 고려할 때 왼쪽 뇌가 언어를 담당함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이다.1.2.2. 영상기기: CT, MRI, PET현대 의료기기의 발전은 뇌를 직접 시각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CT(computerized tomography),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PET(positron emission tomography)의 기술이다. CT(방사선 단층촬영)는 방사선을 이용하여, 그리고 MRI(자기공명영상)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뇌의 조직의 영상을 얻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면 뇌의 단면을 일정한 간격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영상은 실어증 환자의 뇌 손상 부위를 정확히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뇌의 활성화 부위를 파악하기 위하여 혈류량에 민감한 MRI영상을 얻는 기법을 특별히 fMRI(functional MRI)라고 한다. fMRI는 언어를 처리할 때 활성화 되는 뇌의 부위 즉 언어처리와 관련된 뇌의 부위를 직접 보여준다.PET(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은 인체에 무해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신체에 주입하여 혈류량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뇌에서의 혈류의 속도는 부위마다 다르므로 우선 기본적인 혈류량을 반영하는 영상을 얻는다. 다음 어떤 언어 과제를 수행하게 하면서 그 때의 혈류량의 영상을 얻는다. 두 영상의 차이가 나는 곳이 바로 언어 수행에 관계하는 뇌의 부분이다.1.3. 언어의 처리심리언어학의 연구에서는 뇌를 직접적으로 관찰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언어 처리 과정을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기능적으로 밝히는 것이 심리언어학의 목적이다. 언어 처리가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언어심리학은 이해(comprehension)와 산출(production)의 관점에서 연구되어 왔다.이해의 관점에서 보자면, 화자가 어떤 문장의 발화를 할 때, 청자는 음성을 듣고 그것을 언어의 소리로 파악한 다음, 단어를 인식한다. 이때 뇌 속에 있는 어휘에 대한 기억, 즉 머릿속 사전(mental lexicon)을 참조하게 된다. 단어의 인식 후에는 단어들의 연속체를 적절한 통사적 구조로 분석해야 한다. 결국 청자는 단어의 의미와 통사적 구조를 바탕으로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발화는 그 반대로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머릿속 사전을 참조하여 적절한 단어를 골라서, 적절한 문장의 구조로 만들고, 그것을 음운론적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소리로 만드는 과정이다.이상의 대략적인 이해와 산출의 과정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실험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심리언어학의 과제이다. 이해의 경우 음성인식과 관련된 많은 연구가 있고, 단어 처리와 관련된 연구도 많이 있다.1.4.언어 습득과 언어 이론언어심리학의 중요한 하나의 분야는 어린아이의 언어 습득 연구이다. 어린아이들이 옹알이와 두 단어 발화 과정을 거쳐 점차 복잡한 문장을 말하는 능력을 습득해 가는 과정을 언어학뿐만 아니라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장기간에 걸쳐 관찰하는 연구들이 많이 있다.어린아이들은 만 4~5세까지 접촉하는 언어를 모국어로 습득한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기간에 어린아이가 습득하는 언어는 어른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플라톤이 제기했던 문제가 생긴다. 어린아이들은 그 짧은 기간에 제한적인 언어 경험을 가지고 어떻게 그 복잡한 언어 체계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촘스키의 대답은 인간은 언어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서 바로 한국어나 중국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언어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일정한 시기에 적절한 자극(주변의 언어)을 받으면 하나의 완전한 언어를 말할 수 있게끔 하는 언어 유전자가 인간에게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새가 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만 새가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만 태어나자마자 걷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단, 언어 능력과 걷는 능력이 완전히 같은 성질은 아니다. 걷는 것은 태어나서 일정한 시기가 되면 자동적으로 발현되는 능력이지만, 언어의 경우 사람이 특정시기에 주변의 언어에 노출되어 그 언어를 배우게 된다. 즉, 어느 정도의 학습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의 언어 연구와 언어학자1. 고대 인도 언어 연구의 특성2. 고대 인도의 언어학자3. 결론1. 고대 인도 언어 연구의 특성고대 인도의 경우, 언어활동의 구성과 언어활동에 관련된 사유 작용의 구성이 특수하다.첫째, 다른 문화권 내에서는 그 기능 방식 자체가 언어와 용해되지 않아서 순전히 언어학적인 의미 작용 이론을 지니지 못했던 문자가 인도인들에게는 부차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둘째, 처음에는 문자가 부재하다가 후에 음성 문자가 된 사실을 통해 이것이 암시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즉 인도의 언어활동이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언어의 기능 방식이 의미의 장인 화자와 함께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 방식으로 정신화 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언어, 상징주의, 화자에 관한 아주 정련된 이론들이 발전하였다.셋째, 인도가 언어활동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인식은 인도 이론들이 소위 ‘완벽한’ 언어라 불리는 산스크리트어인 베다 문학 언어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 고대 인도 언어학은 그것이 해독해 내는 문맥으로부터 착상을 얻었고, 막 태어나는 학문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론을 설명하게 되는데, 그 이론은 신성한 텍스트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즉, 언어적 사유 작용이 신성한 텍스트들이 증거하는 종교적 인식에 직접 의존하며, 그 자체가 적어도 초기에는 텍스트의 일부였다.2. 고대 인도의 언어학자2.1. 파니니 문법B.C 4세기경의 학자로 파니니는 산스크리스트어의 형태 뿐 아니라 음성 구조까지 세세히 다룬 여덟 권의 책을 남겼다. 산스크리스트어에서 문법의 격은 특별한 지시 기능을 지니지 않고 프라타마라는 수치 표지에 의해 나타나는데, 그 유형의 표시는 의식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종교적 텍스트에서 인용되는 예식 표현들과 끊임없이 관련을 맺는 인도 문법은 언어의 음소에 대한 복합 이론을 제시한다. 소리, 조음, 소리와 의미의 작용관계가 그것이다. 그에 관련한 용어학에 의하면, 소리는 말의 의미인 진동의 실체를 보장하는 물질로 간주된다. 즉 음절akasara은)에서 왔다. 음소varna는 처음에 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음소들은 모음과 이중 모음을 동반하는 자음들의 조음 방식과 조음점에 따라 분류되어, 바르가스 vargas라 불리는 다섯 계열의 상관관계를 형성했다. 종교적 의미 전달과 인간 육체에 대한 복합 이론과 관계를 지니는 세세한 조음 작용 이론이 나와 음소들의 생성 기관으로서의 입술(열린 것과 닫힌 것), 혀와 이와의 관계, 성문, 허파, 코(비음) 등의 여러 움직임들을 구별해 냈다.2.2. 파타냘리의 스포타 이론파니니의 언어 음소에 대한 복합 이론을 기초해 만들어진 스포타sphota 이론은 우선 파타냘리patanjali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파타냘리는 기원후 초기의 학자로 파니니가 소리들을 드바니(담화) 또는 스포타와 구별했다면 파타냘리는 스포타를 근본적으로 구조로 생각했다. 즉, 파니니가 담화 또는 스포타를 길고 짧은 모음들을 지닌 글자들의 모태로 간주한 반면, 파타냘리는 스포타를 일련의 길고 짧은 자음과 모음들, 또는 로 본다.어떤 철학자나 문법학자들은 스포타라는 용어는 단어 자체가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원형prototype을 지시한다고 간주한다. 다른 이들은, 스포타가 총체 내에서 나타나는 단어의 소리로서 글자들의 결합과는 무관한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한다. 즉 스포타는 글자들의 배열 내에서 한 단어가 확실하게 지니는 소리가 아니라 나누어질 수 없는 전체 내에서 재융합된 소리 또는 그에 대응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발성이 되면 소리들을 각각 순서대로 나타나지만 스포타는 단어의 모든 소리들이 조음된 후에야, 즉 형태적 총체의 소리들이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의미와 함께 발성이 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 어원적으로 볼 때 스포타는 을 의미하며 따라서 스포타는 의미가 파열하고, 터지고, 싹트고, 생성되는 곳이다.2.3. 바르트라리의 스포타 이론스포타 이론은 5세기경 파니니 학파 이론의 기초가 될 업적을 이룬 바르트라리Bhartrhari에 의해 발전하였고 많은 변화를 겪었다. 바르트라리는 스포타를 로 개념과 의미를 다원적으로 한정하는 소리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므로, 결국 스포타는 더 이상 발음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실체론자가 아닌 그는 움직이는 현실에 대한 성찰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변형 현실주의에 대해 증거하며 스포타가 무한히 나뉠 수 있는, 그래서 변형될 수 있는 이 우주의 최소 단위임을 논증한다.소리들은 들을 때 또는 말할 때, 아니면 그 두 경우 모두에 하나의 장치를 만들어 낸다. 이 세 명제들 내에서 표현 이론 지지자들의 견해가 나누어진다. 정신 집중이나 안약 등은 단일 감각 기관 내에서만 장치를 만들어 낸다. 반면, 향을 맡으려면 요구되는 것은 대상 속에 있는 장치이다. 시각이 접촉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면, 빛은 대상과 기관에 동시적으로 장치를 만든다고 생각된다. 소리의 경우도 그 과정은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소리와 스포타가 동시에 감지된다고 간주된다. 다시 말해, 소리가 감지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소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사람들도 있다.소리/의미 작용(소리/말)의 양분과 동일한 과정, 행위, 움직임 속에서 이 둘이 지니는 밀접한 의존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말이 소리에 의해 명확해지면, 그 고유한 형태는 그 말의 파악을 돕는 묘사될 수 없는 들에 한정된다. 소리의 진동들에 의해 생각이 싹트면, 그 생각은 마지막 소리와 함께 완성되고 말이 결정된다. 존재하지 않는 중간 음성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청자의 무능력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이해의 수단들에 불과하다. 차별화 작용의 흔적은 끊임없이 말을 파악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말은 그 배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지식은 알아야 할 대상에 근거한다. 마찬가지로 처음 수들에 대한 이해는 다른 더 큰 수들 -비록 그것들이 서로 다를지라도-에 대한 이해 수단이며 또한 외에 다른 음성 요소들을 듣는 것도 그 알고자 하는 음성 요소들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이다. 서로 확실하게 다르기 때문에 각각 글자, 단어, 문장들을 드러내는 그 음성 요소 사물을 보게 되면 잘못 보고 다른 것으로 생각하듯이, 한 문장이 나타나면 그 표현 동기들에 따라 우선은 생각에 부분적으로 나누어진 형태가 주어진다. 우유와 배아가 변형되기 위해서는 고정된 순서가 있듯이, 청자의 생각 속에도 고정된 순서가 있다. 비록 부분들을 지닌 것이 생각 그 자체였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의 형태 분할은 소리들의 연결 순서에서 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기보다 오히려 생각은 부분들로 분할되어 있지 않고 생각 그 자체이며, 부분들로 분할되어 있다는 가상은 이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인도 문법에 대한 위와 같은 성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있다.① 바르트라리에게 소리(기표)는 의미(기의)의 단순한 외표가 아니라 배아 상태로부터의 산물이다. 현대 언어학은 이제 겨우 의미 구성에서 기표가 행하는 역할을 고찰하기 시작한다.② 의미 작용은 하나의 과정이다.③ 따라서 형태론(바르트라리는 이를 중간 음성 요소라 부름)은 존재하지 않으며, 담화의 부분으로의 분할은 거짓된 외관일 뿐이다.④ 의미 작용은 배열된 통사론, 즉 고정된 연결 질서이다.우선, 바르트라리는 통합이라는 이론적 경향을 동반하는 발화행위를 구분하고 체계화하려는 분석적 배려를 하였다. 드바니는 소리 연쇄의 연속적 요소들이다. 언어 체계는 엄격한 질서에 따라 연결되어 드바니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 스포타를 나타낸다. 만약 드바니가 들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라면 스포타는 분배를 통해 인식이 가능한 것, 즉 이다. 바르트라리에게 의미 깊은 그 행위는 끊임없이 나누어질 수 있다. 그것의 최소 단위들은 음소가 아니다. 인도 언어학은 서양의 음운론보다 그 역사가 길며 그 소리 연쇄가 끊임없이 항상 더 작은 요소들로 나뉘는데, 그 더 작은 요소들은 너무나 작아서 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언어 자료의 분해는 실제로 끝이 없다. 현실, 특히 언어 총체의 끊임없는 분할(문장, 단어, 소리)이 만들어 냈을 언어 현실의 을 치유하기 위해 바르트라리는 앞에서 언급한 불연속성과는 다르면서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스포타를 공존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이 단어와 문장 속에서 원자들의 단위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언어활동에서 스포타는-음성적인 동시에 의미를 지니는 -끊임없이 차별화되는 것의 단위이다. 우리는 그 용어에 의해 그리고 그 용어 안에서 작용하는 변증법을 주목하게 될텐데, 그 변증법은 거기서 주축이 되어 이제는 움직이는 것으로 간주되는 언어활동이 변화로서의 현실과 만나게끔 한다. 즉, 스포타가 있음으로 해서, 언어활동은 과정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위, 움직임이 되며, 기표는 기의 속에 스며들어 활동하는 의미를 만든다. 그 유동성은 현실 세계의 행위를 반영한다. 고립되기를 거부하는 의미 작용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연속-불연속의 현실을 일정 거리에 두고 뒤쫓는다.스포타 이론은 문장 이론에서 그 유사성pendant을 발견할 수 있다. 바르트라리 이전에는 인도 문법은 명사와 동사를 구분하면서 품사 분류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구별의 적정성에 대한 논쟁이 문법학자와 철학자들 사이에서 연속적으로 여러 번 행해졌다. 거기서 두 견해가 이끌어진다. 구별을 지지하는 형태론적 견해와 그 품사들 간의 차이점이 언술 내의 기능에 의해서만 나타나므로, 원칙적으로 구별을 하지 말자는 이론적 또는 통사론적이라 할 수 있는 견해가 그것이다. 파타냘리는 형태론적 입장을 유지하여 단어를 네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 그는 라고 쓰고 있다.바르트라리는 그와 같은 형태론적 견해를 버리고 문장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그것은 문장이 하나의 과정이므로 그것만이 의미의 완전한 현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단어들은 문장 구조 밖에서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다시 말해 통사론은 단순한 형태적 위치 변경이 아니며, 용어들은 언술 전체에서 그들이 지니는 관계를 제외하고 존재할 수 없다. 의미에 현실을 부여하는 것이 통사론이다. 스포타의 차원을 넘어서서 담화의 큰 단위들을 다루는 종합적 접근 방법이 바르트라리 이론의 특징이다. 따라서 그는 명사/동사 구별을 반대한다. 그에게 각 문장은 비록 명사/송다의 두 번주들이 명확히 나타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요약)1. 세계관의 차이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다. 이는 대체로 일관성 있고 의식적으로 견지되고 있으며 옳은 근본적 전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전제들은 일반적으로 각자가 의문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끼리는 서로 언급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의 도전을 받을 때만 생각나는 전제들이다.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다음의 일곱가지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을 살펴보는 것이 있다.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가 무엇인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인지, 인간의 사망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지, 도덕의 기초는 무엇인지,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두 가지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답이 너무 명확하므로 저런 질문 자체가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이다. 반면 다른 한 부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거짓이나 지적 자살 없이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 분명 하나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나 그들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그들이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편협하고 단순한 사람들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또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세계관이 질문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 답을 회피하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나 회의주의로 나타난다고 해도 그 또한 하나의 세계관임은 분명하다.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살아가는 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수밖에 없다.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당신은 당신의 세계관을 전제로 세상을 재단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과연 당신의 세계관이 무엇이며, 타자의 세계관론에서 인간을 귀중한 존재로 보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유사하고, 비록 타락했지만 원래의 존귀한 존재로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인간의 선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결정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자유를 선택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창조주에게 불순종하는 길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창조주와 맺었던 인격적 관계는 파괴된다. 이 행위의 직접적 결과는 아담과 이브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그 후손들을 긴 세월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게 만들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구속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무한한 은총에 의해 인간 회복의 길을 열어놓으신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태도와 행위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구주뿐 아니라 주님으로 영접하면 된다.구속받은 인간은 훼손된 형상이 회복되어 모든 부분에서 실질적인 회복을 누린다. 영화된 인간은 완전히 회복된 자로서 하나님, 이웃 그리고 자신과 화평을 누리게 되나 영화는 죽음과 부활 후에야 이를 수 있는 상태이다. 영화된 인간은 정화된 인격체로 변화되어 하나님 그리고 그 분의 다른 백성과 교제를 나누는 인간이다.2.6.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과 함께 누리는 생명의 문이든지, 인간의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 주실 유일하신 분과 영원히 갈라서는 문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하나님은 인간에게 섬길 대상의 자유를 주셨다. 그리고 인간의 선택은 영원히 그 영향을 미침을 ‘지옥’을 통해 명확히 보여준다. 사망시 인간은 변형된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받아들인 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피조물로서 영원의 평원, 즉 천국에서 살게 된다. 그렇지 않은 자는 영원히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존재로 변하여 분리된 두려운 외로움 속에서 거하게 된다. 그것이 지옥의 본질이다.2.7. 윤리는 긴장 상태는 이신론을 매우 불안정한 세계관으로 만든다.3.5. 윤리는 일반 계시에 국한된다. 우주는 정상이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 준다.자연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한 자연계는 타락하지 않았다는 이신론의 전제는 현재의 현상계의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게 된다. 이 세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의 반영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신론은 윤리적 측면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옳다’는 윤리 파괴의 입장으로 귀결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옳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선이므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윤리는 사라져버린다. 사람은 끊임없이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살며, 그 누구도 이신론에서 말하는 윤리관의 기초 위에서 살 수 없다는 점에서 이신론은 비실제적인 세계관으로 판명된다. (물론 모든 이신론자가 이와 같은 윤리적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며 이 주장을 한 알렉산더 포프 역시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이신론은 주요 세계관으로서는 비교적 일찍 사라진다.3.6. 창조시에 역사의 과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다.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로 자연 속에서 구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이신론자들에게 강조점은 일반 법칙들에 부여된다. 하나님은 개인에 대해, 인류 전체에 대해 무관심하며 우주는 그의 재조정에 대해 완전히 닫혀있으므로 역사는 직선적이다.4. 유한한 우주의 침묵: 자연주의4.1.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의 전부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자연주의에서는 우주의 본질이 그 중심 요소이다. 우주는 초월적 존재와는 무관한 하나의 궁극적 실재로 ‘신’이나 ‘창조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無)에서 무(無)가 나온다.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전부터 무엇인가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초월적 창조자가 아닌 우주의 물질 자체이다. 자연주의자들은 우주의 모든 물질은 어떤 형태로든 수 있는가이다. 자연주의자에게 윤리는 단지 인간만의 영역이므로 자연히 어떻게 자기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라는 존재와 가능(can)의 영역에서부터 당위의 역역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자연주의자들은 윤리 체계를 세우려고 매우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자연주의자들의 윤리적 통찰에는 타당한 것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기독교 유신론자들도 수긍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비록 타락했지만 그 형상이 파괴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부분적으로 방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5. 영점(零點): 허무주의5.1. 첫 번째 다리 : 필연과 우연자연주의가 허무주의로 넘어간 첫 번째 이유는 자연주의가 인간에게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주의 제 1명제의 논리적 귀결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의식적이며 자기 결정력이 있으므로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자유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단지 외관상으로만 그럴 뿐이다. 만일 우주가 진정으로 폐쇄되었다면 우주 활동이란 단지 내부에서만 통제될 수 있으므로 변화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설명만이 가능하다. 즉 반드시 현재의 상황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것은 다른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활동은 이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폐쇄된 우주를 전제한다면 이런 연결이 존재한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또한 폐쇄된 우주에서 어떤 것은 필요없고, 다른 것은 필요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변화를 일으킬 힘의 운동이 있을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초의 동인에 대한 무한 연쇄의 고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유로운 행위자로 생각하는 인식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즉, 폐쇄된 우주에서 자유란 인식되지 않은 결정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기 결정력과 도덕적 책임에 필요한 자유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에야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자신을 스스로 빚어갈 것이다. 이처럼 인간만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기 전에는 인간이 아니고, 인간만이 자기 의식과 자기 결정력을 통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든다. 주관 세계는 모든 주관적 존재, 즉 모든 사람이 시키는 대로 된다.6.1.3.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두 번째 명제로부터 인간은 완전히 자유롭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주관 세계의 왕이다. 인간은 객관 세계에 매이지 않고 내적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가치를 긍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가치는 내부적인 것이고 그 내부는 각 사람 자신의 내부인 것이기 때문이다.6.1.4.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 세계는 인간과 대립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객관 세계는 본질적으로 법과 질서의 세계, 즉 거기됨(thereness)의 세계이다. 따라서 주관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원하는 존재로 빚어나가는 인간에게는 객관 세계가 부조리하고 소외된 세계로 보인다. 객관 세계에는 질서가 있으나 주관 세계는 질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그저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이방인’과 같은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이 이 사실을 용인하는 법을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더 빨리 소외를 극복하고 절망을 통과하게 된다.인간에게 가장 극복하기 힘든 궁극적 부조리는 죽음이다. 인간은 주관으로 남아있는 한 자유로우나 죽음은 인간을 단지 많은 객체 중 하나로 만든다. 그러기에 카뮈는 인간은 항상 부조리에 직면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비존재(非存在)로서의 경향을 인식해야 하며 또한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의 확실성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6.1.5. 객관 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반대를 하는 진정한 인간(authentic person)이 반란을 일으키고 가치를 창출한다.실존주의는 바로 이 점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있다. 진정한 실존의 삶
변별자질(Distinctive Feature)1. 변별자질이란2. 변별자질과 영어의 모음3. 변별자질의 타당성과 장점1. 변별자질이란변별자질(혹은 음소자질: distinctive feature)이란 한 음소를 다른 음소와 구별지어주는 하나의 자질을 말한다. 즉, 음소 분립(分立)에 관여하는 음성자질을 변별자질이라 한다.두 개의 의미의 변별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두 음 사이에 어떤 음성적 차이가 있어야 한다. 최소대립어 seal[sil]과 zeal[zil]은 [s]와 [z]가 영어에서 변별력을 가지는 음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s]대신에 [z]를 넣으면 단어의 의미가 변하기 때문에 이들 음은 한 음소의 변이음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은 상보적 분포를 이루지도 않는다. 둘 다 어두에서 모음 [i]앞에 온다. 그러므로 이들은 두 개의 다른 음소 /s/와 /z/의 변이음이다. [s]는 무성음이고 [z]는 유성음이므로 이 두 단어를 구별짓는 것은 유 ? 무성의 음성자질이다. 이처럼 유 ? 무성은 영어(및 그 밖의 여러 언어)에서 특별한 역할을 한다. 이 자질은 또한 feel, veal의 [f]/[v]와 cap, cap의 [p]/[b]를 구별지어 준다. 이처럼 하나의 자질이 한 음소를 다른 음소와 구별지어 줄 때, 이것을 변별자질이라 한다.두 단어가 한 자질만 제외하고 음성학적으로 똑같을 때, 그 음성자질은 변별적이다. 왜냐하면 이 차이만으로 의미의 변별성, 즉 의미차이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2. 변별자질과 영어의 모음영어에는 14개의 모음(vowel) 음운이 있다.음운부호예/i/seat/I/sit/e/say/?/said/æ/sad/?/(비강세=/?/)suds(sofa)/?/sod/u/suit/?/soot/o/sewed/?/sought/??/sight/??/south/??/say이들 모음은 다음과 같이 발음기관이 생리적 기준에서 기술된다.혀의 높이: 모음이 발음될 때는 반드시 혀의 높이와 관계가 있다. 즉 혀가 상대적으로 높은가 아니면 낮은가 또는 중간 정도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따라서 고모음(high vowel)/i ? u ?/, 중모음(mid vowel)/e ? ?(?) o/, 저모음(low vowel)/æ ? ?/이 구별된다.혀의 위치: 모음이 발음될 때는 반드시 혀의 위치, 즉 혀의 앞 부분 아니면 뒷 부분과 관계가 있다. 여기에 따라서 전설모음(front vowel)/i ? e ? æ/과 후설모음(back vowel)/?(?) a u ? o ?/이 구별된다.원순성: 모음이 발음될 때는 두 입술이 앞으로 둥글게 약간 나오든지 아니면 반대로 양쪽으로 펴진다. 여기에 따라서 원순모음(rounded vowel)/u ? o ?/과 평순모음(spread vowel)/i ? e ? æ ?(?) a/으로 구별된다.긴장성: 모음이 발음될 때는 발음기관의 근육이 긴장하였는가 아니면 늦추어지는가와 관계가 있다. 여기에 따라서 긴장모음(tense vowel)/i e u o ?/과 이완모음(lax vowel)/? ? æ ?(?) a ?/으로 구별된다.전설front후설back평순spread원순 roundi ?u ?e ??(?)oæa?위의 도표는 영어의 모음 음운을 네 가지 생리적 기준, 즉 혀의 높이, 혀의 위치, 원순성, 긴장성에 의해서 분류한 것이다. 예를 들면, /i/는 고, 전설, 긴장, 평순모음이고 /?/는 저, 후설, 긴장, 원순모음임을 보여주고 있다.위에서 본 모음 음운은 실제로 그 이상 더 작은 단위로 분할되지 않는다. 그러나 음운론에서는 설명한 네 가지 기준에 의한 자질feature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어떤 자질이 있고 없음을 각각 +와 -로 표시한다. 예를 들면 /i/는 혀가 높기 때문에 [+high]이고 /?/는 혀가 낮기 때문에 [+low] 혹은 [-high]이다. 이러한 자질을 변별적 자질(distinctive feature)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위 도표 모음들은 다음과 같은 4가지 변별적 자질로 나뉘어진다.[±high][±low][±back][±tense][±round]여기서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은, /i/와 /?/를 예로 들면, /i/와 /?/는 그 자체가 단위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여러 자질의 묶음이라는 점이다./i/ = [+high] /?/ = [-high][-low] [+low][-back] [-back][+tense] [+tense][-round] [+round]이와 같이 /i/와 /?/를 변별적 자질의 묶음으로 봄으로서 우리는 /i/와 /?/가 어떻게 다른가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즉 /i/와 /?/는 tense는 같으나 high, low, back, round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음운을 변별적 자질의 묶음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음운 현상을 가장 경제적으로 기술하고 설명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우리가 모음을 실제로 발음할 때, 발음기관이 어떤 모양을 취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i/가 긴장모음이고 /?/가 이완모음인 것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음운이나 변별적 자질이라는 것은 음운론에 있어서의 이론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음운은 추상적인 것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seat와 sit의 모음을 듣고 그것을 각각 다르게 지각하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추상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변별적이라는 것은 분절음이 어떤 기준에 따라서 다름을 설명하기 위해서 설정된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음운이나 변별적 자질이 비록 생리적 용어에 의해서 기술되지만, 그것은 심리적인 실체인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생리적으로 발음하지만, 언어학자는 그것을 변별적 자질로 이루어진 음운으로 해석하는 것이다.3. 변별자질의 타당성과 장점변별자질의 이론적 타당성과 장점을 한 둘 고찰해보자. 어느 한 집에 가족 열 명이 살고 있다고 하자. 또 어느 다방에 들어갔더니 열 사람이 앉아 있었다고 하자. 같은 열 사람씩의 집단이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다방의 열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유기적 관계가 없는 반면, 한 집의 열 사람 사이에는 부모, 형제, 자녀 등과 같은 유기적인 인척관계가 있다. 말소리는 다방의 고객과 같지 않고 한 집안의 식구와 같다. 말소리들 사이에는 유기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t]는 [p], [k], [b], [d], [g] 등의 소리와 같이 파열음이라는 계열을 이루는 한편, [d]는 [s], [z], [n], [l], [r] 등과 같이 치경음이라는 계열을 이룬다. 이렇게 같은 계열에 속하는 소리들을 자연음군(natural class)이라고 하는데, 음운규칙은 자연음군에 의하여 작동되고 자연음군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느 언어에서 파열음이 두 모음 사이에서 마찰음으로 바뀐다 하자. 혹은 치경음이 전설고모음 앞에서 구개음화된다는 규칙이 있다고 하자. 이럴 때, [p]나 [g]만 마찰음으로 바뀌고 나머지 파열음은 불변한다든가, [t]와 [l]만 구개음화되고 나머지 치경음은 구개음화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등의 산재적인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저 음운규칙은 한 자연음군에 속하는 모든 어음에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변별자질은 그 하나하나가 자연음군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sonorant]는 모든 공명음을 가리키며, [-voice]는 모든 무성음을 가리키고, [+nasal]은 모든 비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변별적 자질로의 음운규칙 기술은 그만큼 더 자연스럽다는 말이 된다. 혹자는 “무성음이 유성음이 된다”는 식의 종래의 서술이 [-voice]→[+voice] 식의 변별자질에 의한 기술과 다를 게 없지 않느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어음을 변별적 자질로 명세할 경우, 한 자질의 +/-를 바꿀 때 다른 자질들은 고정불변하므로 [-voice]→[+voice]라는 규칙은 [p]를 [v]로, [s]는 [z]로, [f]는 [v] 등으로 바꿀 뿐이지만, “무성음이 유성음이 된다”라는 서술에는 반드시 이러한 대응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p]가 [z]로, [s]는 [b]로, [f]는 [n]으로 바뀌어도 “무성음이 유성음이 된” 경우들이기 때문이다. 어음을 더 작은 음성자질의 구성으로 보기 전에는 바로 위의 예와 같은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한 음운현상을 자연스럽고 가능한 음운현상과 체계적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어음들 자체가 최소단위로서 공기의 분자처럼 다른 어음들과 동등하고 독립된 관계를 지니고 있다면, [p]가 [b]로 되는 것이 [p]나 [a]로 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아무런 이론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하고나 남남관계인 다방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 누구하고 더 가깝고, 누군 누구보다 더 멀다는 식의 관계를 찾아볼 수 있을까?
『치즈와 구더기』를 읽고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시이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대동하지 않았을까?....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을 누가 냈던가?- 브레이트는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브레히트의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에서 보는 의문은 별반 낯설지 않다. 위인전, 역사서를 읽으며 누구나 한번쯤은 무명의 ‘그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리라. ‘이름’이 남는 개별자로서의 역사적 존재 대부분은 ‘영웅’이라 칭해진다. 이러한 ‘영웅’과 ‘범인’의 사전적 정의는 실재 자체에 입각한 구분인가 자의적인 구분인가. 혹 ‘영웅’과 ‘범인’의 뛰어넘을 수 없을것만 같은 간극은 역사적으로 가공된 관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아마도 브레히트의 시에 등장하는 노동자가 ‘푸코’의 사상을 안다거나 ‘푸코’와 비슷한 사유 방식을 지녔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했을 것이다.푸코는 인간의 이성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각 시대의 인식 구조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이러한 인식 구조는 또한 각 시대의 권력 매커니즘에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푸코의 견해에 따른다면 브레이트의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의 ‘노동자’나,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의 ‘메노키오’는 ‘책 읽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주체적으로 재구성’ 함으로써 시대의 무의식적 사유 구조인 에피스테메의 모순을 자각한 훌륭한 선각자요 사전적 의미의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각각이 ‘사전적’ 의미의 ‘영웅’의 정의를 만족시키는지를 가늠해 보았을 때, 그 평가조차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차치해 두기로 한다.)그러나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를 참고해 본다면 당시의 ‘사료’의 내용 자체에서 그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심문기록 속의 메노키오는 치즈 속에서 구더기가 생겨나듯 천사나 신도 우주의 초기 물질에서 생겨났다는 이단적인 주장을 하는 무명의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에 불과하며 이후 미시사가인 진즈부르그가 그를 재조명해주기 전까지 그의 이름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에 실재했던 평범한 ‘작은 사람들’, 그러나 이제는 역사의 그늘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간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규범화시키 연구 경향이 미시사이다. 미시사가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상층의 지배문화와 하층의 민중문화 사이의 간극을 밝히며, 그 사이의 갈등과 대립과 절충의 관계를 밝히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진즈부르그 또한 미시사적 접근으로 16세기 당시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갈등을 논하며 무명의 ‘16세기의 한 방앗간 주인’을 마치 니체처럼 ‘미래에 속한 자 메노키오’로 되살려 놓는다.거시사가 아닌 미시사가 지니는 장점은 여러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역사를 조망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 미시사와 전체적 조망이 가능한 거시사가 상보적 관계의 틀 안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거시사와 미시사를 생각하며 강대국과 약소국, 그리고 한반도와 얽혀있는 간도와 독도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강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그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이 따를 소지가 클 것이며, 따라서 그렌디가 ‘이례적 정상’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을 것이다. 세계사 또한 강대국을 중심으로드렌디가 말하는 ‘이례적 정상’이라는 모순적 어법처럼 보이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미시사에서 대상으로 삼는 개인의 역사는 그늘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 간 보잘것없는 주변부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지배계층에 의해 ‘비정상’이라고 규정되기에 오히려 자신이 속한 사회환경이나 계급문화를 ‘정상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 . 또한 지배계층은 사회적 현실을 조직적으로 왜곡하려 하므로, 이런 의미에서 하급계층에 대한 기록을 조작한다. 따라서 지배계층에 의해 만들어진 다량의 공식 자료보다는 하층계급 출신의 목격자나 피의자가 긱접 남긴 말의 기록은 예외적이고 양이 만힞 않다고 할지라고, 그들의 사회현실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