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John Locke, 1632-1704)가 제시한 '정치적 저항권'에 관 해 연구 보고]정부의 해체와 사회의 해체정치적 저항권(혹은 정부의 해체)을 옹호하는 로크의 이론이 『통치론』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로이드 토마스(D.A. Lloyd Thomas)는 『통치론』의 목적이 반란을 정당화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통치론』에서 소유권이나 자연상태에 대한 논의가 인민의 저항에 대한 논의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게 된 것은 서구 유럽이나 미국의 실제적인 역사적·정치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즉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후에, 그리고 영국에서는 로크가 살던 시대 이래 무장한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사람들은 『통치론』에서 인민의 정치적 저항권에 부여한 로크의 강조점을 간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실제로 이곳에서의 통치 혹은 법에 대해 저항하는 정치적 경험은 반란의 형태가 아니라 시민 불복종의 형태가 중심이었다.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나 영국에서 참정권 운동이 시민 불복종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시민 불복종이 비록 법을 위반하는 것이긴 하지만 통치의 부정이나 정부의 전복을 목적으로 행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반란 혹은 혁명과 구분된다. 애쉬크래프트(R. Ashcraft) 역시 로크 정치 이론의 결론을 '왕에 대한 인민의 저항권을 합법화'하는 것으로 보고, 로크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가를 추적하고 있다로크는 먼저 사회의 해체와 정부의 해체를 구분한다. 로크에게서 이때 사회란 정치사회를 말하며, 정치사회가 곧 정부를 뜻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를 구성하고, 산만한 자연상태에서 나와 하나의 정치사회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각각 다른 사람들과 하나의 단체를 결성하여 일체로서 행동하기 위해서, 곧 하나의 독립된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맺는 협정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결성된 정치사회가 해체되는 유일한 방식은이 아니다. 인민은 그들의 낡은 제도를 버리는 것을 이처럼 지체하거나 꺼리므로, 현재는 물론 과거에 이 왕국에서 일어난 많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 귀족, 평민들로 구성된 예전의 입법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분노에 찬 봉기로 몇몇 군주의 머리 위에서 왕관이 벗겨진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들이 그 왕관을 다른 왕가로까지 옮긴 적은 결코 없었다."로크는 인민에게 저항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세 가지 근거를 더 제시한다. 인민들이 비참한 상태에 떨어져서 자의적인 권력의 남용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발견하면 인민에게 정치적 저항권을 부여하든 부여하지 않든, 인민들은 가만있지 않는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학대를 받으며 권리를 유린당하고 있는 인민은 기회가 닿기만 하면 언제나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부담을 벗어 던지고자 한다. 그들은 그러한 기회를 간절히 바라며 추구하는데, 그러한 기회란 인간사가 변하기 쉽고 어리석음과 우발적인 사고로 충만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반드시 닥쳐오게 마련이다."인민에 의한 혁명은 사소한 잘못이 있을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통치하는 편에서의 커다란 과오, 많은 잘못과 폐단을 야기하는 법률, 인간적인 약점에서 비롯되는 모든 사소한 비리에 대해 인민들이 반항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를 감당한다. 그러나 만약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된 남용, 속임수, 술책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일한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통치자의 의도가 인민들에게 뻔히 보이게 된다면, 그리하여 인민들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면, 상황은 달라진다.입법자들이 인민의 재산을 침해함으로써 그들의 신탁에 반하게 행동할 때, 인민이 새로운 입법부를 세워서 새롭게 그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반란에 대한 최선의 대비책이라고 로크는 주장한다."왜냐하면 반란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오직 정부의 제도와 법률에 근거를 데, 이 상태에서 이전의 모든 유대는 취소되며, 그 밖의 모든 권리가 중지되며,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침략자에게 저항할 권리가 있다. 로크는 군주에 대한 모든 저항이 반란이 아님을 분명히 강조한다(232절). 무질서를 야기하는 것,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고자 정당한 정부의 구조와 틀을 전복시키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죄악이라고 단정짓고 나서(230절)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무력으로 대항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며, 이는 자연법이 허용하는 것이라고 옹호한다(233절)."정당방위는 자연법의 일부이며, 그것이 왕 자신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해서 공동체에게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왕에게 재차 복수하는 것은 결코 그들에게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연법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왕이 특수한 몇몇 개인들에게 개별적인 증오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우두머리인 국가 전체에 대항하여 참을 수 없는 학정을 통해서 인민 전체 또는 그중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폭정을 자행한다면, 그런 경우에 인민은 단지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의 군주를 공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민은 그들이 입은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지만 어떠한 도발에 대해서든 적절한 존경과 존중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재 진행중인 공격을 격퇴할 수는 있지만, 과거의 폭력에 대해서 복수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우리의 생명과 신체를 방어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열등한 자가 우월한 자를 처벌하는 것은 자연에 반하기 때문이다. 인민에게 기도되고 있는 위해를 인민은 그것이 행해지기 전에 방지할 수 있다."이처럼 인민을 최고의 주권자로 볼 때 앞서 이미 언급한 정당한 인민의 저항에 대한 로크의 약점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로크의 저항권 이론은 '정치 체제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될 때 훨씬 현실적이고 강력한 이론이 될 것이다.결론적으로 로크에게 각 개인이 사회에 들어갈 때 그 사회에 양도한 권력은 사회가 존속되는 한 태에서 인간은 투쟁적이지도(악하지도) 도덕적으로 성숙하지도(선하지도) 않다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평화롭고 행복했으며, 인간의 불행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제도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크의 견해로서의 인간의 자연상태는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본다(처음에는 성선설을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성백지설을 주장하게 됨.) 따라서 인민은 사회 계약인 정치적 동의를 통해 국가를 이룬다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의 국가관과는 다르다. 홉스는 모든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지만 로크는 자연권, 보존권 등을 양도할 뿐 인민은 저항권을 지니며, 인민적 자유권(소유권)을 지닙니다. 즉, 이는 국가는 언제나 인민의 저항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로크의 생애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1632년 영국 서미싯(Somerset) 주의 링턴(Wrington)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해는 곧 발발할 내전에서 처형당할 운명의 찰스 1세의 지배가 7년 째되는 해였고, 홉스가 아직 그의 주요 저작을 완성하기 전이며, 스피노자가 태어난 해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작고 초라한 생가는 그의 외가였다. 로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청교도적인 상인 가문 출신이었는데, 아버지 쪽은 의류업에, 어머니 쪽은 제혁업에 종사해온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머싯주 치안 판사들의 법률 대리인이자 서기로서 평범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내전 당시 의회군에서 복무하기도 했는데, 로크는 아버지의 상관이자 당시 유명한 정치가였던 포프햄(Alexander Popham)의 후원에 힘입어 웨스트민스터 학교(Westminster School)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크는 1652년에 옥스퍼드의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Christ-Church College)로 진학하였으며, 학위를 취득한 후에도 줄곧 연구원으로서 그곳에 머물렀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로크는 성직자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고 안정되고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의학에 관심을 가지고은 바로 화농성 간 종양으로 몸져 누워있던 애슐리 경(Lord Ashley)의 외과 수술을 집도하였던 것이다. 이 수술은 성공확률이 매우 낮은 것이었음에도 로크는 이를 훌륭히 완수하여 애슐리 경의 생명을 구하였다. 애슐리 경은 후일 새프츠베리 백작(Earl of Shaftesbury)이 된 인물로서, 이후 30년간 파란만장한 영국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로크의 운명도 자신의 후견인의 격동적인 운명과 함께, 그리고 1683년 새프츠베리가 죽은 후에는 그가 이끌던 광범위한 정치적 집단의 운명과 함께 부침을 거듭하게 되었다. 수술을 계기로 로크는 애슐리 가의 고문 의사직을 제의 받았고, 이를 수락하여 런던에 있는 애슐리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 인해 로크는 정계의 중심부와 직접적인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곧 애슐리 가에서 의사 이상의 직분을 떠맡게 되었고, 애슐리 경이 관여하고 있던 많은 정치적 활동에 관해 조언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667년에 로크는 『관용에 관한 시론』(An Essay concerning Toleration)을 저술하는데, 그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아마도 새프츠베리와 교분을 맺고 있었던 데서 직접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복고적인 영국 국교회주의에 맞서 비국교도에 대한 관용을 새프츠베리가 지속적으로 지지한 것과 로크가 관용과 출판의 자유를 위해 활발하게 공적·사적 캠페인을 벌인 것 사이에는 동기적·내용적 연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이 상당한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후일 『관용에 관한 서한』(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에서 훨씬 정교한 형태로 제시된 견해의 실체를 이 글을 통해 예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 글의 서두에서 자신의 정치이론의 핵심을 간결하게 압축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관용에 관한 시론』에서 정치권력의 유일한 목적은 사회성원들의 선(善), 안전 및 평화를 실현하고 보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목적이 정부활동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혹은 차선의 국가헌정체제로서 폴리티(polity)의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Ⅰ.아리스토텔레스1. 인물 특성(연대기)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 북부 스타기라에서 BC 384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민타스 2세에게 고용되었던 의사였으며, 프록세노스라는 후견인에게 그를 남겨놓고 죽었다.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그는 의사가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세 때인 BC. 367~366년에 아테네에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플라톤이 죽자(BC. 348) 그의 조카 스페우시포스가 그 학파의 수장으로 임명받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아시아의 연안에 위치한 아쏘스로 옮겼다. 그는 헤르메이아스의 조카딸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였다.BC 342년경에 필립 왕으로부터 13세의 어린 알렉산더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초대받은 그는 마케도니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뤼케이온(뤼케이온이라 불리는 아폴로 신전 옆에 있었기 때문에)또는 페리파토스(차폐물이 있는 도로라고 알려진 새로운 학교를 창립했다.그러나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BC. 323)은 아테네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런 와중에 마케도니아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은 협력자로 고발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건하지 못한 글들을 썼다는 죄로 고소당했다. 그는 어머니의 출생지였던 에우보에아에 있는 칼시스의 마을로 은퇴했다가, 여기서 곧 병이 들어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BC. 322) 그는 슬하에 피티아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같은 이름의 딸 피티아스와 그녀가 죽은 후 헤르필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니코마코스를 두었다.이를 연대기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B.C. 384년 그리스의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게이라에서 출생B.C. 366년~348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학원에서 수학B.C, 348년 헤르메이아스왕의 초빙으로 아소스로 이주B.C. 343년~340년 알렉산드로스의 궁정교사B.C. 335년 아테네에서 뤼케이온 학원 건립B.C. 322년 칼커나 동시에 잘못된 결정을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 없다.”)그러나 그는 다수의 우월성을 절대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집단의 권력행사는 수의 횡포라고 보고 이런 관점에서 다수결의 원칙에 대해 반대한다. 그렇다고 해서 위에 본 바처럼 다수의 긍정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상황에서 적합한 다수의 정치를 옹호한다. 이것은 다수의 우월성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한다는 의미로서 법의 지배와 연관된다.법이란 개인이나 소수의 권위에 지배하지 않고 관행과 관습에 기초를 두어 시민들 사이에 정해진 약속이다.“법이 정체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져야지 정체가 법들에 맞도록 만들어질 수는 없다”)여기에서 보듯이 법은 정체의 기원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나 입법자가 법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법은 완전무결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자의적인 의사에 따라 예측할 수 없이 행해지는 정치양태보다는 법으로 미리 정해진 바에 따라서 예측 가능한 정치생활을 향유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낫다는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법이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치에 야수적인 요소를 첨가시키는 것과 같다.“ 폴리티는 이런 정체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다수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체제로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안정성이 유지되는 체제이다.두 번째는불평등문제를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절하게 해결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유제 비판에서 사유와 공유의 공존을 언급하여 공산체제의 장점과 사유재산체제의 장점을 결합할 것을 주장한다. 지나친 사유화는 부의 편중을 초래하고 일방적인 공유제는 극단적인 평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정치체제에서 경계해야 하고 해결하기 위해 폴리티를 제시하였다.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에는 과두정과 민주정을 단순히 수에 따라 분류하기 보다 재산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민주정과 과두정을 빈부의 기준에만 의거하여 구별하는 것은 수에만 따라 구별하는 것 이상으로 좋지 못하다고 하여 「정치학」통치를 할 수도 있고 통치를 받을 수도 있으며 군사적 능력을 갖고 있는 한 집단의 사람”)이러한 중간계급은 몇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첫째, 극단에 속한 사람들은 이성에 따르기가 어려운데 비해 중간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이성에 가장 잘 따른다. 둘째, 중산계급은 다른 계급의 사람들에 비해 야망이 상대적으로 적다 야망은 군사적인 영역이나 혹은 시민사회 영역에서 국가에 위험을 초래한다. 셋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산계급이 주도권을 갖고있는 국가에서는 극단적인 민주주의나 폭군정치가 나올 확률이 적다고 보았다. 중간계급이 클 경우는 시민들 사이에 분열 또는 파벌이 생길 가능성이 가장 적고 정체가 안정된다. 이것이 민주정부다 과두정이 수명이 길고 더 안정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중간계급은 폴리티의 안정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 아울러 보수성을 나타낸다. 중간계급은 일정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재산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중산계급이 주된 기반이 되는 폴리티는 자연히 보수성을 띌 수 밖에 없다.3)폴리티의 단점단점은 참으로 찾기 힘들 만큼 그의 이론은 정교하다.그의 기본분류에 의하면 정체는 군주정, 귀족정 및 법치적 민주정으로 구분되며 이것이 각각 타락하면 참주정, 과두정, 빈민정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2천 수백년 전 희랍 도시국가라는 소규모 국가에서 관찰된 것이며 특징적인 그의 분류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그는 개성 또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인간의 본질은 금,은,동이 구별되듯이 우열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출생과 교육으로 결정된다. 신 앞에서의 평등, 그럼으로써 법 앞에서의 평등 사상은 기독교의 전통이며 오늘날 민주주의 사상의 근본적 요청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와 평등사상에는 이러한 전통이 결여되어 있음을 이해하여야 될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근본이념인 자유와 평등의 이론은 절대적인 것이며 제도에도 반영되고 있다. 우리는 이 절대적 신념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카데미아에 있을 때 또는 그 직후 아소스에서 지낼 때 집필된 것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가 플라톤의 강한 영향 아래에서 어떻게 독자적인 사고체계를 구축해 나갔는가에 대한 탐구는, 이 두 철학자 사이에 형성된 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것이며,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이다. 그 밖에 자신의 연구 기초자료를 모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저작이 19세기 말 출토된 파피루스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아테네인의 국제(國制)》 등이 그것이다.2)논리학인식이란, 객관적 실재가 인간의 의식속에 반영되는 형식의 하나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인식을 체계화시키는 데 필요한 논리적추리형식으로서 3단논법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쌓았다. 또한 양상논리(樣相論理)의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이 측면에서 그의 논리학의 의의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논증과학이란, 정의에 의해서 조정되는 특정한 유적(類的) 존재를 공유의 원리를 이용하여 파악하고, 그 종류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현상을 3단논법을 사용하여 논증해 나가는 절차이다. 즉, 논증과학의 구조를 3단논법을 적용하여 분석하고 3단논법을 형식논리학에서 공리화(公理化)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우선 수학적인 방법으로 분석을 시도하였으며, 나아가 이것을 경험과학에도 적용할 수 있는 논증과학 일반의 방법론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공리는 모든 논증과학에서의 고유의 원리와 개별과학에서의 고유의 원리(定義?定立命題)로 구별된다. 개별과학에서의 공리는 개별과학의 대상을 한정하고 그 위상을 조정(措定)한다. 정의?정립명제는 감각에 주어진 소여사실 속에 부여되어 있는 것을 이성이 직관(直觀)함으로써 찾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일정한 소여사실을 으로서 한정하고 있는 제1의 근거인 것이다.3)자연학운동하고 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 연구를 자연학이라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4가지 원인을 들었다(四因論).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생기는 소재(素材) ② 형상인(形相因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있지만, 이것은 사람에게 단지 잠깐씩만 허락되는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활동에 있다. 인간의 행동을 언제나 이성적 질서에 적합한 상태로 발현시키기 위한 힘으로서, 영혼 속에 있는 지속적 상태가 기량(器量;德)이다. 기량은 영혼의 정동적(情動的)인 부분에 있어서는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간을 유지하는 성향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항상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정의(正義)의 성향 속에서 끝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각각의 행위에서 실현되려면 개별적 상황에서의 이성적 질서의 판정을 필요로 하며, 그것에는 영혼의 이성적 부분의 기량인 의 움직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성향과 이성에 있어서의 2가지 기량이 갖추어졌을 때 인간의 기량은 완성되어 인간공동체 속에서 사랑이 실현된다.6)정치학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며, 인간의 선은 공공생활 속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구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교대로 통치자가 되는 곳에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국제(國制)가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체제론은 뛰어난 민주주의적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7)시학(詩學)창작의 본질은 모방(미메시스)에 있다. 즉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지는 과정을 모방하여 관객에게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일으켜 이를 통해 관객의 정서를 정화(catharsis)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고 하였다.8)자연과학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것은 자연과학에 관계되는 것이다. 《자연학》 《천체론》 《생성?소멸론》 《기상론》 《우주론》 《동물발생론》 《동물부분론》 《동물운동론》 《동물지(動物誌)》 등이 있다. 그 범위는 물질계의 보편적 여러 조건이나 우주의 구조 등에서부터 지구상의 동?식물 및 그 여러 기관(器官)에 대한 기술 등, 존재하는 거의 모든 것에 이르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포함하여 시하였다
-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質的) 공리주의와 벤담의 양적(量的) 공리주의를 비교하시오.-[벤담의 공리주의]벤담은 그의 저서인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에서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어 왔다. 우리들이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지시하고, 또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고통과 쾌락뿐이다. (Bentham, 1981:47) 고 말함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즉, 인간의 행동은 고통과 쾌락에 의해서 결정지어 진다고 생각하였다.그는 그의 공리주의이론)을 「공리성의 원리」(principle of utility)에 입각하여 전개하고 있는데, 그는 공리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공리성의 원리란 그 이익이 문제되어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가, 또는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 경향에 의하여....모든 행위를 시인하고 부인하는 원리를 의미한다. (Bentham, 1981:48)) 이는 모든 행동의 적합성은 그 행동이 당사자의 이익을 증가시키느냐 또는 감소시키느냐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공리성의 원리는 단순히 개인의 행복의 증진에만 관여된 것이 아니라 벤담이 그의 저서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Bentham, 1988:3)) 라고 말했듯이 다수의 행복의 증진에 관여되어 있다. 또한 그는 “어떤 행위가 사회의 행복을 증대시키는 성향이 그것을 감소시키는 성향보다 큰 경우에, 그 행위는 사회전체에 대해서 공리성의 원리에 또는 줄여서 공리성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로버트 하일브로너, 2001))라고 말하며 사회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옳은 행위라고 보았다. 여기서 사회의 이익이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하나 하나의 이익의 총계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벤담은 공리성의 원리 아래에서 옳은 행위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사회적 쾌락을 동시은 행위인지 그른 행위인지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만이 비로소 해야 함, 옮음, 그름, 혹은 그와 유사한 용어들이 의미를 갖게 되며, 달리는 가질 방도가 없다." 라고 했다.(Ibid, p19)) 위와 같은 벤담의 말들에서 우리는 벤담이 쾌락주의적 공리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는 약간의 모순 점이 있다. 그가 최대다수를 강조하는지 최대행복을 강조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대다수를 강조하게 되면은 소수자의 행복이 다수자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수 있고, 최대행복을 강조하게 되면은 다수의 행복이 소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버스 정류장을 만드는데 2사람이 100이라는 만족 도를 가지는 곳과, 50명이 2라는 만족 도를 가지는 곳이 서로 경합하고 있다면 최대다수를 강조한다면 50명이 2라는 만족 도를 가지는 곳에 버스 정류장을 설치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수자의 행복이 다수자의 행복에 의해 희생 될 것이다. 그러나 최대행복을 강조한다면 2사람이 100이라는 만족 도를 가지는 곳에 버스 정류장을 설치할 것이고, 다수자의 행복이 소수자의 행복에 의해 희생 될 것이다. 이렇게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충돌할 경우의 해결책은 벤담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벤담은 쾌락은 한 가지 종류밖에 없으며, 쾌락과 고통은 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으며 단지 양적으로만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쾌락은 양적인 차이만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행위1을 두 사람이 했을 때 개인당 유용성이 100이고 총합은 200이라고 하자.그리고 행위2를 50명이 했을 때의 개인당 유용성이 2이고 총합은 100이라고 하자. 이러한 경우에 벤담은 유용성의 총량이 더 큰 1번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벤담의 양적쾌락주의이다. 벤담은 또한 쾌락은 동일한 척도에 의해 양적으로 측정 계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이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으로서 이후에 더 이상의 다른 쾌락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성향을 갖는 쾌락이 선호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기준은 쾌락의 순수성으로서 어떤 쾌락들 중에서 고통과 섞이지 않고 일어나는 순수한 쾌락일수록 보다 더 선호된다는 기준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의 기준은 쾌락의 범위로서 쾌락을 누리는 사람의 수가 많은 것일수록 선호된다는 기준이다. (황경식, 1985:112~113) 이 가운데서 첫 번째, 두 번째는 현재 느끼고 있는 쾌락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세 번째,네 번째는 장차 느끼게 될 쾌락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고 다섯 여섯 번째는 행위 또는 사건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가치 기준이다. 그러나 당사자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일 경우에는 일곱 번째의 적용범위까지도 고려해야한다.(J.S 밀(2002)) 벤담은 이러한 쾌락측정방법을 사용하여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적용하여 산출한 후 합산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쾌락을 측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쾌락측정방법으로는 쾌락을 정확하게 계산해 내기 어렵다.(김완진외, 1996:23)) 왜냐하면 우선 여러 기준들 가운데서 시간측정이 가능한 지속성이나 근접성 등은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들마다 판단의 기준이 다를 수 있는 강도는 지속성만큼 정확한 측정이 어려우며 확률의 문제와 관련된 확실성의 기준도 그 측정이 용이하지가 않으며 먼 미래의 결과들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다산정의 측정에 이르면 거의 불가능한 일에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 기준이 상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J.Rawls, 1971: 557)) 한 예로 폰 노이만과 모겐스턴은 열이론의 예를 들어서, 초기에는 신체적 느낌에 의존하여 온도를 대략적으로 측정하였으나 온도계의 발명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앞으로 정확한 쾌락측정기가 개발되면 수량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von Neumann and Morgenstern, 1944, Sec.3.4).그러나 이러한 쾌락측정기는 현재은 비판이 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를 수 있는데 그런 점은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쾌락의 능력이 유사하다고 가정하였기 때문이다.[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質的) 공리주의]벤담의 양적 공리주의는 쾌락의 양이 동일하다면 압핀과 시가 똑같이 좋다는 벤담의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벤담의 말에 따르면 쾌락은 종류나 질에 상관없이 양만 같다면 어떤 쾌락이든 같다. 압핀으로 아이의 엉덩이를 찌르는 쾌락이 시를 읽는 쾌락보다 절대 낫다고 할 수 없지만 양이 같다면 이 둘의 쾌락은 동일해야 한다. 밀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행동들이 행복을 증진시키는 경향에 비례하여 옳고, 행복의 반대(불행)를 산출하는 경향에 비례하여 그르다”(J.S. Mill,1962: 257)고 주장한다. 이는 벤담의 주장과 동일하다. 즉, 밀도 기본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벤담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돼지에게나 합당한 철학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대하여 밀은 “어떤 종류의 쾌락은 다른 것보다 바람직하고 가치 있다.”(J.S. Mill,1995: 174)고 주장하였다. 쾌락의 양과 관계없이 시는 압핀에서 느끼는 쾌락보다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나으며 만족한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J.S.Mill,1995: 175)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모든 쾌락을 양적 크기로 환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벤담주의적 쾌락계산론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공리주의 윤리학에 관한 밀의 설명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1863)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책에서 밀은 “인류의 선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들은 여전히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시와 같은 세련된 쾌락과 맥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천한 쾌락 사이의 선택에 직면한 어떤 교양 있는 사람은 언제나 전자를 선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공리주의』))그리고 “공리성밀이 겪은 정신적 위기의 또 다른 결과는 벤담의 윤리학이 매우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이는 벤담의 이기주의적인 쾌락주의를 버리는 것이 공리주의 전체에 대해 더 적은 손해를 끼칠 것이라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벤담은 인간을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본다. 자기의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동들이 최대다수의 행복을 이끌어낸다고 한다. 이게 이기적 쾌락주의이다. 밀이 정신적 위기이후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그를 거부했다는 말은 벤담의 이기주의적 쾌락주의를 버린다는 말이고 이기주의적 쾌락주의를 버리는 것이 공리주의 전체를 봤을 때 손해가 더 적다는 의미다. 밀은 벤담의 계승자로서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J.S.Mill, 1995: 181)을 인정함과 동시에 벤담을 비판하며 다양한 종류의 쾌락을 가정하는 질적 쾌락주의를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밀의 공리주의는 “질적 공리주의”로 불린다. 즉 고상한 품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양적으로 많다고 하더라도 저급한 쾌락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밀의 질적 공리주의의 요체이다.(J.S.Mill, 1995: 218))그러면 질적으로 높은 쾌락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의 결정은 질적으로 낮은 쾌락과 높은 쾌락을 다 경험해 보았고 또 평가할 줄 아는 쾌락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모두 경험을 쌓은 자’의 선호에 근거한다.) 행복에 도취된 백치는 분명히 그 자신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지만 지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활이 백치로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생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설사 백치가 더 행복하다고 양보한다 하더라도 결코 백치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밀에 의하면 이런 우월한 능력이 ‘품위감’이다. 인간은 단순히 쾌락의 양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언제나 질적으로 우월한 쪽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고상한 인간에게는 행복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 질 .
[마키아벨리의 비르투(Virtu)-포르투나(Fortuna) 개념의 연관성에 관해여]들어가는말기독교세계관이 담긴 용어 중 “100% 노력, 100%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노력이 100%라 할지라도 신의 허락이 아니면 어떤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역으로 신이 100% 축복을 한다하더라도 인간의 노력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마키아벨리의 비르투(virtu)와 포르투나(fortuna)의 개념 역시 이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흔히 기독교계에서는 마키아벨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회주의적인 처세가로 악명 높으며, 그의 대표작 “군주론”은 오랜 시간 기독교의 금서였다. 기독교세계관과 일치한 듯싶으나 기독교계의 원성을 불러일으킨 마키아벨리는 많은 부분 작위적인 글들로 오해를 받아온 듯하다.1) 로베르토 리돌피(1899~1991)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한번도 기독교인이기를 거부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반사제주의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기독교계에선 무신론자처럼 보이게 한 원인일 수도 있거니와 한번 새겨진 그에 대한 편견이 몇 백 년이 지난 필자에게까지 이어져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하여 이 글은 마키아벨리가 원래 주장하고자 한 비르투와 포르투나의 의미가 인간과 정치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비교 설명하고,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포르뚜나와 비르뚜]1. Fortuna의 개념(1)마키아벨리 이전의 포르투나마키아벨리는 인간사에 있어서 개입해 들어오는 일종의 우연적이고 불가해하며 때로는 불가항력적으로 보이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의 이론에서 포르뚜나라는 인격화된 여신의 이름을 빌어서 등장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등장하는 비르뚜와 포르뚜나라는 용어는 마키아벨리가 고안 한 것도 처음 사용한 것도 아니며 그 연원은 고대 로마의 사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인들이 섬기던 제신 가운데 하나인 포르뚜나는 운명의 여신을 뜻하며 이 말은 우연의 의미보다 어떤 거대한 힘에혹은 보상을 내려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인간의 성품, 덕, 기예를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더 나아가 포르뚜나가 인간보다 선재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미지의 힘이 아니라 인간에 부속된 하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가 내려졌다.(2)마키아벨리의 포르뚜나무심코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포르뚜나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전지전능하고 완벽해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의 냄새가 풍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포르뚜나의 수레바퀴에 걸터앉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단지 포르뚜나의 바퀴위에 걸터앉아 있을 뿐이며 포르뚜나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비유를 하자면 엔진고장으로 조난당한 보트에 있는 사람은 운명의 여신 포르뚜나가 선사하는 배고픔, 추위, 폭풍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포르뚜나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기 마련이며 따라서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레바퀴의 맨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결국 포르뚜나의 변덕스러움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한 인간만이 수레바퀴의 맨 위에 앉아 있을 수는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없는 것이다. 결국 모든 성공은 이미 멸망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으며, 반대로 멸망은 앞으로 다가올 성공의 불씨로 타오를 수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있어서 영속적인 것은 없고,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이처럼 마키아벨리의 주장은 포르뚜나를 숙명으로 보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다음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인간은 포르뚜나를 원조할 수는 있으되 결코 포르뚜나를 훼방놓을 수는 없다.”마키아벨리가 사용하는 포르뚜나의 수레바퀴라는 비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포르뚜나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으로 이는 군주의 기존의 행위방식이 더 이상 변화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전까지는 한 군주가 견지하던 방식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으나 포르뚜나의 변덕으로 인해 더 이상 그러한 행위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포르뚜나는 인간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시민적 탁월성을 의미하는 그리스의 아레테 개념을 계승한 비르뚜스 개념은 키케로에 의해 잘 요약되었다. 『투스쿨룸의 대화』에서 교육의 이상을 논의하면서 그는 교육의 목적은 단지 일정한 정도의 기술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을 무색케 하는 단일 비르뚜스를 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비르뚜스를 시민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갖추어야 할 불가결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구체적으로 용기, 합리적 지혜의 개발, 감정의 통제, 공공적 의무에 대한 헌신 등이 이 당시 운에 대응하는 비르뚜스인 것이다.기독교가 전파된 이후로도 이 비르뚜스라는 말은 보에티우스가 세속적 삶에서의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포르뚜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비르뚜스라는 말이 갖고있는 로마적, 플라톤적 및 기독교적 함의를 부각시켰고 이로써 포르뚜나 및 비르뚜-포르뚜나의 양극성적 개념은 중세 성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 세계에서도 로마적 정치관념을 영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군주의 개인적 자질로서의 비르뚜의 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였다. 중세에도 군주의 자질에 관한 논의는 있었지만 대부분 군주의 기능의 종교적 함의에 대한 논의로 그쳤었다. 그러나 15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군주의 자질로서의 비르뚜가 논의되면서 그 정점에 마키아벨리가 있었다.(2)마키아벨리의 비르뚜마키아벨리는 비르뚜라는 말을 열러 가지 상황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는 것은 군사적 맥락에서이다. 닐 우드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비르뚜를 갖췄다고 보는 인물은 모두 53인인데 이 가운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솔론같은 현인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군대의 지휘관과 같은 전사였다. 물론 비르뚜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논의가 전사의 자질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군주론에서 논하는 비르뚜의 개념들은 12장에서 14장의 순수하게 군사문제만을 다루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전사의 자질로서의 비르뚜의 논의는 대부분 새로운 국가의 창건이나 유지에람들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어떤 군주가 선한 일만 하려고 고집한다면, 그는 위대한 업적 달성에 성공하기는커녕 십중팔구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앞에서 논한 필요성의 원리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는 현명한 군주는 무엇보다 필요의 지침을 따르게 될 것이다. 즉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선하지 않은 힘을 획득해야 하며 상황에 따라 언제 그것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현명한 군주는 가능하다면 올바른 일을 고수해야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올바르지 않게 행동하는 법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만약 군주가 국가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진실과 자비, 인간애와 종교에 반하여 행동할 필요가 있다.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는 포르뚜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항하는 비르뚜 역시 한가지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마키아벨리는 고대로부터의 전통적으로 여겨져 왔던 도덕적 관념에 반박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행동이 있는데 첫 번째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짐승에게 어울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종종 첫 번째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군주는 반드시 두 번째에도 의지해야한다. 따라서 군주가 알고 있어야 할 한 가지는 과연 어떤 동물을 모방하느냐이다.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만약 그가 짐승들 중에서 여우와 사자를 선택하고, 아울러 힘과 속임수의 필수적인 기술을 갖춘 인간다운 품위의 이상을 곁들인다면, 그것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고 조언한다. 이 개념은 마키아벨 리가 자신이 선호하는 역사적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셉티미우스가 매우 위대한 비르뚜를 지니고 있는 사내라는 점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는 셉티미우스는 포악한 사자와 교활한 여우의 위대한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 결과 만인이 그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존경하게 되었다고 덧붙인다.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보존하고자 할 때 비교적 사소한그러나 로마사론에 등장하는 비르뚜는 한 군주의 자질이 아닌 시민들의 비르뚜가 국가 전체의 법, 제도, 질서로 굳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한 군주의 자질로 영원히 지속되는 국가는 없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파멸에 이르는 한정된 비르뚜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비르뚜로 어찌할 수 없는 숙명론적 포르뚜나관과 비르뚜의 통제가능성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것이다.정리해보면, 마키아벨리가 표상하고 있던 포르뚜나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숙명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는 인간이 포르뚜나의 간계에만 매어있지 않고 이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자유를 확보해 나갈 가능성에 대해서도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것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2)포르뚜나라는 수레바퀴인간이 성공에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포르뚜나의 바퀴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포르뚜나의 바퀴가 돌아가는 것은 인간으로선 피할 수 없다. 수레바퀴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상황이고,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것은 그러한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행위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론』25장에서 지적한 것 처럼 그 전까지 인간이 견지하던 방식이 충분히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바뀜으로 해서 기존의 행위방식이 이제 쓸모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이러한 예를 우리나라의 사례에서 찾아보면 박정희의 몰락을 들 수 있다. 그는 해방과 한국전쟁이후 경제성장의 도약기에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적 격변기의 대통령으로서 마키아벨리 시대의 격변기의 이탈리아 군주와 비교된다. 그는 과단성과 결단력, 강한 실행의지와 같은 비르뚜를 갖추고 있어서 그 결과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뚜나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포르뚜나는 정치적 민주화요구라는 시대적 상황변화를 일으켰고 이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박정희는 피살됨으로써 결국 몰락하고 만 것이다. 수레바퀴의 밑에 깔려버린 것이다.마키아벨리.
[성 어거스틴의 기독교 실존주의에 대한 연구]1. 역사신학(Theology of History)성 어거스틴은 개인과 인간 사회 양 측면에서 역사를 연구한다. 그는 경험의 전세계를 역사의 연구 분야-지역사, 국가사, 공적 력사, 사적 력사, 정치사, 과학사, 철학사, 문학사, 과거와 미래, 시간과 영원-로 끌어들인다. 그의 인간 역사의 초상을 특히 그의 두 명작인 {고백록}(Confessions)과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사회 전체의 역사를, {고백록}에서는 개인의 역사를 다룬다. 그래서 포탈리(E. Portalie)는 기술하기를, "{고백록}은 한 영혼 속에 체험된 것으로서의 신학이요, 하나님이 개인 속에서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인간의 역사 체계 속에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신학이며,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은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한 명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종국까지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그러면 방법론의 관점에서 어거스틴이 역사연구를 위해 시도하는 연구방법의 기초는 무엇인가? 모든 실제적인 역사가들은 항상 어떤 분명하고 인식론적인 원리들에 입각해 일하고 그들이 인식하건 아니건 간에 역사철학을 지니고 있다. 인정을 받는 역사철학자들은 역사해석 작업에서 그들이 분명하게 수용하고 있는 원리들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받는다. 키이스에 따르면 한 인간의 역사철학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이라 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수 있다. 첫째 질문은 객관적인 실재를 믿는가 아니면 주관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느끼는가?이고, 두번째는 만일 객관적인 실재를 믿는다면 그 실재와 교통하는 접근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 두 도성의 개념은 {하나님의 도성}이 구성되기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플라토(Plato), 티코누스(Tyconus), 그리고 성서가 광대한 재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어떤 다른 가능한 자료-이교도적인 것이건 기독교적인 것이건 간에- 보다는 성서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마르쿠스(A. Marku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어거스틴은 "두 세계"에 대한 플라톤과 성서의 어조 사이에는 실질적인격차가 있음을 그의 생애의 아주 후반기에 깨달았다. 그때 그는 젊은시절에 그리스도의 나라(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18:36)와 프라토 형태의 지성적인 세계(Intelligible World)를 동일시했던 것을 거부하였다...이러한 발전의 첫째되는 주요 계단은 성서에의 몰두, 성직수임, 그리고특히 390년대 중반의 바울서신 탐독의 결과였다. 이것이 어거스틴으로하여금 점차적으로 구원 받은 자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에 대해단호한 시각(Vision)을 갖게한 근원(Source)이었다.두 거대한 사상의 흐름이 로마에서 서로 만났다. 즉 그리스-로마(Greco-Roman) 문화와 철학 전통 그리고 팔레스틴으로부터의 유대-기독교(Judaeo-Christian) 계시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 두 전통의 총아이며 이 두 사상조류를 깊이 들이 마시며 성장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자이다. 플라톤 및 신 플라톤주의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어거스틴의 정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은 플라토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철학에서 단지 헬라적인 요소만을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국가} 및 {법률}과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국가}는 인간의 철학적 사고의 구축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이 암시하는 바가 제거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신지식이란 필연적으로 실존적이고, 이성적이며, 신앙적이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a) 실존어거스틴의 첫째 관심은 신 아카데미파의 회의주의에 반하여 회의론자의 모진 의심이 전혀 뒤흔들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실존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Cassiciacum에서의 대화 앞부분을 상대자의 실존에 대한 의식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증명하는 첫째 단계로써 자신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추구하는 주체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하면 추구자 자신의 실존은 인식론적인 그리고 "나와 당신"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한 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신지식관에 따르면 자아 실존에 대한 확신은 진리를 향한 기초적인 예비과정이다.인간은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자신을 선택하는 실존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그가 인간의 자아인 자신의 실존을 무시한다면 신인관계성이나 신지식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참으로 인간은 그가 결정해야 한다는 면에서 력사안에서의 책임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아의식이 결정의 전제조건이다. 현대의 인기있는 실존주의는 인간의 자아인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입증해주고 있다. 신학이 자아인식을 무시하는 것은 자기패배행위이다. 실제로 금세기의 유명한 신학자들(예를 들면 R. Bultman, P. Tillich, etc.)은 이 자아인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었다.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자아실존을 신지식의 주체로 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쇼프(Ludwig Schopp)는 주장하기를, "어거스틴은 자아의식을 지식의 근본적인 기초로 수립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야말로 그가 이룩한 가장 큰 공로들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b) 이성(Reason)어거스틴은 하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라고말하듯이 권위만이 성서의 유효성을 인증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복음은 성서와 전통을 해석하는데 있어 반드시 추종해야할 최고의 규범이 된다. 포탈리는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신앙을 입증하는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성서에 의해서는입증되지 않지만(만일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이 있었을 것이다) 그 기초에서나 거룩성의 탁월한 경이성에 의해 입증되는 교회의 신성성을 성서(The Sacred Books)의 지식 또는 적어도 그 영감성 보다 앞에 둔다.그 다음에 그는 교회의 종교사상의 본질적 요소에서 신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카토릭 교회로부터 교회의 사명과 특권을 그에게 보다 명료하게 보여주는 신조와 영감된 책을 받는다.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이 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존재함을 가르치는 성서의 진리를 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던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성 어거스틴은 신앙에 입각하여 신지식의 근원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관계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믿으려면 이해하여야 하고 이해하려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 리는 "신앙에 이르는 준비단계를 고려함에 있어 이성의 선행적이고 마음의 귀의((Adherence)를 동반시키는 역할을 어거스틴 보다 정확하고 신중하게 주장한 사람은 없다. 그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성을 완전하게 잘 정돈하여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 어거스틴의 신인식(Religious Knowledge)의 관점은 방법론 상 폴 틸리히(P. Tillich)의 상관방법(Method of Corelation)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신인식(Religious Knowledge)은 권위와 조명(Illumination)을 통한 신앙과 은총의 신비스러운 만남의 접속점에서 생긴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팽이가 설 수 있는 것은 상관성의 원리에 입질서 및 발전을 지니고 있다. 인간 사회는 하나님이 부여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성어거스틴은 역사과정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섭리를 본다. 성 어거스틴은 우주의 과정에 대한 그의 심상(picture)을 묘사하기 위해 "신곡"(Divine Comedy)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는 역사과정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 보듯이 그 과정을 설명하는 모든 요소를 기독교에서 이끌어 낸다.기독교적인 신앙의 빛 속에서, 성 어거스틴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따라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직선적으로 계속 진행해 나가는 것으로 믿는다. "분명히 무질서는 없다. 창조, 이 땅에서의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사,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이 모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연극공연 전에 대본(Text)이 작성되었다"라고 키이스는 말했다.다시 말해서 성 어거스틴은 인간역사는 처음부터 종국의 마지막 심판까지 6장면으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두 도성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2. 예정(Predetermination)성 어거스틴은 역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목표점을 향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직선으로 진행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완전하게 창조된 우주는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고 섭리가 현명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우주의 과정을 행복이 넘치도록 예정되어 있는 목적지로 이끌어 간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의 경험 세계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은 지혜롭고 사랑이 가득한 섭리적인 계획 속에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들임을 서슴없이 믿었다"고 키이스는 기술하였다. 드라마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사건이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려진다. 시를 암송하는 사람은 암송의 시말 내내 그가 암송하는 순간인 현재와 암송을 마친 미래를그의 마음 속에 담고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영원한 현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 어거스틴의 역사관에서 역사의 필연성 혹은 불가피성을 볼 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