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왕 조사1. 프랑수와 1세 (FracnoisⅠ;1494-1549)프랑스 국왕(1515-47 재위). 코냐크 출생. 앙굴렘백작 발루아의 아들이며,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린다.1514년 국왕 루이 12세의 공주 클로드와 결혼, 루이 12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천성이 명랑하고 활발했으며, 낙천적이고 무인(武人)의 호방함을 지닌 한편, 기지와 우아한 감각도 지녔다. 즉위 초에 이탈리아에 원정, 밀라노를 손에 넣었다.1519년, 독일 황제의 선거에 출마하여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 5세에게 패배, 이어서 카를 5세에게 도전했으나 25년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싸움에 져, 포로가 되어 유폐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자 다시 카를과 전쟁을 벌여 싸움이 44년 화의 때까지 계속되었다.한편 왕은 이탈리아 학문예술에 심취, 루아르강변에 르네상스양식의 성관을 세우고 고전학자들을 초빙해 문예부흥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기도 하였으며,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가 공용어로 쓰이게 되었다.*이탈리아 원정 전쟁1521-44년, 이탈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벌어진 4차례의 전쟁.프랑스의 이탈리아침입은 15세기 말 샤를 8세의 나폴리진격에서 시작되었고, 다음 왕 루이 12세도 밀라노공국을 목표로 거듭 침입하였으나 처음은 독일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반격으로 좌절되고, 다음은 교황 율리오 2세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국내의 반프랑스 세력동맹의 반격으로 좌절되었다.루이 12세의 뒤를 이은 프랑수아 1세도 북이탈리아 진출을 꾀하여, 베네치아와 결탁, 1515년 마릴리아노의 싸움에서 승리해 밀라노공국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19년 막시밀리안 1세가 죽은 뒤 에스파냐왕 카를로스 1세가 프랑수아 1세를 격파하고 독일황제(카를 5세)로 선출되자 1521년 밀라노공국 탈환을 위해 군대를 진출시킴으로써 이탈리아전쟁이 시작되었다.제1차는 21-26년, 제2차는 26-29년, 제3차는 36-38년, 제4차는 42-44년에 있었다. 제 1차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프랑스에 있는 영국의 영토를 거의 되찾아 프랑스 국토통일을 실현하였다. 샤를 8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때 발루아왕조의 위세가 가장 컸는데, 강력한 경제정책과 행정기구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해서, 다음을 이은 부르봉왕조의 절대왕정을 준비해 놓았다. 비록 이탈리아전쟁은 실패하여, 이 전쟁 때부터 생긴 합스부르크왕가와의 적대관계는 이후 프랑스 왕정이 몰락할 때까지 지속되었지만, 이 전쟁을 통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아들임으로써, 왕조 말기에는 프랑스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 운동에 커다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2. 루이 14세 (Louis XIV ; 1638.9.5~1715.9.1)프랑스 부르봉왕조의 왕(재위 1643~1715)로서 ‘대왕’ 또는 ‘태양왕’이라고 불렀으며, 부르봉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생제르맹앙레에서 태어났다. 5세 때인 1643년 5월 14일 즉위하였으므로, 모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이 되고, J.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보필을 받았다. 이때는 30년전쟁과 관련된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하였으므로 국민들은 점차 반항의 기미를 보였고, 파리고등법원은 국민의 입장을 대표하여 왕권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일어났다. 여기에 대귀족과 불평분자의 책모가 작용, 프롱드의 난이 일어나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왕은 파리를 떠나 모후와 함께 각지로 유랑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 난은 오랫동안 왕에게 불쾌한 기억으로 남게 되고, 파리가 싫어져 나중에는 궁전을 베르사유로 옮겼다(1682).프롱드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재상 마자랭이 정치를 독단하다가 1661년 3월 9일에 죽자, 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왕은 재상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직접 고문관회의를 주재하였으며, 대신들에게 명하여 자기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부의 임시적인 특사의 성격을 띤 앵탕당(지사)의 직무를 확대하여 각지에 상주시킴으로써 명령에 따라 손발처럼 움직이는 관료의 조직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였다.그리고 그의 만년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피해로 프랑스는 그전에 얻었던 모든 이득을 대부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1709). 게다가 루이는 개인적인 슬픈 일들을 잇따라 당했다. 그는 아들인 왕세자, 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베리 공, 증손자인 브르타뉴 공, 부르고뉴 공작부인을 잃었다. 궁정 안에서는 아첨이 넘쳐흐르고 밖에서는 악담이 빗발쳐 왕의 모습은 불운이 닥쳐오면 무너져버릴 우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승승장구하는 나라의 화신(化身)이던 루이는 그 자신의 아픔과 자기 백성의 아픔을 끊임없는 결단으로 견뎌냄으로써 평소의 자기가 해내는 것 이상으로 성과를 이루어냈다.런던에서는 궁정혁명이 일어나 화평을 주장하는 토리당이 권력을 잡았고, 게다가 프랑스가 드냉 전투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전쟁이 끝을 맺게 되었다. 1713~14년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와 바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내놓긴 했지만 영토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와 라인 지방에서 최근에 정복했던 영토를 그대로 지니게 되었는데 프랑스는 뒷날 어떠한 패배나 혁명으로도 그 지역을 잃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대중의 비웃음을 받는 가운데 생드니 바실리카에 묻혔다. 부르고뉴 공의 막내 아들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5세의 어린아이였으며 몹시 병약했다. 조카인 오를레앙 공을 못미더워한 루이는 실권을 몽테스팡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멘 공에게 넘겨주고 싶어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그 유언장은 결과적으로 왕정이 몰락하도록 재촉한 셈이었다. 즉 그가 죽고 난 뒤 유언장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집된 파리 고등법원(Parlement)은 권력을 되찾아 모든 개혁을 저지하는 데 이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대혁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후의 관계도 원만치 못했으나 신하들에게는 따뜻이 대해주었다. 대외정책의 운영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궁정 내의 파당들과 싸운다거나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나 자크 네케르와 같이 앙시앵 레짐[舊體制]의 비틀거리는 재정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개혁적인 신하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보낼 만큼 마음이 강하지도, 결단력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튀르고, 네케르). 1771년에 정치적 권위를 잃었던 파를망(귀족의 이해관계를 지지하던 사법기관)에 권력을 다시 돌려주어(1774. 8) 치세초부터 왕의 위엄이 떨어졌다. 그뒤 귀족의 반동세력은 1789년 이전까지 점점 커져갔다. 재무장관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이 1787년 취한 재정·경제·행정개혁을 귀족들이 반대하자 왕은 1788년 7월 하는 수 없이 성직자·귀족·평민 대표로 이루어진 삼부회(三部會)의 소집을 허락했고 결국 대혁명으로 가는 길을 터놓았다.[대혁명에 대한 루이의 반응]프랑스에는 제한된 권력의 입헌군주제가 들어설 수 없었는데 이는 통치 능력이 없고 우유부단한 루이 16세가 1789년 이후 반동세력에 굴복한 것이 부분적 이유였다. 루이는 처음에는 귀족들의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중간계급 개혁자들과 손을 잡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만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1789년 봄에는 동생 아르투아 백작 샤를(뒤에 샤를 10세)을 중심으로 한 궁정의 반동적인 무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으며 삼부회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을 옹호하는 정책이 다시 채택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해 여름 내내 파리와 지방에서 대중운동이 나날이 급진적인 길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루이는 대혁명의 불길이 스스로 꺼지리라는 희망을 계속 지녔다.이 시기에 이르러 왕의 성격에 숨어 있던 근본적인 약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둔감한 성미에다 정치적 통찰력이 없어서 타협이 필요한 때가 언제인가를 판가름할 수 없었던 루이는 늘 사냥을 즐기고 자물쇠를 만들거나 돌을 다듬는 따위의 개인적인 취미에만 시간을 보내곤는 루이가 미라보와 은밀히 손을 잡고 있었으며 외국과 반혁명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가 튈르리 궁에 있는 비밀벽장에서 발견되었다. 8월부터 가족과 함께 옥에 갇혀 있던 루이에게 반역죄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12. 3) 루이는 국민공회에 2번(12. 11, 23)이나 출두해야 했다.[사형선고]지롱드당이 그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애썼지만 당시 '시민 카페'로 불렸던 루이는 국민공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았고 1793년 1월 18일에는 반대 334표(그 가운데에는 선고유예를 조건으로 사형에 찬성한 13표가 포함되어 있음), 찬성 387표(여기에는 처형 연기 가능성을 논의하자는 데 찬성한 26표가 포함되어 있음)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집행유예를 놓고 실시한 투표(1.19)에서 루이는 찬성 310표, 반대 380표를 받아 1793년 1월 21일에 파리의 혁명광장(Place de la Revolution)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가 지롱드 내각을 해산시킨 뒤 파리의 폭도들이 왕궁에 난입했었는데(1792. 6. 20) 이때 그가 보여준 담력과 재판 과정이나 처형당하는 순간에 취한 위엄있는 자태는 그의 평판을 되살리는 데 상당히 도움을 주긴 했으나 완전히 회복시키지는 못했다.* 프랑스 혁명수세기 동안 세계의 정치사는 정권을 타도하거나, 타도를 시도하는 야심가들과 군림하는 군주들과 왕국들의 무수한 예로 가득차 있었다. 18세기 말에 새로운 현 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들(Common people)이 그들을 지배하던 군주 정에 반대하여 일어섰고...그리고 승리했다. 주변부국가에서 일어난 연관성없는 예들 정도가 아니라, 이것들은 영국이나 프랑스같은 주요국가에서 일어난 중요한 혁명들이었다. 우선,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고 새로운 국가로 등장했다. 다음으로,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국왕들의 전제정치에 지친 프랑스인민들 이 1774년 부터 부르봉의 제 5대 국왕으로 통치하고 있던 루이 16세에 반대하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