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t`s of people are learning English with several reasons. Most of them are doing it to satisfy conditions which is required from career they want to have, and the rest are studying it for the academic purpose. Then why am I studying English in the world? I arranged finally my main three reasons about studying it Firstly, Learning English is fun and interesting by itself. I have a lot of exciting experience when studying it. I can learn western countries` culture and their life style through it. I will be able to get intellectual satisfaction from what I am learning. That is to say, it is a kind of achievement.
‘교육목적론’「교육목적론」은 책의 원제목인 ‘Education and the good life'가 말해 주듯, 교육과 삶을 연결시켜 쓴 책이다. 즉 저자는 교육의 본질을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여러 가지 철학적, 논리적인 답변이 요구된다. 1장에서 4장까지의 내용은 결국 ’좋은 삶‘을 위한 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기초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1장은 영국의 국가교육과정 운영현실에 비추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결국 국가교육과정이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교육과정의 목적 설정, 추구하는 인간상이나 기대하는 사회상, 기초과목 선정근거 및 중핵과목의 구분근거 등 많은 이론적인 토대를 무시한 영국의 1988 국가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제시함으로써 화이트 교수는 국가교육과정의 원칙을 정립하고자 한다.국가교육과정의 원칙은 교육내용의 중앙정부 통제 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국가단위의 사회 공동체이므로, 교육 계획시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교육과정을 옹호하는 입장은 민주주의의 개념에 기반을 둔다.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국가교육과정이 추구해야할 교육적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 그 이전에 국가가 국민들의 좋은 삶에 관여할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개인의 좋은 삶에 관여할 수 있는 국가의 역할범위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회의 ‘도덕적 틀 혹은 기본 도덕’이고 둘째는 ‘복지’의 제공을 돕는 일이다. 즉 국가는 이 두 가지를 통해 개인이 ‘좋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움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중립주의에 대한 견해는 자기 모순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국가가 개인이 자율적으로 ‘좋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 자체가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자율성’이라는 가치가 그 자체로서 바람직하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와 무관할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욕구와 무관하게 가치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근거를 가지고 참된 인간을 설명하는 무리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욕구와 무관한 잘삶을 주장하기 위해 먼저 형이상학적 근거에 대한 명확한 설명뿐 아니라 그 가치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에게 욕구를 생성시킬 수 있게 해 주는 인과적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까지도 할 필요가 있다.이제 도덕성과 관련된 교육목적을 잘삶에 관련지어 생각해 볼 것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질문은 도덕적 목적이 무엇인가이다. 도덕적 목적은 도덕적 지식, 그것 뿐 아니라 도덕적 행동을 유발하는 성향까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또한 도덕적 행위에 관한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도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결국 이 말은 도덕교육에 중심이 없고, 단지 중요한 것이라는 말로 도덕교육의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큰 과제거리이다.왜 도덕이 중요한가? 이미 언급했듯 도덕은 사회구성원들의 잘삶을 성취하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도덕적 행위라는 것이 반드시 나에게 유익한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도덕규칙의 준수와 잘삶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동들에게 덕은 그 자체가 보상이라는 점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는가? 또 기본도덕의 범위는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법기반적 도덕성은 고대 그리스의 잘삶에 대한 도덕적 성찰이 의무를 중시한 도덕원리로 옮겨가면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나 칸트, 그리고 많은 권리론자들을 포괄하는 최대주의 도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도덕적 최소주의는 영국 사회 내에 만연한 형태인데, 이로 인해 도덕을 도구적 이유로 행동하는 것이 일반이다.그렇다면 이러한 도덕성의 다양한 형태 중에 어떤 입장을 취하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저자는 크게 두 단계로 이야기 한다. 첫째 단계로 이타적 성향들이다. 그 이유는 교사나 부모가 아동이 권력자나 기게스의 반지와 같은 것은 우리에게 조화론적 입장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결국 도덕성과 잘삶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 보면 ‘인간의 잘삶이 반드시 도덕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타당한 이유는 아직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타주의와 잘삶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이타주의 목적과 개인의 목적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맥킨타이어의 견해를 듣는 것은 유용하다. 맥킨타이어는 인간의 잘삶이란, 내재적, 공유적 가치를 지닌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러한 실천들이 서로 갈등할 때 이것을 합리적, 통합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덕목이 필요함을 설명하였다. 그것의 대표적이 예로는 지혜와 판단력, 성실 지조 및 인내 등이다. 또한 좋은 삶에 대해 한 가지의 설명을 덧붙이는데, 그것은 ‘전통’이라는 개념 속에 나타난다. 선을 추구하고 덕을 실천하는 일이 결코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행하는 것이 아닌, 특수한 사회적 정체성의 소유자로서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맥킨타이어의 이론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있는가?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에 우선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만약 저자처럼 ‘개인의 검증된 주요 욕구들의 충족’을 개인의 잘삶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속에는 이러한 요구들이 다른 것과 더불어 이타적 목적도 포함해야 한다는 제안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자들이 교육목적을 체계화할 때 이타주의를 잘삶의 개념 속에 집어넣어야 할 마땅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육이란 모종의 이타주의적 목적들을 가져야 한다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주장에서 출발할 수 있다. 비록 ‘아동이 갖게 될 이타주의적 욕구의 충족이 자신의 잘삶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은 함의하지 않지만, 이타주의적 삶과 자신의 이익을 분리시키면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맥킨타이어의 ‘실천’의 개념이 상기시켜 주었듯이, 우리의 많은 활동 속에는 타인과 공유하는 목적들이 들어 있다. 타인을 목적으로서 돕는 일과 나의 이기적 욕구를교육방법으로서 실제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것이다.5장. 자율적 인간을 위한 교육자율성이 강한 인간일수록 자신의 삶이 자신의 선택이 전통, 종교, 자연적 구속 그리고 사회적 구속 등의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적다. 자율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자연적 구속을 가능한 감소시키려고 애쓰며, 그들의 이상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방식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의 자유, 흔히 자율성이란 소극적 자유로서 이해되고 있지만, 제약에 대한 도전이나 탈피만이 자율성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급진적 선택자이 강조하는 인격교육은 그들이 애호하는 덕목, 태도 및 성향들 중에는 무지, 잘못된 믿음, 혼란스런 사고 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의문시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육자가 사실만을 전수해야 하는지, 가치의 주입을 통해 다른 형태의 구속을 만들어 자율성을 해치는 일인지에 대해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인격교육이 구속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면, 학생들은 아무런 인간적 자질도 갖추지 못한 채, 그저 다양한 종류의 지식과 이해만 가지고 자라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적 활동에는 지적 덕목이 수반되기 때문이다.조기교육의 과제는 아동들을 모종의 인간적 자질을 가진 인간으로 형성시키는 것이다. 아동은 태어나서 부모와 교사에 의해 사회 속에서 그 가치에 따라 이끌어진다. 이렇게 탄생하는 아동의 자율성과 사회적 구속은 상호 충돌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자율성은 확고하고 안정되게 획득된 성향에 기초해야 한다. 이러한 확신 속에서 교육자들은 학생들의 자율성을 해치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지 않아도 된다.그렇다면 안정되게 획득된 성향의 기초위에 자율성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 아동은 하나의 욕구와 다른 욕구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갈등을 해결해 나간다. 그러나 갈등의 해결은 양쪽의 갈등요소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갈등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더 바람직, 욕구범주 내부의 그리고 욕구범주간의 갈등의 해결을 돕는 일이다. 처음에는 부모들이 갈등 해결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겠지만 점차 아동들이 스스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아동들이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자율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에도 그들의 삶의 방식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충하는 두 가치가 있더라도 그것의 하나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닌 상황에 땨른 자신의 가치를 더 선호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율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렸을 때의 제한된 틀을 벗고 성장하면서 자신의 욕구들의 중요성에 따라 욕구의 위계를 스스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들은 점차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이에 따라 자신의 욕구구조에 보다 큰 응집성을 부여하여 나름대로의 현실적이고 확고한 요구들로 자신의 자아상을 삼는다. 이에 대해 인생계획과 자아인식의 두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자율성은 인생계획을 함의하지 않는다. 자율성은 인생계획을 자기 삶의 전체적인 불변의 청사진으로 그릴 필요도 없고, 상황 변화에 따라 자신의 현행계획을 수정하고 적응시킬 수 있다는 것도 함의하진 않는다. 인생계획을 교육자들의 교육목적관과 관련지어 생각해보자. 직업에 따라 전체적인 잘삶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부모와 교사들이 학생들을 위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인생계획에 관여하는 것은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아동들의 잠재적인 선호를 무시하지 않고 직업에 대한 기초를 쌓도록 도와주는 것은 허용되리라고 본다.욕구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에는 자신의 욕구가 무엇이고 어떤 욕구가 더 소중한지를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욕구들과 그 우선순위를 학생들이 모를수록 또는 그에 대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할수록 그들의 자아인식은 불충분한 것이 된다. 자아인식의 결핍은 잘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 욕구를 명확히 아는 것은 욕구 충족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자율적 인간에게 필요한 실천 지향적 자아인식은 자신에 대한 포괄적인 지.
I'd like to write a composition about my mother today. I love my mother too much, but I grant the love of mother's for me is immeasurable; I cannot repay my mother for her love on me over all of my life. My mother always prays to God for my life every early in the morning. But I can't count the number that I pray to God for her. When I occur to this, I feel shameful. There are lots of stories related with my mother in my life. Now I want to bring back my memory moved from my mother one day. I guess it would happen about four years ago. I had severed in the Korean navy for twenty-four months when I was twenty-one years 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