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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화와 문학] 해변의 카프카 신화적으로 분석하기 평가A좋아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를 신화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나의 모든 시도는 tautology, 즉 동어반복의 오류와도 같아서 어찌 보면 아무런 효용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루키 스스로도 자신의 소설을 평론가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순수한 독자로서 작품을 해석하고자 하는 나의 이 글이, 그리고 나의 의미부여가 적어도 나에게는 이번 학기 신화와 문학을 공부하는 현실적인 목표였음을 상기하며 완전중립의 객관적 분석보다는 상당부분 감상적 고백의 언어로 표현 될 것을 미리 밝힌다.15세 소년의 가출 기행담를 아주 간단한 한 마디로 요약하면 15세 소년의 가출 기행담 정도가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소설이 마치 상당히 계몽적인 성장소설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실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추측이다. 계몽적이라든지, 교훈적이라든지 하는 식의 해석은 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문학, 특히나 소설의 줄거리를 접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요약에 수반되는 생략은 언제나 작위적이고 폭력적이다.주인공 다무라 카프카는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15세 소년으로 아버지에게서 들은 오이디푸스적인 불길한 예언을 벗어버리고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의 소년이 되기 위해 가출을 결심, 시코쿠로 향한다. 인물의 환경설정에서부터 주인공은 보통의 소년들과는 상당히 다르며, 그렇기 때문에 소년이 질풍노도 의 시기를 거치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해가는 한 통과지점에서 겪는 일련의 과정들은 다분히 비일상적이며 당연히 소설적이다. 시코쿠의 한 도서관에서, 그리고 숲 속에서 열다섯 살의 다무라 카프카는 숱한 경계를 오간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의식과 무의식, 현실 세계(상징계)와 환상의 세계(실재계) 등 이 작품이 넘나드는 일련의 경계에서 소년 카프카는 터프하게 성장해 간다.성장기 소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5세 소년이 상징하는 것은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통과점이다. 이 시기에 그들의 정신구조는 맹목적으로 자유를 모색하고, 신체는 격렬한 속도로 성숙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추구의 상징과도 같은 오이디푸스와 흡사하다. 열다섯 살의 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에 대해 하루키는 "그들이 아직 변화할 가능성이 많은 존재이며, 그들의 정신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데 주목했다." 고 밝혔다. 열다섯 살의 소년은 '아이의 종점'이며 '어른의 시발점' 이라는 점에서 아직 변형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인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프로이드가 오이디푸스를 영유아기의 남자아이로 재해석한 반면 하루키는 이렇듯 오이디푸스를 청소년기의 남자아이로 재구성해 냈다. 어째서 여전히 남자아이인가? 아마도 성욕에 대한 처리문제에 있어서 여자아이보다는 남자아이 쪽이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일단 생각한다. 어쩌면 작가가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신화 속 오이디푸스가 남자이기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먹구구식 분석은 일반화가 불가능하다. 어쨌거나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를 남성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다시 말해 모든 남성의 잠재의식 속에 오이디푸스적인 환상이 내재한다는 프로이드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도 동감도 할 수 없지만 솔직히 영유아기의 남자아이보다는 15세 소년 쪽에 감정이입 하는 것이 메타포 적으로 생각하기에 훨씬 쉬웠다.다무라 카프카군은 곧 나 자신이며, 독자 여러분 자신이기도 합니다다무라 카프카군은 곧 나 자신이며, 독자 여러분 자신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직접 밝혔듯이 오이디푸스와 다무라 소년의 공통점은 수 없이 많다, 라기 보다도 다무라 카프카는 오이디푸스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낸 인물이기 때문에 둘은 반듯하게 포개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어떻게 같은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면,1. 오이디푸스는 신으로부터, 다무라 카프카는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운명이다.2. 두 사람 모두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다.3. 그리고 몸소 저주를 이룬다.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신화적 공간, 혹은 정신분석학적인 실재계에서 저주가 이루어진다.그리하여다무라 카프카 = 오이디푸스 = 인간이렇게 일반적인 도식으로 일반화 하고 나니, 어쩐지 시시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이 작가가 의도하고 내가 이해한 의 소설적 장치이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도식을 찾아 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는가를 느끼고, 그리고 나에 대해 세계의 끝까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오시마상이 들려주는 아리스토파네스 이야기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홍석천에게 동성애자 연기를 시키고,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coming out 하게 만든 작가 김수현에게서 무자비한 야비함을 느꼈었다. 홍석천의 입을 통해 듣는 그 대사들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인간 홍석천의 절규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홍석천은 그 순간 작가의 의도대로 연기자가 아닌 동성애자 홍석천으로 보이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이다. 하필 그것을, 그 역할에 꼭 홍석천을 캐스팅해야 했었나?그에게서 동성애자라는 낙인을 지우자. 내가 편견에 치우친 건지, 작가 김수현이 정말 야비한 건지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지도 않을 만큼 기분이 나쁘다.소설 속에서 오시마 상은 카프카 군에게 플라톤의 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신화와 문학 시간에 익히 듣고 보아서 알고 있었지만 오시마상이 들려주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홍석천의 연기에서 느끼는 감정과 같은 맥락에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오시마 상은 생물학적으로는 혈우병을 앓고 있는 여성이지만 성기 구조를 제외하고는 여성으로서의 성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남성으로 보이는데다가 정신구조는 남성으로 조직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이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생물학적으로는 헤테로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호모를 나타내는 이중적인 상황을 연출한다.이처럼 오시마 상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이 남남, 여여, 남여로 구성되어 있던 아주 먼 옛날 신화 세계에 존재하던 인간의 재현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시마 상이라는 인물의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그 존재 자체를 신화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그는 어떤 면에서는 완전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시마 상은 남자로서의 구분이나 여자로서의 구분 자체가 필요치 않은, 마치 기원이 하나인 인간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행복한가? 신의 벌을 받지 않은 형태로서,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둘로 나뉘기 이전의 상태로서 그는 그의 반쪽을 찾아 헤매는 일 없이 온전한가?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고독한 시간을 보냈고, 사랑을 찾아 헤맸고, 지금까지도 자신의 반쪽을 찾고 있다. 완전체, 혹은 완전함이라는 것은 오히려 의지의 결여로서 때때로 불완전함을 뜻한다. 오시마 상도 물론 그렇지만 특히 사에키 상의 경우에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행복의 정점에서 몹시도 고독했고 그러한 고독은 그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그런데 남남과 여여, 그리고 남여의 결합은 과연 완전한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그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하였다. 어디까지나 내 머리로 생각한 것뿐이지만, 인간은 서로 등을 맞대고(=등을 돌리고) 살아서는 안 된다. 등을 돌리는 것은 배척을 의미하는 대화의 단절이다. 혹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며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이다.와는 상관도 없는데 왕가위 감독의 이라는 영화에서 아비가 친어머니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만나주지 않는 어머니에 대해 난 단지 어머니를 보러 왔을 뿐인데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니, 나도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 고 독백하며 걸어가던 장면, 롱테이크 기법으로 묘사되던 장국영의 뒷모습이 갑자기 생각나는 건 왜일까?꿈에는 책임이 따른다하루키 소설의 특징적인 소재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꿈에 대한 해석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꿈속에는 마치 신탁과도 같은 일종의 예언이 담겨있다. 카프카 군도 아버지의 오이디푸스 예언, 일종의 저주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기억에서 말살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유전자는 쫓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주의 내용은 끊임없이 꿈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꿈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설령 꿈속에서 죄를 범했다 해도 그것은 꿈속에 국한된 무의식적 행위일 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므로 당연히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꿈을 바라보면 꿈에는 책임이 따른다. 꿈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저주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단지 꿈을 꾸었을 뿐인데, 무의식이 상상했을 뿐인데 거기에 책임이 따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금기에 대한 상상력의 자극이 가져오는 실현 가능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다무라 카프카와 오이디푸스에게 내려진 저주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그들이 필사적으로 도망쳤으나 그 결과 필연적으로 이루어진 저주는 그들이 저주, 곧 금기에 대해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그것이 금기였을지라도 저주를 피하기 위해 그들은 저주의 내용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상상은 꿈으로 실현되었다. 그 꿈에 대한 책임으로서 저주는 이루어졌다.저주가 이루어지고 난 후 남은 건 무엇일까? 다무라 소년은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소년은 이제 어른의 모습이 되어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시작.
    인문/어학| 2003.12.16| 6페이지| 1,000원| 조회(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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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화와 문학] 신화와 문학(파에톤) 평가A+최고예요
    {빛나는 자 파에톤,빛이 되어 추락하다사회과학부9915491배성은1.네 아버지를 찾아가라!친아버지의 보살핌 없이 자란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 친자확인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 받는 이야기(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몽의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그러한 형태를 취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파에톤 이야기는 이렇듯 전형적인 친자확인의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일종의 레종데르트-존재의 이유를 확인하는, 아들로 대변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이야기의 시작 지점에서 파에톤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친아버지인 태양신을 찾아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대부분의 친자확인 스토리에서처럼 험난한 모험이 동반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파에톤의 모험은 오히려 아버지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일반적으로 신화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에는 여타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그 확장의 폭이 넓고, 또한 깊다는 특징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도 역시 그러한 특징이 적용될 수 있는데 파에톤은 표면적으로는 아버지 태양신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지만 그 아들이라는 소재가 갖는 문학적 상징성을 조금 더 확장해 나가면 아들이라는 속성은 바로 신의 피조물인 인간으로 대변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파에톤이 아버지와 첫 대면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태양신 헬리오스의 위대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신의 피조물, 너무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파에톤은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이자 신의 손길로 빚어진 인간인 것이다.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파에톤의 아버지인 태양신이 상징하는 것 또한 아버지라는 소재가 갖는 문학적 이미지와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신으로서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태양신인 아버지 헬리오스에게 추가되는 한 가지 핵심적인 이미지는 바로 태양이라는 존재의 문학적 상징성이다. 이 이야기에서 태양은 시작, 기원, 근원으로 표상되고 있다. 물론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이 시작이라는 견해에 있어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보통 일출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여기서는 그러한 일반론에 따르기로 한다.굳이 신화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태양과 태양신의 이미지는 화려하고 적극적이며 만물의 으뜸이 되고, 만인에게 우러러 존경받는 모습, 혹은 감히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하고 또한 두려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태양은 대부분의 예술작품 속에서 만물에게 빛과 생명을 주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역시 다른 예술작품과 마찬가지로 태양신의 신하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그리는 것으로 보아 태양이 만물의 근원이며 생명의 기원과도 같은 존재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이처럼 , 흔히 씨를 뿌리는 농부에 비유되는 남성의 이미지에서 알 수 있듯이, 태양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생명을 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파에톤의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의미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근원, 기원과도 같은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겠다. 한편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에 대해 흔히 남성대 여성으로 대비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력, 혹은 역할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남길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주가 되는 것은 파에톤의 이야기에서 가부장적 질서에 편승하는 단서들을 찾아내어 그에 대한 논의를 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므로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한 충분한 설명에 대해서는 과감히 생략하기로 한다.아버지와 아들, 태양신과 파에톤이 각각 상징하고 있는 것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파에톤이 아버지를 찾아 태양이 솟아오르는 곳으로 갔다는 것은 자신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회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며,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명제의 증명이다.아버지의 존재가 아들(남녀를 구분하지 않는, 자식으로서의 의미)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는 궁예와 견훤, 그리고 삼국을 통일하고 최후 승리자가 된 왕건의 이야기를 상고해볼만 하다.첫째, 궁예는 왕가의 자손이었지만 출생부터가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출생으로 날 때부터 부모의 보살핌은커녕 아버지의 손에 죽을 운명에 처했으며 이렇듯 죽을 고비를 어렵게 넘기고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이러한 성장 과정은 그것은 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는 후에 사소한 의심만으로 자신의 왕비와 왕자를 죽일 만큼 남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었으며 이것은 한편으로는 뛰어났던 그의 여러 능력을 뒤엎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만큼 절대적인 결함이었다.둘째, 견훤의 경우 그의 아버지 아자개는 독특한 교육방식으로 견훤을 성장시켰는데 이를테면 99점을 맞은 아이에게 100점을 맞지 못했다고 호통을 치는 식이었다. 견훤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높은 수준으로 성장했으나, 그러한 방식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었고 결국 견훤의 최후 역시 궁예와 마찬가지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겠다.셋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왕건은 유비에 비견될 만큼 포용력이 강했던 인물이다. 왕건의 아버지는 지방의 세도가로서 왕건의 인생 초반은 그러한 아버지가 그를 위해 닦아놓은 탄탄대로 위에서 부족함이 없었으며, 이에 힘입어 훗날 궁예와 견훤을 교묘히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하여 왕좌에 등극할 수 있었다.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컨대,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 믿음 등의 가치는 아들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자신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세 인물의 아버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다.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굳이 예시를 들어가며 길게 설명하지 않고 신화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 정도만 이해해도 파에톤의 이야기를 깊이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줄로 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어냈다는 신화적 상상력을 거부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신화적 상상력을 거부하는 이들처럼 파에톤도 징표를 요구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볼 수 있지만 아들은 그것을 알 수 없기에 징표를 요구하고 찾고 의심하며 고민하고 또한 성장한다. 그것이 바로 신과 기원을 찾는 인간의 모습이다.그런데 과연 파에톤이 자신의 존재 근원을 찾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자가 상상한 연후에 나름의 해석을 부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2.너는 때가 되면 죽을 팔자를 타고 난 인간이다. 네가 소원하는 것은 필멸(必滅)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에게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파에톤이 아버지의 태양수레를 단 하루만 끌어보겠노라는 소원을 빌었다는 것은 자기 능력을 시험하려는 것이며 그 미션을 성공시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세상 앞에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세우고자 하는 입신양명의 뜻이 담긴 의지의 발현이다. 아버지 태양신은 파에톤에게 다른 소원을 권하며 부귀영화를 제시하지만 그의 아들이자 인간인 파에톤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파에톤의 생각에 자신은 신의 아들이므로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하루 동안 태양수레를 온전히 몰아보는 것을 그러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버지가 신이라도 파에톤은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은 그저 때가 되면 죽을 팔자를 타고 난, 필멸의 팔자를 타고난 인간일 뿐이다.네가 이보다 조금만 더 지혜로웠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신의 간곡한 부탁과 경고에도 파멸을 예감하지 못하는 고집 센 인간, 파에톤! 빛나는 자 라는 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그에게는 사리를 분별하는 혜안이 없었던 듯 하다. 따지고 보면 그의 이름은 엉터리다. 도대체 그의 무엇이 빛났단 말인가? 그가 인생에서 빛났던 순간은 아마도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불타며 추락했던 바로 그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파에톤도 별처럼 빛났다.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을 만들 때 그들의 성격과 자질까지 규정하지는 않은 듯 하다. 신의 능력으로 지혜의 정도를 조절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이며 동시에 신보다 어리석은 그 점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신은 인간이 그러한 자유의지를 발현시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한 듯 하다. 파에톤의 경우 뿐만 아니라 신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신과 인간의 대결이 그러하고, 인간에 대한 신의 응징의 이유가 그러하다.3.신들이 기대어 맹세하는 강, 내 눈으로는 보지 못한 강이 내 약속을 보증하리라.스틱스강에 맹세를 하고 후회한 신이 한둘이 아니다. 스틱스강에 맹세하는 것은 그 안에 맹세를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금기사항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핵심 장치의 역할을 하고, 이렇듯 금기가 가진 매력 때문에 흥미로운 이야기의 시작에는 더욱더 금기를 깨뜨리는 사건이 등장한다.
    인문/어학| 2003.12.16| 6페이지| 1,000원| 조회(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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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정치] 일본정치론 현대 일본의 체제이행 서평 평가B괜찮아요
    일본정치론書評『현대 일본의 체제이행』사회과학부 9915491{배성은1. 비교 정치 · 경제학적 접근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제기우리는 종종 여러 나라를 비교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각각의 나라가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자 한다. 실제로 비교의 방법은 관찰을 통해 각각의 특성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애용되어온 사회과학 연구방법 중 하나이다.그러나 비교라는 방법의 효용성에 대해 우리는 그다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 없이 맹신해 온 것은 아닌가? 비교를 통해 차이를 아는 것 외에 비교에 무슨 효용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떻게 다른가를 분석했다면, 왜 다른가에 의문을 갖고 집중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당연한 자세이다. 비교를 통한 학습은 차이의 발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차이가 생겨나게 된 원인을 알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이라는 책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일본이 대부분의 선진 산업 민주 정치 체제들과 비교했을 때 어느 나라와도 비슷하지 않으며 독특한 안정, 혹은 발전 양상을 나타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 비교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이 다른 나라들과 다른 형태의 체제를 유지한 이유에 대해 일반론적인 설명을 하자면, 나라마다 체제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상이하게 변화하는 것은 그 나라의 고유한 성질, 즉 나라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범위한 영역의 국가 비교에는 명확한 통제변수를 도입할 수가 없다. 통제변수 없이 비교한다는 것은 상관관계나 인과관계에 대한 설득력을 포기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간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국가별 발전양상의 차이는 문화, 역사, 언어, 환경 등 무엇 하나라고 뚜렷이 규정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라는 것의 문제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너무 많다는 데 있다고 하겠다.2. 오리엔탈리즘(orienta고 있지 않지만 학습자에게는 일본을 한국과 비교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솔직히 말하자면 결코 쉽게 와 닿지 않는 스웨덴이나 이탈리아의 체제와 비교하는 것보다는 의의가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국민감정이 우호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한 · 일 관계는 거울과도 같이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거울이라는 의미가 일본과 한국이 하나라든가 하는 식의 일체성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고 다만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뜻에서 사용된 것이다. 일본을 공부할 때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한국과 비교하게 된다. 또한 한국을 공부할 때도 일본은 한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매 시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혹은 과시해 온 나라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이렇듯 한국과 일본이 물론 속도에 차이는 있지만 거듭 변화하는 가운데 두 나라 다 더 이상 지난날의 한국과 일본이 아니며, 바람직하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비판적 시각에서 제시하는 이상적인 모습과도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이것은 왜 그런가?변화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이상향과는 동떨어진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은 마치 과학시간이나 수학시간에 배웠던 물리학적인 법칙에 따라 거센 물살을 가로질러 강을 건너려는 배가 물살의 힘에 떠밀려 원래 목적지로 삼았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정착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거센 물살이라는 것을 크게 생각해 보면 한 국가를 둘러싼 외부환경 정도가 될 것이고, 작게는 한 정부를 둘러싼 국내외적인 상황 정도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다음 장에 제시된 그림에서와 같이 배(국가 혹은 정부)는 물의 흐름(국내외 환경)에 떠밀려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정착하게 된다.목적지{은유적인 방식의 설명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그러나 실제로 외부적 요소의 영향력을 예측하는 것은 내부 동태를 파악하는 것 보다 어려운 것이라는 점에서 위의 그림이 아한다.그렇다면 안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장기적인(1960년대와 1990년대로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어떠한 의미에서는 단기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변화양상, 변화과정을 관찰함으로써 2보 전진 1보 후퇴를 통해 진일보(進一步)하는 일본을 설명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shift 라는 개념의 사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화했지만 과거와 결별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은 변화를 주목하는 동시에 변화하지 않는 지속적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후 우리나라 사회도 큰 혼란 속에서 많은 변화(실업, 빈곤, 교육열 과다 등)를 겪었으나 그 변화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도대체 변한 것은 무엇인가?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면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물론 사회의 혼란스러운 양상은 어느 시대나 다 비슷한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오히려 일본은 한국과는 반대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것이 한국과 같은 체계의 변화가 아니라 체제의 변화였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사과와 배를 비교하는 오류인가?5. 보수는 아무나 하나책을 읽으면서 크게 웃었던 부분 중 한 가지는 일본의 보수성에 대한 규정이었다. 자민당의 업적(?)을 보면 일본의 보수는 보통 일반적으로 보수성이 내포하고 있는 성격들을 어느 정도 일탈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자민당을 보면 일본의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이 애매해진다. 일반적으로 보수성이라는 것은 체제, 혹은 체계 유지적이고 안정 지향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 일본의 자민당도 권력 유지를 위해 취한 여러 가지 행동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해 볼 때는 보수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러나 그러한 행동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것은 여느 나라의 보수 정당들이 좀처럼 채택하지 않는 진보적인 정책들로 가득 차 있다. 성이라는 것 속에는 큰 정부로서 일본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작은 정부인척 하는 큰 정부가 바로 일본의 보수주의적이며 평등주의적인 정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대외 무역에 있어서 일본과 한국이 외국의 자본과 기술에 대한 대처방식에서 달랐던 점, 그리고 다를 수밖에 없었던 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책에서는 일본이 미국 (그리고 다른 외국) 자본이 거의 침투하지 못한 나라였으며 일본의 회사들이 자본과 기술이 시급한 상황이었지만 외국인에게 경영권을 내주는 것을 꺼렸다고 설명하고 있다. 외국 지배의 위협에 대한 대처로서 일본은 자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일본에 있어서 도쿠가와 말기, 혹은 페리호의 출현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로 다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경제적 철조망을 설치해서 외국 기업이 일본 시장과 상품 그리고 그들의 자본에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도록 만든 이유는 일본이 반복학습을 통해 외국의 지배가 얼마나 신속하게 한 부문 전체에 걸쳐 이루어졌는가를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약간 무리가 따르는 설명이긴 하지만 일본은 적어도 한국에 비해서는 사대주의라든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운 나라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이 과거(혹은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한국이 중국을 바라보고 또한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본은 중국뿐만 아니라 어떠한 나라에게도 섬기는 형태나 복종하는 체제를 취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몹시 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말기에 외국 열강들이 범람하던 그 시점에서 불평등 조약을 강제당하는 상당한 정도의 국가적 위협 앞에서 그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강해져야 한다는 결심을 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미군정 지배 체제에서도 일본 전체는 외국의 지배에 대해 강한 반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도래하게 된 경제부흥의 시기에서는 자주적으로 국가의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이 발전 관심을 차단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1960년대 이래 실제로 두 가지 모두 시행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자국민에게는 희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요했다는 것, 어쩐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과 흡사해 보여서 남 얘기 같지가 않았다. 그나마 우리나라에는 책임을 물을만한 악역이라도 있었지만 일본에는 딱히 누구라고 꼬집어 죄를 물을 수 있는 존재가 없다. 한마디로 책임전가 해버리면 그만인 상황.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본 국민들이 그러한 상황을 모두 감내했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 단위의 파업도 있었고 시위도 있었고 학생들은 대학을 봉쇄하기도 했지만 그것의 명분은 어디까지나 외세의 압력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시위가 노동 자체를 위해서, 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보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서 조직화되고 확산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정부 자체에 대한 반감의 표현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일본의 노조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직접 물어야만 알 수 있는 수수께끼들이 잔뜩 있다. 어찌하여 일본에는 협력과 조정이 경쟁과 서로 상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배경지식을 활용해 보건데 아마도 일본인들의 이중적인 사고구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편리에 의해서라면 얼마든지 경쟁과 협력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 이해관계를 놓고 다투던 사이도 오늘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의기투합 할 수 있다는 발 빠른 전환. 뭐, 비단 일본의 경우뿐일까 마는…….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의 반복이지만 일본의 정부는 결코 작은 정부가 아니며 오히려 감시정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규제를 서슴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로 일본 국민들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질은 낮고 가격은 비싼 국산품을 애국이랍시고 써야하는 의무만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특이하게도 일본 국민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니 이거 너무 지나친 순종 아닐까?물론 우리나라도 근대화 과정에서
    독후감/창작| 2003.12.16| 11페이지| 1,000원| 조회(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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