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속의 인감심리〕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그녀에게..(Talk to her)"인문과학부0081044이 동 규≫ 들어가며...누군가가 내게 영화취향을 물으면 난 항상 “멜로영화 빼고 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멜로영화란...뻔한 스토리구조 안에서 남?여가 사랑 하나만 바라보고 갈등, 희생, 구원의 공식 속에서 슬프고 힘겹게 달려 가기만하는..너무나도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로 인간감정의 민감한 부분에 자리잡은 눈물샘을 톡톡 건드려 보려는..뭐 그렇고그런 괘씸한 영화로 보여져왔다(이상 나만의 제멋대로 잣대). 그런 이유에서인지 교수님께서 제시해주신 4가지 영화 중 미안하게도〔그녀에게〕는 서류전형 불합격처리 되었다.그런데〔랜드 앤 프리덤〕,〔헐크〕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하여 이 영화를 선택했느냐..이유는..그렇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나만의 제멋대로 잣대를 제멋데로 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라는 영화를 본 후의 느낌은 쉽게 말해서 당했다(?)라고 표현하는게 어울릴 것 같다.≫ 전반적인 줄거리〔그녀에게〕라는 영화에는 네 명의 중심 인물이 나온다. 간호사 베니그노, 무용학원생 알리샤, 기자 마르코, 투우사 리디아.영화는 '까페뮐러'를 공연하는 공연장에 관객으로 나란히 앉아있는 베니그노와 마르코를 보여주면서 그 두남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베니그노는 집앞 발레학원에 다니는 알리샤를 몰래 좋아한다. 어딘가모르게 여성성?집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그가 알리샤에게는 거부감을 들게한다. 그러던 어느날 알리샤는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고 간호사인 베니그노가 4년동안 그녀의 간호를 맞게된다.마르코와 리디아. 일단 마르코는 베니그노와는 달리 사랑에 있어서 순조로운 출발점을 가진다. 베니그노처럼 몰래사랑도 아니고, 상대가 거부감도 갖지 않는다. 기자 마르코는 여자투우사 리디아를 TV에서 보고 그녀의 인터뷰를 자청한다. 그 후, 그 둘은 연인사이로 발전하지만 리디아가 투우경기 중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극장에서 나란히 앉았던 베니그노, 마르코 두남자는 병원에서 각자의 여자친구를 간호하는 입장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갑작스런 사고로 마르코는 혼란스러워진다. 베니그노는 그런 마르코에게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시작하고, 언뜻보면 무모해 보이는 그의 사랑이야기는 마르코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하지만 베니그노의 사랑방식은 세상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자신에게 위기로 다가온다. 그를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마르코는 베니그노를 돕기위해 애쓰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피나바우쉬의 공연장면을 보여주며 베니그노의 순정한 사랑을 지켜본 마르코와 그의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알리샤가 새로운 인연을 만들 것 같은 기대를 주며 막을 내린다.≫ 작 품 평(들어가기)뇌사상태에 빠진 '그녀'에 대한 ‘남자’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절절한 감정으로 그려낸 는 여느 멜로영화에서처럼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소 새롭다.남자 간호사인 베니그노는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엘리샤에게 당당히 나서서 말할 수 없고 몰래 숨어서 지켜 보기만한 그런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또 주위사람들이 다가가기가 그다지 편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뇌사상태에 빠진 순간, 이제 그에게도 그녀 가까이 다가가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자신이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발레리나 알리샤에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베니그노의 알리샤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반작용이 없다. 베니그노의 ‘그녀에게 말걸기’는 일방향적인 넋두리나 다름 아니다. 혹은 그렇기에 이런 베니그노의 말걸기가 가장 맹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베니그노는 이런 일방향적인 대화에서만 자신의 마음을 열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간직해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 그래서 베니그노의 이러한 사랑법은 관객에게 동정과 슬픔을 만들어낸다.-같이 영화를 보고있던 여자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이거 스릴러 영화야?"..바로 베니그노의 사랑이야기가 진행되는 중 이었다. 나조차도 너무나 진지하게 보던차라..그제서야 "아 이영화는 멜로영화지.."하는 생각이 들었다.-뇌사상태에 빠진 인간에 대한 스토커적인 집착..이라는 소재는 분명 멜로소재로는 적당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알모도바르 감독은 베니그노의 사랑을 단순히 스토커적 집착에 머물게 하지 않고 희생적이고 순수한 사랑으로 표현해낸다. 그런 스릴러적 냄새를 다분히 풍기는 요소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멜로영화에 접목시켜냈다.다른 한 남자 마르코. 마르코란 인물은 베니그노를 지켜보는 관객의 눈을 대신해준다. 베니그노의 사랑법을 이해하는 관객의 대표자 역할을 한다. 관객들은 마르코가 베니그노의 사랑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같이 동화된다.그는 베니그노에게 여느 다름 사람처럼 처음에는 쉽게 다가 설 수 없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의 베니그노가 적극적인 친밀감을 내보이며 다가가자 조금씩 가까워지고, 베니그노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그는 혼란해진다. 베니그노는 “그녀에게 말해봐요"라고 조언해주지만 아직도 마르코는 혼란스럽다. 베니그노와 알리샤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그도 점점 베니그노를 알게되고 사랑법을 이해했을때쯤 그는 여자친구(리디아)를 놓아준다.-베니그노의 사랑은 지극히 이상적?맹목적성인데 반해 마르코는 현실적인 면을 보인다. 그는 목석이 되어버린 여자친구를 앞에두고 혼란스러워하지만 리디아의 전 남자친구가 리디아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자 마르코는 절실한 사랑에 있어서 패배감을 느낀 듯이 리디아를 놓아준다-위에서 말했다시피 마르코와 리디아의 사랑은 베니그노와 알리샤의 그것보다 시작은 순조롭고 평범하다. 이미 사랑에 상처받은 그는 리디아에게 동정과 연민으로 다가가서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나중에 동등한 처지에서의 베니그노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중간중간에 마르코의 대사, 표정연기가 그런면을 보여준다.-리디아가 사고를 당한 뒤 베니그노와의 대화에서 마르코는 식물인간이된 여자를 두고 성적매력을 등을 운운하고, 나중에 리디아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의 마르코의 표정은 이미 직감했다는 듯이 너무나도 무담담했다.-감독은 베니그노와 마르코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영화 중반까지 이끌고온다. 물론 멜로 아닌 것을 멜로스럽게 말이다. 그리고 결말단계에 이르러서는 너무나 많은 것을 너무나 멜로스럽지않게 관객의 몫으로 남겨버린다.베니그노가 탈옥한다는 메시지를 듣고 마르코는 수용소로 뛰어가지만 이미 늦은걸 알고 너무나도 슬프게 운다.-거기서 의문을 갖는다. 베니그노에 대한 마르코의 우정을 표현하는 것일까?, 사랑일까?, 아님 죄책감일까?. 알리샤의 임신을 두고 감독은 여운을 남겼고 결국 베니그노가 죽었다. 마르코가 베니그노에게 달려간 것은 그 임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간 것이 아닐까 하는..개인적인 의문도 든다-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베니그노와 마르코가 처음 만났던 공연장에서 공연(마주르카 포고)을 보고있는 마르코와 알리샤를 비추고 끝을낸다.-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뒷골이 땡겼다. "그럼 베니그노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아니 정말 이걸 원했던 걸까? 영화 중반에 베니그노가 게이라는 식으로 뉘앙스를 풍긴다. 그렇다면 과연 베니그노의 죽음은 누구를 위한것일까. 알리샤?..아님 마르코의 사랑을 위해?"-≫ 작 품 평(나오기)“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기억하고... 말해요. 당신의 사랑을”세계적인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그녀에게〕. 일명, 변태적이고 조금은 엽기적이면서도 적나라한 그의 예전 영화들에 비해 이번 영화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4 -{형이상학(양태범 교수님) 이동규(0081044)형이상학적 주장과 논증----------------------이 장에서는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갖는 특수성에 대해, 특히 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과 의미와 무의미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다룰 것이다.1. 형식적 / 내용적인 의미와 무의미형이상학적 주장의 본성을 다루기 위한 훌륭한 출발점은 오직 두가지 종류의 유의미한 명제만이 존재한다는 실증주의적 교의이다. 흄 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는 관념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과 존재의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명제이다. 나는 이런 분석이 형이상학과 관련하여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보다 세부적인 부류의 진술들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실증주의적 교의에 대응하는 다른 한가지 교의를 고찰해 볼까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내용적 무의미(불합리)와 형식적 무의미라고 하는 상식적인 견해이다.. 내용적 무의미 : 보편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정하게 될 명백한 사실을 부인 할 때 ... 형식적 무의미 : 형식적 논리학의 규칙에 위배되는 말을 할 때..내용적 / 형식적 무의미라는 이분법은 매우 타당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보여 줄 수 있다.예1)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차가 멈추었다고 말하는 친구예2) 단추가 흔적도 없이 그 존재가 없어졌다는 친구위와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종류의 무의미를 저지르고 있는가?철학자들은 대체로 내용적 / 형식적 무의미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찾고 있다.그들에 의하면 「필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술들만이 논리성에 바탕을 둔 진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거나 흔적도 없이 물건이 사라진다고 하는 개념속에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형식적 무의미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또 어떤사람이 자명한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거나 명백히 모순되는 사실을 주장할 경우에 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 설명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 어떤 설명도 적합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만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질문이다. 이같은 의문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들의 틀이다. 이유가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진술과 말그대로 흔적도 없이 물건이 사라질 수는 없다는 진술은 경험적 진술이나 개념에 비해 훨씬 강한 논리적 성격을 갖는다. 그 진술들은 우리의 경험적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전의 틀을 구성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진술들을 문제삼는 태도는 통상적인 경험적 진술들을 문제삼는 태도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이 진술들은 경험적 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경험적 진리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콜링우드가 밝힌 바 있듯이, 모든 질문은 그 질문이 참인것에 대한 질문인 한에 있어서 전제들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만일 내가 프랑스 수상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경우에는, 이미 누군가가 프랑스 수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또 프랑스의 수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자체가 이미 다른 세부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되는 전제들을 콜링우드는 「상대적인 전제」라고 부른다. 이같은 전제의 {근본 특징은 더 이상의 탐구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데있다. 왜냐하면 이런 전제들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콜링우드가 말했듯이, 이것들은 「상대적인」것이 아니라 「절대적인」전제들이 된다.이런 부류의 진술들을 나는 칸트식으로 「범주적 원리들」이라 부르고, 그 배후에 놓여 있는 개념들은 「범주」라 부르겠다. 그리고 범주적 원리를 무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범주적 무의미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겠다.2. 범주적 원리와 형이상학범주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흄의 성서와 강단형이상학을 불태워야 한다는 주장을 무력화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전제들이 모두 다 세부적인 탐구의 주제가 될 수는 없고,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전제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렇게 전제된 것을 의식하며,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당대의 궁극적인 전제들이 필연적으로 과거의 전제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절대적 존재들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분석활동이 요구되며, 콜링우드는 형이상학자들이 행하는 활동이 바로 이런 활동이라고 주장했다.콜링우드가 이처럼 형이상학을 일정한 종류의 역사와 동일시하게 되었던 이유는 그가 절대적 전제들이란 참·거짓의 구별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에 대한 참·거짓의 판별이 필요없는 것이라면, 서로 다른 전제들간 합리적인 선택의 문제 또한 제기되지 않는다. 만일 형이상학이 합리적인 활동이고자 한다면, 무엇이 전제「되어야」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또한 무엇이 전제「되어있는지」를 해명하는데 전념해야 할 것이다.이런 설명에 담겨 있는 일차적인 난점은 그것을 실제의 형이상학적 활동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콜링우드 자신은 그것이 칸트의 경우에 적용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원리들에 관한 분석론」의 목적은 모든 대상적 사고가 따라야할 필연적 조건들을 밝히는 것이었다. 여기서 칸트가 취한 입장은 단순한 방관자의 입장이 아니었고, 칸트의 이론은 적어도 콜링우드와는 다른것이었다.콜링우드의 이론에 있어서 보다 큰 관심을 끄는 두 번째 문제는 절대적 전제들에 관한 교의가 형이상학을 정당화하는 일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한 형이상학은 절대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바를 진술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전제의 역할을 하는 원리들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것과 하나의 형이상학적 관점을 옹호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할 것이다.앞에서 해명했던 바와같이 형이상학의 특징은 그 포괄적 성격에 있다. 일반사람은 이런 원리를 당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수용하고 있는 원리들을 알아 낸다고 하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그이 형이상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할 수는 없을 것이다.정신만이 실재한다, 혹은 만물은 결국「절대자」에 귀착된다고 말하는 것이 곧 의자와 책상 등과 같이 개별적인 사물들은 상상에 의한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절대자」는 우리가 눈으로 볼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친숙하건 친숙하지 않건 세계의 구성물이 아니다. 이는 형이상학 이론에서의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플라톤은 형상은 진정한 존재자라고 주장했지만,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종교적 실제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라서 그는 신의 실존을 주장하는 견해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다.하지만 우리가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 형이상학자들에 의한 존재에 대한 주장은 전체적인 사물체계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간주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올바른 것이라면 각 형이상학 체계의 중심에는 일련의 범주적 원리들이 자리해게 될 것이다. 이런 원리들은 무제약적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형이상학적 주장의 논리적 성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서 찾을 수 없는것처럼 보여지기도 한다.그러나 이는 분명히 문제를 너무 극단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실제로는 그 어떤 형이상학자도 이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우리에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형이상학자는 자신의 논적들에 대한 반론을 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사례를 제시해야 한다. 많은 형이상학적 논증들은 하나의 이론을 지지하거나 반박하기 위하여 사실들으 인증한다. 그래서 근본적인 형이상학적 이론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혹은 물리치고자 한다면 경험 중에서 이런 저런 측면들은 반드시 일정하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들의 지원을 받지못하는 형이상학체계는 적용될 수 없는 법률체계나 마찬가지이다. 이에따라 형그러나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궁극적인 전제의 기능을 하고있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경험이 해답을 제공해 줄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곧 일련의 범주적 원리들의 수용을 의미하는 한에 있어, 형이상학자들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에 기초를 두고서 자신의 입장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역설 자체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난을 받게 될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논리적 모순에 빠진 것은 아니다. 또한 일부 형이상학자들이 주장하듯이, 형이상학적 진리란 그 진리를 부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바로 그진리를 다시 인정하는 것이 되는 식의 진리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 설사 형이상학적 원리들에 강제적인 어떤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적어도 논리적인 면에서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내가 형이상학적 원리들이고 부른 것은 형이상학적 논증의 전제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그 원리는 하나의 규제로서 기능하였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형이상학자들 사이에는 많은 혼란이 초래되어왔다. 그 결과 형이상학적 논증의 진정한 본성에 대해서도 곡해를 하게되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런 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3. 형이상학에 있어서 증명과 논증, 그리고 원리와 전제17세기의 위대한 형이상학자들은 증명된 지식이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었다.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자체의 내포된 의미에 의해 자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정의와 공리라고 부른 일련의 명제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이를 기초로 삼아서 자신의 철학의 주요 논점들을 엄밀하게 증명해 나갔다. 데카르트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런 체계의 최초의 전제들을 설정하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였다.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도 이런 전제들의 수용 여부를 판가름짓는 궁극적인 기준은 명석성과 판명성, 즉 이성에 대한 투명도에 있다고 했다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