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사회 레포트처음 교수님이 여성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관점이나 생각 등을 레포트로 제출하라고 했을 때 무척 고민을 했다. 여성영화로 어떤 영화를 봐야할지, 또 어떻게 내 의견을 논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중 일찍이 내가 사춘기 때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는 〔델마와 루이스〕라는 영화로 무의미한 일상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모처럼 출발한 휴가 여행이 우연한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도피 여행이 되어 펼쳐지게 되는 두 여인의 행로를 그린 영화이다.전체적인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델마의 남편 데럴은 자동차 부속품 회사의 지점장인데 그는 예쁜 빨간색 스포츠카를 갖고 있다. 그는 아내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를 원한다. 아내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한다기보다 가정생활의 부속품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가정주부인 델마는 덜렁대는 성격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지만, 남편이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여 외출도 매번 허락을 받아야 하는 답답한 현실에 불만이다. 루이스는 웨이트레스로 꼼꼼하고 이성적이지만, 식탁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기만 하다. 그녀는 예전에 어렸을 적 남자에게 강간당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강간범은 결국 무죄로 풀려 나왔다. 그녀는 그때부터 이사회는 철저하게 남성 위주로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여성을 성적 소모품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남자들을 증오한다. 그리고 지금의 생활이 지긋지긋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여고 동창생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주말에 별장을 빌려 함께 지내기로 하고 각자 간단한 메모만을 남긴 채 신나게 여행을 떠난다. 출발은 너무나 상쾌했다.그러나, 고속도로변 휴게실에 차를 세웠을 때 평범한 두 여인들의 여행길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의 긴 여로에 오른다. 남편으로부터의 해방감에 들뜬 델마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을 마시고 모르는 남자와 춤을 추나, 남자는 곧 치한으로 변해 주차장에서 폭력을 휘두르며 강간하려하자 루이스가 권총을 가져와 그를 제지하고 델마를 구해준다. 그때 남자가 성적인 모욕을 가하자 루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총을 쏴 그를 살해한다. 즐거움으로 가득 찬 여행길은 이제 공포의 도주로 바뀌고 델마와 루이스는 극한 상황에 빠져든다. 더구나 루이스의 돈을 제이디 라는 건달 청년이 훔쳐 가는 바람에 델마는 솜씨 좋은 강도로 변신한다.두 사람은 강력범으로 수배되나 형사 할(극중이름)만이 두 여자의 어쩔 수 없는 여정을 알고 그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들이 차를 몰고 가는 동안 유조차 트레일러가 그녀들의 차를 쫓아온다. 그 운전사는 끊임없이 성적 희롱으로 추근덕 거린다. 고속도로변에서 몇 번 그와 마주친 루이스는 그 운전사와 차를 나란히 달리게 됐을 때 뭘 원하느냐고 묻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러자 운전사는 신이 나 차에서 내려 그녀들의 차가 있는 곳으로 온다. 그때 루이스가 묻는다. "만약에 당신의 아내나 딸에게 누가 당신처럼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소?" 운전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험한 욕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때 델마가 총을 꺼내 트레일러의 차 바퀴를 쏴 버린다. 그리고 유조차의 탱크를 쏴 폭파시켜버린다. 경찰의 추격 끝에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된 두 여인. 델마가 루이스에게 그냥 앞으로만 달리자고 소리친다. 서로의 눈빛을 확인한 두사람은 그랜드 캐년의 벼랑 끝을 질주한다.내 생각엔 극적 전환점으로 강간당하려는 델마를 루이스가 구해주려다 폭행범을 죽이게 되는 장면인데 이건 지극히 정당방위였으나, 그녀들은 남성사회의 사법체계의 맞설 자신이 없어 도망치므로 그녀들의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또한 두 여인들이 여행 중 만나게 되는 여러 종류의 남성들 (무심한 남편에서 피터팬 타입의 남자 친구, 예민한 경찰, 그리고 거친 트럭 운전사) 속에서 남자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여성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성보다 더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 인생이 사소한 것 때문에 전혀 다른 길로 빠질 수 있음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그중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있다. 먼저, "우릴 안 믿어 줄 거야, 우리는 여자니깐!" 이란 말이 있는데 델마가 경찰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에, 델마가 할란과 줄곧 부둥켜안고 춤을 추었기 때문에 그가 강간하려 했다는 사실을 경찰이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루이스가 한말이다. 이것은 사회가 여성들의 말을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기에 그들만의 비아냥이 아닌가 싶다.두 번째로,{"만약에 당신의 어머니나 누이나 아내에게 누가 당신처럼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소?"라는 대사가 있는데 고속도로변에서 몇 번 유조차 운전사와 마주친 루이스가 운전사와 차를 나란히 달리게 됐을 때 뭘 원하느냐고 따라 오라고 하고, 운전자가 신이 나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오자 루이스가 물어봤던 말이다. 난 이말 속에서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됐는데 무엇보다도 내가 어떠한 여성을 성적인 매력만을 보며 여성을 평가하곤 했던 것에서 그 상황에 그 여성이 내 누이고 내 여동생이라 생각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에 나를 부끄럽게 했다.세 번째로{"너 깨어있니?""내 눈이 떠 있으니까 그런 셈이지. 한번도 깨어있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뭔가 달라, 그런 거 너도 느끼니?" 라는 도로를 달리는 중의 루이스와 델마의 대화 속에서 남성중심적 사회에 살아가야 했던 그녀들이 눈을 뜨고 있어도 깨어있다는 느낌을 들 수 없었던 이유가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나 사고들의 얽매임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했던 눈은 뜨고 있어도 깨어있고 싶지 않던 그녀들의 아픔을 느낄 수가 있었다.네 번째로,{"내말 들어 봐. 우리 잡히지는 말자. 계속 가는 거야"하며 그랜드 캐년의 낭떠러지로 질주하면서 한 대사가 속에선 여성들에 대한 편견과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그녀들이 선택한 탈출구 였고, 그녀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진정한 해방을 꿈꾸는 마지막 여행이 였던 것이다.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두 여성은 대조적인 성격특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바쁘고 활력 있게 일하는 식당 장면과 남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델마의 주방 장면이 교차된다. 그리고 두 여자는 전화로 여행계획을 이야기한다. 카메라는 양쪽을 넘나들며 원거리 상의 장면을 찍어낸다. 이 장면은 내 생각엔 델마와 루이스의 대조적인 성격과 생활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죽어지내는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델마의 성격이 여기서 확인된다. 루이스와의 전화 통화가 끝난 후, 델마와 남편 대럴의 아침 대화가 시작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남편의 권위적이고 신경질적인 성격과 그것에 아무 저항도 못하고 있는 델마의 소극성이다. 델마의 집안은 매우 어수선하고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은 뒤에 나오는 루이스의 깔끔한 아파트와 매우 대조적이다. 또한 여행을 준비하는 델마와 루이스의 모습도 양쪽을 차례대로 번갈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머리를 말아 올린 채 잡동사니들을 주워담는 델마와 익숙하게 옷가지를 준비하는 루이스의 성격이 다시 한번 대조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성격은 각 사건을 거치면서 변화되어가고 그 점이 중요한 영화의 단서가 되고 있는 듯 하다.처음 루이스가 살인을 저지른 후, 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인 행동을 한다. 흥분한 델마는 자신의 머리를 빗으며, 루이스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려고 애쓴다. 루이스의 사태 주도에 끌려가기만 하던 델마가 처음으로 적극성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남편 대럴과의 전화 통화이후이다. 멕시코로 탈출하기를 결심한 루이스는 델마의 결단을 요구한다. 아직까지도 델마는 '모른다'라는 답변으로 사태를 회피하려하고, 루이스는 이러한 델마의 수동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할 것을 강요한다. 혼란에 빠진 델마의 결정을 내리게 한 것은 대럴과의 통화였다. 사정을 알지 못한 채 델마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당장 집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는 남편에게 델마는 처음으로 반항하며, 남편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즉, 남성이 여성을 억압할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당당히 제시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델마의 성격은, 제이디를 만나 루이스의 돈을 도둑맞는 사건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사태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서슴없이 강도 짓을 저지를 정도로 대담해진 델마는 드디어 루이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그들의 저항에 나서기 시작하며, 교통 경찰을 트렁크에 밀어 넣으면서부터는 루이스를 능가하는 기민함과 사태장악력을 갖추게 된다.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에 대해 알기 위해선 다른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만의 특성을 알아내는 게 우선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먼저 서구인의 심리와 한국인의 심리를 비교해보자면 서구인의 사고는 개인주의적이고 원칙에 충실하며 정직성에의 추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반면 한국인은 상황 중심적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서양의 문화가 예약문화라면 한국의 문화는 상황을 고려하는 인정문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계약문화는 남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며 합의논리에 근거, 원칙, 실용성, 이성 등을 가치롭게 여긴다. 실례로 외국인 교수들은 대부분 성적에 출석을 많은 비중을 두는 경향과 수업시간에 지각하는 것을 잘 허락 하지 않는 경향이 보인다. 반면 한국의 인정문화는 심정논리에 근거 상대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계약보다 상황을 중시하며 덕, 인정, 도리 등을 가치롭게 여기는 것 같다. 일전에 내가 뉴스로 접한 얘기인데 훌륭한 부정에 의해 풀려난 고교생 절도범이 있었는데 상대의 불행에 대한 심정적 이해가 법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우이며 한국인의 인정문화의 한 실례라고 하겠다.또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 비교해보자면 일본인의 심리저변에는 의리가 있고 한국인의 심리저변에는 정이 있다고 하는데, 일본인의 의리는 사적관계까지 지배하며 이것은 의무와 비슷한 개념으로 일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자식간의 의무에서 출발한다. 의무를 '기리'라고 하는데 기리가 발전해서 아마가 된다. 아마는 한국의 정과 비슷한 개념이나 일본인은 아마를 기리보다 하위에 두고 아마의 관계에 대해 조심스러워 한다. 아마의 관계는 공적인 질서를 해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정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데 반해 일본인은 아마의 장점과 단점을 뚜렷히 구분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인은 이성적이고 공적인 부분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반면 한국인은 감정적이고 사적인 부분에 상대적으로 가치를 더 많이 둔다고 하겠다.이렇듯 다른 나라사람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은 크게 상황 중심적이성을 강하게 보이고 이로써 다른 심리적 특성들이 파생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파생되는 다른 심리적 특성들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한국인만의 심리적 특성인 정, 한, 핑계, 눈치, 체면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잘 알려진 특성들이라 제외하려 했으나 내 생각엔 그래도 한국인의 심리 특징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라 실례 몇 가지만 들고자 한다.먼저, 정과 한이 잘 나타난 한 예로 93년도 한 신문에 게재된 대한약사회 광고의 헤드라인은 두 가지 점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광고를 게재하게 된 동기는 한약 조제 권 문제와 관련된 분쟁에서 약사의 입장을 옹호하는데 그 광고의 목적이 있었으며, 그 광고의 헤드라인은 우리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이었다. 이 헤드라인에서 먼저 나의 주목을 끄는 점은 단순히 시민이나 시장 인이 아닌 공적단체인 대한약사회 에서 아주머니나 아저씨들의 싸움 또는 논쟁에서나 사용되는 억울하다 는 말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억울하다는 말은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 사안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객관적 논리의 전개라기 보다는 개인의 주관적 심리상태를 심정적으로 토론하는 주관논리에 근거한 호소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을 신봉하는 전문가 집단인 대한약사회가 이처럼 주관적 심리에 호소하는 광고를 게재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다른 한편 광고가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이 광고는 한국인의 심층심리에 찰떡같이 달라붙는 과학적 광고의 살아있는 한 예라고 생각된다.또 다른 특징 중 하나인 핑계의 한 예로 일본사람들과 비교하자면 한국인은 니 탓 을 많이 하고 일본인은 내 탓 을 많이 한다. 일본의 기업이 도산할 때 사장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지지만 한국의 기업체에서 사장이 책임을 자인하면 용서되지 않고 매장 당하므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의 '오야붕'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집단주의적 오야붕인 반면 한국의 '오야붕'은 이기적인 '오야붕'인 것이다.그리고 또 다른 예로 지난주에 나는 한 미국 교포 언론인이 쓴 글을 읽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한국인들은 평생을 남의 안색을 살피며, 꾸중을 들으면서 산다고 한다. 어릴 때는 부모와 집안 어른의 안색을 살펴야 하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선생님 안색을, 직장에 들어가서는 선배와 상사의 안색을 살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은 환갑을 넘어서도 보스의 안색을 살피면서 공천을 제대로 받을지 걱정을 하고, 그리고 제일 황당한 것은 교회에 가서도 목사의 안색을 살피게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교회 출석률이 저조하거나, 새벽기도 참석자가 적거나, 헌금 액이 저조하면, 목사는 강단에서 성도들을 향해 예배당이 쩡쩡 울리도록 꾸짖기 일쑤다. 라는 글을 그는 서슴없이 쓰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국민으로 잘 살아가려면 어려서부터 소위 눈치를 잘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눈치 살피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그리고 우리나라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인 체면의 한 예로 우선 우리나라는 체면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무릇 언어라는 것은 그 나라의 가치관과 문화가 묻어 나오기 마련인데 우리나라 속담에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체면 관련 속담들을 예로 들자면 양반이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 냉수 먹고 이빨 쑤신다 , 동냥치가 동냥치를 꺼린다 등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만 금 뺐지를 가슴팍에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나라의 체면의식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들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내가 나름대로 찾게된 몇 가지의 어쩌면 주관적인 한국인의 심리특성들에 대해서 찾아보았다.먼저, 한국인에게는 동반자살이 많은 것 같다. 자살도 문화에 따라 동기와 유형이 다르다. 한국에서 부모가 자식을 데리고 자살하는 이유는 심정논리에 근거해서 자식을 자신과 동일성정'에서 자식에 대한 사랑의 한 표현인 것 같다. 실례로 고난의 시기였던 IMF의 위기를 국면 했을 때 한 어머니가 자식을 아파트에서 강제로 뛰어내리게 한 후 자신도 자살을 하는 외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부모 자식간의 동반자살이 있어 나를 안타깝게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밖에도 비슷한 동반자살 사건들이 많아 우리나라 사회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도 했었던 적이 있었다.그리도 둘째로 이것은 교수님이 한 예를 들어 준 것인데 한국 여자들은 가짜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가짜를 산다는 것은 싸구려 상품들은 쉽게 살수 있기 때문에 비싼 상품을 가짜로 산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과 여학생들에게 물어본 결과 대다수가 비싼 특정 브랜드 상품을 갖고 싶지만 너무 비싸기 때문에 살수는 없고 그래도 갖고싶은 마음이 강해서 가짜라도 사서 대리만족을 한다는 것 이였다. 그런데 내 생각은 열등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된 과시인 것 같다. 자신의 열등함을 가짜라도 비싼 특정상품을 소유함으로써 그 특정상품을 소유하지 못한 상대적 박탈 감으로 느껴지는 자기 내적인 불쾌감을 소멸시키려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더 특징적으로 한국여자들에게 국한 적으로 나타나서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세 번째로 한국사람들이라면 다 공감할 수 있는 말인데 우리나라는 유교적인 전통사상 때문에 남아 선호 사상이 발달되어 왔다. 그래서 아들과 딸에 대한 구분이 유난히 뚜렷하다는 것이다. 예전에 한때 많은 시청률을 기록한 TV프로그램 중에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극중에서 아들은 귀남이 딸은 후남이라는등장인물이 나오는데 이름에서부터 알다시피 아들과 딸의 차별이 심했고, 그로인해 딸은 아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졌으나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안타까운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결국은 딸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장래를 키워나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당시 여성들이 유교적 전통사상이 깊게 자리한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극중 드러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런 여성불평등 현상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아직도 한국사회에 깊게 자리한 유교적 가치관은 남아 있는 것 같다.그리고 이것은 어떤 이가 인터넷 상에 올린 글을 인용한 것인데 네 번째로 우리나라는 밥그릇 숟가락이 네 것 내 것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밥그릇은 보기에도 많이 담겨 보이고 실제로 많이 담기는 사다리꼴이요, 엄마 밥그릇은 보기에는 적게 담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이 담기는 구형이요, 아이들 밥그릇은 보기와 실제와 같은 원통형이요, 머슴 밥그릇이나 사랑방 손님 밥그릇은 보기에는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게 담기는 역 원추형이고 반면에 미국 가정에서 스푼·포크·나이프·그리고 접시는 공용인데 비해 우리의 것은 전용이다는 것이다. 이부자리도 그렇다. 구미인은 공용의 시트만 갈아 끼울 뿐 네 이불·내 이불, 내 요·네 요가 따로 없다. 그러기에 아무런 저항 없이 쓰던 의식주의 일용품을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것이다. 한 집안이란 공간에도 보이지 않는 벽으로 차단된 전용의식의 짙게 깔려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깥주인이 밤 아닌 대낮에 안방의 문을 밀고 든다는 법은 있을 수 없고 또 사나이가 부엌에 드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공간 점유가 거부된다. 한국인은 같이 사는 같은 집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가려진 수많은 전용 공간을 회피해 가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전용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로 한국인은 유목민인 유럽이나 중앙아시아 사람과는 달리 일찍 정착한 농경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유목민의 생명원인 목초지는 네 것 내 것이 없는 공용인데 비해 농경민의 생명원인 토지는 네 것 내 것의 한계가 뚜렷한 전용이다. 유목민은 부족 집단으로 이동하고 또 집단으로 취사를 하며 집단으로 잠을 자는 데 비해, 농경민은 가족 집단으로 정착하고 가족끼리 취사하며 가족끼리 잠을 잔다. 부족 공동이 가족 공동보다 의식주의 기구를 공용하는 데 훈련돼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