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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중세시대의 환관과 공녀
    환관과 공녀라는 말, 솔직히 우리역사에 약소국으로서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고 그 가운데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다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는 아마도 국수주의라서 그럴까? 우리가 사대주의가 있었고 공물을 바쳤다고만 서술되었지, 중세시대를 통털어 정치·군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아래 그렇게 심하게 간섭을 받으며 환관과 공녀를 바치고 애통한 역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병자호란이나 전란에만 끌려간 게 아니라 약소국으로서 눈물을 머금고 보내야 했던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역사 중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중세시대에 중국에 공물로써 보내지던 것 중에 환관과 공녀. 화자(고자)와 처녀(공녀)의 공납은 한국과 중국간의 조공 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 조공으로 보내던 공물 가운데는 우리나라의 특산물만이 아니라 내시로 쓰기 위한 생식기가 거세된 화자와 궁녀로 쓰기 위한 어린 처녀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화자와 처녀들이 중국 땅으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중국에서는 막대한 양의 공물과 화자,공녀를 요구함으로써 고려와 조선에 대한 고도의 복속정책 내지 종속관계의 강화를 꾀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지배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중국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고려와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것이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도 중국과의 사대관계상 실리를 챙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 황실에서 고달픈 타향살이를 하는 환관 중에는 그래도 출세해서 금의환향하는 행운을 누린 자도 있었고, 끌려간 처녀들 역시 황후까지 올라 부귀를 누린 이도 있지만, 대부분 황족이나 귀족의 노리개 구실을 하고 또는 매춘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애꿎은 백성들만 양쪽 국가의 지배자들 사이의 이익을 위해 사용된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우리가 많았지만, 고려가 항복을 하고 사실상 원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부터는 본격적으로 화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화자를 바쳤고, 대상이 원에서 명나라로 바뀐 차이밖에 없다. 조정에서는 선발된 고자들에게 의복이나 신발 등을 주고, 그 가족에게는 부역을 면제해 주거나 곡식을 하사하였다.원나라로 간 고려의 화자들은 궁궐의 환관이 되었다. 그들은 귀족의 시종과 재물의 출납 등에 재능을 보여 황제들의 신임을 받고, 고위 관료에 임명되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재상과 맞먹을 정도의 권세를 누리고, 원나라의 관직뿐만 아니라 고려의 관직이나 작위도 받았다. 이러자 환관을 부러워하여 가족이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거세하는 자들도 발생했다니 정말 권력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한다.공녀로 원나라로 끌려가서 궁녀에서 황후에까지 오른 기황후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특히 독만질아, 박불화, 고용보 등의 고려출신 환관들의 역할이 큰 몫을 하였다. 이들은 기황후의 심복으로서 그녀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원한 전형적인 음모가이며 동시에 비상한 수완가였다. 이들 고려 출신 환관들은 사실상의 기황후의 친위부대라고 할 수 있는 자정원당을 형성하여 원나라 황실과 조정에서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했고, 원과 고려의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사 에서 환관 고용보는 황제의 총애를 믿고 의지하여 조정을 어지럽히고 상벌을 제멋대로 하였으며, 승상과 오고가며 거리낌없이 만났다. 라는 것만 보아도 이미 이들의 권력이 승상을 능가하는 정계의 막후 실력자임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에 끌려간 화자들은 명나라 환관이 되어 황실의 인정을 받고 수시로 사신이 되어 조선에 파견되었다. 조선 출신의 환관 사신들이 조선에 파견되어 오면 황제의 권위를 믿고 명나라 출신의 사신 못지않게 거만하게 굴면서 여러 가지 물품을 요구하거나 행패를 부렸다. 조선인 사신들이 요구하는 물품이나 선물은 중국인 사신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출신이야 본국의 미천한 고자에 불과했지만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온 사 예를 지나치게 한다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지만, 이는 실리적인 외교상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 나라의 통치자의 입장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수모를 감내한 것 일거라 생각한다. 사신들은 대접 외에도 조선의 관리들의 인사에도 관여해서 승진을 요구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고향 승격 등 무리한 요구들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출신 사신들이 고국에 폐해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때때로 조선측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외교상의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자신들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한 가급적 조선의 대명외교에 도움을 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조선에 이익보다는 해를 더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환관과는 별도로 궁녀, 황족의 혼인 상대자, 고관대작의 처나 첩 등의 필요성 때문에 고려와 조선의 처녀들을 계속해서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였고, 그 내면의 진정한 목적은 역시 고려와 조선에 대한 복속 정책과 종속관계의 강화에 있었던 것이다.주로 평민이나 낮은 권력의 사람들의 자식이 공녀로 보내어졌는데, 돈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사신에게 뇌물을 주는 등으로 공녀에서 제외되었다. 대부분의 힘없는 자들인 평민들은 자기 자신이 원치 않는 데도 어쩔 수 없이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 하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중국에 가서 거의 성폭력에 가까운 성적노리개의 하나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 말로하면 유전면제 무전공녀 인 것이다. 물론 그 중 몇몇은 황후나 황족이나 대신의 배필이 되는 등 그나마 좋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과연 이들의 아픔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이렇게 보낸 공녀의 수는 몇 천명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에서 공녀를 보낼 것을 요구하면 공녀로 보낼 예쁘면서도 나이가 어린 그런 여성을 찾기 위해 임시기구를 설치했고, 중국에서 공녀를 요구하는 시기에는 더더욱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론하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하도록 하는 등 공녀를 찾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처녀사냥이 일어났다. 이것은 국사를 뒤로 한 채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리들이 이 일에 매달려야 했으니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그만큼 공녀를 찾는 일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백성들은 자신이나 자신의 자식들이 공녀로 선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딸을 몰래 시집보내는데, 심지어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유모가 안고 시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처녀를 숨기는 것이었다. 병을 구실로 내어놓지 않는 사람이나 나이를 속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부득이한 경우 나이 비슷한 다른 못생긴 처녀를 대신 내어놓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혹은 뽑혔다 해도 스스로 삭발을 하거나 약을 발라 얼굴을 상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어떤 처녀는 중풍에 걸린 사람처럼 일부러 입을 비뚤게 하였고, 어떤 처녀는 다리를 고의로 절뚝거리는 등의 꾀를 부렸다. 이런 방법들이 들통이 났을 경우 관직을 삭탈하거나 가산을 몰수당하거나 혹은 귀양이 보내졌다. 조정에서는 전국의 모든 전·현직 관리의 딸, 그리고 관청의 노비를 신고토록 하고, 만약 처녀를 숨기거나 다른 처녀를 내놓는 자들은 물론, 해당 지역의 지방 관리들까지도 엄벌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을 통하여 조정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처녀를 선발하려 하였고, 이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공녀로 가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공녀에 대한 백성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불행하게도 공녀로 선발되어 이역만리 중국으로 가야하는 처녀들과 가족들 중에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는 자, 목을 매어 죽는 자, 또한 기가 막혀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고 실명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이다. 공녀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겨울에 끌려가기라도 하면 찬바람과 추위를 견뎌내야 했으며, 중국으로 끌려가면서도 호송하는 환관들이 고자인 주제에 감히 처녀들에게 마음을 두어, 그의 마음이 얼마나 원통했을까?고려사 세가에는 80년간 모두 50차례에 걸쳐 공녀가 원으로 보내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고 누락된 부분과 중국의 고관에게 끌려간 허다한 여인들까지 감안하면 실제로 끌려간 공녀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이런 많은 고통을 위로해주고 회유하기 위한 차원에서 조정에서는 가족들에게 관직이나 물품하사 등의 각종 혜택을 부여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물품이 내려졌으며 중국에서도 여러 가지 은전이 내려졌다. 그밖에 궁녀로 끌려간 처녀들의 일가친척에게도 많은 혜택이 부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 공녀로 보내지는 여성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정말로 위로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또 이러한 것들은 단지 공녀의 가족들에게 주어지는 것 일뿐, 실제적으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공녀에게는 이러한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고 단순히 고통만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가족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강제적으로 끌려가는 것이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가족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물품들을 보내 줘서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행복하게 해준다 하여도 그것이 자식을 공녀로 보낸 슬픔이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몇몇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고려·조선인들은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공녀를 이용하여 영달을 꾀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 자들도 간혹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하여 자진해서 딸을 중국인들에게 상납하였다. 어쨌든 딸을 이용하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 자들에게는 아들보다 딸이 더 중하게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天命下父母心 不重生男 重生女 라는 백낙천의 시를 읊조리며 이러한 풍조를 비웃었다. 그 당시의 한이 가슴에 느껴지는 시다. 아무리 돈이나 권력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는 사람이 먼저여야 하는 게 아닌가? 돈을 위해 자신의 한 핏줄인 딸을 공녀로 다.
    독후감/창작| 2004.10.01| 5페이지| 1,000원| 조회(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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