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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국가운영체제와 중앙정치기구
    유교이념에 입각한 조선의 국가운영체제목 차Ⅰ. 머리말Ⅱ.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조선의 국가운영체제Ⅲ. 조선의 중앙 정치구조Ⅳ. 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불교를 숭상하고 귀족 중심의 체제였던 고려사회를 뒤로하고, 새롭게 개창된 조선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표방하여 유교정치의 실현을 꿈꾸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표방하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유교정치를 실현하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점차 사회적, 정치적 안정 속에서 정치기구와 통치체제를 국왕과 신료들이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해 덕치·인정을 베풀어 모든 백성이 유교를 생활화된 정치를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조선이 유교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은 크게 태조, 태종, 세종대로 나뉘어 살펴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시키는가, 신권을 강화시키는가, 아니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느냐를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조선 6대왕인 성종대에 들어서 비로소 양반관료체제에 입각한 조선의 중앙정치기구가 완벽하게 확립되는 계기가 된다. 앞으로 본문에서 다룰 내용은 이러한 조선이 유교정치의 이념을 표방하며 실현해나가는 모습을 통해 확립되어 가는 국가운영체제에 대해 살펴보고, 양반관료체제에서 형성되었던 조선의 중앙정치기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 조선의 국가운영체제유교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유교정치에 적합한 정치체제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며, 유교적 교양을 가진 군주와 관료가 있어야 하며, 정치적 안정과 왕권의 강화도 불가결하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신하는 왕을 존중하고, 왕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어야 유가에서 이상으로 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이상적인 유교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에 적합한 정치·제도 위에 유교의 교양을 갖춘 올바른 군주와 신하가 서로 만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태조인 이성계는 개국 군주답게 왕권은 확고하였으나 당시 고려왕조에서 조선왕조로 교체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적·사회심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온 것이 아닌 정도전·조준 등의 소수의 재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가 행해져 왔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운영체제는 도평의사사의 공신들의 불평과 불만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교정치에서 이상적이지 못한 체제였다.정종 2년, 정안군 이방원(태종)에 주도하에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개편하게 된다.) 의정부의 개편에 관련해서는 밑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다시 말하면 태종이 즉위 후 의정부관제를 개편하여 최고 정치기관으로써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면서 의정부서사제로 변모하게 되었다.) 의정부서사제는 의정부대신들이 논의를 하여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를 해나가는 체제로 유교정치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의정부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의정부의 권력을 6조에 분산 시켜 의정부는 정치권력의 핵심에서 제외되었다.이후 조선의 국정운영의 모습은 태종 14년 4월 이전과 이후로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종 14년 4월 이전에는 국정 대부분이 의정부의 의의(擬議))를 거쳐 시행되었기 때문에 의정부의의가 의정부에 정치권력이 집중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정부의 의의는 사라지고 6조의의가 대신하게 되면서 정치권력이 6조에 분산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의정부·6조의의, 의정부·6조·대간 동의가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승정원·공신까지도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태종은 몇몇 재신에 집중되어 있던 권력을 분산시키는 국정운영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강화·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흔히들 6조 직계제라고 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훙거한 이후에도 이른바 6조직계제는 지속되었으며, 중요한 국정은 해당 조서와 의정부, 6조의 동의하에 계하는 국정운영방식이 진행되어져 왔다. 세종 18년 의정부서사제가 실서 의정부서사제로 바뀐 것은 세종 18년 4월로 되어 있다.) 태종 14년 이후 당시 태종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정부·6조·승정원·대간 등 중요 정치기구의 권력을 분산시킨 상태였다. 이러한 국정운영체제가 유교정치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지만 유신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총체제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세종이 즉위하고 18년 경, 유교정치를 담당한 유신들이 충분히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유교적인 의례·제도도 상당 수준으로 정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운영체제 또한 유신들이 이상으로 하는 총재제로 돌아갈 단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종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국왕에게 폭주되는 직무를 처리해야하는 6조직계제를 계속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세종대의 경우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고, 왕권이 확립된 시기에서 진행된 의정부서사제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유지하면서 유교정치에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되기도 하였다. 의정부서사제는 “6조는 각기 그 직사를 모두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는 가부를 헤아려 의논한 후 계문(啓門)하여 재가를 받아 다시 6조에 내려 시행한다. 다만 이·병조의 제수, 병조의 용군(用軍), 형조의 사수(死囚) 외의 형결(刑決)은 그대로 본조에서 직계하여 시행하되 곧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의정부에서 살펴 논박하여 다시 계하여 시행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직무는 직접 보고받음으로 인해 왕권은 유지·확보할 수 있고, 의정부에서 국정을 총령(總領)함으로써 폭주하는 6조의 직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정치에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유자적 소양을 가진 세종과 관료들의 조화로 이뤄진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하지만 의정부서사제는 정치가 불안해지고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깨지면 유지할 수 없었다. 문종과 단종이 차례로 즉위 후 세조가 쿠데타로 얻게 된 왕위는 정통성과 명분의 약화로 또 다시 6조직계제라는 국정운영으로 바뀌게 된다. 의정부서사제는 앞에서도 말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태조와 태종을 거쳐 유교적 정치기반을 다지고 세종의 유교적 소양이 더해져 이뤄진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Ⅲ. 조선의 중앙 정치구조조선의 중앙 정치구조는 개국과 함께 고려의 관제를 계승하면서 성립되었다. 그러나 도평의사사체제에서 의정부·6조체제로 개편되었다. 의정부·6조가 태종대 이후로 국정의 중추기관이 되었으며, 이후 승정원, 삼사에 해당하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 예문관·춘추관·성균관·의금부·한성부 등 대부분의 정치기구의 운영과 관련한 것은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다음 내용에서 조선의 중추기관이었던 의정부와 6부, 중앙 정치기구들의 기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1. 의정부의정부(議政府)는 정종 2년에 아우인 이방원이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도평의사사를 개편하면서 성립된 것이다. 성립되었을 당시에는 명칭만 바뀌었을 뿐 그 기능과 구성원은 도평의사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태종 5년 의정부는 정치만을 관장하고, 의정부 관원으로만 구성하게 되면서 독자적인 의정부제로 정립되었다. 기능은 최고 국정·의결기관으로써의 기능, 논도경방(論道經邦: 나라를 다스릴 길을 놓아 국가를 경륜함. 출전 서경)·섭리음양(論道經邦: 재상이 천하를 조화롭게 통치함을 비유)의 기능이 융합되면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법제적인 기능이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왕권의 강약, 의정부 구성원의 자질, 6조·승정원·3사와의 국정운영을 둘러싼 상호관계, 원상제(院相制)운영 등의 요소와 관련하여 의정부의 기능이 강화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였다.) 참여 범위는 정치·군사·경제·사회·문화·외교 등 전반적인 국정을 참여하였다.의정부의 정사는 구성원의 직질·기능과 관련하여 대개 3의정(영·좌·우의정)이 찬성 이하의 보좌를 받아 합의로써 처리되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국왕의 총신을 받는 한 두 의정이 의정부의 업무를 천단하는 경우도 있었다.2. 6조6조는 고려 말의 6조를 계승하여 정 3품아문으로 성립되었다. 태종 5년에 정 2품아문으로 격상되면서 서정을 분장하고경제·사회·문화·군사·외교 등 전반적인 국정업무를 관장하는 일이었다. 이조는 문선(文選)·훈봉(勳封)·고과(考課) 등의 문관의 인사 및 고과를 관련하여 정사를 관장하였으며, 호조는 공직(貢職)·전량(錢糧)·식화(食貨) 등 국가 재정과 회계 업무를 관장하였다. 예조에서는 예악(禮樂)·제사·연향(宴享)·조빙(朝聘)·학교에 관한 정사를 맡았다. 병조에서는 무선·군무·의위(儀衛)·우역·병갑(兵甲)·기장(器仗)·문호(門戶)·관약(管?)등 무관의 인사와 군사관련 업무를 관장하였다. 형조는 법률, 상언, 사송 등의 법률, 재판과 관련 행정을 도맡았으며, 공조에서는 산림·소택·공장·건축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다.3. 삼사⑴ 사헌부조선 개국과 함께 고려 말의 사헌부를 계승하였으며,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 지평 1인과 감찰 5인으로 법제화되었으며, 그때그때 정사를 논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풀어주며, 남위(濫僞)를 금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실제 기능은 법제적인 간쟁·봉박·서경은 물론, 일반적인 참정·시신(侍臣)·형정 등의 기능을 광범하게 발휘하였다.⑵ 사간원태종 원년 의정부에 소속된 문하부를 혁파할 때 문하부에 소속되어 헌납간쟁(獻納諫諍)· 박정차제(駁正差除)·수발교지(受發敎旨)·통진계전(通進啓箋)의 기능을 수행하던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면서 성립되었다. 성종 원년에 정언 2인으로 증원하여 왕에게 간쟁 및 논박하는 일을 관장하였다.⑶ 홍문관세조 2년에 집현전을 혁파한 이래로 문운의 진흥과 유학자의 양성을 도모하기 위한 기구를 확대하면서 운영해 온 예문관의 관원과 직장 중에서 성종 9년에 본래의 예문관 직장·관원은 예문관에 존치시키고 구제의 집현전계 직장·관원을 홍문관으로 독립시키면서 성립되었다. 홍문관은 궐내의 경적을 관장하고, 문한을 다스리며 왕의 고문에 대비하는 일을 맡았다. 홍문관 관원들은 국왕과 빈번히 접촉하면 경사를 강론하였고, 수시로 승자·승직의 특전을 받았으며, 대부분 대간으로 체직되는 등 당시의 엘리되었다.
    인문/어학| 2011.11.12| 5페이지| 1,500원| 조회(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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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가수다`의 마케팅적 성공요인
    ‘나는 가수다’의 마케팅 관점의 성공요인목 차Ⅰ. 머리말Ⅱ.‘나는 가수다’의 프로그램 소개Ⅲ. ‘나는 가수다’에 대한 마케팅 전략 및 성공요인Ⅳ. 맺음말Ⅰ. 머리말현재 미디어매체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에 관한 마케팅 전략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나 요즘 화제 거리 중 하나인 ‘MBC 우리들의 일밤 - 나는 가수다’가 대표적인 하나일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는 가수다(나가수)’를 통해 현재 음반 판매순위를 상위차트에 진입되어 있는 가운데 하루 매출이 1억 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앞으로 볼 내용은 ‘나는 가수다’를 통해 볼 수 있는 마케팅 전략에 대한 성공요인에 대해 알아보겠다.Ⅱ. ‘나는 가수다’의 프로그램 소개현재 아이돌 그룹과 댄스음악으로 편중된 방송 가요계에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무대를 제공하며, 실력 있는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취지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가창력 소유자들이 경쟁이라는 서바이벌을 통해 흥미를 주고 가수들의 노래에 감동을 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이 프로그램이 현재 초유의 관심을 두고 있는 가운데 룰을 가지고 서바이벌 미션을 진행하여 개그맨 매니저와 가수가 대결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송 사상 프로그램의 PD가 교체되는 등 많은 논란을 가지고 있으면서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다시 시작된 ‘나가수’는 한 번에 탈락되는 진행방식을 두 번의 공연을 통해 합산 점수에 최저점을 기록한 가수가 탈락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청중평가단 투표제도 또한 1인 1선택에서 1인 3선택으로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되어 안정적이고 객관적인 평가가 나올 것입니다.Ⅲ. ‘나는 가수다’에 대한 마케팅 전략 및 성공요인1. 숫자 마케팅‘7’이라는 숫자를 통해 7명의 가수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음악 색깔을 7가지 색깔로 표현하여 7명의 가수를 표현하고, 제목에서 나는 가수다에서 가부분에 ‘ㄱ’을 7로 표현하여 더욱더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경험으로 ‘나가수’를 시청하면서 프로그램 마크가 화면 상단에 띄어졌을 때 어찌 저렇게 7이라는 숫자를 강조할 수 있을까하는 감탄과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로 하여금 관심을 더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생산자의 재화가 소비자인 시청자들에게 더욱 더 쉽게 각인 시킬 수 있도록 단순하게 숫자를 활용하여 함축적으로 전달하게 되었다. 숫자는 보다 글보다 이미지 전달력이 우수하기 때문에 나의 경험과 같이 소비자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2. 버즈 마케팅(구전 마케팅)‘나가수’는 녹화과정에서 청중평가단을 모집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프로그램과 소통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또한 청중평가단이 1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남녀노소 다양하게 500명을 모집하고 베테랑 가수들의 음악을 들은 감동을 자연스럽게 TV시청률로 가져가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감동을 받은 평가단과 시청자들은 웹사이트와 구전을 통해 ‘나가수’에 대한 광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시청률이 높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케팅은 요즘 스포일러 형식으로 나타나 또 다른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스포일러란 미리 음원이나 영상 등을 미리 다른 독자 및 시청자, 네티즌에게 미리 밝히는 행위나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나가수’에서는 주의하겠다고 하였지만, 이로 인해 발생되는 노이즈로 인해 관심을 받는 것에 감사하다고 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스포일러로 인해 홍보되는 효과가 높다고 볼 수 있다.3. 리얼 마케팅이 프로그램은 서바이벌을 소재로 하여 가수들이 극도로 긴장하고 그로인해 눈물 흘리는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방송에서는 다방면에서 생존, 버라이어티, 다큐, 토너먼트, 서바이벌 등의 소재로 ‘리얼(Real)’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방송의 경우 치밀하게 각본을 짜서 연출이 된다. 인터뷰와 중간평가를 통해서 그들의 노력과 긴장감을 토로함으로써 더욱더 리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4. CO 마케팅(공동 마케팅)매회 거듭할수록 탈락한 멤버를 대신한 새로운 멤버와 기존 멤버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지고 있다. 특히 임재범의 경우 앨범 수록곡이었던 ‘너를 위해’를 비롯하여 경연에서 불렀던 ‘빈잔’과 ‘여러분’을 상위 음반차트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그래서 가수는 대중들의 관심은 물론 음반 수익까지 얻어지는 효과를 가집니다. 이러한 전략은 프로그램과 가수간의 WIN&WIN전략이라 볼 수 있다. 서로 각자 가수와 프로그램 간의 잘하는 것을 잘해야 하는 것이 CO마케팅의 기본 조건이 되며, 서로 WIN&WIN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예체능| 2011.05.28| 3페이지| 1,500원| 조회(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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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화선목 차Ⅰ. 머리말.Ⅱ. 취화선의 역사적 배경.Ⅲ. 진경산수화.Ⅳ. 영화 속의 장승업.Ⅴ.문화 콘텐츠와 취화선.Ⅵ. 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영화 ‘취화선’은 조선후기의 혼란한 사회에 김홍도, 신윤복과 더불어 조선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던 장승업의 일생에 대하여 그린 영화이다. ‘취화선(取畵仙)’은 술을 즐겨 마셨던 천재 화가 장승업을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에 비유한 말이다. 아까 앞에서 말했듯이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과 함께 조선 화단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천재 화가로서, 한국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루었으며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으로 생기 넘치는 작품을 남겼다. 장승업은 1897년에 생을 마쳤다. 그러나 아무도 장승업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모른다. 그의 화풍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호방하고 활달하여 격조 면에서보다는 기량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대표작으로는 , , , , , , 등이 있다. 그는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조영모(花鳥翎毛), 기명절지(器皿折枝), 사군자 등 여러 분야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으며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지금부터 취화선의 역사적배경과 진경산수화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고 영화 속 장승업의 모습과 문화콘텐츠와 취화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Ⅱ. 취화선의 역사적 배경.‘취화선’을 그린 시기는 조선 철종 시대부터 고종 시대까지 그린 영화이다. 먼저, 철종시대는 순조 시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세도 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三政,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철종 대는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다.장승업의 주요 활동 시기는 고종 시대로서,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에 걸쳐 그려진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발전한 것으로, 앞 시기의 경향에 비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했을 뿐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 특색을 뚜렷하게 창출하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적 변동과 의식의 변모를 배경으로 유행했는데, 특히 종래의 방고(倣古)) 행위의 형식화와 그 표현의 상투화에 대한 반성에서 당대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추구하고 재인식하고자 했던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했던 문인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의 확산에 의한 탐승유력(探勝遊歷) 풍조)의 성행과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에 따른 문화적 고유색의 만연 및 자주의식의 팽배 등도 진경산수화의 발전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조류의 이념적 성향은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老論) 문인사대부들과 남인(南人) 실학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실경의 소재는 조선 초기·중기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중거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화풍은 종래의 실경산수화 전통에 18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가미하여 형성되었으며, 정선(鄭敾)에 의해 대성되었다. 정선은 금강산과 영남지방 및 서울 근교일대를 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토대로 표현, 새로운 화격을 이룩함으로써 전통 실경산수화의 면모를 일신하고, 진경산수화풍의 정형을 수립했다. 그의 진경화풍은 기존화법과 남종화법을 우리 산천의 형상에 어울리는 필법으로 소화해낸 것으로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큰 특색이 있다. 그리고 양식적으로는 부감법(俯瞰法))의 시각에 동적인 대각선이나 사선을 활용한 화면구성법을 비롯하여 부드러운 피마 준법(皮麻?法))과 듬성한 태점(苔點)), 괴량감(塊量感))넘치는 짙은 적묵(積墨))의 바위와 능란한 편필(偏新)·엄치욱(嚴致郁)·이재관(李在寬)·김하종(金夏鍾)·유숙(劉淑) 등의 화원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풍은 정선파와 김홍도파 이외에도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강세황·허필(許?)·정수영(鄭遂榮)·윤제홍(尹濟弘)·정철조(鄭喆祚)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 높은 화법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전개에 기여했다. 이와 같이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근대이행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한국적 화풍의 수립과 함께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정치권의 보수화 추세에 의해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이 득세함에 따라 쇠퇴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에 걸쳐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리는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양식보다는 정신적 배경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Ⅳ. 영화 속의 장승업.1. ‘취화선’의 줄거리와 등장인물(1)줄거리어린 장승업은 선비 김병문의 손에 구해지고 장승업의 그림실력을 눈여겨 본 김병문은 역관인 이응헌의 집에 보낸다. 시간이 지나 대화원 유숙의 문하에서 정식 그림지도를 받게 한다. 그림으로 이름을 떨쳐가던 장승업은 술자리에서 몰락한 양반의 딸로 기생이 된 매향(유호정)을 만난다. 돌아온 후 김병문은 오원이라는 호를 지어주지만 자신의 출신과 직업화가라는 것을 천시하는 양반들에게 모멸감을 느낀다. 장승업의 화명이 높아져 궁궐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지만 답답한 궁궐생활은 그를 탈출 하게 하고 지방 토호의 그림을 그려주다 동학군으로부터 ‘지배층에 기생하는 존재’라는 말을 듣고 괴로워하며 매향을 찾기 위해 제주도까지 갔던 장승업은 김병문과 재회한다. 서울로 돌아와 우연히 매향을 만나게 되며 방에 놓은 항아리를 바라보던 장승업은 그릇을 빚어낸 노공의 손길이 편안하고 담담하다는 매향의 말을 듣고 또 다시 유량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역사적업과 주변인물들?장승업오원(吾園) 장승업(1843∼97)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과 함께 조선조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천재화가다. 장지연이 적은『일사유사』에서 장승업은 중인으로 추정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잃고 거지처럼 떠돌다 역관 이응헌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고 전해진다. 영화 속에서는 김병문이 장승업을 소개시켜 이응헌의 집에 지내면서 머슴살이를 하며 지내는 것으로 나온다. 이응헌의 집에 보관된 그림을 어깨 너머로 보고 똑같이 흉내 낸 그림으로 재능을 인정받게 되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뛰어난 기량과 왕성한 창작욕으로 한양 문화계의 총아가 되고 고종으로부터 벼슬까지 받지만, 결국 거절하고 천하를 떠돌다 1897년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들은 창작의 산물이다. 일본인 기자 가이우라와 친교가 있었다는 정도가 그에 관해 남아 있는 에피소드들이다. 영화상의 내용은 임권택 감독의 상상력이 그려낸 것이다.)?장승업 외의 허구 인물실존 인물로는 장승업, 역관 이응헌과 스승 혜산일 뿐이며, 김병문과 장승업의 첫사랑인 소운, 기생인 매향과 동거녀인 진홍은 모두 가상인물이다.(2)영화 속 장승업 작품?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림영화 속에 등장하는 오승업의 그림은 다른 사람이 모사한 것으로 소운의 초상화나 지두화, 스승 유숙과 함께 그린 합동 그림 그리고 매향과의 처음 만날 때 매향의 속치마에 그려준 매화 등 실제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 있다.?실제로 존재하는 그림종이에 담채, 용인 호암 미술관) 서울대 박물관 소장삼성 미술관 리움1879년 종이에 수묵, 고려대 박물관3. 영화에 대한 평가엄연히 수많은 훌륭한 화가가 존재하고 풍부한 미술 유산을 가지고 있는 전통의 나라에서, 구색이라도 갖춘 미술 소재 영화가 전무하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취화선 은 이러한 문화 빈곤의 허기를 채워준 위대한 유산이다. 신윤복, 김홍도와는 달리 후대에 별로 인기가 없던 조선조 말기 화가, 장승업의 노정을 쫓으면서 영화는 천재화가 오원 장승리구성으로 권위 있는 해외 영화제나 외국 관객의 입맛을 맞추긴 힘들 것이다. 글로벌 스텐다드를 기본으로 하여 아름다운 우리 문화를 접목해야지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다.Ⅴ.문화 콘텐츠와 취화선.1.문화콘텐츠문화콘텐츠란, 문화,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합성어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One Sauce Multi Use’와 ‘One Sauce’ 안에 들어 있는 사상이다.2. One Sauce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기술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이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은 거의 없다.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잘나간다. 그 이유는 저패니메이션엔 아름답고 신기한 동양의 한 나라 일본이 등장한다. 우리의 애니메이션은 거의 미래의 혼란한 세계, 문화도 없고 눈깔과 머리색은 서양색이다.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명성황후라는 뮤지컬의 경우 비록 서양의 오페라를 전공한 배우들, 서양의 뮤지컬에서 배워온 연기 메커니즘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비결로는 기초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의상과 무대 연출 그리고 정서적인 면에서도 한국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3. Multi Use멀티 유즈는 하나의 콘텐츠에서 여러 가지의 콘텐츠들을 뽑아내는 과정이다.ex> 라이온 킹 - 라이온 킹 영화의 성공 이후 콘텐츠로서 OST, 뮤지컬, 테마파크, 게임4. 취화선과 One Sauce취화선의 배경은 구한말 조선 왕조의 쇠락과 일본제국주의, 중국, 서양 열강들의 침략 속에 비극적으로 몰락해가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조선의 3대 화가 중 한명인 오언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취화선은 매우 한국적인 정서가 잘 묻어있다. 영화를 보면 한편의 한국화를 보는 것 같다.한 장면 한 장면은 취화선 개인의 일대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편의 한국화를 보는 것 같다. 이야기가 중간에 듬성듬성 빠지는 것마저도 한국화의 여백의 미를 잘 살린 것처럼 어색하지 않다. 군더더기 없는 선문답 같은 대사는 이런 여백을 다.
    인문/어학| 2010.12.12| 5페이지| 2,000원| 조회(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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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국가운영체제
    고려시기의 국가운영체제- 나라살림의 벌이와 쓰임새-목 차Ⅰ. 머리말Ⅱ. 고려시기 재정운영의 관리와 통제.Ⅲ. 재정구조와 예산편성.Ⅳ. 관청 운영 경비의 조달.Ⅴ. 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고려는 신라 말의 문란한 수취 체제를 다시 정비하고, 재정 운영에 필요한 관청도 설치하면서 새롭게 재정운영체제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고려는 재정적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과 호구 장부인 호적을 작성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백성들에게 조(租)·용(庸)·조(調))를 부과하도록 되었다.조세(租稅)는 토지를 논과 밭으로 나누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3등급으로 분류하여 부과하도록 하였다. 거두는 양은 생산량의 10분의 1로써, 조선시대까지 이 틀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거둔 조세는 각 군현의 농민을 동원하여 각 도의 조창까지 옮긴 다음, 조운을 통해 개경으로 운반하여 보관하였다. 공물(貢物)은 집집마다 토산물을 거두는 제도로써 중앙 관청에서 필요한 공물의 종류와 액수를 나누어 주현에 부과하면, 주현은 속현과 향, 부곡, 소에 이를 할당하고, 각 고을에서는 향리들이 집집마다 공물을 거두었다. 공물의 종류로는 매년 내어야 하는 상공과 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두는 별공이 있었다. 역은 국가에서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동원하는 제도로, 고려시기부터 16세∼60세까지의 남자를 정남이라 하여 의무를 지게 하였다. 이는 군역과 요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이러한 수취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고려는 재정운영체제를 세우게 되었다. 재정운영체제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관리하고 처분하는 체제이다. 재정운영체제는 앞에서 말했듯이 조세제도를 통해서 거둔 재화를 국가운영을 위하여 쓰는 것이다. 국가의 실질적으로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인 호부와 삼사를 두어, 재정은 관리의 녹봉, 일반 비용, 국방비, 왕실 경비 등에 지출하였다. 각 관청은 관청 운영 경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토지를 지급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한 경우, 그 비용을 스스로 각 관청에서 마련하기영체제의 큰 틀은 고려 말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고려중기 이후 경제구조의 변화와 정치상황 속에서 부분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지방재정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저조한 편이어서 1990년대에 이르러 재정구조를 종합적으로 다룬 연구에서 전체적인 구조가 연구되고 있다.앞으로 다루는 내용에서는 고려의 재정운영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하였고, 국가 재정을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청 운영 경비가 어떻게 조달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Ⅱ. 고려시기 재정운영의 관리와 통제.재정운영을 담당하던 관청은 호부(戶部)와 삼사(三司)였다. 이 두 관청이 국가 전반의 재정운영을 주관함으로써 구체적인 재정운영이 재정관서 단위로 이루어지는 한계를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6부의 하나인 호부(戶部)는 가장 중요한 재정 담당 관청으로서, 기본재정원인 토지와 호구를 파악하고 관리하였다. 고려 이전까지 여러 관청이 나누어 맡아 오던 재정업무를 통합하여 수행한 관청으로서 성종 때 설치되었으며,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문종 때이다. 호부의 설치로 인해 전국의 세원(稅源)을 집중적이고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될 수 있었다.삼사(三司)는 호부가 파악한 세원을 바탕으로 조세를 거두고 지출하는 일 즉, 재정운영을 계획하고 총괄하는 일을 하였다. 삼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성종 때까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려시기의 삼사는 성종 때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삼사 역시 성종 때에 고려 초 조세 징수 등을 담당했던 조위부 등을 흡수하여 성립하여서 조세를 징수하고 전곡(田穀)을 출납·회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세와 녹봉에 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정출납에 관한 회계 사무를 관장하는 정도에만 그쳤다. 그래서 실제로는 재정을 운영하는 관청이 독립적으로 세원을 배분받아 세입과 세출을 관장하였으므로 호부와 삼사의 관리 기능은 제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모든 재정부분이 직간접으로 호부와 삼사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다. 창고운영의 책임자인 별감을 왕 측근인 근시(내시)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왕은 재정운영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재정운영을 둘러싸고 왕과 어사대 관원 즉, 관리와의 갈등이 종종 일어났었다. 하나의 예로 녹봉용 곡물을 관리하고 지급한 것은 좌창이었다. 관리들이 정월과 7월에 지급하는 녹봉을 받기 위해서는 녹패가 있어야 했다. 녹봉 지급 증명서인 녹패는 삼사에서 발급하고 있었는데, 녹패 발급을 통해 좌창이 멋대로 녹봉을 지급할 수 없도록 견제하였지만, 혹여 비리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어사대의 감찰어사가 지출 과정을 감독하였다.)Ⅲ. 재정구조와 예산 편성.고려 중앙정부는 관리의 녹봉과 일반 비용, 국방비 그리고 왕실재정 등으로 지출하였다. 녹봉은 현직 문무 관리는 물론 왕비, 종실, 퇴직관원, 공장(工匠) 등에게까지 지급하였다.지금 6도의 관찰사가 보고한 개간된 토지의 수는 50만 결이 채 못 됩니다. 왕실에 지원하는 경비는 넉넉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10만 결을 우창, 3만 결을 왕실에 속한 네 개의 창고에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녹봉용으로 10만 결을 나누어 주면, 17만 결정도만 남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6도의 군사·나루·원(院)·역·사원에 지급할 토지와 향리나 지방 관리의 녹봉 등 지방 관청에서 사용하기에도 오히려 부족하여, 국방비가 나올 곳이 없습니다. -고려사, 권 78, 식화지.위 글은 고려사에 실린 조준의 토지개혁 상소로 고려시대의 국가 재정 구조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중앙정부에서 쌀이나 재화를 걷어 들여 예산이 필요한 기관에 나누어 주는 방식이 아닌, 필요한 만큼 토지를 나누어 주어 예산을 충당하게 하는 봉건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고려 조정은 관리나 사원에 일정 지역의 토지세를 거두는 권한을 위임하였고, 이 중 군사 행정구역이었던 북쪽에 위치한 북계와 동계는 조세를 국방비로 충당했으므로 양계의 토지를 포함하면 고려의 재정규모는 어마어마하였을 것이다.이러한 재정구조로 쓰였던 주요 재정항목은 공상(供上) 왕실 재정이다. 공상은 국가가 왕과 왕비에게만 제공하였던 좁은 의미의 왕실재정이다.) 고려시기 공상의 가장 중요한 재정기반은 360개에 달하는 장(庄)과 처(處)의 토지였다. 고려시기 장과 처의 토지는 고려전기 왕실 재정의 중심 기구였던 내장택에 속하여 세를 바쳤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각 궁전과 사원에 분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공상을 담당하였던 관청은 지방 군현에서 각종 공물을 징수하거나 국용을 담당하였던 우창(右倉)에서 미곡 등 필요한 물자를 지원받아서 각 관청의 고유 업무를 수행하였다.국용(國用)은 넓은 의미로 국가 재정 전체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국용의 범주는 국가 재정 전체에서 공상, 녹봉, 군자, 구휼을 제외한 부분을 일컫는다. 국용의 범주에 포함된 것은 제사, 빈객 접대, 사냥, 상장례 등으로 비용의 규모는 녹봉과 비슷하였다.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은 별도의 재원을 관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팔관회는 팔관도감 혹은 팔관보에서 관장하였는데, 팔관보의 경우 원금을 마련해 놓고 거기서 생기는 이자를 받아 팔관회의 비용으로 사용하였다.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비용 중 하나인 군자(軍資), 즉 국방비는 고려시기 또한 거란족과 여진족, 몽고와 계속적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하게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군인의 개인용 무기는 스스로가 조달해야만 했고, 식량도 본인이 조달해야하는 등 현대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국방체제를 유지하였으므로 오늘날의 국방비용이 똑같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방위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군인에게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하여 생활비와 군 복무기간 동안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접적지역인 양계지방에는 개인이 토지세를 거두는 사전은 두지 않고, 그 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모두 방위비로 사용하였다. 경상도, 강원도, 교주도 등 개경으로 조운이 힘든 동해안지역의 조세는 해로를 통해 동계로 옮겨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남쪽지방의 국방비는 요충지에 군량을 비축하는 창고를 두어 가까운 군현의 미곡을 보관하을 담당하였던 관청들도 대체로 성종 때를 전후하여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구휼기관이었던 의창(義倉)은 986년(성종 5) 7월 태조 때부터 있었던 흑창(黑倉)을 확대하여 설치하였으며, 지방 군현의 의창은 현종 때에 설치되었다.) 그 밖에 상평창(常平倉)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곡물을 중심으로 하여 물가를 조절하던 기관으로 ‘흉년에는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고(구휼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이 손해를 보지 않게 한다.[饑不傷民 豊不損農(기부상민 풍부손농)]'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官)에서 시가보다 비싼 값으로 곡물을 사들여 비축하였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시가보다 싼값으로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절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관청은 성종 12년, 개경과 서경, 12목에 설치되었으며,) 제위보(濟危寶)는 백성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 기관으로서, 고려시대의 보(寶)가 이식(利息)으로 사업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재단이었다는 점에서 구호와 의료를 담당하는 상설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광종 14년에 설치되었다.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은 문종 때 설치되었으며, 일종의 국립 의료기관으로, 고려시대에는 개경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있었다고 하여 보통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라고 불렸다. 그렇지만 사실은 서경(西京)에도 분사(分司)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사(使), 부사(副使), 녹사(錄事) 등의 관리가 배치되어 일을 맡아 보았다. 대비원은 의료사업과 함께 의탁할 곳이 없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구제기관으로서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혜민국(惠民局)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으로서, 1112년(예종 7)에 설치하여 충선왕 때에는 사의서(司醫署)에 예속되었다가, 1391년(공양왕 3)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관원으로는 판관(判官) 4명을 두었으며, 본업(本業:醫官)과 산직(散職)을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혜민서(惠民署)로 고쳐졌다. 이 세 기관의있다.
    인문/어학| 2010.12.12| 5페이지| 1,500원| 조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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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화운동 1(1910-1920)
    신문화운동Ⅰ(1910∼1920)목 차Ⅰ. 머리말Ⅱ. 근대교육의 성립과 발전Ⅲ.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사상Ⅳ. 근대문학과 예술Ⅴ. 민족문화의 발전Ⅵ. 맺음말※참고문헌Ⅰ. 머리말조선은 서세동점의 추세 속에서 살 수 있는 길은 변화와 개혁이라고 여겼다. 그 변화는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측면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개항 이후 조선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민족적인 성격을 가지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그 중 일환이 되는 것이 신문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신문화운동 역시 단면적인 운동이 아닌 다방면으로 근대적 학문과 체제, 학문 등을 수용하면서 국제적인 무대의 일원으로 나가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강한 압박으로 인해 주춤하기도 하지만 조선인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게 된다. 앞으로 살펴볼 내용은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추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근대교육의 성립과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 서양의 근대적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과 우리나라의 언어와 역사 등을 연구했던 국학연구운동에 대해 알아본 후, 근대의 문학과 체육, 미술 등 근대 예술의 일부분을 다뤄 보고, 이 시기의 조선인들의 의식주 문화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근대교육의 성립과 발전1. 근대교육의 성립1) 개화기의 교육정책과 근대학교(1876∼1894년)근대교육은 실학자들이 조선 후기의 사회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성리학의 교육체제를 비판하면서 이용후생과 사민평등의 교육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실학자들의 교육개혁론은 조선정부에 수용되어지지 않은 채 개항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정부는 서구문물을 먼저 도입해온 일본과 청의 실상을 파악하게 되면서 교육개혁을 필요성을 느끼면서 동도서기론의 이론적 뒷받침과 함께 양무론적 개화파의 주도 아래 서양기술의 수용과 시설도입을 추진하고 이에 필요한 교육기관들을 설립하였다. 먼저, 서양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교섭을 갖게 되는 일이 잦아지자 서양어(西洋語)를 말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조선정부는 영어교육기관으로 동문학(同文學첫째, 개항이후 국가경영에 참여하면서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사회적인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전통학문이 아닌 서구적 학문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고, 둘째는 학교설립의 명분으로 의연금(義捐金)과 찬성원(贊成員)을 모으고, 정치적 실력자와 유대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으로도 보인다.또 다른 학교의 모습은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문호가 개방되었던 원산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가 1883년에 설립되었다. 이는 원산의 주민들이 일본상인의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개화파 관료인 정현석과 협력하여 설립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에서는 지금의 부산상고의 전신인 개성학교가 1895년에 설립이 되고, 인천에서는 정부가 1895년에 관립 인천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으나 광무 4년(1900)에 전문학교의 전신인 수제학교(修齊學校)를 설립하였다.한국의 근대교육의 발전은 개신교의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1880년대부터 기독교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배재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기독교 선교금지정책이 이완된 1890년대에는 지방으로 넓혀 평양의 광성학교· 숭덕학교· 정의여학교, 1895년 서울의 정신여학교를 비롯해 동래· 인천· 재령 목포 등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이 밖에도 안창호는 강서지방에 점진학교(1899)를 세워 최초의 남녀 공학을 실시하게 된다. 이러한 민간사학은 처음에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의 교육을 하는 것에서 출발하였지만, 점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띄어간다. 이러한 민간사학은 1905년 을사조약이후에는 독립운동의 성격을 띄어가게 되는데 이러한 운동을 교육구국운동이라 한다. 교육구국운동은 뒤에서 다뤄보겠다.3) 근대 학교의 교육내용을미교육개혁에서 국민보통교육을 위해 마련된 학교제도는 한성사범학교와 소학교였다. 소학교 교사양성을 위한 한성사범학교는 1895년 5월에 설치되어 본과 2년(1899년, 4년으로 개정), 속성과 6개월로 본과는 20세 이상 25-4년제), 실업학교(2-3년제)와 고등교육기관으로 전문학교를 두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의 경우 소학교(6년), 중학교(4-5년제), 실업학교(3년)과 고등교육기관인 전문학교(4년)와 대학교(6년)을 두었다.일본은 『조선교육령』을 통해 조선인의 학제는 실과의 실습위주인 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교육수준이 낮고, 대학이 설치되지 않아 원칙적으로 학교간의 연계성을 인정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인은 중학교로의 진학과 대학의 진학에 어려움을 겪었다.당시 일본은 식민지 교육정책의 실시와 더불어 한국인의 민족교육(전통교육)에 대한 탄압을 감행하였는데 각 지방관청에 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의 학교의 경우에도 법에 위반이 될 경우 강제로 폐교시키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사립학교의 수는 급속히 감소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서당이 점차 사립학교와 같은 반일민족교육의 장소로 전환하게 하였으며, 이에 일본은 1918년 2월, 서당에 관한 규칙을 공포하여 탄압하였다.⑵ 『제 2차 조선교육령(1922. 02- 1938.03)』3·1운동의 계기로 일본은 외형상의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조선인의 학제를 일본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듯 보였으나 실질적인 목표는 변함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의 변화와 함께 공포되었던 『제 2차 조선교육령』은 한문과 함께 교육해오던 조선어를 분리해 따로 교육을 하였으며, 조선 지리와 조선역사 등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일본어 교육이 전체 수업시수의 37.6%인데 비하여 조선어는 11.7%로 비중이 『제 1차 조선교육령』에 비해 낮아졌다. 이러한 이유는 창가와 체조의 수업비율을 높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과를 물리, 화학, 박물 등으로 세분화하였고, 실업과목도 실업, 법제 및 경제로 나누어 교육하였다.『제 2차 조선교육령』시기에 변화된 교육체제는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여자고등보통학교(3-5년), 전문학교(5년), 대학예과(2년), 대학본과(3-4년)로 바뀌면서 일본인의 교육연한과 같게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개혁적이면서 구체적인 안이었지만, 실제 문자생활에서는 반영되지 못하였다.그런데 1908년 1월 25일자로 정부에서는 공문서류에 국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순한문으로 쓰거나 이두를 혼용하는 것은 규정에서 어긋난다고 강조하고, 각 관청의 공문서류는 모두 국한문을 교용하고 순국문이나 이두, 외국문자의 혼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이 조치는 1894년 칙령 제1호의 ‘공문식’이 폐기된 것이고, 당시 문자생활을 극복하고 평민중심의 국문으로 전환하려 하였던 노력은 한문 중심의 문자생활을 극복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국한문 혼용이라는 형식을 취한 양상이었다.국한문 혼용이 국문표기의 기본형식으로 인정된 것은, 정부나 문자의 사용이 많은 계층에게 국한문 혼용이 국문 전용보다 편리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오래 사용해 온 한문을 국문으로 전환하는 개혁에 따라야 할 사전준비가 전혀 없던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국어에 관한 학자나 기관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시국과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문자개혁이 갑오경장의 정치논리에만 의존해서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다. ;황성신문; 1910년 7월 24일자부터 27일자까지 3차례에 걸쳐 이광수는 《금일 我韓 用文에 대하여》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국한문이란 순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에 불과하다면서, 한문으로 된 말만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의 말은 모두 국문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 방안은 그나마 현실에 입각한 것으로서, 구두어에 한자를 혼용 하자는 것이었다.)3. 한국사전근대의 역사학은 경사일체로 불리는 것처럼, 독립적인 학문이라기보다 경학에 부속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이론을 벗어나지 못해 중국사에 종속되어 서술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의 학문적 전통은 적어도 그러한 점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바 있었다. 자국사와 당대사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계속되며 실학을 계승한 역사서술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개항을채 확립하기도 전에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이 침투하였다. 한말 계몽주의 사학은 근대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침투하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때로 한계가 노출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서 식민주의와 근대성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일제 관학자들의 위장술에 그대로 놀아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실학시대의 사학이 갖는 실증성과 계몽주의 역사학이 갖는 근대성을 내적으로 수용하여 진전시키는 한편식민주의 사학과 도전에 대응하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간 역사학자들이 있었다. 박은식, 신채호가 그러한 사람들이다. 한말 일제강점 초기에 이르면 우리 나라의 역사학이 이념면에서나 방법론에서 질적인 고양단계에 이르게 된다. 박은식에 의해 근대민족주의 사학이 태동되고 신채호의 의해 근대민족주의 사학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박은식은 그의 저술을 통해 몇 가지 사학적 특징이 보인다. 첫째 주목되는 것은 국혼 중심의 사학 정신이다. 그는 한국통사에서 나라의 멸망 과정을 썼지만, 그 서언에서 역사를 쓰는 목적이 민족의 정신 즉 神을 보존함에 있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 없으니, 대개 나라는 ‘形’이나 역사는 ‘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훼파되었다고 하나 ‘신’은 가히 홀로 존재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이 《통사》를 만드는 소이이다.박은식이 《통사》의 서언에서 지적한 ‘신’은 《통사》의 결론에서는 ‘魂’이라 하였는데, 이는 국가를 이끄는 정신적인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서언에서 말한 ‘形’은 국가를 형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에 해당하는 ‘魂’을 의미할 것이다.둘째로 박은식 사학의 특징은 역사서술 체제와 내용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근세신사’의 체제를 따라 서술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말 사학이 갖고 있는 전근대성을 극복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박은식의 사학은 그의 주저인 《통사》, 《혈사》의 시대구분이나 가치평가에서 자주적이며 진보적인 요
    인문/어학| 2010.12.12| 28페이지| 3,500원|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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