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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학] 오리엔탈리즘
    ● 들어가는 말과제에 맞게 책의 내용보다는 내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찾아보고,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의 여러 모습도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이 무엇인지 그 개념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 혹은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dword W.Said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은 오리엔탈리즘이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사이드가 이 책에서 비난했던 미국·유럽에서도 이 책을 인정하였기에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나의 부족한 지식을 가장 잘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dword W.사이드의 생각이 책에서 에드워드 W.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일일이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얘기할 필요도 없을 거 같다. 단지 사이드의 생각을 요약해서 보면,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크게 세가지로 정의한다.*첫째, 동양에 대하여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리엔탈리스트이며, 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학문이 오리엔탈리즘이다.*둘째,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 구별에 기반한 사 고 방식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다.*셋째,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제도 및 스타 일이다.요컨대 오리엔탈리즘이란 위에서 지적된 여러 의미들이 상호 의존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곧 '동양'이라고 하는 독특한 존재가 문제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불가피하게 그곳에 조준이 맞추어지는 관심의 네트워크의 총체를 말한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 기반하여 유럽 문화는 일종의 대리물이자 은폐된 자신이기도 한 동양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자신의 힘과 정체성을 획득했다는 것이 사이드의 주장이다.그리고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개념 설명과 함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나타내고 있다. 사이드가 주장한 논의를 살펴보면, 우선 첫째는 오리엔탈리즘이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하게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은 서양의 동양에 대한 정치적 통합하고자 하는 일정한 의지나 의도를 내포하는 제국주의적 목적이다. 둘째는 오리엔탈리즘이 서양이 동양이라는 상대적인 타자의 이미지를 설정함으로써 서양 스스로의 자아 이미지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사이드는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자아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는 상대자, 즉 '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문화의 발전과 유지는 서로 다른 경쟁적인 '타아'의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양은 유럽(혹은 서양)이 스스로의 대조적인 이미지, 관념, 개성, 경험을 갖는 존재로 자신을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어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아랍인들과 이슬람 문화를 허식적으로 설명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우선 그것의 본질주의적 성격, 즉 아랍인들과 이슬람 문화의 본질적인 특질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특질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용어로 나타난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동양은 과학이나 예술이나 상업에 있어서 인간 진보의 본류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정의되었다. 즉 그것의 관능성, 전제적 경향, 도착적 심리, 부정확한 습관, 후진성 등이 모두 동양적 특질을 정의하는 용어들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이러한 접근이 오류를 범하는 것은 우선 '이슬람 사회' '아랍정신' '동양적 정신' 과 같은 그러한 본질주의적 성격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누구도 유태인이나 흑인에 대해서 그러한 본질주의적 타성어를 감히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랍이나 이슬람 문화에 대해서도 그러한 본질주의적 접근은 허위이며 오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또한 사이드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인식이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푸코의 담론이론에 기반하고 있는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지식들은 다름 아닌 권력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은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종과 지배를 목표로 한 정보라는 것이다. 나아가 사이드는함하는 개념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그들'과 구별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오리엔탈리즘은 친구(유럽, 서양, '우리')와 이방인(동양, 동방,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장하는 구조, 궁극적으로 현실에 관한 정치적 비전이다. 타자의 규정과 배제에 입각한 이러한 주체의 자기동일성의 확립은 우열의 가치체계와 병행하는 바, 곧 우월/열등한 것, 정상/비정상적인 것의 구분이 서구인과 비서구인, 남성과 여성,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 등의 구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 및 내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찾아서...2001년 9월 11일 정말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일명 9·11테러사건. 이 사건은 지금까지 살펴본 오리엔탈리즘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그때나 그 이전,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이란 및 중동지역을 예의주시하고 필요하면 공격도 서슴치 않는다. 그들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자기들은 우월하고 중동지역 및 동양은 열등하다 는 편견을 가지고 그들이 조금만 잘못을 하면 바로 그것을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냉전체제 종식 이후 나타난 미국의 압도적 군사우위를 바탕으로 두고 그것에 도전하는 어떤 나라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는 패권주의 발상과 전 세계를 향해 호령하는 오만한 자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랍계 국가로 하여금 불만을 일으키게 하여 9·11이라는 테러가 일어났다고 본다.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침공은 그들의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한 단순한 보복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미국은 수많은 인종들이 미국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순수혈동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미국이 세워진 시기의 주도세력이었던 백인중심사회로서 흑인이나 황색인 그리고 아랍계 민족등에게는 인종차별이 심하다. 9·11테러 이후에는 아랍계 민족들에 대한 적대감이 쌓여서 미국에 살고 있는 아랍계 민족은 더욱 편히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뉴스를 통해 테러 소식을 접하면서 아랍계 민족은 왜 그럴까? 정말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미국편에 서서 미국인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고방식이 보이지 않게 오리엔탈리즘에 중독된 무비판적인 사고임을 책을 통해서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오리엔탈리즘에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나의 모습들이 오리엔탈리즘의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사람 거의 오리엔탈리즘에 빠질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 시대 현실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1894년 강화도 조약부터 광복까지의 근대시대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영향에 놓여있다. 그랬기에 우리 스스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자주적인 사고를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아랍민족에 대한 편견을 갖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맹목적으로 서양과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사고는 너무나 제한되어 왔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식속에는 편견으로 가득 차 있게 되어 버렸다.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내부에서 복제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양이 설정한 자의적인 경계선 저 쪽에 위치한 동양인으로서 우리가 미천하다고 생각하는 동남아시아의 노동자들, 조선족 동포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동양인들과의 또 다른 구별을 통해 서양과의 차이를 줄이려 한다. 서양의 평가에 민감한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서양이 우리가 보기에는 미개한 다른 동양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다른 동양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오리엔탈리즘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한 바보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서양에게 포섭되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동양인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차별은 지배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차별은 오히려 피차별자 자신이 차별적 가치를 내면화하여 행사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그 구조를 온존시킨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동안 서양의 시선으로만 보아 왔던 주변 혹은 변방과 상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이다. 한국에서 일하는등 지금 당장 내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요즘 우리 사회는 성형 미인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쌍껍풀 수술이나 오똑한 코, 유방확대수술, 작은 얼굴을 위한 광대뼈제거 수술 그리고 다이어트 등 이런 행동들은 서양의 미녀들을 따라하기 위한 행동들이다. 그 밖에 요즘은 남자들도 귀걸이나 머리 염색등 꾸미는 데 서슴치 않는다. 이런 겉모습을 꾸미는 행동들이 무작정 정신적인 내면과 관련된 오리엔탈리즘의 요소라고 단정짓지는 못하지만 겉모습은 내면의 외부화라는 사고를 가지고 접근한다면 무시못할 요소들이다. 일반 국민들의 이런 무책임한 행동을 학식있는 지식인이나 전문가 계층에서 깨우쳐줄 필요도 있지만 우리 사회는 오히려 지식인이나 전문가 계층에서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눈에 띤다. 서로 미국이나 외국 박사학위를 따내려는 모습, 유학을 가려고 줄 서 있는 우리의 초·중·고등학생들의 모습, 태어나자 마자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원정출산 등 이 모든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며 이러한 것들에 우리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속에도 우리 정부는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의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지금 우리 정부는 나라의 대학을 키우기는 커녕 외국 유학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대학을 죽이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나온 사람들에게는 실력을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미국 및 유럽등에서 석·박사 과정을 하고 와야 실력이 있든 말든 인정한다. 실력이 아니라 유학을 갔는냐 안 갔는냐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기에 돈이 없어서 정말 가기 힘든 인재들도 돈을 빌려서라도 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런 현실 자체를 통해서도 더욱 우리 사회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고 있나 볼 수 있다. 더욱이 우리가 정말 싫어하고 혐오하는 일본인들은 일본의 학문이라고 인정하지 않기에 외국학위 같은 것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정말 부끄럽다. 이런 모습이 계속된다면 우리 주체적인 학문을 찾기란 정말 힘들 것이다.다.
    사회과학| 2005.02.19| 5페이지| 1,000원| 조회(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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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학] 논어감상문 평가B괜찮아요
    ◆ 들어가는 말나는 경기대 행정학과 학생이다. 학교에서 행정이라는 전공을 가지고 그것을 공부한다. 지금 나에게 있어 최대 목표는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행정공무원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것을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큰 난관을 극복해야만 한다. 시험만 합격하면 나는 공무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라는 직분을 가지는 것이 최선이 아닐 것이다. 올바른 행정인, 공무원이 되어 진정으로 국가 발전 및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나는 그런 지침을 「논어 집주」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 책이 쓰여진 시대와 현재는 시기적으로 약 2400년이라는 차이가 있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기에는 곤란하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연구하고 있으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와도 같은 행정사상이 담겨있는 고전중의 고전이다. 그러기에 나는 논어를 통하여 공자가 추구하는 행정사상이 무엇인지 볼 것이며 논어의 글귀를 통해 올바른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요소를 나의 주관적 입장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논어」와 공자가 원하는 행정(유교적 행정)유교의 근본 사상이 된 논어는 공자의 언행과 사상, 자와 제야 인사와의 문답, 제자들간의 대화를 제자들(주로 증자 및 자사)이 기록해 두었다가 공자가 죽은 후 한나라 시대 공자의 제자들에 의하여 책으로 엮어졌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고본으로는 노논어, 제논어, 고논어의 세 종류가 있어 일부가 여러 사람에 의해 전해 오다가 단편들을 모아 한나라 시대 어느 정도의 원본이 만들어지면서 논어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 많이 사용하고 있는 논어는 송나라 시대 주희에 의해 만들어진 「논어집주」이다.공자가 말한 도덕에 의한 정치란, 효제(孝悌)에 의한 정치라고 말해도 괜찮다. 어떤 사람이 "선생께서는 어째서 정계(政界)에 나가시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있게 지낸다면 이것이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니 어찌 일부러 정치를 하겠는가?"라고,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올바른 공무원이 되기 위해...공자가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때 그때 익히니 즐거운 일이 아닌가! 벗이 머리서 찾아 오니 즐거운 일이 아닌가!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더라도 속상해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 닌가! - 學而 第一 1.여기서 공자는 배움, 학문의 중요성{) 公冶長 第五 28.과 내면의 성숙{) 學而 第一 14. , 學而 第一 16. , 里仁 第四 14. , 雍也 第六 11.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무원이 되었다고 학문의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새롭게 생성되는 다양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업무에 활용되고 있다. 만일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없이 현재에 안주한다면 나중에는 자기 직분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공무원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신경쓰기 보다는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적극적으로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것이 알려지게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승진이라는 바로 앞의 이익을 위해 간부가 보는 앞에서만 열심히 하는 자세는 공무원의 진정한 직분이 아니다. 욕망을 절제하고 일을 성실히 하며 말을 아끼고 뇌물, 아첨하지 않으며 꾸준히 공부하는 내면적 성숙함을 가져야한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된 자가 도(道)에 뜻을 두고서도 조의 조식(粗衣粗食)을 부 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하기에 미흡하다. - 里仁 第四 9., 述而 第七 3.즉 반구제기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함에 있어 누구든지 잘못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잘못을 한 후에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냐에 있다. 공무원 역시 업무를 함에 있어 실수나 잘못을 한다. 대신 자기 반성적 사고로 잘못을 뉘우치고 무엇이 문제인지 살핀 후 다음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하며, 쓰임을 절도 있게하여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부리는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한다.- 學而第一 5.공자는 성실함을 공무원의 필수 조건으로 보았다. 그에 더해 솔선수범{) 爲政 第二 22. , 八佾 第三 19., 근검절약, 역지사지를 강조하였다. 공무원은 국민에게 봉사함에 있어 대충하기 보다는 성실한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타율적이 아닌 솔선수범의 정신으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가 상관이라고 하여 부하가 일이 있어도 다른 일을 막 시킨다. 부하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생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업무까지도 부하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이유로 현대 행정은 쓸데없이 비대화되고 비능률화 되고 있다. 앞으로 공무원은 성실함을 가지고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는 사고를 가져 국민에게 신뢰감을 주고 또한 능률, 발전적인 행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자하가 말하였다.현명한 자를 현명한 자로서 대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해라. 부모를 섬길 때 는 있는 힘을 다하여라. 임금을 섬길 때는 그 몸을 다 바쳐라. 친구와 사귈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여라. 그리하여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 學而 第一 7.공자는 대가 없는 서비스,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서비스가 가치 있다고 본다. 현대 행정에서 서비스의 역할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업무를 하는 관료로 뽑아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리더십이 아닐까 한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옛 것을 온양하여 새 것을 만들어 낼 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 爲政第二 11.공자는 온고지신{) 述而 第七 1. 19.을 강조했다. 일설에 온고지신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학문의 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온고지신이야말로 자기 학업을 진취해 나가는데 있어서의 자기 스승이다. 공무원은 항상 자기 발전적이어야 한다. 이전의 업무를 기초로 두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 이해하기도 힘들고 발전적이지 못하며 결국에는 새로운 것도 추구하기 힘들다. 나 역시 행정학을 공부함에 있어 행정학 개론을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에야 요즘 새로이 등장하는 행정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 爲政第二 12.공자는 공무원이 모든 것을 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기물은 모두 저마다 다른 형태와 용도가 있다. 그것은 각각 한가지 일에 제약되고 한계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은 많은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하는 능력을 지녀야만 한다. 모양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지 말고 다방면에 걸쳐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자공이 군자에 관하여 여쭈었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먼저 실행하라. 말은 그 후에 행동을 따르게 하라." - 爲政第二 13.언행 일치는 공자가 가장 중요시하는 바였다. 우리 사회에서 언행 일치가 가장 안되는 것이 선거에서 대표자가 국민에게 한 공약 및 약속이다. 이처럼 그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국민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한다. 공무원 역시 국민에게 봉사하는 직업으로서 국민의 믿음이 없다면 공무원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군자는 두루 마음쓰고 편당짓지 아니하며, 소인은 편당짓고 두루 마음쓰지 아니한 다." - 爲政第二 14.공자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라는 공정성의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무원이 업무를 함에 있어 여러 국민의 부탁이 있다. 고위직 일어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뇌물이 존재한다. 부당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은밀히 그 일을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물질적인 상을 준다. 이런 것들로 인해 약한자는 손해보고 우리의 행정은 부패를 맞이한다. 이렇게 공직부패가 만연하면 개인적 해이로 세금포탈과 안일한 일자세로 공직 생산성이 하락하고, 특정 기업을 봐주다 보면 자유로운 경쟁이 왜곡되고 독과적 현상이 나타나 시장경제를 크게 왜곡시키게 되며, 가진 자를 더 잘 봐주기에 형평성과 정의에 손상을 입히게 된다. 또한 정부불신의 증가와 권위추락 및 정치적 불안이 조성되어 결국은 체제의 정당성이 위협을 받게 된다. 진정한 공무원이라면 올바른 일을 추구함에 있어 그런 것을 초월하는 정직하고 결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맹손,숙손,계손의 삼가사람들이 옹의 노래로서 제사를 마치었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후들이 제사를 돕네.그 가운데 천자의 모습이 그윽히 빛나도다'라는 저 가사의 노래를 어찌 삼가의 마당에서 부를 수 있겠는가?" - 八佾第三 2.공자가 상하간의 질서와 자기에 맞는 역할{) 八佾 第三 1. 6.을 중시했다. 공무원은 1∼9급까지의 여러 직급과 다양한 분야의 직책들이 있다. 우리가 공무원이 되면 하나의 직급 및 직책이 주어진다. 현대 사회는 분업사회로 자기가 맡은 각각의 일들을 처리하면서 사회가 자연스레 돌아간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앞에서 우리는 공무원은 모든 것을 할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무조건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무질서를 초래한다.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되, 그것에 한정되지 말고 여러 일도 겸용하는 일명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활쏘기는 과녁의 가죽을 뚫는 것을 장끼로 삼지 않고, 힘쓰는 것은 일률적으로 그 등 급을 매기지 않는다.이것이 곧 옛사람의 도이다." - 八佾第三 16.공자는 결과보다는 과정{) 雍也 第六 14. , 述而 第七 26.을 중시했다. 활은 과녁을 맞추는 것이지 뚫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결과 지향을22.
    독후감/창작| 2005.02.19| 8페이지| 1,000원| 조회(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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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과 신문명론
    동학과 신문명론서 론세계를 지배하여 온 물질주의적 서양의 사고에 대치할 새로운 이념을 이제는 동방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시대적 대 전환기에 도래하게 되었다. 여기에 국내적으로는 남?북의 냉전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우리민족이 공유할 수 있는 사상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급선무이며 국제적으로는 2천년대를 아시아의 시대로 예측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원된 인류문명이 유럽을 거처 대서양을 건너 아시아로 동진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민족의 전통사상에 주목하게 되는데 단군 왕검 이래로 우리겨레의 홍익인간 이념이 근대기적으로 승화, 집대성된 것이 동학사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우리는 근대사상인 동학의 시천주 사상으로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분단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서 다가오는 미래인류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을 기대하며 현 정치의 지도방향에 있어서도 동학의 사상과 현실에 맞는 정치현실을 접목하여 미래에는 환골탈퇴 하는 심정으로 새로운 발전과 희망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보고자는 “동학과 신문명론”을 보고함에 있어 “정치학개론” 수강 때는 본론 부분에 있어 각 장(1~9장)을 요약하여 보고 하였으나 금번 “비교정부론” 수강 때에는 본론 부분에 있어 “동학과 신문명론”에 관하여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요약 및 구성하여 보고 하고자 한다.본 론■ 18~19세기 조선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흐름18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사회는 구조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조짐을 뚜렷이 보인다. 농업위주의 사회체제에서 생산 양식의 변화는 농업기술 향상을 가져오고 단위면적에 대한 노동력의 감소로 인해 사회적인 유동성의 증대가 불가피하여 정체된 사회의 질서를 담당하는 이념형으로서의 성리학의 권위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농업기반의 상실에 의한 반농이나 폐농의 속출과 신분질서의 문란은 봉건적인 전근대 사회의 존립기반인 향촌의 단위 공동체를 뿌리까지 흔들어 놓게 되는 것이며, 정상적인 삶의 방식에서 낙오된 민중은 경제적인 핍박에 못지않게 정신적인 공백상태에 머인들의 개화 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동학 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그런데 이 혁명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에,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에, 3월 봉기는 여름의 경작에,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의 결실에, 그리고 9월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겨울의 황량한, 그러나 새로운 농사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들판에 견주어 봄직하다. 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군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 갔다.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 차이가 한국의 행정현실과 행정학 연구에 미치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은 대단히 클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 행정학이 이 영향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차이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본 연구는 서구적 변용이 본격적으로 가해지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한국 고유의 합리성 이론을 동학을 통해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에 대한 베버의 분석결과와 대조하여 보았다. 베버는 서양 근대사회가 이룩한 합리성의 한 형태를 그 발생과정과 특이성, 한계 등에 비추어 연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베버는 서양사회가 목적-수단 합리성과 형식합리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고 진단하였다. 베버의 합리화론은 이러한 서양 특유의 합리성이 발전하게 된 계기와 원인을 추적하였다. 합리화에 있어 베버는 종교적 관념의 역할에 특히 주목하였다. 베버는 서양의 근대적 합리성이 발달하게 되는 정신적 기반은 프로테스탄티즘이었다고 해석하였다. 베버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중국사회가 서구와는 구별되는 합리성의 한 형태를 발전시킨 것은 유교와 도교의 종교적 에토스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베버는 중국의 유교가 이념적으로 가치 합리성과 실질합리성을 중시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세계에서는 도교의 주술적 비합리성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베버는 유교가 실현하고자 하였던 동양적 합리성의 이념이 서구적 합리성의 한계에 대해 하나의 대안적 처방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본 논문은 동양적 합리성의 이론이 지니는 이러한 대안적 성격을 동학사상 속에서 추적해 보고자 하였다. 이 글은 프로테스탄티즘과 서양 근대의 합리성에 대한 베버의 분석과 동학사상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는 동양적 합리성의 이론을 비교해 보는 연구전략을 취하였다. 첫째, 한국인들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 온 합리성의 이론과 서양 근대의 합리성 이론은 내용적으로 서로 다른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합리성의 비교를 위한 베버의 범주들은 동양적 합리성의 이론을 적절히 포착해 내는 데에는 부적고양시켰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처럼 동학사상은 창도 이래 양반 신분제 사회의 모순과 외세의 침입아래 질곡에 빠진 많은 농민들의 고통이 심화 될수록 종교적 성격을 떠나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사회변혁사상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 동학 외피설동학은 당시 여러 민간 신앙적 요소와 사회사상들을 수용하여 창립된 종교이며 사회사상이었다. 동학은 이 과정에서 해체 되고 있던 조선사회의 지양점과 서학에서 보여주는 서구적인 세계를 종합한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일정하게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전망은 복고적 관점을 수반한 종교적 차원에 머물렀고, 이에 따라 새로운 정치체제 구상이라는 점은 동학 속에 적극적으로 포섭될 필요가 없었으며, 당시 혁이적 세계관이 테두리에서 초보적이거나 환상적인 반봉건 , 반외세 수준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즉, 동학은 새로운 사회인 근대 사회로의 전망을 보여줄 발전적 역사관과는 거리가 있는 전통적 순화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나마 그것이라도 실현 시켜줄 구체적인 계획, 강령이 빈약하였다. 또 , 이러 한계를 극복할 현실적 방안과 실천적 노력 또한 최제우 다음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동학이 자연-인간 합일의 조화 사상과 천도순화사상 그리고 현실이탈적 신선사상등은 견지하고 있는 한 동학교단은 현실 투쟁보다는 종교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학이 이러한 종교적 사상적 특징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를 도구적 기능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즉 하나의 사상이 가지는 발생적 의미와 그것을 누가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사회변혁세력이 동학에 들어가 동학을 정치, 사회문제에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곧 19세기의 변혁운동을 계승하고 있던 전봉준계를 비롯한 남접계(서포계열)는 종교적 온건노선을 주장한 최시형의 복접계(법포계열)와는 달리 현실투쟁적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를 위해 동학북접계를 끌어내어 이와 연계된 척왜양의 대으로 발전하였다. 실천운동의 주체는 실학파 학자등의 양반층을 벗어나 일반 하층민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천주교가 단순히 양반층 중심의 補儒論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일반 시민들의 신앙차원으로 발전했음을 반영한다. 이러한 경향은 신유박해로 인해 지식층이 대거 축출당하게 됨에 따라 양반층이 대거 탈락하면서 더욱 강해진다. 천주교를 보유론 차원에서 인식하려던 경향과 함께 양반층보다는 일반민에게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지배층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즉, 그들은 천주교 신도가 반란음모에 연루되어 처벌된 왕족이나 불평을 품은 양반층, 그리고 시정잡배나 농부, 아녀자들로 구성되었 있음에 주목하면서 천주교도가 기존의 사회질서를 뒤엎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사로 잡혀 정부측에서 천주교도들을 반사회 단체형태로 간주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선교 목적의 의도가 主였지 전교 및 포교과정에서 백성의 일규를 획책하거나 전체를 일거에 뒤엎어 버리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봉건사회의 대응과 사상간의 갈등 및 대립서학연구기풍이 생겨나고 일반민간에 천주교가 유포되기 시작하는 초기에 정부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생각 하였으나 연구가 활발해지고 신앙운동으로 진전되었을 때 정부는 주자학 체제의 도전이라 판단하고 탄압을 가하였다. 이론적인 면에서 서학과 천주교를 배격하는 비판론이 제기 되었다. 주자학 사상에 사로잡힌 지배층들은 명분론과 존화의식에 근거하여 이질적인 사상체계에 탄압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봉건사회의 신분이데올로기에 대해 서학?천주교가 갖는 진보성에 대한 억압이기도 하다 정부는 천주교를 금수지도 禽獸之徒, 悖倫亂常之徒라 탄압하였는데 이는 천주교도들이 조선사회의 전통적 예속인 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철폐하는 신앙행위와 신분과 문벌을 초월한 평등논리가 신분차별?서얼차대?문벌중시에 입각한 조선사회의 봉건적 지배 질서를 파탄시킬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점에서 천주교는 주차학적 신분질서에 터전한 조선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동요시었다.
    사회과학| 2004.07.04| 9페이지| 1,000원| 조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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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주론] 군주론
    “군 주 론”◆ 목차Ⅰ. 서론Ⅱ. 본론1. 전기 활동과 시대배경2. 후기활동3. 군주론이 씌어진 동기와 배경4. 군주의 개념Ⅲ. 결론→ 저번학기 노태구 교수님의 비교정부론 이라는 수업을 통해 민족주의와 국제정치 라는 리포트는 썼는데 이번학기에도 같은 주제의 리포트가 나와서 그냥 내었습니다. 조금 비양심적이라고 생각해서 군주론 이라는 리포트를 추가적으로 이렇게 제출합니다.● 서론마키아벨리는 역사상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군주론이라는 얇은 한권의 책 때문인데 마키아벨리는 이 군주론 한권의 책으로 여러 가지 평가를 받으며 역사상 큰 영향을 미쳤다. 100페이지 남짓하는 이책에. 도대체 이 얇은 책속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길래 그토록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일까? 우선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통해 군주론에 깔려있는 의미를 알아보고 또 그의 삶을 통해서 그의 의식을 알아보고 마지막에 군주론에서 논의하고 있는 진정한 군주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서 그 의미들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도록 하자.● 본론1.전기 활동과 시대배경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운동이 그 최고봉에 도달한 느낌을 주기 시작한 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니콜로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로 1527년 6월 22일에 58세의 생애를 마치고 타계하였다. 그는 동시대의 천재들, 즉 라파엘로(1483-1520),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와 함께 인류역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금자답을 세운 역사적인 존재이다.마키아벨리의 저작활동과 내용은 다양하고 광범위하지만 그는 주로 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흔히 약육강식의 폭군지상주의자로 낙인찍혀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다.이러한에 대한 오해는 “어느 역사적 사실은 그 사실이 이루어진 시대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만 진실되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랑케의 주장대로, 현시점의 감각에서가 아니고 마키아벨리가 살던 그 시대의 의식에서 살펴 볼 때 8세가 이탈리아 정복을 감행한 해로서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분열상태에서 이탈리아는 어이없이 굴복당하고 그 후 계속하여 외침을 받았다. 이탈리아는 지력·무력 또는 정치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체내의 분열로 외세 침략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물론 샤를 8세의 침입은 이탈리아에 부정적인 것이었지만, 문화면에서는 오히려 르네상스 문예를 알프스 이북으로 이식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바로 이탈리아에서의 무예운동의 퇴보와 동시에 알프스 이북으로의 문화 중심지 이동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환경에 처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의 천재성은 문학·예술 등 각 방면의 활동에서도 충분히 발휘되지만, 특히 그의 흥미를 끈 것은 조국 이탈리아의 운명이었으며, 그는 조국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해결뿐이라고 결론 짓고 그의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꾸민 것이다. 즉 정치를 윤리·도덕과 분리시켜 객관적·과학적인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통치 기술이라 한 점이다.그는 피렌체의 공리 또는 외교사절로서 국가간의 무자비한 비윤리적 투쟁과 군주를 목격하며 이 비극에서 조국 이탈리아를 구출할 수 있는 길을 바로 이 에서 밝혀 놓은 것이다. 이는 그이 과 함께 근대적 의미에 있어서의 정치학을 창설한 이정포이다.1498년 29세 때, 그는 처음으로 공직을 맡았는데 피렌체의 최고 통치기관인 시뇨리아의 4부처의 하나인 ‘자유평화10인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군부나 내무부와는 달리 독립된 기구로서 외교업무를 주로 담당하며, 동시에 국민군을 관장하였다. 그때까지의 그이 결력에 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그의 부친이 법률가이며 높은 교양을 쌓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출생 후 29년간은 피렌체와 이탈리아에 엄청난 시련과 재난이 거듭된 시기이며 피렌체와 르네상스 시대는 더욱 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그를 계승하여 피에로 메디치가 등장하며, 로마에는 그 악명높은 보르지아가의 악레산더 교황이 즉위하고 드디어 프랑스의 침입으로 자인 소데리니에게 권하고, 다시 1504년에는 1494년부터의 피렌체의 퇴폐와 비운을 에 기록했다. 또한 구국의 유일한 방법은 용병이나 그 장군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애국심에 불타는 국민병을 조직하고 육성하는데 있다고 국민국방을 주장하여 새로운 군사노선을 천명하엿다그에게 국민병의 필요성을 암시한 것은 고대 로마 시민병과 그가 목격한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의 군제였으며, 소데리니도 그이 우국의 정열에 감동하여 국민군 조직에 착수하여 1506년 마키아벨리는 군부비서에 임명되면서부터 시군정 확립에 헌신하게 되었다.당시 이탈리아 반도에는 프랑스·독일 양국으로부터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그 중에도 프랑스의 경우는 그 만행이 극도에 달하여 교황을 중심으로 모든 도시가 단결했다. 그러나 피렌체의 경우, 프랑스와는 통상상의 중대한 이해관계가 있어 어느 편에도 가담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사신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얻은 경험과 견문으로, 의 두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독일의 번영과 안정의 요인을 각 시의 자치제도와 상호협력에 프랑스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제도에 기인한다는 점을 참고로 하여 이탈리아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였다.1512년 피렌체에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소데리니는 실각하고 시는 다시 메디치가의 전제시대로 들어가며, 구정권에 봉직하였다는 이유로 마키아벨리는 1년간이나 억류생활을 하였다. 그후 다시 공직에 복귀되나 반메디치 혐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다행히도 투옥기간은 단시일이었으며, 석방된 후 사회생활을 멀리하고 산 카시아노의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작생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의 대표작인과 도 바로 이 시기의 저작이었다.그가 실의에 차 있을 때 유일한 벗이며 사상과 우정을 기탄없이 나눌 수 있었던 친구는 로마 주재 피렌체 사절이었던 베토리였으며, 독서와 저작생활에 몰두하는 이외에 친구와의 문통이 그에게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문통 내용은 주로 이탈리아와 피레체에 관한 정치3행시로서 마왕 키르케에 의해 당나귀로 변신된 어느 인물이 환상 속에서 이탈리아 각 도시를 돌며 그 시대의 모순과 비정상을 풍자한 재치있는 내용이며 는 여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을 풍자한 것이다.마키아벨리가 은둔생활에서 저술화롱을 계속하는 동안 이탈리아와 전 유럽에는 역사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혁명으로 전유럽은 역사상 볼 수 없었던 혼란에 빠지며 이탈리아는 강대국들의 전쟁터로 변하여 마키아벨리가 그렇게나 사랑하던 피렌체도 황제 카를 5세의 치하에 들고 만다.그는 이탈리아의 참상은 이탈리아 자체의 내부 분열과 거기에 따른 무력화가 자동적으로 외세 침입을 초래한 데에 있다고 하여 에서 피력한 그의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순수사학적인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사실의 기술에만 만족하지 않고 사실을 토대로 그 인과관계를 부각시켜 논리적 귀납으로 역사의 원인을 파헤치는 새로운 양식의 역사 서술을 시도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세기적 종교 권위에서 벗어나 신의 섭리와 교훈을 역사적 사실과는 분리시켜 자연법에 입각한 객관적인 사관을 확립시키는 역사학에 공훈을 남겨 놓은 것이다.1527년 6월 22일 중병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은 여생을 또다시 조국과 피렌체의 평화를 위해 교황 또는 피렌체의 사신으로 공직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중심부인 로마는 1527년 5월 에스파냐의 부르봉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동시에 그에게 잊을 수 없었던 메디치 가문도 반란으로 쫑겨나 피렌체는 니콜라 카포니가 이끄는 평민당 지배하에 들어가 마키아벨리는 실의에 찬 채 위대한 업적만을 남기도 타계하였다.3. 이 씌어진 동기와 배경솔직 담백하고 하등의 불필요한 수식도 없이 직설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팜플렛이라 부를 만큼 부피가 작은 저술이다. 그러나 이 저작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위정자들과 이 방면의 전공자들 사이에 널리 애독된 책은 그리 흔치 않을것이다..그 예로 ‘금서령’이 내린 바로 그 다음해에 바젤에서 의 라더역판이 출판되었다. 단순한 감정적인 탄압이 아니고 학문적으로 에 대해 노골적인 편견과 악의에 찬 비판이 시작된 것은 프랑스 밥학자 이노센트 젠틸레에 의해서였다. 그는이란 글을 발표함으로써 에 담긴 정치사상을 반박하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열거하고 자기의 정치사상과 정책요강을 표시하였다. 그가 바로 이 글로의 본의를 고해한 ‘마키아벨리즘’을 만드어낸 장본인이다. 이후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자기의 권력과 세력을 팽창,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말고 도의정신·종교심·논리성을 저버리며 오로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방법을 주장한 지적 괴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 후 은 마키아벨리즘이란 괴물로 둔갑하여 각 시대 전제자들의 애완물로 타락하고, 오늘날까지 비정한 정치세계의 한의 행동지침이 되었던 것이다.은 권력자들에 의해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여져 마치 전제군주의 폭정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전락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에 대한 곡해를 풀고 객관적 견해를 위한 노력도 있었는데 유명한 국제법학자 알베리코 젠틸리의 마키아벨리 연구와 프리드리히 그리스트의 는 그 대표적일 것이다.에 대한 고해를 벗어나 모든 선입관년을 배제하고 그 저작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 책이 씌어진 동기와 작자 개인의 입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개인이 처한 시대적 배경은 상술한 바 있고 여기서는 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1512년 프링토 정변으로 메디치 가문이 다시 피렌체의 집권자로 등장하자, 마키아벨리는 반메대치의 혐으로 공직에서 쫓겨난 독서를 벗삼아 시골에서 상심에 젖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 해가 다 저물어 갈 즈음 그는 그의 절친한 친구 베토리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나는 그 사건 이후, 피렌체엔 20일도 채 못 있었고 줄곧 여기 시골에 와 지내고 있습니다. 때로 새를 잡으러 다니기도 하면서 9월달을 별일없이 지냈지만, 이제 그 장난도 무의미해서 그만두다.‘
    사회과학| 2004.07.04| 10페이지| 1,000원| 조회(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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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학] 민족주의와 국제정치
    Ⅰ. 序論民族主義의 理念(national idea)이 世界化를 위해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이 글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초점(issue)은 社會的, 經濟的, 知的 발전의 결과로서 民族主義에 대한 최근의 많은 연구자료에 의해 논의의 쟁점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思想이 다른 것의 운명에 대한 영향을 주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들 양자 중에 民族主義는 특별히 世界化의 개념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고 있다.여기에서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각 민족사회가 저마다의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그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世界文化를 형성해가는 방향이 될 때, 세계문화의 발전이 촉진된다. 따라서 世界化, 國際化를 이루어간다는 것은 곧 한편으로는 자기 民族文化의 특징을 한층 더 살려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결국 民族의 경제성장, 근대화, 통일국가건설은 한반도 전체가 세계자본주의에의 편입되는 의미의 世界化의 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自主的으로 이루어져야 할 近代國家 건설 그것이며 그 지도원리는 외세를 극복하는 統一民族主義로서 韓國民族主義의 理念的 모색의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世界化의 필요성을 인정하면 할 수록 民族主義와의 理念的, 理論的 결합은 필수적이다.아래에서 民族主義와 國際社會의 理念的 관계의 모색을 두고 本章의 序論에 이어 제2장에서는 本稿의 양 개념의 統合을 두고 異論的 構圖(framework)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민족주의, 민족의 개념을 그 자체보다는 국제질서와 관련하여 먼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自決과 反植民地 원리의 이름으로 民族主義가 民族國家(new stares)를 창조하고 그리하여 國際社會로 수평적으로 나아가게 하여 世界가 동시에 共存을 이룰 수 있다는 문제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經濟的 발전이 제3세계 民族主義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이유와 그리고 제3세계 國家들이 그들에게 유리한 국제 사회의 경제적 질서로 바꾸도록 하는 데 왜 성공하지 못하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장래를 두고 民族主義와 國際主義랄까 民族主義와 民主主義와의 그 理論的 결합관계를 고찰해보는 것은 有意義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근대이후 민족주의의 역사와 민주주의의 역사는 언제나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양자는 서로 보완적이고 통합적인 조화의 관계를 이룩한 경험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양자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 있던 경험도 있는 것이다. 民族主義란 결국 民族의 統一 · 獨立 · 發展을 지향하는 理念이며 운동이다.민족의 統一 · 獨立 · 發展을 지향하는 민족주의는 민족의 운명을 민족공동체 구성원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民族의 自決과 自治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가 민족의 자치를 전제로 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국민의 자치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조화를 이루고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가 곧 민주주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조화와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공동체의 政治的 理念이 민주적 경향을 갖추어야 한다. 특히 제국주의적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위한 저항과 투쟁이 일단 완수되자 그 다음 단계로 극심한 빈곤과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하여 전력하고 있는 非西歐國家의 民族主義는 신속한 국가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민주주의의 본질적 내용들을 잠정적으로 유보하고 권력의 집중을 통한 권위주의적 방식이나 또는 전체주의적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시간이 경과하면 결국 잠정적인 권위주의의 체제가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로 이전되거나 또는 전략으로서의 社會主義가 목표가 되고, 목표로서의 民族主義가 전략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흔히 발견하게 된다.전시대적인 ‘우월적 민족주의’의 팽창으로부터 해방된 현대의 민족주의는 ‘밖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이념적 정향에서 이제는 ‘ 내부에서의 자유’를 지향하는 이념적 전환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現代 民族主義는 대외적 존재양식이 민족공동체들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것임에 비하여, 민족주의의 대내적 과제는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동질족주의가 확산되는 시기로 어떤 나라도 이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서구가 있어서 민족주의가 양 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쇠퇴하는가 하였지만 이는 비서구(동구)와 제3세계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출현하는 무대로 되었다. 新民族主義로 불리워지기도 하는 이 理念은 대부분 식민지역에서 일어났다. 대체로 이는 서구의 제국주의와 정복의 정책에 대한 반작용이었다.2차 세계대전과 獨 · 英 · 佛 그리고 帝國의 기도가 붕괴되면서 민족주의는 이전의 식민지역에서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하였다. 제국의 붕괴는 제국주의의 약점과 취약성을 들어낸 것이다. 독일이 타도되어지면 그 원리는 프랑스에서도 프랑스가 타도되어지면 그 원리는 영국에서도 영국이 붕괴되면 이는 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兩次 世界大戰으로 백인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는 無敵의 神話(the myth of white invincibility)가 民族主義에 의해 民族國家가 건설됨으로써 결정적으로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었다.2. 民族主義와 自由主義民族主義에 대한 많은 현대적 설명은 그 근거를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속에서 찾는다. 따라서 民族主義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불평등한 발전에 대한 대응으로 또는 소위정통사회에서 조직된 종교와 民俗에 의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 접착제를 위한 필요를 위하여 일어난 하나의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설명된다. 그리하여 여기서 民族主義 理論과 實踐이 民族主義를 하나의 현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들의 사회속에서 어떻게 수용(accommodation)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自由放任 政策에 대한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는 최소의 국가(minimal-state)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국가를 위해 어떠한 부분적 주장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이 공격을 시작할 당시에는 國家는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었으며 그리하여 국가는 참으로 거의 자연스런 세계의 일부로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었다. 이익의 조화를 좌절에 절제있고 실용적인 그리고 공격적이면서 방어적인 주장들이 결합되었다. 이 둘은 다양한 重商主義政策(mercantilist policies)과 특별하게 民族主義의 目的(nationalist purposes)을 위해서 적용되고 확대된 것이다. 즉 自由資本主義에 의한 世界秩序에 대하여 하는 것으로 경제정책을 民族的 正體性(nation identity)을 위한 필수적 支柱로 삼는 것이다.전통주의적 중상주의 思想을 民族主義의 政治思想에 적용한 피히테(Johann Fichte)의 저술인 “배타적인 상업국가”(closed commercial state:1800)는 생산과 분배 그리고 교환이 민족적 행위에 의해 계획되어지는 완전한 集産主義的 司會(collectivist society)를 위해 하나의 靑寫眞을 제공함으로써 전통사상을 확대하였다. 대외무역의 필요는 점차 감소되고 결국 민족이 자연적 국경선에까지 확대함으로써 무역의 필요는 아주 제거되어진다.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국제적 접촉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國際秩序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갈등이 없는 국제상황을 계획하는 것은 가능하게 될 것이다.한편 영토회복운동과 경제적 팽창주의가 - ‘자연적’ 국경선의 ‘역사민족’의 이론이 지배한다면 - 이는 상대방의 사상으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리덴티즘은 조상의 古土를 재점유하여 민족의 동질성의 본질을 靜態的인 개념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팽창은 특별한 민족의 정열과 진취적 정신을 민족의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권리를 제공하는 필요한 공간과 자원을 위하여 역사발전의 動態的 개념으로 민족주체성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다.한편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국토회복운동가들과 경제적 팽창주의자들이 당면한 실제적 난관은 본래는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연의 준거에 의하여 국가의 국경을 다시 설정하려고 하는데 반해 다른 사람은 명백한 운명과 경제적 필요성의 준거에 의해 결정하려고 한다. 이러한 난관은 회복되어야 하거나 정복되어질 수 있는 영토에 살고 있는 다른 에서 해외로부터의 경쟁을 조절하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여러 관점과 시점 시각을 두고 각자의 정부들에 의해 결정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서구국가를 비롯하여 어디에서도 산업정책은 自由主義와 集産主義 理念과 관련한 意思決定의 民族的 構造로부터 분리하여서는 어떠한 유용한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認識하는 것이다.Ⅳ. 韓國民族主義의 將來1. (後)植民地 民族主義제3세계 민족주의가 반제국주의와 반서구적이라는 사실은 많은 제3세계지도자로 하여금 처음부터 독립과 더불어 대부분 상속하게 된 자유자본주의에 대해 이념적 대안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제3세계 지도자들이 제조된 수입품과 마찬가지로 理念에 의존해야만 하는 환경속에서 그들 대분분이 맑스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맑스주의(또는 오히려 맑스-레닌주의)는 이중적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첫째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그것이 비록 외래에서 수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서구의 전통내에서 반대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리하여 이는 강력하게 반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제3세계 민족주의운동을 위한 필수적 기준을 제공하는 것으로 되었다.둘째로 맑스-레닌주의는 역시 경제적 처방을 위한 유효한 요소를 포함한다. 레닌은 권력을 장악하자 급속한 산업화를 위하여 비자본주의적 전략을 발전시켰다. 반제국주의적, 반자본주의적인 철학에 의해 매료된 많은 사람들이 경제의 정부통제를 지지하고 신속한 결과를 약속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결과적으로 3세계 민족주의자들이 그들의 반서구적 입장을 유지하기 위하여 절충적으로 맑스이론을 인용하면서, 경제적 곤경에 대해서는 신맑스주의적 분석을 사용하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능력밖에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서방의 원조를 기대하고 있다. 제3세계는 두가지 주요문제로 기존의 국제질서와 대결하고 있다. 첫째로 아래에서 논의될 탈식민지와 이의 정당화 그리고 정도의 문제이다. 둘째로 다음 장에서 주로 다루고 다.
    사회과학| 2004.06.02| 11페이지| 1,000원| 조회(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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