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경령 활동 당시의 중국사회당시의 중국사회는 이전의 역사 중 가장 급변하던 시대였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은 물론 이전까지 중국의 이데올로기였던 황제체제가 무너졌으며, 이에 따라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는 붕괴하였고, 결과적으로 사회는 무한한 혼란의 나락으로 빠졌다. 이후의 일제의 침략으로 사회는 더욱 더 혼란스러워 졌으며 일제의 패망 이후에는 곧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내란이 끝나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며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는 듯 하였지만 모택동에 의한 문화대혁명으로 다시 중국 사회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송경령 생애의 활동▷ 1893년 1월 27일 - 부유했던 宋家에서 6남매 중 가운데 두 번째로, 딸 셋 중 가운데로 출생.▷ 1908년 - 미국의 뉴저지주와 조지아주에서 유학.▷ 1915년 10월 25일 - 도쿄에서 손문과 결혼. 이후부터 1925년, 손문이 죽을 때 까지 그 의 뒤에서 그의 사상을 따랐으며 그의 활동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 었다.▷ 1924년 1월 - 국민당 개조를 위한 회의에 참석한 199명의 대표 중 한사람으로 선출.▷ 1925년 3월 12일 - 손문이 간암으로 사망.▷ 1925년 5월 30일 - 상해에서 비무장 중국 민간인에 대한 영국의 총격을 비난.▷ 1926년 1월 - 국민당 제2차 전당대회의 최고 간부로 선출.▷ 1927년 4월 12일 - 중산함사건 등의 장개석의 반공쿠테타를 비난.▷ 1927년 8월 1일 - 장개석과 왕정위의 배반을 비난하는 성명에 가담. 이후 신변보호를 위해 모스크바로 이동.▷ 1927년 12월 - 반제 반식민지 투쟁 동맹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지위 수락하고 동맹위원 회의 중요한 회의 참석을 위해 브뤼셀로 여행. 회의에서 명예의장으로 선출.▷ 1931년 - 조국으로 귀국하여 반장운동 전개.▷ 1932년 말 - 노신을 포함한 일단의 탁월한 중국 문화인들과 함께 중국 민권 보장 동맹 결성.▷ 1933년 -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노신과 함께 상해의 독일영사관에 항의.▷ 1935년 12월 9일 - 북경에서 학생들의 의해 봉기된 12·9 운동의 배후에서 활동 전개.▷ 1937년 2월 -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통일전선을 강하게 호소.▷ 1937년 - 중일전쟁의 발발. 그해 11월 신변보호를 위해 홍콩으로 이동.▷ 1938년 6월 - 홍콩에서 구제사업을 위한 보위중국동맹 설립.▷ 1940년 - 그녀의 자매들과 중경으로 이동하여 성공적인 국공합작을 위해 장개석과 호의 적 관계 유지.▷ 1945년 8월 15일 - 중일전쟁의 종전. 그해 12월 상해로 이동하여 보위중국동맹을 어린 이들과 친공산당 지식인을 돕는 중국복리기금회로 개편.▷ 1946년 6월 26일 -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면적인 내란 시작하였고 이에 연합정부의 수 립을 호소. 국민당의 정치적 술수에 의해 1945년, 중앙집행위원회 의 위원으로 복직되었고 1946년, 상임위원으로 1947년, 정부고문 으로 발탁됨.▷ 1947년 말 - 국민당 혁명위원회가 발기되고 여기서 명예주석으로 임명.▷ 1949년 1월 21일 - 북경함락 전야에 장개석이 국민당 총통의 자리에서 은퇴. 이후의 총통인 이종인이 그녀에게 당과 국가업무의 지도권을 권유하였으 나 거절.▷ 1949년 5월 - 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그녀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한 국가권력최고기관인 중앙인민정부의 6명의 부주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 이후 공산당에 가입하려 하였으나 공산당 내부에서의 반대로 당원이 되지 못함.▷ 1949년 - 전국부녀연합의 명예주석으로 활동.▷ 1950년 - 중국복리기금회를 재조직하였는데 아동들의 복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명칭 을 중국복리회로 변경.▷ 1966년 - 모택동에 의해 공식적으로 문화대혁명 선포. 그녀는 공산당이 아니라는 이유 로 위협받음. 이후 계속 그 위협은 사라졌으나 심한 불안 속에서 생활함.▷ 1981년 5월 8일 - 캐나다의 빅토리아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학위를 받음.
뮤지컬 『알타보이즈』를 보고『알타보이즈』를 보면서 처음에는 수업시간에 들었던 여러 가지 장르 중 어떤 것인지, 어떤 장면을 유심히 봐야 하는지, 어떤 장르의 노래들이 나오는 지에 대해 분석하며 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뮤지컬이 시작하면서 나는 이전에 생각하였던 여러 가지 수업시간에 배웠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그 다섯 명의 알타보이즈에게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알타보이즈』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알타보이즈가 세상에 찌들고 타락된 우리들을 신의 뜻을 받아 구원해준다는 내용이다. 특히 나에게 있어 가장 인상에 남은 것은 그 내용의 전달에 있어 연기의 대사에 중점을 두지 않고 우리들에게 좀 더 친숙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맞춘 가사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통한 메시지 전달은 좀 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의 입에서 관객의 귀로의 전달이 아닌 배우의 마음과 관객의 마음으로의 전달로써 이어져 보다 편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각 다섯 명의 캐릭터가 서로 애매하지 않고 일관적으로 공연을 이끌어 주었기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상당히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그러나 처음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뮤지컬에 대한 분석적인 느낌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음악과 춤 등에 의해 이미 나는 수업시간에 들었던 뮤지컬의 요소나 뮤지컬의 장르를 생각할 만큼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것들은 뮤지컬을 보고난 한참 후에야 생각할 수 있었고, 공연 당시에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때 이미 알타보이즈의 한 멤버로 들어가 같이 공감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알타보이즈』를 보면서 나는 하나의 단어가 계속 머릿속과 마음속에서 맴돌았다.“순수함”사실 이것 말고도 나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우정과 사랑, 의리, 열정 등을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미 순수라는 하나의 단어에 포괄 될 것이다. 그리고 뮤지컬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세상에 찌들고 병들어 타락한 우리들을 구원해주기 위해 왔지만 이미 그들은 공연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그러한 세상에 찌들어 타락해버린 상태였다. 공연의 마지막에서 알타보이즈의 4명의 멤버(매튜, 루크, 마크, 후안)는 서로가 서로를 배신하고 각자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서로를 버리려 하였던 것이다. 친구의 우정보다는 자신의 성공과 돈 - 보통의 사람들도 동의를 하겠지만 이것이 세상에서 타락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을 위해 배신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가장 하나님의 부름으로써 모이게 된 알타보이즈에서 어쩌면 가장 적합하지 않은 유태인인 에이브라함만이 가지고 있던 그러한 “순수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진정한 알타보이즈로 돌아오게 된다.나를 포함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쩌면 모두 이미 그 누군가도 구원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의 타락에 빠져있는 것이 아닐까?어떤 사람들은 순수함을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라고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순수함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열정, 사랑, 우정, 의리 뭐 이런 것들도 사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순수함의 뒷받침 후에 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순수함을 우리들은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다들 성공과 돈의 노예로 변해가고 세상은 더욱 더 황폐해져 가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이제 사람, 인간이 아닌 짐승이,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바보의 눈에는 바보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미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한 그들의 눈에는 모두가 자신과 같은 그들로만 보게 된다. 이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함이 그득한 인간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순수함이 그득했던 그들도 그러한 바보 취급으로 인해 또 다시 세상의 타락으로 편입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로라고 취급하는 그들이 오히려 우리는 타락한 짐승이라고 취급해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송대 사학의 특징송대의 사학은 이전시대의 사학을 집대성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송의 관방수사는 당의 제도를 계승·발전시켜 하나의 완전한 역사편찬기구를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사관이 상설기구로 되는 이외에 기거주와 시정기를 편찬하기위한 전문기구가 생기면서 일록과 실록, 국사의 편찬 체계가 상당히 확립되었다. 이밖에 본조의 회요나 전대의 정사, 그 밖의 중요사료를 편찬하는 경우에도 바로 각종 형태의 편찬기구를 수시로 편찬하였다. 한편, 이렇게 사관의 체계가 확립·발전되는 가운데 많은 사학의 명가들이 배출되었다. 사마광, 구양수, 정초, 원추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송대 뿐만 아니라 중국사학사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이처럼 송대 사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다음과 같다.첫째, 당말 오대이래의 분열을 끝내고 통일된 중앙집권 국가가 등장하여 경제발전과 사회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사학이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둘째, 송대는 문치주의를 국책으로 표방하였기 때문에 학술과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러한 문치주의를 표방하였던 송대는 국력이 가장 약했던 시기였다. 특히 북방민족의 위협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사가들에게 새로운 사고와 연구를 진행시켰다.셋째, 송대는 과거제가 발달하여 독서인들이 계속적으로 늘어났고, 사회적으로도 역사를 말하고 또 읽는 풍조가 유행하여 대량으로 사서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에 사학은 광범위하게 중시되어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넷째, 송대 학술은 토론의 풍조가 많아서 학파가 나타나고 학자들의 연구는 경·사·자·집을 다 포함하여 각 방면의 연구를 종합하여 서로 자극을 줌으로써 사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이렇게 발전된 송대 사학은 중국사학사의 최고봉에 이르게 되는데 그 성과는 다음과 같다.첫째, 중국사서의 체제가 송대에 들어와 더욱 완비되었다. 특히, 편년체 사서가 이전의 기전체 정사를 타파하고 독존하는 국면을 가져왔고 동시에 편년체 자체도 당 중엽 이래로 발전된 통년체와 함께 충분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강목체와 기사본말체 등의 새로운 서술체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둘째, 사학의 편찬체제가 늘어남에 따라 송대 사학의 범위가 더욱 확산되었다. 사가들은 경서나 정사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자료를 취했으며, 경학과 사학을 비교하여 고증하는 방법으로 연구하였으며 이 외에도 지방사나 민족사, 중국역외사 등의 다양한 사학이 등장하였다.셋째, 송대 사학의 돌출된 특징은 회통사상이 사학의 주류였다는 점이다. 이로써 계통적이론을 형성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주류였던 단대사의 맹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사학연구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 일으켰다.다음으로는 이러한 특징과 성과를 이룩한 송대의 사학체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남조 역사서의 특징위진남북조 시대는 한말 황건적의 난부터 수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약 400년에 가까운 시기로써 중국사회가 장기간 혼란에 빠진 시기였다. 그러나 사회의 혼란기와는 반대로 사학은 이 시기에 크게 발전하였다.이렇게 위진남북조 시대에 사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간접적인 배경과 직접적인 배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간접적인 원인으로 먼저 여러 왕조의 분열 및 흥망성쇠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대상황이 사가들에게 수많은 역사적 문제를 제기하게 하였고 사서 편찬에 극히 풍부한 내용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화폐가 폐기될 정도로 자연경제가 강화되었으나 사회의 발전을 정체시키거나 후퇴시키지는 않았는데 특히 남방이 개발되어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되면서 중국경제의 중심이 남방으로 전이되는 기초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중심의 이동은 문화와 사상, 과학 등 모든 것을 전이 되도록 하였고 이는 사학발전의 기초를 마련하게 하였다. 한편, 과학의 발전과 함께 종이제조기술 또한 함께 발전하여 종이의 보급이 보편화되어 대량의 저서와 책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여러 곳에서 이루어진 민족들 간의 투쟁으로 서로간의 교류가 빈번하게 되었고 이것은 중국문화사상 자체를 발전시킴으로써 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통치자들이 사학을 중요시 한 것이다. 통치자들은 사학을 정치투쟁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혼란한 상황에서의 정신적인 무기로써 이용하였기에 매우 중요시 하였다. 이 때문에 사서를 병서와 함께 읽도록 장려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서의 편찬을 장려하고 이를 위해 사관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학을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문화 전적의 수집과 정리를 중시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대량의 도서목록이 나오게 되었다.요컨대, 이러한 위진남북조시대의 시대적 특성은 사학이 발전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하였던 것이다.이 시대 사학은 많은 발전과 함께 전 시대와는 다른 여러 가지 특색이 나타난다. 먼저 이전이 주로 사관이 역사를 편찬하였던 것과는 달리 기 시기에는 개인이 역사를 편찬하는 경우가 많아져 역사편찬의 저자가 많아지는데 이렇게 저자가 늘어남과 함께 사서의 분량 또한 많아지게 되었다. 후한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사서의 여러 가지 체제가 이 시기에 들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의 한 예가 실록과 기거주, 정치·법률·제도에 대한 번문적인 저술이 획기적으로 발전 한 것이 그것이다. 한편, 남북조시대 사학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쓰이고 있는 사학의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전시기까지는 사서가 유가경전의 종속상태로 간주되어 사학의 개념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에 들어와 사학이 경학으로 점차 독립하게 되면서 사학의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이전시대의 사서인 『한서 예문지』와 사학이 경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정착된 『수서 경적지』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후한대에 쓰여진 『한서』의 도서목록이라 할 수 있는 「한서 예문지」에서 史의 부분에 오행이나 역법 등의 도서를 나열하고 일반적인 도서를 나열하는 춘추의 부분에 『사기』와 같은 역사서를 나열함으로써 아직까지 史의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기에 사학의 개념이 정립되어지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정립된 당대에 쓰여진『수서』의 도서목록인「수서 경적지」에서는 경의 부분에 오행이나 역법 등의 도서를 나열하고 史의 부분에 역사서를 나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당대에 확실히 자리잡은 사학의 개념 정립의 기반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사기』는 사마천에 의해 저술된 중국 최초 문명시대인 황제시대부터 전한의 무제시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이다.사마천의 부친은 당시 태사령이라는 관직에 있었던 사마담이었다. 태사령은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문서, 역사기록, 천문관측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고 자연철학과 역사학, 제자백가 사상 등을 연구하던 관직이었다. 이러한 관직에 있었던 그는 죽기 전, 공자의 『춘추』이후 제대로 된 사서가 끊어진 점을 개탄하였고 이에 아들이었던 사마천에게 태사령의 관직을 이어 사서의 편찬을 부탁하였다.어려서부터 고문을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의 논저와 천문, 율력, 지리, 의약, 점복 등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20세 이후 전국을 유람하며 경험을 쌓고 자료를 축적하였던 그는 부친의 임종 3년 후에 부친의 부탁을 받아 태사령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며, 그 동안 축적되었던 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통한 사서편찬에 착수하였다.이러한 사서편찬을 하던 중에 그는 흉노에게 패한 이릉을 변호하다 한무제에게 노여움을 사 궁형이라는 치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부친의 유업계승과 사기 저술의 완성을 위해 더욱 더 분발하게 된다. 2년 후 그는 다시 중서령에 임명되어 황제의 신임을 받게 되지만 그는 사기 저술을 자신의 유일한 정신적 의지로 삼고자 한다. 그리고 사마천은 이릉의 화 이후 사기 저술의 목적을 보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설정하게 된다.『사기』는 최초의 기전체 사서로써 본기 - 열전 - 제가 - 서 - 표 로 구성되어진다.먼저 본기는 통치자들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춘추』의 형식을 따라 편년체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사마천은 통치자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명목상의 통치자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닌 실제의 통치를 했던 인물의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항우본기」와「여후본기」를 본기에 넣은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본기를 쓴 목적은 왕조교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서술하였는데 그는 역사가 하늘(天)의 아들인 통치자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통치자의 잘잘못에 의해 왕조의 흥망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사마천은 공자의 천명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세가는 봉건 제후들의 역사 즉, 통치자의 주변인물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사마천은 공자가 제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세가에 넣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의 사상이 이후의 왕조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그가 죽어서도 왕의 주변에서 계속 남아있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다.열전은 역사의 흐름에 참가한 일반인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인물 개인의 역사만을 쓴 것이 아닌 주변민족의 역사를 넣기도 하였는데 「흉노열전」,「조선열전」,「서남이열전」등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중국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던 민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이 사마천이 가지고 있었던 화이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당시 제후였던 오왕의 비는「오왕비열전」에 들어가 있는데 그가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기에 강등되었기에 열전에 넣은 것이다. 다시 말해 사마천은 오왕의 비를 난을 일으켜 천명사상을 어겼기에 천벌을 받았고 이에 세가가 아닌 열전에 서술한 것인데 이로써 다시 한번 사마천의 기본적인 사상이 천명사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