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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데올로기 미술비평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
    “이데올로기 미술 비평이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 전후 현대 미술을 중심으로-들어가는 말미술 나아가 예술의 형태는 과거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 내용과 형식 자체가 매우 다채롭게 변화되어 왔으며, 그것은 바로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술비평이 지금의 이론적 형식을 갖기 전에도 그러한 미술비평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비록 형식이 정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작가의 비평적 관점에 의해 작품이 만들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비평의 기준이 미메시스(m?m?sis), 즉 모방이었다면, 현대로 올수록 모방보다는 다른 것에 기준을 둔 비평들이 많아졌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데올로기비평 관념적 미술비평이라고 할 수 있다.이데올로기(Ideologie)는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데스튀트 드 트라시(Antoine Louis Claude Destutt de Tracy)의 『이데올로기의 개론, 1801』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구체적 현상에 대한 관념과 이상이라는 의미의‘Idea’와 어떤 사실에 근거한 인식, 즉 과학의 뜻인 ‘Logik’으로 이루어진 합성어인 이데올로기는 관념의 과학, 이상의 과학 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 의미로 인간 ·자연 ·사회에 대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의 제형태를 뜻하는 것이다.그리고 미술 비평(art criticism)은 미술작품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을 말하며,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별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여기서 그 가치판단의 준거를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작품의 좋고 나쁨은 결정되는 것이며, 그것에 따라 비평의 형식도 달라진다. 즉 이데올로기 미술비평 혹은 이념적, 관념론적 비평이란 외부 대상과의 관계에 비추어서 하는 비평에서 벗어나 이념적인 기준에 준거하여 비평하는 것이다. 이때 일반적으로 그 준거가 되는 이념은 크게 나누어 종교, 도덕 혹은 윤리,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이념 세 가지이다.고래로 종교와, 윤리, 정치 사회는 그 의미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인간이 가진 사회간 이후 본격화 된 정신분석학과, 다다이스트들의 반(Anti) 예술 운동은 초현실주의 미술을 등장시켰다. 초현실주의 운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차례로 등장한 다른 전위 운동에 비해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는데 이는 제 1차 대전의 참상으로 기인된 인간의 의욕과 양심의 가책이 생의 변화를 열망하는 정신 상태와 현실성에 대한 도전으로서,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의 방법론과 헤겔의 관념론(Idealism)을 원용하여 인간 정신의 전면적 해방을 위한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일종의 신비 사상에 의존했던 점, 그리고 당시 유럽의 정치적, 사상적 풍토가 마르크시과의 접촉, 융합에서 비롯한 점을 통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이성이나 합리적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으로 인간의 잠재의식을 제시하였고, 오토마티즘(Automatisme)을 통하여 획기적인 발전하였고, 19세기 이후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상상력의 해방을 명확한 방법의식에 의거 철저히 구축시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가 있다.달리의 [기억의 고집, Persistance de la memorie) 은 고향인 카다케스 해안이 배경으로, 흐물거리는 물체들이 등장하여 그 형태에서 불충분하고 불길한 현실을 이야기 하고, 문명의 상징으로 시계를 등장시켜 어린 시절로의 퇴행을 의미하며 죽음이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나타내었다.초현실주의 자동기법을 활용했던 대표적 화가들은 1938년 국제전 이후 2차 대전으로 인해 분산되면서 많은 작가가 전후 추상표현주의에 압도 되었지만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추상표현주의 이외에도 팝아트, 환경예술, 또한 Happening의 원천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더불어 19세기 초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미술운동의 질서 속에 그 위치를 굳혔는데 이는 20세기 회화사에서의 큰 수확이며 현대인의 새로운 정신의 반영이었다.독일 표현주의와 전후에의 의미.야수주의와 함께 20세기 초 새로운 미술로서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표현주의는 근대상 공습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작가들에게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충격을 주었고, 피카소, 필립 거스턴(Philip Guston)등에 의해 주제화 되었다.해리 스턴버그 [파시즘]장 포트리에 [인질의 머리]1차 대전 이후 꽃피울 것으로 생각되었던 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의 개전 후에는 전쟁수행에 효과적이고 파괴적인 전체주의에 맥을 펴지 못하고 흔들렸다. 미국 화가 해리 스턴버그(Harry Sternberg)의 판화[파시즘]에서 전체주의 폭력성과, 위력적인 전체주의의 모습을 거대한 괴물로 이미지화 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가 셋 달린 이 괴물은 각각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가 합체된 존재로 그 주변에는 학문과 예술의 상징물들, 그리고 기독교와 유태교의 상징물들이 마구 짓밟혀 있다.이렇듯 2차 대전 중에는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전쟁의 잔학성과, 무서움 그리고 전쟁의 비도덕성과 파시즘에 대한 공포감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그 중 프랑스화가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는 [인질] 연작을 통해 전후 앵포르멜(Informel)의 물꼬를 튼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을 제작한다. 앵포르멜은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처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하고 공간이나 마티에르에만 전념함으로써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것으로 그것은 기성의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무정형 ·무한정한 자유가 오히려 표현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였다.2. 정치권력의 수단미술은 그 자체가 가지는 선동성과, 호소력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독재자나 정치권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알리기 위해 미술을 이용하였고, 많은 이들이 그것에 선동되고, 그러한 정치적 사상에 의하여 그림을 평가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독일 히틀러에 의해 일어난 퇴폐미술전과 tm탈린에 의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리고미국은 당시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었던 공산주의가 서유럽의 저명한 예술가들에 의해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퍼져나가고 있었으며, 공산당의 영향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나가는 것에 대한 대항으로써 폴록에게 주목하였다.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흩뿌리는 그의 스타일은 추상표현주의의 상징으로서 적합하였고, 개인주의 자유, 순수성 같은 당시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에 맞서 외치던 가치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상표현주의 이후 미술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져 왔으며, 그 뒤잭슨 폴락 [Lavender Mist]다양한 방향으로 현대미술이 전개되었다.위에서 살펴보았듯 미술이 가지는 시각적 언어는 정치이데올로기에 의해 많이 이용되어져 왔다. 특히 히틀러나 소련의 경우에는 그들이 역사의 승자가 되지 못하여 그들의 정치이데올로기를 대변해주던 미술이 결국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그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이는 추상표현주의 이후에 세계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왔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미술가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갔었고, 본토에서 전쟁을 거치지 않고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점이 그러한 현상을 뒷받침해 주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3. 자본주의의 발달1913년 4월 1일, 미국 미시간주 하일랜드 파크의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새로운 생산방식인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이용한 자동차가 처음 생산된 이래 20C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형태라는 사회문화적 혁신을 몰고 온 이 새로운 생산체제는 포디즘(Fordism)이라 불리며 20세기 식 노동의 성격을 결정하여 전례 없는 풍부한 소비문화를 가능케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전후 서구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퍼지고 공산주의가 몰락함으로써 더욱 확연해 졌다.(1)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전후 물질문명의 새 장이 열리고 엄청난 풍요가 몰려왔다. 프랑스의 사상가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 개척하고 있다. 이러한 물질문명시대의 산업주의 속에서 버려지는 공업재료를 이용한 미술작품들은 다양한 사조를 거치면서 그 특색과 형태를 달리하며 거듭나게 된다.로버트 라우센버그 , [모노그램]19세기에 이르러 산업혁명은 기계문명을 통한 물질문명의 길을 열어 놓았고, 기계문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물질적 행복을 약속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후유증은 인간이 종래에 이룩한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이 산업사회의 소유양식으로 나타나 모든 대상을 객체로서 환원시키는 끝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악순환을 가져오게 되었고, 인간과 물질이 동등시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리얼리스트의 목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풍속, 이상, 모습 등을 예술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당시의 젊은 지성을 수 세대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과 기성윤리가 다져놓은 그들의 사회에 대하여 심한 회의와 반항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다다운동이 그러한 사실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시문명은 예술에 있어서 새로운 소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 오브제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지고 왔고 일상생활과 환경이 작가의 선택과 재창조작업을 통해 쓰레기로 둘러싸인 도시 환경은 창작의 새로운 소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은 사회적으로 배척되고 변두리로 밀려난 산업사회의 부스러기들을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긍정적인 가치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크가 예술가들에 의해 작품으로 재창조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1950년대 이후의 시대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인간의 문명에서 쓰레기는 버려진 후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하다가 대량생산에 따른 공업제품도 그 내구력이 발달하여 버려진 후 더 이상 자연적 소멸에 기댈 수 없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쓰레기와의 전쟁은 1950년대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현대 예술가들은 쓰레기가 있는 도시다.
    예체능| 2013.11.12| 21페이지| 1,500원| 조회(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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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8혁명의 전개와 그 의의
    68 혁명-혁명의 전개과정과 그 의의-Revolution de Mai들어가는 글본론사상적 배경 - 실존주의68혁명의 전개시대적 상황혁명의 확산과정사회로의 확산정부의 대응68혁명의 의의기성사회에 대한 거부성의 해방맺음말Revolution de Mai들어가는 글"나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68혁명 당시 내세웠던 슬로건이다. 금지에 대한 금지, 이는 단순히 자신의 자유만을 요구하는 방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주체성의 확립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흔히들 말하는 혁명이란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국체 또는 정체를 변혁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기존 사회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이제까지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던 계층 대신, 피 지배계층이 그 권력을 비합법적 방식으로 탈취하는 권력교체의 형식이다.68혁명은 역사적 사실 만으로는 어찌 보면 실패한 혁명이다. 그것이 정권교체나 피지배계층의 권력창출로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68혁명이후 세상이 변했다는 말처럼 다른 의미에서는 그 혁명이 성공하였으며, 그 정신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우리나라의 교육체계 속에서 16년 이상 공부를 해온 나로서는 그들이 기성 사회에 반대하기 위해 행한 행동이 언뜻 이해하기 힘들고 완벽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영화 몽상가들에 등장하는 세 명의 젊은이의 행동 역시 그렇다. 지나칠 만큼 안정적이고 부족할 것 없이 지내왔던 지난 나의 시간들은 어쩌면 나를 현실에 안주하고 모든 것에 만족하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1 - 9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이제는 사회인으로 나아가야하는, 자신 스스로가 주체적인 삶을 결정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 무엇인가 나에게 부재해 있음을 느끼고 있다. 이번에 68혁명에 대해 조사해 보면서 그 혁명의 과정과 의의를 되새기고, 그 실제를 파악하여 앞으로 우리들이 지녀야 할 인간의 주체성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2 - 9본론사상적 배경 - 실존주의19세기 이전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가치체계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합리주의-를 통해서 초월된다고 보았다.즉, 이전까지 신으로 대표되어오던 어떤 초월적 가치에 의한 인간의 결정이 그것이 무너지게 되는 비극적인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인간 개개인이 지닌 '내재적 가치' 혹은 '주체성'으로 그 중요성이 옮겨오게 되었다. 이전까지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정이 초월적 가치규범에 의한 재단이라고 보았다면 그것이 한 인간 개인의 실존 그 자체로 이동해 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실존주의를 주체성의 철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 이며, 68혁명이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주체에 의한, 다양한 목소리의 결집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당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68혁명의 전개시대적 상황1968년 당시 프랑스는 장기간의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한 대량 소비사회에서 갑3 - 9작스러운 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는 경제 호황기를 누리다 1966년부터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고 1968년에 접어들면서 실업률이 급증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경제호황에 의한 부유한 삶이 갑자기 찾아온 경제위기로 몰락하자 이전까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게 되고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무제한적인 소비와 이윤을 추구하던 자본주의 경제 불황을Revolution de Mai맞이하고, 구조적 모순에 의해 야기되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은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제위기가 68혁명의 주된 원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또한 당시 프랑스 사회는 가정과 학교에서 권위주의가 지배적인 가치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청소년들에게는 권리보다 복종과 의무가 강요되던 시대였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이후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대학생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61년 20만 명에 불과했던 대학생이 68년에 이르러서는 5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질적인 성장을 당시 프랑스는 이데 이날의 운동은 학생조합 내지 학생자치회에 의한 통상적인 투쟁이 아니었다. 선진적인 활동가가 수업중인 교실로 순회 돌입하는 등 반란적인 직접행동으로 대중반란을 조직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방식이 68혁명의 특징인 행동위원회 운동의 시작이었다. 반란투쟁은 대중과 대결하여 대중을 반란행동에 연대하는 부분과, 반대 행동하는 부분, 중간적인 동요부분으로 분열시키고 반란에 적대적인 부분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대중의 분해와 분열을 철저하게 촉진한다. 실제로 4월4 - 925일에는 투르대학에서 우익청년단체 '옥시단'과 대치하다가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학생집단의 무장충돌을 구실로 대학 당국은 학원을 봉쇄하였고, 국가권력은 학생반란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은 국가권력의 공격에 대한 무장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5월 2,3일의 낭떼르분교, 소르본느 본교의 폐쇄, 소르본느 대학으로의 경찰투입과 점거학생 527명 대량체포를 계기로 5월 3,6,7,Revolution de Mai8,10일로 이어지는 카르체 라탄의 대중적 점거전과 바리케이트전이 시작되었다. 소수의 학생운동가집단의 직접행동에 의한 반란운동이 두 달 만에 수 만 명에 이르는 대중을 가담시킨 가두점거전이나 바리케이트전 으로 발전한 원인은 근본적으로는 1960년대 후반의 세계적 정세와, 그로 인해 초래된 학생대중의 현상불만의 누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UNEF나 SNESup 등 조합적?자치회적 조직의 정력적인 활동에 의한 바도 크다. 조직들은 낭떼르의 투쟁이 시작되자 즉시 연대하여 항의집회, 스트라이크를 학생대중, 교직원, 일반노동자, 시민에게 호소하였다. 대규모의 결집이 가능했던 것은 선진적인 활동가집단의 과감한 직접행동과 조합적?자치회적 조직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폭발력의 이면에는 직접행동의 반란행동위원회에 의한 대중반란의 조직이라는 요소와 조합적?자치회적 조직에 의한 시위적 압력투쟁의 조직이라는 종래의 요소가 운동 속에 혼재하여 서로 모순 한다는 문제점이판하였다. 이러한 운동의 전면적 확산은 대중적 공동투쟁의 헤게모니가 종래의 조합적?의회적 좌익에게로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낭떼르에서 시작된 직접행동의 반란운동에 의해서 유발된 학생반란과 거기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참가가 이제 조합적 켐페인 스트라이크, 켐페인집회, 시위로 변질되고 구속받게 된 것이다.노학연대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공산당이나 사회당, 노동조합조직은 정치적 좌파라고 분류된다. 정당 당료들은 제도적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조합들도 노동귀족화의 형태를 띄기 시작한다. 당시 급진적 조직의 학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은 좌파 정당과 노조 지도부가 혁명역량을 상실한 채 자본주의 결과물을 향유할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사회적 좌파로는 좌파 학생들과 노동조합의 하부조직 청년노동자들을 들 수 있는데 사회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있지 않아 사회혁명의식이 고양되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좌파 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68혁명 기간에 계속 이루어진다.학생반란을 계기로 폭발한 노동자의 파업은 조합관료나 조합기관을 거치지 않은 직장노동자의 직접적 주도에 의해 실현되었고, 사실상 공장점거투쟁이었다. 노동자의 공장점거투쟁은 생산과정이 자본의 생산과정인 자본Revolution de Mai주의사회의 근본을 정면으로부터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노동자가 스스로 생산과정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주체로서 노동자가 자기 정립하는 출발점이 된다. 공장점거투쟁에 돌입하자 노동자는 사회의 모든 법과 질서에 전면적으로 마주치게 되며 따라서 자기의 투쟁을 관철하기 위해 무장을 갖춰 자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대중의 직접적 대중무장의 원점이 된다.정부의 대응정부?지배계급은 새로운 대응을 한다. 5월 11일 퐁피두 수상이 수상방송을 통해 소르본느의 재개, 재판의 재심, 체포학생의 석방을 약속하였고, 13일 밤 카르체 라탄의 경찰대를 철수시켰다. 이러한 정부의 유화정책에 정치문화를 등장시켰다는 국제적 성격의 의의와 대량 소비적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 즉 기존 질서에 대한Revolution de Mai거부라는 의의를 지닌다.6 - 968혁명 연구의 권위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이를 에로스 효과(eros effect)라고 하였다. 68혁명 당시 젊은이들은 소비주의에 대한 문화적 순응, 여성 차별, 소수 집단에 대한 차별, 젊은이들에 대한 차별 등을 의문에 붙이면서 전 세계적 반란을 동반하였고, 이는 문화적 자각을 전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자각은 각국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일상생활의 작은 문제에 대한 원인 찾기에서 시작하여 전 사회적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들의 투쟁은 기존의 구 좌파와는 확연히 구별된 것이었다. 제도화된 구 좌파는 소비에트의 국가 사회주의 적 경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관료적이었고 권위적이었다. 중앙의 방침에 따라야 했으며, 여기에는 개인의 개성과 문화적 차이는 존중되지 않았다. 비록 68혁명 당시의 대학생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레닌과 맑스, 마오쩌뚱의 전통적 좌파 이론을 따랐지만 그들의 관심은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전통적 좌파의 권위주의도 벗어날 수 없었다. 프랑스 젊은이들의 파업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이 되었고, 그들의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는 68년 1/4분기에 67년 4/4분기의 3배에 해당하는 폭발적인 학생들의 봉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프랑스의 68혁명과 전 세계적 학생 봉기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프랑스의 68혁명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거부로부터 출발한다는 의의를 가진다. 비록 혁명이 앙시엥 레짐, 즉 구체제를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실패한 혁명으로 보기 때문에 68혁명이 아니라 68운동으로 명명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기존의 질서에 대한 거부가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과 연대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현재 프랑스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프랑스 대학생들은 교육제도의 문제에 대한 봉
    인문/어학| 2013.11.12| 11페이지| 2,000원| 조회(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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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로본 똘레랑스 - 필라델피아
    -영화를 통해 본 다양성과 똘레랑스-필라델피아?학 과 :?이 름 :?교수님 :?날 짜 :필라델피아들어가는말본 론필라델피아(Philadelphia, 1993) 줄거리공간적 배경- 영화 속 도시 필라델피아의 의미- 법정과 현실의 경계영화에서 나타난 호모포비아- 동성애에 대한 법률적 인정호모포비아의 원인- AIDS와 다양성에대한 이해의 부재- 종교적 관념다양성에 대한 이해과 관용맺음말필라델피아들어가는 말“이 법정에서 정의는 인종, 종교, 피부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적인 기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영화 필라델피아의 한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이다. 판결에 앞서 법은 그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그 사람의 인종이나, 종교, 성적인 기호의 차이에서 벗어나 공평한 판결을 한다는 법의 평등성을 재판장은 이야기 하고 있다.하지만 앤드류의 변호사 조는 대답한다.“존경하는 재판장님 우리는 이 법정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렇죠?”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법정과 다른, 다름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곳이라는 대답이었다.이 짧은 문답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가 바로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 이다. 다원화 되어가고 있는 21세기에서 그것이 종교, 이념, 국가, 혹은 영화에서 말하는 성적취향이든 다름에 의한 충돌은 과거보다 더욱 빈번해 질 것이다. 그러한 세태에 앞서 21세기를 살아야 할 인간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는 무엇일까?그리고 나아가서는 인간은 왜 서로 다르며 자유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지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영화 필라델피아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본 론필라델피아(Philadelphia, 1993) 줄거리조나단 드미 감독 톰 행크스, 덴젤 워싱턴 주연의 93년 작 필라델피아는- 2 -동성연애자인 변호사 앤드류(Andrew Beckett 톰 행크스 분)와 변호사 조(Joe Miller 덴젤 워싱턴 분)가 등장하여, 사회에 만연한 호모포비아(homophobia))에 의한 사회적인 폭력과, 그것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인공들의 노력에 대 모습은 그 배경음악과 함께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의 실재성을 더욱 사실적으로 각인 시켜 영화의 공간속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도시 필라델피아는 그 지역이 가지는 특수성만으로도 영화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영화에서는 이렇듯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영화 전체의 의미를 잘 대변해 주기도 한다. 일례로 애니 프로(Annie Proulx)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또 다른 동성애 영화 에서도, 호모포비아에 의한 사회적인 혐오를 텍사스- 3 -라는 공간과 대자연을 통해 더욱 부각시키기도 하였다.)필라델피아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동쪽 끝에 있는 도시로서 1636년 스웨덴계 이민이 최초의 백인필라델피아취락을 건설한 데서 비롯되어 1681년에 W.펜이 영국계 이민을 이끌고 온 뒤부터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독립전쟁을 전후하여 독립군의 최대 거점이었고, 여러 차례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1776년에는 인디펜던스 홀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된 도시이다.) 이러한 필라델피아라는 도시의 성립과, 그 발전과정,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배경으로 하여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한 인권(Human Rights)과 평등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영화 속에서 재판이 시작되고, 수많은 인파들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는 앤드류와 조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독립선언에서는 모든 이성애자는 평등하다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하고 있다 고 말이다. 즉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독립선언을 통해서 선포되었으며, 그것이 선포된 곳이 바로 필라델피아이다.하지만 형제애와, 평등의 선언이 이루어진 필라델피아에서 조차도 인간은 바로 다름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인간의 평등을 자신과 같음에 한하는 그러한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집단적 폭력에 가까운 이러한 차별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이 가진 종교나, 질병-AIDS-에 대한 무지, 그리고 관용의 부재 등 있으며, 군중으로서의 인간의 성격과,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법은 만인의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그 누구라도 지극히 일반적이고, 사실적으로 받아들여지며, 법정 안에서는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고 말하고, 또한 대부분의 판결의 경우 그 사람의 특정 요인을 떠나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4 -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법정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성생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했으며, -그것이 앤드류에게 있어 득이냐 실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셔츠를 풀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만 했다. 결국 그러한 수치를 감내하고서 법정 속에서 앤드류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킬 수 있었고, 차신을 차별한 사회에 대한 벌을 내릴 수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고 싶어 했던 자신의 사생활이 타인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인권을 존중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또한 배심들이 압도적으로 앤드류의 편으로 돌아섰던 것이 그에 대한 연민에 의해서였다면, 즉 그가 에이즈라는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과연 그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도 들게 하였다.법정이 사회적 규약이 만들어 놓은 평등의 상징이라면 일상적 공간은 그 규약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공간이다. 사람들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그리고 거부감으로 인해 앤드류는 상처를 입고,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실적 공간에는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앤드류의 가족과 친구들이며, 또한 TV속에 나오는 인권보호에 대해 외치던 군중들이다.즉, 크게 드러나는 3가지의 공간 속에서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반응과 사람들의 인식을 볼 수 있다.영화에서 나타난 호모포비아앞서 말했듯 호모포비아(homophobia)는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와 그로 인한 차별을 일컫는 말로 동성애혐오증이라고도 한다. 호모포비아에 사로잡힌 이들은 정확한 정보나 지식 없이 막연히 동성애는 나쁜 것이고,고 나서 부터는 돌변한다. 그간 그가 쌓아왔던 업적은 한순간에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돌변하고, 최고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실력은 미달이 되었으며, 신뢰의 표시로 맡겼던 업무는 단순한 테스트로 돌변한 것이다. 또한 그가 여기저기 에이즈 병균을 옮기고 다녔다며 같은 사우나에 갔었던 것 마저 치를 떨며 불쾌함을 드러내었다. 또한 동성애자의 변호를 맡았다는 이유로 조 역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고, 심지어 같은 동성애자로부터 데이트제안을 받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을 단지 역겨움으로 표현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인이미지가 각인되어져 있는 것이다. 사실 동성애운동 이전에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해 일반인들의 인식이 부족하였으며, 이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인 제재도 받았었다.- 동성애에 대한 법률적 인정1969년 6월 28일 오전3시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발생한 스톤웰(Stonewall)습격사건이 동성애 운동의 중요한 시초이다. 이 사건은 동성애자들이 부당한 억압에 맞서 최초로 소리를 내지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스톤웰 항쟁 이후 미국에서 동성애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항쟁 후 1년 내에 미국에서는 12개의 동성애 단체가 구성되었고, 1970년 시카고 대학에서는 660명이 참여한 최초의 공개적 게이 댄스 모임이 열려 자신들의 성 정체성- 6 -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1973년에는 미국 정신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정신 질환 리스트에서 제외하는데, 이는 단순히 의학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동성애자 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이제 정신 의학 분야에서 동성애는 치료 대상 질환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즉 사회가 동성애에 대해 법적인 차별 자체를 없앤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필라델피아호모포비아의 원인- AIDS와 다양성에대한 이해의 부재영화에서 앤드류는 에이즈(AIDS))에 걸린 동성애자이다. 그는 사람들의 편견과, 시선에 고통을 받를 발표하면서 많은 동성애자들을 거론했으며, 이 때문에 에이즈는 누구나 감염될 수 있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와 에이즈의 관련성만이 크게 부각 되었던 것이다- 7 -. 사람들은 이 원인 불명의 질환을 동성애를 단죄하기 위해 신이 내린 역병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동성애 공동체와 동성애 개인에 대한 물리적 공격까지 빈발하게 되었다.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동성애에 대한 이미지가 대부분 무분별한 성관계, 성폭력-계간-,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에이즈 발생에 대한 의견이 절대적으로 많다.이와 같은 원인들에 의해 형성된 동성애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반응들은 기실 대부분의 사람들-도덕적으로 성숙이나, 민족적 성향을 떠난-에게서 모두 나타나는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앤드류의 변호를 맞은 조 역시 처음에는 앤드류가 걸필라델피아린 병 때문에 그의 변호를 거절한다. 앤드류가 조의 사무실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 자신이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밝히자 멀리 슬그머니 거리를 두는 그의 행동과, 그 뒤 바로 담당 의사를 찾아가서 에이즈 감염 여부에 대해 물어보는 행위에서 이러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조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변호를 맡았으며, 뒤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길을 가다가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등 소위 말하는 도덕적으로 성숙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높은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한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 역시 동성애자에 대한 편협한 사고와,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성애에 대한 막연한 혐오와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앤드류가 다닌 법률회사의 대표들 역시 그러한 범주에 들었기에 앤드류의 일을 방해하고 그것을 빌미로 앤드류를 해고한 것이다.- 종교적 관념인류문화를 돌이켜 보면 모두 종교에 의해 많은 것이 이루어 졌다. 원시신앙에서부터 기독교, 불교 등의 거대한 종교에서부터 작은 규모에 이르기 까지 많은 종교에 의지하며 생활해 왔고, 그로 말미암아 종교이다.
    독후감/창작| 2013.02.12| 12페이지| 1,500원| 조회(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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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육당 최남선의 역사학 평가A좋아요
    六堂 崔南善의 歷史學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최남선의 연보와 생애1) 연보2) 생애2. 최남선의 문화주의3. 日鮮同祖論4. 不咸文化論과 檀君신앙5. 통사론Ⅲ.결론Ⅰ. 서론六堂 崔南善은 사학계뿐만 아니라 문학, 출판, 언론, 정치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대표적 문화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받으면서도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뜨거운 감자’가 되어온 인물이다. 한 말에서 일제시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50여 년 동안 쉼 없이 저술을 남겼고, 오랜 세월 동안 쓰인 방대한 그의 저술은 문화적 민족주의가 친일로 귀결되어 간 사상적 흐름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이다.최남선은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남겼지만 한국사에 대한 저술이 단연 많다. 그 자신이 역사학자로 평가되기를 바랐을 만큼 한국사 연구에 열의를 다한 학자였다. 또한 그는 일제 시기와 해방 후 한국인의 한국사 인식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역사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친일 행적은 그의 사학에 대한 연구를 기피하게 했고, 그나마 이루어진 연구도 그의 사학의 민족성·반민족성을 가늠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최남선이 이루어낸 한국사 연구가 당대 어떤 민족주의 사학자보다 오늘날까지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성과를 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근대 사학의 중심을 일제와의 투쟁에만 둔다면, 그가 이룩한 역사학 자체의 근대적 발전은 정당하게 평가 받을 수 없다. 본고에서는 최남선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살펴보고, 일제 말기 최남선의 사상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최남선의 연보와 생애1) 연보1890년 4월 26일崔獻圭와 姜氏 사이의 둘째아들로 漢城 中部 上梨洞에서 출생1901년 (12세)『皇城新聞』에 「大韓興國策」을 투고1904년 (15세)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자퇴 하고 귀국1906년 (17세)와세다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학과에 입학1908년 (19세)월간잡지 『少年』을 창간하고, 여기에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1909년 (20세)안계대전 종전을 전후해서 근대 자본주의 문명,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세계지배를 비판하면서 국제 질서의 개편을 주창하는 사조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사조 중의 하나였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을 일으킨 배경이 되었다. 1919년 말에 이르면 새로운 세계 사조는 改造論이란 형태로 일본을 통해 한국 사상계에 흡수되었다. 일본 개조론은 신인문주의를 바탕으로 일본식으로 재정리한 문화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면서 한국 지식인에게 가장 설득력 있는 현실 인식 틀로 대두되었다. 1920년 6월 25일에 창간된 『開闢』의 필자들은 문화를 인격을 실현하는 방편이자 인격이 실현된 상태라고 하였다. 인격을 발달시키는 것을 문화라고 할 때,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인격이 된다.인격 있는 인간으로의 자유로운 발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화이고, 이런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문화주의인데, 결국 문화주의는 ‘인격주의’가 된다. 문화주의가 인격주의인데서 인격의 자유로운 발달을 저해하는 모든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자는 운동론이 도출되었다. 인격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문화주의는 각 인격의 단위인 개인이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주의를 고수하게 된다. 따라서 문화주의운동은 개인을 각종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개인 자신으로 서게 하려는 운동이었다. 문화주의자들은 봉건적 유습에 의한 불평등, 부의 편중에 의한 불평등, 민족 차별에 의한 불평등을 인격 평등의 실현을 저해하는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개조를 요구했다.② 民族自覺論과 民族改造論문화주의자들에게 개인은 민족과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었다. 개인의 자각을 중시한 문화주의는 민족 문제 인식에서도 민족적 자각을 중시한 민족자각론으로 나타났고, 외래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즉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시대적 대세이지만, 민족적 주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지나친 서구 지향적 개조는 지나친 유교숭상으로 빚은 조선왕조의 폐해를 그대로 반복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조선적인 것을 자신의 조선주의를 선양시키는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역사연구였다. 그의 역사연구가 단군에로 집중되었던 것도 단군이 민족의 정신적 결합을 상징하는 표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심이 구현된 대상은 단군만이 아니라 조선의 국토 전부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애니미즘적 신앙이라 하였다. 또한 시조를 조선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문학으로 평가하고 시조를 부흥시켜 국민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주장했다.최남선은 맑스레닌주의의 민족 부정의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회의 개조와 변혁은 조선을 부정하고 민족을 부정하면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진보는 민족적 자기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했다.한국 고유의 것을 밝히고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민족적 자각을 완성해 나가려 했던 이 시기에, 최남선에게 민족은 생명처럼 소중했다. 그러나 독립이 막연해지면서 민족자각론의 낙관적 분위기가 사라지게 되었다. 최남선은 이러한 민족성의 단점을 개인의 단점이 아니라 한국사의 단점이고, 따라서 조선왕조의 유교에 한정되지 않고 통시대적인 단점이라고 하였다. 또한 한국사와 민족개조론을 연결시킴으로써 민족성의 단점을 한국사의 숙명으로 내제화시켰다.③ 1930년대 이후 文化優位論1930년대 이후 최남선은 문화를 민족보다 우위의 가치로 인식한 문화우위론자였다. 그는 “민족은 작고 문화는 크다. 역사는 짧고 문화는 길다.”라고 했는데, 문화우위론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민족은 상대적이고 한시적인 개념이었다. 민족을 대립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상적인 집단체는 아니라고 보는데 반해, 문화는 역사상 일시적으로 나타난 민족보다 영원하고 유구한 것이었다. 최남선에게 역사는 문화의 기록이었고, 한국사 연구에서 문화 연구는 민족 연구보다 앞서는 것이었다.한국문화의 우울성을 누누이 주장했던 최남선은, 한국문화가 일본문화를 능가할 뿐만 아니라 다른 계통의 불함문화권에서의 중심적 존재로서의 한국 문화의 위상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 문화의 우월성을 점차 퇴색했다. 한국 한 또 다른 학자는 조선사편찬에도 관여한 今西龍 (이마니시류)은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일선동조론에는 기본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었다. 그는 ‘수사노오=단군 동일설’을 ‘어리석은 설’이라고 단언하였다. 이처럼 일본은 일본 내에서도 사실상 통일되어 있지 않았던 수사노오 조선시조설을 조선 통치를 위하여 억지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4. 不咸文化論과 檀君신앙1) 단군론의 배경①신채호의 단군론최남선은 말년에 자신은 단군 신화를 연구하기 위해 모든 학문을 집중시켜 왔다고 술회했다. 사실 최남선만큼 단군신화에 무한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왕성한 연구의욕과 다양한 방법으로 단군 신화를 추적한 연구자는 찾기 어렵다. 그는 근대인이 단군을 신념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이념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단군을 객관적·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단군에 대한 논의와 그 의미는 을사조약을 전후한 계몽 운동기에 고양되고 있었다. 민족과 국가 존립의 위기 상황에서 단군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재조명되었고, 단군은 민족의 시조이며 한민족은 단군의 혈손이란 의식이 강화되었다.신채호는 『독사신론』(1908)을 발표하여 한말 교과서의 식민 사학적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새롭게 단군론을 제기했다. 『독사신론』의 단군 인식은 단군이 추장 시대에 장백산을 중심으로 조선을 개창한 후 각 부락과 지역을 정복하여 만주·요동·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숙신·조선·예맥·삼한의 여러 종족을 거느렸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단군의 정복 사업을 강조하여 단군을 정복 군주 또는 영웅처럼 서술했는데, 이는 한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 영웅을 단군으로 표출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또한 단군조가 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 체계의 단서를 열었다. 이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 강화된 한 계승의식을 부정한 것으로, 신채호의 단군인식과 고대사 체계는 민족주의 사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최남선의 단군론은 1920년대에 본궤도에 오르고, 신채호의 단군론도 1920년대에 『독사의 단군론은 3·1운동 후 3년 남짓한 옥고를 치루는 동안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 기간에 당시까지의 단군에 대한 의문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이 때 최남선은 이후 그의 단군 연구의 두 축을 이루는 ‘밝’과 ‘당굴’에 착안했다. 최남선은 ‘밝’과 ‘당굴’의 언어학적 유추와 인류학의 문화 전파론을 적용하기 위해서 1925년에 「不咸文化論」을 탈고했다. 여기에서 단군을 정치적 군장이면서 종교적 사제장으로 규정하여 단군 샤먼론을 제기했다.「불함문화론」은 인류학의 문화 전파론에 입각해 쓰인 논설이다. 인류학의 문화 전파론은 문명의 기원지는 하나이고, 세계의 모든 문화는 이 기원지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일원적 전파론과, 문화의 기원지를 하나가 아닌 여러 곳으로 보는 다원적 전파론으로 분류된다.「불함문화론」의 기본 구도도 중심·주변 구도에 있다. 白字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을 불함 문화권의 중심으로 설정하고, 나머지 지역을 주변으로 설정했다.최남선은 다원적 전파론의 문화권을 적용하여 불함 문화권이라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을 설정하고 중심·주변 구도로 한국을 중심에 위치시키고 나머지 지역을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일원적 전파론의 태양 거석 문화론을 적용하여 이 지역을 태양 숭배 신앙 지역으로 해석했다. 「불함문화론」이 중심·주변 구도로 한국을 중심에 위치시켰다는 사실은, 그의 의도가 동북아시아 문화권내에서의 한국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인류학의 문화 전파론은 세계 각지의 유물·유적의 분포 양상을 토대로 성립한 살이지만, 최남선은 언어 분포를 통해 불함문화권의 권역을 추정했다. 문화권역 설정에 언어학적 방법을 적용했던 것은 당시 근대 사학에 언어학적 방법이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불함문화론」에는 두 가지의 언어 분석이 적용되었다. 문화 계통을 증명하는 ‘밝’의 분석과 문화 성격을 규명하는 ‘당굴’의 분석이 바로 그것이다.최남선은 동일한 문화 계통은 동일한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어원을 통해 문화권을 설정했다. 한국어가 속한 우랄알타이 어족이 .
    인문/어학| 2006.06.07| 12페이지| 1,000원| 조회(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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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사]남명학파의 흥망성쇠
    남명학파의 흥망성쇠머리말Ⅰ. 조식과 남명학파1. 조식의 가계와 생애2. 조식의 시대3. 남명학파의 형성과 사상Ⅱ. 남명학파의 의병활동1. 의병활동의 배경2. 남명학파 주요 의병장의 활동과 의의Ⅲ. 남명학파의 흥망성쇠1.광해군대의 북인2.인조반정 이후의 북인맺음말서론남명학파(南冥學派)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더불어 조선 중기의 영남유학(嶺南儒學)을 양분하여 형성한 것으로 여러 문인(門人)들을 배출하였다. 남명학파는 하학(下學)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實踐)에 바탕을 둔 출처관, 경(敬)과 의(義)사상, 성리학적 학문, 실학, 예학, 교육사상 등을 바탕으로 보다 진보적인 사림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조선 중기의 주요한 학통을 이었다.남명학이 조선시대 명종(明宗)·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연간에 있어서 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시대가 내려올수록 남명의 사상과 그 학파의 후예들은 빛을 잃어가고 있는듯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이러한 남명학파의 연원(淵源), 학풍(學風)과 그 문인들, 그리고 광해군과 함께한 남명학파의 흥망성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남명학파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Ⅰ. 조식과 남명학파1. 조식의 가계와 생애조식은 자(子)가 건중(楗中)이고 호는 남명(南冥)이다. 그의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창녕 조씨는 고려 때 번창하였으나 증조부 조안습이 생원으로 삼가현(:현재의 경남 합천군 삼가면) 판현으로 낙향하였다. 조부 조영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 조언형과 숙부 조언경은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일단 이루어진 셈이다.조식은 성품이 강직하였는데,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부친의 성격이나 숙부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을 당하는 모습에서 의기(義氣)의 가풍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조모는 지족정 조지서(?~1504)의 누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세자일 때의 사부(師父)로서 권학(勸學)을 힘써 했으므로 연산군으로부터 미움을 사고, 갑자사화 때 그의 지나친 강직한 성품과 정치원칙에 충실하려는 태도 그리고동으로 이사한 후 뇌룡정(雷龍亭)을 전립하고 계속 학문과 제자를 기르게 된다.55세 때에 조정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내린 벼슬을 사양하는「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로 조정과 재야 전체를 놀라게 한다. 57세 때에는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삼처사’(三處士0라 일컬어져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던 서경덕, 성운, 조식이 충청도 글자 그대로 ‘세속을 떠난 산’에서 회동하여 당대의 화제가 되었다. 61세 때에 경상우도의 지리산 밑인 진주의 덕산(현재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산천재(山天齎)를 짓고 졸(卒)할 때 강학(講學)을 계속하였다.2.조식의 시대조선시대는 사대부정치시대이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들은 성리학으로 정신적 무장을 한 지방에 근거를 둔 중소지주 출신들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된 뒤 반세기쯤 지나 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건국주체세력은 어느덧 기득권층이 되어 초기의 개혁정신과 도덕성을 점점 잃게 되었다.한편 신흥사대부로서 성리학적 이념을 함께 하면서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반대하여, 조선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재야의 길을 택한 부류가 있었다. 15세기 후반부터 현실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들은 도덕성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들고 있었고, 이들의 눈에 비친 현실은 부패하기 시작한 훈구세력의 부도덕성이었다. 이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이른바 사대사화(四大士禍)이다.사화(士禍)로 인해 바른말을 하거나 비판을 하는 자는 용납되기 어려운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은 중앙정계의 진출을 포기하고 근거지인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조선시대 학자들은 나아가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대부가 되고, 물러나면 사인(士人)의 본래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를 출처(出處)라 한다. 이것이 이들의 기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처사의 길을 택하면 학문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각 지방에 이름난 학자들이 나타났다. 지리산 밑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소백산 밑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속리산 밑에 대남명의 경의는 『주역』이 함의하고 있는 경의의 의미를 넘어서 그의 독특한 사상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용어로 거듭 태어나게 된 거다.②「신명사도」의 수양론-존양(存養)?성찰(성찰)성리학의 핵심 과제는 타고난 본연의 마음을 보존해 함양하는 것과 마음이 외부 사물과 접촉할 때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정밀하게 살피는 것이다. 전자를 존양이라 하고, 후자를 성찰이라 한다.존양은 무엇보다도 공경심을 필요로 한다. 이는 인간이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도덕적 긴장감이다. 이 공경심이 없으면 존심양성(存心養性)이 불가능하다. 마음에 이 공경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마음을 주로 하여 다른 데로 흩어져 갊이 없도록 하는 주일무적(주일무적), 마음을 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깨어있게 하는 상성성(常性惺), 마음을 풀어놓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수렴기심(收斂欺心)등이 그것이다.성찰은 마음이 일에 음하고 대상을 접할 때 시비(是非)?선악(善惡)?사정(邪正) 등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 때 뚜렷한 가치판단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의(義)이다. 이 의에는 이치에 맞는 것, 적의(適宜)한 것, 사리에 합당한 것, 공평무사한 것, 합리적인 것 등의 뜻이 모두 들어있다. 『논어』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하였듯이, 의는 이와 상대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의리를 따르지 않으면 바로 사리(私利)에 빠지고 만다.-심기(審幾)?극치(克治)심기는 사욕이 일어나는 기미를 살피는 일인데, 대장기(大壯?)의 삼엄한 기상으로 그 기미를 살피는 것이다. 이 일은 조정의 명을 받은 장수가 한다. 극치는 사욕의 기미가 발동되는 것을 살피면 즉시 나아가 물리치는 것이다. 「신명사도」의 ‘대장기-극치’는 「신명사명」의 ‘네 자의 부절을 발하고, 백물기를 세운다.’에 해당하고, ‘대사구-극치’는 ‘아홉 구명의 사악함, 세 요로에서 비로소 발하네. 움직이는 기미를 용감히 물리쳐, 나아가 섬멸하게 한다.’에 해당한다.여기에서 ‘부절’은 밖으로 나가는 사신이나 장수가 가지고 가는 으켰는데, 영남지방에서도 선도적인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이 의병의 주력을 구성하여 구국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의병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결과적으로는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으로 일본군이 진출하는 것을 저지하는 공을 세웠다.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과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을 비롯하여 조종도, 하응도, 이대기, 이정, 박제인, 노흠, 성여신 등은 모두 남명의 문하생이거나, 남명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도와 의병활동에 참가했던 다른 인물들 역시 직?간접으로 남명과 사제관계를 맺고 있었다.의병 활동의 기반은 크게 사상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 그리고 경제적인 면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먼저 학문적인 연원을 통해 연계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을 살펴보자면, 남명의 문인들이 남명 선생에게서 받았던 가르침의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소 경의지학의 실천정신을 강조한 데다 무예와 병법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조예를 지닌 남명 선생은 제자들에게 병법과 국방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고, 남명의 문인들은 이를 이어받아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한 것이다.향촌사회에서 재지사족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회적 기반이 임진왜란 중의 의병 모병(募兵)과 연관하여 중요한데, 재지사족들은 유향소, 향약 보급, 향교, 서원 등의 건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6세기 후반의 향촌지배구조는 상층부의 결속과 하층부의 통제에 있었는데, 이것은 이 시기의 향촌제도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입장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사족들에 의해 행해졌던 이러한 향촌통제력은 난에 즈음하여 사족들이 민들을 쉽게 결집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경상우도에 재지적 기반을 마련하였던 사족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의병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재지사족들은 재지지주로서 많은 전토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찍부터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였로 실천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전란을 맞아 정인홍이 보여 주었던 활동은 단순히 의병장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조정에 상소를 올려 전란 중의 민생과 재정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제시하기도 했다.③ 김면 (1541~1593)남명의 문인이자 이황에게서 배우기도 했던 그는 1592년 5월, 정인홍과 더불어 창의를 모의한 뒤 고령 양전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면의 휘하에는 고령과 거창을 중심으로 양반과 농민, 노비 등 지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여 향토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593년 초 갑자기 병사하였으나 당시 조정에서 그 휘하의 병력이 경상우도에서 가장 대규모였다고 파악했고 그에게 의병도대장이란 직책을 내렸을 만큼 그는 비중 있는 의병장이었다.- 의의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처음 상륙했던 일본군은 이후 승승장구 했다. 조선은 오랫동안 계속된 태평시절동안 전쟁을 위한 준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병력을 제대로 동원할 수 없었고, 이에 비해 일본군은 준비된 군대였다.이 같은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창의했던 의병들의 활동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남명 문인들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면서 각 지역으로 발송했던 격문의 내용은 인근의 많은 사족과 백성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흩어진 경상도 일원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임진왜란은 다른 정치 세력에 비해 한층 강력한 주전론(主戰論)을 펼치고 의병 운동을 통해 향촌에서 지지 기반을 획득한 남명 문인의 입지 강화를 가져왔다. 이로써 남명 문인과 화담 문인이 주요한 모집단이었던 북인들도 정치 일선에 등장하였다. 광해군이 북인에서 갈라져 나온 대북(大北) 세력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르고, 임진왜란 시에 거병(擧兵)하여 큰 공을 세웠던 정인홍이 정국의 일선에 등장한 것은 대북 세력과 남명학파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요인이 되었다.Ⅲ. 남명학파의 흥망성쇠1.광해군대의 북인조선 중기 이래 사림(士林) 내부에서 붕당(朋黨)이 형성되고 고착되는 과정은 각 시기의 정치적 .
    인문/어학| 2006.05.26| 10페이지| 1,000원| 조회(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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