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먹고 말 거야” - 오리온 내가 초중학교를 다닐 때 쯤엔 TV를 켜면 항상 볼 수 있었던 광고 한편이 있었는데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치타 캐릭터가 과자 한 봉지를 먹기 위해서 갖은 수난 겪고, 마지막 과자를 먹으려는 결정적인 순간 과자를 놓치며 “언젠간 먹고 말 거야”를 외치는 치토스 광고였다. 당시 다른 과자 광고와는 달리 치토스는 귀여운 만화캐릭터를 내세우고 광고를 연작으로 제작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었지만 지금은 회사 사정과 이미지 변화를 위해 아쉽게도 치토스 라는 이름을 버리고 투니스로 개명했다.1. 광고 기획 의도으레 먹는 광고는 말 그대로 제품을 맛나게 먹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과자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 시대 대부분의 스낵광고는 귀에 쏙 들어오는 CM송과 함께 모델들이 과자를 맛깔나게 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그런 광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치토스’는 여기에서 벗어나 제품의 구매대상이 어린아이라는 점과 그 당시 유행하던 셀 애니매이션 기법을 활용하여 기존의 광고와는 다른 새로운 형식의 광고를 기획하게 되었다.주 고객인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셀 애니매이션 기법을 이용하여 친숙하고 귀여운 캐릭터(체스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제품을 맛있게 먹는 것 대신 제품을 너무나 좋아하는 체스터가 제품을 먹기 위해 갖은 고난과 시련을 겪고 과자를 먹으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꼭 제품을 먹지 못하게 했다.그럼으로 시청자들에게 묘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유발하고 저 제품이 얼마나 맛이 있으면 저럴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이 광고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연작으로 15년 넘게 제작되었다.2. 타겟과자를 먹는 나이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주 타겟은 중학생 이하 저연령층이다. 그리고 광고에서 치토스를 먹기 위해 체스터가 당하는 폭력적인 요소와 제품 안에 들어있는 스티커와 딱지의 일종인 ‘따조’를 보면 여자보다는 남자 쪽에 더 비중을 뒀다고 하겠다.여기서 ‘따조’는 딱지의 변형된 형태로서 튕기고 날리고 돌릴 수 있는 작은 아이템이었다. ‘따조’ 없는 치토스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초등학교 남학생들은 과자보다 따조를 수집하기 위해 치토스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치토스는 당시 유행하는 만화, 게임, 장난감과 프로모션을 해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아이들의 선물을 사려면 치토스의 패키지를 참고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만큼 치토스는 그 당시 아이들의 유행, 문화를 잘 대변해주었다. 3. 광고 효과보통 먹는 광고는 제품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보여줘서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거나 제품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게 먹음직스럼게 보여주는 식의 제품 보여주기 광고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치토스는 기존의 이런 정형화된 광고의 틀을 깨고 제품을 ‘먹고는 싶은데 먹지 못했다’는 식의 광고를 함으로서 호기심을 유발했고 제품소개에 비중을 두기 보다는 캐릭터를 내세워 제품의 이미지를 높이는 쪽을 택했다. 실재로 치토스는 광고의 주인공 ‘체스터’를 통해 월 40억원 이상의 이익을 올렸다고 한다. 이런 광고는 적중해 타 제품과의 차별화에 성공했고 ‘치토스’는 아이들의 대표스낵이 될 수 있었다.
[목 차]I. 서론I - I.류시화 프로필II. 본론II - I. 시인으로서의 류시화II - II. 기획자로서 류시화III. 결론I. 서론조금은 부스스해 보이는 긴 머리에 선그라스를 즐겨 쓰는, 여행과 명상을 즐기는 시인 류시화에게는 소박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은 그의 수식여구가 있다.‘출판계의 미다스의 손’ 실제로 그가 손을 기획하고 번역한 작품은 대부분 베스트 셀러 대열에 올랐다. 그의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출간 10년 만에 100쇄를 돌파했다. 그 10년은 류시화 신드롬의 10년 이었고 밀리언 셀러에 육박하는 그 시집의 100쇄 출판은 그의 출판계 최대 인기작가의 입지를 더욱 굳게 해주었다.출판계의 불황을 비웃기라도 한 듯 그가 손을 댄 작품은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하지만 이런 대중적인 인기와는 대조적으로 문단계 에서 류시화는 ‘찬밥’ 신세다.이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류시화는 누구일까? 이제부터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I - I.류시화 프로필시인이며 번역가로도 활동중이다. 본명은 안재찬이고 1957년 출생하였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었다. 1980~1982년 사이에는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1983~1990년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기간동안 많은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했는데, [성자가 된 청소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티벳 사자의 서], [장자, 도를 말하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등이 대표적이다.1988년 "요가난다 명상센터" 등 미국 캘리포니아의 여러 명상센터들 체험하였고, [성자가 된 청소부]의 저자 바바 하리 다스를 만나기도 했다. 1988년부터 열 차례에 걸쳐 인도를 여행했으며 라즈니쉬 명상센터에서도 생활했다. 1988~1991년까지는 가타 명상센터 생활을 했다. 1992~1993년에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지냈다. 1993년 이후에는 네팔, 티벳,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했다.시집으로 , 과 산문집 , 인도 여행기 , 잠언시집 ,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II. 본론II - I. 시인으로서의 류시화시인으로서의 류시화는 안타깝게도 ‘반쪽짜리’ 시인이다. 그는 수십만 명 이상의 독자를 가진 베스트 셀러 작가이지만 문단에서는 “시인 안재찬이 있는 반면 시인 류시화는 없다.”는 평을 들을 만큼 문단에서 축출된 시인이기 때문이다. 안재찬은 1980년대 초 박덕규, 이문재, 하재봉씨 등으로 구성된 동인 ‘시운동’의 멤버로 활동하던 시절에 쓰던 류시화의 본명이다.그는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내면서 본명을 버리고 91년 류시화로 부활했다. ‘화무십일홍’의 베스트셀러 시장에서 그의 첫 시집은 10년간의 류시화 신드롬을 알리는 신호탄 이었다 류시화는 97년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내고 약 80만 부를 팔았다.그에게는 수십만의 독자들이 ‘아군’이었을 뿐 문단의 반응은 여전했다. 류시화론은 없었고 “저급함도 역겨움도 모르는 외눈박이 독자들에게나 매혹적인 시집이 될것”) 이라는 등 침묵이나 외면보다는 가슴 저미는 촌평으로 대신했다.하지만 류시화의 시는 일상언어의 직조를 통해 어렵지 않은 보통 구문으로 신비의 세계를 빚어 낸다고 한 이문재 시인의 평가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말로 표현되어 있어 시적상징이나 모호하고 애매한 은유로 쓰여진 여타 다른 시에 비해 읽기가 수월해서 접근하기가 용이하지만 문단의 평가처럼 그렇게 가볍지만도 않다.물론 그의 시 중에는 ‘그대가..’, ‘소금인형’, ‘산안개’, ‘새와 나무’처럼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사랑을 다룬 연애시 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명상과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나 고독과 허무를 다룬 시들이 대부분이다.그는 여행을 좋아했다. 특히 명상의 나라 인도를 특히 동경하여 인도 여행을 많이 갔다. 그는 명상과 여행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했는데 그의 시 은 그러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시이다. 보리수 나무 밑에서 득도를 한 부처처럼 류시화도 여행 중 길에서 삶의 무언가를 깨달았던 것 같다.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는 구절이 특히 인상적인데 이 시는 사람의 끝없는 욕심과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탐내는 인간의 속성을 뚜렷이 표현한 시다.그에겐 삶이란 집착이 아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구처럼 지구란 속세는 그저 잠깐 소풍 나온 장소일 뿐이다. 하늘의 수많은 별만큼 사람들이 많은 것은 모두가 각자 그 별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는 지구에서의 삶은 여행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 여행은 즐겨야 하는 것이다. 금방 훌훌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기에 집착은 쓸데없는 것이다.이런 일상언어로 삶의 진리를 표현하는 류시화 시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시는 이라는 시다. 여기 전문을 소개한다.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나는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이 시가 전해주는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다. 방안에서 별을 토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는 그 토론의 덧없음 때문에 문 밖으로 나온다. 어두운 밤, 별은 밖에 있는 것이다. 진리의 상징일 별은 작은 벌레의 눈에도 비치고 있었다. 지식과 관념, 도그마와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사람들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감수성이 퇴화된다.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며 노예들이다. ‘나’는 눈먼 사람들에게 별을 보여주기 위해 벌레를 들고 들어간다 그러나 진리는 보여주거나 설명할 수 없는 불립문자이다. 별은 사라지는 것이다. 아니 그 방안의 사람들이 별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정관념은 시력을 매우 떨어뜨린다. 방안의 사람들은 벌레의 눈에 비치는 방안의 전등불을 가리키며 비웃었을지도모른다. ‘나’는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풀섶에 벌레를 내려놓자 벌레는 별 그자체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진리와 실상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시인의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그 비밀을 열어 보이려 한다)그의 시는 또 낭송시로서 탁월하다. 여기 라는 시가 있다.물속에는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하늘에는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내 안에는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내 안에 있는 이여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그대가 곁에 있어도나는 그대가 그립다설명을 들어서 좋은 시가 있는 반면에 몇 번 읽으면 그 의미가 삼투하는 시도 있다. 시는 눈으로 읽어서는 그 감흥을 제대로 느낄수 없다. 소리내어 읽어야만 운률과 함께 시가 지닌 속 뜻을 알수 있다) 류시화의 시들은 몇 번 읽는 동안 독자의 온몸으로 스며든다. 그의 시에 대한 첨언은 불필요 하다. 좋은 물에 대한 정의는 무색 무취로 충분한 것 처럼...이렇게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시인 류시화는 그러나 문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그가 문단으로부터 외면 받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 상상력이 재배하던 80년대에 신비주의적 세계관을 수정하지 않아 문단으로부터 ‘외계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시운동의 멤버였던 류시화는 “시인은 전쟁이 나도 다락방에서 사랑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독한 고별사를 남기고 문단과 등을 돌린 채 약 10년간의 은둔과 방랑에 들어갔다. 그 고별사는 ‘귀거래사’라기보다 훗날을 기약하는 ‘출사표’였다. 그의 오랜 방랑과 명상 끝에 나온 첫 번째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로 대중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복귀를 했으나 문단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그는 객관적 세계라 지칭되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그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거친 세상에 지친 사람들에 커다란 호응을 일으켰다. 명상과 수행을 하는 시인 번역가란 매력적인 타이틀로 그리움과 떠남을 얘기하는 그에게 대중이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점이 느껴진 것도 그때쯤이 었다. 그는 우선 수행자로서 너무 행복하다. 오랜 수행을 통해 운명처럼 얻어져야 할 깨달음이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었다. 게다가 그 깨달음대로라면 진리는 명상과 진리속에 있어야 하는데 여전히 그는 다변(多變)과 미문(美文) 속에 있었다. 그 부조화가 그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쩌면 류시화는 가짜가 아닐까?)II - II. 기획자로서 류시화시인으로서 류시화가 대중과 문단으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반면에 기획자로서 류시화는 적어도 성공한 기획자라는 하나의 평을 듣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기획자로 불리기를 거부한다.“나는 기획을 한적이 없습니다. 기획이라면 계획하고 계산해서 책의 모양새를 만들어가는 것일텐데 난 그렇게 한적이 없으니 기획자는 절대로 아닙니다.”
낭만주의 미술에 대하여서론낭만주의의 역사적 배경본론낭만주의 미술이란?낭만주의 미술의 특징낭만주의 작가와 작품1.프랑스 낭만주의 작가1)프란시스코 드 고야2)테오도르 제리코3)외젠 들라크루아2.영국 낭만주의 작가1)존 컨스터블2)터너3.미국 낭만주의 작가1)토마스 콜결론부록대표적 작품들▨ 낭만주의의 역사적 배경- 문학과 예술의 낭만주의는 19세기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 까지 한 세기를 풍미하였다.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이 한 세기 동안에 세계는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급진적인 발전은 유럽사회의 산업혁명을 더욱 촉진시켜서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이러한 시대의 변천 과정 속에서 성립?발전하였고, 급기야는 냉혹한 대립을 가져야 했다. 사회주의의 개척자이자 대표적 인물인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난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주창하였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이념 논쟁들은 국가간의 불화뿐만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주권 다툼을 몰고 와서 크리미아 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보불전쟁을 야기시켰다. 인간성의 회복은 자유로운 사고,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고, 이성과 감정의 표현양식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유와 억압, 이성과 감정, 과학과 종교간에 마찰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사고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미술에서는 사실주의에 이어서 인상주의의 태동이 있었고 문학사에서는 인상주의와 관계를 이루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들이 대거 출현하였다. 문학과 예술 이외의 철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사상을 주창한 철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낭만주의 미술- 낭만주의미술은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고, 또 개성을 존중하여 자아의 해석을 주장하고, 격정적·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여 상상하는 대로 무한한 것에 동경한다는 전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즘),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낭만주의 작가★ 프란시스코 드 고야(1746-1828) - 고야의 작풍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즉 1771년부터 1794년까지 후기 로코코의 작풍과 그 이후의 것이다. 후기 로코코시대에는 프 랑스 18세기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 많다. 그 후 융그스와 티에 폴로로부터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으면 서 차츰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 화로 전환하였다. 1800년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는 당시 궁정 사회의 인습과 무기 력, 허명과 퇴폐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유명한 『옷을 입은 마하』,『옷을 벗은 마 하』(1800∼1805)에서도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 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한 동기는 청각 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 었다. 똑같은 포즈의 여인이 옷을 입고, 또 한번은 옷을 입지 않은 채 그려진 의 화가 고야. 그 그림은 고야를 이단 재판소에 회부되게 하기도 했지만, 그의 사후, 많은 이들에게 호기심을 안겨주며 아직까지도 고야에게 대중적 인기를 안겨주고 있다. 그 리고 실제로 그 그림을 소재로 하여 많은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 지기도 했다. 야릇한 미 소로 화가를 조롱하는 듯 혹은 유혹하는 듯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인 여인은 마리아라는 이름의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알바 부인이 죽은 뒤 고야의 그림은 다소 냉소적이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의 부조리와 악마적인 인간의 본성을 파헤치는 내용 등으로 그려졌다. 게다가 정치적인 소재와 전쟁이라는 비극적 내용을 주제로 하여 많은 이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리고는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프랑스 보르 도로 망. 그러나 누드의 마하도 그다지 인체 드로윙이 충실한 작품은 아니다. 인체의 사실적 표현에서는 약간 벗어난 모습 임을 알 수 있는데, 얼굴과 몸이 각기 다른 모델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프랑스 낭만주의자★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 - 제리코는 단 하나의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으로 낭 만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당대에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배의 조난사 고를 약 7m×5m되는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한 것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세네갈로 프랑 스 인들을 나르던 국영 이민선, 메두사 호는 실력도 없이 인맥으로 정부에 의해 선임된 선 장의 무능력으로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조난당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구호선으로 도피한 후 임시로 만든 뗏목에 149명의 승객들을 싣고서 밧줄로 끌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선원 들은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끊고 도망쳤으며 승객들은 적도의 태양 아래서 12일 동안이나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하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결국 구조선이 이들을 발견했을 때 생존자는 오직 15명이었다. 제리코는 기자처럼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생존자 를 만나 기아로 인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던 무시무시한 체험담들을 직접 들었다. 그 는 또한 시체 공시소에 가서 부패한 시체를 관찬하고 보호 수용소에서 미치광이들의 얼굴 과 길로틴에서 처형당한 죄수들의 머리를 직접 스케치하는 등 이 사건을 정확하게 묘사하 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자신의 화실에 모형 뗏목을 만들어 놓고 마치 배우같이 당 시의 상황을 직접 체험해 보고자 폭풍우 속에서 이 뗏목을 몰아보기도 했다. 이러한 특이 한 작업 과정이 그림의 세부묘사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서사시적 인 드라마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제리코의 낭만적인 감수성이었다. 나체인 승객들의 긴 장되고 비틀린 육체는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투쟁하였는지 보여주고 있으 며 바로 이것이 내내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그림의 주제이다. 이 무시무시한 들은 죽은 엄마의 가슴에서 젖을 빨려고 하는 갓난아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사르디나팔의 죽음』은 폭력적인 장면에 대한 들라크루아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이런의 시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인데 앗시리아 왕 사르디나팔은 전쟁에서 패 배하자 종복들에게 자신이 자살하기 전 모든 소유물들을 파괴할 것을 명했다. 들라크루아 는 왕의 후궁과 말들이 학살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그리고 있다. 불꽃같이 붉은 배경 위 에 몸부림치는 육체들이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강렬한 색조, 생생한 명암의 대조, 활달 한 화필로 그려진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한 형태는 바로 낭만주의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1830년『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완성되었던, 이 해 7월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났다. 7월 혁명은 3일 동안 계속 되고, 8월 3일에 이르러 필립이 국왕에 즉위 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자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되었으며, 들라크루 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 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민중 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을 말하고 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 방되어 가는 "자유"에 대한 공감이 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에 있는데, 그녀 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반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다는 강렬한 의지 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 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죽은 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후면으로 피어오르는 안개와 전체적으로 어둡고쳐지고 있다. 코끼리 머리 장식은 붉은 빛의 피로 물들어 있으며, 방바닥에 온갖 보물들이 어질어 있는 화면 왼쪽에는 흑인 노예가 백마를 끌고 안으 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펼쳐지는 대각선 구도 속으로 격정과 죽음에 대한 고통을 미켈란젤로의 형식미로 표현했으며,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강렬 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이 광란의 장면을 지켜보 는 사르다팔르의 우울함과 더불어 죽음에 몸을 뒤트는 여인의 풍만한 관능미는 에로티즘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면서, 사르다나팔의 이야기를 뛰어난 환상미로 표현하고 있다. 불꽃같이 붉은 배경 위에 몸부림치는 육체들이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강렬한 색조, 생생 한 명암의 대조, 활달한 화필로 그려진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한 형태는 바로 낭만주의를 선 언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던, 이 해 7월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났다. 7월 혁명은 3일 동안 계속 되고, 8월 3일에 이르러 필립이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자 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되었으며,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 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 해주는 그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을 말하고 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 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자유"에 대한 공감이 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 로 묘사되어 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 "에 있는데, 그녀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잘 나 타나 있다. 반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 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
▨ 낭만주의 음악- 낭만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프랑스의 'le roman (소설,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이것은 중세 프랑스의 기사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서사시(romance)이다. 엄격히 말해서 음악의 시대적 분류에 낭만이라는 용어를 적용시킨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나 19세기의 음악이 절대적으로 문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면 낭만음악의 용어적 타당성을 인정하게 된다. 대부분의 음악사적 시대 분류가 전(前)시대 음악의 거부 또는 개혁에서 이루어지지만 낭만음악은 이러한 분류에 의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다. 1810년경부터 '낭만'이라는 용어가 음악에 등장하였고, 베토벤 음악을 시작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은 18세기 고전주의 음악의 거부가 아니라, 확장. 변화를 통한 고전주의 음악의 계승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은 고전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독일음악에 낭만적인 요소가 융화되면서 새로운 서정성을 함유한 음악으로 탈바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미 전고전시대의 작품이나 하이든의 일부 교향곡들과 모차르트 말기 작품에는 이미 낭만주의적인 서정성이 상당히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모든 음악에 단지 서정성과정감이라는 특성만 있으면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귀착하게 되며, 서정성만으로 낭만주의 음악을 정의한다면 시대와 작곡가를 불문하고 낭만주의 음악은 언제나 존재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물론 낭만주의 음악은 서정성과 정감을 음악의 기본이나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이라고 단정지울 수 있는 요소들은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학자들은 시대적 분류를 기준으로 해서 1820년에서 1900년까지의 음악을 낭만주의 음악으로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 특징 : 고전주의 작곡가들이 형식 안에서 그들의 음악을 찾았지만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음악을 위해서 형식을 찾았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 속에 보다 자유로운 형식과 구조를 맞추어 나갔으며 정감에서 음악의 자료를 찾는 절대음악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주제나 이념을 문학이나 미술 등 음악 외적인 자료에서 찾는 표제음악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하여 많은 낭만주의의 작곡가들은 폭넓게 독서했으며 미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울러 이들이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이든지 창작의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자연, 사랑, 꿈, 밤, 달빛 등 낭만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음악자료들도 소재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요소와 자료들은 이 시대의 작곡가들의 주관적인 창작기법에 의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낭만주의 음악가들이 추구한 형식논리는 자유로운 형식의 이탈과 수정에서 새로운 형식의 창조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주기법의 개발도 가능하게 하였다. 문학과 음악의 결합은 표제음악을 시도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표제교향곡, 교향시 또는 성격작품들이 새롭게 나타났으며, 풍부한 시와 피아노의 구조적 발전은 예술가곡을 정착시켰다. 뛰어난 연주기량을 뽐내기 위한 작품들이 나오면서 비르투오조(virtuoso))라는 기교파 연주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창작기법의 주관적, 개인적 취향은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세계주의적인 보편적 경향의 음악에서 벗어나 자신의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국민주의나 민족주의 음악을 태동시키게 되었다.▨ 낭만파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 - Felix Mendelssohn [1809-1847] - 멘델스존은 낭만주의 작곡가로 서는 드물게 보는 보수주의적인 음악가였으나, 그를 단적으로 말하면 정신은 낭만주의에다 형태는 고전주의적 질서와 조화의 감각을 가진 작곡가라고 하겠다. 그의 형식이 완벽에 가 깝도록 완성된 데 비해 심각한 내객이 부족한 탓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뒤흔들 감동이 없다 는 것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의 생활환경이 너무나 행복하여, 사회의 어두운 면을 모르고 현실의 비극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그의 음악 에서 강렬한 열정이나 비창은 느낄 수 없지만, 밝은 빛과 시적이고 그림처럼 경쾌하고 아 름다운, 그리고 세련된 형식은 그의에 외로이 솟아 있는 언덕과 푸른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의 모습을 스케치하여 바위에 부딪치는 흰 파도와 동굴 속의 고독한 적막감이 눈에 보이는 듯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얼마 후에 아름다운 칸타빌레의 제2테마가 첼로와 파곳의 연주로 제시되고, 제3테마는 밝은 햇빛을 연상하게 한다. 이 같은 여러 갈래의 테마가 변화무쌍하게 발전, 재현되다가 종결부에서는 주요 테마로 끝을 맺는다. 눈을 살며시 감고 듣고 있노라면 서늘한 바닷바람과 갈매기의 날갯짓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실내악은 기본적으로 고전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낭만주의적인 서정성 통일감이 야하다는 평을 듣는다.★ 리하르트 바그너 - Richard Wagner [1813-1883] - 베를리오즈에서 시작되어 리스트 에 이르러 꽃을 피웠던 후기 낭만주의 즉, 신낭만주의는 바그너에 와서 최고도에 달했고 완성의 과정에 왔다. 웅대하고 대규모적인 구상과 방대한 표 현 양식, 대담한 화성법과 반 음계적인 도입에 의한 조바꿈의 연속, 형식의 자유로운 확장, 관현악의 대규모적 편성과 웅장한 음향의 표출 등 작곡 기교의 개혁뿐 아니라 그의 생애를 걸고 완성한 극과 음악의 유기적인 결합체인 악극을 창시함으로써 이른바, 바그너 주의로 온 구라파를 휩쓸었던 바 그너의 역사상 업적이야말로 영원불멸의 금자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그대로 따른 제 1기, 외면적으로는 아직 전통적인 오페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극과 음악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기교적으로는 지도동기라고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짧은 동기의 사용 등 많은 발전을 보던 제 2기, 오페라 양식을 모두 버리 고 처음부터 끝까지 극과 밀착해서 이어지는 무한 선율과 지도 동기의 사용, 아리아의 폐 지와 서곡을 전주곡으로 대치하는 등 완전한 악극을 확립한 제3기로 나누어진다."발퀴레의 기행”"탄호이저”"로엔그린" [1850]"트리스탄과 이졸데" [1865]"니벨룽겐의 반지" [1876]"파르지팔" [1882]「탄호이저」- 그랜드 오페라적인 요소를 독로 이사를 하자, 그 곳 법률 학교에 입학하였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하게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애 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그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 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최초의 대작인 이 초연된 것은 1868년 그가 28살 때이다. 이 곡이 성공하자 그는 계속 작품을 내놓았다. '차 이코프스키'가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연금 6,000루불을 원조 받기 시작한 것은 1876년부터이다. 이로써, 생활이 안정되어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 다. 그러나 1877년에는 음악원의 제자인 안토니나 미류후와 마 음에 없는 동정 결혼을 한 결과, 3개월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이 충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고생을 하게 되나, 그는 한때 이탈리아, 스위스등지로 요양을 하기도 하였다. 1878년 음악원을 사 직한 '차이코프스키'는 구라파 여러 나라와 미국 등으로 순방하면서 자작품을 지휘 연주한 외에는 주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1893년 그의 이 초연된 5일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대 서곡" [1812]"백조의 호수" [1877]"잠자는 숲속의 미녀" [1890]"호두까기 인형" [1892]"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1869]"비창 교향곡" [1893]"만프레드" [1885]"유진 오네긴" [1870]「호두까기 인형」- 1) 작은 서곡 - 막이 열리기 전에 연주되는 경쾌한 행진곡2) 행진곡 - 어린이들이 들어오는 음악3) 별사탕 요정의 춤 - 성의 여왕의 춤4) 러시아의 춤과 트레팍 - 과자 나라 인형과 선녀들이 추는 춤5) 아리비아의 춤 - 커피 요정이 추는 춤6) 중국의 춤 - 중국의 명산인 차의 춤7) 갈대피리의 춤 - 갈대로 만든 장난감 피리의 춤8) 꽃의 왈츠 - 꽃의 요정]"어린이의 정경" [1838]"낙원과 페리" [1843]"파우스트에서의 한 장면" [1853]"피아노 5중주 e 장조" [1842]「어린이의 정경」- (Kinderszenen, 1838)은 그가 어린 시절 의 기분을 상기하면서 그다지 어려운 기교를 쓰지 않고, 매우 가벼운 마음으로 쓴 것들 중에서 13곡을 선정하여 한 책으로 묶은 피아노 소품집이다. 여기에는 , , , 등 어린이들의 노는 모습이라든가 기분을 경쾌하고, 때로는 조용하고 온화한 느낌을 표현한 곡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일곱 번째 곡인 < 夢想(몽상)>은 이 소품집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이것은 유화한 선율을 전개함으로써 어린이의 꿈을 상냥하게 묘사한 것이다.★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Peater Schubert [1797-1828] - 슈베르트는 샘솟듯 넘쳐흐르는 악장과 이것을 작품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직감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느낀 영감을 따라 애환을 그리고 감정을 음악에 도입시켜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서정의 음율을 노래한 것이 다. 또, 가곡이란 장르를 통해 낭만주의, 독일 리이드의 세계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이 슈베르트이다. 그는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예리한 감성과 풍부한 정감으로 작품을 썼고, 그 에 필요한 가곡 기교도 스스로 습득하였다. 이리하여 슈베르트는 많은 작 품을 남겼으며, 특히 모짜르트와 베토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창작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고전음악의 전통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낭만주의의 새로운 현대 의 물결이 거셌고, 따라 서 그는 새 사조의 선각자로서 낭만음악을 썼던 것이다. 그를 엄 격히 따지자면 고전적 낭만주의자라고 하겠다. 샘물처럼 흐르는 그의 선율은 서정이 젖어 있고, 그의 화성은 섬세하고 뭉클한 정감에 차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그의 재능을 잘 발 휘한 것은 뭐니 해도 가곡일 것이다. 그의 노래는 섬세 한 감정과 약동하는 생명력, 깊은 통찰력 등, 필연적이고 유동적인 음악적 표현에서 이루어져 있다. 한편 기악곡에
소년의 비애를 읽고한국 개화기 문학의 특징 중 하나는 전근대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근대로 나아가려는 계몽주의적 성격이 뚜렷히 나타나는 것이다. 춘원 이광수의 ‘소년의 비애’ 도 그런 계몽주의적 성격이 잘 들어난 소설이다.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문호는 여러 누이와 종매들 가운데에서 난수를 가장 사랑한다. 난수는 사랑스럽고 얌전할 뿐 아니라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16세가 되자 난수는 어느 부잣집 아들과 약혼하였다. 신랑이 되는 사람은 논어(論語) 한 줄을 사흘 걸려서도 못 외우는,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문호는 못내 실망하여 슬퍼하였다. 문호는 이를 안타까워하며 계부에게 난수의 약혼을 파하고 서울로 보내 공부시키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계부는 양반집 체면상 그럴 수 없다고 하고 난수 역시 부모의 뜻을 어길 수 없다고 하였다. 혼인날 난수는 문호의 어깨에 기대어 한없이 울었다. 난수가 혼인한 다음날 문호는 죽은 쇠눈깔 같은 난수 신랑의 눈을 보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환멸을 느낀다. 저런 사람이 난수의 배필이라 생각하니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 뒤 3년만에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문호 턱에는 수염이 까맣게 났고, 그의 어머니는 토실토실한 아이를 안고 와서 '너의 아들'이라고 한다. 문호는 '이제 소년의 천국은 지났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작품이 끝난다.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주목했던 부분은 전근대적 유교의 악습을 벗어나고자 하는 문호라는 인물과 그 악습의 희생양이 되는 난수의 갈등상황이었다. 문호는 난수의 문학적인 기질과 미적 감각을 높이 사 그녀의 결혼을 한사코 반대하고 마지막까지 그녀를 악습의 희생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지만 난수는 자신의 처해진 상황에 실망은 하지만 저항은 하지 않은 채 덤덤히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이를 통해 문호는 교육을 받아 깨친 사고방식으로 과거인습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교육이라고는 국문소설을 읽는 것이 전부였고 신교육을 접하지 못한 난수로서는 그런 저항은 감히 생각하기도 힘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광수가 이 작품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얘기했듯 개화기 문학에서 강조하던 계몽정신을 짙게 들어내는 것이라고도 하겠다.또 이런 교육의 강조 외에도 이광수는 이 작품을 통해 악습의 폐단을 근절해야 한다고 소리높이고 있다. 문호와 난수의 갈등원인이 되는 조혼의 풍습을 살펴보자. 당시대에는 유교적 원리가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였다. 이 사회에서는 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어서 거기에 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런 가장의 권한은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결혼에까지 이르렀는데 결혼상대자의 선택을 본인이 아닌 가장이 그 결정권을 가졌다 그 시대에서는 연예결혼은 생각하기 어려웠고 결혼식 날 자신의 배필을 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도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등과 관련하여 이해타산적인 부분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므로 대를 잇지 못하는 여성은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집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아래에서 새로운 사상을 접해보지 못한 난수로서는 집안 어른의 명령에 저항한다는 것은 자신의 그토록 좋아하고 따르던 문호의 권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 이었을 것 이다. 아무리 난수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도 계부의 말처럼 “계집애가 공부는 해서 뭐하게”로 일언에 거절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이광수는 신랑이 모자란 사람인지 알면서도 양반의 체면 때문에 결혼을 취소하지 못하는 계부를 통해 양반의 허례허식을 비판한다. 작품 속 문호는 양반의 체면은 일시의 일이이나 결혼은 난수의 평생의 일이지 않느냐며 혼사의 취소를 부탁하나 계부는 체면을 내세워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발을 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