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운명 인 이유요즘 나오는 어느 광고에 이런 카피가 있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30개월 즉, 2년 6개월이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선 공통된 호르몬이 발산된다. 그 호르몬은 2년 6개월 동안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어느 연구에나 임상실험은 거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모든 현상에 예외라는 법칙은 존재한다. 사랑엔 유통기한이 없다. 사랑은 상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입맛이 변하는 것이니까.올 가을 내가 선택한 영화는 “너는 내 운명” 이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이유는 이 영화가 실화라는 점이다. 실제로 남자 주인공인 석중은 이 운명 같은 사랑으로 한 달 새 몸무게가 20kg 빠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영화 예고편을 보면서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자체의 편집과 구성 스토리 전개는 칭찬할 만은 못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칭찬할 만 하다. 나는 이들의 사랑을 말하고 싶다.오로지 순정하나뿐인 순수한 남자 석중, 사랑을 믿지 않는 그러나 새로 태어난 여자 은하, 그 여자를 사랑이라고 믿는 집착뿐인 남자 천수 여기 세 사람의 사랑이 있다.맑은 영혼을 가진 석중은 젖소 한 마리를 애지중지 키우는 시골 노총각이다. 그는 사랑 없이는 결혼은 불가능 하다고 믿는 열혈 순정파 남자다. 그 남자를 첫눈에 반하게 한 아가씨는 서울에서 “순정”이라는 다방으로 온 은하, 그는 은하를 처음 본 순간 반하고 만다. 그때부터 그는 은하에게 사랑공세를 시작한다. 매일 아침 그녀를 위해 첫 우유를 짠다. 장미 꽃 한 송이와 함께 그녀의 “순정”다방으로 배달된다. 일하느라(?) 피곤한 그녀를 위해 그는 다방의 티켓을 끈고, 단란주점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그녀를 기다린다. 그러나 은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은하는 그런 석중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석중은 은하가 티켓으로 모텔에 드나드는 것이 안쓰러워서 자신이 모아둔 돈을 은하에게 건넨다. 그러나 은하는 그 일로 자존심을 상해하고 결국 석중의 뺨까지 때린다. 그러나 은하는 이미 석중의 진실한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배달을 나갔던 은하가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석중은 그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며 은하를 간호하고, 결국 둘은 결혼하게 된다. 너무나 행보해 보이는 두 사람 그러나 사랑엔 언제나 장애물이 있다. 은하에게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것, 그러나 은하는 그 사실을 모른다. 석중은 은하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은하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때에 맞추어 은하의 전 남편인 천수가 은하를 찾아온다. 은하가 되기 전 그녀의 이름은 ‘전옥분’이었다. 천수는 알코올중독자이다. 그는 옥분을 전국방방곡곡 찾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힌다. 사랑이라고 믿는 집착뿐인 정신병적 증세를 가지고 있는 그는 옥분에게 같이 떠날 것을 얘기한다. 그러나 은하는 그에게 500만원을 주면서 떠나라고 하면서 제발 오빠만은 건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천수는 분노하며, 석중을 만난다. 석중은 그에게 그의 꿈이며, 친구였던 젖소를 팔아 2000만원을 건네며, 옥분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받는다. 그리고 은하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는 말을 전한다. 그러나 이미 은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하는 석중이 괴로워하는 사실이 에이즈라는 것도 모르고 돈 때문인지 안 그녀는 석중을 떠난다. 사랑엔 언제나 진실이 있어야 한다. 숨기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 그리고 불신 그런 것들로 인해 사랑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석중은 은하가 떠난 후 은하를 찾기 위해 1년을 방황한다. 은하는 또 다시 윤락의 길로 들어선다. 자신이 에이즈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마음속으로 석중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면서…….어느 날 석중은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은하가 경찰서에 있다는 것 석중은 떨리는 마음에 술을 먹고 경찰서로 향한다. 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녀는 세상을 저주하며 에이즈라는 병을 옮기고 다닌 여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석중은 은하를 향해 이렇게 얘기한다. “은하야 오빠가 왔다. 오빠가 지켜줄게” 은하는 옛 애인 천수의 신고로 경찰서에 잡혀오게 된 것이다. 분노한 석중에게 천수는 “사랑한다면서 은하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은하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아요. 다행히 에이즈는 안 옮았어요.” 그의 사랑은 집착뿐이었다. 석중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을 향해 퍼저나갔다. 그러나 그 후 석중은 가족도 잃고 친구들도 잃었다. 에이즈라는 병은 그들을 사회에서 매장당하게 했던 것이다. 은하는 2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수감했다. 석중은 은하를 기다렸다. 석중은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다. 그는 단 하루를 살아도 은하와 같이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1.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공격,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분쟁, 이라크 전쟁, 파병... 뉴스나 신문의 국제 란을 장식하는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용맹하게 싸우는 한 편의 무용담과 같은 것일까? 또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포트리스, 스타크래프트 등과 같은 컴퓨터 게임처럼 무차별한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일까?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많은 것들이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리고 독일의 유태인 학살이나 일본의 마루타 실험 등 그 잔혹한 사건들은 단순히 과거 전쟁 중에 일어났던 소수의 정신병자들 소행일까?국제화 시대, 정보화 시대인 21세기 현재, 과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사실상 굶어 죽어 가는 한사람을 살리는 일보다는 오히려 한사람을 죽이기 위해 투자하는 일에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쟁은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휴전상태에 있다. 또한 세계분쟁에 우리라고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많은 국제분쟁에 자의반 타의반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의 젊은이들은 분쟁지역에 파병되고 있다. 즉, 전쟁은 이미 우리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간절히 평화를 원한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정당한 전쟁, 정의의 전쟁은 존재할까? 전쟁을 통해서 귀중한 생명과 맞바꾸면서라도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전쟁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다.2.전쟁은 왜 일어나는 가?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 전 세계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다시피 했다. 그 가운데 단연 두드러진 것은 어서 이상주의(Idealism)와 현실주의(Realism)로 설명한다. 즉, 이상주의라는 것은 인간은 선하고 상호 협력적 즉, 도덕적(도덕주의)이기 때문에 전쟁은 국제관계에서 최악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의 제거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방법(국제기구)를 통한 국제적 노력(합법적통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군사력을 축소하거나, 무기 통제 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주의는 2차 대전의 발발로 그 노력이 무산 되었다. 2차대전 이후 우리는 현대적 접근 방식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바로 현실주의다. 인간은 악하고, 본능적으로 권력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는 무정부주의적이며, 권력의 투쟁관계에 있다.현실주의는 악(惡)을 탄생시키며, 갈등하며, 배신한다. 모든 국가의 우선적 목적은 권력의 획득을 통한 타 국가의 복종과 국가 이익의 증대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이익증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충분한 군사능력의 보유를 통해 가능하다. 이러한 국가의 이익증대로 안보딜레마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국제 사회에서 당연히 국제조직과 국제법은 무용지물이다. 이들은 자체방위 능력의 확보를 위해 동맹국을 형성한다. 이러한 학설로 볼 때 인간은 끊임없이 자국의 발전과 물질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볼 수 있다.)이것은 다시 ‘죄수의 딜레마’로 설명가능 하다.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는 2명 이상의 공범이 각각 분리되어 검사의 취조를 당할 경우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지도 또 자백하지도 못하는 심리적 모순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부인하자니 다른 공범의 자백에 자신이 더 큰 피해를 당할까 두렵고, 그렇다고 죄를 인정하는 자백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범인은 아주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때 죄수들은 심리적인 교착상태에서 자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각 개인이 자기 이득만을 노리고 의사결정을 할 때 사회전체에 손실을 야기 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에 의해 설명된다. 그렇다면, 두 즉, 이상주의에서는 선과 협력을 통해 묵비권이 지켜지지만, 현실주의에서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배신을 하게 됨으로써 둘 다 죄를 자백하여 형을 받게 된다. 전쟁은 즉, 자신의 이익과 욕구, 이기심 때문에 비롯됨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기심은 어떤 사회에서 가능 한 것일까?3.미국의 전쟁을 일으키는 까닭은?오늘날을 탈냉전시대라 부른다. 탈냉전시대란 무엇인가? 냉전이 종식되고 우리는 이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이것을 바로 탈냉전이라 부른다.10년 전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이라크, 소말리아,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개입은 침략을 막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며, 테러리즘을 멈추기 위한 '인도주의적' 파견이라는 미명 아래 이뤄졌다. 미국은 스스로 세계의 평화의 수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악의 축을 설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나라라고 생각한다.이라크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석유를 소비하는 나라다. 그러나 세계의 석유는 몇십년 후에 고갈된다. 이러한 때에 미국은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자국의 이익 때문이라면, 미국은 살아남아야 할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즉,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진의는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즉, 현대 세계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위에 살펴본 인간의 본성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 먼저 살고 있는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의 내부에는 전쟁으로 치닫는 경향이 붙박이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본주의는 경쟁적 착취 체제다. 착취―소수가 압도 다수 노동자들로부터 날마다 부(富)를 쥐어짜내는 것―자체가 격렬하고 끊임없는 충돌을 낳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역사의 5단계의 마지막인 공산사회로 변화해야 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사발전 5단계에 맞추어져 있다. 역사발전 5단그것은 또 여태껏 상상하지 못한 대규모 전쟁을 가능하게 하기도 했다. 세계가 이미 분할돼 있었으므로 유럽 국가들 간의 경제적·군사적 세력 관계 변화가 곧바로 세계 재분할 투쟁으로 이어지게 됐다. 특히, 독일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유럽의 주요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독일은 1870년에야 통일 국가가 됐으므로, 19세기에 진행된 식민지 쟁탈전에서 빠져 있었다. 이제 독일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또는 중동부 유럽에서 독일의 “정당한” 몫을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는 이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피바다의 진정한 원인이었다. 유럽의 지배계급들은 식민지와 이윤을 위해 자국 노동자들과 청년들을 전쟁터로 보내 서로 수백만 명을 죽이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근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속이었다. 영국 정부가 전쟁을 벌인 이유는 파시즘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프랑스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태평양에서 일본의 위협에 맞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독일의 도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오늘날의 전쟁들도 근본적으로 똑같은 제국주의적 이윤·정복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그 상황은 다르다. 1989∼91년 소련의 붕괴로 새로운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그 때 미국 지배계급은 미국의 거대 기업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세계의 주요 산유국들을 지배하는 것이었다.미국 국가에게 2001년 9월 11일은 또 다른 “기회의 창”이었다. 그 덕분에 부통령 딕 체니,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그의 부관 폴 월포위츠, 기타 주변 인물들은 이런 전략을 공격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확신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라크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얻고,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며, 어떤 국가도 미국의 권력을 무시하거나 앞으로 그에 도전해서는 안된다는쟁에 있는 힘껏 저항해야 한다.4.전쟁의 파괴력이제 우리시대의 전쟁은 옛 전쟁을 상상해서는 안된다.) 고대의 전쟁처럼, 영화 ‘트로이’에서처럼,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다. 세계의 강대국들은 수많은 국방비를 지출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기를 개발한다. 그러나 그 무기는 보통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구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다. 그 보통이 아닌 무기는 바로 ‘핵’이다. 강대국들은 어이없게도 ‘핵’ 역시 그들만이 가질 것을 주장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1957년 원자력의 평화적인 사용과 핵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UN총회아래 설치된 준 독립기구이다. 이 기구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증진을 위해 개발도상국에 기술협력을 제공하기도 하고, 원자력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전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핵 안전 업무를 수행한다. 우리나라는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북한은 1974년 가입하였다가 1993년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여기서도 그들의 이기심이 드러난다. 핵 보유 5대 강국)과 비 보유국간의 차별적인 조치를 허용한 것이다. 핵보유국은 핵무기 개발과 제조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반면, 비 보유국은 핵폭발장치의 개발, 관련기술과 장비의 도입을 금지, 원자력 시설이나 기술을 도입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이 조약에 의한 핵안전 조치협정에 서명 및 국제기구의 핵사찰에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핵의 힘은 얼마나 세기에 강대국들이 자신들만 가지려 하는 것일까?☞히로시마의 비극1945년 8월 6일 8시 15분 미국의 폭격기 B-29 폭격기 ‘에놀라게이’ 호가 히로시마에 4.5톤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이 폭탄의 이름은 ‘리틀보이’ 였으며 길이 3.2m, 반경 73.6cm, 무게 4.4t, 위력 12.5kt, 공중 600m 상공에서 폭발하였다.당시 히로시마 인구 28~29만, 군인 4만 3천 중 폭발과 동시에 반경1km 안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건물 90% 가 파괴되었으며, 1945년에 인구의 절반인 14만명이 사망하였고다.
치악산●치악산 이해하기1908년 유일서관에서 출간한 이인직 작의 상편과 1911년 동양서원에서 발간한 김교제 작의 하편으로 된 신소설이다. 신극운동을 의식한 작품으로서 ‘연극 신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간행했다. 이인직의 생존시에 발간된 하편이 어떤 경위로 김교제의 작으로 출간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이 작품은 재래적인 가정 비극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대 소설의 타성에서 벗어난 것은 보수적인 가정과 진취적인 가정의 대조를 보여 주는 동시에 몰락해 가는 봉건 사회의 배경 속에서 노주(奴主)를 싸고도는 현실의 단면을 방영하는 한편 신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실천한 점에 있다. 후실과 전처 자식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가정비극을 그리면서 여기에 신구사상을 대조시켜 몰락해 가는 봉건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내용 정리* 작자 : 상편은 이인직, 하편은 김교제* 출전 : 유일서관 (1908)* 주제: 계모의 박해, 고부간의 갈등, 신교육관의 고취, 하층 계급의 반발 의식●치악산의 줄거리완고한 홍참의 집에 이 판서의 딸이 백돌에게 시집와 살면서 후실 시어머니 김씨와 시누이의 구박 때문에 눈물짓는다. 그나마 위로를 주던 남편 백돌이 개화에의 의지로써 장인의 도움을 입어 일본으로 유학간 뒤 시어머니는 혼자 남은 며느리를 간부(姦婦)로 오해하여 치악산으로 내쫓는다. 거기에서 이씨 부인은 최치운 · 장포수의 겁탈위기를 벗어나고 마침내 승려가 되지만 그 또한 미모로 인하여 파문을 당하자 우물에 빠져 자살을 기도한다. 한편 그의 몸종 검홍이는 복수를 계획하고 귀신 장난을 벌여 홍참의 집안을 쑥밭으로 만드는 데에서 상편이 끝난다.한편에서 홍참의는 집을 나와 방랑하다가 우연히 며느리임을 모른 채 여승하나를 구출하게 되고 집에 돌아와 김씨 부인을 내쫒는다. 유학을 마친 백돌은 처가 죽은 줄 알고 장인의 중매로 혼인하게 되나 신부가 이씨 부인임을 알고 기뻐하고 이후 모두 화목하게 살게 된다.●이인직호 국초(菊初). 경기 이천(利川) 출생. 일본 도쿄[東京] 정치학교를 수학한 했으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문성(散文性)이 짙은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는 크다. 《혈의 누》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귀(鬼)의 성(聲)》, 그밖에 《치악산(雉岳山)》 《모란봉(牡丹峰)》 등이 있고, 단편으로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이 있다. 한국 최초의 신소설가로서 개화사상을 고취하고 갈등과 성격 묘사, 그리고 사실적 문장을 처음으로 구사하였다.?치악산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들?『홍참의: 서울가서 장가들었다고 난봉이 되려면 서울 사는 사람들은 다 난봉이 되게 얘, 백돌아, 집안에 못된 책 얻어 들이지 말고 오늘부터 맹자를 읽든지, 논어를 읽든지 하여라. 사람이 제 마음만 단단하면 어데를 가기로 거관이 있겠느냐만은, 너같이 중무소주한것이 서울이나 자주 가면, 마음이 들떠서 못 쓰는 법이니, 다시는 서울 가지 말아 애비의 말을 아니 들으면 집이 망하는 법이라. 조심하여라.』→ 홍 참의는 개화가 대세로 되면서 원주로 낙향한 완고한 수구파다 여기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을 나타내주는 장면이다.『백돌이: 날이 새었소. 나는 사랑으로 나가 있다가 아침 식후에 어데로 놀러 간다 하고 그길로 떠날 터이니, 그리 알고 잘 있으오.』→백돌이가 계모의 괴롭힘과, 시골 양반 집의 답답한 분위기로부터 탈출을 결심하는 장면이다. 그렇지만, 불쌍한 아내를 두고 혼자 떠나는 백돌이가 얄밉다.『이씨부인: 날개가 돋쳤으면 훨훨 날아 쫓아가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몇 백리 가는 길에 동행 없이 가노라면 고생인들 오죽 될꼬. 원주에서 서울만 가려 하여도 그렇게 고생이 될 터인데, 만리타국 가려 하면 그 고생이 어떠할꼬. 남편이 큰 뜻을 먹고 만리타국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 하니 아내 된 이내 마음에 좋기도 한량없건마는 며느리를 원수 같이 달달 볶는 계모 시어머니 김씨에 내 목숨이 살아 있다가 남편의 얼굴을 다시 볼까 』→이씨부인이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인해 쫓겨나가는 장면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계모와 며느리의 반목을 중심으로 한 신구사상의 갈등을 그렸다.백돌이와 이씨부인이 혼인하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음, 역시 옛날과 오늘 날은 참 틀린 점이 많다.『사위되기 전보다 십 배나 백배 더하여 그 사위를 외국에 보내 공부 시키려는 생각이 도저하던 터이라 뜻밖에도 그 사위가 서울 온 것을 보고 아모쪼록 사위를 꼬여서 타국으로 유학시킬 마음이라.』→이판서의 개화에 대한 생각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장인이 친가의 허락 없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또한, 신교육 사상을 선양하려고 한 것으로 우리 국민이 개화하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정치 문제 이상으로 중대한 것으로 인식되어져 신소설의 모든 작품에 제시되고 있다.『홍 참의: 개화한 사람은 그 따위 버릇을 한 단 말이냐 애, 원주 구석에 사는 만만한 홍 참의는 좋은 사돈 솜씨에 자식 하나도 못 기른단 말이냐 얘, 고두쇠야 이 길로 다시 서울 가서 이 판서 대감을 뵙고 지금 네가 듣고 본 대로 한 마디 빼지 말고 말하여라.』→백돌이가 장인의 말을 듣고 외국으로 공부하러 간 뒤 홍 참의가 화내는 부분이다. 개화기가 반상 대립, 신·구 세대 간 충돌, 점진주의와 급진주의의 거리, 개화파와 보수파의 갈등,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반목 등 여러 측면의 갈등관계가 뒤엉켜 있던 시대였음을 잘 일러준다.『이판서: 자네 어르신네가 아니 보내시거든 몰래 도망이라도 시키게. 완고의 늙은이들은 다 어서 죽어야 나라가 되지, 쓸데없이 오래 살아서 젊은 사람에게까지 해가 적지 아나하여…….어어, 내가 실체 하였네.자네 어르신 말을 하다가 그 소리를 하여서 되었나…….똑 자네 어르신네를 두고 한 말이 아닐세. 나부터 완고이니 우리같이 나많은 사람은 하로바삐 죽고 없어야 나라가 아니 망하느니…….』→이판서의 개화사상은 보수적인 사람들이 나라를 망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소설에서는 인정론에 바탕을 둔 도덕의식으로 선악을 나누었으나 개화기 소설에 와서는 '새것=선(善)', '옛것=악(惡)'이라는 도식적 관념이 성립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홍 참의와 이판서가 생각하는 선과 악상판이나 있는 줄로 의심을 둘 듯하여 고두쇠에게까지 말하였는데,』→최 치운은 이씨부인을 남몰래 흠모하던 사람으로 백돌이가 일본으로 유학 갔다 하자, 홍 참의의 노비인 옥단이와 짜고 이씨부인을 모함하려 빼돌리려 한다.『옥단이: 내 말만 들으면 남의 종노릇도 아니 하고 잘 살 도리가 있지』『최가 만난 것을 제 복으로 알고 대들더니 세 손뼉이 맞으며 하로 밤내 별 계교가 다 생기더라 사람의 욕심이 불 같으면 남이 동이 덩어리같이 커지는 법이라 최 치운의 욕심은 본래 사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게 된 것이라. 고두쇠와 다시 두 말할 것 없고 옥단이는 최 치운의 일만 잘 되고 보면 돈도 많이 얻어먹으려니와 자알 속량하여 잘 살 도리가 있다 하는 그 소리에 비위가 어찌 동하였던지 불인지 물인지 모르고 날 뛰는 판이라』『옥단: 상을 타면 타고 말면 말지요, 마님 입으시던 치마를 얻어 입고 있어요. 이런 큰일을 하면 마님께서 쇤네를 속량이라도 하여 주시고, 단구역말 앞들에 있는 보논을 다 주시더래도 아까울 것이 무어 있습니까.』『옥단이: 쇤네가 논이야 참 바라지 않습니다. 속량이나 하여 주시면 그런 상덕이 어데 잇습니까』→《치악산》은 노비가 속량의 조치를 받기 위해, 또 신분 상승에 절대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구성을 보인다 《치악산》은 신분사회의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 작가가 살았던 사회를 적실하게 기록한 것이라는 반영론의 관점에서 보면 선주선비(善主善婢)와 악주악비(惡主惡婢) 사이의 갈등관계나 대립상을 제시한 작품들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그날 밤 일은 다 옥단이의 속에서 나온 일이라 오동나무 위에 올라 섯던 사람은 고두쇠요 담 너머로 내다보며 소곤거리던 계집애는 옥단이요 담 밖으로 지나가다가 도적 튀기던 사람은 최 치운이라 고두쇠가 담위 에서 슬쩍 뛰어내려오며 최 치운 손을 아프지 아니하게 얼러싸고 달아나는 시늉을 하다가 몽둥이를 끌고 기침을 하며 나온 것이요, 김씨 부인이 넘어진 것도 부러 넘어진 것이요 옥단이가 가슴 피를 뿜고 마당에 동드라졌다』『이씨부인: 하느님, 여기가 어디가 어데란 말이요 죽어도 죽는 곳이나 알고 죽읍시다 하느님,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여기 와서 이렇게 죽습니까 죄가 있거든 마른하늘에 날 벼락을 자끈자끈 쳐서 죽여 주셨으면 내게는 그런 적선이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사람을 이렇게 몹시 죽이십니까. 하느님, 하느님, 내가 전생에 무슨 흉악한 죄를 짓고 이 생애 홍 참의 집 며느리가 되었습니까. 네 발가진 짐승이 되었던지 두 발을 가진 새가 되었던지 지렁이 굼벙이 같은 더럽고 작은 벌래가 되었더라도 자유로 활동을 하여 하로를 사더래도 근심 없이 살다 죽는 것이 좋을 터인데 』『이씨부인; 에그, 원통하여라 그 여우 같은 시어머니가 나를 무슨 애매한 죄를 뒤집어 쓰여서 이 산중에 내다 버리게 하누 미련이 뚝뚝 돋는 시아버지는 여우 같은 후취를 댁의 속살거리는 말에 폭 빠져서 무죄한 며느리를 이렇게 원통히 죽게 한단 말인가 어젯밤에 왼 집안사람을 불러 세우고 비상을 찾을 때에 필경 나를 죽이려고 그리한 것이니 그 몹쓸 시어머니가 별 요악을 다 부리더니 이러한 흉계를 꾸미느라고 그리하였구나 』→이씨부인이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였다고 죄를 뒤집어 씌우고 산에다가 버리는 장면, 그러나 최 치운이 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씨부인은 그 미모 때문에 나중에 절에서도 파문 당한다. 이걸 보면서 여자는 얼굴이 너무 예쁘면 팔자가 기구 하다는 말을 새삼 깨달았다. 너무 예쁘게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겠다.^^『최치운: 여보 말이 났으니 말이지 부인의 처지를 내가 아는 터이요 부인은 시집살이 고생이 허다한 중에 또 부인 남편 되는 사람이 만리타국으로 갔다하니 청춘에 독수공방하는 그 팔자는 무슨 팔자이오. 여보, 두말라고 나를 따라가면 일평생을 호강으로 지낼 터이요』『당장 그 자리에서 겁측을 하더니 부인이 피하여도 피할 수없고 죽으려도 죽을 수 도 없을 지경이라 부인이 하느님을 부르며 운다. “하느님 맙시사, 내가 이 산중에 와서 이 몹쓸 놈에게 이 욕을 보고 죽게 하
시란 무엇인가?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정의"시는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하여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운문 문학)"시란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유기적 구조를 지닌 운율적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문학의 한 갈래이다."시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A.매클리시/시학 詩學》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구형의 사과처럼/무언(無言)이어야 한다.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조용해야 한다.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새들의 비약처럼/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시는 비등해야 하며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존재해야 한다.?《이규보 李奎報/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시에 아홉 가지 마땅치 않은 체격이 있으니,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한 편 안에 고인의 이름을 많이 썼으니, 이것은 한 수레 가득히 귀신을 실은 체격이다. 고인의 뜻을 모조리 앗아다 쓴 것이 있으니, 용한 도적질도 오히려 옳지 못한데 도적질조차 용하지 못하니, 이것은 서툰 도적이 잡히기 쉬운 체격이다. 어려운 운을 달기는 했는데 근거(根據)한 곳이 없다면 이것은 쇠뇌를 당겼으나 힘이 모자란 격식이다. 그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운을 번드레하게 달았다면 이것은 술을 제 양에 넘도록 먹은 격이다. 어려운 글자를 쓰기 좋아해서 남을 쉽게 현혹하려 했다면 이것은 함정을 파 놓고 장님을 인도하는 체격이다. 사연은 순탄하지 못하면서 끌어다 쓰기를 일삼는다면 이것은 강제로 남을 내게 따르게 하려는 체격이다. 속된 말을 많이 쓴다면 이것은 시골 첨지가 모여 이야기하는 체격이다. 기피해야 할 말을 함부로 쓰기를 좋아한다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詩篇)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 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同時性)의 원칙이 된다.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경험들은 끝없는 서론(緖論)으로 준비되는 것인 데 비하여 시는 소개말과 원칙과 방법론과 증거 따위를 거부한다. 시는 의혹을 거부한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침묵의 서두(序頭) 정도이다. 우선 시는 속이 텅 빈 말을 두드리면서, 독자의 영혼 속에 사고(思考)나 중얼거림의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散文)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킨다. 그러고 나서 진공(眞空)의 울림을 거쳐서 시는 저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최자 崔滋/보한집 補閑集》시라는 것은 기(氣)를 주(主)로 한다. 기(氣)는 성(性)에서 나오고 뜻은 기에 의지하며 말은 정(情)에서 나온다. 정이란 것은 즉 뜻이다. 그리고 신기(新奇)한 뜻은 말을 만들기가 더욱 어렵다. 자칫하면 생경하고 난삽하게 된다. 그러나 문순공(文順公) 같은 이는 경사백가(經史百家)를 골고루 열람하고 그 꽃다운 향기에 삶아지고 고운 채색에 물들여졌다. 그런 까닭에 그 말은 자연히 풍부하고 고와서 비록 새로운 뜻의 지극히 미묘하고 어려워서 형상하기 어려운 곳이라도 그 말이 곡진(曲盡)하고 다 정숙(精熟)하다. 대체로 표현하는 재주가 시정(詩情)을 이기면 비록 아름다운 뜻이 없더라도 말은 오히려 원숙하지만, 시정이 표현하는 재주를 이기면 말이 비근(鄙近)하고 산만하여서 아름다운 뜻이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된다. 정과 재주가 겸비된 뒤라야 그 시는 볼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다.?《정도전 鄭道傳/삼봉집 三峯集》눈 내려 이 해도 늦어 가는데/풍진은 하 번져서 수습 못하네.벗님네 아스라이 서울을 못 내리는 사념의 발열, 심층심리 안의 문답, 외롭게 희귀한 개성적 심상(心像), 선명하지도 밝지도 못한 사고의 교착(膠着), 암시, 모든 잠재의식과 꼬리가 긴 여운. 시인이 버리면 영 유실되는 것, 시인이 명명하지 않으면 영 이름이 붙지 못하는 것. 원초의 작업 같은 혼돈에의 투신과 첩첩한 미혹, 그리고 눈물 나는 긴 방황.?《정약용 丁若鏞/증언 贈言》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 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 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과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펴 그 때묻은 잔재를 씻어 내고 그 깨끗한 진수를 발전시키면 된다.?《박두진 朴斗鎭/시(詩)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뒤집어서 말하자면 시는 새벽에 엄습하는 어두운 그림자, 죽음――그것을 이기는 기도, 삶 자체의 가장 순수한 보람의 사랑보다도 어느 의미에서는 더 충족적이며 순수한 자각과 생명 욕구의 가장 포괄적인 발현일 수 있는 것이다. 시가 더 내적이며 더 구체적이며 더 현실적인 삶의 징표(徵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더 구체적인 삶의 내용, 가장 선택된 마지막 낙원, 가장 가능한 아름다움의 세계가 되는 셈이다.?《A.A.숄/시집 詩集》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비논리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박두진 朴斗鎭/시(詩)란 무엇인가에 대하여》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백거이 白居易》시란 정(情)을 뿌리로 하고 말을 싹으로 하며, 소리를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한다.?(*장 콕토와의 람에게 생기를 주는 희망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시인은 성자여야 합니다.?《M.아널드》내용이 끝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황금어의 피안에, 도시 성곽의 외부에, 토론의 형자(形姿)를 뒤로 하고, 사고 체계를 벗어나서 신비로운 장미는 개화한다. 서릿발의 열기(熱氣) 속에, 도배지의 희미한 무늬 속에, 제단의 뒷벽 위에, 피어나지 않는 불꽃 속에 시는 존재한다.?《E.A.포》나에게 있어서 시는 목적이 아니고 정열이다.?《R.M.릴케》시는 마치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나가는 모래와 같은 것이다.?《C.샌드버그》시란 삶을 육성시키고, 그러고 나서 매장시키는 지상의 역설이다.?《T.S.엘리엇/전통(傳統)과 개인(個人)의 재능(才能)》시란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며, 인격의 표현이 아니고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J.주베르/팡세》시는 자기 속에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 데에서도 찾지 못한다.?《M.E.몽테뉴/수상록 隨想錄》시는 이해하기보다도 짓기가 더 쉽다.?《이광수 李光洙/문학평론 文學評論》시는 그 시인의 고백이다. 신의 앞에서 하는 속임 없는 고백이다. 구약에 시편만이 아니라 무릇 시는 시인의 심정 토로다. 시인은 시에서 거짓말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신을 기만하는 것이다.?《신석정 辛夕汀/나는 시(詩)를 이렇게 생각한다》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갈망하는 데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分身)이 아닐 수 없다.?《김영일 金英一/동심 童心》시란 사랑이다.?《조병화 趙炳華/인생(人生)은 큰 안개이다》시 또한 짙은 안개가 아닌가. 답이 없는 세계, 답이 있을 수 없는 세계, 그 안개 같은 실재를 지금 더듬고 있는 거다.?《W.바이라우흐/나의 시(詩)》나의 시(詩)는 싸움이다.?《전촌융일 田村隆一/사천(四千)의 날과 밤》한 편의 시를 낳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운 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김춘수 金春洙/나목(裸木)과 시(詩 미소하며 오는데무성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의 사건으로 떨어져 가고,그 예민한 가지 끝에명멸하는 그것이시일까,?시란 본질적인 면에서 인생의 비평이다. 《M.아널드》?시란 간단히 말해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고, 다양하게, 효과적으로 사물을 진술하는 방법이다. 《M.아널드》?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로움 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 《W.워즈워스/서정민요집 抒情民謠集》?시는 악마의 술이다. 《A.아우구스티누스/반회의파 反懷疑派》?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 《호라티우스/시론 詩論》?시는 신(神)의 말이다. 그러나 시는 반드시 운문(韻文)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곳곳에 충일(充溢)한다. 미와 생명이 있는 곳에는 시가 있다. 《I.S.투르게네프/루딘》?위대한 시는 가장 귀중한 국가의 보석이다. 《L.베토벤》?시는 거짓말하는 특권을 가진다. 《플리니우스》?시란 미(美)의 음악적인 창조이다. 《E.A.포》?공자께서 말씀하셨다.「시경(詩經)에 있는 삼백 편의 시(詩)는 한 마디로 말해 사악함이 없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 《논어 위정편 論語 爲政篇》?시는 단 하나의 진리이다.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R.W.에머슨》?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다. 하나의 시란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이다. 《P.B.셸리》?시란 그 시를 가장 강력하고 유쾌하게 자극하는 방법으로 사상의 심벌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예술이다. 《W.C.브라이언트》?즉흥시는 진정 재지(才知)의 시금석(試金石)이다. 《J.B.P.몰리에르》?감옥에서는 시는 폭동이 된다. 병원의 창가에서는 쾌유에의 불타는 희망이다. 시는 단순히 확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재건하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시는 부정(不正)의 부정(否定)이 된다. 《C.P.보들레르/낭만파(浪漫派) 예술론(藝術論)》?시란 영혼의 음카드》
법과 도덕의 관계-과거에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었지만, 오늘날의 법은 최대한의 도덕이다.왜 이렇게 바뀌게 되었을까? 양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우리의 생활이 원시 사회로 되돌아가면 갈수록 단조로워 진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도덕과 법의 구별이 없이 그저 자연법 속에서 살고 있음을 의미 한다. 이러한 생활을 원시생활 혹은 신화적(mythos) 생활이라 한다. 신화적 생활은 物活論的 사고방식 혹은 타부(Tabu)의 생활양식이다. 이러한 생활에는 아직 도덕과 법이 의식되지 않는 사회이다. 가령 금지 된 행위를 하였을 때는 법에 의해서 제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천재나 질병에 의해서 보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자연법의 의식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상태에서 자연의 배후에 일정한 원리가 있음을 알게 되고 이러한 원리의 想定에서 자연 법칙을 찾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연 법칙을 알게 됨으로써 무질서적 보복적인 생활에서 사회적 질서 생활을 갖게 되고, 이러한 질서의식에서 사회적 습관(custom)이나 풍속(mores)이 정착된다.)도덕과 법은 모두가 사람에게 관계되는 규범이며 사람이 따라야 할 법칙이기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사람의 문화생활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 그러므로 도덕과 법은 생활의 규범이다. 그리스에서는 도덕과 법을 사회 공동생활을 위한 규범이라고 하였다. 그럼 도덕과 법은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자.도덕은 윤리 ,종교, 도덕을 포함한다. 즉, 이것은 강제성이 없는 자율규범이며, 임의 규범이다.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 모두 자신의 양심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면적이다. 도덕은 최대의 선을 목표로 한다. 도덕은 존재법칙이며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법은 다르다. 강제 규범이며, 외면적, 타율적이다. 지키지 않을 시에는 강력한 제재가 따른다. 법은 이중성을 띤다. 권리와 의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당위 법칙이다. 도덕은 종교와 같이 선택이 가능하지만, 법은 선택할 수 없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도덕과 법은 문화생활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하였다. 또한 원시사회로 돌아가면 갈수록 단조로워진다. 곧 이 말이 의미함은 예전에는 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법을 대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더라도 어떠한 범죄를 일으켰을 때 하늘이 대신하여 벌을 준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큰 죄는 반역죄나 강상죄였다. 그 시대에는 어떠한 범죄의 기준이나 처벌 방법이 뚜렷한 것이 아닌 사람사이의 예와 도덕을 중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다변화되고, 윤리 도덕의 정의가 분화 될 만큼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 즉, 갈수록 범죄의 종류가 늘어나고,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살고 있으며, 그들과의 결합을 통해 행위를 파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행위를 제한하게 되는 것이 바로 법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오늘날은 법이 사회를 강제하게 되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이해관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해관계 속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을 통제하고 해결 할 수 있는 것들을 원한다.▣“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ethics minimum)” 이 말은 옐리네크의 표현이다. 넓은 윤리적 요청 가운데 특별한 최소한 것만은 법적 요청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즉 사람사이의 관계속에서 윤리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으로 해결하고, 그 외 해결되지 못하는 것만을 법으로 해결 하자는 것이다. 법은 여러 주체들 간의 관계 속에서 최소한의 정의 실현이나, 질서를 유지를 내용으로 한다. 법으로 모든 것을 다 규정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일이다. 사람들은 사회생활 속에서 자유롭게 도덕 원칙에 따라 서로 이해하고 해결하자는 의미가 된다.▣“법은 최대한의 도덕이다”사람들 사이에는 도덕만으로도 해결 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도덕이 요청하지만, 도덕은 책임 질 수 없는 것을 법이 강제로 요청해서 해결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점에서 슈몰러(G. Schmoller)가 말했듯이 법은 도덕의 최대한은 될 지언정 결코 최소한은 아니라는 것이다.▣법과 도덕의 견련론(牽蓮論)라드브르후(G. Radbruch)는 법과 도덕은 분리 될 수는 없고 구별 될 수 있을 분이라 하였다. 분리란 서로 떨어져 무관계한 것이 되는 것이지만 구별은 서로 강조점을 달리 하여 특수하게 발달 되는 것을 의미한다. 라드부루흐는 ‘법의 도덕 왕국에로의 귀화’와 ‘도덕의 법왕국에로의 귀화’가 가능함을 설명하고 있다. 도덕이 법 규형성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에 법규 내용 중에 도덕적 경향이 침투되어 있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서 법은 수정되고 사람들의 의식 구조의 변화에 따라서 법은 강화되기도 하고 늘어지기도 한다. 또한 한때는 법률에 의한 절대권의 통치자가 군림한 적도 있으며 그 법의 명령이 바로 신의 명령으로 주어진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법은 바로 도덕을 포괄한 것이었으며 홉스(Hobbes)같은 학자는 실정법을 도덕보다 우위에 두었다. 익 jt 역시 법의 절대성을 주장한 것이며 법 그 자체가 도덕인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양상이 다양하고 여러 가지 기능이 분화됨에 따라 사회는 도덕과 법률의 분리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사회질서의 차원과 사회건설의 차원에서 그리고 행위의 동기의 차원과 결과의 차원에서 도덕과 법의 구별이 피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도덕과 법을 구별한다 하더라도 법에 앞서 인도주의가 주장되고 법은 법으로서 피할 수 없는 허점을 갖고 있기에 사람과 사람과의 본질적인 분제는 윤리적 차원으로 해결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