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는 나에게 평소에는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고 당연히 ‘맞다’라고 생각되는 답이 꼭 정답은 아니고 다른 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맞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의심없이 그것을 수용해 왔으며 그렇게 해야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왔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우리 마음속에 단정을 짓고 그러한 모습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규정하는 생각이나 관념 등은 정상적인 것이고 소수의 사람들이 따르는 그것들은 비정상적인 것일까. 왜 우리는 다수가 따르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있을까. 무엇인가가 우리가 그렇게 답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영화에서 정신병원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병원에서 원하는 생활패턴대로 사람들이 생활하기를 바라고 있고, 치료를 명분 삼아 하는 토론 시간조차 간호사는 정답이 무엇인지를 전제하고 환자들에게 그 답이 아닌 다른 대답은 틀렸다고 강요하며 정답이 나올 때까지 환자들에게 자기 고백을 시킨다. 이에 대해 저항하면 억압과 처벌이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도 영화에서의 정신병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서는 주입식 교육으로 학생들의 여러 가지의 생각은 무시된 채 정답만을 말하도록 교육받고, 학교에서 원하는 학생의 모습으로 생활하도록 규칙 등을 통해서 강요받는다. 선생님의 말씀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 체제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말 그대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그들이 원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학생은 소위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고 체벌을 받는다. 선생님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사람 개개인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으로만 외칠 뿐 거기에 대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런 용기가 ‘대든다, 버릇없다’라는 말로 격하되고 그런 용기로서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사실 ‘체제 속에 순응하면 편안한 삶일텐데 왜 피곤한 짓을 할까’라는 안이함으로 인해 체제에 복종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군대나 사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조직과 그들의 명령이 항상 옳을 수는 없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직의 힘. 특히 ‘제재’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는 순종해버린다. 평평한 잔디 밭에 조금이라도 길게 자라있는 풀을 잘라버리듯이 우리는 그들의 원하는 대로 있어야 했고 유별나다고 생각되면 내쳐졌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범죄가 갈수록 강력범죄화가 되고 있다. 최근에 발생했던 ‘강호순 사건’이나 몇 년전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부녀자 21명을 연쇄살인하였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뚜렷한 범행 동기없이 사회에 대한 적개심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들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러한 사건들과 논의를 접하면서 나도 그들의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범죄인들의 권리보호 차원에서 사형집행을 유보해야 하나, 아니면 국민 법 감정에 대한 반영과 강력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로써 사회질서를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 최선일까에 대해서 말이다.대한민국은 사형준폐지국가이다. 사형준폐지국가란 일반 범죄에 사형이 적용되나 지난 10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은 국가이다. 하지만 최근 이와 같은 ‘묻지마살인’이 증가하면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더불어 한동안 잠잠했던 사형제도 존폐에 대한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법’이라는 사회제도를 통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제도는 모든 상황에 영향력이 미치도록 일반화되기 때문에 위의 경우뿐 아니라 ‘사법살인’이라 일컬어지는 조봉암의 죽음까지도 ‘법’의 관점에서 정당화 할 수 있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에 의한 재판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신의 범주에 속하는 일을 오차없이 일관되게 해낼 수 있는가? 사형은 어떤 경우에 왜 선고해야 하는가? 사형선고가 최선의 방법인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나에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컸다.벡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서 사형반대론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힌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형반대론과 달리 벡카리아의 그것은 빈민에 대한 옹호를 현실적 근거로 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즉 벡카리아 시대는 물론 그 이전에 사형은 대부분 빈민에게 무자비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현대에서도 재조명될 가치가 있다. 즉 사형반대를 계급론적인 차원에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현저히 무시되어온 이 점에 비해 벡카리아가 사형의 무조건 철폐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당시 현실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무정부상태에서 국가의 자유가 문제되면 사형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그러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사형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사형은 범죄의 억제효과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벡카리아는 사형보다도 고통을 지속시키는 종신노력형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또한 그는 사형은 야만적이기에 유해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법이 살인을 범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도 주장한다. 벡카리아는 인간은 오류 없는 존재가 아니므로 사형을 과할 충분한 확실성은 결코 보장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사형제도의 문제점은 현대 사형폐지론의 그것과 다름이 없으나 앞서도 말했듯이 벡카리아의 사형반대는 사회개혁가로서의 그가 빈민에 대한 사형 특히 재산형에 대한 사형 부과에 대한 반대를 기본 취지로 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범죄와 형벌에서 저는 저자 체사레 벡카리아의 생각과 사상에 대해 깊게는 아니지만 조금은 엿볼 수 있었고 그는 공리주의를 입각하면서 법의 지배를 통한 확립된 사회계획이론의 경제형태의 그의 이론이 기초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범죄와 형벌은 법의 지배의 우월성을 지지하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공리주의적 논의에서부터 시작되며 벡카리아는 두 가지 설명 방법으로 그가 주장한 공리주의를 이용하고 있다. 첫째는 법의 지배이다. 벡카리아는 형법이 특히 명확성과 논리적 포괄성 그리고 예측성을 비롯한 형식적이고 실질적인 합리성의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종교재판소와 규문주의를 가지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신중심주의에 염증을 느껴 법의 지배를 호소하고 있다. 한편 벡카리아는 그가 주장한 공리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두 번째 설명방법 즉 시장 경제의 원칙을 상정하고 있다. 그는 근대국가의 사법적 정치적 기초는 중세의 신중심주의와 절대왕권의 봉건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규모의 부르주아적 공리주의의 원칙을 통하여 확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경제주체와 법의 주체를 한 개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각 개인이 국가법을 잘 준수할 수 있도록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각 개인이 각자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벡카리아가 범죄를 사회에 유해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시장경제원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사회계약으로 모든 시민들은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자유의 일정부분을 국가가 양도하고 그대가로 국가는 개인의 안전과 평온을 보호한다고 주장한다.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총합은 일종의 저축분인데 이 안에는 국가가 국민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의 기초가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범죄는 법과 경제 양자를 침해하는 행위가 된다. 벡카리아가 경제를 소중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은 그가 범죄와 형벌에서 언급한 범죄유형이 절도 위조 밀수 등과 같은 재산범죄를 강조한 것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또한 벡카리아는 휴머니즘과 인간학에서 비롯된 다양한 실증주의적 계몽주의사상을 그의 범죄와 형벌에 적용하였다. 그이 책 전반에는 휴머니즘과 인권 존중 사상을 느낄 수 있는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사형 제도의 폐지, 미결구금의 원칙, 고문과 사형의 반대, 잔인한 형벌의 반대 등이 그 내용이다. 백카리아는 그의 저서인 ‘범죄와 형벌’에서 합리적이고 인도적인 형벌에 대한 호소와 함께 비인도적 형벌제도의 폐지를 사회계약론과 공리주의 관점에서 도출해내고 있다.
Ⅰ. 責任財産의 保全채무불이행에 대한 구제로서 우선 강제이행을 청구할 수 있으나(民389條,)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채권자가 이를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결국 금전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된다.(民394條) 그러므로 모든 채권은, 궁극에 가서는 금전채권으로 변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런데, 금전채권에 대하여는 채무자의 일반재산을 금전으로 바꾸어서 그 변제에 충당하므로, 채권의 실질적 가치는 채무자의 일반재산의 다소에 의하여 결정된다. 한편 채권자 상호간에 있어서는, 채권자 평등의 원칙이 적용되므로 채무자의 재산은, 개개의 채권에 관하여 그 이행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모든 채권자를 위한 공동담보로 되어있다. 채권의 가치는 채무자의 책임재산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큰 영향을 받는다. 여기서 채권자가 확실하게 지급을 받기 위하여, 담보물권제도를 이용함으로써 위의 채권자 평등의 원칙을 깨뜨려 다른 채권자에 우선하서 지급받도록 하는 방법이 있으나, 또 하나의 방법은, 채무자의 재산이 줄어서 적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본래 채권은 채무자의 재산을 직접 지배하는 권리가 아니므로, 채권자의 채무자의 재산에 대한 참견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여기서 민법은 채무자가 그의 권리의 실행을 게을리함으로써 그의 재산을 적어지게 하거나, 또는 제3자와 공모하여 고의로 재산이 줄어들게 하는 경우에만, 채권자가 채무자의 재산에 참견하는 것을 인정한다. 즉, 채무자의 책임재산을 보전하기 위하여 채권자에게 채권자대위권과 채권자취소권을 주고 있다.채권자대위권은, 채무자가 소극적으로 책임재산의 유지, 책임재산의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지탱하여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 채권자가 채무자에 갈음하여 책임재산의 유지를 꾀하는 권리이고, 채권자취소권은, 채무자가 적극적으로 책임재산을 줄어들게 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에, 채권자가 채무자의 그러한 행위(사해행위)를 부인해서 책임재산을 회복하는 권리이다.Ⅱ. 債權者代位權1.의의-채권자가 자기의 채권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의 채무자에게 속하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채권자대위권이다.(民404條) 이 제도는 두 가지 효능이 있는데 첫째로, 강제집행의 준비로서의 작용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채무자의 책임재산을 보전하는 작용을 한다. 둘째로, 이 제도는 그 본래의 기능과는 전혀 관련없는 특정채권의 보전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이용해 오고 있다.2.성질-채권자대위권은 소송법상의 권리가 아니라 실체법상의 권리이다. 채권자가 채무자의 이름으로 채무자의 채권을 행사하므로 대리권이 아닌 일종의 법정재산관리권이다.3.요건- 1)채권자가 자기의 채권을 보전할 필요가 있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채무자의 무자력을 필요로 하지만, 채무자의 특정채권보전을 위해 채무자의 특정의 권리를 행사하는 경우에 채무자의 무자력 여부는 조건이 될 수 없음이 통설·판례이다. 또한 채권이 질권·저당권으로 담보되어 있거나 다른 구제방법이 있어도 대위권은 성립한다. 2) 채무자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 부당한 방법이라도 채무자가 스스로 권리를 행사한 경우에는 대위권행사가 불가능하나, 대위권행사가 가능하면 채무자의 반대의사가 있어도 된다. 3) 채권자의 채권이 변제기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의 허가에 의해서 하는 재판상 대위와 보존행위의 대위는 변제기 전에도 할 수 있다.3.행사- 대위채권자가 물건의 인도를 청구하는 경우에는 채무자에게 청구할 수도 있으며, 자기에게 직접 인도할 것을 청구할 수도 있다. 대위권으로서 채무자 재산의 관리행위는 인정되나 적극적인 처분행위는 할 수 없다. 대위권 행사시에 채무자에게 내용을 통지하거나, 통지가 없어도 대위권 행사 사실을 알면 그 후에는 채무자의 처분행위를 통해 채권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4.행사의 효과-직접 채무자를 구속하고 총채권자의 공동담보로 제공되나 상계적상의 상태에 있을 때는 상계에 의해 우선변제의 효과가 있다. 대위를 위한 채권자지출비용에 대해서는 상환청구권이 있다. 대위소송판결의 기판력의 범위에 대해 판례는 어떠한 사유에 의하건 소송제기사실을 채무자가 안 경우에는 기판력이 미친다고 보나 다수설은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기판력은 채무자에게도 미친다고 본다. 대위권의 목적이 될 수 있는 권리는 채무자의 채권보전에 적합하면 청구권 외에도 형성권·채권자대위권·취소권·공법상 등의 행위에도 대위가 가능하다. 그러나 행사상의 일신전속권과 압류금지 채권은 대위가 불가능하다.Ⅲ. 債權者取消權1.의의-채권자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행한 채무자의 법률행위(사해행위)를 취소하고, 그러함으로써 그 사해행위에 의하여 빠져 나간 채무자의 재산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채권자의 권리가 채권자취소권이다.(民406條)채권자취소권은 채권자대위권과 더불어 채권의 공동담보의 보전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채권자대위권은 채무자의 권리를 대위 행사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본래 있어야 할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 지나지 않으며, 채무자에게나 또는 제3자에게나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적다. 이에 반해 채권자취소권은 일단 유효하게 성립한 채무자가 행한 행위의 효력을 부인해서. 제3자로부터 담보재산을 회수해 오는 것이므로, 채권의 공동담보의 보전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채무자와 제3자 사이에 본래 있어서는 아니 되는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되어 채무자 및 제3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요건이나 행사방법에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 이는 파산법상의 부인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파산절차의 개시에 의하지 않고 일반재산의 보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다 간편한 제도로서 기능한다. 채권자취소권의 본질은 민법 제406조의 해석상 사해행위의 취소와 일탈한 재산회복을 본체로 하는 병합설로 보는 것이 판례·통설이다.
‘남자답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떤 것이 남자다운 것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처음 남자답다는 게 뭐에요?”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가장 먼저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싸움 잘하고 외적으로 강한 외모나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남자라고. 유치원생 같은 대답일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내 머리 속의 남자의 이미지는 강함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그게 멋이라고 나는 생각해왔었다. 그런 생각이 반영되어서 인지 내 성격은 자존심이 아주 세고 누구에게 힘으로나 지적으로나 밀리기 싫어하고 무시당하기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학창시절에 누군가의 뒤를 따르기보다는 누군가들을 이끌고 싶어 했고, 돋보이고 싶었고 우위에 있고 싶었다. 내 의견과 마찰이 있거나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욕설과 폭력을 사용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때 그러한 행동들이 나의 ‘강함’을 표출해주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러한 수단들은 사실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약한 부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런 수단들을 사용했던 것 같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관계는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수평적인 것 같지만 그 내부의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서열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서열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닌 소위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내 생각에 남자 세 명만 보여도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는 서열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러한 서열이 가름되는 요인은 ‘힘’이라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그 보이지 않는 서열구조 속에서 자기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해 함부로 하기도 한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급자에게 있어서 상관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은 욕설과 폭력이었다. 하급자에게 그러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겁먹는 모습을 보며,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느끼고 제도가 주는 권력의 맛에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명령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남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크게 떠올랐던 생각이 세 가지 정도였다. 하나는 ‘내가 만약 안토니오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과연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비난할 수가 있는 가.’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물음들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가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주인공의 안타깝고 희망 없는 삶을 지켜보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내가 만약 안토니오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이번에 새로 얻은 직장을 포기하고 다시 직업소개소로 가서 기약 없는 선택을 기달렸을까. 아니면 나도 안토니오처럼 자전거를 훔칠 수밖에 없었을까. 어렵게 구한 일자리, 처자식이 있는 가장,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나였어도 아마 자전거를 훔치지 않았을까 싶다. 자전거를 훔친다는 것은 물론 잘못된 일이고 사회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나 가난과 실직으로 가정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가정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는 가장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 나는 그를 백번이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연 안토니오의 자전거를 훔친 청년이나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친 안토니오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절도는 범죄행위이고 다른 사람의 이익에 침해를 가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의 잣대로 들이대는 것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럼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그건 바로 국민들의 기본권조차 제대로 보장해 주지 못하는 사회의 책임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도 세계적인 경제 위기 여파로 일자리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고 실업자 수는 사상 최대이며 저소득계층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생계형 범죄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다. 식사를 하고 돈을 내지 않는다던지, 마트에서 절도를 한다던지, 벌금을 내지 않는 등의 범죄가 바로 그것이다. 겉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행위를 비난할 수 있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그 사회구조 속에 구속받고 있는 우리들을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를 옥죄고 변화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