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광고 심의의 자율성 확립방안[ 목 차 ]I. 서 론II. 광고 자율규제의 특성과 유형1. 광고규제의 특성2. 광고의 자율규제 - 특성과 효과3. 자율규제의 구분4. 자율규제의 유형5. 광고 자율규제의 장점 및 단점III. 한국의 광고규제 현황1. 인쇄매체 광고규제2. 방송매체 광고규제3. 업종별 자율규제IV. 현행 방송광고 규제의 문제점1. 방송광고 규제 현황2. 방송 및 방송광고 규제의 논리3. 방송광고 사전심의에 관한 논란V. 새 방송법안에 따른 광고심의의 변화와 문제점1. 방송법 개정안 내용중 광고 심의관련 조항2. 동 법안중 광고심의에 관한 문제점3. 특수한 전문지식 및 기술을 요하는 사무VI. 결론 및 제언I. 서 론광고규제에 있어 그동안 가장 강력한 정부규제를 규정하고 있던 방송법의 개정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과 관련분야의 관심과 기대속에 광고심의의 내용이나 방법이 다소 자율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사실 방송이나 광고계 일각에서는 그동안 방송위원회라는 국가기관이 사전에 법적심의로 방송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사전검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고, 더 나아가 위헌시비까지 있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논란에 따라 새로운 방송법의 제정(통합 방송법 또는 단일 방송법)이나 기존 방송법의 개정에서는 그동안 문제되어 온 방송광고의 사전심의가 사후심의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어 왔다. 물론 이 경우에도 방송광고의 사전심의를 완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이 하던 사전심의를 민간기관에 의한 자율적 사전심의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며, 기존의 방송위원회 사전심의는 사후심의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특히 이러한 주장이 현실적 대안으로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몇가지 상황의 변화가 있었던 점을 무시할 수 없다.우선 신정부의 매체규제 원칙이 先 自律, 後 責任의 기조위에 있으며, 둘째는 각종 신 매체 출현에 따라 방송광고 심의대상이 크게 확대되고 있어 기존의 방송위원회 심의만으로 이를 포괄하기 어렵게 된 점, 셋째 W전히 책임지는 규제형태를 말한다. 이 자율규제는 소비자 대표, 정부관리, 관련 공적인물 등 외부세력과의 참여나 협의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나 공식적 의결역할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들을 배제시킨다. 이 자율규제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규제방식이 있다.그리고 이 자율규제는 크게 2가지의 광범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다. 첫째는 오도광고, 무법적 광고행위, 과잉강요, 프라이버시 침범, 공격적 메시지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쟁업자에 의한 불공정행위로부터 광고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중의 지지, 공중의 자율규제기관에 대한 접근성, 객관성, 신속한 행동과 처리절차, 철저성, 피드백 제도, 책임성 등이 확보되어야 한다.이와같은 자율규제의 효과로는 4가지가 있다. 첫째는 '직접적인 사회적 효과'로서 예를 들면 소비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나 영향에 근거한 구매실수를 줄이게 하고 소비자나 경쟁업자를 다치지 않게 하는 효과를 말한다. 둘째는 spillover 또는 제3자 효과로서 이는 광고주나 대행사들이 과거의 사례로부터 배우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메시지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장효율성 효과'로서, 시장에서의 정확한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촉진함으로써 광고의 수용율을 높이고 광고효과를 증대시켜 메시지 효과당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넷째 효과는 '정치?사회적 효과'로서, 자율규제가 광고와 관련된 법률이나 행정부처의 활동, 재판사례 등을 감소시켜줌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나 정부, 기업 차원의 제반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실제로 자율규제와 타율규제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세계 여러나라가 순수자율규제와 타율규제, 소비자 통제 등을 혼합한 방식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율규제라고 해도 다 같은 것이 아니며, 통제의 정도와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3. 자율규제의 구분(1) 중앙자율규제기구에 의한 규제이는 한 국가의 광고 전반을 중앙에 다. 실제로 벨기에, 프랑스, 캐나다에서는 자율규제의 규정과 지침이 본래의 역할 외에도 바람직한 광고활동의 위반여부를 평가하는데 법적규제를 보완해주고 있다. 특히 법률로 다루기 어려운 미풍양속이나 품위, 성적표현 등의 문제를 다루는데 효율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법적규제보다 더욱 엄격한 규제를 행하기도 한다(예, 미국의 양조업계 자체에 의한 독주광고 규제 등).5) 자율규제는 규정과 지침이 자발적으로 제정되고, 이것이 관련업계 회원들에 의해 채택되기 때문에 법률보다 더욱 도덕적인 특성을 갖는다.6) 법률은 통상적으로 설득, 중재, 협상 대신에 강제력, 고소 고발, 처벌을 강조함으로써 마찰을 조장할 수 있는 반면, 자율규제는 기업과 소비자, 또는 기업간의 마찰을 줄이는데 도움을 준다.(2) 단점1) 공공이익과 기업활동의 자유라는 기준에서 공공의 이익이 약화될 우려가 있다.2) 업계가 자율적 기준을 제정하면서 최소수준에서 정할 때, 실제로 업계는 규제의 효과보다 정부의 법제정을 완화하는 이기적 수단으로 이를 이용할 우려가 있다.3) 엄격한 처벌이 배제되기 때문에 비효율적일 수 있다.4) 업계에 의해 선정된 극소수의 소비자와 공익대표자들만이 심의위원으로 선정되어, 기타 단체와의 협상시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려움이 따른다.III. 한국의 광고규제 현황1. 인쇄매체 광고규제한국의 인쇄매체 광고규제는 법적규제와 자율규제가 모두 사후규제로 이루어 지고 있다. 즉 집행된 광고가 문제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법률적 위법성이나 자율규정 위반을 심의한다. 다만 각 매체사가 나름대로 심의규정을 제정하여 매체사 내부에서 사전심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실시여부는 의문이다. 인쇄매체의 대표적인 자율심의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2. 방송매체 광고규제현재 한국의 모든 방송광고는 국가기관인 방송위원회 의 '사전심의'를 거쳐야만 방송이 가능하다. 방송위원회는 "한국방송광고공사법 제15조의 규정에 의하여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방송국에 위탁하여 방송하고자 하는 광고물 등의 방송물"에 대방송법에서는 국가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위원회가 사전심의를 담당하도록 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부규제이면서 사전 행정처분에 해당하는 규제제도로 바뀌었다. 이는 과거의 심의결과가 행정소송의 대상이 아니었던데 비해 현재의 심의결과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광고계는 계속 방송위원회의 사전심의를 국가기관에 의한 사전검열로 간주하면서 위헌문제를 제기해왔다.한국의 방송광고는 방송위원회의 사전규제를 받고 방송된 후에 다시 관련법규에 위배된 경우 해당법규에 의해 법적제재가 가능한 사후규제의 이중규제를 받고 있다.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심의제도가 안고 있는 사전검열의 위헌가능성 문제이다. 방송광고중 의견광고와 같은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광고나, 시청자의 악세스권에 해당하는 광고의 경우 사전심의 자체가 '사전검열 억제'의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이것이 사전검열이 아니라 '적합성 심의'라는 이견도 있다. 이 해석은 무차별성, 즉시성 및 동시성, 피해 회복불가, 직접성, 광역성 등의 방송매체 특성 때문에 방송할 광고물의 사전심의는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그러나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방송위원회의 결정이 방송가, 방송불가의 행정처분이라는 점에서 사전억제라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이 문제는 아직 판례가 없어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예상되고 있기도 하다.2. 방송 및 방송광고 규제의 논리그러면 왜 방송광고에 대해서만 이토록 엄격한 법적규제가 이루어지는가? 이는 방송매체 자체의 특성과 그에 따른 방송규제 논리에다 광고의 상업성 및 반복성에 대한 규제논리가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먼저 방송에 대한 규제의 기본논리는 다음의 4가지 개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개념들은 1934년 제정된 미국 통신법(Communication Act)의 법적 해석과정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러 판례를 통해 정립되어 왔으며, 흔히 전파의 공공소유 개념(public ownership con의는 매체사 등의 자율에 맡기고 법적 정부규제는 위반광고에 대한 사후 제재형식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특히 광고업계 및 일부 학계에서는 현행 방송광고의 사전심의가 지니고 있는 부당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우선 광고업계에서는 현행 심의방법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헌성을 안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상업언론인 광고도 표현의 자유가 있으며 사전심의는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전억제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표현의 사전억제를 금하고 있는 헌법규정에 위반될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위헌제소가 되어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문제제기는 세계 경제환경 변화와 관련된 사항이다. WTO체제의 지구촌 시대에 현재와 같은 방송광고의 법적 사전심의(국가기관의 직접규제)는 외국으로부터 국내시장 진입을 방해하는 규제장치라는 문제제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방송규제의 논리적 토대가 되어 온 개념들이 상당부분 변화되어 이미 이론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파의 희소성 개념이나 방송의 매체 특성론 등이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과 기술의 발전으로 논리적 설득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또 방송 및 통신의 융합과 신매체 출현으로 광고심의 대상매체가 확대되는 등 방송환경 변화에 따라 규제제도를 신축적 효율적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다.V. 새 방송법안에 따른 광고심의의 변화와 문제점1. 방송법 개정안 내용중 광고 심의관련 조항정부여당이 마련한 것으로 알려진 방송법안의 광고심의 관련 조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제31조(방송의 공정성 및 공공성 심의) ②방송위원회는 제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방송이 국민문화의 향상에 이바지하고 그 내용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하도록 광고방송에 대하여는 방송되기 전에 그 내용을 심의하여 방송여부를 심의 의결한다.제80조(권한의 위임 위탁) ②방송위원회는 제31조 2항의 규정에 의한 광고방송물의 사전심의에 관련된 업무를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민간기구, 단체에 위탁할 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 정리(화왕계)화왕이 처음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했는데, 봄이되어 곱게 피어난 온갖 꽃들은 빠짐없이 달려와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여 배알하려 했다. 장미 가 홀연히 걸어와 앞에 나와 말했다. 왕이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또한 할미꽃이라는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 말했다. 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 지라도, 상자속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이 있어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말에 생사와 삼베같은 좋은 물건이 있다해도 왕골과 띠풀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가 어느 쪽을 택하겠냐는 질문에 화왕은 장부 말도 일리는 있으나 어여쁜 여자 얻기가 어렵다며 고민하자 장부가 다가가 무릇 임금 된 자는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다며 말했다. 그러자 화왕은 잘못했노라 했다.(귀토지설)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병이 났다. 의사가 토끼간을 약에 섞어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 하자 거북 한 마리가 토끼간을 구할 수 있다며, 마침내 육지로 나와 토끼를 보고 근심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며 토끼를 업고 가던 중 사실대로 말했다. 이를 들은 토끼는 자신의 간을 씻어 바위 밑에 두었다며 가지러 가자한다. 그 말을 듣고 거북이 돌아갔는데 언덕에 오르자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뛰어들어가면서 거북보고 어리석다하자 거북은 그 말을 듣고 멍청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밀우)밀우와 유유는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천왕 20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시켜 왕이 성에서 나와 도주했다. 추격당하는 왕이 남옥저하여 그들의 식읍으로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로 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귀산)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 젊어서 같은 부의 추항을 벗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어진 사람 옆에서 도를 배우기로 했는데, 당시 원광법사를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여, 그 거처에 가서 한 말씀 해주시어 평생계명으로 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법사는 세속오계가 있으니 이를 실행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했다. 그들은 다른 것들은 하겠지만 살아 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 죽여야 한다는 말을 잘 모르겠다고 하자 법사는 죽이는 시기와 대상을 선택이라 하여 오직 소용되는 경우만 죽이고 그 이상은 죽이지 말 것이니, 좋은 계율이라 한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실행하고 어기지 않겠다 한다. 진평왕 건복 24년에 백제가 아막성을 포위했다. 왕은 이를 방어케 했는데 이때 귀산과 추항도 함께 전선에 나갔다. 그때 백제가 패해 물러가 군사를 매복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군사는 진격하다 힘이 다해 돌아오고 있었는데 이때 무은은 후 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오고 있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며 큰 소리로 외치고 적을 치고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싸웠다. 여러 군사들이 이를 보고 분발해 진격했다. 귀산과 추항은 온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다 죽었다. 왕은 그들의 시체를 앞에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각각 추증하였다.(온달)온달은 고구려 평강왕때 사람이다. 얼굴은 험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마음은 착해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를 밥을 빌어 봉양하였고,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쳐 그를 바보온달 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어 왕이 농담으로 바보온달에게 시집가야 되겠다고 했다. 딸이 16세가 되어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하니 공주가 대왕께선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으니 말씀을 바꾸지 말라며 받들지 못하겠다고 하자 왕은 화가나 너는 내 딸이 될 수 없다며 갈대로 가라고 하자 이에 이듬해 병인년 백제가 공격해오자 왕은 장수들에게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채 돌아오자, 찬덕이 분하여 의리 없는 행동이라며 자신은 의리 있게 죽겠다며 힘써 싸웠으나 성이 회복되지 않자 그는 죽어서도 성을 회복하겠다며 홰나무에 부딪쳐 죽었다. 그리하여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항복했다. 해론이 20여세 되자 부친의 공으로 대나마가 되어 해론을 금산 당주로 임명해 왕이 가장성을 빼았도록 했다. 이를 들은 백제가 공격해오자 해론이 장수들에게 아버지도 여기서 전사하였으니 자신도 오늘이 죽을 날이라며 칼을 들고 적진에가 여럿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황이 소식을 듣고 그의 가족을 보살펴 주었고,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소나)소나는 백성군 사산 사람이고, 그의 부친 심나는 잦은 싸움에 그때마다 싸웠는데 가는 곳마다 적의 진지가 무너졌다. 사졸들이 퇴각했음에도 심나는 크게 꾸짖으며 수십을 베어 죽이니 적이 두려워 도주했다. 이런 아버지의 풍모를 지닌 소나는 아달성으로 가 변방을 방어하게 되었다. 상원2년 을해년 봄에 백성들에게 모두 삼을 심게 했는데 이를 말갈의 첩자가 자기 추장에게 보고해 백성들이 성을 나온 틈을 타 들어가서 노략질하니 소나가 분격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활을 쏘았는데 적들이 쏜 화살을 맞고 쓰러져죽었다. 집에 있던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울며, 평소 남편이 싸우다 죽어야 한다고 했다며 죽음이 뜻대로 됐다고 말하니 왕은 그에게 잡찬을 추증하였다.(취도)나마 취복의 아들이 셋인데 맏이는 부과, 가운데가 취도, 막내가 핍실이다. 취도가 출가해 이름을 도옥이라 하였다. 태종대왕때 백제가 조천성을 공격했는데 싸움이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때 도옥이 무리에게 자신은 외형만 중과 같으니 군에 들어가 몸을 죽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 만 못하다하여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후 취도로 이름을 고쳤다. 군대를 따라 적지에가 싸우다 죽자, 그 후 백제인들과의 전투에서 부과가 당주로서 전사하여 논공의 제일이었다. 문명 원년 갑신에 고구려 어느 대감이 그를 왕에게 천거했다. 당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할 때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서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됐는데 그의 부친이 관창에게 공을 세워 부귀를 얻으라하자 관창도 동의하고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군이 적어 산채로 계백앞으로 보내져 그의 투구를 벗게 하니 어리고 용감한 것을 알고 계백은 차마 해치지 못하고 살려 보냈다. 하지만 관창은 다시 적진에 가 죽었다. 계백이 그의 머리를 베 말의 안장에 매어 돌려보내자 품일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며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었다. 3군이 그것을 보고 의지를 다지니 백제가 패하여 대왕은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가족들에겐 당견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일백섬을 부의로 주었다.(김흠운)김흠운은 나밀왕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달복잡찬이다. 흠운이 소년시절에 아무개가 전사하여 이름을 남겼다는 이야기에 감동되어 그와 같은 의지를 보였다. 같은 문하에 있던 중 전밀은 흠운이 전쟁에 나가면 돌아오지 못할 거라 했다. 태종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는 것을 분하게 여겨 정벌하려고 군사를 동원할 때 흠운을 낭당대감으로 삼았다. 백제인들이 야음을 기해오자 군사들이 놀라자 적군이 혼란을 틈타 공격해 오니 화살이 날아왔다. 대사 전지가 흠운이 죽으면 수치라고 말하자 그는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며 적과 싸우다 죽었다. 이때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함께 전사했다. 보용나는 흠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개를 지켰다며 자신도 적진에 들어가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양산가를 지었다.(열기)문무왕때 당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평양을 포위했다. 그때 유덕민이 국왕에게 국서를 전해 군수물자를 평양에 보내게 했는데 왕이 김유신에게 쌀 4천석과 벼 2만2천2백50석을 수송케 했는데 장새에 이르렀을 때 풍설이 몹시 사나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죽었다. 고구려하고 적진으로 돌입해 전사했다. 거진이 바라보다 나가려하니 종이 아버님이 마님을 위로하라 명하였다며 뜻을 져버리는 불효는 하지 말라 청했으나 거진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사는 것도 효자라 할 수 없다며 종의 팔을 치고, 싸우다 죽었다. 군사들이 이들의 죽음을 보고 감격해 진격하니 승리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었고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반지산에 합장하고 처자와 유족에게 상을 주었다.(죽죽)죽죽은 대야주 사람이고, 부친 학열은 찬간이었다. 선덕왕때 죽죽이 사지가 되어 김품석 당하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선덕왕때 백제장군이 그 성을 공격했다. 이에 앞서 품석이 자기의 막객인 검일의 아내를 뺏은 일이 있었다. 이를 한심스럽게 여기던 검일은 적과 내음해 창고에 불을 질렀다. 품석의 보좌관인 서천이 윤충에게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항복하겠다고 했다. 성밖으로 나가는 이들을 제지하며 죽죽이 백제의 말을 믿지 말라하고 싸우자했지만 모두 듣지 않고 나가 백제에게 죽임 당했다. 품석이 나가려다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자살했다. 용석이 죽죽에게 항복하자고 하자 그는 듣지 않고 싸우다 용석과 전사했다. 왕은 이를 듣고 죽죽에게 급찬을 추증하고 용석에게 대나마를 추증하였고 처자들에게 상을 주어 왕도로 옮겨 살게 했다.(필부)필부는 사량사람이며 아버지는 존대아찬이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밀접한 사이가 되어 함께 신라 침탈을 도모하자 태종이 방어할 만한 사람을 구해 필부를 칠중성하의 현령으로 삼았다. 그 이듬해에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격멸 하였고 고구려가 이에 우리를 미워해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므로 필부가 싸우기를 20여 일이나 계속했다. 적장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역신 대나마 비삽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성안에 힘이 다했으니 이를 친다면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며 알리는 바람에 다시 공격해왔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으로 던지며 호통을 치니 병자들도 일어나 성에 올랐으나 사기가 사라져 사상자가 반이 넘.
{한국문학의 길잡이--------------------------------------------------------------------------------------------------------{--------------------------------------------------------------------------------------------------------근대문학에 대하여近 代 文 學Ⅰ. 근대의 정의한국 문학사 서술에 있어 가장 고려해야 할 문제는 바로 근대 의 기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근대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와 근대의 기점을 어디서부터 설정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근대 문학의 시점을 논의하기 전, 근대란 무엇인가 또는 근대를 나누는 데 있어 일반적인 논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근대 즉, 전환기적 특징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환기란, 체제 중심고리의 이완과 붕괴, 이데올로기의 해체, 정신적 혼란, 난해성, 기존의 규율과 권위의 거부, 정부 차원의 강제 수단의 무기력, 무제한적 다원주의와 온갖 모순의 확산, 가치관의 위기와 같은 과도기적 성격 등으로 말미암아 무정부적 상태가 지속되는 시기이다. 이는 혼돈 상태인 무계획성과 무질서로 대변된다. 이러한 혼돈 상태는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재편성되고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한 조정 과정을 거쳐 다음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다.한국에서의 근대는 외세의 침입과 함께 왔으며, 이는 중세 문학의 해체와 그대문학의 형성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적 역량을 모아 세계만방에 자주독립 국가임을 천명하고 외교적으로 승인을 거쳐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고 자주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근대문학은 이러한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Ⅱ. 근대 시점의 논의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근대기점으로 설정된 것을 시대순으로 살펴보면,1 18약되는 당대의 과제를 대변하려 한 문학정신의 치열함에서 찾을 수 있다.이 시기 서사문학은 다음의 세 갈래로 크게 구분된다. 첫째, 국가의 근대화나 국난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국내외의 영웅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전기문학, 둘째로 작가의 인식과 이상을 대변하는 화자(話者)를 통해 현실을 분석·비판하게 함으로써 독자의 각성과 정치적 계몽의 효과를 의도한 시사토론체소설, 끝으로 근대소설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면서 당대의 시대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반영한 신소설이 있다.1 역사전기문학이는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전개된 애국계몽운동과 깊은 연관 속에서 창작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반봉건 근대화의 요구와 함께 제국주의 모순이 격화되기 시작한 이 시기에 민중의 애국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문화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소설의 형식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정치적 의도를 널리 펴는 데 알맞은 형식이므로 당시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종의 정치계몽운동의 수단으로 역사전기문학을 채택한 것이다.이러한 문학관은 반외세 국권회복이란 시대정신을 선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양식의 근대적 진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역사전기문학은 작가의 현실인식의 방향에 따라 다음의 몇 가지 방향으로 크게 구별된다. 먼저 『비스마룩구청화』(『조양보』, 1906년 7월), 『나팔륜전사』(도의사, 1908년), 『피득대제전』(『공수학보』, 1908년 5월)와 같은 비스마르크, 나폴레옹, 피터대제 등 서양의 국가적 영웅들에 대한 번역전기이다. 이들 대상인물의 공통점은 부국강병책으로 국가의 근대화를 이룬 인물이라는 점이다.다음으로 들수 있는 것은 『서사건국지』 『애국부인전』(장지연, 광학서포, 1908년), 『이태리건국삼걸전』(신채호 역, 광학서포, 1908년) 등과 같이 외세에 맞서 국권회복을 위해 앞장섰던 유럽의 민간영웅들에 대한 번역·번안전기이다.끝으로 『을지문덕』(신채호, 광학서포, 1908년), 『강감찬전』(우기선, 1908년), 『이순신전』(신채호,『대한매일동기의 측면에서는 역사전기문학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이 시기에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담화나 토론체로 된 독특한 소설양식이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도 망국을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에서 민중을 계몽·각성시키려는 의식의 소산이다. 따라서 당시에 발표된 어느 서사양식보다도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형태로 현실의 모순을 풍자·비판·고발하였다. 그러나 시사토론체소설은 인물과 사건의 형상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는 소설 본래의 모습과는 부합되지 못한 일종의 과도기적 소설양식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그 양식 자체가 소멸된 것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금서처분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작가가 자신의 현실관을 근대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3신소설1905년을 전후로 한 문학사에는 전시대 국문소설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추구하던 당대의 면모와 세태를 비교적 생생하게 그린 신소설이란 새로운 서사양식이 등장하였다.신소설에 나타난 근대문학적인 요소에 대해 살펴본다면 첫째, 언문일치 문장의 확립을 들 수 있다. 신소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고전국문소설의 운문체 문장이나 한문 직역투에서 벗어남으로써 문체에서 근대소설 형성의 길을 닦았다. 다음으로, 작품의 배경과 소재를 주로 갑오경장과 청일전쟁 이후의 역사·사회에 둠으로써 소설이 지나친 허구와 비현실의 세계로 비약할 가능성의 폭이 좁아지고, 이에 따라 인물과 사건의 구성이 한층 실감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해서 신소설이 근대소설로서의 완전한 체제를 갖춘 양식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새로움이 있는 만큼 적지 않은 구소설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문제가 된다. 신소설에 나타나는 구소설적 요소는 작품 배경의 설정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신소설 작품이 봉건가정 내부에서 일어나는 처첩 사이, 혹은 계모와 전처 자식들간의 갈등을 축으로 봉건사회가 빚어낸 비인간적 세태와 시류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안일과 방탕으로 일관하는 무능한 과도기..1920년대 한국적낭만주의의 조짐(꿈,환상,낭만-1920년대 근대시의 자설적구조변화의 과정)#자설적 형식-남에 의해서(외부에 의해서)주어진 어떤 문학적 특징타설적 형식-스스로 자체내에서(자생적으로)형성된 어떤 문학적 특징ex)외부(한시)의 영향 우리 조선사회를 주름잡는 형식. 엇시조,사설시조 자설적.문예지- .주요작가-육당최남선, 춘원이광수, 소성현상윤, 소월최승구(최소월).일본유학파 신세대들에 의해 겉껍질은 변했지만 내용은 별진전이 없었다.(공부,개화하자...).-태서는 구라파,서구 문학을 의미.외국문학을 소개해 주는 신문.김억(김소 월의 국어선생.장관출신.7,80년대까지 가장많은 분량의 전집작가.근대최초 의 시집20年代)이 번역,편집,사장.육당과 춘원의 2人문단시대..육당 최남선-17세때 편집인겸 사장. 지에 매호 자신의 작품발표.·「해에게서 소년에게」-제일 못쓴작품(?). 지금은 중요시 않함.신시의모습이나 내용은조잡. 바이런의 디오우션을 번역하다시피한 작품창간 호의 권두시. 당시 17살의 작품에 당시인들은 야∼하는 반응 일으킴.·정형성을 갖춘신시(한계를 느낌) (혼란) 에서 자유율 선택 리듬의 무 정부 상태.춘원 이광수-초기에 교육자. 1909년1월호에 실린「옥중호걸」에서 시작.·작품-「우리의 영웅」, 「곰」 「어머니의 무릎」·춘원시의 주류를 이루는 세부가 육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구조가 아니라, 관념적이고-1- 보편적인 공적 감정으로 일관됨 형식면에서 자유로움만 극단적으로 몰고간 자유율의 한계 춘원은 시에 회의를 느끼고 근대소설을 쓰게됨.⊙1920년대 .근대시 전개의 세 흐름.매일신보 유일(1910년대) 『조선』『동아』의 두일간지(발표지면의 중요한 역할)와 『개벽』(아주오랜동안 발간60호)등의 잡지 20년대 문학의 전개와 발전에 기여..동인지-詩문학, 청록집(박두진,박목월,조지훈)/창조,백조,폐허등은 곧바로 폐간.1920년대 초반-詩만 두드러지게 나타남-검열통과 유리.한시,가사,시조,국문풍월,창가,신체시등(10년대의 다양성) 자유시 하나로 정지(시전문지 아님)/이시우「제1인칭시」등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이상의 부록현 상으로 그침.-2-.「詩人部落」동인·생의 탐구 시도·서정주-창간호에 「문둥이」「獄野」「대낮」등 /실험적·오장환- � 「城壁」등7작품발표/파상적인 실험작품(내용자체는 20년대로 퇴보)·유치환- 질박한 목소리로 대상을 다룸.「旗」(조선문단.36년.1월호)/실험에서 물러남..30년대가 저물며 검열이 심해지며, 모든 작품이 친일문학 쪽으로 통제되어 갔다.(문인보국 회-친일강요)⊙1945∼1950년 민족문학 수립의 모색기.해방기문학/해방공간/암흑기(문학작품은 없고 사상논쟁이 주류)·해방을 맞이하며 가장 가슴조린이들 : 친일 작가·일제강점기(말살정책의 극한)의 종말>우리 민족문학 찾기 시작·군정이 시작됨>정치사회분야인력부족>친일파를 심을수 밖에(아이러니컬하게도)·친일/반일 좌(사회주의.소련)/우(민주주의.미국) 이데올로기의 대립*좌익계열우의 미국의 사상조사 북으로감.해방직후 시단의 두 경향·민족문학-김기림, 정지용 / 순수문학-조지훈, 서정주·참여시-경향시(민족작가회의)8.15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시인들의 작품을 말함.조벽암,권환,박세영,임화,이용악,오장환,박아지,여상현,설정식. / 시조-조운순수시- 민족주의(한국문인협회)순수시를 주장하는 시인들은 민족주의계열(우익.미국)시인들이다.정치적 이데올 로기의 배제김현승,김광섭,서정주,유치환,김광균,김용호,청록파(박두진,박목월,조지훈),박남수, 정한모,박인환. / 시조-양주동,이호우,김상옥Ⅳ. 시대별 구분1)1910년대1917년 〈매일신보〉에 발표된 이광수의 〈무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소설사의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먼저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이라는 점, 자유연애를 3각 구도의 틀 속에서 보여주었다는 점, 자강주의(自强主義) 사상의 하나인 안창호의 독립준비론을 소설화했다는 점 등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 사상을 드러낸 작품이 있는가 하면, 걱정없을 이의 〈절교의 서한〉과 양백화의 〈슬픈 모순〉 등은 당대 현실다.
목차Ⅰ. 서론Ⅱ. 본론1. 김동인 소설의 성격과 비평관2. 염상섭 소설의 사회인식3. 김소월의 시세계4. 한용운의 시세계5. 김소월과 한용운의 비교Ⅲ. 결론1. 김동인과 염상섭2. 김소월과 한용운* 참고문헌Ⅰ. 서론1920년대 문학의 전개와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그중 대표적인 소설가 김동인과 염상섭, 시인 김소월과 한용운의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그 시대 문학의 시대상을 연구해본다.Ⅱ. 본론. 김동인 소설의 성격과 비평관1. 소설의 성격김동인의 작품은 크게, 자연주의와 낭만주이, 유미주의, 인도주의, 민족주의로 나누어져 평가된다.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작품과 관련시켜 작품성격을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1자연주의 - 『감자(1925)』『감자』는 주인공인 복녀 가 빈민굴에 살면서 송충이잡이 등 고된 일을 해 가며 생활을 이어가던 중, 중국인 왕서방네 감자를 훔치러 갔다가 들켜 몸을 팔게 되고 그 뒤부터 왕서방은 수시로 복녀를 찾아오는데, 그러던 차에 왕서방은 어떤 처녀에게 장가를 들게 되고 질투심에 불탄 복녀는 칼을 품고 신방에 뛰어들었으나 왕서방 손에 죽게된다. 그러나 사흘 후 복녀의 시체는 돈 몇 푼에 매수된 남편에 의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실려 나간다는 내용의 단편소설이다.이른바 자연주의의 특징인 황견 결정론에 입각한 작품이다. 환경 결정론이란 주인공의 운명은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복녀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불우한 환경이 빚어낸 일종의 숙명으로, 그 운명은 황경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최초의 부정은 타율적인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자율적인 것으로 변화된다.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 이위에 드는) 농민이었다.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예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 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들자, 원망의 눈을 한 채 소경은 쓰러져 죽는다, 죽어 넘어지는 순간 먹물이 튀어 그림은 완성되나 그 눈은 마지막 죽어가던 순간의 원망을 담고 있었다, 그 후 화공은 미쳐 돌아다니다 끝내는 소경을 그린 족자를 가슴에 품고 운명한다, 여기까지 이야기 구상을 마친 여는 화공을 조상(弔喪)한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내용이다.이는 미인도를 완성해 가는 추하고 늙은 화공의 작업과정을 유미주의적 입장에서 그려나간 작품이다, 화공이 미치게 되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예술적 완성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 그러하다.작가 김동인은 미에 대한 견해를 여러 글에서 제기한 바 있는데, 악(惡)도 미(美) 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미에 대한 광포적(狂暴的) 동경 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미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이 소설에 잘 나타나있다.4인도주의 - 『발가락이 닮았다(1932)』32세의 노총각 M이 친구들 몰래 결혼을 했다. 총각 때의 무절제한 방탕생활로 각종 성병을 앓아 생식능력이 없음을 의사인 나 는 알고 있다, 그러한 M이 결혼 2년 후의 어느 날 갓난아기를 안고 나 의 병원으로 찾아왔다. 아기가 기관지를 앓고 있었지만 M의 속셈은 그 애가 자기애라는 보장을 얻으려는 데 있었다. M은 그 애가 제 증조부를 닮았다고 말하고 자기를 닮은 데도 있다고 말했다. 즉, 가운데 발가락이 제일 긴 자기의 발가락을 닮았다는 것이다.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서도 애써 그것을 삭혀 보려는 M의 심정이 눈물겨워 나 는 발가락뿐 아니라 얼굴도 닮은 데가 있다고 말하고는 의혹과 희망이 섞인 M의 시선을 피해 돌아앉는다는 내용으로 강한 휴머니티가 깔려있는 작품이다.마지막에 의사인 친구에게서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확신을 받고 싶어하는 부정(父情)과 아내를 의심하면서도 어떻게든 그것을 부인해 보려는 M의 노력은 안타깝다.5 민족주의 -『붉은 산(1932)』이 작품에는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시달리고 있는 당시 우리 민족의 모습이 배경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연히 민족의식이다. 역사와 예술품과의 차이를 구별하는 방법을 살펴보면 우선 첫째는 역사적 개념과 문예의 개념은 비슷도 않다는 기술상의 차이. 둘째는 역사가 그리는 바는 한 목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가되 그 목적까지 도달시키는 표현상의 차이, 셋째는 역사가에게는 運筆의 자유가 없으되 예술가에게는 절대적 자유가 있다는 작가의 입당의 차이를 들고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 나름의 역사소설에 대한 인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이상에서 살핀 소설 일반에 관한 견해는 그가 직접 창작생활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창작론이라는 또 하나의 특성이 있다 할 것이다.. 염상섭 소설의 사회인식염상섭은 항일운동가인 동시에 평범한 소시민이었고, 선각자인 동시에 가난한 작가였다. 그는 평생을 현실문제에 집착했고 그의 소설에 당대 사회의 진실을 문학 형상화해 놓았다. 염상섭 소설 쓰기의 원동력은 생활현실 체험과 상상력이었다, 그의 소설을 사회 관찰의 기록이라고 부르는 뜻도 여기에 있다.그가 이같이 현실 문제에 집착하게 된 것은 당대 사회가 최대의 민족 수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민족 수난기의 극복과 그에 따른 현실대응이 문제였다.염상섭에게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생활과 현실이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생활의 진실을 밝히는 일이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문제였다. 지금 있는 생활 즉, 식민지적 현실이 그에게는 문제였다. 생활과 현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염상섭은 현실제일주의자다. 현실은 곧 당대 생활이다 생활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는 인식은 그에게 문학창작의 방법으로 리얼리즘을 선택하게 한다.염상섭은 객(客)을 주(主)에 걸러서 보는 것이 사실주의다. 라고 했다. 객이란 무엇인가? 현실 곧 생활이요, 당대 사회이다. 주란 무엇인가? 나. 즉, 작가이다. 작가의 주관에 의해 사회를 보고 그 현실의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리얼리즘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주관이란 무엇이겠는가? 작가의 현실인식이요, 작가의 세계인식을 통한 사회인식을 말함이다.1. 식민지 지식또한 식민지적 현실과 이에 동화되어 가는 친일적 세계의 죽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민족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식민지 조선을 무덤같다고 비판하지만, 구체적으로 해결의 의지르 f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무덤 같다는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탈출하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의식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선의 현실을 비관적으로 느끼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않고 현실을 도피해 버리는 당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식민지적 근대성의 부정-염상섭 소설에 등장하는 악한, 부정적 인물들은 모두 돈에 대한 욕망으로 눈이 먼 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모두 식민지적 근대성에 길들여진 자들이다. 돈의 논리를 가장 빨리, 체험적으로 혹은 생리적으로 체득한 자들이기 때문이다.염상섭 소설에서 나타나는 식민지 근대의 부정성은 일상의 모습을 드러내려 할 때나, 현실을 역사적으로 구조화시켜 형상화할 때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만세전 에 그려진 일상이나, 삼대 의 조-부-자가 살아온 서로 다른 삶의 체험과 그들의 지향, 허구적 근대의식에 사로잡힌 사랑과 죄 의 정마리아나 유택수, 무화과 의 한인호 등을 통해 식민지 근대 사회가 안고 있는 삶의 문제점들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모습을 보이지만 정작 봉건적 전통에 가장 강하게 집착하는 조의관, 근대 문명과 교육의 세례를 받았으나 감각적이고 물신적 욕망에 사로잡힌 조상훈, 윤택수, 정마리아, 한인호, 식민지적 착취와 봉건적 유제에 갇혀 살아가는 조선 민중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봉건성과 허구적 근대의식, 식민지적 착취구조가 착종된 채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일상이 바로 식민지적 조선사화이고, 이것이야말로 식민지적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들인 것이다. 염상섭 소설들에서는 이런 양상들의 돈과 애욕에 대한 욕망들과 접합되어 복잡한 사건들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2 『삼대(1931)』이 작품은 1931년 조선 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들의 논리였는데 이것이 삼대에 있어서도 수용되고 있다. 살아남아서 다음의 과정을 모색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유일한 인물은 덕기였다.삼대는 만세전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대를 부정하려는 입장을 치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는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제시되지 않는다. 작중인물 덕기가 말한 대로 포용과 강화가 적극적 현실대응 방법이 될 수 있으려면 그 뒤에 오는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최종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논리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포용과 감화의 다음 단계에 대한 발전적 논리가 제시되어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대에서는 제시되지 않으며, 이 점이 삼대의 큰 한계일 수 밖에 없다.2. 중도적인 관찰자의 모습과 리얼리즘의 구현염상섭이 식민지적 근대성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도적인 초점 화자를 등장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염상섭 소설에서 중도적인 초점 화자는 현실을 비교적 냉정한 시각으로 관찰하며, 현실의 다양성을 포착하게 된다.만세전 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나(이인화) 가 초점 화자인 동시에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지식인인 나 는 조선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관찰하고 드러낸다. 만세전 이후의 염상섭 장편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졌으면서도 서술자의 태도는 비교적 중도적이다.역사의 현장에서 허위와 진실의 대립 양상을 목격하고 그 모순과 갈등을 보게 된 염상섭은 당대사회의 진실을 보다 폭 넓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이거이냐 저것이냐, 이쪽이나 저쪽이냐 하는 양단적인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폐쇄성을 버리고 대상을 다각적으로 관찰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며 비판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사회적 현상을 주체적으로 수용코자 했다.염상섭은 가공적인 인위성을 거부하고, 사회나 인간을 그 모습 그대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복잡한 현실을 미화하거나 덮어버리려 하지 않고 이를 사회적 진실감으로 받아들여 형상화하기에 전념했으며 갈등과 고뇌의 생태를 거짓없이 파악하여 정직히 기술했다.. 김소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