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이정명무엇을 위한 추리였나?단 이틀 만에 두 권을 읽고 나니 머릿속이 어지럽다. 원래 내가 소설책을 한 번 잡으면 두고두고 읽기보다는 리듬을 끊지 않고 쭉 읽는 스타일이이기도 했지만, 이 소설은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 힘든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타 지식형 추리소설과는 달리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추리상의 복잡함도 별로 없었다. 또한 이 소설은 ‘한글’이라는 우리말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실존 인물이 등장함에 따라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 한다.‘뿌리 깊은 나무’는 추리소설이다.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다. 물론 소설 안에 있는 한글이라는 우리 문자에 대한 과학적인 면과 한글을 만드는 과정의 험난함, 그리고 뜻을 굽히지 않았던 세종대왕과 그가 중시하던 신하들에 대한 부분이 이 소설을 단순이 추리소설이라 말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소설의 전개 방식과 독자를 빨아들이는 소재가 범죄와 그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이고, 한글의 위대함은 그저 독자의 관심을 끌게 하는 소재에 불과하게 돼 버려 추리소설이라 여겨짐은 어쩔 수 없었다.내가 생각하는 추리소설은 서술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줄기로 나눌 수 있겠다. ‘모리스 르블랑’식과 ‘아가사 크리스티’식 뤼팽이라는 불세출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은 불사신에 가까운 주인공이 명석한 두뇌와 강인한 육체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작가는 몇 가지의 단서를 이용해 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관찰자 시점에 가까운 객관적인 서술로 사건을 진행시킨다. 독자는 작품의 결말부까지 범인의 실체를 알지 못하거나, 이미 범인이 드러났다 해도 범인의 소재를 파악하기 할 수 없다. 결말에 가서야 작가는 독자에게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단서와 사건을 가르쳐 주고 범인을 밝혀낸다. 이런 방법은 반전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독자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내지만, 다소의 비약과 억지스러운 면을 나타낸다. 추리극 추리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에 감정적 요소를 거의 배제하게 된다. 그러나 모리스 르블랑 식과 다른점이 있다. 바로 정보 제공의 측면이다. 작가는 서서히 단서를 제공하고, 주인공이 그 단서를 토대로 추리를 하게 함으로서 독자 역시 생각하고 의심하게 한다. 이 방법은 독자가 글을 읽으며 시종 머리를 싸매게 만들기는 하지만, 독자 스스로 범인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작가는 이렇게 주인공으로 하여금 점차 용의자를 좁혀가게 한다. 그러나 결말부에 이으러 작지만 큰 단서를 토대로 독자와 주인공이 생각하던 용의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든다. 이런 반전은 앞서 말한 모리스 르블랑 식의 추리보다 어쩌면 반전 적 효과가 적게 느껴질지도 모르나,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전의 효과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이런 두 가지 추리극의 특성을 놓고 봤을 때 뿌리 깊은 나무는 두 번째 방식을 채택한다고 할 수 있겠다. 궁궐 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겸사복청에 근무하는 신분이 미천한 말단 겸사복인 강채윤이 정별감의 짐을 지고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강채윤은 명석한 두뇌와 강인한 육체를 지녔다는 점에서 뤼팽과 비견 될 만하나, 뤼팽 정도의 능력을 가지진 않았다. 일단 신분의 한계로 인해 수사의 어려움을 겪고 육체 또한 초인적이진 않다. 그러나 강채윤은 사건을 해결하고자하는 일념 하나로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을 추리소설로만 놓고 보았을 때,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점에서의 한계를 보인다.아가사 크리스티 식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강채윤의 추리는 합리적이고 치밀하다. 이에 작품이 흐를수록 독자와 주인공이 생각하는 범인이 생겨나게 된다. 처음 강채윤은 무휼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이어 세종대왕이 사건의 배후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런 와중에 독자는 작가의 서술에 따라 최만리가 범인이라 여기게 된다. 그리고 끝내 최만리가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여기까지 흐르는 와중에도 독자는 내 짧은 지식으로 보건데 가상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최만리는 그렇지 않다. 작가가 처음 친 덫, 즉 세종대왕이 사건의 배후라는 점에서부터 드러나는 문제인데, 최만리는 우리가 모두 아는 인물이다. 세종대왕 시기에 대제학을 지냈고,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발표하자 상소문을 올려 세종대왕의 미움을 샀던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아직 한글창제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여러 인물을 연쇄살인한 배후의 인물이라면 최만리는 한글창제당시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혹은 옥에 있어야 한다. 고로 독자는 최만리가 범인일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사실 작가가 작품의 중간에 너무나 의도적으로 최만리가 범인일 것이라는 단서를 많이 던져준다. 추리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이런 점에서부터 최만리는 독자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게 된다.그러다 결국 강채윤은 소설 속에 드러나는 단서, 옆에 있던 사내가 국물을 마시고 즉사한 점과 독자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단서, 그 사내가 침술을 할 줄 알았다는 것을 강채윤이 조사해 알고 있다는 점을 토대로 범인이 최만리가 아닌 심종수임을 밝혀낸다. 이는 나름의 반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반전은 반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일단 심종수는 최만리와의 대화를 통해 두 번 가량 소설상 등장했을 뿐, 그 사람 됨됨이나 사건 내에 개입되지 않는 인물이다. 고로 독자가 생각하기엔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다. 이런 설정은 의외성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반전 적인 요소라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배신을 당했을 때 뒷골이 띵 해지는 법이다. 심종수가 범인이라는 것은 차라리 소설 중 나오는 강채윤의 찬모가 범인이라 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차라리 소이가 범인이라거나 아니면 가리온이 범인이라 하면 반전의 효과가 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 속에서 드러내고자하는 한글 창제 과정의 어려움과 세종의 개혁 정책 수행의 어려움을 드러내고자 범인을 심종수로 만들었다.추리소설 속의 이면하지만 이 글은 위에서 말했듯 추리타나지는 세종의 이용후생(利用厚生),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개혁 정책, 그리고 이런 세종대왕의 정책들의 수행의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부분을 좀 더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추리라는 소설 기법을 도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교훈적이고 좋은 내용이라고 해도 독자가 흥미롭게 읽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에, 독자의 흥미와 재미를 유도하기 위해 소설을 추리소설로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그 사실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세부적인 진실을 허구로 꾸며 드러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 때문인지 추리소설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 실존 인물들을 그대로 등장시키고, 그 인물들의 됨됨이나 성격 역시 후대의 우리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실제의 의도, 즉 앞서 말한 한글의 우수성 등을 드러내고자하는 일념 때문인 듯하다.작의 전달의 모호함사실 작가가 극의 완성도를 위해 현재 우리가 평가하는 당대 인물들의 됨됨이와 그들의 생사를 마음대로 설정해버렸다면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 그렇듯, 우리나라 사람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위인을 위대한 인물로 여기고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워할만한 인물로 생각하길 원하지 소설 속에서 그 인물이 변화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이다. 분명 신랄한 비판이 있었을 것이다.이런 문제와 현실적인 벽 때문인지, 소설은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못하다. 내가 서두에 이 소설을 추리소설이라 못 박은 이유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의외성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추리소설의 재미가 반감 되었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적인 요소와 우리를 일깨워주는 요소들의 가미가 그저 단순히 작가가 채득하고 연구한 자료 이상의 효과로 발휘되지 못하여 어설픈 흥미위주의 소설로 변모해 버렸다. 자칫 한글창제라는 모두가 아는 사실을 이용해 흥미를 끈 추리소설이라는 오명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장쉬운 옛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고, 나약하지만 심지 곧은 주인공의 성향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또한 어설프게나마 나오는 소이와의 사랑 역시 이런 매력을 더해준다.단, 소이와의 러브라인이 너무나 미약해 차라리 없는것만 못한 것이 돼 버렸고, 빠른 사건 전개 속에서 간간히 나오는 감정적 묘사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분명 이 소설은 한 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실재하는 것인지 사실인지 모를 정도로 자세하고 상세한 궁궐 내부의 묘사와 마방진에 대한 설명, 그리고 오행에 대한 이야기는 자칫 너무 어려워 독자가 그냥 넘기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짧고 간결한 설명으로 독자의 이해시켰다. 이런 부분은 분명 여타의 역사소설과 다른 점 중 하나다. 무릇 역사소설이나 기타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한 소설들은 방대한 자료와 연구를 통해 나오기에 어려운 말들과 생소한 개념들이 너무 구구절절 나와 글을 지루하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런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이 작품은 챕터가 심하리만큼 많이 나누어져 있다. 마치 영화를 보듯이 서너 페이지 마다 한 번씩 장면이 바뀌고, 그 바뀌는 장면은 챕터로 나눠진다. 이 부분은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고 챕터가 바뀌면 장소와 상황이 바뀐다. 이런 설정은 자칫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도 있지만, 긴장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장미의 이름난 이 소설을 몇 페이지 읽어가면서 하나의 소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 윌리엄이라는 수도사와 그의 종복인 아드소가 한 시골의 수도원에 가서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누구나 알듯 너무나도 유명한 책중의 책으로, 단순히 추리소설이라 여길 수 없다. 추리소설의 기법을 따르고 있기는 하나, 그 초점이 범인이라기보다는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에 있고, 이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당대의 역사적인 사실과, .
현대소설론무진기행1. 작품 속에서의 시간서울에서 무진으로 향한 주인공은 무진에서 사일 간 머무른다. 첫 날 오후에 무진에 도착해, 저녁나절 박의 방문을 받고, 박과 함께 옛 친구인 조의 집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박인숙을 만난 주인공은 이틀 후에 바닷가에 같이 갈 것을 약속한다. 다음날 주인공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인숙과 약속을 한 날 당일 조와의 만남을 갖고 박인숙을 만난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울에서 온 전보를 받고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이는 소설 속에서 흔히 보게 되는 구성으로 주인공이 어딘가로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회귀적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2. 서울에서 무진으로 향하며 드러난 시간소설은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주인공은 무진에 도착하려면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음을 말하고, 무진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버스 승객들이 말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무진의 안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연이어 반 수면상태에 이른 주인공이 무진에서의 기억을 늘어놓는다. 새 출발이 필요 할 때마다 향했던 무진은 주인공에게 고향이었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은 많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은 항상 무진으로 향한다. 마치 안개 속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궁금증에 안개를 헤치듯 끊임없이 무진 행을 택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무진은 주인공에게 단순한 고향이자 기억과 주관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치열한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한 서울과 무진은 새삼 다르지 않다. 조와 박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무진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경쟁과 치졸함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주인공에게는 여행처일 뿐, 이런 그들의 경쟁과는 상관이 없다. 주인공이 실제의 삶은 서울에서 벌어지는 곳. 무진은 그러나 그런 경쟁과 치열함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실제 경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 이에 또다시 안개를 연관시키자면, 서울이 안개 속이라면 무진은 안개 밖에서 그 안을 관조할 수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겠다.3. 시간의 가감이야기는 단 4일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감속과 가속을 이용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서울에서 무진으로 향하는 시간동안의 시간의 흐름은 최대한 자제하고, 그 사이에 무진이라는 공간에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드러낸다. 또한 무진 안에서의 이야기도 하인숙과의 관계를 제외한 다른 주인공의 일상은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하인숙 등 작가가 주인공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부분만 서술하고 있다. 이는 단편 소설의 탄력을 더해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단 앞부분에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생각하는 부분은 다소 늘어지는 감이 있어 작품을 읽는 초반 집중력이 흐트러질 염려가 있게 만든다.4. 묘사와 서정성의 효과/안개의 의미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상현-왜 어떤 인간은 그게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철부지처럼 터무니없이 오기를 부려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삼촌을 만나 멧돼지 사냥을 한다. 소설의 화자이지만 관찰자와 같은 역할.삼촌-물망초(나를 잊지마세요)라는 카페를 운영하던 여인과 사랑에 빠졌던 남자로 사냥에 빠져지낸다. 멧돼지의 눈을 보고 자신을 살려달라던 물망초 여인이 생각나 총을 쏘지 못한다. 사랑이라는 오기로 사랑하는 여인과 동반자살을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가슴에 사랑을 품고 살아간다.도라꾸-삼촌의 친구로 사냥을 돕는다. 살아가기 위한 용기에 대한 것을 짐승을 통해 배운 이후로 총을 잡지 않는다.기 드 모파상의 사랑과 제시 스튜어트의 사랑에는 두 명의 인물이 나온다. 모두 화자가 주인공으로 짐승들의 사랑에 감동을 느낀다.소설에서 처음 멧돼지와 접했던 상황. 즉 사냥개가 멧돼지 새끼의 관절을 물어 거동이 힘들어지자 어미 멧돼지가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도라꾸가 과거에 멧돼지 새끼들을 죽이고 다니다가 곁에 온 멧돼지를 잡은 것. 그리고 모파상과 스튜어트의 사랑에서 오리와 뱀들의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부분은 세 소설에서 나타내고자하는 사랑과 죽음에 대한 해석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있다. 소설에서는 죽음이라는 인간 본연의 공포보다 사랑이 더욱 강하다고 말한다. 이는 마지막에 삼촌이 물망초여인과 같이 죽기로 하고 실행에 옮기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통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소설은 다소 통속적이고 고루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사냥이라는 인간의 야만적이고 본능적인 파괴적 성향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사랑과 파괴성향은 모두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있다. 또한 이런 본능은 짐승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인간과 짐승이 가진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비록 이성이란 인간만지 가지고 있는 성향을 통해 사회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사랑이라는 본능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전해준다.삼촌이라는 인물은 시골 치과 의사다. 치과의사라는 이미지는 돈 많은 부자라는 것 외에도 다소 딱딱하고 차갑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이런 캐릭터 설정을 통해 순수한 사랑의 이미지를 좀 더 강렬하게 안겨준다. 이는 사냥과 사랑이라는 이중적인 인간의 본능으로 드러나는 아이러니와 비슷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뒤엉킨 영성(마이클 야코넬리, 씨뿌리는 사람, 7,500원)처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그 제목만으로 나의 머리 속에 각인되기에 충분했다. 거북하면서도 세속적인 냄새가 풍기는 뒤엉킨 이라는 단어와 영성 이란 거룩하고 영적인 단어가 결합했을 때, 그 느낌이란... 왠지 께름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한(?) 느낌이었다.뒤엉킨 이라는 말이 나에게 왠지 거북함을 주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중에 내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확실하고 정리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바램일 뿐, 실상은 바로 뒤엉킨 그 자체이면서도 그런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자체를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이 책은 뒤엉킨 영성을 가진 우리를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온전한 영성을 향해 가는 우리의 여정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시작은 바로 우리의 상태, 바로 뒤엉킨 영성 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우리의 본성인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는 뒤엉킨 영성 의 소유자임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하지만 우리가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경건의 모양(인정하기 싫지만)들을 배우고, 또한 가지게 되었다. 고난과 고민 중에도 걱정하기보다는 기도하세요 , 기도할께요 라는 말을하는 것, 술·담배 안하는 것, 분노하면 안되고, 교회에서 헌신하는 것, 겸손한 것, 거룩하고 영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 등... 뒤엉킨 영성임을 인정하는 것보다, 이런 경건의 모양을 갖춤으로써 소위 영적이다 라는 평판을 얻음으로서 스스로 안위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미 일상의 모습이다.(솔직히 이 말을 쓰면서도 나 자신도 껄끄럽다.) 그런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하나님께 나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나에게 있는 듯하다.이 책에 예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한동안 우리는 파출부 아주머니를 부를 수 있는 정도로 꽤 잘 살았다.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집안 청소를 하고 흐트러진 것들을 정돈해 주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오는 날이면 아주머니를 위해 오전 내내 아내와 함께 집안 청소를 하면서 보내야 했기 때문에 내게는 그 날이 두려울 정도였다. 더러운 집을 보고 아주머니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었다.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대할 때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거부한 채 영적인 삶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중략)… 그리고 올바른 삶을 살수 있게 될 때까지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존재 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그 사실은 그 정반대다. 자신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파출부 아주머니는 지저분한 집을 청소하게 위해 온 사람이지 집이 깨끗한지 지저분한지 평가하러 온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역시 지저분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지 우리를 정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뒤엉킨 영성임 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자연스럽게 경건의 모양을 쫓아 행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경건의 본질은 점점 잊어가며, 경건의 모양만을 쫓아 행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이 책 속에서 보면, 예수님도 소위 성경을 잘 아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경건의 모양을 갖추시지 안았던 것 같다. 술 마시고, 죄인, 세리, 창녀들과 어울리셨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분노한 모습으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 쫓으시고... 그런 모습들로 인해 신, 곧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이라는 죄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지 안았는가?(뒤엉킨 영성을 인정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으로 자신을 온전한 영성의 사람으로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말이다.) 경건한 본질가운데서 나온 경건의 모양이야말로 진정한 경건이 아닐까? 그것이 뒤엉킨 영성의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독후감 The old Man and the Sea오래전에 아마 중학교때였을겁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보자면 해안에 사는 한 늙은 어부가 오랫동안 고긱를 잡지 못한 끝에 바다에 나가 자기의 고깃배보다 큰 고기를 발견하고 이틀밤낮을 싸운 끝에 겨우 잡았으나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새벽에 항구로 돌아올 때에는 길이 18피트나 되던 물고기가 겨우 머리와 뼈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온갖 고난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는 불굴의 인간 모습이 늙은 어부를 통해 힘차게 묘사되어있는 책입니다.힘들때 어려울때 절망적일때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은 쉽지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이미 경험해 보셨고 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절망속에서도 보잘것 없는 노인이 모든 걸 불태운 것처럼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용기를 잃지말고 주안에서 한발짝씩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