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Ⅰ. 들어가며Ⅱ. 언제, 어디서 베일은 시작되었나Ⅲ. 누가, 왜 베일을 씌웠는가Ⅳ. 베일은 어떻게 의무가 되었나Ⅴ. 베일을 둘러싼 문명의 충돌Ⅵ. 이슬람은 왜 베일을 욕망하는가1. 들어가며...서구 언론은 이슬람의 베일을 인권 탄압의 기제라며 강력히 비판한다. 현실적으로 베일은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례로, 터키의 이맘하팁 종교학교에서는 여학생 모두가 베일을 써야만 하는데, 친구와 저녁을 먹기 위해 베일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딸을 본 아버지가 순결검사를 하겠다면 딸을 협박하는 사건이 발생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는데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이유로 소방관들이 구출해주지 않아 건물에 있던 여성 모두가 불타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하지만 베일 착용이 인권 억압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사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 규정을 적용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많은 가주장적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은 서구 언론에서 많은 비난과 논쟁의 대상이지만, 서구인들조차도 여전히 두 견해 사이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무슬림 여성이 베일을 쓰는 것은 다분히 인권을 침해하는 측면이 있으므로 금지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문화상대성을 인정하여 일종의 ‘차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베일을 둘러싼 논의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단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베일을 쓰느냐 안 쓰느냐는 단순히 베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독특한 이슬람 사회구조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인권’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포괄적인 문제를 상징화한 화두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아주 오래된 역사적 전통과 종교적 사회구조, 근대 이후 서구 열강과의 대결 속에서 빚어진 민족주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인 문맥 속에 놓여있다.그렇다면 ‘여성 인권’과 ‘문화상대주의’라는 이중 잣대를 사이에 두고 설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하락한다. 7세기에 무슬림이 정복하기 전까지, 메소포타미아에는 아케메네스족(기원적539년)의 바빌론 점령에 이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사산왕조페르시아 등 많은 문화가 교체되었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 교류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제도와 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심지어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확장해놓은 하렘은 사산왕조에 이르면 이제 왕족에게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가 되었다.왕족의 특권이었던 하렘은 다른 곳과는 격리되어 있었으며 환관이 수호를 맡았다. 하렘의 격리는 어느새 사회의 본보기처럼 여겨져서 여성 감금을 비롯한 베일 착용은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사회의 기본 관행으로 고착되었다. 기원 후 1세기 동안 여성의 격리 개념은 여성의 몸은 가려져야 한다는 베일 착용 관행과 더불어 이라크나 페르시아 등의 지중해 중동지역의 기본적 사유의 틀을 형성하였으며 당시 사회의 기본적인 관습으로 고착되었다.문화적 요인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든 여성을 비하하는 의식은 지중해 지역에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를 비롯해서 비잔틴 제국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을 악으로 규정하고 정숙한 여성을 강조하는 의식은 베일 착용 관행을 더욱 굳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성 비하 의식은 이슬람 출현 이전 그리스도교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아살해관습(infanticide)은 당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을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문화에 의해 선행되었던 여아살해 관행은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이집트와 유대인들에게도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이것은 또한 아라비아에서도 실행되었으나 이슬람이 출현하면서 금지되었다.4. 베일은 어떻게 의무가 되었나6세기 즈음 중동지방에서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보편적인 법제화가 실행되긴 했지만, 부계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결혼제도만을 유일한 제도람 여성들의 삶을 예시해주는 실례가 되었다. 예컨대, 그녀는 양친이 모두 무슬림이었으며, 아홉 내지는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무함마드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바로 무함마드의 새로운 부인을 맞이해야 했다. 또한 새로운 관습인 ‘베일 착용’과 ‘여성 격리’도 받아들여야 했다. 카디자와 아이샤가 살았던 삶의 차이는 아라비아 여성들이 살게 될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자율성’의 차이였다.아이샤가 여성에게 부과된 많은 사회적 제한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무함마드의 사후 아이샤는 여러 방면에서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정치적 역량은 엄연히 선조로부터 배양된 것이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가 일정 부분 자힐리야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이샤는 제1대 정통 칼리프 아부 바르크의 딸이라는 점 이외에도 탁월한 미모와 재능 때문에 무함마드의 총애를 받았던 부인이다. 무슬림들은 아이샤를 천국에서도 무함마드의 부인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추앙하였다.아이샤는 656년 낙타 전투에 참여해 이슬람 최초로 정변을 주도한 여성이 된다. 예언자 생전에 많은 전투에 동행했던 아이샤는 정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낙타 전투를 치르기 전 바스라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서신을 통해 자신이 전투를 치르려고 하는 이유와 그 정당성에 대해 설명하고 모스크를 지지자들의 회합 장소로 정했다. 바스라에 지취 본부를 차린 아이샤에게 많은 이들이 인력과 무기를 제공하며 지지해주었다. 아이샤는 바스라의 시민들을 영입하기 위해 개인면담은 물론 모스크에서 대중을 향해 연설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낙타 전투에서 그녀가 보인 정치적인 활동은 그 이후 무슬림 여성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선례로 기록되었다. 아이샤는 무엇보다도 여성으로서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정변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슬람 최초의 여성 정치자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아이샤는 낙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아이샤의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패배했다고 믿는 남성들 때문에 이후 무 남성들로부터 여성을 보호해주는 방패이며, 남성의 성적 문란과 유혹을 막아주는 도덕적 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불평등과 맥락이 다른 ‘여성보호관’과 ‘여성유별과’의 차원에서 베일 착용을 주장하는 이슬람 전통주의자들의 해석은, 이슬람이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가부장 권력이 공모하였음을 배제한 것과 다름없다. 베일 착용을 의무화하고 제도화한 것은 보호와 복종의 논리 속에서 실행되었으며, 이때의 보호는 여성의 몸에 대한 철저한 제도적 통제를 의미했기 때문이다.여성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여성의 격리와 베일 착용을 주장했지만,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의 자율권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여성을 남성의 억압 속에 가두는 역할을 하게 되었음은 주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여성에 대한 순결 이데올로기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은 순결하지 않으며,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는 논리의 비약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공헌하였던 것이다. 베일은 결국 여성의 성적 욕망과 성적 자율권마저도 남성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 아래 놓이도록 하였고,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모든 사적ㆍ공적 영역에서 제한된 삶을 살도록 주변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 베일을 둘러싼 문명의 충돌베일은 인권문제 논쟁의 정점에 있는 한편 문명의 충돌을 드러내는 접점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서구 사회에서 무슬림 이민자 여성의 베일 착용은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갈등으로 읽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최근 프랑스가 제정한 무슬림 여성의 베일 착용 금지법(2004년8월31일)은 각종 소요 사태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 법은 프랑스의 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해 제정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민자에 대한 차별을 부르고 있다. 이 법의 골자는 공립 초ㆍ중ㆍ고등 학교 내에서 명백한 종교 상징물 및 차림 금지, 법 수용을 거부할 경우 일정 대화기간을 거쳐 퇴학 처분, 누벨 칼레도니 등 해외 영토에서도 법 적용 가능, 2004~2005학년도부터 시행 등이다. 이 법은 이슬람 머리 스카론은 ‘표현의 자유와 종교적 신념의 대립’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그러나 과연 무슬림의 분노가 표현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협한 종교적 신념에서 연유한 것일까? 아니면 서구의 보편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슬림과 서구와의 문명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일까?유일신 신앙과 철저한 우상숭배 금지 사상으로 인해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나 예언자 무함마드를 그리는 일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 조각이나 그림 등에서 알라나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것은 거의 찾을 수 없다. 무함마드가 등장하더라도 대부분 하얀색으로 칠하여 형체가 드러나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의 신성불가침 영역까지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건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정치적 목적이 담긴 의도적인 침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다른 종교의 신성함까지 침해하는 폭력 행위인 것이다. 최근 서구 유럽사회에서 이민자 무슬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베일 착용 금지도 단지 베일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는 없는 것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정치적 의도가 없다면 이민자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되는 행위까지 제한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정교분리를 국시로 내걸고 있기는 하지만,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지나칠 정도로 드러내 문제가 된 적도 적이 않다. 더구나 최근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과 이로부터 프랑스를 지켜야 한다는 장 피에르 라파랭 총리의 발언은 이슬람교도의 세력화를 경계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인을 비롯한 서구인들이 정서적으로 이슬람에 대해 갖는 경계심에는 역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이르는 세 대륙을 지배했던 제국이었다. 지중해가 오스만 제국의 호수 정도로 간주되었을 만큼 제국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6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유럽을 비롯해 오늘날의 비엔나에 이르는 방대한 유럽 땅
결재란지도교사부 장교 감교 장국사과 본시 학습지도안 ( / 차시)단원대단원ⅵ. 조선 사회의 변동대상지도교사중단원2. 세도정치와 농민의 저항일시수업교생소단원(1) 세도 정치는 어떤 폐단을 가져왔는가?학습목표ㆍ19세기 외척 세도정치가 대두하게 된 배경을 이해한다.ㆍ세도정치 하에서 나타난 정치 혼란상을 설명할 수 있다.ㆍ삼정의 문란의 실태를 알고, 삼정 문란이 농민 생활에 미친 영향을 이해한다.학습자료교사교과서, 수업지도안, PPT자료, 학습지학생교과서, 필기도구, 유인물단계수 업내 용교수 - 학습 활동시간수업자료 및 유의점교사학생도입인사학습 환경 조성전시학습 확인동기유발학습목표 제시▶인사를 한다.▶출석을 점검하고 학습 환경을 정비한다.▶PPT를 통해 지난시간에 배운 것에 대해 복습한다.▶헌종의 릉 사진을 보여주고, 왕릉이 왜 중앙에 있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여 자연스럽게 학습에 대한 동기를 유발시킨다.▶학습목표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인지시킨다.▷인사를 한다.▷주변을 정리하고 학습할 마음과 자세를 갖춘다.▷PPT를 보고 지난시간에 학습한 내용에 대해서 상기한다.▷질문에 대해 생각하여 보고, 이것이 수업내용이 연관 있음을 안다.▷단원명과 학습목표에 대해서 함께 읽으면서 인식하고 학습태도를 형성한다.5분*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여 수업시간에 집중하게 한다.* 전시학습내용을 확인 하고 본시학습의 목표를 파악한다.ppt전개세도정치의 의미세도정치의 결과▶외척세도와 세도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외척(外戚)이란 보통 어머니쪽 친척을 말한다. 하지만, 이 단원에서 뜻하는 외척은 왕과 성이 다른 친척을 말하는 것이란다. 즉, 외가뿐아니라 처가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세도정치는 왕이 신임하는 세력있는 특정가문이 권력을 독차지 하는 정치를 말한단다. 그러므로 외척세도정치(外戚勢道政治)란 ‘왕과 성이 다른 친척들이 왕의 신임을 받아 권력을 잡은 비정상적인 정치형태를 말한다’.▶세도정치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 학생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세도정치의 과정에 대해 설명한다.-전개 과정(3대 60여년간) ※홍국영이 시초순조 : 11세로 즉위. 안동 김씨의 세도(순조의 장인;김조순)헌종 : 8세로 즉위. 풍양 조씨의 세도(헌종의 외할아버지;조만영, 그 형제;조인영)철종 : 19세 강화 도령으로 즉위. 안동 김씨의 세도(철종의 장인;김문근)▶세도정치로 인한 폐단에 대해 설명한다.-세도가의 권력 독점으로 정치기강의 문란과 과거제의 문란, 매관매직이 성행, 관리의 농민 수탈로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하고 사회가 문란함을 설명▶삼정이 국가 수취 체제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강조하여, 문란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 설명한다.-전정, 군정, 환곡-삼정문란: 관리들이 법정 세금 이상을 징수, 환곡이 고리대 구실.-결과: 농촌 경제의 파탄, 국가 재정 파탄, 농민 부담 극심▷세도정치의 의미에 대해 잘 이해한다.▷PPT 자료를 보면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세도정치의 전개과정에 대해 이해한다.▷세도정치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 알고, 이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생각한다.▷삼정의 내용을 이해하고, 삼정의 폐단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 이해한다.32분* 세도정치가 무엇인지 알고, 세도정치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 대해 쉽게 설명한다.* 세도정치의 변화과정에 대해 정리하여 설명한다.ppt사진, 판서* 세도정치기에 나타난 정치 혼란상과 사회적 모순에 대해 연관시켜 설명한다.ppt-플래쉬정리종합정리형성평가 및 기타 질문차시 예고 및 과제제시인사▶학습내용의 요약 정리-①특정 인물이나 가문이 왕의 신임을 받아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정치 형태를 세도 정치라 한다.②매관매직, 과거 시험의 부정 등 세도정치로인한 정치 기강이 매우 문란하였다.③삼정의 문란으로 결국 농민의 부담이 커지게되었다.▶형성평가를 학생들과 함께 읽어보고 한 학생을 지적하여 풀어보게 한다.-필요시 추가설명을 한다.▶차시 예고 및 과제 제시-조선 후기 사회적 모순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농민들의 대응모습과 종교를 찾는 백성들에 의해 발전된 천주교, 동학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심화 학습 제시▶마치는 인사를 한다.▷학습의 주요 내용에 대해 정리한다.▷문제를 통해 학습 내용의 재확인 하고,의문사항을 질문한다.▷차시에 배울 내용을 숙지한다.▷다음 시간에 학습지를 풀어 온다.▷마치는 인사를 한다.8분* 본시 내용의 핵심내용을 상기시켜 준다.ppt* 수업목표 도달을 확인한다.* 차시수업 내용을 공부할 것을 지도한다.국사과 본시 학습지도안 ( / 차시)단원대단원ⅵ. 조선 사회의 변동대상지도교사중단원2. 세도정치와 농민의 저항일시수업교생소단원(2)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난 까닭은?(3) 천주교와 동학이 널리 퍼진 배경은?학습목표ㆍ19세기 농민의 저항으로 인한 봉기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이해한다.ㆍ천주교의 전래 과정의 특색과 내용을 이해한다.ㆍ동학의 발생 배경과 발전 과정을 말할 수 있다.학습자료교사수업안, PPT 자료, 학습지, 지도학생교과서, 필기도구, 유인물단계수 업내 용교수 - 학습 활동시간수업자료 및 유의점교사학생도입인사학습 환경 조성전시학습 확인동기유발학습목표 제시▶인사를 한다.▶출석을 점검하고 학습 환경을 정비한다.▶저번 시간에 학습한 내용을 상기 및 확인한다.▶‘비석치기’놀이의 유래를 통해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게 하여 배우게 될 학습에 대해 동기를 유발시킨다.▶학습목표를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인지시킨다.▷인사를 한다.▷주변을 정리하고 학습할 마음과 자세를 갖춘다.▷PPT를 보고 지난시간에 학습한 내용에 대해서 상기한다.▷‘비석치기’놀이의 유래를 통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본다.▷단원명과 학습목표에 대해서 함께 읽으면서 인식하고 학습태도를 형성한다.5분* 학습분위기를 조성하여 수업시간에 집중하게 한다.*전시학습내용을 확인한다.* 수업내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한다.* 수업 방향에 대해 인지하게 한다.전개▶세도 정치하에서 농촌 사회 현실에 대해알아 본다.-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착취로 인한 농민들의 생활 모습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농민의 고통이 심화되었음을 인식하게 한다.▶유랑 농민의 증가 원인에 대해 알아본다.▶농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농민의 의식이 점차 성장하고, 저항이 일어나게 됨을 정리하여 준다.▶홍경래의 난과 진주 농민 봉기-‘홍경래’는 어떤 사람인가?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위치ㆍ성격에 대해 설명한다.-백낙신은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와 진주의 위치와 성격에 대해 설명한다.▶문제를 통한 확인학습▶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종교를 가질까?▶ 세도정치 시기의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안으로 예언사상과 무속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초기자본주의 시대 당대인들이 사회변화를 어떻게 느꼈을까?- 민중들의 삶을 통해 봄목차1. 초기 자본주의 사회변화2. 당대 민중들이 느낀 초기자본주의 사회3. 민중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큰사람들’에 대한 저항4. 당대 민중들의 망탈리테1. 초기 자본주의 사회변화중세 말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 사회에는 큰 변화가 나타난다. 흑사병이 발생한 이후 노동력의 부족으로 농민들은 지대의 감면과 부역의 폐지를 주장하며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장원영주에 대항했다. 농민들은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며 더 좋은 노동조건이나 더 좋은 보유조건을 찾아 도주하거나 이주했기 때문에 영주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지대를 낮추고 부역을 경감하거나 폐지할 수 밖에 없었다. 농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던 영주와 농민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농민들이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런 농노제 폐지로 자유를 얻은 농민의 생활은 크게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하지만 실제적으로 농민의 생활을 보면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대다수 농민이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으나, 농사 기술은 여전히 원시적이었고, 중세 말에 진행된 금납화로 16세기에 봉건적 반동으로 생산물지대로 고정되어 농민들은 봉건적 공납을 실질적으로 계속 부담하였고, 도시에는 경제 불황과 질병, 도시의 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증가하던 도시빈민의 참상을 심화시켰다.)근대 초 프랑스 사람들의 실제생활모습과 당대인들의 전반적인 생각을 읽기 위해 초기자본주의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민담’과 노동자들의 폭동인 ‘고양이 대학살’의 사료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근대 초 사회변화에 대해 당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2. 당대 민중들이 느낀 초기자본주의 사회‘민담’은 당시 프랑스 농민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으며,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18세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옛날에 나무꾼과 그 부인이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일곱명의 자식이 있었고 모두 아들이었다. 〔……〕그들은 대단히 가난했고 일곱명의 자식들은 하나도 자신을 돌볼 만큼 크지 않아서 큰 골칫거리였다. 〔……〕흉년이 왔고 기근이 심해서 그 불쌍한 부부는 아이들을 내다버리기로 결심하였다.” - 프랑스판의 「헨젤과 그레텔」이러한 사실적인 어조는 어린이의 죽음이 근세초의 프랑스에서 얼마나 통상적인 일이었는지를 암시한다. 아이들을 숲속에 버림으로서 부모는 17세기와 18세기에 수차례 농민들을 압도하였던 문제, 즉 인구상의 재앙기에 살아남는다는 문제에 대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가난한 나무꾼이 착한 일의 대가로 세 가지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약속을 받는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에 식용이 그를 압도하여 그는 소시지를 소원한다. 그것이 그의 접시 위에 나타나자 견딜 수 없는 바가지쟁이인 그의 아내가 하나의 소원을 그렇게 낭비한 것에 대해 격하게 불평하자 그는 그 소시지가 아내의 코 위에서 자라라고 소원한다. 그리하여 모양이 흉하게 된 배우자를 보게 되자 그는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려달라고 소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비참한 현실로 돌아갔다.” -「어리석은 소원」“제대하여 영락한 군인 라메는 구걸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는 수중의 마지막 푼돈을 다른 거지들과 함께 쓰는데 그 중의 한 명은 변장한 성베드로였고 보상으로 그는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을 받는다. 낙원을 바라는 대신에 그는 ‘그럴듯한 식사’를, 혹은 다른 판본에서는 ‘흰 빵과 닭고기’ ‘빵과 소시지와 마실 수 있는 만큼의 포도주’ ‘담배와 여인숙에서 보았던 음식’, 또는 ‘언제나 빵 껍질을 먹을 수 있기를’ 원한다. -「악마와 대장장이」)위와 같이 농민들의 이야기에서 소원은 보통 음식의 형태로 나타나며 그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배를 채운다는 것이 프랑스 농민 이야기의 주인공의 소원 중 첫 번째인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금은보화가 아니라 '먹어서 살아남는가, 먹지 못하고 굶어 죽는가'인 것 이다. 이런 농민들의 민담에는 실제 생존을 위한 계획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실재세계에 뿌리를 두고, 프랑스 농민 생활이 이야기들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에서의 노동자인 니콜라 콩타는 견습공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견습공은 두 명이 있었다. 제롬과 레베이예가 그들이다. 그들은 더럽고 추운 방에서 잤고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직인들에게 모욕을 받고 주인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일했으면서도 먹을 것이라고는 찌꺼기밖에 받지 못했다. 특히 그들의 음식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주인의 식탁에서 식사하지 못하고 그들은 부엌에서 그릇 속의 찌꺼기를 먹어야 했다. 더 나쁜 일은 주방장이 몰래 남은 음식을 팔고는 그 소년들에게 고양이 밥을 준 것이었다. 소화시킬 수도 없는 오래되고 썩은 고기 조각이라 고양이에게 먹으라고 주어도 거절당하였다.”여기에 그려진 노동자 모습은 앞서 살펴보았던 농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제공되고, 잠자리의 환경도 좋지 않았고, 잠도 충분히 잘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초기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소수의 몇몇 장인들이 인쇄업을 장악하게 된다. 장인의 수는 반 이상이 줄어든 반면 직인은 수는 큰 변동이 없어, 적은 숫자의 작업장에 더 많은 노동력이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주인들은 ‘임금노동자’를 고용하여 노동력을 채움으로써 직인들은 밑으로부터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임금노동자들은 원칙상이나마 직인을 장인직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견습공의 기간을 거치지 않았던 사람들로써, 단지 값싼 노동력의 원천으로 여겨져 필요에 의해 고용과 해고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18세기 인쇄소의 모습에서 노동자들은 장인직의 폐쇄하와 특권화로 장인직으로 오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고, 소수의 행운아를 제외하고는 그들 대부분이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여 실업의 위기와 빈곤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3. 민중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큰사람들’에 대한 저항농민의 민담이나 노동자들의 고양이 대학살에서 그들의 궁핍한 삶을 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만드는 ‘큰사람들’ 즉 특권계층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것은 주인공의 모습이나 상징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왕과 두 거만한 공주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때에 그는 그들에게 삶은 감자와 검은 빵이라는 농부의 식사를 먹게 한다. 그리고 공주를 얻은 후에야 왕위의 후계자로서 정당한 자리를 찾는다. 라 라메는 공주를 웃기려는 시합에서 일종의 벼룩 곡예를 이용함으로써 공주를 얻는다. 거지를 사위로 맞아들인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한 왕은 자신의 말을 지키지 않고 공주를 한 궁신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마침내 공주가 두 청혼자와 같이 침대에 들어가 그녀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기로 결정된다. 라 라메는 경쟁자의 항문에 벼룩을 파견함으로써 두 번째 시합도 이긴다.” -「백선에 걸린 장」“가난한 대장장이가 마을의 신부에 의해 오쟁이를 지고는 지역의 영주에게 혹사당한다. 신부가 부추겨서 영주는 대장장이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력하고 그 사이에 신부를 대장장이의 아내와 즐긴다. 대장장이는 요정의 도움을 얻어 임무를 두 번 완수한다. 그러나 세 번째로 영주는 「카프리콘」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지만 대장장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요정은 그에게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가 바닥에 구멍을 뚫고 그가 무엇을 보건 “달라붙어라!”라고 말하라고 지시한다. 먼저 그는 잠옷을 이 사이에 물고 음부에서 벼룩을 잡고 있는 하녀를 본다. “달라붙어라!”라는 소리가 그녀를 그 자세로 동결시켰고 마침 그 때 신부가 용변을 볼 수 있도록 여주인이 요강을 주고 그 둘이서 신부를 위하여 그것을 들고 있을 때 또 다른 “달라붙어라!” 소리에 셋이 함께 붙게 만든다. 아침에 대장장이는 채찍으로 그 셋을 집 밖으로 몰고 나가고 적시에 “달라붙어라!”를 이용함으로써 마을 사람들 전체를 그들에 달라붙게 만든다. 이 행렬이 영주의 저택에 도착하자 대장장이는 “여기에 카프리콘이 있습니다. 주인님”하고 소리친다. 영주는 그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모든 사람들이 풀려난다.” - 「황금의 거위 (카프리콘)」)위의 모습에서 보면 농민들은 특권 계층에 대한 존경심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특권 계층을 풍자의 대상, 저항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소송, 장원의 세금에 대한 속임, 밀렵 등으로 부유하고 권세 높은 사람들을 속이려 하듯 환상 속에서도 그들을 속임으로써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견습공들의 더러운 침실 지붕 위에서 온밤을 울어대는 충분한 밤잠을 잘 수 없게 하였다. 견습공들은 ‘부르주아’가 늦게까지 자는 동안 그들은 지친 상태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레베이예는 지붕 위에세 주인의 침실 근처까지 기어가 오싹할 정도로 고양이 울음을 울어대 주인과 그 아내는 눈을 붙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며칠 밤에 걸쳐 이런 처사를 당하자 그들은 마법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견습공에게 고양이들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여주인이 명령을 했는데 무엇보다도 그녀의 그리스(그녀가 기르는 고양이)는 놀라지 않게 하라고 주의시켰다. 그들은 그리스부터 시작하여 눈에 띄는 모든 고양이를 추격했다. 그 짐승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최후의 의식을 거행한 뒤 그들은 즉석에서 만든 교수대에 고양이들을 매달았다. 이 모습을 본 여주인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그것이 그리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 집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커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고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환희’ ‘무질서’ ‘웃음’으로 미칠 지경이었다.”
- 황조가의 해석《삼국사기》권 13고구려 본기 유리왕 3년의 말미에 수록된 황조가는 그 기록 자체만을 따른다면 공무도하가, 구지가와 더불어 국문학사에 있어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시가들 중의 하나가 된다. 따라서 고대문학의 매우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지만 과연 삼국사기의 문면에 나타난 기사를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황조가의 작품 해석은 여러 가지로 논란이 되어 왔다. 우선 한문의 본격적인 수용을 소수림왕(B.C. 4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보면 현재와 같은 4언4구 시경체의 황조가가 과연 유리왕 때에 창작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기에서 현전하는 작품이 위작인가 한역인가 하는 문제와 작자가 과연 유리왕인가 아닌가, 아울러 그 창작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것이 논란되었다.- 현전하는 작품이 위작인가 한역인가《한국한문학사》를 기술함에 있어 황조가를 현전하는 한문학의 최고 작품으로 인정하고, 유리왕이 그 작자임에 의문을 제시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사실을 회의하지 않고 존중한 데서 나온 것인바, 고구려 건국 초부터의 한자 사용 가능성 및 유리왕의 한시 창작 능력 등을 전제한 데서 나온 견해이기도 하다. 한편 이와 반대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신빙하지 않고 후인 위작으로 간주한 고창옥은 국문학의 범위에서 황조가를 제외시켰으며, 우리어문학회의 《국문학사》 역시 서술 대상에서 제외했다.그러나 대부분의 논자들은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를 존중하면서도 비판으로 검토하여 현재의 한시 자체는 후인의 위작 또는 한역으로 간주하되 원작 자체의 존재 가능성만은 인정하여 국문학사에 편입시키고 있다. 즉 현재의 황조가는 원래 우리말로 창작되어 불려지던 것이 구전되어 훨씬 후대에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현재의 한시 형태로 번역, 정착되었고, 다시 이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이러한 입장의 논거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한문의 본격적인 수용이 유리왕 때보다 4세기 가량 후대인 소수림왕 때라는 일반적인 사실과 삼국사기에 표기된 유리왕 시대의 인명, 지명이 대개 순수한 고구려 토속어의 발음과 뜻을 한자로 가차표기한 사실들을 들고 있다. 그밖에 황조가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삼국사기는 「歌曰~」이라 했는데 여기에서 「歌」는 한시의 창작이 아니라 우리말로 된 노래를 부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 등이 있으며, 임동권의 경우는 「꾀꼬리雙雙(쌍쌍)」의 구절이 애정문제와 관련해서 자주 나타나는 우리 속가의 예에 비추어 민담의 한역으로 보기도 한다.- 황조가의 작자가 과연 유리왕인가정병욱은 유리왕이 신화시대의 신화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서정시를 창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황조가를 삼국사기의 기록을 전혀 떠나서 하나의 작자불명의 서정시 고대가요 한토막이 후대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유리왕의 설화 속에 끼어든 것으로 보았다. 황조가는 유리왕과 관계없는 작품인데 유리왕의 설화 속에 끼어들어 유리왕의 작품으로 잘못 전해져 온 것이라 했다. 역시 유리왕의 창작을 부인하는 견해로서, 김승찬은 황조가가 유리왕 시대의 한 부족장에 의해 창작, 가창, 유포 되던 것이 영웅활동 시대의 유리왕의 작품으로 오인되어 후대 역사 기술에 채록된 것이라 했다. 유리왕의 창작가능성을 부정하면서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기는 곤란하다는 점에서 나온 견해이거니와 많은 논자들이 유리왕과의 관련성을 배제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현재의 황조가는 후세의 한역으로 돌리더라도 원작이 유리왕의 작인가 아닌가가 문제되는 것은 결국 유리왕이란 인물과 황조가의 작품 내용 그리고 화희 ? 치희에 관한 기사 상호간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이해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유리왕 3년조의 기사를 좀 더 면밀하게 검토, 분석하려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황조가의 창작시기를 언제로 볼 것인가종래의 일반적인 황조가 해석에 있어서는 화희와 치희에 관한 기사 내용(즉 유리왕 3년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자 화희, 치희를 계실로 맞았는데 둘이 투쟁하던 끝에 치희가 달아났고, 유리왕은 말을 타고 좇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유리왕이 황조가를 짓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를 일으킨 사건을 전해주는 배경설화로서 이해되었다. 따라서 황조가는 치희라는 사랑하는 비를 잃어버리고 혼자 돌어오던 유리왕이 나무에 앉아 정답게 노는 꾀꼴새들을 보고 느낀 자신의 외로운 심정 (곧 치희에 대한 애모의 정에서 오는 것)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여기서 왕비 송씨의 죽음 이후의 시간적인 여유와 계절적인 배경 등을 고려하여 황조가 창작의 구체적인 시기를 이가원은 유리왕 4년 봄으로 잡았고, 이종출은 좀 더 시간적인 거리가 있는 것으로 계산하여 5년 봄부터 11년 봄까지의 어느 시기로 추정하는 등 창작시기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황조가가 서정시인가 서사시인가몇몇 논자들은 창작시기가 유리왕 시대라는 점 때문에 서정시로 보기를 주저하고 서사시로서 간주하려고 했다. 이명선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전체가 하나의 서사적인 것이란 전제하에 화희 ? 치희의 싸움은 종족문의 대립을 반영한 사건이란 점에서 황조가를 서정시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이가원 역시 서정시가 아니라 서사시라고 하였다.그러나 작품 자체가 순전한 서사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에서 이병기는 「원시적 서사문학 가운데서 축도 또는 기원의 요소적인 부분이 분화 독립하여 서정시로 형성」된 예 즉 서정시로 보았고, 김동욱은 「서사시 가운데의 삽입가요」로서 「한족과의 항쟁의 서사시 중에서 남은 노래」라 하였다. 장덕순은 서기 기원을 전후한 반세기를 서사시에서 서정시로 이향하는 과도기로 보면서 황조가 같은 서정시도 나타날 수 있고 구지가와 같은 서사시도 나타날 수 있는 시기라고 보았다.결국 황조가의 창작을 유리왕 시대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리왕 시대의 시대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며,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정시로서의 황조가의 문학적 성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유리왕의 시대를 과연 시화시대 또는 서정시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황조가의 창작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놓이게 된다.정병욱은 공무도하가는 서사문학에서 서정문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했는데 이와 같은 시대구분의 관점에서 본다면 황조가는 서정문학 시대의 작품인 것이고 따라서 신화시대의 인물인 유리왕의 작품이 아니라 작자불명인 짝을 찾는 서정시가 되는 셈이다. 조동일은 정병욱의 이러한 견해와 장덕순의 앞서 언급한 바 시대구분에 있어서의 「과도기」의 개념을 수용, 발전시키면서 그의 《한국문학통사Ⅰ》에서 황조가를 해석하고 있다. 조동일은 황조가가 원래 청춘남녀가 짝을 찾으면서 부른 노래라는 정병욱의 견해에 동의하고 또 그런 짝을 구하는 행사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 역시 인정하면서도 황조가를 유리왕과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고 있다. 황조가를 유리왕이 창작한 것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더라도 최소한 유리왕이 화희 ? 치희의 사건을 겪고 나서 이미 있어왔던 짝을 찾는 노래로서의 황조가를 불렀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려는 입장이다. 이 경우 유리왕과 황조가의 관계는 우연으로 돌릴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보면서 이를 시대적 배경과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그는 조금 앞서 발표한 《한국소설의 이론》에서 유리왕의 시대는 신화적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대로서, 전설 ? 민담의 시대로 이행해 가는 시기라 하였다. 신화시대는 주몽에서 끝난 것이며 유리왕은 신화적 능력을 가지고 주몽신화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할 뿐 계속해서 신비한 존재로 묘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유리왕이 겪은 고난 즉 예를 들어 부여와의 싸움, 화희 ? 치희의 다툼, 태자인 해명을 죽게 한 일 등 일련의 사태들은 자아와 세계와의 동질성이 상실되고 가직관이 흔들리는 데서 온 혼란이라고 보았다. 유리왕은 신화적 질서가 흔들리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사태들은 개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의 고독을 생각하며 일방적인 사랑의 노래」를 부른 것이라 하면서 「불러도 해결이 없는 노래이니, 이것이야말로 서정시가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국중대회로 유지되던 사회적 유대나 건국신화가 보장해 주는 질서가 흔들리면서, 건국 서사시를 대신해서, 노래 부르는 사람의 절실한 심정을 나타내기 위해 세계를 자아화하는 방향을 택해 서정시로의 길로 들어서면서 나타난 것이 황조가라는 것이다. 이는 고대문학(그는 둘째시대의 문학이라고도 표현했음)이 더 지속되기 어렵게 되고 새로운 시대의 문학(즉 셋째시대의 문학)으로 넘어갈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조동일의 유리왕 시대에 관한 해석에 동의하면서 황조가의 미의식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김학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학성 역시 황조가를 한편의 서정시로 보되 그것을 거기에 부수된 설화의 신화적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우선 황조가는 짝을 잃은 작자의 고독한 처지란 「현실적인 것」과 꾀꼴새처럼 정답게 지내야 하는 부부관계란 「이상적인 것」사이의 갈등에서 「이상적인 것」에의 추구가 좌절된 비장미가 표현된 작품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장의 근본적인 동인을 「신화적 숭고의 붕괴」에서 찾았다. 유리왕은 신화적인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신화적 능력이 좌절되고 파탄되던 시대의 인물로서 신화적 질서, 신화적 권능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일련의 제반사태에 (조동일이 앞서 지적한 부여와의 투쟁, 화희 ? 치희의 싸움, 해명태자의 살해)에 굴복하고 마는데 이를 신화적 질서와 권능에 의해 장엄하게 극복하는 「숭고」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 즉 신화적 숭고의 붕괴에서 비장미가 기인되는 것이라 했다. 결국 황조가는 신화적 질서와 권능이 이미 무너진 상황에서 신화적 질서를 추구해 보려는 유리왕의 지향이 본질적으로 비장적일 수 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서양중세사》기독교 중심의 중세 사회서론본론(1) 중세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2) 중세 교회의 부패(3) 중세 ‘기독교’의 권력 싸움(4) 중세 지배 이데올로기 도구 ① - 보편논쟁(5) 중세 지배 이데올로기 도구 ②- 종교재판, 마녀사냥결론서론은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서, 또는 이 사건을 추적해 가는 윌리엄 수도사와 젊은 제자 아드소의 활약상을 통해서, 중세사회의 기독교의 부패와 중세시대의 암흑기라 일컬어지는 사회적 배경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여 수도원이라는 곳을 통해 사회 모습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게 해준다.을 통해 중세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 기독교 중심의 중세 사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본론(1) 중세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1077년 그레고리 7세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황제와 성직자 서임권을 놓고 투쟁을 벌였다. 이 결과 황제 하인리히 4세(1050~1106)는 파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이라 한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곧 십자군원정 (1096~)이 시작되었고, 이 시기 교황권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약 2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럽에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로 교황권의 약화와 봉건제의 붕괴를 꼽을 수 있다. 세력이 약해진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의 대립으로 아비뇽 유수(1309~1377)가 발생하고, 유럽의 각 지방에서는 봉건제의 붕괴로 여러 가지 이단학파가 발생하여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의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양치기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시행하지 못하고 민중을 착취하며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탄압과 부패의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에서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민중의 억압, 이단논쟁 등의 세부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독선’, ‘권위’, ‘동성애’, ‘음모’, ‘억압’ 등 루드비히가 프리드리히를 거세하자 황제가 둘일 때보다는 하나일 때를 더욱 두려워한 교황 요한이 루드비히를 파문하게 된다. 그 해 5월 체제나 사람 미켈레의 주도 아래 열린 페루지아 소형제회 총회에서는 "완전한 삶의 본(本)인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신 삶의 길을 따르면서 사도들은 재산이나 봉물을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고 나선다. 몇달 후 12월 교황 요한 22세가 사도헌장 을 반포하며 "페루지아 총회에서 언급한 ‘사용'은 곧 '소유'라고 주장한다. 또 이듬해 11월 12일 를 제정하여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이단으로 몰게 된다. 얼마 후 1324년 5월 22일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황제가 을 반포하여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페루지아 총회를 지지하게 된다. 이유인즉 지상적인 권력을 가진 루드비히가 천상적인 권력을 가진 교황 요한 22세를 공격할 구실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단’이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신의 교리가 아니면 안되는 흑백논리. 이 것이 바로 중세사회가 부패하고 스스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내야 했던, 그래서 지식을 억압하고, 인간을 억압하고, 민중을 착취해야 했으며,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는 ‘이단’과 ‘마녀사냥’의 이름으로 과감히 살생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3) 중세‘기독교’의 권력 싸움기독교는 스스로의 이념을 권력화 하게 되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과도한 세력 확장을 위한 십자군 전쟁이후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응당 어느 체제이든 그 체제가 꺼리는 지식들이 있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 힘을 가진 자가 그 지식의 유포를 '금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권력의 본질은 중세사회에서도 그대로 들어 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 핵심소재인 인간 이성의 진리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에 관한 서적의 은폐와 그 은폐를 위한 살인이다. 그러나 '금지'가 영원한 법은 없다. 언젠가는 해제되고, 아니 파괴되고 갇혀 있던 지식들은 자와 재산에 대한 교회의 소유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새로 생겨난 탁발 수도회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은 그 소유를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오랜 기간 힘을 독점했던 교단은 영주권까지 겸해가며 황금을 쌓아갔고 이러한 상황의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4) 중세 지배 이데올로기 도구 ① - 보편논쟁에서 가장 주된 대립의 축은 기존 성직자를 대변하는 호르헤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딕트파와 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윌리암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프란체스코파의 대립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대립 대신에 철학적.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전개된다. 이것의 논쟁의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희극론이 끼어들고 있는 것이 이 이야기의 내용이다.베네딕트파에서 말하고 있는 단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식사 때 한 수도사가 '묻기 전에는 대답하면 안 된다. 웃어서는 안 된다. 품위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한 것. 또 호르헤 신부가 윌리암 신부와의 논쟁에서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며 이것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는데 두려움 없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면 등등. 반면에 프란체스코파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신앙에서 이성을 강조하며 웃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대립의 양상은 다만 철학적 논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논쟁에서의 프란체스코파가 승리한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 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베네딕트파는 끝까지 이 논쟁에서 양보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즉 기존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직자의 청렴을 주장하는 프란체스코파의 주장은 그것이 현실적이든 철학적이든 기존의 모든 교회 권력을 쥐고 이득을 보고 있는 주류 세력인 베네딕트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프란체스코파의 단기적 기간의 관점에서 패배를 어느 정도 예상하게 해준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의 수레바퀴가 정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프란체스코파의 승리는 보편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되는 실재론자들의 입장은 교회의 주류 세력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중세 주류 철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입장이 바로 유명론이다. 유명론은 "universalis post res" 즉 보편이 뒤따른다고하여 잘못하면 신의 개념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주장을 하게 된다. 보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이름뿐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신이라는 것도 개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러한 주장은 로스켈리우스와 아벨라르두스를 거쳐 윌리암 오컴에까지 이어져 중세 주류 철학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가했다.결국 역사에서도 아퀴나스)가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실재론적 입장이 중세 기간 동안에는 유지되었고, 중세가 끝나면서 유명론의 입장이 경험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은 결말에 대한 일종의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5) 중세 지배 이데올로기 도구 ② - 종교재판, 마녀사냥-종교재판(이단심문제도)수도원의 살인 사건이 미궁에 빠진 채 해결되지 않자 종국에는 종교심문관이 파견된다. 이 종교심문관에 대한 윌리엄의 반응은 냉담한데 그가 수도원장에게 하는 말에서 그러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종교심문관은 모든 정상적 관할에서 면제되고 통상법 규정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심문관에겐 특권이 부여되어 변호사의 말을 들을 의무마저 없습니다”중세시대 교회는 절대적이었다. 교회의 권한은 세속에까지 확대,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이 무렵 교회가 벌인 주요 사업 중 하나가 이단추방이었으며 이를 위해 종교재판이란 무시무시한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종교재판소를 설립하고, 그 운영을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맡겼다. 그 후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종교재판이 열렸으며, 숱한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어떻게든 이단으로 결론 내리고 그들을 단죄하고자 하는 베르나르드 귀는 우리에게 그 시대의 종교재판의 오류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종교재판제도는판이랄 수 있는 마녀사냥이라는 씻을 수 없는 과오을 불러왔다.-마녀사냥교회는 교회 밖에 있거나 교회 밖으로 내몰린 형제 아닌 사람들에겐 온 힘을 다해 싸움을 걸었다. 거의 200여년 간 진행되었던 여덟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회는 내부 결속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단 색출과 마녀 사냥이란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냈다. 이야기에는 화형에 처해지는 인물이 셋 있다. 그중 둘은 전직 돌치노) 수도사들이다. 이들은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교황을 인정하지 않고 혼교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해 이단으로 몰린 돌치노가 설립했던 수도회에 몸을 담았었다는 이유로 수도원에서 일어난 수수께끼 같은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을 받는다. 이들과 함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수도사들에게 몸을 팔았던 굶주린 소녀가 마녀로 몰린다. 당시, 이단과 마녀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여겨졌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이야기되었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체제, 하나님의 권위를 위협하는 마법을 금지하고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이중의 효과를 보기 위해 교회는 숱한 마녀들을 고문을 통해 조작했다. 그리고 군중들이 이들에게 화풀이하도록 선동했던 것이다. 굶주림에 지친, 나중엔 분노를 폭발시켜 이단 심판관의 마차를 뒤엎는 군중들. 전염병과 가축들의 돌림병, 흉년과 자연재해 따위의 숱한 불행에 괴로워하던 이들을 달래기 위해선 희생양이 필요했고 오랫동안 교회는 그 책임을 유대인에게 떠 넘겨 왔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던가, 빨리 병이 옮게 만들려고 문의 손잡이나 벽에 기름을 칠했다는 따위의 악의적인 조작이 계속되었다. 이것만으로 일반 대중들의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 때, 마녀가 희생양으로 등장한다. 특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천재를 겪을 땐, 폭풍우를 부르거나 가축을 몰살시킬 수 있는 마법을 소유한 마녀를 '억지로' 찾아내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으로 해결을 하려고 했다.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해 심판관은 개인간의 분쟁을 악마적 마법의 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