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식민적 전환을 꿈꾸는 대륙 “라틴아메리카”월터 D. 미뇰로,『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 : 식민적 상처와 탈식민적 전환』들어가며라틴아메리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왜 “라틴아메리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나 역시 역사를 전공했고,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내가 처음 세계사를 배웠을 때도, 가르치고 있는 지금도 라틴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대륙” 이다. 이 책을 접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던 나의 무지無知와 무관심에 적잖이 당황했다.신대륙이란 말 뜻 그대로 “새로운” 대륙 이라는 의미인데 그 대륙은 이미 사람들이 그들의 문명을 만들어 살고 있던 “존재하는” 대륙이었다. 이는 지극히 유럽중심적인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인들이 도착한 대륙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근대성을 가장한 식민성을 표출하고 관념화 하는 과정에서 마들어낸 “발명”인 것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표현을 한다. 스스로가 승자라고 여겼던 유럽인들이 스스로 세계적 보편성을 가졌다고 생각한 질서 속에 라틴아메리카를 끼워 넣었다.우선 이 책은 서구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식민성과 공존한다는 역사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국 듀크 대학 교수인 저자는 라틴아메리카라는 관념은 르네상스시기에 유럽이 만들어 낸 것이고, 산업혁명 시기를 지나면서 유럽 중심적인 사고가 확산됨에 따라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이 발명되었다고 본다. 르네상스시기와 식민주의를 통해 유럽에 첫 번째 근대성이 생겨났다면, 계몽사상과 산업혁명을 통해 두 번째 근대성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라틴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대륙의 남쪽에 가톨릭과 유럽의 문명을 이식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매우 폭력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라틴아메리카라는 이름이 갖는 종속성이 단순히 과거에 국한된 것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집중해 봐야 할 필요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의 자본주의가 가져온 근대성과 식민성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재도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과거 유럽인들이 개종의 대상이자 착취해도 좋을 노동력으로 인식했던 대륙의 원주민들은 현재도 서구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이끌려 다니고 있다. 그들의 눈에 라틴 아메리카가 가진 천연자원(아마존과 같은)과 노동력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 이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수탈 행위를 기독교 복음화와 세속적 문명화라는 미명하에 포장하고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 왔다. 저자는 라틴 아메리카가 유럽사회(그리고 미국)와 끈질기게 이어 온 사슬을 끊고 그들 내부에서 움트고 있는 식민주의적 인식에서의 탈피를 강조하고 있다.식민지 권력 매트릭스책의 1장에서는 식민주의, 아메리카의 탄생, 그리고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2장에서는 앞서 밝혔듯 유럽사회가 겪게 되는 두 번째 근대성이 생겨나는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라는 개념이 어떻게 확장되어 가는지를 풀어간다. 특히 라틴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3장에서는 앞으로의 ‘아메리카’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들 속에서 라틴아메리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근래에 들어 이뤄지는 지식인들의 움직임과 급진적인 정치, 사회적 운동을 통해 지향해야 할 바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겉으로 드러나는 식민주의(colonialism)는 1960년대에 들어 세계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식민성 (coloniality of power)은 여전히 남아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한 식민성이란 라틴 아메리카를 만들어 낸 권력의 식민성이다. 식민주의가 특정 국가(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미국)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행한 지배체제를 말한다면, 식민성은 특정 국가의 특징을 나타내기 보다는 근대, 식민 세계체제의 지배 논리 그 자체를 뜻한다.16세기 멕시코와 페루가 정복당한 이후 현재까지 라틴 아메리카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 주체와 규모는 달라졌을지언정 그 권력이 가지고 있는 식민성은 변하지 않았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로 대변되는 현재의 권력구조의 사슬을 끊고 라틴아메리카만의 자립적인 발걸음을 유도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대표적으로 탈식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 역시 유럽 중심의 보편적인 사고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집어내는 통찰력을 보인다.또한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타문화에 편파적인 시선과 식민지배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메리카의 “발견”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했다. 저자의 주장은 유럽의 근대성은 계몽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아메리카의 침략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역사 인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직적이고 연쇄적인 역사적 관점을 타파하고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역사적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라틴 아메리카로서의 라틴 아메리카 : 회복의 시도유럽 중심의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대립하게 만들었다. 그에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더 이상 식민지적 권력구조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체제는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할지라도) 매우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온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이 이 책을 통해 한 번에 바뀌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 수 는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과거 에스파냐의 페루 통치를 격렬히 비판했던 17세기 원주민 연대기 작가인 과만 포마의 족적, 19세기 초 아이티의 독립과 독자적인 나라 이름 짓기, 아마우타이 야시(원주민상호문화대학) 등의 여러 사례들이 저자의 행동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또한 이러한 움직임 외에도 라틴 아메리카 내부에서도 식민지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 역시 중대한 일이다. 유럽 중심의 패러다임을 비판하기 위해서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사회적 움직임이 이뤄지고 있다. 그 중 시선을 끄는 한 예는 바로 2006년 당선 된 볼리비아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의 존재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변화에 있어서 배제되어왔던 원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유럽중심의 세계관을 탈피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발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모랄레스 대통령은 “신 자유주의 없이 잘 살기”를 표방하며 서구 유럽중심의 경제체제와 개발 계획에 반대했다. 라틴 아메리카만의 “잘 살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에 서구의 진보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냐시오 라모네는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의 당선을 두고 원주민 운동이 좌파 세력에 흡수되는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저자는 이냐시오 라모네의 그런 시선을 비판했다. 에보 보랄레스의 집권은 유럽 중심의 좌파와는 전혀 다른 행보이고 그 자체는 서구 유럽 중심적인 좌파, 우파의 기준과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서구의 자본주의, 그리고 그에 대항한 좌파 논리가 팽배한 가운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이 주체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사건 자체가 주목할 만한 일 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모랄레스의 등장이야말로 라틴 아메리카가 진정한 의미의 탈 식민화를 시도 할 수 있게 하는 초석이라고 생각했다.‘아브야-얄라’ 진짜 이름을 찾아서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뇌리에 오래 남는 부분은 원주민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역설했던 파농의 저서 『검은피부, 하얀가면』을 의 서두를 재인용하자면,“ 말을 한다는 것(여기에 쓰는 것도 덧붙일 수 있다)은 특정한 구문론을 사용하고 하나의언어의 어형론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무엇보다도 문화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문명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 선 통 신 사1. 들어가며2. 에도이전의 조일관계3. 통신사의 재개4. 통신사 행렬5. 통신사를 통해 진행된 조일문화교류6. 통신사 폐지와 그 후7. 마무리1. 들어가며한국과 일본은 2000여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깊은 관계를 맺고 지내왔다. 각자의 역사에서 서로를 완전히 분리시키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긴 시간동안 교류를 했던 두 나라는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작한 두 차례의 침략전쟁으로 그 이전부터 이어오던 교류의 끈은 끊어졌다. 하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다시 교류를 시작했고, 전쟁 이 후 200여 년간 그 교류는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통신사에 대해서는 조선과 일본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 신의와 교린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고 조공사절이나 사대대행으로 보기도 했다. 양국의 평화와 문화교류의 상징으로서 통신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재평가를 통해 우호적인 한일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다.2. 에도이전의 조일관계한반도의 여러 왕조와 일본의 왕조들은 중국의 중화사상의 틀 안에서 책봉과 조공을 통해 외교관계를 맺었다. 1368년 중국의 주원장이 원(原)을 몰아내고 한족왕조인 명(明)을 건설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선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했고 조선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중화체제 안에 속하게 되었다. 일본은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의 상표입공(上表入貢)에 응해 명과 책봉관계를 맺는다.조선왕조는 그 이전부터 왜구(倭寇)문제로 일본에 빈번히 사절을 보냈으나 당시 사절은 천황(=公家)이 아닌 무가(武家)의 장군에게 갔다. 무가권력이 외교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이들이 봉건영주로서 더 큰 세력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이것은 앞으로 조선시대에 이뤄지는 조선통신사와의 외교체제 역시 공가(公家)가 아닌 무가(武家)가 수행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그동안 아시카가는 외교권을 독단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지만, 결국 명황제의 책봉을 받게 된다. 책봉은 받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일본국왕의 작을 받고, 이후 조선으로부터의 사절이 가져오는고 본다.무로마치시대의 조일관계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두 나라의 교류가 중앙에만 국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앙보다는 서일본의 지방세력, 유력상인, 대마도가 먼저 조선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대마도의 경우엔 매우 특별한 관계가 조성되어 있었는데, 조선왕조 일종의 포섭정책의 일환으로 대마도에 여러 특권을 부여했다. 조선의 관직을 하사해 수직인(受職人), 수도서인(受圖書人)이라 부르고 사품을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두 나라의 서일본정권, 대마도, 유력상인, 일본국왕을 통해 각자가 독자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통신사(通信士)라는 용어는 조선과 일본의 신의와 교린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미 고려시대에도 통신사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었으나, 조선초기의 사절은 일본사절에 대한 답례사절인 회례사(回禮使) 혹은 보빙(報聘使)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단어 자체에서 보이듯 두 나라의 신뢰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닌 통신사는 세종대에 이르러 3회의 일본방문을 한다. 세조와 성종대에 3회의 통신사를 파견하나 사고로 인해 일본에 도착하지 못한다. 이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된다. 무로마치시대의 통신사 파견의 답례로 일본에서도 사절이 조선으로 오게 되었는데, 일본국왕사로 기록되어 있다. 국왕사는 보통 교토 고잔 등의 승려들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한자와 한시문에 능했기에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 대장경등의 불전과 불구를 요청한 목적도 있었다. 무역의 이득은 물론, 안전한 항해길을 위해 유력상인의 협력을 얻기도 했다. 15세기부터 1587,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던 선조 22년까지 총 60회의 일본국왕사가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다. 두 나라가 선린의 교류를 시작하게 된 물고를 튼 것이 아시카가 요시미츠였다면, 비용부담은 교토 고산등의 사찰에서 부담했고, 그 목적은 불전 불구의 회득과 무역의 이익이었던 것이다.3. 통신사의 재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중국을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기 이 침략전쟁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바로 대마도였다. 당시 대마도주는 개전의 선봉에 나설 것을 명받았다. 평소라면 교류와 교역의 장이었을 대마도가 최전선의 보급로가 된 것이다. 전쟁 이후에도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미 대마도 사람의 일부가 한반도 남부에 교역을 위해 거주하고 있었지만 전란으로 인해 그 창구가 닫히게 되었다. 또한 조선국왕으로부터 매년 하사받던 쌀, 콩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대마도는 중요한 식량자원을 잃게 되었다. 전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절로서 조선에 강화의사를 전하기도 했다.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언제까지나 일본으로의 창구를 닫아 둘 수는 없을 노릇이었기 때문에 여러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화해를 하고 무역을 재개한다면 일본의 재침략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논의 끝에 선조는 정보수집과 강화제의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사명대사와 그 이전까지 대마도의 교섭을 담당했던 손문욱을 탐적사로 대마도에 파견하기로 했다. 사명대사는 교토에서 이에야스를 직접 만나 통교재개를 하게 된다. 이때 전쟁 중 잡혀갔던 천여명의 피로인이 고국으로 돌아갔다.사명대사의 보고를 받은 조선조정은 이에야스에게 사죄의 국서와 왕릉의 도굴범을 잡아 보내라는 조건을 건다. 일본측(대마도)은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두가지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너무 빨리 국서가 도착해 이것은 속임수라 간파했지만 이미 일본에 신사(信使)를 파견하려고 결정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강화를 진행시켰다. 전후 초기의 사절단의 이름은 회답겸쇄환사였다. 이 후 이 이름으로3회의 사절이 일본을 방문한다. 일본국내에서는 이 사절단을 입공(入貢)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절단을 신뢰의 교린관계로 받아 들였다.최초의 쇄환사는 조선 국왕의 회답서를 이에야스에게 전달하는 업무로 일본을 방문했다. 피로인의 송환과 교린관계를 돈독히 하고 일본의 국정을 탐색하는 업무였다.1636(인조14)년 당시엔 북방의 후금이 조선을 위협하던 시기였으므로 조선은 ‘야나가와씨가 소던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의 피로인 송환도 의미가 없었기에 쇄환사의 이름도 사용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 대마번의 요청대로 원래의 명칭인 통신사를 사용하기로 한다.이로서 에도시대에 통신사는 다시 재개되고 전쟁 이후 부활한 최초의 통신사는 조선사절 478명로 구성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초청으로 그들은 닛코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소를 유람하고 이에미츠로부터 금전, 은대자, 제구, 비단옷의 선물을 받았다. 이에미츠의 요청으로 이후 2회에 걸쳐 통신사가 이에야스의 묘소를 방문한다. 사절들은 이에야스의 묘 앞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고 한국어로 된 제문을 낭독했다.4. 통신사 행렬조선통신사는 원칙적으로는 조선의 국왕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로 정사, 부사, 종사관의 세 사신은 중앙의 관리로 임명했으며, 그 파견의 목적은 대부분이 장군습직의 축하였고 그 일행은 300~500여명에 달했다. 일본에서 장군의 습직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조선에 그 사실을 알리고, 곧이어 통신사파견을 요청한다. 예조에서 논의한 후 부산의 왜관을 통해 다시 대마도에 파견사실을 알린다. 통신사가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면 부산에 대마도에서 파견된 신사영빙차왜가 그들을 대마도로 안내하고 이어 대마도주의 안내로 에도까지 향하게 된다.서울의 창덕궁에서 조선 국왕으로부터 임무와 국서를 받아 출발을 해 부산으로 향한다. 부산으로 가는 도중 충주, 안동, 경주, 부산의 4개소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나 후에 부산 한곳에서만 연회를 베푼다. 부산까지는 대략 2개월정도가 소요되었다. 부산에서는 통신사의 일행이 모두 모여 일본에 증정할 토산품을 모으고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이 때 준비하는 선물은 도쿠가와 뿐 아니라 에도까지 신세를 진 다이묘나 사찰에도 주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6척의 선단으로 이동하고 대마도에서 몇 주간 체류하며 배를 보수하고, 하물을 점검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마도에서는 대마도주와 함께 오사카까지 바닷길로 이동한다. 아이노시마를 들러 아카마가세키(지금의 시모노들르는 곳 중 하나였다. 효고를 거쳐 오사카로 도착해서는 일본이 제공하는 호화선으로 갈아타고 많은 교류를 나눴다. 교토에서는 육교로 이동하게 되는데 교토의 많은 사찰에 당시 교류한 유물들이 남아있다. 히코네의 길은 지금까지도 조선인의 가도(街道)라고 불리운다. 오가키는 통신사행렬과 연관된 마츠리가 남아있고, 후에 나고야에 도착한다. 순푸(지금의 시즈오카)는 첫 번째 사절단이 왔을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머물던 곳이였다. 세이켄지와 후지산에 당도하면 통신사들은 좋은 경치를 즐기며 한시를 읊었다. 당시 통신사들이 남긴 시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하코네에는 일행이 남긴 글씨가 편액으로 걸려있고, 하코네를 지나면 에도에 도착한다. 에도성에서 국서를 전하는 의식이 행해지고 당시의 그림을 보면 통신사가 지나는 길마다 구경꾼이 넘쳐 난 것을 알 수 있다.하네가와 도에이 [조선통신사래조도], 일본, 고베시립박물관소장18세기 조선통신사행렬을 환영하는 현지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에도에서는 짧게는 12일에서 20-30일가량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연회를 베풀고 빙례를 한다. 조선국왕의 국서가 전달되면 이어 도쿠가와 장군으로부터 회답국서와 조선국왕과 사신들에 대한 갖가지 예물들의 목록이 온다. 예물은 물품이 갖춰지면 성내에서 장군이 직접 살피고 통신사의 귀국인사는 로주가 객관을 방문할 때 이뤄진다. 공식적인 행사 외에도 마상재공연도 있었다.당시 에도에는 통신사가 오는 것을 준비해 소실된 가옥이나 다리, 마을의 문 등의 공사를 하고 특히 방화에 주의했다. 특이한 것으로는 통신사가 올때는 에도에서 몇가지 업종들이 제한되었는데 대충목욕탕은 통신사가 입성하고 귀국하는 날은 휴업하고 체류중에는 오후4시까지 영업을 종료해야 했다. 생선가게는 도착일과 귀국일에 아침부터 낮까지 휴업하고, 만담 인형극 등 사람들이 모이는 업종은 도착 전날 밤부터 체류하는 내내 휴업해야 했다. 이발소도 야간에만 영업하고 불을 사용하는 업종은 오후 6시면 휴업했다. 이러한 조치들이 통신사측에 청결하고 빈교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