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추장이 안개 낀 푸른 초원을 달리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 정신 병원이 감옥보다는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던 맥 머피는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고, 보이지 않는 병원 내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도망가려고 할 때 간호원에게 끌려가 전기 치료를 받고 결국은 무력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바로 미셸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고 말이다.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 맥 머피가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지만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며 정신 병원으로 들어간다. 자유로운 삶으로의 도피(逃避)라고나 할까. 그러나 병원 내의 시스템은 그렇지 않았다. 그 곳의 환자들은 비록 정신병자의 취급을 받지만 실제로는 미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그들은 병원 내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죽은 인간과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추장이라는 인물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벙어리로 알고 있다. 나는 왜 『광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이 영화를 생각해냈을까. 책 속에서 미셸푸코가 설명하고 있는 광인(狂人)의 모습이 실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흡사하다. 자의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생활을 하지만 늘 감시당하고 규율대로 움직이는 자유가 억압된 생활, 그 속에서 미치지 않은 자도 점점 미치게 되는 비극적인 삶을 통해 광기란 무엇이고 또 그 속에 존재하는 권력의 구도를 생각하게 된다.그렇다면 광기를 지닌 광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책에서 말하는 광기의 증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는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자기집착과 낭만적 동일화(허망한 망상(妄想)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즉 현실과 멀리 있는 것들을 스스로에게 반영한다고 생각되어 진다), 공허(空虛)한 가정(이것은 낭만적 동일화와 비슷한 것 같은데, 자신에게 결여된 모든 자질들이나 덕, 또는 힘들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필사적인 정열(이 책에서는 사랑을 예로 들고 있罪)의 근원이 되는 칠죄종을 인간의 내부에 있는 나쁜 것이라고 정의(定意)를 내려보자. 칠죄종의 내용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교만(驕慢), 재물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인색(吝嗇), 성적 쾌락의 무질서로부터 오는 음욕(淫慾), 복수하고자 하는 무절제한 욕망인 분노(憤怒), 과음이나 과식으로 건강을 해지는 탐욕(貪慾),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질투(嫉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싫어하는 나태(懶怠) 이렇게 일곱 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인간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反)하는 말이기는 하나 사실상 이러한 성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단지 그 정도의 차이가 어떠하냐에 따라 우리는 흔히 선하다, 혹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인을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윤리적 잣대는 없으며 광인을 일반인과는 다른 부류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나의 견해일 뿐 실제로 이 책에서 말하는 광인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음과 같이 변화해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인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 곧 지식이 변했다고 할 수 있다.1627년 나환자 수용소가 소멸하게 된다. 이것은 의학적 노력의 결실이 아니라 격리(隔離)수용에서 생겨난 우연한 결과라고 이 책에서는 말한다. 나환자 수용소는 사라졌지만 광인에 대한 의식(ritual)은 남았다. 나병을 극복하기 위한 의식이 아니라 나병과 신성한 거리를 유지하고, 나병을 저주 속에 묶어두기 위한 의식(儀式)이었다. 한 마디로 광인은 윤리적 결함이 있는 존재로 격리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격리가 갖는 의미는 신성한 집단에 소속되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그 집단에서 축출되지도 않은 두렵고 고집스러운 모습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이라고 한다.그러나 몇 세기 후 광인에 대한 인식이 변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공식화가 되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광인이 공식화가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광기를 새롭게 인식하게 죽음 이상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이다.광기가 질병은커녕 오히려 특별한 재능(才能)으로 간주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단지 부분적인 지식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으나, 광인은 지식을 깨지지 않은 완전한 공처럼 원형 그래도 지니고 있었다.”라고 푸코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푸코는 광기를 동양의 신(神)처럼 완전한 지식에 곧바로 다가갈 수 있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그 시대에 광기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신성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중세에는 광기를 악(惡)으로 분류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적인 약점의 무리들을 광기가 이끌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광기라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流動性)이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다.광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감금’이라는 키워드는 빼놓을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기가 가진 폭력은 금지되었어도 광기를 표현할 수는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광기는 이상한 강제력에 의해서 표현까지도 금지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한 강제력이 바로 권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7세기 동안 많은 수용소가 생겨나면서 1656년 파리시에는 종합병원을 건립하라는 칙령(勅令)이 발표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종합병원은 지금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까지 말 한 보이지 않는 이상한 권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종합병원은 왕이 경찰과 법정 사이에서 법률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수립시킨 이상한 권력, 말하자면 제 3의 억압체계였고, 추방이라는 매우 소극적인 조치가 감금이라는 적극적인 조치로 대체된 것이라고 푸코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광인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주도적이거나 직접적으로 가한 압력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소리 없이 사회로부터 단절시켜버리는 그 무서운 압력의 체제가 격리라는 단어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한 감금이 아니라 그 사회의 이익을 반영하는, 그래서 감금이라는 것 자체를 정당화 시킬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누구도 그것에 대해 쓴 소리로 접근할 수 없게 만든 것이 바로 권력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감금은 17세기에 고유한 창조적인 제도적 고안(考案)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중세의 감금과는 무관한 그리고 완전히 구별되는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경제적 조치, 사회적 보호책이라는 장치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이성의 역사에서 이것은 결정적인 사건이다. 즉, 사회적 지평에서 광기가 빈곤, 노동 불능, 체제 내 통합 불가능성이라는 특성에 의해서 파악된 순간이며, 광기가 도시의 한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한 순간이다.”라는 푸코의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되어준다.종합병원의 탄생과 영국과 독일에서의 교화소의 탄생으로부터 18세기 말까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각 도시에서는 모든 종류의 광인들을 발견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을 격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주지해야 할 것은 푸코가 말했듯이 광인들이 실제로 감금 가운데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에서 본다면, 감금은 추문을 피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서 설명되거나 적어도 정당화 될 수 있다. 반대로 감금은 비인간적인 자로 하여금 수치심을 갖게 하는 양심에 대한 일종의 배반이다......가장 미약한 정도의 광기는 도덕적인 비이성이었을지라도, 극단에 이른 광기는 더 이상 도덕적인 비이성이 아니었다. 이 극단에 이른 광기는 강한 발작이라는 개념의 매개에 의해서 동물성이 지닌 직접적인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동물성(動物性)’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푸코는 감금으로 인하여 광인을 동물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말했듯이 고전주의 시대의 감금수용소의 비참함은 결국 권력의 의도 및 기술과 관련이 있으며, 광인의 감금을 의도하는 권력은 광인의 감금의 근거로서 ‘동물성’을 주장하고, 그것에 대한 보증으로 비인간적인 감금장치를 권력의 기술로서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 ‘동물성’여러 번 나온다(마 12:22, 눅 11:14, 마 9:32-33, 마 15: 21-28, 막 7: 24-30, 눅 13: 10-17). 귀신들린 자가 바로 광인과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감금의 시대의 논리로 따져본다면 도덕적인 비이성을 넘어선 동물성을 가진 광인을 격리시키기 위해 피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야 했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들에게 다가가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 시대의 권력의 사상은 반(反)기독교적인 윤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러다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광기가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규정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광기의 여러 형태들로 조증과 우울증, 히스테리와 히포콘드리아 등을 말하고 있다. 광기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바뀐 것은 19세기에 정신분석학이 발달한 덕분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광기를 정신 질환으로 취급하여 광인을 정신병원에 수용이 아닌 입원을 시키고 치료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실도 마찬가지로 광기라는 인식이 그 시대에 통념적인 지식, 즉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변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이렇게 시대를 넘나들며, 혹은 동시대에서 조차도 광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판이하게 다르며, 그것이 지식이자 권력과 연계 된 사회적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광기가 권력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오래 전 이청준씨가 쓴 소설 『소문의 벽』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박준’이라는 사람은 작가이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인데 언젠가부터 이 사람은 글쓰기를 그만두고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사람을 미치게 한 요인을 밝혀내는 것이 소설 속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그 내용은 사실 놀라운 것이었다. 비록 내가 작가가 아니라서 경험 해 보지는 못한 것이지만, 작가에게도 억압을 하는 제 3의 요소가 작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작가를 말할 때 작가와 사회, 작가와 독자, 이렇게 두 가지 구도를 놓고 생각 할 수 있다.것이다.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이 책을 많은 크리스천들로부터 추천을 받은바 있다. 그래서 이번 강의의 레포트가 책을 읽게 된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No 데이팅을 읽기 전에 두려움이 앞섰다. 내 친구 중에 믿음이 아주 신실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No 데이팅을 읽고 사귀던 남자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나도 지금 이성교제를 하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내가 이 책을 읽고 많은 갈등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과는 역시 그랬다. 이 책에서는 이성교제에 대해, 그리고 남녀 관계에 대해, 더 나아가 결혼에 대한 문제들까지도 아주 세세하게 집어주고 있다. 그 내용이 성서에 바탕을 한 것이기에 읽는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더 큰 갈등을 만들어 낸 것도 사실이다. 내가 지금까지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이 책에서는 마치 아픈 부분만 콕콕 찌르듯이 들춰냈기 때문이다.헌신에 대한 약속이 없는 만남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강조를 하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때를 기다리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수많은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만나고 너무 쉽게 헤어진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반복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맺어지기도 힘들며 끊어지기도 힘든 것인데 그런 것을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인위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너무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헌신이란 무엇일까. 내가 지금의 남자친구에게 헌신이 뭐라고 생각 하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대답했다. “난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네가 하라고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과연 그런 것이 헌신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에 맞춰진 명분(名分)에 불과한 것이다. 조슈아 헤리스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이기심이 아니라 성실함으로 상대방에게 오랫동안 희생할 수 있다는 마음의 약속이 있는 것이 헌신이라 말하고 있다.이 책에서는 필자가 여러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이해가 쉽도록 도와주는데, 가장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불완전한 데이트의 7가지 습관에서 데이트는 다른 중요한 관계들로부터 두 사람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나의 주변에도 이와 같은 상황들이 자주 벌어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C.C.(Campus Couple)인 친구들을 보면, 그들은 항상 둘이 붙어 다닌다. 수업도 같이 듣고 밥도 같이 먹고 심지어는 같이 살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저러다가 둘이 헤어지게 되거나 남자가 군대를 가게 되면 서로가 어떻게 생활하게 될까’ 하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곤 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해서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은 좋지만 너무 다른 동료들과는 동떨어져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인관관계가 소홀해 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는 친구의 남자친구가 군대에 입대를 하자 그 친구는 거의 혼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늘 함께 다니던 남자친구가 옆에 없자 쓸쓸해 보이기도 했고 주변에서도 사람들이 그 친구를 보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참 안타까웠다. 그 친구는 자신이 미처 그럴 줄 몰랐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성교제를 하고 있지만 주위의 친구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노력중이다. 다행히도 나의 남자친구는 다른 학교이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서로는 각자의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 처음에는 다른 C.C.들처럼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불만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니 더더욱 그렇다.인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책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비 그리스도인의 사람들이 읽었다면 더더욱 그랬을 거라 생각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 5:28). 이 말씀과 같이 필자는 참된 순결을 위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죄와의 타협을 금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나는 속으로 ‘아멘’을 외쳤지만 인간에겐 본능 즉 성욕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많은 성 전문가들(의사, 심리학자 등)은 자위행위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며 적당히 하는 것은 좋다고 한다. 그러나 자위행위를 하면 음란한 생각을 하게 되고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 된다. 참된 순결을 가지고 살아가기란 정말 각고의 노력을 요하는 것이다.이렇듯 내가 No 데이팅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했던 마음들이 Yes 데이팅을 읽으면서 풀어졌다. Yes 데이팅은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방법,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중심에 설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목적 있는 관계를 추구하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결혼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연애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보기 드문 일이다. 연애는 해도 결혼은 안한다는 사고방식이 더 많이 보편화 되어 가는 사회에서 나에게 주어진 때를 기다리며 결혼할 목적이 생길 때 까지 연애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무척 힘이 드는 일이다.또한 입술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대화’라고 하면서 서로간의 진실 된 대화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연애에 있어서 혹은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별, 이혼과 같은 헤어짐의 원인은 대화가 부족해서 이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대화로써 풀어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말하기’에만 열중하지 ‘들어주기’에는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대화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귀’라고 하면서 남의 의견을 듣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이 책에서 제시한 성적 정체성을 찾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한 내용은 모두가 필히 알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요즘 시대에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그릇된 행동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 그리스도인들이 본다면 잘 이해가 안가겠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를 새삼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그리고 크리스천 남자들을 형제로 보라는 부분에서 나는 속으로 뜨끔했었다. 교회에 가면 많은 크리스천 남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나와 나이가 비슷한 또래들을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들은 성스러운 믿음 안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하여 확실히 느끼게 되었다. 나도 이제 크리스천 남자들에게 자매가 되어 친구사이 그 이상이 되지 않도록 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 동반자가 되도록 해야겠다.그리고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무분별한 성문화를 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왜 성욕을 느끼게 하시어 인간이 쾌락만을 느끼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죄를 짓게 하셨을까 의문스러웠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해답이 이 책에 명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한 과정을 재채기같이 재미없는 일이 아니라 불꽃놀이보다 더 뜨겁고 재미있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부부의 섹스는 기쁨이 넘치는 두 사람만의 예배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더글러스 존스가 한 말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전도(顚倒)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성행위를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로 만드셨고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주셨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선물인 성적 욕구를 쾌락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죄를 범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하나님의 이러한 의(義)를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나는 지금까지 많은 남자를 사귄 것은 아니지만 몇 명의 남자들과 만나면서 뚜렷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이 끌리면 만나고 그렇지 않으면 만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제는 나만의 확실한 연애관을 성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선 나는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와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야겠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 있어 후회할 만한 과거를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혼전순결에 대해서 그다지 옹호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리고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혼전순결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와 돌이켜보니 내가 정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을 내가 안 이상 그런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세계화라는 개념에 대해서 혼란스러움을 느낀 경험이 있다. 대학 입학 면접에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주어졌다.“점차 세계화시대가 빠르게 진행 되고 있는데, 각 국가들 간의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서 전 세계 공용어를 영어로 하는 것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나는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까지 세계화란 지구촌이라 불리는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하게 영향을 주고받아 생기는 현상이라 생각했는데, 질문에 의하면 세계 공용어를 지정해야 한다면 영어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서양 중심의 세계화를 묻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세계화가 ‘전 세계의 서양화(미국&유럽화)’라고 지칭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흔히 ‘세계화’라고 일컫지만 그 속에는 절반 이상이 서구 중심의 문화 우월주의가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늘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따라서 약소국가들은 강대국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중세 ‘야만’ 유목민족이었던 몽골제국이 ‘문명’ 농경 국가를 정복하고 다시 해양 세계까지 장악함으로써 지구적인 규모의 거대한 정치 조직을 이룬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렇다면 세계화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언제부턴가 우리나라에서는 ‘세계화’라는 말이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지금도 세계화라는 말은 입버릇처럼 사용되고 있다. 문화적 교류니, 화합이니 하는 말들은 수없이 많이 들어왔고 그런 것들이 막연하게 세계화라고 인식되어져 왔다. 그렇다면 세계화란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 말일까. 세계화의 사전적 의미는 ‘세계적으로 되거나 되게 함’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빠진 것은 바로 ‘무엇이’에 해당하는 주체이다. 과연 무엇이 세계적으로 되는 것을 세계화라고 말하는 것일까. 현택수 교수님의 저서에 보면 그것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세계화란 ‘근대 국가들이 국경을 초월하여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문화 등의 분야에서 전 세계적 국의 경계가 모호해 지면서 교류가 활발해지면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가 올 것만 같다. 세계화가 될 수록 우리나라도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크게 성장할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우리가 흔히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외국어 공부를 두루 하자고 하면서 영어공부만 유독 열심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화란 동전의 앞, 뒤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세계화’라는 전 지구적, 전 인류적인 현상에 대해 방관하기보다는 장점과 단점을 바로 알고 넘어가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세계화가 서양 중심의 문화 이기주의가 되는 경향이 있다. 세계 제 2의 공용어를 영어로 칭할 만큼 영어권의 나라는 우세함을 과시하고 있고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도 다른 국가들 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런 것들이 세계화의 악영향이라 하겠다. 그러나 중세 도시 사마르칸드의 종지부를 찍은 장본인은 거대한 세력을 가진 몽골인들이 아니라 그 도시를 도읍으로 삼고 엄청난 건축물로 채워 놓음으로 문화의 처음을 장식한 약소국가 티무르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따라서 세계에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이끌어 가야하는 것이다. 즉 세계화라는 흐름에 묻혀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세계화로 향해 간다는 것이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듯 좋은 것만을 가져다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계화’라는 피할 수 없는 과제 앞에서 최대한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최소화 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세계화의 영향에 대해 기술해 보려 한다. 세계화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주권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 교환, 재구성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국가들의 교류와 교역이 극대화 되는 반면에 각 국가간의 문화정체성이 쇠대로 세계가 하나의 집처럼 좁아지면서 통신이나 네트워크의 발달로 정보의 이동이 신속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강국이라 불릴 만큼 인터넷 문화에 심취되어 있다. 이 현상은 앞으로 더 증대 될 것이다.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웹 사이트에서 서핑을 한다는 교수님의 표현이 절묘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국내의 정보 뿐 아니라 해외의 정보들까지 원한다면 가질 수 있다. 웹상에서는 이동 또한 자유롭다. 그것으로 인해 각 나라간의 정보를 쉽게 습득하여 생소함을 줄일 수 있고 인터넷 문화를 서로 주고받으며 이질감을 감소시킬 수 있다.특히 대중문화의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이익을 많이 증진시켰다고 본다. 두말 할 나위없는 ‘한류열풍’은 이제 하나의 고부가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교수님의 저서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나라의 연예사업은 적절한 시기 때문에 중국 등 몇몇 동남아 국가들에게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주목 할만한 것은 교수님의 저서에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듯이 한류열풍의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문화의 특수성과 혼합성, 다양성이 인정되는 추세에 한국문화가 어느 정도 특수성과 보편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세계화라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을 놓고 보았을 때 특수성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특수성이란 개별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것에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라는 의의는 희박해진다. 따라서 특수성 외에도 ‘보편성’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세계화라는 명목아래에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가장 이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의 좋은 문화를 쉽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다소 생소한 문화들, 그리고 틀에 박혀 있는 관습들로 인해 우리가 더욱 관심가질 수 있는 것에서부터 멀어지게 한다. 예컨대 교수님께서 한 여름 밤 호주 멜버른에서 경험하셨던 클래식 음악 연주회와 오페라 공연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클래식과 오페라와 같은 고전 장르의 음악들은 매우 고람을 한다. 그러나 외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쉽게 느끼는 고정관념과 일상을 깨뜨리고 좀 더 자유스럽게, 편안하게, 그리고 대중적으로 확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지 못한 부족한 면들을 외국의 것을 수용함으로 인해 조금 더 진전될 수 있다면 세계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안겨 줄 것이다.그리고 상호 의존이 심화되면서 각 국가 간의 평화 의식이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무력에 의한 갈등이 감소하게 된다. 또한 힘을 모아야만 해결할 수 있는 환경문제라든지, 인권문제를 해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하는, 인문사회학적 부분에 있어서 낙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그러나 부정적인 견해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후진국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세계화라는 것이 선진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세계화로 인해서 자유 시장경제체제가 세계적인 부를 증진시킨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이야말로 사회적 부를 가져오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부의 공정하고 효율적인 배분이 실현된다고 하였다. 여기까지 보면 세계화의 긍정적 기능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진전이 가져오는 현실상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가 독점단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자유방임주의는 흔들리고 말았다. 결국 시장 경제에서 보면 세계화는 선진국에게만 유리한 것이 된다. 후진국의 경제발전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결국엔 후진국이 선진국에 종속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즉, 고대 사회에서도 그랬듯이 자연스레 계층이 생기고 거기에 따른 분쟁과 갈등이 증대 될 것이다. 그 예는 우리가 쉽게 접하게 되는 것들이다. WTO에서 우리나라 농산물 시장의 개방을 요구함에 따라 우리나라 농민들의 피해는 막심하다. 수많은 농민들이 투쟁을 를 개방하면서 우리 문화에 악영향이 적지만은 않았다. 일본의 문화는 선정성과 폭력성의 정도가 강해서 많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이지메(집단따돌림-왕따) 등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게 했다.그밖에도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한 해외 문화의 대량유입은 각 국의 특수성을 약화시키고 문화의 계층화를 발생시킨다. 그 예는 교수님의 저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스크린 쿼터제를 놓고 계속되는 영화인들의 투쟁이다. 스크린 쿼터제가 폐지된다면 한국 영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상업성이 강한 미국 영화에 우리나라의 영화가 아직은 역부족이기 때문이라고 명시되어 있다.그리고 세계기업(world enterprise)이라고도 하는 엑슨 ? 셸 등의 석유 회사나, GM ? 포드 등의 자동차 회사, 그리고 IBM 등과 같은 회사들로 대표되는 다국적 기업(multinational corporation)들에 의해서 단일화된 상품이 보편화 되면 다른 회사의 제품들은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이것은 즉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생존방식이 ‘세계화’라는 포장지에 예쁘게 포장이 되어 있는 셈이다. 선진국에서 봤을 때 후진국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발판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세계화란 선진국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원리 현상이란 말이 된다. 그것으로 인해 다수의 약소국가들은 각 국의 문화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다. 마치 술에 물탄 듯 ‘세계화’라는 흐름에 묻혀 자국의 문화 정체성이 흐지부지 해 지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교수님의 저서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문화 개방과 세계화 현상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 상황에서 대다수 문화 약소국들은 자국의 문화정체성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하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세계화 자체는 현 국제사회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세계화 현상을 기피한다면 우리나라는 국제 사회에서 매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다.‘세계화는 다양성과 다.’
- prologue시원스런 스윙소리와 함께 하늘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바라볼 때 골프의 매력을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골프를 해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참 멋있고 깔끔한 스포츠라고 생각했었다. 얼마 전 온라인 게임으로 골프를 한 것으로 골프의 전반적인 룰이나 과정을 대충 눈에 익히면서, 직접 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찰나에 ‘베가번스의 전설’이라는 골프와 관련된 영화를 보게 되어 개인적으로 반갑고 기쁘게 생각한다.스포츠와 관련 된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골프를 소재로 한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골프라는 스포츠의 역사가 다른 스포츠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왠지 골프라고 하면 부의 상징이자 희소성이 있는 스포츠라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골프라는 스포츠가 가진 진정한 묘미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대중적인 스포츠라는 것을 깨달았다. 잃어 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과정을 도와주는 베가번스와 긴장감 있는 골프의 모습을 표현하는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영화였다.- the main subject흔히 골프를 인생에 비유한다. 목적지가 너무 멀리 있어서 때론 보이지 않고, 가로막힌 나무에 부딪히기도 하고, 깊이 파인 웅덩이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로질러 있는 물에 빠지기도 해서 목적지까지 가기가 힘이 들 때도 있다. 그런 시련들이 힘이 들어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목적지를 향해 팔을 뻗는 사람들도 있다. 도달한 것 같아 방심하다가 목적지를 비켜나가는 경우도 있고, 운이 좋게 한번에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한다. 실로 골프는 우리의 인생과 아주 흡사하다.그렇다면 주너에게 있어서 골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너는 한 때 잘 나가는 골프선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삶도 전쟁처럼 황폐해 졌다. 시련과 아픔의 시간을 이어나가던 중 다시 한번 골프로 인해 자신의 삶이 전환하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바로 골프는 주너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자 목적지였던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골프였고, 골프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마지막에 ‘골프는 치는 것이지 이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인생을 사는 것에 있어서도 눈에 보이는 결과만으로 잘 살았고 못 살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얼마나 인생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며 살았는가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지 상대적으로, 혹은 형식적으로 판단 할 수는 없다. 골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스포츠의 세계에서 승패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그 스포츠를 즐기며 최선을 다했을 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모두가 자신의 인생에 짐이 있다. 주너의 인생에 있어서 짐이란, 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골프였다고 생각한다. 전쟁 후 자신이 골프채를 다시 손에 쥐었을 때 예전과 같은 기량을 발휘해서 재기할 수 있을지 스스로 많이 두려웠을 것이다. 골프를 계속 해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골프라는 무거운 짐을 자신감과 용기로 떨쳐버릴 수 있었다. 주너가 마음을 비우고 골프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생각했을 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골프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나의 삶에도 학문이라는 짐이 있다. 어떻게 보면 많이 무겁고 나를 지치게 하는 짐이지만 그것을 단지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고 나의 목표이자 미래라고 바꾸어 생각한다면 나에게도 승자의 쾌감을 맛볼 수 있을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주너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이 있다.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베가번스이다. 어쩌면 주너가 재기하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가번스는 캐디를 하면서 주너가 골프를 치는 것에 많은 조언을 해 준다.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가 주너에게 큰 의미로 다가와 주너에게로 하여금 골프를 가슴으로 느끼며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너는 그를 통하여 자신이 가진 짐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의 인생에도 역시 조언자, 동반자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조언을 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목사님이다. 때론 말씀으로, 때론 기도로, 때론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조언들을 해 주신다. 그 외에도 주변에 친구들이 내 동반자이자 조언자될 수 있을 것이다.영화에서 보면 자기 고유의 스윙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스윙이 가장 좋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잔디의 방향을 느끼고 몸을 자연에 맡긴 채 스윙을 한다. 바로 자연과 하나 되는 혼연일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인생을 순리대로 살아가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에는 정해진 길이 있고 운명이 있다. 자신의 고집대로 그 길을 가지 않고 돌아가서도, 또한 운명을 거스르며 살아가서도 안 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이 힘들고 고달플 것이다. 인생의 순리대로, 자연의 섭리대로 자신을 맡긴 채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자신이 정해진 길과 운명을 잘 밟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Dead man working(데드맨 워킹) -지난번 영화 ‘세븐’을 보면서 인간의 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죄’라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더럽지만 당연한 유산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무한한 욕망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이 되었든 그렇지 않든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인간의 죄를 인간이 판단하는 법의 제도이다. 그 중 특히 사형제도는 천명(天命)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목숨을 인간에 의해 결정짓는 행위이다. 이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매우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지만 어느 것이 옳다, 혹은 그르다고 명확하게 찬반의 입장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법이라는 제도 자체가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강제적 수단이기 때문에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데드맨 워킹(Dead man working)’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죄와 사형제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흑인 빈민가에서 일하고 있는 헬렌 수녀는 매튜 폰스렛이라는 죄수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에게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조언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매튜는 살인과 강간의 혐의를 가진 사형수이며 자신의 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인간이다. 어쩌면 사형이라는 뻔한 결과를 눈앞에 두고 헬렌 수녀와 바버 변호사는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결국 사형 집행일이 결정되고 만다. 사형 집행 6일전 헬렌 수녀는 매튜로부터 사형장까지 함께 하는 영적 안내자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일은 여자인 헬렌 수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신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었다. 죽은 아이들의 가족들이 그녀를 경멸하는 고통을 감수하며 헬렌은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한다. 가장 인상적이고도 핵심적이었던 장면은 매튜가 사형집행을 받기까지의 순간들이었다. 처음에는 죄를 부인하며 마치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대던 그는 사형시간이 다가오자 헬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죄의 대가를 치를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제까지 파렴치한 범죄자로만 보였던 그가 헬렌에게 죄를 고백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에는 마치 한 마리의 불쌍한 양 같았다. 그리고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우리의 모습도 바로 그러할 것이다. 매 순간마다 죄를 짓고 살아가지만 그 죄를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죄를 범한 범죄자와 같다. 그러나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들이닥쳤을 때 우리는 그제 서야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점점 다가오는 사형집행 시간 앞에서 매튜는 극도의 공포를 느끼지만 헬렌의 기도와 찬양을 위로로 삼고 기다린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이 오자 그는 집행을 받으러 천천히 걸어 나간다. 그가 걷는 그 길의 끝엔 죽음이라는 문이 있다. 자신의 발로 그곳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라는 집행수의 말에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눈물로 말한다.여기에서 나는 과연 사형제도의 의의가 죄인을 죽임으로 그의 죄를 처벌하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자에게 보상하고자 하는 의미로 적용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사형이라는 판결의 영역이 살인과 같은 중죄(重罪)에 해당되는데,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죄를 죄인을 죽임으로써 해결한다는 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논리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죄인의 죄는 완전한 처벌이 될까?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견해 차이이긴 하겠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의견에 서고 싶다. 그 이유는 죄인을 감금하는 교도소라는 곳의 본래 목적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죄인을 교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교도소는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충분히 뉘우치고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감금된 상태에서 치르면서 앞으로의 삶의 변화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형을 처해버린 다면 죄인은 과연 자신의 잘못을 얼마나 뉘우칠 수 있을까. 물론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많은 두려움과 공포로 자신이 지은 죄를 후회할지 모르나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다. 따라서 목적이 전도되는 현상을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