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과 단군신화『장화홍련전』의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의 평안도 철산군이다. 전동흘이 겪었던 실화가 이전부터 철산군에 설화로서 유포되었던 관계로 후세 사람이 그것을 모아서 전기체 구성으로 소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명신록』에 전동흘이라는 철산부사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장화홍련전』과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소설이 철산 지방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설화소설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이 소설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계모가 전처 소생인 장화와 홍련을 학대하는 계모형 가정소설이다. 작품에서 이러한 구성에 따라 장화는 허씨의 간계로 연못에 빠져죽게 되고, 홍련이도 뒤따라 연못에서 자살하고 만다. 이들 자매는 철산부사를 자원한 전동흘에게 신원을 하게 된다. 그 후 허씨는 동헌에서 부사의 재판을 받게 되므로, 『장화홍련전』을 재판소설 또는 공안류소설이니 탐정소설이라고도 일컫는 것이다.『장화홍련전』에 나타난 인물들의 성격도 한결같이 전형적인 인물로 표출되고 있다. 배좌수는 착하면서도 단순하여 계모의 흉계에 넘어가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선인의 범주에 넣기는 어려우나, 결과적으로 악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모 허씨와는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에 속한다. 장화와 홍련은 진선미를 갖춘 부동적인 인물로써, 순진하고 고결한 효녀의 미덕을 겸비한 성숙된 처녀로 나타나 작품을 장식한다. 반면에, 장쇠는 장화를 연못으로 데려가 죽게 하는 흉악한 인물로서 나타나지만 허씨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성을 보이고 있으므로 악의 인물은 아니다. 장화·홍련이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고 난 후, 다시 소생하여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에서 우리나라의 국조신화인 단군신화의 광명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곰은 쑥과 마늘만으로 동굴생활을 한다. 이같은 죽음에 가까운 시련이 있은 후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었다. 동굴이라는 어둠의 세계 속에서 환생하여 광명의 세계로의 전환은 장화·홍련에서의 어둠세계인 죽음에서의 환생과 같다고 하겠다.[단군신화] ---------(동굴)----------+(환생) - - - - 광명사상[장화홍련전]--------(죽음)----------+이 작품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고소설의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에 국한되는 내용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현 사회에서도 악을 행하면 그 악이 반드시 돌아오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내용 전개가 국조신화의 동굴모티프와 연관되어, 그 의미가 사뭇 크다고 할 수 있다. 장화·홍련이 연못에 빠져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는 장면은 이는 단군신화에 나타난 동굴모티프의 수용이라 할 수 있다.배좌수는 장씨가 세상을 떠난 후 허씨와 재혼하여 삼남을 둔다. 그런데, 허씨는 용모가 흉할 뿐만 아니라 마음씨마저 간악하여 두 딸을 몹시 학대하게 된다. 허씨가 추모인 것과는 반대로 장화와 홍련의 용모는 아름다웠으므로 질투를 느낀데다가 여기에 배좌수마저 귀여운 자매를 너무도 사랑하자 이에 질투를 느낀 허씨가 두 자매를 학대했다고 볼 수 있다. 허씨의 계략에 배좌수는 넘어가 끝내는 장화를 가문에서 추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화는 허씨가 데리고 온 아들 장쇠에게 끌려가 연못에 투신자살하게 된다. 장화가 연못에 빠지게 되는 순간에 물결이 하늘에 닿으며 찬 바람이 일어나고 월광이 무색하게 되었다. 또한 산중으로부터 큰 범이 나타나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떼어먹고 간 곳없이 사라져 버리자, 장쇠는 기절하여 땅에 쓰러지게 되었다. 예로부터 한국은 범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범은 깊은 산중에 살므로 신성동물로 섬겨왔는데 설화나 그림에서의 범은 산신의 사자로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삼국지』동이전 예조에는 범을 신으로 모셔 제사한다 라는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장화홍련전』에서의 범은 바로 산신의 사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산신의 노여움을 산 장쇠는 산신의 사자인 범에게 육신의 일부를 잃게 된 것이다.[ 장화·홍련 ] -------------------- [ 단군신화 ]-----------고난·역경-----------[ 허씨 ]--------------------[동굴 속(마늘·쑥)]장화와 홍련의 고난이 허씨에 의해 나타나는 것은 단군신화에서의 동굴 속과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다. 곰은 쑥과 마늘만으로 동굴 속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러한 고난을 이겨내고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이 대립할 때 주로 선이 초반에는 궁지에 몰리지만, 마침내 승리를 하는 구도를 가지는데, 이것은 민중들의 소박한 가치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장화와 홍련이 연못에 빠져죽은 후 애절한 한이 죽은 자신들의 원한을 출어달라는 두 자매의 목소리는 연못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게 된다. 애원의 호소가 아무런 효험이 없자 장화와 홍련의 원혼이 자기들의 원통함을 말하여 공청에 나타나지만, 부사들이 한결같이 놀라 기절하여 죽게 된다. 이런 연고로 그 후로는 부사로 오는 사람이 없어 철산군은 폐읍이 되었으며 매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고을이 텅비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동흘이라는 담이 큰 사람이 자원하여 철산부사로 부임하게 되고, 첫날밤에 촛불을 밝혀 놓고 공청에 앉아서 원혼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자정이 되자 물이 흠뻑 젖은 두 원혼이 다타나고 전동흘은 이들 두 자매의 망령으로부터 모든 사연을 들은 뒤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정부사는 날이 밝자 배좌수 부처와 장쇠를 잡아들여 모든 죄상을 자백받게 된다. 허씨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장쇠는 교살당한다. 하지만 배좌수는 장화와 홍련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사면하게 된다. 정부사는 장화와 홍련이 죽은 연못을 찾아가 물을 퍼내고 살펴보니 두 자매는 얼굴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편히 누워 있는 것이다. 정부사는 이들을 명산을 택하여 안장하고 삼척석비를 쓰기를 해동유명 조선국 평안도 철산부 배무용의 자녀 장화와 홍련의 불망비 라 하였다. 그 뒤 배좌수는 윤씨를 얻어 두 딸의 현신인 쌍둥이 딸을 낳는다. 이에 아이의 이름을 장화와 홍련이라 지었다. 이들이 자라서 평양의 거부 이호연의 쌍둥이 형제 윤필·윤석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 장화는 2남 1녀를 두었고 홍련은 아들 둘을 두고 73살에 두 자매가 함께 죽었다.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장화와 홍련은 다시 태어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장화와 홍련의 죽음이 단군신화에서 곰이 웅녀가 되기까의 과정인 제의적인 죽음임을 알 수 있다. 곰이 쑥과 마늘로 동굴에서 생활하는 것은 죽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장화·홍련의 이러한 죽음 또한 행복한 삶이 있기까지의 단계이다. 즉 제의적 죽음이다.
1.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2.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3.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4. 나는 괴로워했다.5.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6.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7.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8. 걸어가야겠다.9.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이 는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다. 그러나 유명한 것만큼 그렇게 정밀하게 그리고 자세히 이 텍스트가 읽혀진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난해한 말도 없고 난삽한 이미지와 상징성도 없다. 별이니 잎이니 바람이니 하는 말들은 일상적인 생활과 시어에서 많이 씌어진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시는 잘못 읽혀져 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윤동주는 항일 운동을 하다가 객지 일본 땅에서 객사를 한 시인이며 기독교 신자기 때문에, 시를 읽기전부터 벌써 어떤 준비된 의미의 틀을 갖고 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라는 시구를 놓고도, 사람에 따라 독립 운동이라는 정치적 의미의 층위에서 읽을 수도 있고, 종교적인 층위에서 읽을 수도 있게 된다. 물론 시인으로서의 길, 즉 예술적 층위에서 읽으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잠시 윤동주의 전기적 요소를 잊고, 씌어진 시의 구조, 언어로 이루어진 순수한 주고만을 가지고 읽어보면, 그와 같은 고정된 시점이 아니라 좀더 자유로운 의미의 생성과 접하게 될 것이다.우선 1행에 쓰인 단어들을 단독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다른 말들과의 연관성에서, 즉 구조적인 의미의 요소로서 파악해보자.1행에는 죽는 날까지 라는 시구가 나온다. 두말할 것 없이, 죽는 날까지 를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살아 있는 동안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구에서 죽음과 삶이라는 대립되는 의미소와 이 대립의 축을 이루는 것은 시간으로서, 공간과 대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다음에 하늘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앞의 죽음과 생, 그리고 시간이라는 의미소와 관련 지어질 때 당연히 하늘의 의미소가 어떤 것인지 몇 개의 특성을 알게 된다.우선 하늘과 앞의 시구와는 강렬한 대응성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하늘을 하늘이게끔 차이화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땅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하늘을 우러러 라는 말은 현재 화자가 어디에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러러란 말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치켜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은 이 시의 표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땅에 있다. 지상적인 한계에서 천상적인 영원한 것을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그 다음 2행에 등장하는 부끄럼이 없기를 의 그 부끄럼이 무엇인지, 시적인 의미보다도 그 논리적 구조에 있어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1,2행은 모두가 하늘과 관련된 것이고, 그 하늘의 공간은 바로 3,4행과 대응을 이루고 있다. 잎새 라는 말이 그렇다. 잎새에 이는 바람 을 바라보는 이 시의 화자의 시선은 높은 하늘에서 낮은 지상으로 내려 이동해 온 것이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괴로움이라는 말로 변한다.잎새에 이는 바람 이란 잎새를 시들게 하는 것, 즉 수시로 변하게 하는 힘이다. 잎새에 작용하는 시간인 것이다. 하늘이 영원이라면 땅은 잎새의 순간적인 삶이 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의 조사 도 이다. 잎새란 아주 작은 것이다. 무리져 있는 것들의 하나이다. 꽃처럼 아름답지도 않으며 나뭇가지처럼 튼튼한 것도 아니다. 하잘것없는 생명의 개체들이다. 잎새라는 말은 나뭇가지, 등걸, 뿌리, 이렇게 자꾸자꾸 잎새가 소속되어 있는 공간으로 가면 흙이 되고 전체 대지가 된다. 잎새에도 가 붙어 있다는 것은 다른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 괴로움은 지상적인 모든 것을 내포하게 된다. 하늘처럼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시로 변하고 시들고 죽는 생명을 가진 지상의 것들이다.그런데 괴로움 앞에 나 가 강조되어 있다. 나와 잎새는 괴로움으로 맺어져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나에게도 이는 바람인 것이다. 직접 나에게 부는 바람이 아니라도, 지상의 재체들은 그 이는 바람 속에서 같은 변화, 같은 아픔을 느낀다. 타인의 고통,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의 시구에서, 앞에 나왔던 부끄럼 없는 마음과 괴로움이라는 마음이 훨씬 더 구체화된 것이다. 여기의 별은 하늘의 공간인 1행과 맞물리고 있다. 동시에 그 별은 3행의 잎새와도 대응된다. 도식으로 그 관계를 나타내면 하늘과 별의 관계는 땅과 나뭇잎의 관계와 각기 대응을 이룬다.하늘 별땅 잎새하늘을 우러러보는 마음은 바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동격이다. 하늘 은 별 로, 우러러 라는 행위는 노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별은 하늘에 내포되고, 노래는 우러러에 포함되는 함수 관계를 갖게 된다. 공간과 행위의 두 축이 5~8행에 와서 반복, 변이된 것이다.땅의 축, 즉 잎새축을 살펴보자. 모듬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의 6행으로 변전되고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 은 모듬 죽어 가는 것 과 같은 의미이다. 즉 구상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추상화되고 일반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1~4행의 하늘이 별로 개별화되고 구상화된 것과 반대로, 1~4행의 잎새와 바람은 추상화와 일반화로 교체되어 있다.5~8행에서도 1~4행처럼 나 라는 주어가 나온다. 하늘, 땅, 그 사이에 내가 있다. 천지인(天地人). 참으로 오래된 동양의, 한국의 공간이다. 하늘의 공간 (불변 영원의 공간), 땅의 공간 (변하고 죽어 가는 것들), 이 사이에 길이라는 공간이 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길이요,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며 괴로워하는 길이요,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하는, 길의 제 3공간이다. 그것이야말로 시적 공간, 하늘과 땅을 융합시키는 인간의 운명적이면서도 창조적인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길이란 정적인 공간, 결정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끝없이 전개되며 시작과 끝이 있어서 과정을 갖는 동적인 공간이다. 길에서는 서 있을 수가 없다. 길은 걷는 공간으로, 지향점을 지닌 공간인 것이다. 사랑해야지 라는 행동은 걸어가야지 로, 즉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의 행동으로 다시 변이된다.침묵의 행을 건너뛰어 는 한 행으로 마지막 연을 맺는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길 위에서는 늘 현재이다. 걷고 있는 나, 그것이 오늘도 라는 현재 진행형이다. 잎새에도의 도 처럼, 윤동주 시인은 산문적인 조사를 시간이나 공간을 나타내는 데 매우 암시적인 공백의 말로 잘 사용하고 있다. 이 도 는 지속성을 나타내는 현재로서의 그 도 이다.그러나 이런 의미 구조만으로 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적인 것, 통사 구조에 있어서도 이 시는 그 시적 구조의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즉 1~4행은 과거형으로 서술되어 있다. 서술 종지형이 괴로워했다 라는 과거이다. 그런데 5~8행은 사랑해야지 와 걸어가야겠다 로, 모두 미래 추정형인 원망이나 미래의 의지를 다짐하는 서술형이다. 그리고 시의 끝 줄은 오늘 밤에도……스치운다 로 현재형이다.
역사전기비평미래완료형 미당 서정주2004212053윤정원작년에 작고한 未堂 서정주(1915~ 2000)는 많은 상반된 평가를 받는 시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민족시인으로 대표될만한 시인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친일파라 평가되는 시인이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는 분명 우리 현대 시단에 큰 획을 긋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대한 공식화된 평가는 그가 겨레의 가장 깊은 정서를 환기력 높은 시어로 노래한 부족 언어의 마술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굳건한 평가를 가지고 있는 서정주의 시 세계에 대해서 살펴본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큰 모험이 될 수 있다.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서정주 시인이 쓴 시를 모두 한 번씩은 접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2000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평가에 대해 여러 얘기가 많았다는 것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조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서정주 시인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간단치 않은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한 그의 인식은 쉽게 정해지지 않았으며 많은 과정과 사건을 통해서 그는 점차 성장해 왔던 것이다. 먼저, 본능적이고 감각적이었던 그의 초기 시 세계를 보면서, 우리는 그가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본능에 좀더 집중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1938년 그의 첫번째 시집인 화사집에서 그는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였다. 하지만 원색적이고 본능적인 시풍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토속적 분위기 안에서 원죄의식과 생명력을 말하면서 자의식과 욕구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치열하게 드러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서정주 시인은 냉철하고 이성적이기보단 감성적인 모습을 드러내왔다. 그것때문인지 그는 현실인식능력이 대단히 부족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백 년 동안은 지배할 줄 알았다면서, 친일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우익 세력과 결탁. 이승만 박사의 전기를 쓰려 했던 점이나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에게 생일 축하 시와 전두환 대통령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 등, 그의 문학적인 능력과는 걸맞지 않는 행동을 보여왔다. 또한, 눈여겨봐야 할 점은 그는 경향주의적 문학을 배척하고 오직 문학은 순수하게 남아야 한다고 외쳤는데, 정치적 행동을 할때 마다 친권력적, 반민족, 반민주적 행보를 걸어왔던 실수투성인 그의 정치적 행동들은 문학인으로서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지 흥미로운 점이다. 그의 시풍은 감성적인 모습을 보여왔고 또한 미학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이러한 점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는데 아버지의 부재란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부재를 뜻할 수도 있지만 잃어버린 국가를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삶에서 아버지란 존재는 그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부친, 즉 서정주의 할아버지의 노름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많은 일을 했었고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그래서인지, 어머니 과부댁 일본인 여교사 등, 그의 시에서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고 여성적 세계들이 종종 드러난다. 하지만, 서정주 시인이 계속 끝없는 감성적인 세계로 빠져든 것은 아니다. 초기작품에서 그는 원색적이고 악마적이기까지한 시풍을 보여왔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을 통해 그는 비극적인 세계인식을 거쳐 귀촉도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전통주의 또한 그 전통주의 갈래에서 나온 `신라의식`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후기 작품 속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생명주의를 보여준다. 정주는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작품과 우수한 언어 구사 능력을 보여왔다. 섣불리 그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의 뛰어난 시적 능력과 부족한 현실 인식에서 나오는 친권력적 행동들이 그를 존재케 했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그의 부친은 일제시대 억눌려 살았던 자신의 처지를, 자식들에게만은 이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큰 아들인 서정주를 법관이 되었으면 하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그런 뜻과 정 반대로 10대 중반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때 이 나라의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균배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가죽구두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의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하숙도 학교 근처의 좋은 집에서 빈민촌으로 옮겨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다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사선까지 돌파했다. 1930년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에는 중앙고보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투옥됐다. 그의 부친도 지방현에서 베푸는 백일장에 '장원'을 할만큼의 문장가였던 것을 참고로 한다면, 그는 어쩌면 시적 천품을 타고난 사람으로 생각되며, 20대에 그가 이미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데뷔한 일이나 시집을 펴낸 일들은, 그 같은 천품이나 문학적 지향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그의 초기 작품인 화사를 살펴보자.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꽃대님 같다.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의 혓바닥이소리 잃은 채 낼룽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가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클에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입술 …… 스며라! 배암.이 시에서 우리는 먼저, 그의 20대를 대변해주는 작품이라는 점과, 표현상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김영랑 류의 나약하다고 할 만큼 섬세하기만 하던 언어미학이나, 정지용 류의 감각적 기교주의 만을 접하던 1930년대에, 이 시인의 그런 원색적 육성은, 보다 더 직정적이고 생명적이고 본질적이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으리라 믿는다. '원통히 물어 뜯어' 나,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은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글에서 그의 그러한 생명적이고 육정적인 갈등, 그리고 원죄의식을 매우 진하게 맛보게 해주고 있으며, 그것은 그가 이미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성에 눈을 떠' '셋째의 꾐에 빠져 '海岸通 거리 옥매화집 작은 딸 순이'등과 어울리기도 했다는 자전의 기록들을 참고로 해본다면, 매우 재미있는 시사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미당 시의 표기에 관한 것은 전라 방언을 많이 활용한 것과, 그에 따라 띄어쓰기를 임의로 한 것 이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다. 하지만 많은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그의 시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언어의 특징은 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이 혼연 일체를 이룬다는 데에 있다. 그의 언어처럼 시적인 언어도 드문 것이지만 그는 시적 언어를 찾아서 별스러운 시적인 세계로 비약해가지 않는다. 그의 손에서 우리 일상생활의 무엇이든지 그대로 시가 되어버린다. 그의 시에서는 우리의 기거동작에서부터 세간살이까지 우리의 일상적인 것들이 두루 들어가 있다. 우선 미당의 세계를 꾸미고 있는 비품들을 살펴보건대, 거기에는 산이나 구름이나 물과 같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시인들이 가까이 사귀었던 것들이 있고, 동양의 시인들이 길들여 온 난초나 국화나 소나무 같은 것들이 있고, 처녀의 댕기라든지 또 문방사우와 같은 전통적인 우아한 삶에 관련된 것들이 있고 또는 조금 더 토속적인 시취에 맞는 것들로서, 고추라든지 박꽃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있지만 새로 편입된 우리 일상의 물건들로는 매화틀, 놋요강, 건건이, 진도 간장, 또는 좀더 기발한 것으로는 골머리, 종기, 배앓이 같은 것들도 있다. 또 상하귀천 없이 무소부지로 넘나드는 그의 언어는 이라든지 와 같은 토속적인 일상어, 든지의 민속적인 지혜를 담은 말을 포함한다.
1. 작가 하성란1967년 서울 출생1992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편 당선1997년 소설집《루빈의 술잔》발표1998년 장편소설《식사의 즐거움》발표2. 작품 줄거리악취나는 쓰레기장을 갖춘 아파트단지에 사는 남자는 절대로 웃지 않는 여자와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나 번개 퀵서비스와 충돌. 차사고를 내게 되고 번개배달부의 부탁으로 인천까지 퀵서비스배달에 나선다. 인천까지 가는 지하철 안에서 주인공은 여학생 셋의 다리를 흘끔거리고 그 아이들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나 여학생 셋은 사실 그가 자신들을 보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으로 돈내기까지 했던 상황이다. 배달길을 계속 가던 중 가는 길에, 주름하나 없는 흰 피부에 검정콩처럼 까만 눈을 한 여자아이. 지하철에서 본 그 여학생, 주사위를 우연히 보게 되고 그 아이가 자신이 퀵서비스를 가는 집의 딸이라는 것을 또 우연히 알게 된다. 배달 후 주사위의 말에 따라 시가지로 나오게 되는데 화장실로 들어간 주사위는 나오지 않고 결국 남자는 주사위가 변장을 하고 자신의 앞을 지나갔음을 알게된다. 남자는 번개맞은 꼴을 하고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 다시 들어서는데, 건너편 까마득한 아파트 옥상 위에 번개를 막는 피뢰침을 발견한다.3. 에서의 하성란의 문체의 특징「올콩」은 건조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그 느낌은 하성란 특유의 문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특유함이란 마이크로묘사에서 연유한다. 사람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사물을 바라보았을때 사람들은 이것이 아름답다. 혹은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가치판단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과의 거리가 아주 미세한 그것이 되면 사람들은 가치판단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과 견줄만한 무엇을 볼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너무 거대한 크기로 보여지기에 공포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올콩의 세계 또한 그렇다.하성란은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마치 카메라의 눈처럼 현실세계에 대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섬세하고도 밀도 있는 문장을 구성한다.우리는 「올콩」을 읽으며 주사위는 나쁜 아이고, 남자의 다리 훑어보기는 기분나쁘고 불쾌한 일이고, 하는 식의 가치판든을 할 수 없다. 혹은 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하성란, 자신이 가치판단을 배제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하성란이 보여주는 세계가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성란의 문체에서 또 주목되는 점은 등장인물들이 남자 혹은 여자로 나타날 뿐 이름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익명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현대사회에서 만날 수 있는 남자나 여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판단은 배제된다하더라도 작품 속의 인물이 나 혹은 너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다가오게 만든다.4. 하성란 작품의 특징사물의 세계가 매우 미시적으로 기술됨과 달리, 하성란 소설의 인물은 남자, 여자, 사내 등으로 지칭될 뿐 한 개체로서 고유명사나 개별성을 갖지 못한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추상화 익명화되어버린 존재의 처지를 말함이다. 이 세계에게 개인은 같은 일을 변함없이 수행할 과 다르지 않다. 패션 회사의 피팅 모델이 한 예가 된다.마네킹 인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가끔 여자가 낮게 신음 소리를 낼 때면 그제서야 아주 잠깐 디자이너들은 아, 마네킹이 아니었지, 새삼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한다.(「꿈의 극장」)고유성을 박탈당한 개인에게 세계는 권태롭고 단조로운 것으로 경험된다. 탐욕스런 남근처럼 우뚝 솟은 고층빌딩과 아파트 속에서 이들은 토악질과 현기증을 경험한다. 이들에게 (「악몽」)과 같다. 이들의 악몽은 매우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하성란 소설에 특히 악취는 작중인물의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현실경험을 대표한다. 이런 경험현상을 드러냄에 주목되는 것은 뒤엉킨 미세혈관처럼 그것의 비선조성과 현재진행형이 특별히 강조된다는 점이다. 틈입한 이질적인 목소리가 무차별적으로 뒤섞이듯이(「시즈오카 현의 한 호텔은 후지산이 보이는 날만 숙박료를 받는다」), 끊어진 신문 기사처럼, 하성란의 소설은 비선조적이며 일탈과 지연, 우회의 방식으로 전개된다.구겨진 와이셔츠 깃 옆으로 사내의 몸통에 가려 끊어진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목감기 유행으로 종합병원이, 일교차가 큰, 바이러스의 영, 호흡기는, 외출 후 반드시 손을 닦. 문맥이 엉뚱하게 뚝뚝 끊길 때마다 여자의 호흡도 덩달아 뒤섞인다.(「지구와 가까운 소행성과의 랑데부」)비선조적 전개와 현재형은 하성란의 소설적 방법이 존재의 현상을 탐사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말을 바꾸면, 현실 자체가 유동적이고 비종국적이며, 이것이 하성란의 서술방식을 규정한다고도 할 수 있다. 현실이 그러하다면, 스스로 말하는 대로 보이기 위해서 비선조성과 현재형 서술은 불가피하다.오월 토요일 오후였을 거다. 미스 정과 퇴근을 하다 건물 로비에서 은행 밖으로 나오는 그를 만난다. 그를 따라 그의 동료가 모는 차를 얻어타고 근교를 나간다. 토요일인데도 다른 날보다 길이 막히지 않는다. 차는 속력을 낸다. 오랜만에 여자는 가뿐하다.(「풀」)과거 사실을 술회할 때도 그것은 현재형으로 드러난다. 하성란 소설이 고수하고 있는 완강한 현재형 때문에, 심지어 서술자 혹은 초점주체조차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예측하지 못한 사이에 예견되지 않은 무엇이 삶의 외피를 뚫고 나타남은 당연하다. 이 예측불가능성은 두 가지로 이해된다. 그 하나는 기적 혹은 경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비선조적 현재형이란 일상적 삶의 반대편을 보이기 위함이다. 과거조차 현재형으로 말해지고, 10년 뒤 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면(『삿뽀로 여인숙』), 하성란의 소설에서 과거·현재·미래는 선후관계나 선조적인 관계가 아니라 병렬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상이한 시간체험의 지평에 놓이지 않고 상호침투하고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4. 하성란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미지하성란 소설에서 도시는 토사물로 얼룩지고 구타가 이어지며 함부로 취급당하는, 인간의 존엄성과는 거리가 먼 음지이다. 만원버스에서 시달리며 출근하고 회사 엘리베이터에서도 벽 쪽으로 밀 리거나 중량 초과로 밀려나고 직장에서는 상사의 잔소리에 시달리고 생계를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냉혹한 현실 공간인 것이다.이들에게 도시는 실제 온도보다 체감 온도가 훨씬 낮은 곳으로서 이러한 느낌은 유리의 차가움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번쩍이는 유리가 되쏘는 날카로움은 칼이나 바늘 같은 금속성의 이미지로 변환되어 소설 곳곳에서 나타난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나는 쇠 긁히는 마찰음 이나 정원초과를 반복하는 녹음된 목소리, 눈금이 벗어난 고기를 단 한번에 칼로 잘라 내는 푸줏간 여자의 야무진 손끝 , 또 손등을 찰싹 내려 치고 날카로운 바늘이 들어와 잇몸을 찌 르고 우악스럽게 집게가 헤집고 들어와 이를 잡아당 기고 드릴로 긁어내 는 가차없는 치과치료, 피팅모델을 마네킹으로 착각한 조심성없는 디자이너들이 찌르는 시침핀 , 광고판으로 가려진 옥상 안에 툭툭 불거져있 는 녹슨 대못들 등은 주변에 잠복해 있다가 뾰족하게 솟아올라 지친 인물들을 사정없이 찌르곤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1.작가 소개스위스가 낳은 세계적인 극작가. 스위스 태생의 독일어권 작가로서 전후 가장 위대한 드라마 작가의 하나로 손꼽힌다. 사뮤엘 베케트나 오이게네 이오네스코와 더불어 현대의 고전작가로 인정받고 있다.베른시 근교의 코놀핑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베른과 취리히 대학에서 신학, 철학, 독문학을 공부하였는데 미술에도 능했기 때문에 도취한 적도 있었으나 1947년 그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종교가정에서 태어나 극작가로 현실을 파헤쳐야 하는 사실과 미술에 조예가 깊으면서 연극에서도 남달리 재능을 보이는 있는 점이 이채롭다.대표적 희곡으로는 《로물루스 대제(1948)》《미시시피씨의 결혼(1952)》《천사 바빌론에 오다(1952)》《노부인의 방문(1956)》《물리학자들(1962):대학 졸업을 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품 속에 풍자화 되어 나타난다. 또한 《물리학자들》에서는 과학자들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를 신랄한 희극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하고 실러 기념강연에서는 B.브레히트의 비판과 극복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라디오드라마집 《고장》 등이 있다. 평론집 《연극의 제문제(1955)》는 독자적인 연극론을 제시하였고, 독일 현대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저서이기도 하다. 뒤렌마트의 일생은 기독교도이고자 하는 태생적 신앙과 허무주의자(Nihilist)로 빠져드는 이성적 철학적 이변성과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뒤렌마트는 허무주의자가 되려는 유혹과의 투쟁에서 자신이 그 싸움에서 졌을 때만 이 투쟁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그가 신앙에 대해 얼마나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신적인 질서에 대한 신앙 때문에 절망할 수도 없었던 뒤렌마트는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써 제도적으로 조직화된 기독교를 거부하는 태도를 작품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어떤 특정 종교에만 귀속시킬 수 없는 신학적 철학적 신앙의 문제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근본 테마로 등장하는 것이다.비인간적이 뒤렌마트는 회의에 빠진 초월적 신앙론자임이 드러난다. 뒤렌마트가 끊임없이 가하는 신에 대한 모독 속에 신에 대한 갈망이 감지된다. 뒤렌마트의 전 작품이 ‘신 없는 신학’이라고 규정되는 바와 같이 뒤렌마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대상은 신이다. 따라서 뒤렌마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신학적 작가인 것이다. 뒤렌마트가 신 찾기에 대한 그의 시도에서 얻은 결론이라 신은 존재하나 인간적 상황에는 유용가치가 없으므로 세계를 극복하는 길이란 그래도 인간 개개인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을 통해서만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뒤렌마트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용감한 인간을 제시하는 것을 문학의 주요과제로 삼았다.어느 인터뷰에서 “연극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뒤렌마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예를 들어서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연극이 될 수 없지요. 그러나 그 커피에 독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연극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확실히 뒤렌마트의 연극에 부합되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부조리 연극으로부터 출발하여, 전통적 비극을 부정, 오늘날 가능한 것은 희극뿐이라는 인식에 입각하여, 관객의 충격이나 부정적 반응에는 개의하지 않고, 괴상한 과장, 통렬한 풍자, 적나라한 진실을 폭로, 비뚤어진 사회와 정신을 역설적으로 제시하였다2.작가의 작품 경향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과 희극을 나누는 근본적인 요소로 인물의 신분적인 차이를 제시하고 있다. 비극은 고귀한 인물의 인생을 그려내는 것이며, 희극은 비천한 인물을 그 주인공으로 한다. 고대 희극에서의 비천한 인물은 신분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도 저급한 인물이며, 따라서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뒤렌마트는 현대 세계에 적합한 연극의 형태는 희극뿐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의 종말적 서구 사회는 죄를 지은 사람도 없고 책임을 질 사람도 없다. 공동적인 죄를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개인적으로 환원 가능한 비극의 수법을 빌려 부조리(조리가 서지 아니함, 도리에 맞지 아니함)를 재현하여 그 구체적인 이미지를 주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언어를 음절로 해체도 하고 등장인물의 동일성을 상실시키기도 하여 행위의 뜻과 목적을 박탈하였다. 대표적 작가로 S.베케트, A.아다모프, J.주네, H.핀터, E.올비 등이 있다.* 그로테스크(grotesk)라는 말은 15세기말 고대 로마의 동굴을 발굴하던 중에 발견된 벽화들, 즉 "벽면을 가득 채운 당초무늬의 장식에 식물, 동물, 사람의 신체가 유희하듯 서로 엉켜있는 벽화들"에 처음 사용됐다. 그 다음에는 이 발견에 자극을 받아 이 새로운 양식을 수용, 발전시킨 르네상스 시기의 그림들에도 적용됐고, 나중에는 문학 분야에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그로테스크는 조형예술이나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음악이나 영화 등 거의 모든 예술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예술관찰 및 예술비평 개념으로 현대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그로테스크를 아주 짧게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섬뜩하면서도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묘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로테스크에는 끔찍한 또는 전율을 일으키는 요소뿐만 아니라 희극적인 요소도 내재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로테스크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서로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이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환상적이고 과도하게 왜곡되거나 비틀림으로써 무형식적이고 무절제한 것이 생겨난다. 이렇게 모순적인 원칙들이 충돌하고, 종래의 세상에 대한 방향감각이 갑자기 거부되는 불합리성 때문에 그로테스크는 낯설고 어리둥절하게 하며 의미를 거부하는 성질을 갖는데, 그로 인해 수용자에게 가소롭고도 섬뜩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서술 및 묘사는 양식 면에서 볼 때 거의 비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사회인식을 위한 사실주의적 형상화 원칙"으로 여겨진다.3.작품들의 특징뒤렌마트 희비극에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그로테스크다. 브레히트가 서사극에서 소외효과를 통해 관객이 비판적 안목을 가지고 연극을 관람할 베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모든 범죄사실을 인정한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호퍼는 그 두려움을 쫓으려는 듯 지금까지 추리해 온 치밀함으로 코르베스가 자신을 죽일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논리적으로 댄다. 여전히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코르베스는 호퍼의 10년간의 노력이 모두 쓸데없는 일이며 이미 그것은 비밀이 아니라고 말한다. 허탈해하는 호퍼에게 코르베스는 독자들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악덕이나 모험쯤은 묵인해 주고 더 많은 즐거움을 희망하며 자신의 살인극에 희생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는 스물세 번째 소설을 위해 자신이 호퍼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권총의 위협에 밀려 베란다 밑으로 떨어진 호퍼, 코르베스는 유유히 위스키를 마시며 새로운 작품을 위해 마조르카로 떠날 준비를 한다.5.인물 분석작가(코르베스) : 지식인, 노벨상을 수상한 소설가로 술주정뱅이에, 자신이 실제 저지른 범죄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쓰는, 오히려 통속작가에 더 가까운 인물.작가 소설가이고 노벨상 수상자이고 붉은 포도주같이 햇볕에 타고 수염도 깎지 않은 대머리고, 성격은 거칠고 집요하고 또 지독한 술꾼이고...p310노벨상을 탄 소설가가 22건, 아니 23건의 연쇄살인을 저지른 살인마이다. 그가 살인하는 이유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이다. 그는 상상력과 창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제 범행을 저지르고 그것을 그대로 기록한다. 사법기관이나 독자들은 그것을 알면 서도 재미를 위해 이를 받아들인다. 자극을 위해 모든 것을 용서하는 물질만능적인 우리 사회의 단면과 이를 이용해 명예와 돈을 얻으며 사회에 살인적인 해악을 끼치는 가짜예술가들을 섬뜩하게 풍자하는 것 같다. 또 악마적 살인마가 노벨상수상작가라 는 점에서, 이 상의 후보로 수차례 올랐지만 끝내 상을 타지 못 한 원작자 뒤렌마트의 노벨상에 대한 야유가 숨어있기도 하다.결과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 하려는 태도를 가짐. 자기가 그런 소설을 쓰지 않으면 당장 사람들이 무슨 큰일이라도 날듯이 말하는 그 모습이, 일종의 시혜려지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호퍼는 코르베스에 의해서 죽었다기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공포에 의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호퍼 역시 야유의 대상에서 예외가 아닌 인물로 진실을 추구했지만 그는 그것을 돈과 바꾸려고 한 인물이다. 물질을 얻기 위해 진실과 바꾸려고 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협상을 원하며 코르베스의 범죄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호퍼는 얼핏 작품과 작가의 삶을 연관시키는 전기비평가를 연상시킨다. 작품의 사소한 내용까지 작가의 실제 경험과 무의식에 연관시켜 해석하는 전통비평방식으로 이 비평은 60년대를 고비로 작품자체를 연구하는 신비평으로 바뀐다. 때문에 호퍼에게는 역사의 발전에 딴지를 걸어 먹고 사는 사이비 지식인의 냄새도 난다*인물의 익명성주인공들에게 이름은 붙여져 있지만 주인공들은 익명화된 집단의 대리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본질적으로 숨어있으며 익명화 되어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에 대해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주인공을 통해서 희망을 실현시켜 보려는 대상을 작품 속에 투사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는 일정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 관객(독자)세력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뒤렌마트는 작품 속에서 익명화의 작업을 단순히 주인공이나 어떤 집단의 이름의 유무보다는 그것의 상징성을 부각시키려 하였다. 사형집행인(Henker)을 살인자(Murder)로, 작가(Der Autor)를 살인을 부추기는 독자들의 대리인으로 묘사하면서 이 세상에서 몸을 숨기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인물들은 익명화된 개인이나 집단의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로 나타나고 있다.작가 그래서 내가 도피라도 했단 말이오? 난 도망하려고도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았소. 그런 마음을 먹은 일조차 없소. 사회가 내 이용 가치 때문에 날 건드리지 않을 뿐인 거요.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술이란 이름 아래 어떤 악덕이나 모험쯤 내가 해도 묵인하는 형편이오. 내게서 더 많은 즐거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