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중세 말기 교회의 부패중세 말기에 로마교회가 점점 더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로마교회의 권위는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 월등히 강하게 되었다. 이는 베드로나 바울의 사역지이며, 로마가 당시 정치적?지리적인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 지역의 교회보타 그 권위가 우위적 입장이 되어갔고, 결국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세계 교회지배라는 계급적 교회체제가 형성되었다. 교권체제가 절대적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성경적 교회관이나 말씀의 권위는 점점 그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다.결국 교황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치부하게 되었고 제도화된 교회는 바로 신국과 일치되었다. 의식과 형식, 제도 중심의 사제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교회의 부패는 갈수록 그 속도를 더해만 갔다.중세 교회의 타락의 원인의 다른 한 가지 요인은 교회의 세속 권력과의 타협 제휴였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수도를 천도한 때부터 로마교회의 세속권력과의 타협은 싹트고 있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군사적 힘이 동쪽으로 이동하고 서로마 제국이 패망하자 로마교회는 어떤 다른 힘의 보호가 필요했다. 결국 당시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았고, 그 후 로마교회는 교회의 위협과 이교도의 세력확장을 저지할 목적으로 부단히 세속의 정치력과 군사력에 의존하였으며 왕위 찬탈전에도 깊숙히 간여하면서 타협, 거래, 협조, 동반하는 자리로 빠져갔다.교회의 붕괴는 철학보다 외적인 사건에 의해 더 촉진되었다. 중세의 교황권은 어느 누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였으나 중세 말기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교황이 아비뇽에 붙잡혀 있는 일로 인해 그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특히 교황 레오는 교회 건축과 장식에 재정을 낭비하였고, 모자란 재정을 채우기 위해 교회 관직을 만들어서 팔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 교회의 본래적 사명은 없어져 버리고 속화와 타락, 영적부패의 가중, 도덕적 부패 또한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미신과 이교적 관행인 성상과 의식이 예배를완전히 근세도 아닌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시대이다. 그 특징은 인간관과 세계관의 두 측면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인간관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인간긍정과 자아존중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중세의 신 중심 사상에 대해서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인간상은 그리스의 교양인을 이상으로 하였다.르네상스는 고전문화에 대한 단순 흥미가 아닌, 이전의 휴머니즘으로의 회복을 뜻하며,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성에 대한 저항이었다는데 의의를 갖는다. 중세의 엄격 일변도의 교권주의 종교세력과 봉건적 지배세력이 결탁했던 질서에 대항하여 신흥 시민계급 지식인들이 인간 정신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로 인해 인간은 종교나 집단 속박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존재가 되고, 새로이 인식하게 된 자신의 인간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고 묘사하기에 이르렀다.중세인은 신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존재의미를 가졌으나,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 가치와 품위를 자각하였다. 그러므로 복종과 굴욕을 미덕으로 삼았던 중세와는 달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재능과 힘이 뛰어난 개인이 찬양을 받았다. 더구나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스토아 학자들의 보편적 인간성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그 본질과 가치는 누구나 동등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휴머니즘은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존경과 개성 존중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다.르네상스시대의 신은 중세 그리스도교에서처럼 세계를 초월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내재하며, 세계의 모든 것은 신의 나타남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산 자연, 즉 창조하는 자연일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자연으로서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자연은 중세에서와 같이 신에 대립하는 악의 덩어리도 아니며, 계몽주의시대에서와 같이 단순히 기계적인 자연도 아니었다. 자연은 인간의 찬미와 기도의 대상이며, 인한 인물로서 마이스트 엑카르트가 있는데 그도 역시 스콜라철학의 영향을 벗어나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가 주안으로 삼는 바는 내면적으로 신과 접촉하려고 하는 데 있다. 그에 의하면 신은 무규정적인 것이어서 이름붙일 수 없는 것, 즉 무인데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욕망을 멸하고 자아를 버림에 의해 이 신과 신비적으로 합일할 수가 있다. 마이스트 엑카르트는 종교의식의 내면화와 종교의식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인간 정신을 노예화하는 것을 반대하고 신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며 내적 직관성으로만 신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은 지식의 객관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신비 속에서 발견되고 접근 될 수 있다고 하여 신비주의를 제창하였다. 또한 발렌틴 와이겔은 인식의 원천은 정신이 자기 내부에서 전개해 나아가는 과정이며 인간은 내적으로 자신을 알아가는 존재라고 하여 범신론적 경향을 띄었다. 이는 기독교적 신이 아니라 자연속에 신이 내재되어있다는 입장으로 중세 종교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견해를 피우기 시작하였다. 야콥 뵈메는 신비주의를 정립한 학자로서 신은 외부에서 알 수 없으며 자기 속에 신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알게되면 신성의 비밀이나 진성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신은 인간의 마음에 있으며 인간은 신의 소산이라는 자연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신을 알려면 자신을 고찰하라하여 범신론적 입장에서 자연과학적 시식으로 나아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지상과 천상이 완벽하게 분리되던 신중심의 시대에서 자연에 신이 내재되어 있어 자연을 알고 신과의 접촉을 시도하려는 시대로 전환되어갔다. 신비주의 사상은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중세철학이 근세 철학으로 넘어가는 한 계기가 되었다.Ⅳ. 종교개혁1517년 독일의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중세의 보편교회에 대한 반항운동이다. 그 결과 중세의 기독교 세계의 통일이 깨어지고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교회, 교파들이 생겨나고, 종래의 중세 교회는 구교, 카톨릭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종교개혁 운동드로 성당 건축비에 보태기로 합의했으며,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에 헌금하는 사람은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면죄부 판매에 분노한 루터는 95개조 조항의 성명문을 위텐베르그 성당 문에 붙이고, 그것은 교황에게도 보내졌다.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지만 프레드릭의 보호 하에 그는 계속 운동을 할 수 있었고, 이 개신교 운동이 프로테스탄트이다. 그 후 아우구스부르크 의회에서 카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가 유럽의 합법적 종교로 인정됨으로써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1) 종교개혁의 원인중세 교회나 교황권은 봉건 사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는데, 그 봉건 사회의 붕괴가 종교의 변화를 가져왔다. 봉건 사회의 붕괴는 교황권의 쇠퇴를 초래했고, 교황청 및 교회의 부패와 타락도 개혁의 한 요인이며, 이러한 중세 교회의 상태와는 반대로 정신계나 종교계의 새로운 운동과 경향이 태동한 것이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었다.십자군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경제가 상업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로 인한 교황 위신의 실추는 교회개혁을 부채질했다. 교회가 부과하는 세금과 교황청의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동방의 사치품이 수입되고 서방사회는 사치풍조에 휩쓸리게 되었고 사제주의의 횡포로 하나님께 직접적인 교제가 단절된 무리들은 영적인 해갈을 위하여 현실도피에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렇듯 교회와 백성사이에 생겨진 괴리에 새로운 개혁의 가교는 누군가에 의하여 놓여져야만 했다.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 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 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2) 루터의 개혁카톨릭교회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성사에 있다고 하고, 특히 회개의 성사가 인간을 속죄로 인도하는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 속죄는 선행으로 얻어지는데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은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건설을 위하여 면죄를 고시하고, 독일에서 면죄부의 판매를 허락하였다.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되어 마구 팔렸다. 루터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삼으로써 모든 벌과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며 확실히 구제된다고 믿는 사실에 종교적 위기를 느꼈다. 금전에 의한 면죄부의 구입이라는 안이한 행위에는 ‘회개’라는 그리스도신자의 기본적 행위가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논제”에서는 로마에 의한 독일의 재정적 착취를 문제삼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신앙원리를 제시하였다. 루터는 이 논제의 제 1 조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는 일평생 회개하기를 원하였다’고 말하고, 제36조에서 ‘진실한 회개가 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제28조에서 하느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람은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며, 그 믿음의 근거는 성서밖에 없다고 확신하였다. 이 확신은 다시 만인사제를 이끌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