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의 책 중에.. 일본인이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쓴 점에 선뜻 이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다.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어깨 위에 천사는 없었다. 가족 속에서 삶은 노예와도 같았다. 독학과 조선 사회주의자들과의 교유를 통해 그는 근대 일본국가의 가부장제가 제국주의의 ‘모세혈관’임을 깨닫는다. 정점에는 일왕이 가위눌림처럼 군림했다. 그는 연인 아나키스트 박 열의 조국인 조선 역시 왕정의 굴레 아래서 신음하는 것을 발견한다. 같은 처지의 조선을 또 다른 자신처럼 사랑했고, 조선인처럼 일본에 저항하다 ‘대역죄’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년 1월 25일 요코하마에서 경찰서 순사의 장녀로 태어났으나, 무책임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로서의 삶이였다. 무적자이기에 학교에도 갈 수 없었고, 가난으로 얼룩진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가부장적인 가정환경마저 겹쳐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억압과 차별을 받았다. 그러한 가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자아를 발견한 그녀는 그로부터 6년 후인 23세때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의 여죄수 독방에서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불과 4개월 전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그녀의 돌연한 죽음은 당연히 '의혹'으로 번졌다.가네코 후미코는 독립 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 열의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이며 옥중에서 결혼한 부인이다. 스물 세살의 나이에 옥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삶과 사상투쟁은 한 편의 ‘비극적 드라마'라고 느껴졌다. 무적자로서, 여자로서, 나아가 밑바닥 삶을 살면서 그녀 자신의 뜻과 의지를 무시당한 아픔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식민지 조선은 확대된 자아로 해석되는지도 모르겠다.책에는 조선에서 보낸 청소년기에 양녀로 들어간 일가 집에서 ‘친할머니’에게서 받았던 학대 등 ‘비통했던’ 가네코의 어린 시절을, 읽기가 고통스러울 만큼 서술되어 있다. 딸을 ‘외삼촌’에게 팔아넘기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해 가출을 감행한 가네코는 도쿄에서 신문팔이, 오뎅집 일을 하며 밤에는 독학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 사회주의자 등과의 만남 속에 아나키스트로 변화해 간다. 이 과정은 소외자 가네코가 ‘자기’를 세계 속에서 ‘발견’해 직진해 나아갔던 과정이기도 했다.< "자유에 관한 생각이 날카롭지 못한 자의 외국관은 그가 외국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진부할 수밖에 없다." - p.400 > 자기 자신을 국민이나 민족 등, 집단의 일원으로 밖에 구현할 수 없는 사람은 외국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이 속한 국민, 민족, 집단이 규정하는 추상적인 외국관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눈과 귀는 이미 국민 혹은 민족이란 틀로 고정되어버렸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구체적인 사람들로서의 외국인을 볼 수 없게 된다. 근대화기의 많은 일본인들이 근대 국민으로 재탄생하면서 필연적으로 다다를 수밖에 없었던 인식의 한계가 여기서 비롯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쓴 야마다소지는 박 열을 자유에 관한 생각이 가네코 후미코보다 날카롭지 못한 인물로 생각한다. 그는 아무래도 자기 자신보다는 민족에 더 육감적으로 반응했고 그가 주장한 ‘자유'란 실제 경험보다는 상상에 그친다고 본다.너무 갈망하면 정작 꿈을 이룬 현실에서는 그 열기가 금세 식는 법이다.박 열에게 자유에 대한 열정은 금세 민족적 억압이란 문제로 쏟아진다. 반면 후미코의 경우는 자유 그 자체로 팽창하고 그녀의 자살도 그 자유를 억누르려는 세력들에 대한 최후의 저항으로 해석된다.박 열은 전향공작에 굴복하여 천황제를 긍정한다. (심지어 해방 후 친일 잔재 청산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한다.) 일본에서 여러 좌파 계열 중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천황제로 돌변하고 독일의 좌파 계열 중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나치즘으로 전향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후미코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그녀는 국가(천황)의 공작도 뿌리치고, 천황-가부장제적 일본 근대의 틀 자체를 목숨을 걸고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국가도 민족도 가족도 아닌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이 책의 부제,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란 말은 일본에서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퇴행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크며 이 책이 추구하는 주제와도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일본의 맥락에서 쓰인 부제라면 ‘민족적 정체성을 초월한 이상(혹은 개인)'정도를 의미하겠으나, 우리의 맥락에서 쓰인다면 후미코가 '조선 민족의 불행'이란 집단적 동원 코드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가네코 후미코는 흔히 금자문자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일본 이름을 버리고 자신을 ‘금자문자’로 불려지길 원했기 때문이다. 천황제폭살사건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을 때 일본 열도는 물론 한반도도 놀랍기만 한 사건이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인 박열이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어서 세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식민지 청년과 사랑에 빠져 뜻을 같이 하다니....뭐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황이라는 '신성한' 존재의 허구성을 꿰뚫어보고 '도련님'이라고 법정에서 호칭할 수 있었던 가네코의 대담성은 결국 자살로 이어진다. 사실 그녀의 죽음은 의문에 싸여 있었다. 옥중에서 박 열의 아기를 갖게 되자 이를 감추기 위해 당국이 죽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 야마다 쇼지는 당시의 여러 정황들을 철저히 추적해들어가(가네코가 보던 책의 메모 하나까지도)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형무소에 있으면서도 전향의 강요가 끈질 기자 그녀가 자살을 선택한 것임을 알아낸다. 전향에 동요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선택한 것이 자살이라는 것. 아직도 일본은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미미하고....가네코 후미코라는 일본 여성이 보여주는 삶과 죽음이 일본의 미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저자 야마다 쇼지는 말한다. 그리고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이렇게 까맣게 잊혀진 인물, 가네코 후미코..사실 나 또한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유명한 아나키스트 박 열이 일본 여인과 사랑을 한 사실 정도만 고등학교 배운 정도..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그리고 하마마쓰에서 나는 시종일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나는 자아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나온 모든 날들에 감사한다.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벌써 열일곱 살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에서-.화장된 그녀의 유골은 도쿄에 있던 육홍균. 장삼중 등 비밀단체 ‘불령사'의 한인 회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빼돌려져 현해탄 건너 경북 문경에 안치됐다. 옥중에서 의문사한 일본 여인의 유골이 한반도 남단에 묻힌 이유는 그녀가 유명한 한인 아나키스트 박 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골로 돌아온 조선 땅이 그녀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10세 때인 1912년부터 할머니와 고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서 1919년까지 살았었다. 저녁을 굶고 쫓겨난 어느 날 그녀는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주겠다"는 조선 아낙의 호의를 받고 "조선에 머물렀던 7년 동안 나는 이때만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감동한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박열이 ‘청년조선'에 기고한 ‘개새끼'란 시에서 "어떤 강렬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고 있었다"고 느꼈던 그녀는 1922년 봄 박 열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등을 서약한 둘은 아나키스트 조직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 등을 발간하며 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에서 사랑과 혁명을 꿈꾸었다.1923년 9월 1일 유명한 간도대지진 발생 이틀 만에 둘은 예비 검속돼 '천황폭살사건'이라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부풀려진다. 대지진의 공황심리를 엉뚱한 곳으로 분출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6천여명의 조선인을 '사냥(?)'한 일제는 박 열을 천황 폭살을 꾀한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것이다.그렇게 두 사람은 법정에 서게 되어 세상에 알려진다. 식민지 청년 박 열과의 사랑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가네코는 자기의 사상을 당당히 밝히는 법정 투쟁으로 일본 근대사상사에 기억되고 있다. 박 열과 가네코가 아나키스트였던 점이 이용됐다.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와 오스키 사가에가 모두 처형, 살해됐을 정도로 아나키즘은 일본에서 천황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저자는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여성 아나키스트의 짧은 일생을 다루면서도 그녀를 통해 일본 천황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박 열과 가네코는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삼아 천황제와 맞서 싸움으로써 일본과 조선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예심판사는 박 열과 가네코를 격리시키기 위해 가네코에게 일곱 차례나 전향을 권유했으나 가네코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형벌이 사형 하나밖에 없는 형법 제73조 대역죄를 감수했다.대역죄를 적용해 사형을 내렸으면서도 왜 다시 무기형으로 감형하였는지 궁금했는데 이는 천황의 은혜로움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었다.
큰 망설임 없이 빌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를 읽기로 결정했다. 세계제일의 부자이며 천재적이라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나가는지 궁금했다.일찍 책을 빌려 읽어보며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주제인 2장 ‘상거래 - 인터넷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았다.2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컴퓨터가 탄생시킨 인터넷이라는 신경망은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먼저 기존의 주문과 거래 방식을 바꾸어버린다.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생활방식이 아닌 ‘웹 라이프 스타일’라는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며 기업은 ‘웹 워크 스타일’로 운영된다. 인터넷으로 인해 인재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고 아웃소싱이 자연스럽게 일반화된다는 것이다.디지털 변곡점의 결과로서 일어나게 될 세 가지 근본적인 비즈니스 변화에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1) 기업과 소비자, 기업과 기업, 소비자와 정부간의 거래는 대부분 셀프서비스 형태의 디 지털 거래로 대체될 것이다.2) 어떤 비즈니스를 막론하고, 고객 서비스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주기능이 될 것이다. 틀에 박히고 가치가 낮은 일이었던 고객 관련 서비스가 가치가 높은 일, 다시 말해 고 객의 중요한 현안-문제나 요구-에 대해 개별적인 상담을 해주는 일로 바뀔 것이다.3) 고객에 대해 개별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늘고 거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디지털 프로세스를 채택해 효율성을 높이는 일을 여전히 미루고 있던 기업들도 어쩔 수 없이 내부 디지털 프로세스의 채택을 서두르게 될 것이다.』책에서의 내용은 위와 같이 요약된다.인터넷이 고객의 기대수준을 높이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70여 개 이상의 온라인 중개회사들은 현재, 저가의 셀프 서비스 방식 모델이 결국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고는 임계량에 도달해 버리고 말, 몇 안 되는 모델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심지어 저가의 온라인 시장에서 일하던 회사들마저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고객이 지불할 "마법의 조합"을 찾으려 애쓰며 상은 쇼핑뿐만 아니라 브라질의 방코 브라데스코가 구축하고 있는 인터넷 뱅킹 시스템에서도 성공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전자상거래가 활기를 띠게 되면서, 단지 중개인들만이 고객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창의적인 인터넷 사용방법을 찾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전자거래를 경험한 고객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친구들에게 얘기할 만큼 충분한 만족을 얻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이 레포트를 쓰기 바로 전에 인터넷 사이트에서 마우스를 구매했다. 인터넷에서 판매 사이트를 검색하여 들어가 구매하고자 한 마우스를 찾고 엄마의 신용카드로 전자 결제를 했다. 평소에도 다른 물건들을 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을 통해 구매하는 편이다.내가 이렇게 몸소 전자상거래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전자상거래에서 느끼는 것은 내가 직접 매장을 찾아가 구매를 하는 것과 같은, 혹은 더 큰 만족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판매하는 회사들이 많은 부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2장 부분을 읽으며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인터넷 또한 전기에 의존하는 범세계적인 통신 인프라스트럭처 이다보니 인터넷의 대중적 확산을 '전기 생활양식'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은 우리의 생활양식을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전기 생활양식과는 다르다. 나는 그것을 '웹 생활양식'이라고 부른다. 전기 생활양식과 마찬가지로 웹 생활양식도 그 응용품들의 급속한 혁신이라는 특징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 고속접속을 위한 인프라스트럭처가 임계량에 도달했으므로,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 p.150 』인터넷이 전기에 의존하는 것이나 그것이 창출해내는 효과는 전기 생활양식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인터넷이 개개인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았듯이 이젠 기업의 경영방식 또한 변화시켜가고 있는 것이다.『기업들은 이제 단순한 거래는 인터넷 안으로 옮기고 정보 공유를 위해서 뿐 아니라 일상적인 통신에상의 매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이런 시나리오에서는 더욱 더 많은 영업사원들이 컨설턴트로 전환될 것이다.』인터넷으로 인해 고객들의 위치가 향상(?)되며 인터넷을 통해 직접 기업과 접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고객은 고객의 위치에서 최상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고 기업 또한 불필요한 부분의 노동력을 줄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기업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디지털 시대에 성공을 거두는 기업의 핵심원칙 중 하나인『12. 디지털 도구를 이용하여 고객들이 스스로 문제점을 해결하도록 도와줘라.전자상거래가 번창해짐에 따라 인터넷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거래관계와 고객들을 강화하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있는 것은 중간 상인들만이 아니다. 전자상거래를 단순한 디지털 현금 출납기 이상으로 여기는 모든 상인들이 가장 번창할 수 있을 것이다.델사는 전자상거래로 옮겨간 최초의 대기업 중 하나다. 매출액이 180억 달러가 넘는 세계적인 컴퓨터 공급 업체인 델사는 96년 중반에 온라인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의 온라인 영업은 주당 100만 달러에서 하루 100만 달러로 급속히 증가했다. 곧 그 액수는 하루 300만 달러로, 그리고 다음에는 500만 달러로 급증했다. 이제 그 액수는 1,400만 달러로 늘어났다. 마이클 델은 현재의 사업방식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얼굴과 얼굴, 귀와 귀, 키보드와 키보드의 다른 결합이다. 그 각각은 모두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 인터넷은 사람을 대체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을 한층 효율적으로 만든다.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웹으로 옮기고 고객들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는 판매 요원들을 해방시켜 고객들과 한층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말한다. 기민한 회사들은 인터넷 서비스와 개인적 접촉을 결합하여 고객들에게 이 두 가지 방식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혜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것이다. 순수한 거래는 인터넷을 이용하고, 정보공유를 위해서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이용하고, 최대의 부가 속도로 확산될 것이다. 책 속에서 그가 예로 드는 기업들은 아직 인터넷이 오늘과 같이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시대의 속도를 앞질러 나가서 디지털 시대의 이점을 향유하는 기업들이다.광속으로 변하는 시대의 중간에 서있는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가든지 뒤에 쳐지든지 아니면 적어도 시대의 속도에 발맞추어 같이 나갈 수 있는 생각의 속도이다. 빌 게이츠는 리처드 맥긴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대처하지 않으면 몰락한다.” ‘과속은 곧 죽음’이라는 통상적인 표어를 반대로 이해하여 실천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내가 실생활에서 겪는 한 일편을 책 속에서 풀어낸 것 같아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였다.그리고 3장에서 정보관리에 관한 내용은 내가 앞으로 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대처하고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게 해주었다.3장의 대략적인 내용은 전략적 사고 향상을 위한 정보관리 사람보다 우월한 정보 분류와 검색능력을 가진 컴퓨터는 지식관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개개인의 능력을 기업 IQ로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현장에서 컴퓨터는 최적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것은 혁신적인 도전을 가능하게 해주며 성공가능성도 높여준다는 내용이다.책을 읽으며 빌게이츠라는 이름이 단지 MS라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가 앞서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단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고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돌려버리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단지 정보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이 우수하다거나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난 것 같다.책 속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의 능력이라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단지 그 정보를 정보로서 그치게 나둘 것이냐 아니면 가공하여 또 다른 정보로 유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질이 아닐까속에서 바로 기업의 최고경영진에게 전달되는 단계다. 경쟁자, 납품 업체의 움직임도 예외는 아니다.빌 게이츠는 기업이 디지털 신경망을 갖추기 위해서는 우선 조직 내 의사소통을 이메일로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는 것은 힘'이지만, 힘은 숨겨놓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지식에서 나온 다. 이메일이 조직 내 정보를 빠르게 전달할 뿐 아니라 거르지 않은 생생한 내용을 조직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됐다.그는 기업의 경영과 관련된 각종 자료는 온라인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디지털 피드백 통로를 만들고, 중개인을 제거하기 위해 디지털 배달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디지털 신경망의 중요성은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나 개인도 디지털 신경망을 통해 훨씬 빠르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빌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빌게이츠의 놀라운 사업능력의 천재성도 발견할 것이고 그만의 경영기법의 특수한 내용들이 주를 이룰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놀랄 만한 전문지식이나 천재성도 발견할 수 없는 책이었다. 단지 빌게이츠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조금 더 나은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시할 수 있는 경영자로서 자신의 이득보다는 사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여 주었으며 진실로 중요한 것은 번뜩이는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부단히 애쓰고 그런 과정에서 얻어낸 판단을 실천해 나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책이였다. 이 책에서 빌게이츠는 모든 기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그 비용 대비 효과에 대하여 망설이고 있는 부분을 과감히 깨고 빨리 정보의 회전속도나 경영상의 의사결정과정의 효율성을 위하여 기업을 디지털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기업인 MS사(마이크로 소프트사;미국)이나 GM(제네날 모다.
나는 누구인가?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 어떤 어려운 수학 문제보다도 답하기 힘든 질문일거라고 생각한다. 제 아무리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러한 물음을 던져 준다면 선뜻 답하지 못하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나 역시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우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겉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겉 모습만으론 나를 알기엔 뭔가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다.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내면적인 모습이 어떠한가하고 돌이켜 보았다.하지만.. 헉! 정말 며칠을 두고 나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피상적인 모습만 떠오를 뿐 나의 본질을 알기에는 뭔가의 공허함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나는 며칠동안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이 레포트를 작성해가는 짧은 과정 중에서 더 나를 완전히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돌아 볼 수 있었던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성 경 : 사사기 6 : 11∼16근세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는 본회퍼다. 독일 나치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순교 당한 사람이다. 그가 옥중에서 쓴 편지를 연구한 책이 수백 권이고 그에 관한 논문도 수천편이 된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태연히 명랑하게 확신에 차서 영주가 성에서 나오듯이 감방에서 내가 나온다. 자주 말들 하지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자유로이 다정스럽고 밝게 명령하는 사람처럼 간수들과 내가 말한다고 자주 말들 하지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침착히 미소 지으며 당당히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불행한 날들을 내가 참고 있다 말하기도 한다.나는 정말 남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만 아는 존재인가? 새장 속 새 같이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들고 목 졸린 것처럼 헐떡이며 몸부림치고 색과 꽃과 새 소리를 갈구하고 부드러운 말 다정함을 사모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해 몸 떨고 무서운 일이 올까 두려워하고 멀리 있는 친구를 그리워 낙심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데 지쳐 허탈에 빠지고 의기소침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다.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오늘은 이렇고 내일은 저런 인간 인가? 양쪽 다 나인가? 사람 앞에서 위선 떨고 스스로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약자인가? 아니면 내 속에 있는 건 승패가 결정된 싸움에서 흩어져 도주하는 패잔병인가?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에 나를 비웃는다. 누구건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이것은 본회퍼만의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으나 현실에 부딪히면 불안하고 두렵다.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태어나고.. 사회화 과정을 거쳐서 지금 대학교 1학년생이 되기까지.. 아직도 사회화 과정 중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알아야 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늘어만 간다.
..PAGE:1구석기시대지구상에 인류(人類)가 출현(出現)한 것은 50만년 전이다.특히, 우리도의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의 두루봉 동굴은 약 50만년전 다섯사람이 2천7백80일 이상이나 동굴안에 살았던 것으로 확인된 곳이다.이 시대 인류는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어떤 일정한 장소에 주거를 정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곳이 동굴주거(洞窟住居)였다. 애초에는 석회암동굴과 같은 자연동굴을 이용하다가 점차 강변(江邊), 대지(臺地)에 진출하여 거주하면서 어로(漁撈)나 수렵(狩獵) 생활을 하였으며, 큰 바위틈이나 바위 그늘의 자연물을 이용했거나 인공적(人工的)으로 돌을 쌓아 만든 돌담그늘 등에서 주거(住居)를 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당시의 보편적인 주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의 주거유적(住居遺蹟)을 통해 한반도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주거를 건축적(建築的)인것으로는 평가할 수 없으나 이땅에 인류가 나타나면서 생활을 위한 주거의 흔적들인 것이다...PAGE:2구석기시대금굴 :1967년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동굴 유적지. 이동굴의 퇴적층에서 남한에서는 드물게 대량의 석기와 동물 뼈가 출토되었다.그러나 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에서 살랐던 사람들이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인지는 현재로서 분명치 않다...PAGE:3구석기시대지금부터 약 50만년전부터 약 만년전까지의 사이 일반적으로 타제석기(打製石器)를 도구로써 사용하며 주로 수렵, 채집을 생업으로 함. 아직 土器나 마제석기를 모르는 인류문화상의 한 단계로 정의하고 있다.구석기시대는 前期, 中期, 後期로 세분되며 각각 특색있는 문화상을 나타낸다< 前期 >20-30명 가량의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 거동이 느린 동물을 포획하여 식량으로 하고 나무나, 풀, 열매를 따먹는 아주 단조로운 생활을 함, 더운 계절에는 거의 의복을 입지 않았다.< 中期 >문화가 더 발달되어 활을 사용하여 달리는 동물이나 날으는 조류도 포획 수렵 것으로 보아 처음 불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땅을 파내고 짖는 움집은 원래 추운 지방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구석기시대이래 이용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PAGE:6신석기시대신석기시대에 이르러서 정착생활을 시작함구석기시대의 채집經濟에서 농경과 목축의 재배經濟 단계로 옮겨짐이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은 대부분 야외에서 행하여 졌고, 도구사용(어망, 낚시질로 물고기를 잡고, 활을 쏘며, 작살 혹은 몽둥이로 짐승을 잡거나 함정을 만들어 짐승을 사냥)짐승가죽으로 간단한 옷을 만들고 어망을 짤 줄 알고 있었다.신석기 말기에 간단한 農耕 시작..PAGE:7신석기시대서울 암사동 움집 주거지;남한의 대표적인 신석기 집자리 유적. 1926년 대홍수 때 처음 발견되었으며, 발굴은 1967년 이후부터 이루어졌다.기원전 6000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은 이런 움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130군데나 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 유적지는 대부분 이곳처럼 큰 강가, 해안가, 호숫가, 섬 등 물가에 자리잡고 있다.▲신석기 마을 사람들움집/ 원시농경 / 집짐승기르기 / 채집 / 삶의 여유 / 고기잡이..PAGE:8신석기시대 (발굴을 통해 알려진 자료)① 일반형 타원형이거나 부정원형-- 지름 대략 6m 내외, 깊이 60cm정도작은 규모(황해도 봉산 지탑리 3호)--지름 3.5m깊은 움집(평양 궁산리 1호) 깊이 1.2m② 바닥은 흙바닥이거나 돌을 깔아 정리하기도 한다.오산리 1호, 서포항 3호는 바닥의 진흙을 다져서 구웠다.③ 바닥에 화덕을 설치하나 그 위치는 일정하지 않다.화덕 주변에 돌을 더 설치하여 여열을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암사동 움집은 평면과 화덕 모양이 비슷하다.궁산리 2,5호 집에서는 화덕 옆에 진흙으로 똬리처럼 시설.④ 저장용의 질그릇 항아리를 바닥에 묻어 세우기도 한다.지탑리 1호집 저장시설은 5곳. 그 중 하나는 화덕 옆에 위치.⑤ 한편에 출입구가 있다. 발디딤을 시설하고 오르내리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한강다마루도리 ; 지붕 가장 꼭대기에 걸리며 서까래를 지탱한다. 움집에는 없던 새로운 구조물이다.기둥 ; 지붕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도록 가장 굵은 나무를 썼으며, 자연 그대로 나무의 가지 쪽이 위로 가 있어 안정감이 있다.쪽구들 : 끝에서 불을 떼면 불기운이 통로를 지나면서 위에 얹힌 넓적한 돌(구들장)을 데운다. 이 시대에 처음 등장한 난방 기구이다.긴마루 도리 위에 차례로 서까래를 얹었으며, 기둥이 절반이상 지상으로 올라 왔다. 가옥이 지상으로 올라올수록 채광과 통풍에 유리하고 드나들기가 편리한 반면, 비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난방에는 불리하다. 이 집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화덕을 두 개로 늘리고 쪽구들을 설치하였다.화덕 ; 조명, 취사, 난방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 주므로, 여전히 집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물이다.지붕재료 ; 알곡을 털고 남은 짚단은 좋은 지붕재료가 된다. 그러나 짚단은 쉽게 썩기 때문에 한 해나 두 해 가 지나면 새로운 것으로 바꿔야 한다.도리 ;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 주는 목재로 기둥에 주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는 나무를 썼다...PAGE:13고조선(청동기, 초기철기시대)화로가 양쪽 두군데에 자리잡고 있는 비교적 큰 집이다.이 가족은 앞쪽을 부엌으로, 뒤쪽은 안방으로 활용하고 있다.용도에 맞게 집안 공간을 구분해서 쓰는 모습이 신석기인들의 집안생활과 확연히 구분된다.저장용 토기 ; 다른 그릇보다 크고 물건을 넣고 꺼내기 쉽도록 아가리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시루 ; 밥이나 떡 뿐 아니라 채소나 물고기, 육류를 찌는데도 이용되는 만능 조리 기구이다.가마솥 ; 음식을 끓이거나 시루를 얹을 때 쓰는 가장 기본적인 조리기구이다.스금그릇 ; 암염이나 해조류에 붙어있는 소금을 모아 두었다. 곡물을 주로 섭취하는 사람들에게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식품이다.대접 ; 청동기 시대에는 주식을 중심으로 개인별 식기가 사용되었다...PAGE:14고구려고구려의 주거에 관한 기록으로는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소수림왕 이전의 기록인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를 연상시킨다.성안에 사는 사람들 성안은 관청과 귀족들의 집, 절, 시장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왕과 귀족, 스님, 군인, 수공업자와 상인, 화가와 장의업자들이 이러한 도시의 시민을 이룬다.성밖 마을 사람들 계곡이나 하천가 좁은 평야지대에는 ‘나’라고 불리는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PAGE:16기원전부터 혼강유역의 졸본지역과 압록강유역의 국내성 지역에는 계곡사이를 흐르는 하천과 평아를 따라 ‘나’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었다.북만주에 있던 나라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세력은 이 마을들을 기반으로 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마을들을 서로 합치고 커져서 고을들이 되었으며 여러 고을 가운데 중심이 되는 고을 주위에는 평지성이 세워졌다.그리고 성안의 ‘도시’와 성 밖의 ‘농촌’이라는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수레 운송수단으로 수레가 많이 쓰인 나라였다. 그만큼 도로도 잘 닦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레는 주로 소가 끌었고 왕과 귀족도 외출할떄는 가마가 아닌 수레를 타고 다녔다.토기굴뚝 바닥 없는 토기를 엎어서 만든 독특한 모양의 굴뚝. 삼국시대에 널리 쓰였다.다락 창고 ‘부경’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부경이라고 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대장간 철제도끼로 땔감나무를 쪼개는 사람 왼쪽으로 쇠를 벼리는 대장장이가 보인다. 철기가 널리 쓰이면서 이처럼 수공업자인 대장장이가 등장했다.고구려..PAGE:17초가집일까요 기와집일까요경상남도 창원 다호리에서 출토된 집모양 토기. 가야유물이지만 고구려 다락창고 모양을 추측하게 해 준다. 다락창고는 습기나 짐승의 습격을 피해 평지보다 높게 지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이런 창고를 ‘부경’이라고 했다.고구려다락창고해방전 평양에서 출토된 집모양 토기. 높이 8미터, 고구려의 가옥형태를 짐작하게 해준다.우진각 지붕의 단칸집으로 창문과 출입문이 표시되어있다. 추운 지방인 만큼 열손실을 줄이기 위해 창이 작은 것이 특징이다...PAGE:18고구려아차산 보루설치한 것으로 보인다.성안의 호화주택; 황해도 안악고분1호분 벽화(4세기말). 이층전각(중앙) 주위에 있는 지붕 있는 담을 두르고 네 모서리와 담 벽 가운데 기와지붕을 가진 대문을 두었다. 기와지붕 양쪽에 뿔 모양으로 장식된 치미가 인상적이다...PAGE:22부뚜막 평북 운산 용호동 1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부뚜막. 길이 66.7㎝. 아궁이와 굴뚝의 방향이 ‘ㄴ’자로 꺾이는 고구려 특유의 형태를 보인다. 중국것은 직선방향이다. 고구려에서는 주로 흙으로 만든 것이 나오며 철 제품은 이것이 유일하다.외양간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 외양간 안에서 색깔이 다른 소 세마리가 구유속의 여물을 먹고있다.우물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 ‘우물정’자가 있고 물 긷는 여자이름(아광)도 있다. 우물 주위에 항아리, 물구유, 도르래가 보인다.조리하는 사람들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357년). 부뚜막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는 여인. 시루 앞에서 요리에 열심인 여인. 탁상에 반상기를 두 줄로 쌓아 올리는 여인이 표현되어있다. 뒤쪽 고기 창고에는 개, 사슴 등의 고기가 갈고리에 걸려있다. 부엌앞에는 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지붕 오른쪽 끝에는 까치 한 마리가 앉아있다 ...PAGE:23귀족집의 손님맞이:중국 지린성의 무용총벽화. 주인과 손님이 식탁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머리가 짧고 주름치마를 입은 두사람이 손님인 스님을 보인다.각자 앞에 말굽 모양 다리를 한 소반을 놓고 떡이나 과일, 차, 식사 등을 차렸다. 두 상의 뒤편에도 상이 네 개 놓여있으며, 상에 올린 그릇들에는 음식이 높이 쌓여 있다.검은 그릇은 당시 고급식기로 사용되던 칠기이다. 한사람이 하나의 상을 받는 독상 차림이 재미있다.고구려..PAGE:24안학궁은 국내성과 달리 궁을 둘러싼 편지성이 따로 없고 귀족들과 평민들은 궁 밖에서살았다. 그러니까 안학궁은 평지성. 뒤편에 자리잡은 대성산성이 산성의 역할을 한 셈이다.안학궁의 규모와 구조는 1975년부터 시작된 발굴로 밝혀졌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