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1
검색어 입력폼
  • 자소를 통해서 본 20세기 초 중국의 모습
    ‘자소’를 통해서 본 20세기 초 중국의 모습자소(自梳)란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재수생활을 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홍콩영화에 푹 빠져 있던 나는 특히 여배우들 중에서 원영의와 더불어 양채니를 가장 좋아했었다. 그래서 양채니의 작품마다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가령과 함께 주연한 영화가 개봉이 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하지만 양채니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난 보러 가지 않았었다.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나에게 ‘자소’는 이쁜 화면의 동성애영화로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뒤늦은 자소를 보고나니 ‘내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었구나’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자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영화에 대한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자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줄거리 및 감상영화는 어떤 한 여자가 멋진 다리를 배경으로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작업을 시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건축설계사로 보이는 이 여자는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은 연령의 남자들에게 서슴없이 작업에 대한 질책을 한다. 이 장면은 웨이로 대표되는 현재의 여성상을 잘 그리고 있다 생각된다.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며 그로 인해 남자들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고 거침없이 대하는 모습은 홍콩여성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웨이는 그 무리 중에 섞여있던 한 남자에게 어떤 한 여인을 아버지에게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는데 그 여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고 맹세한 ‘자소녀’라는 것이었다. 섹스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면서 어떻게 평생을 독신으로 살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웨이의 모습 또한 홍콩여성 혹은 오늘날의 여성의 사고관을 어느 정도 비춰주고 있다 생각한다. 장면은 바뀌어서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보여준다. 웨이와 관련이 있는 그 여인이 타고 있을 기차가 거의 역에 들어왔을 때 장면은 또 바뀌어서 웨이와 그의 애인을 비춰준다. 차안에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은 문제의 그 여인에게 현장을 들켜버리고 만다. 완이라고 하는 이름의 이 여인은 웨이와의 옥신각신한 대화에서 밀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성격을 보여준다. 이때 웨이와 완은 영어를 섞어서 쓰는데, 웨이는 홍콩에서 일을 하는 여성이니 영어를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완이 영어를 쓴다는 것은 조금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외국인의 집에서 일을 해 영어를 쓸 줄 안다는 완의 말에 의문이 사라졌다. 이 여인의 나이가 꽤 있는 것 같은데 영어를 쓸 줄 안다면 젊은 시절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을꺼란 추측을 하던 중 웨이의 “어떻게 평생을 독신으로 살 수 있죠?”란 질문이 들려왔다. 웨이의 말에 완은 짙은 감정이 섞인 어조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완의 회상은 복, 장수, 자유, 순결, 강인함, 우정, 행운, 평화의 여덟 가지 덕목을 계속 반복하며 한 여인의 둘레에서 여인들이 머리를 따주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바로 이 의식이 자소녀가 되기 위한 의식으로 보여지는데 앉아있는 여인의 얼굴이 밝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이 여인의 이름은 푼으로서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그 사연은 이내 곧 밝혀지는데 바로 부모가 관리의 집안에 푼을 매매한 것이었다. 푼은 그것이 싫어 자소녀가 되려고 하던 중 아마도 관리의 명령을 받았을 사내들이 쳐들어 온 것이었다. 푼의 어머니조차 여자의 길은 어쩔 수가 없다며 푼을 궁지로 몰아가던 중 한 여인이 자신의 전 재산을 던지며 푼의 목숨을 구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빈곤한 집안의 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소녀가 되려했던 푼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장면은 바뀌어 비단공장을 비춰주는데 여기가 바로 광동의 대본영이라고 불려지는 순덕현의 잠사공장이었다. 푼은 자소녀의 의식을 다 치뤄 명실상부한 자소녀가 되었는데 대부분의 자소녀들이 일하고 있는 비단공장에서 그녀 역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부분이 바로 이 지역에서 금란회가 발생하였던 원인 중의 하나를 나타내는 장면인 것이다. 푼의 경우는 혼인을 거부하여 자소녀가 되었지만, 다른 자소녀의 경우는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논문에서처럼 여성의 노동력이 절실한 잠사업에서 경제력을 확보한 여성들이 결혼으로 인한 위치의 상실을 기피하여 자소녀가 된 경우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푼은 여기서 사장이 데려왔다는 노란옷의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이 바로 푼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그 은인을 대신해 뺨까지 맞은 푼이 소중한 인연을 갖게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된다.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는데 과거에서의 푼과 현재의 웨이가 비록 사고방식이나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동일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인물로 생각된다. 현재에서의 웨이는 애인에게 버림받고 부친과의 약속 때문에 순덕현으로 가게 된다. 현재에서의 대화 중 상당부분이 영어를 섞어서 쓰고 있는데 이것 또한 현재의 홍콩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완의 머리를 빗겨주는 푼을 보여주고 있다. 이때 완의 과거가 조금 드러나는데 어린시절 포주에게 팔릴 때 받은 귀걸이를 푼에게 주는 장면에서이다. 어릴 때 포주에게 팔린 경우라면 푼의 경우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현재 완의 모습은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나는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겼다. 완은 푼의 경우처럼 포주에게 팔리는 것을 거부하고 자소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럴 수는 있었지만 완이 자소녀의 길을 거부하고 기생이 되었던 것일까? 완의 현재모습을 본다면 후자의 경우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문제는 그때 사회의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만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완의 머리를 정리하던 푼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남자는 단오절에 용선놀이를 하던 이였다. 푼은 그와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차라리 자소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용선놀이의 장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람들을 통제하던 사람들이 국민군이었다는 점이다. 중국공산당과의 치열한 대립으로만 각인되어있던 국민군이 저기서 인원통제를 하고 있다는 점이 나로서는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에서 쓰인 영화의 제작비이다. 영화의 전체제작비가 1300만 홍콩달러였다는데 이 용선놀이 장면에서만 무려 절반가량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용선놀이가 감독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장면이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실감나게 느껴졌다.영화는 점점 흘러가다 이번에는 완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 시대 여성의 비참함을 보여주었다. 남편의 사업을 위해 동행한 완은 생각지도 못했던 남편의 배신에 한 군인과 비참한 관계를 맺게 된다.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완조차도 남편의 말 한마디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노리개 감으로 전락해버린 것이었다. 비참한 완의 모습과 더불어 푼 역시 군인의 집 밖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 모습 또한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 대체로 비참했다는 점을 느끼게 해준다. 이때도 역시 국민군이 순찰을 도는 장면이 나오는데 완을 탐하는 군인의 집 앞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고 순찰까지 자주 도는 걸 봐서는 꽤 높은 신분의 군인이라고 생각된다. 완과 푼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남편과 그의 부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복수를 해준다. 그리고 완은 자신의 몸에 문신 비슷한 것을 새기는데 자소녀가 되는 다른 방식의 의식이라고 생각한다.영화의 현재에서는 웨이가 남자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대사가 나온다. 그것은 바로 웨이가 한 말인 “그를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요.”라는 말이다. 현재의 여성상으로 상징되는 웨이 역시 남자를 위해서는 다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은 다소 의외였다. 결국 시대의 환경에 의해서 태도나 성격 등이 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건 남자에 대한 여성의 태도를 말하고 싶은 것인지 감독의 의중이 궁금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지 못한 걸 후회하는 웨이에게 완은 사랑은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자소녀의 결혼을 보여주고 있다. 자소녀의 결혼이란 말조차도 모순돼 보이지만 그 결혼이란 단지 상징적 의미의 결혼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가문을 산다.”라고 표현되는 이 결혼은 자소녀가 죽은 후에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되기 싫어 결혼을 하는 것이었다. 결혼을 하지만 일체의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불락가의 형태로 봐도 되는 것인지 그 점이 궁금해지기도 하였다. 어쨌든 여기서 이 여자는 한 가문의 빚을 갚아주는 등의 행동으로 그 가문을 산 것으로 보이는데 정말로 그렇다면 그 지역 여성 특히 자소녀들의 경제력이 상당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결혼의 상대방은 바로 푼과 서로 좋아하던 씽이라는 남자였다. 결국 씽과 푼은 서로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사랑을 나누는데 완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죽음까지 거론하며 다그친다. 여기서 죽음까지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과연 푼이 자소녀의 신분에서 정을 통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비록 진실된 결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궁금한 점이다. 내 생각에는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소녀들은 금란회에 가입이 되어있다고 했는데 그 금란회의 성격이 비록 공개조직이라고는 하나 규율이 엄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소녀가 독신의 맹세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면 그건 중죄 중에서도 최고수준의 죄라고 생각한다. 금란회의 규율이 과연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지회와도 관련이 있는 조직이니만큼 자소녀의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했으리라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07.05.26| 4페이지| 1,000원| 조회(374)
    미리보기
  • 1980년대 이후 중국영화
    강 좌 명: 생활사로 본 동아시아사중국, 대만 그리고 홍콩의 영화역사문화학부 권순명◆중국영화(1980년 이후)▶1976년 1월, 9월-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 인물인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망-이후 화궈펑이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2년 만에 덩샤오핑에 의해 밀려남-덩샤오핑은 경제적자유화와 개혁?개방 정책을 내세움▶1978년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이하 11기3중전회)탈이데올로기에 대한 요구가 공개적 표명됨, 계급투쟁노선⇒실용적 현대화 정책으로 대체 ☞앞으로 중국이 현실적?경제적 발전을 지향해 나갈 것을 의미함But 1970년대와 1980년대에도 공식 정치노선이 예술과 영화를 지배함-정부의 노선을 따르는 예술가와 비평가, 정치적 지시를 수용한 대중들은 1990년대 중반까지도 변함없이 영화를 국가 이데올로기적 예술로 간주☞여전히 영화의 정치적?사회적 기능이 중시, 형식은 무시됨▶1970년대 말-마오쩌둥의 미망인 장칭을 포함한 이전 권력자들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단죄☞이는 동시에 많은 희생자들이 복권됨을 의미☞살아남은 영화제작자와 예술가에게는 다시 자신의 직업을 찾을 수 있는 기회-1978년 45편의 극영화 제작, 1981년 105편, 1984년 143편의 영화가 상영-영화부문은 어느 장르보다 빠르게 구조적 재건이 이루어짐-폐쇄되었던 영화스튜디오와 극장들은 다시 문을 염, 새로운 촬영소가 난닝과 창사에 설립-1978년 베이징 영화학교와 합작으로 어린이 영화 전문 스튜디오가 세워짐☞베이징 영화학교: 문화혁명기에 12년 동안 폐쇄됨, 1978년 다시 문을 열고 학생을 모집, 대중을 위한 영화잡지와 전문잡지 그리고 단행본을 발간함※이 시기 새로 제작된 영화들의 특성-1950년대의 미학적 특징과 내용을 거의 그대로 답습-영화제작자들은 공식규정에 맞게 제작방향을 정함-개혁?개방정책과 현대화 정책을 찬미하는 영화도 제작됨☞이러한 영화들은 인민을 정부정책과 경제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냄※1978년 베이징에서 제작된 두 편의 영화「남쪽 변경의 이른 봄」(1978, 감독: 궈쥔?샤오랑)제작자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문화혁명의 문화?정치적 규정과 당시의 권력자들에 의해 선전된 대중문화에 맞추어 자신들의 제작방향을 설정함. 초인적 의지로 혁명을 수행하면서 상투적이고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한 여성영웅을 그림.「대하의 세찬 흐름」(1978)2부작 영화로서 낡은 도그마와 새로운 정치 사이의 긴장감이 잘 드러나 있다. 과거의 전형에서 벗어난 주인공과 시각적 표현이 돋보임. 중국영화의 예술적 전환점으로 평가받음.☞「대하의 세찬 흐름」은 하나의 모범영화로서의 역할을 함. 이후 1984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정치노선을 표방하는 일련의 영화들 제작됨.Ex)「등」, 「모진 역정」, 「작은 꽃」, 「법정 안팎」, 「전선의 부름」등▶1970년대 후반-이후 중국영화 제작편수는 증가함-영화의 주제는 개혁문학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회와 그 사회의 특별한 문제들이 주류-한편으론 마오쩌둥 지지세력들 사이의 갈등 또는 젊은 개혁가들 사이의 갈등을 다룸-1970년대와 1980대 초까지 여러 장르에서 정치적 요구들은 변함없이 강조됨☞다만 영화는 사회주의 건설에 기여해야 한다는 과거의 슬로건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체된 것But 결과적으로 국가정책에 충실한 영화들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가 없었음▶1978년 이후(베이징의 봄)-덩샤오핑은 1978년 이후 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경제 부문에만 한정, 사회?정치개혁은 기피☞그러한 개혁은 인민들이 미래를 위해 과거의 잘못들을 되돌아보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예술의 자유도 거의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술을 국가정책에 편입, 억압함But 그의 정책은 의도와는 달리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저항의 기회를 제공-1970년대 후반 민주화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폭넓은 전선이 형성됨-이들은 노동자 지도자 웨이징성(魏京生)과 많은 지식인?학생?예술가들의 주도 아래 4개 현대화 외에 민주주의를 요구함. 이 때 용기 있는 예술가들은 당 노선을 반대하고 개인적인 예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 그들의 투쟁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중국의 자유로운 예술활동의 토대를 마련해줌. 그 토대 위에서 세계로 개방된 중국의 영화와 문학은 1949년 이후 처음으로 호평을 받음☞이 시기 영화들은 사인방 비판으로 과거의 의미를 축소시킨 당 노선에 대항, 덩샤오핑의 정책과도 직접 관련이 있는 최근 역사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보임.대표적인 작품: 바이화(白樺)가 시나리오를 쓰고 펑닝이 감독한 「짝사랑」(1979)▶1985년 9월 23일 중국공산당 전국대표회의덩샤오핑은 “예술은 이제부터 국가나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에 먼저 기여해야 한다”고 제창☞예술이 경제적인 면에서 국가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야한다는 것-1949년 공산당의 집권 이후 중국에서 사라졌던 오락영화는 1980년대 초에 첫 선-1984년에는 영화예술의 스펙트럼 안에 수용되었으며 1987년 이후에는 빠르게 확산-영화부문에서도 시장개방과 상업성을 고려-범죄영화와 무협영화 등 상업영화 모든 장르들을 제치고 이미 70%(1989)의 시장점유율☞이 영화들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액션을 살리기 위해 정치적 표현을 완전히 배제-외적으로는 탈이데올로기화와 수익성을 겨냥, 내적으로는 경직된 당 노선의 요구를 충족-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영화가 설정한 오락성과 관객 만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But 이데올로기적 단순함, 정권 유지 그리고 표면적 조화를 겨냥한 당 노선을 엄수-1980년대 범죄영화나 전쟁영화 또는 모험영화들이 큰 인기를 누림-수입영화의 시장점유율이 30%를 넘지 못함(중국 정부의 보호규정)-미국 영화는 대개 B급 영화들만 상영됨-1980년대 중반 이후 수많은 무협영화와 스릴러영화를 중국에 수출한 홍콩은-중공에서 제작된 영화들 가운데 어떤 영화도 홍콩에 버금가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함「흑갑첩혈기」또는 「마법의 채찍」은 홍콩영화를 흉내 낸 싸구려 모조품들「마작사건」(1987), 「모델의 죽음」(1987), 「골든 트라이앵글 기습작전」(1988)☞미국식 코미디 영화와 범죄영화는 국제적 관객의 취향을 계산에 넣은 작품But 텔레비전, 비디오, 디스코텍 또는 가라오케 등 새로운 오락문화의 확산에서 기인한 젊은층 영화관객의 감소현상을 막을 수는 없음☞연간 영화 관람객수: 1987년 20억 5천만 명 → 1992년 11억 4천만 명으로 감소▶1990년대-예술 활동을 억압하는 정부의 조치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변함이 없음-정치적 반대는 예술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부문에서도 용납되지 않음-작업금지와 상영금지가 공산당의 변함없는 예술정책☞1994년 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감독 역시 탄압을 받음. 당시 신작 「인생」이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출국하려던 시기. 그는 「상하이 트라이어드」의 제작비를 압류당했으며 외국과의 합작과 1995년 뉴욕 영화제 참석도 금지 당함-1990년대 후반에도 영화에 대한 통제는 여전, 1996년 7월에는 검열, 영화수출입, 작품개작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계속해서 늘어나는 사적인 제작과 배급을 엄하게 규제함-1988년 사적영화제작이 가능해진 이후 점점 늘어난 상업적 오락영화 부문에는 새 규정이 적용되지 않음. 범죄영화, 코미디, 타이완 영화의 전형을 따라 본토에서 촬영된 멜로드라마들, 중국 오락영화의 대명사가 된 무협영화 등은 모두 상업적인 동시에 비정치적이라는 공통점. 시장경제의 도입과 국가의 지원 아래 이런 영화들은 홍콩?타이완?미국 등지에서 수입된 영화와 함께 중국의 스크린을 지배☞「피에 물든 칼」(1991, 감독: 양치톈), 「일본 무사」(1992, 감독: 장신옌), 「청춘 가라오케」(1991), 「청사」(1994, 감독: 쉬커) 등-이러한 상업 영화들에는 국제적 감각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의 재미에 대한 욕구가 반영됨-수용된 미국과 홍콩의 양식들은 중국의 특성을 없애고, 현대 소비문화를 확산시켰음-상업영화들은 밝은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권력자들은 물론 권선징악과 전통 미학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도 정치가 요구하는 사회의 조화를 보여줌But 이런 혼혈적 특성을 보이는 영화들은 영화사적 측면이나 영화 미학적 측면에서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음★제5세대 감독들▶제5세대란?-문혁이 종결된 이후 1978년 중국에서 정식 대입고사가 부활되었을 때 베이징영화학교에 입학해 82년도에 졸업한 학생들의 집단 ☞문혁을 겪었던 세대-제4세대들은 상흔영화나 반사영화의 형식으로 재구성, 전통적 양식과 표현 수법-제5세대들은 문혁의 아픔을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영화언어와 형식 선보임-새로운 소재나 이야기, 표현수법을 들고 나와 영화계를 주도하게 됨-시종일관 강한 색채와 독특한 구도로 시각효과 부각, 개방적인 구조와 보편적이지 않은 영상을 이용해 문화, 역사, 권위체계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표현-이들의 영화는 상반되는 개념들이 충돌하는 형태로 그려짐☞진보?낙후, 문명?야만, 이성?광분, 독립?맹종, 과학?미신, 압력?반항, 봉건?반봉건 등-전통적인 인성, 윤리도덕에 대한 과감한 도전은 전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종의 혁명-과거의 역사와 민족의 전통, 윤리체계를 새롭게 그려나가는 시도-역사와 전통에 대해 깊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대표적인 제5세대 감독들: 천카이거, 장이모, 황젠신 등◆대만영화-1858년 톈진조약 체결 후 사진시술이 타이완섬으로 들어감-서양문명과 거의 단절된 상태였던 타이완이 외부에 공개되면서 급속한 변화 생김☞19세기 말에 영화매체를 수용할 만한 기반을 갖추게 됨-1985년 타이완은 일본에 할양됨☞일본은 타이완을 주요 군사거점으로 구축, 영화산업을 동아시아 침략을 위한 선전수단▶1901년 11월 17일(타이완 영화상영의 효시)타이베이시의 유흥가인 시먼딩에서 일본인 사진작가 다카마쓰 도요지로가 돌린 영상시, 그 후 몇몇 극장들이 세워짐☞주로 일본이 제작한 전쟁 다큐멘터리와 ‘국제 선린우호’를 선전하는 영화들이 상영됨
    사회과학| 2007.05.26| 6페이지| 1,000원| 조회(475)
    미리보기
  • ‘잃어버린 삶을 찾는 귀향’ - The Return Of Martin Guerre
    ‘잃어버린 삶을 찾는 귀향’: 강 좌 명: 주제로 본 서양사1560년 9월 16일 피레네산맥 기슭에 있는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인 아르티가에서 한 농부의 귀향을 둘러싼 소동이 벌어졌었다. 그 소동은 아르티가의 한 젊은 농부에 대한 재판이었는데, 결국 그 농부는 사형을 선고받아 죽음으로써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무슨 이유에서 젊은 농부가 사형까지 받게 된 걸일까? 그 소동은 당시 이 재판을 맡았던 판사 쟝 드 코라스가 후세에 남기기 위해 기록을 하였고, 이후 전해져 내려와 영화와 소설로 만들어졌다. 1982년 만들어진 영화인 ≪마틴 기어의 귀향≫은 철저한 고증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당시의 상황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였다. 이 영화에서 사건의 빌미는 마틴 기어가 제공하지만, 이야기는 그의 아내인 베르트랑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를 베르트랑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당시의 사회상과 여성의 지위 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당시 여성의 삶은 출생과 동시에, 남성과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베르트랑 역시 그러한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13세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집안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혼한 마틴 기어와 베르트랑에게 처음부터 애정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결혼 후 몇 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마틴 기어가 마법에 걸린 것도 아니었으며, 악마의 저주 때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너무나 어린 나이였던 마틴 기어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기 싫었을 것이다. 그것은 베르트랑과의 잠자리에서 등을 돌리는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회는 결혼한 부부가 발기부전으로 인해 성교가 불가능할 경우 결혼무효가 성립되었다. 물론 당사자들이 합의하면 결혼의 지속은 가능하였지만, 여성이 출산의사를 밝힐 경우 결혼무효가 성립되어 여성은 다른 이와 재혼이 가능하였다. 이 경우 남성은 발기가 치유되지 않는 한 다른 이와의 결혼도 불가하였다. 베르트랑의 어머니 역시 이러한 것에 기인하여 결혼취소를 주장하였고, 이렇듯 상황이 안 좋아지자 마틴은 결국 베르트랑과 관계를 하여 아들 샹시를 낳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틴은 평소 군인을 동경했던 것으로 보였는데, 결국은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떠나게 된다. 곡식을 훔쳤던 것은 떠나기 위한 핑계로써 고의로 만든 것으로 보여 진다. 당시 사회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파악하였다. 법적으로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던 여성이 결혼 이후부터는 남편에게 이양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도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하나의 재산처럼 생각되었다. 베르트랑 역시 마치 계약과도 같은 결혼생활로 인해 즐거움이란 없었을 것이다. 마틴을 위해 정성들여 만든 각반 하나에 행복을 찾으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마틴의 차가운 말 한 마디였을 뿐이다.이러한 베르트랑에게 8년 만에 되돌아온 가짜 마틴 아르노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베르트랑은 마틴이 떠난 이후, 8년 동안 정조를 지키며 집안일을 도우며 살아왔다. 그 사이 마틴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위해 자신의 어머니는 남편의 숙부인 피에르와 결혼을 하였다. 재산이 나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결혼이었는데, 이 결과 자신의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그 결과 베르트랑은 독신도 아니고 과부도 아닌, 그저 집안일을 도우는 하녀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그렇지만 베르트랑은 8년의 시간동안 정조를 중시했고 남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필자는 베르트랑이 마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정조를 지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농촌이라는 한정된 장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의 생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베르트랑은 불온한 소문에 휩싸이지 않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아들 샹시가 유산을 받게 될 법적 상속인이기 때문에 참고 견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정조를 지키며 살아온 베르트랑 앞에 다시 나타난 마틴은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맥주를 마시고,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마틴은 외모에서도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그야말로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렇게 마틴 행세를 시작한 아르노는 초반 조심스러운 태도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다녔다. 그 결과 돌아온 마틴을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고 마을사람들은 아르노를 마틴이라고 확정지으며 믿게 되었다. 어쩌면 베르트랑은 처음부터 아르노가 가짜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빨래터에 오기 전까지 형성된 여론과 분위기, 그리고 마틴이라고 믿고 싶었던 자신의 마음으로 인하여 베르트랑조차도 아르노가 마틴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 각 마을을 떠도는 부랑자들에 의해 아르노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게 되고, 재산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숙부를 비롯해 꽤 많은 사람들이 아르노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아르노는 재판장에 서게 되는데, 이때도 베르트랑은 아르노를 진짜 마틴이라고 주장하였다. 베르트랑이 언제 가짜 마틴임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분명한 건 재판 이전에 알았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베르트랑은 왜 사실을 숨겼던 것일까? 마틴이 떠난 후, 외로움과 고된 삶에 지쳐있던 베르트랑에게 아르노는 따뜻한 가장인 동시에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되어주었다. 또한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고, 사랑의 말과 애정을 잊지 않고 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트랑은 성모마리아에게 용서를 구하면서까지 아르노를 너무나도 확고하게 남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만약 베르트랑이 아르노가 가짜임을 알게 된 시점이 딸을 낳은 이후라고 한다면 그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르노를 가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함과 동시에 딸을 사생아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한다면 베르트랑은 자신을 떠났던 진짜 마틴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가정을 지켜줄 수 있었던 아르노를 마틴이라고 여기며 평생을 살아가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하녀와 같은 삶을 살던 베르트랑은 아르노를 그 동안의 불만과 잠재된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베르트랑은 법정에서 성적인 얘기까지 꺼내면서 아르노를 변호하였던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7.04.29| 3페이지| 1,000원| 조회(336)
    미리보기
  •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흐름이자 숙명 평가D별로예요
    「프랑스 대혁명」을 보고 난 후영화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쳐주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두 사람을 혁명에 의해 타도된 어리석은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견해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며 정말로 이들이 혁명의 타도대상이었는지 아니면 혁명의 이미지를 세우기 위한 희생양이었는지를 살펴보려했다. 루이16세는 착하기는 했지만 둔하고 무능한 왕으로서 취미생활 등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왕이었다. 하지만 이런 왕을 보좌하는 훌륭한 측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루이16세 스스로 이런 복들을 차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징조로서 바스티유 습격사건이 일어나고 프랑스혁명의 기운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너무나도 유명한 대사가 나오게 된다. 이는 루이16세가 놀라서 “폭동인가?” 라고 묻지만 옆에 있던 신하가 “아닙니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인데 왕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신하조차 폭동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아 이미 루이16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영화는 이 무렵부터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라는 프랑스혁명의 두 중심인물을 다루게 된다. 처음에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뜻이 같고 행동 또한 같은 방향으로 나갔지만 루이16세의 처형에 있어서 의견대립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당통역시 루이16세의 처형에는 어쩔 수 없었고 급기야 혁명타도의 상징적 존재인 국왕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루이16세는 ‘시민 루이 카페’로서 용감하게 자신이 개조했던 단두대에 올라갔는데 유일하게 영화속에서 국왕다운 모습을 보인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위대했던 프랑스 절대주의는 단두대에서 그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었다. 국왕의 처형이후는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갈등을 담고 있다. 그러던 중 에베를 군주제 옹호자로 몰아 처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카밀의 부인의 총명함이 보인다. 그녀는 진실이 무의미하게 변해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이는 반드시 당통과 카밀에게도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생각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현실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낀 당통은 점차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고 이는 로베스피에르 측에 빌미를 주게 되어 급기야는 당통마저 단두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당통이 처형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영화상에서는 “내 머리를 군중들에게 보여주시오. 그래야 잘 보일테니까”로 나왔는데 이는 약간 잘못된 번역이라 알고 있다. “내 머리를 군중들에게 보여주시오. 내 머리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알고 있고 후자의 대사는 의미가 와 닿는데 반해 전자의 대사는 왠지 뜬금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결국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에 의해 이슬로 사라지게 되고 영화는 당통의 신념을 밝히는 목소리와 로베스피에르의 마지막모습을 오버랩하면서 끝나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실과의 타협도 즐기면서 혁명을 추진하던 당통과 오직 법의 수호자로서 외길만을 갔던 로베스피에르로서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7.02.26| 1페이지| 1,000원| 조회(402)
    미리보기
  •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근대화의 아버지 평가A+최고예요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근대화의 아버지목차머리말본론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Ⅱ. 일본근대화의 선구자Ⅲ. 일본제국주의의 선구자맺음말머리말내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은 오늘날 일본의 최고액(最高額)지폐인 1만 엔짜리 화폐에서이다. 나는 한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화폐 중 최고액권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위치의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아 일본 내에서 그는 메이지시대의 위대한 계몽 사상가이자 일본근대화의 정신적 지주로서 일본의 문명개화사에서 첫 손에 꼽히는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런 높은 평가는 게이오의숙의 창립자?자유주의자?합리주의자?여성해방론자 등의 업적들로 뒷받침되고 있었다.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에는 이러한 것과 더불어 지나친 서양숭배?정부와의 타협?권도주의에의 전향 등의 부정적 측면도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후쿠자와는 19세기 말 조선왕조의 혼란기 때 조선개화파들을 배후에서 조종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이것이 실패하자 ‘탈아론(脫亞論)’를 주장해 일본의 제국주의를 부추기기도 해 하였다.이렇듯 일본근대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제국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본론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들을 살펴보며 그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겠다.본론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1834년 오사카의 나카쓰번의 하급무사의 차남으로 출생한 후쿠자와는 2세 때 부친을 잃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세가 되던 1854 년에 나가사키로 유학을 간 그는 이듬해부터 오사카에서 난학(蘭學))을 배웠다. 1858년에는 번의 명에 따라 에도에 난학숙을 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게이오의숙의 모태였다. 이후 요코하마에 유학을 다녀온 후 난학의 무력함을 느끼고 영학(英學)으로 학문을 바꾸게 된다. 1860년부터 막부관리로서 해외를 접한 그는 특히 1862년에는 막부 해외사절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영국?네덜란드?독일?러시아?포르투갈 등순방하고 귀국하기도 하였다. 후쿠자와는 이 때의 경험들을 토대로 『서양사정(西洋事情)』등의 서양 문명 소개서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대단한 인기를 불러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들이 누구보다 도움이 된 건 후쿠자와 본인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문명개화사상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또, 그는 1867년 미국을 다녀올 때 당국의 허가 없이 다량의 책을 반입한 혐의로 3개월간의 근신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868년 신정부가 주는 관직을 거절한 그는 지금까지 운영해 온 난학숙을 개편한 게이오의숙을 설립하여 양학에 뜻을 품은 자들을 위한 교육과 언론의 계몽 활동에 전념하였다.후쿠자와는 중앙 집권적 국가 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는 1871년 이후부터 일본 사회의 문명개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국민의 정신을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 방법으로 당대 일류의 양학자들의 모임인 메이로쿠사(明六社)에 참여하여 문명개화를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문명론의 개략』에서는 봉건적인 정신을 버리고 서양 문명을 목표로 개인의 자발적 정신을 생활화하고 서양문명과 자유로운 교류를 행해야만 비로소 국가가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아시아제국을 제물로 삼더라도 일본은 구미열강의 선진대열에 합류해야 한다는 ‘탈아론’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충실히 뒷받침하는 이론이 되기도 하였다.Ⅱ. 일본근대화의 선구자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특히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민감하여 여러 분야의 책을 원서로 읽었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발달된 서구 문명을 직접 실감하였다. 그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명개화를 이루고자 하였는데 이는 무작정 서양의 것을 본받는 것이 아닌 서양을 부강하게 만든 정신을 배움과 동시에 현재 일본에게 필요한 것만을 취하여 국체(國體)를 보존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마치 조선개화파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도 같은 것으로서 일본의 정신위에 서양의 유용한 것들만 가져와 사용하자는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이었다. 후쿠자와는『서서양의 문물들 중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는 마치 조선인이 처음 일본에 와서 느끼는 것과 유사한 감정이라고 하였다.하지만 그는 조선은 단지 놀라기만 할 뿐이지만 일본은 놀람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도입하여 정착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조선과 달리 일본은 서구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실현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말로서 자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등으로 구성된 조선개화파의 노력을 간과한 주장으로서 결국 자부심의 고취를 위한 주장이었다고 생각한다.어쨌든, 후쿠자와 유키치는 국민정신의 변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 하나가 실학적 합리주의를 생활화하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서양문물이 급속도로 일본 내에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장은 그것을 단지 모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꼭 필요한 것만 실용적으로 골라내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저서 『학문을 권함』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 내용은 서양인은 매일 목욕을 하지만 일본인은 한 달에 한두 번밖에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문명개화의 차이로 연관 짓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즉, 서양의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며 일본이 한달에 한두 번 목욕하는 습관은 일본인에게 맞는 고유한 풍습이니 서양인의 풍습을 따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일본의 정신은 유지하되 서양문물 중 필요한 것만 도입하자는 실학적 합리주의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하지만 결국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하는 것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당시 일본국민의 태도가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걸 생각할 수 있다.그 첫 번째 부류는 목욕문화의 차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의 것이라면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와 반대로 서양문물을 적대시하여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두 번째 부류인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두 부류 모두에게 중간의 합의점을 설명해것을 납득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그 방법만이 국민정신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고 나아가 문명개화를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후쿠자와는 그러한 중간적 합의점들을 게이오의숙에서 사농공상을 차별함이 없이 교육함으로서 계몽사상을 높이는데 노력하였다. 또,『학문의 권장』에서도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 두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 두지 않는다.”라는 말로서 차별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에서 인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자유민권론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이렇듯 문명개화와 국민들의 계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들과 실학적 합리주의의 주장이나 인간평등을 강조하는 모습은 계몽사상가적인 후쿠자와의 모습을 잘 설명해준다.하지만 이런 계몽사상가적인 후쿠자와의 모습은 1880년대부터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민권(民權)을 우선하던 기존의 모습에서 국권(國權)을 우선시하는 관민조화(官民調和))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었다.그렇다면 이렇게 변화한 후쿠자와의 사상 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탈아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Ⅲ. 일본제국주의의 선구자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는 참으로 대담한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소위 ‘탈아론(脫亞論)’이라고 불리 우는 ‘아시아 침략론’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저서에서 보아왔던 실학적주장이 극단적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성향으로 나타난 것이다.‘탈아론’은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 패한 후 서구열강의 아시아 침탈이 가속화되자 일본이 제국주의열강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이후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1885년, 후쿠자와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 ‘탈아론’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국민정신은 아시아를 벗어나서 서양 문명으로 향해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의 이웃에는 중국과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는 진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 서양 문명이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운지를 목도하면서도 거기서 아무것도 없이 그저 낡은 유교 윤리에만 집착함으로써 천 년 전과 다름이 없는 감각으로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런 나라들은 지금의 국제 사회에서 도무지 자립할 수 없다. 오늘날의 중국과 조선은 우리 일본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이 두 나라는 일본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기 때문에 삼국이 같은 동료인 것처럼 서양에 비쳐질 가능성도 있으므로 아주 곤란한 존재이다. 오늘날 일본에는 ‘중국과 조선이 언젠가는 문명에 눈을 뜨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니 느긋하게 그 날을 기다리자’는 식의 시간 여유가 없다. 만일 서양이 이 두 나라를 침략한다면 일본도 서양과 보조를 함께 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서양 제국과는 달리 우리 일본은 두 나라의 이웃나라인데…’라는 식으로 점잔 뺄 필요는 전혀 없다.당시 후쿠자와는 조선의 개화파를 적극 지지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조선과 청에서의 근대화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화파가 정변에 실패하면서 조선정국을 장악하지 못하자 이러한 ‘탈아론’을 발표했던 것인데 이는 일본이 아시아의 입장이 아닌 서구열강과 같은 입장으로서 중국과 조선을 대하겠다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또, 일본이 이미 서양문명으로 향해있다는 대목에서는 일본의 서구화주장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70년대 이후 꾸준히 주장되어오던 문명개화론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중국과 조선을 일본이 근대국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특히 서구열강과 접촉할 경우 여러 면에서 저해되는 국가라 단정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아편전쟁으로 인해 서구열강들이 중국을 종이호랑이정도로 인식하였고 동시에 조선 역시 갑신정변의 실패로 근대화가 어려운 나라로 인식되었음을 생각했던 것 같다. 중국과 조선이 일본과는 달리 전제국가인 점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그렇다면 후쿠자와는 왜 갑자기 일본이 중국과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야 한다는 입장에서 ‘탈아론’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을까?그 의문점은 바로 후쿠자와가 ‘정한론(征韓論)’)을 비판하던 상황에서 것이다.
    인문/어학| 2007.02.26| 5페이지| 1,000원| 조회(859)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4
4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3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1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18일 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9:24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