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제비의 병진명과 정원명머리말1. 영천 청제비란 무엇인가1) 청제비의 발견과정 및 건립 배경2) 청제비의 형태와 특징본론2. 영천 청제비의 병진명과 정원명1) 병진명과 정원명의 의미 (사전적 의미)2) 병진명 분석3) 정원명 분석4) 병진명과 정원명이 나뉘어진 이유 및 차이점- 나뉘어진 이유- 외적인 차이 (서체, 시대, 상태)- 내적인 차이 (통계수치, 목적)- 종합적인 가치의 평가5) 청제 중립비- 건립 과정 및 내용맺음말4. 영천 청제비의 현대적 의미1) 청제비의 고고학적 가치2) 논쟁거리 및 연구사적 비교 검토3) 청제비의 현재 관리상태와 문제점1. 영천 청제비란 무엇인가?? 보물 제517호?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7-11) 청제비의 발견과정 및 건립 배경1968년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영천의 남쪽에 청제(보통 "청못"이라 함)가 있는데 이 못의 북쪽에 비가 있다. 그 글에 "당나라 정원14년(798)에 임금이 양내사(兩內史)를 보내서 인부 14,800여명을 시켜 못을 막고 비를 세워 전말(顚末)을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개 이 못의 관개(灌漑)는 300여석이라 지금도 이익을 보고있는데 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년)에 어떤 사람이 절단한 바가 되어 흙속에 묻혀, 그 고적(古跡)이 부전(不傳)함을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여기에 고쳐 세워 이같이 기록한다. "아! 후인이 이 비로 말미암아, 이 못을 폐(廢)해서 안되는 까닭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비가 이 못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강희(康熙) 27년(1688) 9월"삼국 및 통일신라 양시대에 걸쳐 양면비(兩面碑)는 이것이 처음이고 농업수리비(農業水利碑)로서 제자리에 1200여년이 넘도록 서있는 것도 이 비가 처음이다. 이 청제비가 노천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80년에 비각을 세움으로써 보존할 수가 있었다.2) 청제비의 형태와 특징이 비는 신라시대(新羅時代)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 있는 양면비(兩面碑)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관석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 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2. 영천 청제비의 병진명과 정원명1) 병진명과 정원명의 의미① 병진명 - 병진년에 청못을 축조하다.병진명 해석> 법흥왕 23년 536년 병진년에 280개의 지역에서 25명씩을 뽑아 전체로 7000명을 동원하여 2월 8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② 정원명 - 정원년에 청못을 수리하다.정원명 해석> 법흥왕 23년(536)에 축조된 저수지가 파손되었으므로 그를 수치(修治)하기 위하여 역역을 동원한 내용과 수치 된 저수지의 규모를 나타내고 있다.2) 병진명 분석청제를 처음 축조한 때 세워진 병진명의 비문은 전문이 10행 각행이 9∼12자로 되어있는데 이 중 제 1행∼4행은 축제년 월일 제의 규모 동원인원이 적혀 있고 제5행 이하는 이 공사에 참여한 지휘자들도 보이는 인물의 직명과 인명 관등이 적혀 있다. 비문을 이렇게 두 문단으로 끊은 것은 비문의 작자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비문 제 4행의 밑에 여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을 바꾸어 쓴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비문은 전체적으로 판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특히 제 5행 이하의 후반부가 더욱 결락이 심하여 제대로 끊어 읽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학자간의 견해가 다르다.하지만 1행에서 2행 첫 번째 글자까지는 판독의 의견이 거의 모두 일치하고 있으며 탁본을 통해서도 이 이상의 판독은 불가능하다. 이기백씨는 1행~4행까지를 이 비문의 전반부에서 여기까지를 한 단각으로 보고 있는데 즉 이 부분은 본 비의 건립일 또는 청제의 완공일과 공사의 명칭을 서술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 제 1행의 여덟 번째 글자는 만들었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라고 생각된다.제2행 두 번째 글자에서 제4행 끝부분까지는 제의 규모와 동원인원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인데 이 부분의 판독에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경주대 김창호 교수는 2행 두 번째 글자부터 3행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사인(使人-시키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대사제(大舍第), 대오제(大烏第), 소사제(小舍第), 소오제(小烏第) 등 관등명칭과 사람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제를 축조할 당시에 책임자의 이름이 아닐까 한다.3) 정원명 분석청제비 병진명 비문의 반대편에는 정원명의 비문이 있는데 병진명의 비문과는 달리 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글자를 거의 다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두 글자의 판독을 비롯하여 전체적인 내용에서도 재검토의 여지가 남아있다. 이 비문은 12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행은 4∼12글자이고 글자간의 간격은 4∼6cm이며 130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1행부터 2행의 3번째 글자까지는 비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먼저 판독된 정원십사년명의 명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①貞元十四年戊寅四月十三日菁堤治記之 ②謂洑堤傷故所內使以見令賜所矣 ③玖長?五步岸立弘至深六步三尺 上排堀里十二步 ④此始爲二月十二日元四月十三日此間中了治內之 ⑤都合斧尺百?六法契一万四千百?人此中典大ホ角助役切火押梁二郡各□人 ホ起使內之⑥節所內使上干年朶史?大舍架□?架玉純朶정원명의 내용은 위에서 번호를 표시한 바와 같이 크게 6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①은 본 비명의 표제라고도 할 부분으로, 刻銘(각명)의 年月日(년월일)을 적은 것이다. 貞元十四年戊寅(정원14년무인)은 곧 元聖王(원성왕) 14년인데 絶對年代(절대연대)를 안다는 것은 이 碑銘(비명)의 사료적 가치를 크게 높여주는 것이다. 4월 13일은 수치가 완료된 일자이다.②는 청제를 수치하게 된 배경을 적은 것이다. “洑提(보제)가 傷(상)했다고 하는謂(위) 故로 所內使(소내사)로 하여금(以) 보게(見) 하셨다.”로 해석된다.③은 수치공사의 규모이다.④는 수치기간이 2월 12일에서 4월 13일까지였음을 기록한 부분이다.⑤는 이 공사에 투입된 인원과 인원구성 내역을 밝히고 있다. 斧尺(부척) 136인 또는 法功夫(법공부) 14,140인 중에는 切火?押梁(절화?압량)의 2郡(군)에서 동원된 각□인의 조역이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⑥행바다 9~12자의 글자청못을 축조할 때 새운 것 (출제기)5행부터는 판독이 어려우나 관등명칭과 사람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제를 축조할 당시에 책임자의 이름이 아닐까 한다.○정원명 - 798년 원성왕14년자경이 4.5∼5cm12행으로 4~16자의 글자수치공사를 완료한 뒤 세운 것(수치기)신라속한문체병진명의 비문과는 달리 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글자를 거의 다 알아볼 수 있다.③ 내적인 차이(통계수치.목적)공사에 동원된 인원수가 청못을 축조할 때 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는 것이다.병진년에 축조를 할 당시에 7000명에 불과한데 수리를 하는 데에는 14140명이 동원된 것이다. 이는 청제의 수리는 빈민구제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당시 유난히 재해가 많아 이에 국가에서 2월-4월에 이르는 보릿고개시기에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청못을 수리한 것이 아닌가 한다.④ 종합적 가치평가청제비의 비문 해석으로 보아 당시의 청제 축조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루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제5행 이하의 판독은 아직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서제ㆍ소서제 등의 경위를 가진 사람들이 여럿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많은 왕경인이 공사적사제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또 7000명의 노동력을 징발한 것도 국가권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축제의 공사 책임자로 8명의 인원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중에서 7명이 왕경인이었고 1명은 당해촌에 거주하는 지방호족으로 추정하였는데, 보통 왕위를 가진 사람은 적고 나머지는 모두 외위를 가진 촌의 토착 세력가였던 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특이한 점은 영천의 특수한 위치와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왕경인 금성과 인접해 있는 절야화군은 신라의 지배집단인 왕경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그리고 청제비는 당시의 역역동원 체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동원인원 중에서 ‘부척’은 도끼를 사용하여 일을 하는 기술인원으로, 이들이 평상시에 어떤 고정된 조직체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당시의 기술을 과 그 인접지에서 동원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뿐만 아니라 정원명에 나타나는 ‘소내사’의 해석을 국가에서 명을 받아 청제축조공사를 담당한자라고 보며 이를 전국적인 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한 점과 더불어 당시의 신라사회의 중앙집권화를 보여주는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6세기 전반에 벌써 벼농사를 귀하게 여겼다는 것과, 또 자연 災害(재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엿볼 수 있다.영천 청제비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비석 그 자체로의 평가는 필체가 불규칙하고 자형도 일정하지가 않아 같은 글자라도 글자마다 형태가 달라 정확한 모양을 알아보기가 어려운데 청제비의 건립시기를 기준으로 7년뒤에 세워진 창녕비와 비교해보아 글자의 형태가 품위를 갖추고 있음을 들어 신라 문화의 성장을 알 수 있다.5) 청제중립비① 청제중립비 건립과정과 특징청제중립비는 절단되어 흙속에 묻혀 있던 청제비를 1653년에 최일봉씨 등 세 사람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는 사연을 새긴 비석으로 강희(康熙) 27년(숙종14년)(1688)에 세운 화강암 비석이다.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글씨를 새기고 뒷면은 이름이 쓰인 부분만을 다듬고 나머지 여백은 그대로 두었다. 앞면 윗부분에 가로로 菁堤重立碑(청제중립비)라고 음각되어 있다. 지붕돌이 없어 윗부분의 좌우를 귀접이하여 그 모양이 이른바 규형 비석에 가깝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중엽부터 조선시대까지 흔히 유행하던 것이다. 비석 크기는 높이 107cm, 너비77cm, 두께 15cm이며. 비문은 전문 10행, 각 행 14글자, 자경 5.5cm이다. 원래 청제비에서 서쪽으로 5m 떨어져 있던 것이나 지금은 청제비와 나란히 비각 안에 서 있다.② 청제중립비 내용청제비의 내용을 인용하여 원성왕때 수축 기록을 밝힌 다음 청제중립비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에 비석이 누군가의 손에 절단되어 땅속에 파묻혀 버리니 이 고적(古跡)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비석을 고쳐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는 바이다. 아, 훗날.
사회의 발전과 매체의 발달과의 관계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의식의 차이라 생각한다. 자각하는 인간과 자각하지 않거나 가리지 않는 동물, 그러므로 인간은 사고를 하고 발전하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발전하는 삶은 사회의 모습을 바꾸었다. 또한 나라마다 발전의 속도는 다르겠지만 보통은 선진국 즉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나라를 모방하며 발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사회 즉 무리를 지어서 산다는 점과 욕망이 있다는 것을 들려고 한다.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과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가지는 마음이라고 본다.사회의 발전과 매체의 발달과의 관계에서 위와 같이 서론을 시작한 이유는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기에 사회가 발전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나는 이번 과제를 세 부분으로 나눠서 설명하려 한다. 먼저 돈과의 관계를 알아보고 두 번째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과 관련지어 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매체의 활용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인간의 욕망은 돈과 관련 있다.욕망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생리적, 안정적 욕망은 동물도 가지는 것이고 명예욕, 성취욕, 특권의식과 같은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다. 그 욕망은 사회의 발전을 이뤘고 매체의 발전을 만들어냈다. 더 좋은 것을 원하는 욕망으로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우리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돈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존재한다. 또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듯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나만 돈이 많다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은 아니다. 나라 전체가 성장해야 자신도 좋은 삶은 누릴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돈은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라고 본다.보통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보면 국가의 원수가 바뀌거나 다른 나라의 문화, 기술 등을 받아들이거나 전쟁을 통해 빼앗는 등을 이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국가의 원수가 바뀐다는 것은 옛날에는 나라의 정치가 올바르게 되지 않을 경우 새로운 원수를 내세워 새로운 정책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부족한 면이 더 많기 때문에 사회를 이루며 살며 부족한 면을 채우며 산다. 그렇기에 나라를 대표하는 원수가 있으면 주위에서 돕고 그것조차 어려울 경우 다음을 잇는 사람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며 발전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민들이 그냥 따라가는 수동적이었지만 현재는 능동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질책과 도움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그 발전 속도는 더욱 빠르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발전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 속도는 더욱 빠른 것이다.특히 돈에 대한 욕심. 어떤 물건이건 새로운 물건을 만들때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 물건을 만드는 이유는 필요에 의해서도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천재로 알고 있는 에디슨 역시 돈을 벌기위한 목적으로 많은 발명을 했다. 특히 사진의 발명과 스튜디오를 만든 것은 사업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발명이지만 당시에는 돈을 벌기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최초의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 역시 역사상으로는 인쇄술을 발명해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촉진시켰다. 이 기술로 지배계층의 특권인 교육이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의 발전도 이룩했고 매체의 발전에도 큰 몫을 하였다. 하지만 인쇄공장까지 차려 돈을 번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1페니의 신문이 나오고 성경의 가격도 떨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모두 상업의 목적을 띄고 있다. 현재는 그 영향이 더 심해진 것 같다. 더 좋은 내용을 더 나은 매체로 얻고자 하는 욕망은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선 좋은 컨텐츠를 만들어야 하고 컨텐츠 뿐만 아니라 좋은 매체를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연구 부분 역시 돈이 절실하기 때문에 돈이 많은 쪽에서 원하는 대로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 효과 부분에서도 많이 나오는 말인데 송신자 중심의 연구가 이루어 진 이유도 돈과 관련이 있고 매체의 발명 역시 돈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사회를 발전시켰고 욕망을 채우는 돈은 나라의 성장과 함께 매체를 발전시켰다.어떻게 하면 좋아질까?라는 궁금증.어떻게 하면 나은 삶을 살까?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까? 이런 궁금증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인간이 할 일을 기계가 대신함으로 농업중심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변화한 산업혁명은 나은 삶을 꿈꾸는 궁금증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발명이라는 것이 보통‘이렇게 하면 편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산업 사회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냈고 소품종 대량화가 되었다. 고액의 매체는 극 소수로 판매 되었지만 대량화가 되면서 많은 생산을 하게 되었고 가격이 낮아지며 많은 판매를 했다. 우리 나라는 금성에서 최초로 TV를 생산하였는데 당시 쌀 27가마의 가격이었지만 물량이 딸릴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좋은 컨텐츠의 역할도 있었지만 남들과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도 한 몫을 한 것이다. 이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선 더 나은 매체를 만들어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생산가격을 줄이고, 나은 품질을 만들고, 디자인을 좋게 하고 등의 생각은 매체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가장 크게 변화 한 것은 도시화가 됐다는 것이다. 도시화가 되면서 대가족은 핵가족화 되었고 그로인해 가족들은 많은 부분에서 단절 되었다.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전자매체가 많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데 공간적 제약이 있던 전화는 핸드폰을 만들어냈다.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핸드폰은 현재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이 부분에 대해 나의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나는 1999년 LG PHILIPS. LCD 생산직에서 일을 했다. 당시 컴퓨터는 도스화면이 아닌 윈도우즈 화면을 사용하였고 흑백이 아닌 컬러의 화면이었다. 컴퓨터의 LCD 모니터를 기본으로 만들었는데 회사에서 핸드폰 컬러액정 실험을 했다. 컴퓨터 역시 흑백화면에서 발전하여 컬러화면으로 변화하였듯이 컬러 액정의 핸드폰도 개발한다면 좋은 성과를 누릴 거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진행 되었다. 당시 생산량은 적었고 가격 역시 고가였지만 획기적인 아이템이 되었다.직접 경험한 것이라 더욱 와 닿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은 흑백 핸드폰은 판매도 하지 않고 컬러액정은 당시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좋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우리는 흑백 핸드폰을 사용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러 색의 볼펜을 하나로 쓸 수 있게 만든것처럼 매체의 결합도 궁금증에서 생겨났다. 하나를 사는 가격으로 몇 개의 효과를 얻는다면 소비자는 당연히 좋아할 것이다. 특히 핸드폰은 결합이 많은데 편지와의 결합, 카메라, 게임기, mp3에서 현재는 TV와의 결합도 하고 있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욕망은 연구진의 궁금증을 자극했고 그로인해 다양화된 매체가 생겨났다.산업 사회가 지나고 정보화 사회로 발전했다. 정보화 사회는 산업 사회가 가지는 자원, 에너지의 사용 문제점을 파악하고 획일화된 사회에서 변화하는 사회이다. 국가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고 쓰는 것도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그렇기에 소품종 대량생산을 기본으로 하던 산업 사회는 소비자의 여러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변화하였고 기술을 중시하던 사회에서 지식과 정보를 중시하는 사회로 변화하였다. 정보화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체가 인터넷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인터넷은 세계에서도 알아줄 만큼의 기술을 가졌다. 궁금증을 해소 하는데 현재의 특효약은 서적이 아닌 인터넷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인터넷의 중요도는 높아졌다.한국인의 빨리빨리 병은 역동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되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렇듯 인터넷의 발전은 빨리빨리 병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인터넷 속도가 변화한 것도 한국인의 빨리빨리 병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 창이 뜨는데 걸리는 시간은 물론 페이지가 넘어가는 시간, 사진이 나타나는 시간 모두 단 몇 초 안에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인터넷은 처음에는 미국에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 졌으나 일반인들도 사용 시 좋을 것 같아 새롭게 만들어 졌다. 지금은 또 다른 결합이라는 이름으로 초고속인터넷 통신만을 이용한 IPTV도 만들었다.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서 컴퓨터의 용량도 커졌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매체 속에서 살고 있다.사회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그에 맞춰 새로운 매체가 탄생하게 되고 정보의 전달 방식 역시 변화하였다. 사회의 발전도 나은 삶을 꿈꾸는 의식에서 생겨났듯 궁금증은 끊임없는 발전을 촉진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언제나 매체와 함께.우리 나라는 박정희 정권 때 많은 경제성장을 이뤘다. 우리 부모의 노력으로 이만큼의 경제 구도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쉽게 말해 먹고 살만해 졌다는 것이다. TV가 귀했던 시절은 동네에서 부잣집이나 만화방 같은 곳에 하나가 있어 드라마가 할 경우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서 봤다. 지금은 각 집에 TV는 한 대는 기본이고 방방마다 있거나 휴대도 가능하게 되었다. 흔해진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TV를 살 능력이 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경제적 여권이 주어져야 가능 한 소비는 반드시 필요하진 않지만 없어서는 아쉽다고 느낄 것에도 소비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핸드폰에 카메라가 있지만 우리는 디지털 카메라도 가지고 있다. 화질과 용량, 기능을 따지기 때문이다. 사회의 발전은 소비의 행태도 변화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