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참사와 닮은 터널화재6일 아침 서울 내부순환도로 홍지문 터널에서 일어난 차량 화재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대구 지하철 참사의 망령에 몸서리를 쳤다. 터널 안에서도 교통사고는 발생할 수 있고, 그로 인해 화재가 날 수도 있다.그러나 생명선인 환기설비와 조명시설은 정상적으로 작동되어야 한다. 터널 안 화재로 유독가스가 퍼져 가는데, 멀쩡하던 환기설비가 작동을 멈춘 사실은 정전으로 전동차 문이 닫혀 아수라장이 되었던 대구 참사와 다를 게 없다.사고는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차체가 아스팔트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2㎞ 가까운 터널 한 가운데에서 화재가 난 것이 문제였다.그래도 전기공급만 계속되었으면 간단히 수습될 사고였으나, 원인 모를 정전으로 조명등과 환기설비 작동이 중단되어 일이 커졌다. 곧 비상발전기가 가동돼 조명등은 금세 복구됐지만, 환기시설은 20분 동안이나 작동을 멈추어 운전자와 승객들이 차를 내려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동이 벌어졌다.서울시에 따르면 비상발전기 용량이 적어 환기설비가 작동되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전력을 공급하는데 20분 이상 걸린 일에 대해서는 “휴일과 야간 근무자가 2명 뿐 이어서 자동으로 내려진 차단기를 올리는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설비를 왜 했으며, 휴일과 야간에는 사고가 나지 않는 법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4년 전 건설된 홍지문 터널은 현대적인 환기설비를 갖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유사시 별도의 통로로 유독가스를 배출시키는 반 횡류식 환기설비가 있지만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서울에는 길이 1㎞가 넘는 터널이 여러 곳 있고, 전국적으로는 더 긴 터널이 무수히 생겨났다. 이번 사고가 정부와 각 지방 자치단체는 물론, 도로공사 철도청 광산 등 유관 기관들에게 지하시설물의 항구적인 안전대책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공황과 나치의 경제회복◎ 들어가는말1929년부터 1938년까지 독일 경제의 전개과정은 독일 현대사의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대공황에 이어 나타난 경제회복을 계기로 국가와 경제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 문제는 최근 선진국 경제가 국가주도권보다는 시장역할을 강조함에 따라 더욱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보다 한층 더 논란이 심했던 문제는, 경제회복을 이룩했다고 해서 과연 제3제국을 ‘긍정적으로’평가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나치 정권이 적극적으로 적자재정정책을 실시했다는 점이 경제회복의 중요한 특징이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학파였다는 신화가 생겼고, 평화가 도래하는 번영의 시대에 독일 내부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 경제는 전간기에 비교적 침체되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단기고성장(1925~28년, 1937~39년)은 변화무쌍하고 불건전한 전간기 세계경제의 환경에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운 적응과정이었던 저성장의 일반적 경향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였다. 대공황은 독일의 정당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고, 경제정책의 선택은 경제상황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대에 의해 좌우되었다. 나치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대체로 경기침체기간에 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한 데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1933년과 1936년 사이에 나치가 독재정치를 손쉽게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가 회복됨으로써 히틀러가 1932년에 비해 보다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제 1 차 세계대전과 세계대공황 사이의 독일 경제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독일은 성장하는 선진 산업경제의 모든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이끈 독일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명실상부한 공업국이었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 경제의 기본방향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경제발전과정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전비와 복구비의 지출로 인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그 결과 1923년 독일의 마르크화가트 주가폭락,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외국자본의 독일 철수를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견해는 대공황의 원인을 미국의 주가폭락에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더욱 악화된 국내적 요인에서 주로 찾고 있다. 팰커스(M.E. Falkus)는 독일 경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국내신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외자대부 덕분이었고, 막대한 대부자금이 독일 은행을 통해 유통되었기 때문에 외국으로부터 자본공급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금융경색, 고금리, 기업활동 위축 등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외자대부가 이러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부합되는 듯하다. 자본유출이 발생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의 투자대상에 대한 매력이 더 커졌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독일 투자자가 그들의 자본을 해외의 안전한 곳에 투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테민(P. Temin)과 보르하르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렇게 대공황이 서서히 진행되기 시작했던 원인을 1928년에 기업가를 실망시킨 독일의 수요위기에서 찾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대공황이 1929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후에는 독일이 1925~1929년에 세계자본시장과 맺은 특수한 관계로 인해 사태가 더욱 약화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29년에 대공황을 전후로 하여 자본이 독일로부터 급속히 유출되었지만, 그것은 유입된 자본으로 충분히 보충되었다. 단기대부자금의 상환요청과 장기대부의 중단으로 인해 ‘정상적인’경기순환상의 하강국면이 경제적 파국으로 급전되었다. 한편으로는 국내외 수요감소가 산업투자의 위축과 가격하락을 초래하였고, 국제금융제도상의 문제점이 대공황의 골을 깊게 하여 훨씬 더 파국적인 국면으로 치닫게 했다. 국제적 경제위기는 모든 주요 산업국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 중에서도 독일에게 특히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독일에 대한 외자대부가 급격히 감소한 것이었다. 그 당시 이전의 대부자금에 대한 인출문제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한층 더 심각한 문제였다. 미국의 후버(H. 정에 관여한 것은 정당뿐 아니라 대기업가 및 농업조직이었다. 산업은 크게 수출부문과 중공업부문으로 구분되었다. 농업은 점점 더 많은 보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후자의 부류에 더 가깝게 되었다. 브뤼닝은 그들의 분열을 최소화하는 경제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이해집단, 정당, 외국채권자 간의 공정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대공황기간중 경제적·정치적 생활을 규정했던 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에, 결국 부뤼닝이 어떻게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를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농업부문을 주도한 정치집단이 대규모 귀족령에 대한 브뤼닝의 비우호적인 태도를 이유로 1932년 5월 힌뎌부르크 대통령에게 그를 해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직면한 이익집단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경제회복의 성격독일의 경제회복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몇 가지 지표는 이미 1932년 중반에 경기가 상승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매디슨(A. Madison)은 거의 모든 독일의 인접국과 주요 경쟁국이 1913년과 1938년 사이에 더욱 뚜렷한 경제성장을 기록하였음을 입증하였다. 제임스는 국가정책이 효과를 거두기 전인 경제회복 초기국면에서 이러한 경우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1933~1934년에는 미미한 소비자 붐이 나타났는데, 이는 특히 중소기업의 경제침체로 인해 감소했던, 특히 중소기업의 재고투자가 다시 급증한 후에 뚜렷해졌다. 제임스에 따르면, 이 회복은 정부에 의해 창출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인(spontaneous)’것이었다. 경제회복이 어느 정도는 경기순환 덕분에 나타났던 것이 분명하며, 새롭게 등장한 히틀러 정부는 이 경기상승을 정권유지를 위해 악용할 수 있었다. 1933년의 암울한 세계경제 상황하에서 자생적인 경기회복이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바르카이(A. Barkai)와 폴크만(H.-E. Volkmann)은 나치 정부의 경제적 간섭주의의 근원을 독일의 통제적 전통에서 찾고 있다. 실시한 것은 나치가 부분적으로는 농민들 지지를 기반으로 집권한 후부터였다. 독일의 경제회복을 수요측면에서 분석하는 데대한 반혼이 만만치 않다. 제임스가 지적한 1933년의 ‘자생적인’경제회복은 세금혜택이나 국가보조금의 형태로 이루어진 국가지원에 크게 의존하였다. 지겔(T. Siegel)이 주장한 바와 같이, 정부는 대공황하의 수준에서 임금을 동결시켰고, 고용주가 공식적 임금을 삭감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많은 재취업자가 고용창출계획에 입각하여, 또는 현금이 거의 지급되지 않는 노동봉사의 형태로 일했다. 평균소득은 대공황기의 마지막해인 1932년보다 1933년과 1934년에 더 낮았다. 나치정부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1930년대에 케인스의 전략을 추구하기는커녕, 이윤 및 투자에, 또는 국가에 소득을 재분배함으로써 민간소비의 증가를 억제하였다. 국내소비수요가 완만하게 증가했고 수출이 붕괴했다는 사실은 경제회복을 설명할 때 투자, 특히 정부투자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산업확장을 위한 주식발행의 자유는 박탈되었고, 모든 신규 주식발행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했다. 1926년부터 1929까지 90억 마르크에 달했던 민간주식 발행총액이 1933년부터 1938년까지는 26억 마르크에 불과하였다. 민간투자는 대체로 공공투자보다 훨씬 더 완만하게 회복되었다. 상충되는 이러한 경제여건하에서는 민간기업의 신뢰가 완전히 회복되기 어려웠고, 자동차산업과 같이 정부가 특권을 제공한 산업에서만 민간투자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공공투자, 또는 정부통제하의 민간투자가 국내경제의 확대와 구조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랜디스(D. Landes)와 스베닐슨은 모두 전간기 경제성장의 유형을 설명할 때 생산성 향상과 ‘새로운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규모 공공투자 및 재정지출정책은 경제회복의 주요 변수로서 작용하였으며 인과관계 설명에서도 가장 중시되고 있다.◎ 정부와 경제회복독일의 경제회복은 겉으로는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를 표방했던 나라가 국가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정부가 이러한 부차적이고 덜 직접적인 성과에 대해 통제를 가한 것은 재정이 낭비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민간 경제주체를 수입대체나 재무장과 같이 국가가 중시하는 부문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다. 첫째, 민간투자는 개별기업과 공급자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운영되었던 국가기관의 허가를 통해 실행되었다. 둘째, 광범위한 정부 정책에 적합한 고비용사업에 착수할 것을 약속한 특정 기업에 대해서는 특혜가 제공되었다. 당근·채찍정책(carrot-and-stick policies)을 혼합한 결과 1938년경에는 민간투자가 공공투자를 상회하게 되었고,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투자활동을 유지하게 되었다. 민간자본을 정부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금융 및 자본구조에 대한 정형화된 통제를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게 되었으며, 1930년대 말에는 민간자본시장에 관한 평가가 점차 학문적인 성격에 띠게 되었다. 재정지출 확대정책을 실시한 결과 국민소득은 계속 증가했고 실업은 급격히 감소했다. 재정지출과 소득증가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처음으로 입증한 사람은 케인스였다. 케인스는 재정지출의 증가가 수요와 고용을 촉진하기 때문에 초기지출의 가치보다 더 많은 소득을 발생시키는 ‘승수’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국내노동자의 재고용을 증대시키는 계획을 후원했고 강제부역을 통해, 그리고 1935년 이후에는 징병을 통해 독일 청년을 노동시장에서 끌어냈다. 1934년 부역계획은 약 40만 명의 독일 청년을 노동시장에서 끌어내 주로 토지에 대한 무보수 수작업노동에 투입시켰다. 정부는 공공채무의 증가를 최상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은 외자를 조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장기대부를 위한 자본시장에서의 차입과 단기대부를 위한 적자예산재정에 의해 실행되었다. 단기적자재정, 즉 정부수입에 대한 재정지출 초과는 정부증권의 발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초기의 재원 대부분은 이러한 단기 고용창출어음 또는 소요자금을 지불하기 위해 정부계약자가 사용한 재무장‘메녔다.
南燕과 고구려의 통교학번: 0181164성명: 이승진408년에 고구려와 南燕이 통교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고구려와 南燕의 교통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될 듯싶다. 즉 ‘고구려 사자가 南燕의 廣固에 도착하여서 南燕에게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사람 열 명과 千里馬 한 필을 바쳤다’.) 池培善, 「中國中世史硏究」『慕容燕과 北燕史』, 1998 연세대학교출판부 p.216『十六國春秋輯補』 卷 62 南燕錄 「慕容超」, 太上 4年條, p.453, 高麗使至, 獻千里十人千里馬一匹.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고구려에서 南燕으로 사자가 도착하였다는 사실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듯싶다. 이를 몇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첫째, 고구려에서 어떠한 경로로 南燕으로 들어갔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 사신이 육로를 통하여 南燕으로 들어갔다고 고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로로 왕래할 수가 없는 것이 당시의 北中國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육로를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고구려에서 南燕으로 통하는 육로는 고구려와 南燕이 직접 맞닿은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北燕과 우회하는 길목에 북위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 사람이 통과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北燕에서 南燕으로 가기 위하여 北魏를 통과하여야 하는 길은, 그 당시 고구려가 北魏와 적대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北魏를 통과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옛날의 교통체계상 배를 소유하고만 있다면 육로보다 해로가 훨씬 용이하였던 것 같다.) 池培善, 앞에든 책 pp. 216 ∼217 拙稿, 「北燕에 대하여(11)-馮跋과 그 재위시를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 29, 1989, pp.174∼175, 高雲의 뒤를 이어서 北燕의 天子에 즉위하였던 馮跋의 北燕이, 北魏와의 관계도 선린관계가 아니었다.南燕과 北魏가 적대적인 관계이고) 池培善, 위에든 책 p.217, 拙稿, 앞에 든 논문, 「南燕에 대하여- 慕容德을 중심으로-」, p.157, 南燕 慕容德 재위시의 南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였던 慕容達 등이 도망가자, 이 문제로 인하여 南燕과 北魏는 전투를 하였다.北燕과 北魏와의 관계도 이즈음에는 대립적이었기 때문이다.) 池培善, 위에든 책, p. 217, 拙稿, 「南燕에 대하여(1)-고구려 왕족 후예 高雲과 그 재위시를 중심으로-」, 『東方學志』, 54·55·56 合輯, 1987, pp. 845∼872, 高雲이 고구려 왕족의 후예였던 관계로 北燕과 고구려와는 친선관계를 유지하였지만, 이즈음 고구려와 北魏는 적대적인 관계였다.山東반도에 위치한 南燕을 가는데 가장 손쉬운 길은 해로였다는 것이다. 南燕과 고구려와의 교류가 있기 이전부터 대규모의 해상운송이 활발하였다는 이야기다.둘째, 그 당시 고구려가 南燕으로만 사자를 파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池培善, 위에든 책, p.218, 拙稿, 앞에든 논문, 「北燕에 대하여(1)- 고구려 왕족 후예 高雲과 그 재위시를 중심으로-」, p. 867고구려는 前·後燕과 전쟁의 형태를 통하여 관계를 가졌던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그런 와중에서 고구려가 사신을 왕래시켰던 예도 있다. 이는 고구려가 北中國의 정세 파악에 기민하게 대처하였던 하나의 증거로 보고싶다. 고구려가 南燕으로 사자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고구려가 五胡十六國시대의 여러 국가 및 東晉과도) 池培善, 위에든 책, p.218, 『晉書』卷 10「安帝紀」, 元興 9년條, p. 264, 이 해(413)에 고구려가 東晉과 海路로 통교하였음.활발한 통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료라서 주목하고 싶다.셋쩨, 고구려가 南燕과 통교하면서 南燕에게 가져다가 주었던 예물이 千里人이라는 점이다. 千里人이라고 함은, 먼 거리를 가는 데 지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빨리 달리는 사람을 뜻한다. 고구려에 千里人이 많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南燕에다가 千里馬는 한 필밖에 주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千里人을 무려 열 명이나 南燕에 주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듯 싶다. 간과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 당시 나라와 나라끼리 선물이나 예물로 사람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그 때는 사람을 물건처럼 매매하는 것이 가능하였다는 이야기다.넷째, 고구려가 南燕에게 주었다는 千里馬란, 어떤 종류의 말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셋째 분석에서 언급되었던 千里人처럼 千里馬는 천리나 되는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천리인의 경우는 고구려가 열명이나 되는 많은 숫자를 南燕에 주었는데도 천리마의 경우는 겨우 한필만을 南燕에 주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고구려에서 천리인보다도 천리마를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리마가 교배종의 말이었기 때문에 계속적인 번식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는 그림이나, 말 타고 사냥을 하는 그림이 흔하다는 사실에서도 고구려에서 말이 소중한 동물이었고, 고구려인들이 천리마를 매우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南燕에 주었던 천리마란, 어떤 종류의 말인가? 이에 대해 應 는 大宛에는 천마가 있는데, 이 말이 땀을 흘리는 색깔이 피와 같아서 汗血馬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였기 때문에) 池培善, 위에든 책, p. 222, 『漢書』卷 6 「武帝紀」太初 4年 春條의 應 註, p.202이를 천리마라고 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본다면, 고구려가 南燕에게 주었다는 말이 , 여기서 말하는 천마를 의미한다고 해석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고구려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생활하였던 유목성과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에다 초점을 맞추고 싶다. 그렇다고 고구려에 천리마가 많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천리마가 고구려에 왔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필자의 억측이 허락된다면, 대략 漢 武帝의 동방침략을 하였던 후의 일로 추측된다. 이렇게 유추해석이 가능하였던 근거는, 기원전 101년 漢 에서 최초로 천리마를 획득하였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천리인 열 명, 천리마 한 마리 이외에 큰 곰 가죽, 말의 배를 덮어 흙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는 물건(障泥)등을 예물로써 南燕에게 바쳤다는 것에 대하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이유는 당시 고구려와 北中國의 五胡十六國과의 관계에서 고구려가 어떠한 물건들을 주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내부에 하루에도 먼 거리를 달리면서 물건 등을 나르는 전령 역할을 하였던 계층의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사회신분사를 이해하는 데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그렇다고 천리인이 하루에 천 리를 주파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먼 거리를 빠른 시간에 간다는 뜻으로 비유한 표현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또 천리마를 고구려가 갖고 있었다는 사실도 고구려가 역동적이었던 국가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예라고 해석하고 싶다. 또한 障泥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보건대, 고구려가 말을 많이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마를 소유하고 있었던 국가답게 馬具類 생산에서도 유명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이는 고구려가 주변국과 교류에 있어서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南燕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보아야 옳을 듯싶다.
기독교와 현대사회1.사진2.학년 3학년학번 0181164학과 사학과계열학부 문리대학출석좌석 C-793.성명 이승진4. 발표제목이슬람문명올바로이해하기: 이슬람발표내용우리가 이슬람국가를 떠올리면 전쟁,테러,석유 등 좋은쪽보다는 나쁜쪽으로 많이 인식하고 있다. 지금 이라크전쟁에서 보듯이 기름 때문에 일어난것이라고 해도 지나친말은 아니다. 우리는 이런나라들을 경계심을 갖고 보고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렇지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지역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또한 이슬람 지역의 주요인물을 통해 민족적인 모습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 지금 전쟁이 일어난 이라크의 후세인도 거론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주로 유럽이나 미주, 동아시아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다. 책을 통해 이슬람국가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되었다.5. 학생발표안락사인간의 생명은 매우 고귀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누가 함부로 할수없는 것이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안락사에 대해 찬반대립이 팽팽하다. 아직까지도 정확한 답을 내리지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안락사에 관해 찬성이다 반대다라고 확답할 수는 없지만 찬성의 입장으로 신중히 결정하고 싶다. 만일 내주위 가족이나 친지들이 이런상황에 있다면 아마도 반대한다고 할수있겠지만. 그러나 회생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안락사로서 그 병자자신도 고통을 좀더 줄여갈수 있지않나 싶은생각이다. 그뿐아니라 그사람을 간호하고 걱정하는 가족들은 더많은 고통을 짊어지고있을 것이다. 회생이 가능하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칠것이지만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이 가면 안락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무작정 한쪽의 의견으로만 일방적으로 판단하면 안되고 가족과 의사와의 정식절차를 밟아서 하는 이런 상황에 관해서는 안락사를 허용했으면 한다.6. 남북평화정착지금 세계에서 주목하고있는 주요 뉴스가 북한핵문제이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등 전세계국가들이 긴장속에 협상을 진행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라크처럼 전쟁이 일어나지않을까하는 걱정 속에 살고 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나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시점에서 예전의 북핵사태를 교훈삼아서 잘대처해야할 것이다. 예전에도 기독교인들이 조용히 나서서 문제를 차분히 해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와 비슷하게 무조건 강력히 밀고 나가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이번 사태를 해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조지 W. 부시대통령은 이라크전쟁처럼 무력으로 해결하지말고 주변국과 북한, 남한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잘풀어 나갔으면한다. 우리나라 역시 대북지원사항을 늘려 긴장감을 좀더 낮추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천하제일 남가이」를 읽고......먼저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게 되서 너무 기쁘다. 사실 전공 공부에 얽매어 있다보니 전공 서적을 읽기에도 너무 바빴고 힘이 들었다. 그래서 따로 소설을 읽을 시간을 낸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도 핑계에 지나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책을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장을 넘기고 서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사실 두 편만 읽으면 되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선생님이 왜 대표로 이 두 편의 소설을 읽으라고 하셨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책을 읽다보니 작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대강은 알 수 있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그런 작가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여러 작품들 가운데 이 두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부터 두 소설 속에서 황만근과 남가이를 통해 작가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는지를 나의 나름대로의 소견을 정리해 보겠다.이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주인공의 이름에 대해 작가의 의도가 있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황만근과 남가이 그냥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특이하고 심상치 않은 이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함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황만근의 경우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이미 만근이라는 이름이 동네를 하나로 어우르는 만근산에서 나왔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 밖에도 만근이라는 이름 속에는 동네의 만근산처럼 항상 드러나지는 않지만 묵묵히 동네의 바람을 막아주고 동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과 철에 따라 먹을 거리를 제공해 주듯이 황만근이라는 인물도 동네에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과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면서 만근산처럼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인물로써 그리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작가는 황만근이라는 이름과 동네의 산을 만근산이라고 설정함으로써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지를 암시해 주고, 아울러 작품을 다 읽은 후 더욱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그리고 남가이 또한 작가는 작품 속에서 남개똥이라는 이름에서 남가이가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내 생각엔 남가이 또한 작가가 생각하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린 흔히 훌륭한 외모와 인품을 가진 사람을 “나이스 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작가는 이“나이스 가이”에서 남가이라는 이름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나친 논리 비약일수도 있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이다. 작가는 황만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이름을 통해 먼저 주인공의 성격과 앞으로의 줄거리에 대해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러한 생각이 읽는 이에게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책을 읽는 이의 생각 중에 소설은 잊혀질 수 있어도 작품의 주된 인물인 황만근과 남가이는 쉽게 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작가는 이 두 작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려하고 있는 지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 먼저 알아보면, 우리 사회를 과연 누가 이끌어 가고, 누구에 의해 살만한 세상이 되어가는 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다. 작가는 신대리라는 하나의 작은 마을을 우리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동네에서 항상 무시당하는 존재 황만근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힘들게 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황만근은 겉으로는 항상 씻지 않아서 지저분하게 이를 데 없고, 동네에서는 바보라는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항상 마을에 문제가 생기거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그 일을 했으며, 인상 한 번 찌푸리는 일 없이 항상 웃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 구성원으로 볼 수 있는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생각하며 이용하려고만 생각한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반근이라고 부르면서 일한 품삯도 항상 반이었고, 그의 순수한 심성을 이용해 “부채탕감농민궐기”에서처럼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황만근에게 넘겨버리는 것처럼 동네 사람들은 그를 단지 바보라고 생각하며 비웃었고 항상 무시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이미 황만근이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돌아왔을 때 비로써 인식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황만근이라는 존재가 자신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었고,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난 사실 작품을 읽으면서 과연 나는 동네사람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황만근 같은 존재인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론은 너무나도 동네 사람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우리 사회에도 황만근과 같은 어디에서나 꼭 필요한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남이 알아주지 않고,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해 점심 한 끼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평생을 장애인과 함께 하며 그들의 팔과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항상 우리 주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마도 나 자신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대리의 마을 사람들이 황만근을 바라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무시하고, 더 나아가 이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까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신대리 사람들처럼 황만근을 잃은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이 사회가 그나마 아직까지 살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황만근과 같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도 어쩌면 이들을 잃은 후에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를 하며 그때서야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다음으로 「천하제일 남가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선 작품을 이해하는데 앞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보다는 많이 어려웠다. 다소 엉뚱한 장면이 많이 등장했고, 현실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 자체가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작품성이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기존 질서와 그것을 부정하는 새로운 것에 대한 대결 구도와 그리고 그 대결에서 기존 질서가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배척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가는 남가이에게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인 남가이만의 향기를 주어 그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해 위험에 빠뜨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성은 기존 사회를 움직이는 세력에게는 강력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세력은 남가이의 능력을 목과 할 수 없었고, 결국 군대라는 기존사회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곳에서 남가이의 능력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다.그렇다면 작가는 남가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선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성과 나보다 잘난 것에 대한 질투심과 이기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남이 나보다 잘난 것에 대해 인정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남에게 있다면 우리는 질투심으로 몸서리를 치며 그것에 대해 부정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런 특별한 것들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리고 나서야 안심하고 질투심을 거두어들인다. 이러한 성향은 사회 지배층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에게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소설 안에서 남가이로 인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이 모두 지배층과 엘리트층 이라고 볼 수 있는 경찰서장 부인, 여선생, 세무서장 딸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남가이가 결국에 가서는 이들에 의해 희생당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계층은 자신의 지위와 권위에 도전하는 남가이와 같은, 작품 속에서는 미남이라고 표현된 존재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가짜 미남이 아닌 진짜 미남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최고의 미남은 가장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이라고 밝힘으로써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가장 잘생기고 미남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은연중에 남가이가 읍내의 똥을 모두 모아다가 생명의 근원으로 탈바꿈시키는 모습에서 작가는 남가이의 가장 잘생긴 면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이 작품을 썼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똥과 남가이의 향기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남가이의 향기 또한 똥냄새에서 나온 것이며 똥냄새든 아니면 남가이의 향기든 그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향기를 누가 풍기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똥냄새를 풍겨도 그 사람이 지극히 사람답고 미남이면 그 똥냄새는 천하제일 남가이의 향기가 된다고 작가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