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학년도 1학기 과제물(온라인 제출용)교과목명 : 세계의 역사학 번 :성 명 :연 락 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제유형 : ( ) 형○ 과 제 명 :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1896)- 이하 과제 작성죽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무대 오른편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먼저 알베르 까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를 떠올렸다.그는 총을 쏘고 살인 후 구속되지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데 그것은 그가 모든 것이 가진 가치는 동일하며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라는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었다.마찬가지로 뜨레쁠레프가 ‘갈매기’를 통해 살아온 길은 본다면 그는 기성 세대의 예술적 가치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함과 동시에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버림아닌 버림을 받는 모습을 보며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모습보다 인생의 무가치함을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며 뫼르소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을 느끼게 되었다.그리고 다른 하나의 생각은 그래서 “죽은 사람은 누구였을까?”라는 의문이었다.소설이든 영화든 다양한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이 권총을 쏠 때는 크게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하나는 평생을 원망하며 마음을 다치게 하는 대상자를 향한 한 방.다른 하나는 꿈을 이룰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스스로를 쏘는 한 방.뜨레쁠레프란 인물은 입체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나 ‘인생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전제한다면 전자(前者)의 한 방-복수의 한 방 보다는 ‘인생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는 장치로써의, 후자(後者)의 한 방-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스스로를 쏠,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총알의 한 방은 누구를 향해서였을까?전자(前者)의 한 방은 누구를 향해서였을까?자신을 버리고 간 여자친구 니나?아니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어머니 아르카지나?아니면 작품적으로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혹은 여자친구와 어머니를 뺏어간 연적 뜨레고린?이 셋을 향해서는 모두 전자(前者)의 한 방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자신을 버리고 갔지만 끝까지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마지막에 그대로 나가는 모습에서 그간기다린 시간의 무의미함, 그리고 사랑하는 감정의 무의미함을 느끼며 무가치함을 깨닫고 전(前) 여친에게 한방을 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다.어머니 아르카지나는 이 이야기 내내 아들인 뜨레쁠레프를 인정하지 않는다.「그렇지만 그 애는 평범한 희곡을 택하지 않고 저런 데카당한 잠꼬대를」「우리에게 강요했잖아요. 농담으로 한다면 그런 잠꼬대를 들어 줄 수도 있지만, 보세요, 저건 새로운 형식에 대한 강요, 예술의 새로운 기원을 위한 강요잖아요. 내 생각으로는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나쁜 근성일 뿐입니다.」위와 같은 언급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다정한 모자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고, 이 역시 모두 전자(前者)의 한 방의 대상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뜨레고린? 행복하길 바란 전(前) 여친이 행복하지 못하고, 어머니와 자식사이를 사실상 가르는 역할을 했기에 전자(前者)의 한 방에 가장 충족한 대상자였을 것이었다.전자(前者)의 한 방은 사실 나의 바람이자 소망이었다.뫼르소가 살인을 하고도 밝힌 이유는 ‘태양’때문이라고 한 것처럼 뻔뻔하게 뜨레쁠레프 역시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인생에 대한 책임을 니나든 아르카지나든 뜨레고든이든 누구에겐가 원망도 하고 책임을 돌리기를 바란 것이었다.「하지만 제가 보기에 요즘의 연극은 구태의연한 편견에 불과 합니다」「새로운 형식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형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차라리 아무 것도 없는 게 낫습니다.」「낡아 빠진 당신들이 예술계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이 하는 일만 타당하고 진실하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질식시키고 있지 않나요」위와 같은 뜨레쁠레프의 발언을 통해 나는 그가 지난 시대 정신에 저항할 줄 알고 새로운 형식에 도전할 줄 아는 영웅적 모습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기에 전자(前者)의 한 방을 소망했다.하지만, 모든 주인공의 좌절은 종국에는 주인공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에 시대 정신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그가 느낄 좌절감을 생각해 본다면 후자(後者)의 한 방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아니면 사실 그가 죽은 갈매기를 니나에게 건낼 때 갈매기에 본인을 외재화(externalization) 하여 본인이 좌절하게 된다면 언젠가 죽은 갈매기처럼 될 것이란 예상을 했을 거란 생각을 했다.마지막 도른이 자살소식을 알림과 동시에 난 뜨레쁠레프의 좌절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새로운 형식으로 도전한 연극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떠나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의 곁으로 떠나간다는 건 어쩌면 감당하지 못할 좌절감이었을지 모른다.그래서 그가 사랑한 니나는 이 모든 것을 알았고 더불어 미안함과 고마움을 갖고 뜨레쁠레프에게「중요한 것은 꿈꿨던 빛나는 명예가 아니라 견뎌 내는 능력이에요.」 라고 말을 전한다.이 말을 통하여 뜨레쁠레프로 하여금 절대 현재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스스로를 쏘지말고 이 상황을 견디고 견뎌 앞으로 헤쳐나가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결국 뜨레쁠레프는 본인을 투사한 ‘죽은 갈매기’가 되고 말았다.갈매기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그렇다면 ‘갈매기’는 무엇이었을까?사람들은 흔히 자유롭게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날개를 펼치는 저 새들처럼’ 이라고 표현한다. 새를 보면, 훨훨 날아가는 모습 때문에 자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부러워하기까지 하곤 한다.하지만, 새가 살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필사적으로 날개짓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곤한다.그래서 나는 뜨레쁠레프가 투사한 ‘갈매기’는 결국 작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매개체로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람들이 갈매기를 보며 우리 마음대로 ‘자유롭게 날고 있다’라는 상상을 하는 것.이 것은 결국 사람들의 소망을 갈매기에 투사한 것에 불과할 뿐 우리가 마주할 현실은 절대 우리가 손쉽게 극복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그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라는 말을 역설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이다.그것을 작가는 뜨레쁠레프의 상대편에 있는 뜨레고든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생각했다.「나에게는 그런 나만의 달이 있지요. 써야 한다, 써야 한다, 써야 한다, 하는 하나의 생각이 밤낮으로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역마차를 갈아타듯 끊임없이 글을 씁니다.
탁월함이란 무엇인가탁월함이란 무엇인가“메논”‘탁월함은 누구든 그것이 생기는 사람에게 신적인 섭리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우리에겐 보이네.’책의 끝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만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고자 한 ‘탁월함’서로 주고받는 이야기 내내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진정한 탁월함은 대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하였다.하지만 책 말미에 ‘그것이 생기는 사람에게 신적인 섭리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고 정리를 해버리니 나는 멘붕(?) 할 수밖에 없었다.책장은 이제 한 페이지도 남지 않았는데 저렇게 마무리를 하고 가버리면 나는 다시 천천히 그 주고받는 대화의 의미를 하나하나 되새겨야 했기 때문이다.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이제 나는 어디 좀 가봐야 할 시간’이라고 말을 하는 건 마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너희가 이걸 한 번에 알아듣기에는 어려운 울 거니까 남아서 잘 생각해봐’라고 우리를 남겨놓는 것 같았다.어쨌든 나는 다시 책 앞장으로 돌아가‘탁월함’에 대해 읽어볼 수밖에 없었다.메논의 문제제기와 소크라테스의 제안우선 소크라테스를 향한 첫 질문은「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가르쳐질 수는 없고, 수련될 수 있는 것입니까」로 시작을 함과 동시에 나 역시 ‘탁월함’은 무엇이며 어디에서부터 오고 어떻게 성장시켜 나갈 수 있는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하지만, 긴 소크라테스의 답변은 두루뭉술 하게 ‘어쩌지 나 잘 모르겠는데..’라는 느낌 혹은 ‘나 알긴 아는데 쉽게 정의는 할 수 없어’로 정의할 수 있었다.탁월함이란 무엇인가 ? 비판적 검토그러자 메논은 아주 쉽게 정의하려 하는데 쉽게 정의하려 하는 만큼 답변도 경솔하게 느껴졌다.‘남자의 탁월함’과 ‘여자의 탁월함’,‘아이, 자유인, 노예의 탁월함’등 저마다의 탁월함이 ‘제각기’있다고 말을 했다.하지만, ‘제각기’라는 의미는 결국 쉽게 정의할 수 없다와 동의어처럼 느껴져 가르칠 수 있는지 수련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은 결국 자기모순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게 하였다.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너 그럴 줄 알았다며 공세를 취하는데 그 공세의 요점은 결국 ‘동일한 형상’을 다양한 예시 ? 벌의 본질, 건강, 큼, 힘, 남자와 여자의 관리, 정의, 절제로 설명하려 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뛰어난 사람 일 것이네」라고 주장에 쐐기를 박는다.결국 소크라테스는 ‘탁월함’그 자체로는 차별적이라기보다는 사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에 주목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뒤에서는 다시「나도 자네에게 그 밖의 다른 형태들을 말해 줄 것이네」라는 말을 통해서 보편성 속에서 특수성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메논은 다시 탁월함을 「훌륭한 것들을 반기도 또 힘을 갖는 것」이라고 답을 한다.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한결 같았다.오히려 「획득에다 ‘정의롭게 그리고 경건하게’를 덧붙이는 것」「그와 같은 좋은 것들의 획득」「비획득」「정의와 함께 생기는 모든 것」모두를 단지 탁월함의 부분으로 설명한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탁월함은 역시 인류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가치 -‘보편성’을 나에게 혹은 메논에게 강조하려는 것으로 이해했다.하지만 메논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이런 논의를 ‘전기가오리’에 비유하여 본인의 논의를 마비시킨다며 ‘교활함’을 보인다.그런 ‘교활함’앞에서도 우리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겸손하다.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난관에 빠져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난관에 빠뜨리기 때문이네, 지금도 탁월함에 관해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난 알지 못하네」라며겸손함을 보여주는데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논의에서 메논과 달리 ‘탁월함은 00이다’라는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탁월함’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어렵게 느끼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다.그러자 메논은 질문의 방향을 바꿔「당신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탐구하실 겁니까」라는 질문을 하며 실제 ‘탁월함’을 만나면 어떻게 그것이 알지 못했던 것인가를 알 수 있냐라는 물음을 한다.하지만, 그렇듯 소크라테스 역시 순순히 인정하며「사람은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결국 탐구할 수 없다.」고 답을 한다.대체 무슨 의도일까라고 생각을 하다보니 ‘상기’라는 개념을 이야기 한다.「탐구와 배움은 결국 모두 상기니까 말일세.」이 시대가 이야기하는 탐구와 배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메논에게 노예를 불러 ‘상기의 해석’을 해주겠다고 말을 했다.상기의 해석을 위해 노예에게 선분을 그리며 도형의 넓이를 계속 구하라고 하며 특별한 가르침은 없고 오직 질문만이 가득했다. 그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보여주려고 했던 첫 번째는 본인이 한 말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생각을 했다.「처음에 이 아이는 8제곱피트 도형의 선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네. 지금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나 그땐 적어도 그것을 안다고 생각했고, 또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담하게 대답했으며, 난관에 빠져 있다고 믿지도 않았네. 그러나 이제 비로소 난관에 빠져 있다고 믿고, 또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들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네」라는 설명은‘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결국 탐구할 수 없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의 부연설명으로 느껴졌다.본인이 처음에는 아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인지 눈치 채지도 못하고 질문과 답을 하다보면 답을 구할 수 있고, 그것이 나아가다보면 또 난관에 빠지지만 그 본인은 난관에 빠져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끝내 답을 구할 수 있다라는 것. 그 자체를 설명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따라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 속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참된 확신들이 있는 거지?」라는 질문에서도 결국에는 본인이 처음에 아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건지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답을 얻고 답을 얻는 과정을 통해 확신이 생긴다는 걸 강조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그렇다면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질문할 뿐인데, 그 스스로 자신으로부터 인식을 되찾음으로써 인식할 수 있찌 않겠나?」를 통해 단지 본인은 과정 속에서 질문만 했고, 답을 찾기 원하는 자가 스스로 결과를 냈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탐구와 배움은 상기’라는 것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읽혀졌다.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다음 강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난 ‘지적 겸손’이라 생각했다.그 이유는 그가 말한 다음의 대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발견할 수도 없고 탐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때보다도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더 나아지고 더 남자다워지며 덜 게을러질 거라는 사실, 바로 이것을 위해 난 기필코, 내가 할 수 있다면,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싸우려는 것이네」왜 그가 ‘아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도 결국 탐구할 수 없다’라는 애매한 답변을 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현상에 대해 인식하고 무엇을 하기 보다 그저 우리가 모르고 부족하기 때문에 더 노력에 노력을 더해 행동한다면 진리 추구가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그의 의견에 보충을 해본다.탁월함이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인가다음은‘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시작했고, 긴 호흡이지만 한번에 논의를 따라갔다.「그렇다면 뛰어난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뛰어나게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배움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인가?」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역시 ‘인식’이기 때문에 배움으로 탁월함을 가르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매조지를 하려나 싶었다.하지만, 그 뒤에「탁월함뿐 아니라 어떤 것이든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그것의 교사들이나 학생들이 있지 않겠나」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버리니 정말 ‘탁월함’은 본성적인 건지, 가르칠 수 있는 건지 ‘나의 주관’이 없이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다보니 나 역시 자꾸 흔들리게 되었다.하지만 보기 좋게 ‘탁월함의 교사’는 없다고 이야기 한다. 아뉘토스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나는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라 믿고 ‘탁월함의 교사’를 찾았지만「(스스로를) 탁월함의 교사들임을 공언하고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배우길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사람들로서 그들 자신을 밝히며 이에 대한 보수를 정하기도 받아 내기도 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보내는 게 정말 분명히 올바르게 보내는 것인가?」라고 소피스테스들을 소위 돌려까기를 시전하는데 당시 시대적으로 스스로를 탁월함의 교사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논쟁에 끌어들여 그들도 비난하려는 혹은 ‘탁월함’의 다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들을 비난했을지도 모르겠다.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이어지는 질문에서 현대에도 비슷하게 논쟁이 될만한 질문거리를 볼 수 있었다.「이 사람은 가르치는데 돈을 써야만 할 경우 이것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가르치고서 뛰어난 사람으로 만드는 데 돈을 들여야 할 필요가 없을 경우 이것들을 가르치지 않았을 리가 결코 없었을 거라는 사실 말일세. 이것들이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야.」잠시 우리 시대가 말하는 ‘탁월함’을 생각해보았다.그리고 우리 교육방식은 시대가 말하는 ‘탁월함’을 향해 가고 있는지...내가 생각했을 때 우리 시대에서는 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탁월함’이라면 우리는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응당 타당할 것이지만 우리 시대에서 말하는 ‘탁월함’이 입시의 우수한 성적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들이 가르쳐질 수 있도록 돈을 쓰고 우수한 성적이라는 ‘탁월함’을 추구한다.천박하다고 비난할지라도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기에...어쨌든 그 시대의 탁월함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 대목에서 한번 멈춰 갈 수밖에 없었다.이런 논의에 이어 탁월함의 교사들도 없고 학생들도 없다면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게 아니겠지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나도 어느 덧 동의를 했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란 무엇인가소크라테스정의란 무엇인가“크리톤”이야기를 듣는 내내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이 똑똑한 사람은 왜 감옥에 갇혔을까?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것이 가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저렇게 죽음을 선택했는지....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을 자아냈다.책을 덮고 가장 먼저 찾아본 것은 소크라테스의 죄목이었다.그 결과 소크라테스는‘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것과 그로 하여금‘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로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리고는 나는 현대적 관점으로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죄와 그로 하여금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하지만, 다분히 현대적 관점을 가진 나에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그가 지키고자 한 가치와의 비교를 위해 나는 다시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다시 읽어야만 다시금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우선 이 책을 번역한 작가가 생각한 이 대화의 목차를 천천히 곱씹으며 그의 생각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크리톤의 탈옥 권유우선 먼저 크리톤이 되어 봤다.흔히 우리가 만나는 히어로 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구하러 오는 주인공 친구들은 다급하고 절박해 보인다. 그런 크리톤도 그랬을 것이다.하지만,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있는 친구를 구하러 다급하게 왔더니 마주친 그의 모습은 이보다 편할 수 없이 잠들어 있으니...한동안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며 요즘 이야기로 크리톤은‘현자 타임’을 갖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그에 반해 주인공 소크라테스는 태평하게“신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행운이 함께 하여.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라며 답을 한다.천성이 태평한 사람인가? 이 사람은 정말 뭘 믿고 이럴까라는 생각과 함께 정말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어쨌든 크리톤은 다급했고, 이전에도 탈옥을 권유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만큼 크리톤은 실제 당사자인 소크라테스보다 다급했고, 그가 이유를 댔던 친구보다 돈을 중시했다는 평판은 설득하기 위한 방편이었지 논리적인 설득에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다급했고,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하지만, 이 답답한 사람 소크라테스여...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그저 다수의 판단에 신경 쓰지 말고 훌륭한 사람들은 우리가 한 일을 실제로 있었던 대로 생각할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여기에 굴복할 크리톤이 아니었다.크리톤‘역시 그래 소크라테스 네가 주인공이다’라고 인정하듯, 너는 충분히 멋있음을 강조하면서 너를 구하려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탈옥 시 어려움을 걱정하는 것이라면 다시 걱정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하지만, 그는 다시 그게 다가 아니라며 자기는 더 많은 것을 염려한다고 한다.크리톤은 가족을 생각하고, 친구를 생각하고, 재판 과정을 비판하고, 그리고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되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탈옥을 권고한다.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함께 해줄 친구가 몇이나 있을까 부러움과 동시에 그저 주인공은 답답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크리톤의 권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응수이제부터 그의 이야기를 철저히 들어봐야 했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이는 원칙(logos)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기변명(?)을 시작하고, 지금 본인이 세운 원칙보다 더 좋은 것들이 없다면 절대 탈옥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짓는다.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기에 마음속으로 소리쳤다.“나는 당신의 죄를 압니다. 소크라테스! 이만하면 됐어요. 여기서 죽으면 더 이상 우리는‘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아닙니다. 이건 개죽음이 될 수 있어요.”그래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문제를 적절하게 고찰하는 방식을 꿋꿋이 설명한다.다수의 판단이 아니라 전문가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판단(의견)들 가운데 어떤 거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되 어떤 것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늘 우리가 한 말은 맞은 말인가」「내가 이런 처지에 있으므로 그 말이 어떤 점에서 내게 이전과는 꽤 달리 보일지, 아니면 같은 것으로 보일지」「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못한 것, 부끄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 좋은 것과 나쁜 것과 관련해서 살펴보세」「정의롭지 못한 것에 의해서는 손상되고 정의로운 것에 의해서는 이로움을 얻는 대상이 파괴되었을 경우에는 우리의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우리는 다수의 사람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그토록 크게 주목할 게 아니라, 정의로운 것들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과 진리 자체가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하네」이 것을 논하기에 앞서 당시 아테네 사법제도를 이해해야 하는데 아테네 사법제도는 배심제를 토대로 30세 이상의 남자 시민으로 구성되었다.그런데 다수의 사람의 판단(의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배심제를 채택한 그곳에서 정의로운 것들과 정의롭지 못한 것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이 뭐라 그럴지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원칙에 대해 과신하는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면서 한 편으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판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정치적으로 중요한 판결을 앞두고는 진영 대결 논리와 소위 다수가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떼법’이라는 자주 나타나고 실제 판결을 좌지우지하는 모습도 보여 한국사회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해보곤 할 때가 있다.‘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칸트의 말처럼 민주사회에서 최후의 보루는 ‘사법부’가 담당한다.하지만,‘진영논리’와‘떼법’에 의해 밝혀야 하는 실체는 사라지고 흔들리는 사법부가 된다면 판결은 논쟁만 남아 사회는 더욱 바로 서기 어려울 것이다.또한 그런 사회라면 소크라테스가 올곧다고 믿는 정의의 실현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믿은 그 사람들의 전문성 또한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그러한 사회는 건강할 수 없으며 정의 또한 사라질 것이다.이 생각이 여기까지 왔을 때, 한 정치인이 보여준 모습이 생각이 났다.자신의 sns를 통해 공정과 정의를 말해 일약 인기를 얻은 정치인이 되었지만검증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에서는 마치 나에게 적용될 공정과 ‘가재 붕어 게’로 대변되는 ‘일반’ 시민에게 적용되는 공정이 달라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런 사회라면 역시 사회는 건강함을 잃고 공정한 경쟁이 사라지고 병들 것이다.결과적으로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사회라면 누구나 탈옥을 꿈꿨을 것이라는 생각에 닿았다.그런 결론과 두 가지 생각이 병존하며 소크라테스는 그래도 당시 민주사회가공정과 정의가 살아있다 믿은 ‘로맨티시스트’였나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정의의 원칙들과 탈옥의 문제그런 로맨티시스트적인 면은 그 이후의 논쟁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훌륭하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이 같다」「정의롭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은 그 짓을 하는 사람에게 모든 경우에 나쁘고 부끄러운 것인가」「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더라도, 다수의 사람이 생각하듯이,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도 안되네」「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는 그것들을 이행해야 하는가, 어겨야 하는가」이런 질문답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로맨티시스트라고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도 덧붙이게 되었다.플라톤 역시 국가론을 통해 정의를 불의와 비교하며 이야기를 했다.정의와 불의 중 어느 것이 더 강한가란 질문부터 논쟁을 시작한 이야기는 궁극에 핵심은 정신의 특성에 집중한 데에서 해석을 시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를 논하다아리스토텔레스,정치를 논(論)하다“정치학”플라톤을 만난 후, 아리스토텔을 만나본 정치학으로의 여행은 성공인가, 실패인가보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의 이야기는 결국 연속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되었다.그 이유는, 어느 국가가 이상적이고 어떤 정치체제, 어떤 시민들이 함께 하는 국가가 되어야 하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까지도 충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야기와 우리도 논의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플라톤을 만나고 그가 말하는(소크라테스를 빌린이야기)형식에 익숙해졌는지 아리스토텔이 이야기하려는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또한 예를 든것도 과거속의 그들의 문제로 예를 들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다.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을 오늘날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해야하는 것이 분명 뜻깊은 것은 내가 그들을 만남으로 그들이 살면서 겪은 고민들과 문제들을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하는 해결책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문제의식을 가져라라고 말을하고,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오늘의 해결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꼈다. 물론, 어렵고 방대한 이야기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을 만나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만으로도 과거와 오늘의 연속을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했다고 생각한다.이 책은 1편부터 8편까지 정치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1편에서는 ‘노예’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국가론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도 비슷한 불편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불편함은내게 있어서 사회의 언급하기 힘든금기에 대해 언급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불편하게 느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되었다.‘노예’에 대해 불편함을 가진 이유는, 사회가 신분제도를 가진경우에 노예나 주인은 누구나 될수있는 것이 아닌 누구는 노예, 누구는 주인으로 결정된다고 한 부분에서였다. 또한, 이 노예를 얻는 기술은 수렵과 전쟁을 통해서라고 했는데 그것이 재산으로서 작용하고 또한 이것의 목적이 돈벌이 수단이 된다는데에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사회는 ‘돈’이라는 개체를 통해서 돈의 주인과 돈의 노예로 나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는데 자세히 그부분을 생각해보니 우리도 결국 사람의 습성에 따라서 주인과 노예로 나뉘고 있던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이 들었다.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라는 것은 역시 새로운 신분제를 가져올 수 있으며 돈이 목적이자 곧 수단으로서 작용되는 것을 생각해보니 과거‘노예’에 대해 그려낸 과거의 모습과 ‘돈’이라는 개체로 그려낸 현재의 모습이 매우흡사해 보였다.어쨌든, 과거에도 지배에 따라 차별이 나타나는 문제를 가진 것을 보았고 그에 따라서 현재에도 돈의 소유에 따라서 차별적 대우가 나타나는 점을 생각해보았다. 과거의 정치가가 차별을 해결하지 못하였고, 우리사회의 정치가들은 궁극적으로 차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고, 우리사회의 ‘돈’의 위력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그런 이야기를 생각해보며, 난 아리스토텔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의문중에 하나는 국가가 무엇이고, 시민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그렇게 심도있게 했어야만 하는것이다. 아무리 시민이 정체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시민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어렵게 분석한 이유가 무엇인지..현재의 우리가 말하는 시민도 시민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그리고, 그가 이야기한 정의는 정당한 배분이라고 했으며, 국가는 선한 생활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으나 공동이익과 가난한 자의 이익은 별개로 한걸 봐서는 다른 느낌의 이야기인것 같아서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 어떤 의도인지 궁금증을 더했다.이런 궁금증이 조금씩 불편해진것은, 집단의 주권자가 되어야하는 인물에 대해서 높은 재산자격이 요청이 되야한다고 하는데 이부분에 있어서 정치가가 재산에 대한 관심이 많다면 투명하고 부패없는 정치가 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중국에서는, 정치가의 월급이 상당히 적은데 그 이유가 국가에서 지도자가 그런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지원을 하여 경제적인 부패를 막는다고 정치 그 자체에만 신경쓰게 한다. 그러나 오래전의 아리스토텔은 그런 대안을 생각못해본 것인지 재물과 부패의 연관관례를 몰랐던 것인지 현재 중국의 정치도 따라가지 못한 생각이라 생각했다.그렇게 아리스토텔역시 정치가가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 중에 눈에띄었던 것이 복종을 할 줄 모르는 자는 좋은 지배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이 부분이 상당히 공감이 가는 부분중에 하나 였는데, 결국 리더쉽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리더가 누군가를 리드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을 이끌 수 있어야 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가가 정치를 통해 시민을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보았고,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을 했다.반면에, 과연 우리의 정치에서 정치가분들께서는 정말 우리 시민에게 복종을 할 수 있는지, 혹시나 복종을 우리에게만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플라톤을 만난 후라 그런지, 아리스토텔에 대해서는 왠지 가까운 느낌이 들지않았는데, 플라톤때보다 불편한 이야기를 많이 해서인지 비판의식이 보다 많이 들었다.계속해서 나오는 국가요소에 대해서도 너무 한정지으면서 정의를 내리려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서는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과연 어떤 큰의미가 숨어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최근의 정치는 국가의 어떤 요소하나 쉽게 포기할 수 없을정도로 모든 것이 한데 어울러져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가 이야기한 약자의 이익과 같지않은 공동이익이 공동이익으로서 의미가 있을지 말이다.
-시의 왕으로 불린 시인-Paul Verlaine목 차작품 소개 및 이해와 감상◆ ………………………………………………………………… ◆1. Il pleut doucement sur la ville ………………………… 1[거리에 소리없이 비가 내린다]2. Le ciel est par-dessus le toit... ………………………… 2[하늘은 지붕위로]작가 소개◆ ………………………………………………………………◆1. 작가 연대 …………………………………………………… 42. Verlaine et Rimbaud ……………………………………… 63. 문학사에서의 Verlaine ………………………………… 11시의 왕으로 불린 시인 Paul VerlaineIl pleut doucement sur la ville (거리에 소리없이 비가 내린다)ll pleure dans mon couer Comme il pleut sur la ville;(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 눈물이 내린다)Quelle est cette langueur Qui penetre mpn coeur;(가슴 속까지 스며드는 이 슬픔을 무엇이라고 할까...)O bruit doux de la pluie Par terre et sur les toits!;(땅 위에, 지붕 위에 내리는 비 오는 소리의 처량함이여...)Pour un caer qui s'ennuie O le chant de la pluie!;(속절없이 외로운 맘 울리는.....오...빗소리. ..비의 노래.)Il pleure sans raison Dans ce caer qui s'ecaeure;(서럽고 울적한 이 마음에 뜻 모를 눈물만 내린다.)Quoi! nulle trahision?....Ce deuil est sans raison(원망스런 생각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괴로움 바이 알 길 없구나.)C'est bien la pire penie De ne savior pourquoi(사랑도 없고..원한도 없으련만 ....어찌해 내 마음 이리도 괴로울까.)Sans 롭다. 3연과 4연에는 서정적 자아의 인생관이 나타나 있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명상의 삶을 강조하고 청춘의 소중함을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마치 한시의 구성법인 선경 후정의 배열 방식을 택해 단순하고 소박한 삶의 가치를 노래하고 있는데, 상징주의 시의 독특한 음악성을 잘 구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치밀한 대구에서 형성되는 형식적 안전성과 프랑스어의 음감을 살리는 조사법이다. 1연과 2연에서는 푸르고 고요한 하늘과 지붕 너머로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는 종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고 새 소리가 들려 오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대구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시의 배경이 된 자연의 소박한 정경을 제시한 뒤 3연에서는 자연의 소박하고 고요한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제시한 삶과 대비되는 인간의 삶이 지닌 불협 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4연에서는 이제 신이 만든 자연에서 떨어져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분주한 삶이 지닌 의미를 묻는다. 즉 소진되는 청춘의 소중함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하는 양태를 각성시키는 것이다. 표현면에서는 전체적으로 1연과 2연에서 자연의 사물을 가지고 대구법을 사용한 데 이어 이러한 자연과 인간의 삶과의 연관을 묻는 3연과 4연을 배치하여 전체적으로도 대비가 되도록 구성하였다. 이 같은 구성은 먼저 경치를 서술하고 그에 대한 인간적 감회를 읊는 동양의 한시의 구성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상 전개가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베를렌은 이 시에 대해 "시 전체가 꿈과 현실, 부재와 실재 사이에 걸려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현실의 삶이 지닌 소요와 그에 대해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소박하고 고요한 삶에 대한 인간적 희원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치밀한 구성을 엿보게 해주는데 구성의 엄밀성뿐만 아니라 음감과 조사법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번역된 작품이기 때문에 원문을 읽는 것과 같은 맛의 느낄 수가 없다.Paul Verlaine - Pauvre Lelian [1844.03.30.~ 1896.01.0 창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전에 간행한 시집은 위의 5권을 포함, 20권에 이르며 시편은 840편이나 된다. 1894년에 그는 시왕(詩王)으로 선출되고, 세기말을 대표하는 대시인으로 숭앙되었다. 그의 시풍(詩風)은 낭만파나 고답파(高踏派)의 외면적이고 비개성적인 시로부터 탈피하여 무엇보다도 음악을 중시하고, 다채로운 기교를 구사하여 유원(幽遠)한 운율과 깊은 음영(陰影)과 망막(茫漠)한 비애의 정감으로 충만되어 있다. 이 밖에 랭보, 말라르메 등 근대시의 귀재(鬼才)들을 소개한 평론집 《저주받은 시인들 Les potes maudits》(1884), 회상기 《나의 감옥 Mes prisons》(1893) 《참회록 Confessions》(1895) 등의 저서도 유명하다. 그는 도서관에서 심령술과 신비학에 관계된 책들을 읽었으며, 몇 개월 동안 베당뜨의 문학 원리를 발전 시켰다. 시인은 전령사이자 신성함의 해설자였다. 그는 "나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아마 그는 내적인 발흥을 시적인 통찰력에 의한 해석으로 보상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약의 도움으로 신과 합체될 수 있다는 (나아가 신이 될 수 있다는)것과 선과 악 사이에서의 고통스런 단절을 끝낼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지존의 경지는 온갖 불경스러움과 고난을 통해 근접되고 있었던 것이다.2. Verlaine et Rimbaud1871년 여름, 파리로 가고 싶어하던 랭보는 자신이 존경하는 시인 베를렌에게 몇 편의 습작을 우편으로 보낸다. 전혀 낯선 사람의 시에 열광한, 낭비벽이 심하고 관대한 베를렌은 자신의 집을 제공하기 위해 그에게 파리에 올 수 있는 돈을 부쳤다. "어서 오시게, 친구. 거대한 영혼, 난 그대를 부르며 기다리다." 이렇게 그들의 불행한 동행은 달콤한 언어와 함께시작하였다. 폴 베를렌은 여러 의미에서 랭보보다 위험스런 존재였다. 부친이 군 장교였던 그의 가정은 랭보의 가정보다 훨씬 더 안락하고 인습적인 부르주아 쪽이었다. 하지만 외아들인 베를렌은 타고난 신리하여 그들은 증명되지 않았던 이성론의 한계들을 극복하고자 인도 삼에서 채취한 마약(당시 그 마약은 담배로 피우지 않았다.)이나 향쑥 혹은 알코올에 젖어 들었다. 특히 랭보는 지속적인 환각 상태에 빠져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호수의 한 가운데서 살롱들은, 파리에 있는 공장들의 모습에서 동양의 회교 사원들을 보았던 것이다. 랭보는 각가지 방법으로 베를렌을 학대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느닷없이 그를 덮치는가 하면 자신이 저지르고 싶어했던 범죄 이야기를 들려 주기도 했다. 일례로 어느 카페에서 랭보는 베를렌에게 시험하게 있다면서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 놓으라고 말했다. 랭보는 베를렌이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려놓자 단검을 빼들고 수 차례나 찔러댔다. 랭보의 발작과 베를렌의 눈물. 잠시 후, 부드럽고 다정한 모습으로 변한 랭보와 다소 위안을 찾은 베를렌의 육체적 열정이 이어졌다. 랭보는 베를렌을 학대했고, 베를렌은 마틸드를 학대했다. 술에 취하거나 실성한 채 집으로 돌아온 베를렌은 나이 어린 아내에게 무지막지한 손찌검을 해댔다. 어떤 날은 머리카락을 태우려 했고, 어떤 날은 칼로 손에 상처를 입혔다. 마틸드는 랭보를 증오했다. 그녀는 랭보가 남편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1872년 1월, 베를렌은 생후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벽을 향해 내던지고(두텁게 껴 입힌 옷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어 마틸드의 목을 졸랐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마틸드의 부모와 실랑이 끝에 겨우 저지당한 베를렌은 집에서 쫓겨났다. 어쨌든 랭보와 베를렌은 이러한 와중에도 아름다운 시들을 쉴새 없이 써댔다.랭보를 향한 자신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베를렌. 그는 랭보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아내를 사랑했다. 두 시인의 관계가 2년 동안 지속되던 무렵, 마틸드가 마침내 이혼하겠다고 나서자 베를렌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 나겠다면서 랭보를 샤를빌로 보냈지만 한 달도 못되어 다시 불렀다. 어느 날 베를렌은 병에 걸린 마틸드의 약. 베를렌은 떠나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길 원했지만, 랭보는 다시 안기는 베를렌을 보면서 그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지옥의 시간은 이틀이 흘러가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가장 익숙한 시간들, 다시 말해 함께 마시고 울고 떠들고 격렬한 사랑을 나누는 순간들이 흘러 갔다. 사흘째 되는 날, 술에 취한 베를렌은 떠나기로 마음먹은 랭보를 방안에 가둔 채 총을 꺼내어 들었다. 한발이 랭보의 손에 박히고 나머지 두발은 빗나가 벽에 박혔다. 이내 자신의 행위를 깨달을 베를렌은 울면서 밖으로 나가 모친의 품에 안겼다. 그의 어머니와 랭보는 베를렌을 진정시키느라 미처 그 총을 치운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날 오후, 세 사람은 역으로 나갔다. 랭보는 손에 입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떠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술에 취해 정신 없던 베를렌은 랭보에게 다가간 뒤, 자신의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며 이번에는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기겁을 한 랭보는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다. 베를렌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랭보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문제는 그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의 소문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는 것이다.베를렌은 2년 동안의 강제 노역 판결을 받았다. 1873년 8월 8일이었다. 그에게 적용된 판결은 상대에게 경상을 입힌 범죄자에게 처해지는 최고의 형벌이었지만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명백하다. 실제로 동성애가 추행인가 하는 여부는 의사의 소견에 위임되었으나 막상 법정은 외설로 보았다. 그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사안이었다. 랭보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즉시 벨기에에서 추방되었다. 아무튼 베를렌의 자품은 자신의 친구들에 의해 1875년의 프랑스 고답파의 선집에서 제외되었다. 그의 행실에 대한 형벌이었다. 랭보 역시을 서둘렀으나 파리의 문학계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 해 11월, 랭보는 자신의 원고를 태우고 영원한 절필로 들어갔다.랭보와 베를렌은 그 이후에 독일에서 한번 더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