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혜강 그는 누구인가?최한기(崔漢綺:1803∼1877)는 조선 말기에 활약했던 탁월한 철학자이자 선진적인 과학사상가이다. 본관은 삭녕, 자는 운로, 호는 혜강惠岡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사에서 독창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철학체계를 제시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학자가 아니다.최한기는 신분과 학문, 두 측면 모두에서 그 시대의 주류가 아니었다. 주류 학자들과 인간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면 그에 대한 정보가 그 시대의 학계에 충분하게 전파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후대에도 잘 전승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경학이나 주자학에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주자학이 주류였던 당시의 학계에 편입되기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학문은 매우 포괄적이고 이질적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학문영역에는 인식론과 존재론과 같은 수순철학은 물론이고 사회개혁론과 같은 사회사상, 천문학, 농학, 의학, 수학, 지리학과 같은 자연과학 등이 망라되어 있다. 더욱이 그의 철학이론은 주자학과는 문제틀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체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그의 저술에는 신기神氣, 통通), 추측推測, 활동운화活動運化), 기륜氣輪) 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과 낯선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주로 주자학의 분석틀에 익숙해져 있던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그의 학문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데는 그의 학문이 지닌 포괄성과 이질성이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1. 혜강의 학문에 관한 연구(0) 기학 체계의 독창성과 다양성우리는 일반적으로 그의 철학을 ‘기氣학’의 전형적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학’은 ‘理리학’에 상대하는 개념으로서, 성리학에서나 실학에서 ‘기’개념을 근본개념이나 중심개념으로 삼는 모든 철학적 입장에 대한 포괄적 개념이다.그는 자신의 고유한 ‘기’개념을 통하여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형성함으로써 기학에 속한다기보다는 기학의 영역을 새롭게 넓혀 나가는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구조와 방법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그의 기학이 매우 특징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일각에서는 그의 철학을 ‘독창적’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혜강의 기학이 독창적이라 지적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기본개념과 이론체계가 어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 그 연원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한기는 기를 ‘한 덩어리의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 하여 기의 운동적 성격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기’라는 것은 무릇 한 덩어리의 살아 움직이는 것이니, 스스로 순수하고 깨끗하여 맑은 기질이 있으며 비록 소리 빛깔 냄새 맛에 따라 변하지만 그 근본의 성질은 변하지 않으니, 그 전체의 무한한 공적과 활용의 덕을 들어서 총괄하여 ‘신’이라 한다.)그는 “천지에 가득 차 있고 물체에 푹 젖어 있는” 모든 것이 ‘기’아닌 것이 없다 하여 기일원론을 확인한다. 여기서 그는 기의 현상으로 인간개체가 있기 이전에 ‘천지의 기’(天地氣神)가 있고, 인간 개체가 있은 다음에 ‘형체의 기’(形體氣神)가 생기며, 죽은 뒤에 다시 천지의 기로 돌아가는 전개양상을 파악한다. 곧 하나의 기가 우주와 개체 사이에서 순환과정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특히 기가 운동을 통해 발휘하는 무한한 효용성을 바로 ‘신神’이라 제시한다.최한기는 ‘신기’를 천의 신기, 인간의 신기, 사물의 신기로 구별하여 이들 모두가 하나의 기임을 확인하면서도, 주로 인간의 신기로서의 형체의 기를 중심으로 해명하고 있다.) 곧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지니는 신기는 다양한 감각기관을 통해서 대상의 무수한 사물과 소통한다는 의미에서 ‘통通’하는 것으로 이해된다.최한기의 기개념에서는 기의 운동하는 성질 그 자체를 ‘운화運化’내지 활동운화로 제시하고 있다.형질이 크고 완비된 것으로는 오직 ‘운화’하는 ‘신기’가 있으니, 모든 사물의 근본이요 원천이 되는 것이다.무릇 ‘기’의 성질은 원래 활동운화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충만하여 실낱같은 빈틈도 과 세계의 현상들이 전개되고 순환하면서 동시에 ‘일통一通’하는 유기론적 기일원론을 제시한다. 이러한 그의 기학에서는 특히 인간의 신기가 활동하는 양상으로서 인식작용을 해명하며,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의 운화과정을 치밀한 체계와 구조로 제시함으로써 독특하고 풍부한 이론을 정립하고 있다.(1) 성리학 비판과 혜강의 리 개념유학에 대한 혜강의 태도는 유학의 윤리규범의 묵수가 아닌, 자신의 기학을 통한 재해석 그리고 고전의 재해석을 통한 권위의 차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혜강 당시의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던 성리학은 유학의 적자격이었으므로─혜강은 주자학만이 유학의 정통이고 다른 유파는 이단사설이라는 인식에서는 이미 벗어나 있었다─성리학의 여러 개념을 그대로 쓰기는 하였으나 그 의미는 이미 다른 무엇이었다. 그러면 리를 중심개념 내지 일차적 개념으로 놓는 리학에 대한 혜강의 비판과 기학에 입각한 혜강의 리 개념은 무엇인지 대해 알 필요가 있다.기를 알지 못하면 리를 알지 못하고, 기를 보지 못하면 리를 보지 못한다. 기를 모르는 사람은 성과 리를 공부하는 데만 중점을 두어 단지 리가 천하에 가득 찬 것만 알고, 기를 보지 못하는 사람은 허리墟理를 연구해서 말하는 바가 모두 신령한 리뿐이다. 지혜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라 하여 그것을 성에서 구하고 허에서 구하기는 하지만, 기에서 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혜강의 성리학 비판은 우선 리가 그냥 무형 중에 있은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리는 기의 조리條理로서, 실체가 아닌 그림자 같은 부수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실체인 기를 먼저 알아야 무형 중에서 뜬구름 잡는 리가 아닌 참된 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러한 비판이 가능하지 성리학의 리가 지닌 의무부터 간략히 살핀 다음 혜강의 비판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정주 계통의 주리적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는 존재론적으로는 太極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리는 그 속성상 무형체, 무계탁無計度, 무조작無造作인 동시리는 인간존재에 있어서는 성이 되는데, 그 내용은 인의예지라는 유가의 덕목들이다. 여기서 유가의 가치개념은 단순한 인간의 가치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로 되어 도덕형이상학을 이루게 된다.혜강이 성리학에 대해 비판하고자 하는 초점은 리의 구체적 내용이 인의예지라는 인간적 가치라는 점과 더불어 그러한 내용의 리가 무형, 무조작의 관념적 실재이고 존재의 근원이라는 점이다. 혜강은 리 그 자체의 인식이 아닌 기를 통한 리의 인식이 될 때에만 무형의 리가 아닌 유형유방有形有方의 리를 인식할 수 있고, 이로써 신비적이 아닌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리의 인식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2) 서양과학의 이해와 수용혜강이 어떠한 계기에 의하여 서양과학의 정밀함과 유용성에 눈뜨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선이 쇄국으로 세계의 진운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혼자 고루한 처지에 떨어져 있음을 개탄하고 개국통상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한 것이 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추측된다.)혜강의 과학에 대한 접근태도는 앞 시대의 실학자인 이익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받아들인 과학의 내용은 질적으로 달랐다. 이익이 받아들인 과학의 내용이 서양의 중세과학을 반영한 것인 데 반해, 혜강의 『성기운화』나 『신기천험』의 대본이 된 『담천』이나 『전체신론』은 혜강과 동시대의 과학서들로서 19세기의 과학 수준을 상당히 반영하는 수준 높은 책들이었다. 또 이익을 비롯한 여타의 실학자들은 과학기술의 수용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적 세계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과학과 철학을 이원화시킨 데 반해 혜강은 기학을 반영함으로써 서양과학과 전통철학을 일원화시키고 있다. 혜강의 서양과학 수용은 놀랄 만큼 빠른 동시에 정확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었고, 또 자신의 철학체계와 관점에서 서양 서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취사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 업적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2. 기학이 지닌 의미와 한계혜강의 기학이 지니는 사상적 의의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먼저 기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서구의 과학기술문명이 유입되는 시기에 살면서 이것의 우월성에 대해 충격을 받고, 앞으로 그러한 과학기술문명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는 시대의 전개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욕구가 구체화된 것이 바로 기학으로, 따라서 이 속에는 그의 독특한 인식론을 비롯하여 새로운 경학과, 윤리관, 진리관, 세계관 등이 제시되어 있다.기학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을 포괄하는 학문체계이다. 기학이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혜강은 이 유학의 요체를 성리학의 수기 중심의 인문과학이 아닌, 치인 중심의 사회과학으로 보고자 하였다. 따라서 기학에서는 일신운화(수신의 원리)보다 통민운화(치국의 원리)가 강조된다. 이것은 인문, 사회과학, 특히 유학으로서의 사회과학을 과학화, 수학화하려는 혜강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혜강은 기존의 유교 경전을 성경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새로운 경전으로서의 ‘천경天俓’에 주목한다. 이런 측면에서 ‘탈경학적 경학관’이라고 할 수 있다.기학에서 제시된 진리관에 의하면 진리란 선과 이利를 동시에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의 추측으로 얻어진 천인운화에 의해 수립된 천인운화지준적이야말로 선, 불선, 득실, 시비를 판별하는 추고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혜강은 기학을 저술함으로써 농본사회, 폐쇄사회에서 형성된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사회 즉 과학과 기술이 중시되는 개방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시키고자 시도하였다는데 그것의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혜강의 기학이 갖는 한계는 무엇인가? 기학이 갖는 한계로서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발견에 있어 추측과 증험)을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혜강이 기학에서는 아직 검증과 확인이 안 된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보자.첫째, 혜강은 형질의 기가 운화의 기로 말미암아 생성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때
1. 청계천의 역사와 청계천 복원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청계천(1) 청계천의 역사와 청계천의 복원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다. 청계천은 하상이 낮았기 때문에 건조한 봄·가을에는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조선 초기 태종 집권(1406)부터 영조 집권(1733)까지 많은 공사가 이루어졌다.)청계천이 지금의 청계천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500년 동안 불리어 오던 '개천'이라는 이름 대신에 '청계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때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의 하천명칭들이 정리될 때 개정된 것으로 추측된다.)일제 강점기 이후 청계천 자체는 약 10여년 동안 방치되었다. 일본은 청계천을 이름 값 못하는 '탁계천(濁溪川, 더러운 물이 흐르는 시내)'이라고 비웃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울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흘러온 청계천은 하루아침에 더러운 하수구로 전락하여, 청산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청계천 복개계획을 발표하였다.)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나라의 가난하고 불결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으며,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 속에서 청계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유일한 방법, 그것은 '복개(覆蓋)'였다.)청계천이 복개 이후 약 40년이 지난 오늘날 청계천은 도심산업의 중심지로서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는 하루에도 수십만 대의 차량들이 지나 다닌다. 그러나 더 이상 청계천을 서울의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서울의 이미지를 해치는 주범으로 지적 받고 있으며, 청계고가도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는 근대화·산업화의 상징이 아니라 개발시대의 무지가 낳은 흉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생태환경의 회복과 지속가능한 도시로서의 변모를 계기로 2003년 7월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되었고, 2005년 9월 완공 되었다.(2) 조사의 의의와 초점이번 조사는 청계천의 복원으로 인하여 생긴 복원의 긍정적인 효과에 중심을 두어 자연과 인간의 공생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춰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특히 긍정적인 효과에서 관광적 측면, 경제적 측면 그리고 이번 주제에 가장 부합하다고 할 수 있는 환경적 측면에 대해 조사하였다.2. 청계천 복원의 긍정적인 효과(1) 서울의 새로운 관광명소 창출 동대문 패션상과와 연결된 청계천수변공간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방문하고 싶어하는 곳)으로서 북악산, 인왕산 및 남산에서 흘러온 물이 모여 서울 한복판을 흐르는 중심하천 청계천의 복원은 역사적, 환경적, 경제적 차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 관광의 격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 하고 있다. 청계천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청계천 복원으로 인한 수변문화거리 조성으로 서울의 역사문화유적(고궁)과 종로, 동대문 패션상가, 을지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문화 공간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청계천을 거니는 시민들과 주변 직장인들은 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주변상가에서 쇼핑을 즐길 수도 있으며, 아이들은 물가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도시형 자연하천으로 복원되었다.이러한 결과는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 직후인 2005년 10월8일부터 14일까지 청계천을 방문한 시민 500명(만 16세 이상)을 대상으로 실시한 ‘청계천 방문자 만족도 조사’에 잘 나타나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방문객 중 96.6%가 올해 청계천에 ‘다시 오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시민들이 공감하는 청계천 복원효과로는 ‘시민 문화공간 및 휴식공간 맑은내다리의 야경제공’(61.2%)이 꼽혔다.) 즉, 시민들에게 있어서 청계천 복원의 가장 큰 효과는 관광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2) 소음감소 및 대기환경 개선청계천의 복원은 도심 속에 대규모 공원, 녹지 공간, 하천을 생산함으로써 환경적인 풍부성과 쾌적성(amenity)을 높였다. 또한 복원 전에 야기되었던 환경문제들을 일정 정도 해결하는데 기여하였다. 구체적으로 먼저 청계천 복원은 폐수와 오염된 공기로 가득한 청계천의 정화를 가져왔다. 또한 고가도로의 철거를 통하여 도시의 환경개선에 크게 기여하였다.고가도로의 철거를 통해 이루어진 환경개선 효과는 소음감소와 대기환경 개선이 있다.1) 소음 감소 청계천 복원 전?후 환경개선지표을 참고해보면, 2005년 9월 조사된 청계천변의 환경소음은 평균 69.6 ㏈로 2003년 4월의 73.8보다 4.2㏈ 줄어들었다.) 청계천 바로 옆 산책로의 소음은 평균 60.5㏈로 더 조용해졌다.) 소리 강도가 2배로 세질 때 소음이 3㏈ 증가하는 것에 비춰보면 상당히 개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 대기환경 개선고가도로가 철거됨에 따라 소음과 마찬가지로 대기환경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대기환경은 아황산가스와 미세먼지, 오존, 이산화질소, 일산화탄소 양의 변화로 복원 전?후 얼마나 많은 환경개선 효과를 가져왔는지 비교할 것이며, 열섬 현상 또한 위의 방법으로 규명할 것이다.다음 표2, 3)은 청계4가 도로변의 대기질 상태를 청계천 복원이 완료된 “2005년 9월”을 전?후로 2002년부터 2007년 8월까지 8월달과 12월달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구분연도아황산가스(ppm/년)미세먼지 (PM10)(㎍/㎥년)오 존(ppm/8시간)이산화질소(ppm/년)일산화탄소(ppm/8시간 )2002년 8월0.002460.0150.0380.82003년 8월0.004600.0080.0470.72004년 8월0.006490.0110.0640.62005년 8월0.005560.0080.0380.7복원 전 평균0.00452.750.0100.0470.72006년 8월0.005340.0100.0300.62007년 8월0.005370.0100.0370.5복원 후 평균0.00535.5(-17.25)0.0100.034(-0.013)0.55(-0.15) 청계 4가 도로변 8월달 대기질 현황구분연도아황산가스(ppm/년)미세먼지 (PM10)(㎍/㎥년)오 존(ppm/8시간)이산화질소(ppm/년)일산화탄소(ppm/8시간 )2002년 12월0.006750.0060.0460.92003년 12월0.009980.0030.0550.72004년 12월0.008790.0040.0770.7복원 전 평균0.0075840.00430.05930.762005년 12월0.007490.0060.0460.72006년 12월0.010310.0020.0490.7복원 후 평균0.00840(-44)0.0040.0475(-0.011)0.7(-0.06) 청계 4가 도로변 12월달 대기질 현황위의 표에서 복원 전 평균과 복원 후 평균량을 보면 미세먼지량은 8월 기준 52.75㎍/㎥년에서 35.5㎍/㎥년으로 줄어들어 약 40%정도 줄어들었으며 12월 기준으로는 84㎍/㎥년에서 40㎍/㎥년으로 줄어들어 50%이상 줄어들었다. 이산화질소량은 8월 기준 0.047ppm/년에서 0.034ppm/년으로 감소하였다. 일산화탄소량 역시 소폭 줄어듦에 따라 청계천 복원이 대기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왔음을 알 수 있다.다음은 열섬 현상이 청계천 복원 후 어떤 변화가 이루어 졌는지 알아보자.열섬현상은 열용량이 큰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구조물로 뒤덮여 있는 도심에 특히 잘 발달하는데 주택, 자동차 등에 의한 열 이외에도 구조물이 바람의 통로를 막고 있을 때에도 잘 발생한다. 청계천 복원 전에는 이와 같은 열섬현상이 일어나기 쉬운 장소였다. 고가도로에 의해 자동차의 소통이 많을 뿐만 아니라 고가도로 자체가 바람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청계천이 복원된 뒤 주변지역의 열섬 현상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의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2004년 8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청계천 주변 500m 범위의 기온 분포를 분석한 결과, 청계천 복원 뒤 주변 기온이 대략 1.3도 낮아진 것을 볼 수 있다.1차 조사 때에는 청계천 주변 13개 지점의 기온은 서울 평균기온보다 평균 2.09도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복원 뒤인 2005년 9월 말 3차 조사 때에는 서울 평균기온보다 0.84도 높게 관측됐다. 복원 뒤 기온이 1.25도 낮아진 셈이다. 특히 청계천 내 녹지지점은 복원 전엔 서울 평균기온보다 2.33도나 높았으나 복원 뒤에는 0.51도 높은 데 그쳐, 무려 1.82도나 낮아졌다. 이러한 기온 변화의 긍정적인 효과는 결국 복원 뒤 청계천에 물이 흐르고 잔디 등 녹지가 조성되었으며, 고가 도로 철거에 따른 바람 길이 형성되어 열섬 현상이 많이 줄었다고 사료된다.3. 청계천 복원의 아쉬운 점과 결론청계천에 놓여진 수표교청계천 복원은 600년 달하는 서울의 역사성과 문화에 대한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청계천을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 왔다.그러나 석조 문화재인 수표교 등의 청계천의 문화유적지 복원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장충단 공원에 남겨진 수표교광통교의 경우는 복원 후의 청계천 변의 폭보다 다리의 길이가 모자라 4m짜리 돌다리를 덧댄 이상한 다리가 되었고, 수표교의 경우 청계천 변의 폭보다 약 8m 길기 때문에 복원을 하기 애매해 졌다.이 외에도 상류를 복원하지 않고 양수기로 한강 물을 끌어다 중간부터 흘려보내는 방식인데다, S자가 아닌 직선으로 만든 인공하천으로 자연 하천을 복원하지는 못했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청계천 복개가 산업화 시대의 논리였다면 복원은 탈산업화 시대의 논리이다. 탈산업화는 풍부한 생태성을 요구한다. 생태성은 도시의 경쟁력이자 삶의 질의 척도가 된다. 도로로 복개된 청계천의 생태하천으로의 복원은 많은 생태적인 풍부성을 내포한다. 복원은 비록 복원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켰을지라도 환경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해주었다는 점에서 실보다는 득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서울도심의 핵심 문제인 녹지공간과 수자원의 부족은 일정 정도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