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 동양근세사영화 감상평사학과 3학년 경석현1.영화 는 장예모(張藝謨) 감독, 공리(??) 주연의 중국영화이다. 장예모와 공리는 1988년 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이 영화는 1988년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포함하여 세계 유명 영화제에 출품되어 각종 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 등을 통해 장예모의 영화는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2년 6월, 프랑스정부가 장예모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프랑스 주재 중국대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거 프랑스인들은 중국에는 천안문과 만리장성밖에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프랑스인들에게 중국에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장이머우(張藝謨), 천카이거(陳凱歌), 그리고 아름다운 궁리(??)가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것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장예모, 공리 콤비의 영화가 당시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특히 기존의 중국사회에 대해 세계인들이 갖고 있었던 이미지를 타파하는 데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도 세계인들이 갖고 있었던 중국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타파하는 데에 한 몫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는 제 11회 벤쿠버 영화제에서 에어캐나다상(장예모 수상), 제 49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장예모 수상), 여우주연상(공리 수상), 제 28회 전미 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상 등을 수상했고, 세계는 다시 한번 장예모와 공리를 주목하였다. 과거사에 집착하여 침울한 감상주의와 형식미에 치우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 장예모 감독은 이 영화를 기점으로 현대 중국인의 삶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이 영화는 중국의 농촌 모습과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의 도시 모습을 모두 사실적으로 담고 있어 세계인이 당시 중국 사회-90년대 초반의 중국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이 글은 영화 에 대한 감상평이다. 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무엇이고, 그 내용을 통해 장예모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나아가 장예모가 영화를 제작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의 중국사회, 를 낳은 90년대 초반의 중국사회는 어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이 감상평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겠으나, 90년대 초반의 중국 역사 속에서 영화 를 평가하는 것이 영화 감상 및 평가에 있어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2.의 원제는 추국타관사(秋菊打官司)이다. ‘추국’은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니, ‘추국이 소송을 걸다’라는 의미이다.) 원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주요 소재는 소송이다.영화의 배경은 중국의 한 농촌마을이다. 추국은 남편과 함께 고추를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시골의 임신한 여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남편이 촌장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촌장과 말다툼을 한 끝에 남근을 걷어차여 부상을 입게 되자 추국은 촌장에게 가 사과를 요구하지만 바로 거부당한다. 추국은 이에 향(鄕)의 공안국에 고발하여 촌장이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향 공안국은 촌장에게 치료비를 부담하라는 결정을 내렸으나, 촌장은 추국에게 돈을 직접 주지 않고 더 심한 모욕을 준다(돈을 건네주지 않고 땅에 던져 주어가게 한다). 추국은 촌장에게 사과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현의 공안국에 고발하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현의 재판에서도 추국은 촌장으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하고 금전적인 보상만을 제시한다. 이에 추국은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市)의 공안국에 고발하였고, 역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자 성(省)의 인민법원에까지 고발하였고, 법원의 조사 결과 남편의 뼈에 금이 갔던 사실이 확인되어 폭행사건으로 확대된다.추국은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만삭이 되어 출산을 하게 되는데, 이 출산을 계기로 추국과 촌장에게 화해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추국이 출산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촌장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추국을 들것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가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고마움을 느낀 추국은 출산 후 촌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촌장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촌장은 그날 호송차에 실려 인민법원으로 끌려가게 된다.3.장예모가 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에 앞서 장예모가 감독한 영화를 몇 편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장예모가 이전에 제작한 영화 가운데 대표적인 영화로는 , , 등이 있다. 장예모가 이들 영화를 통해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은 중국사회에 깊이 박혀 있는 봉건적 전통질서였다. 세 영화의 여주인공은 모두 돈에 팔려 시집 가게 된다. 더욱이 상대 남자는 나병환자()이거나 성불구 노인() 아니면 이미 결혼하여 부인이 셋이나 있는 남자()이다.장예모가 이렇게 자신의 영화에서 봉건적 질서에 대해 다루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아마도 인간의 욕망과 가장 어긋나는 질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인간의 사랑, 생명력을 봉건질서에 대립 시키는 구도)를 잡음으로써 중국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봉건질서의 실체를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는 근대화의 산물인 ‘법’이 중국의 관습에 승리를 한다는 설정을 하여 기존의 장예모 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촌장과 향 공안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대충 무마하려는 관습에 대해 (전통/근대의 구도를 관습/법에 대비 시켜볼 때) 이는 근대·법이 승리한다는 것이다(물론 결과적으로 이 영화 역시 비극적이었지만).그러나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여자주인공 추국이 법에 의탁하게 된 것은 촌장의 폭행으로 인해 남편의 성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행여 아들을 낳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이 점에서 볼 때 여전히 가부장제적 남근주의가 중국현실을 주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추국은 임신한 상태였고, 만약 딸을 낳을 경우 그리고 남편의 성기능에 이상이 생기게 되면 더 이상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추국을 인민법원까지 끌고 갔던 원동력이었다. “그래도 거길 차면 안 되죠.”라는 추국의 반복적인 대사에서도 이는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4.이제 장예모 영화의 특징은 (적어도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까지는) 봉건전통을 소재로 하여 중국 현실을 해부하는 것에 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봉건전통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우리는 보통 장예모를 제 5세대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제 5세대 영화감독이란 1976년 모택동 사망 후 다시 문을 연 북경영화학교 출신의 영화감독들, 특히 북경영화대학 78학번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젠 세계 영화인의 상식어가 되었다.모택동의 사후 중국사회, 중국의 80년대는 반성의 시대이자 계몽의 시대였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80년대 중국의 지식인층은 비극을 체험하였고, 당시 지식인들은 5. 4운동 이후의 중국 현대사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다.그들이 5. 4운동 이후를 중국사에 있어서 현대로 규정하는 까닭은 5. 4운동 이후를 근대 자본주의를 지향함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여 근대 이후의 시대로 나아가는 역사의 시작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이다. 신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는 반외세, 반봉건이었다. 반외세는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나 중화민족의 독자적인 역사 발전을 이룩하자는 것이었고, 반봉건은 5000년 동안 중국을 속박해 왔던 전통적인 봉건질서로부터 탈피하자는 것이었다.
서평: ?반역의 책 - 옹정제와 사상통제?(조너선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이산, 2004)사학과 3학년 경석현1.중국은 언제부터 저렇게 껐을까? 어떻게 저렇게 큰 영토를 확보하고, 다양한 민족을 포함한 거대 국가를 만들었을까?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 정도는 이러한 궁금증을 갖어봤을 듯하다. 교과서적인 말로 역사를 왜 공부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현재의 우리 모습은 과거 우리의 모습이 축적된 결과이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를 잘 알기 위해서는 그 축적된 과거의 우리 모습을 파악해하고 이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한다(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다시 위의 저 질문으로 돌아가, 중국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바로 앞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접목시켜 생각해 보자.지금으로부터 2200년전 시황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 제국을 형성했다. 7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전국를 진이 통일을 하여 왕 보다도 높은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중국의 황제는 이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이 현대 중국의 역사적 기원에 해당될까? 진이 통일하고 난 후 20여년이 지나 漢族이 세운 통일왕조 한이 등장한다. 한은 전·후 합쳐 400년이라는 중국의 역사시대 왕조 가운데 가장 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럼 한족이 세운 한나라가 현대 중국의 기원일까?현대 중국의 범위는 매우 넓다. 가깝게는 조선족이 살고 있는 간도지역에서부터 내몽고와 신강, 마카오까지 영토상으로도 그렇지만 민족적으로도 다양하다. 이러한 측면을 봤을 때 과연 秦이나 漢에서 그렇게 넓은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중국(중화)라 생각했을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의문은 진, 한 이후에 등장하는 수, 당, 송, 원, 명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中華사상에 입각한 華夷論이 지배를 했던 시기이다. 즉, 화와 이를 분명히 구별하여 이는 화가 될 수 없고, 오직 천하는 중화가 중심이며 주변에 있는 이는 중화의 덕을 받아 교화되어야 하고, 또 중화는 그들을 교화시켜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원이 아무리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동유럽까지 그 활동 영역을 넓혔다 해도 그들은 중화의 입장에서 보면 夷에 불과했다.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비록 중국 정부의 입장이긴 하나) 현대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중국의 인민들은 한족이건 조선족이건 모두가 중화가 되었다. 그토록 중화와 이적을 구분지으려 했던 역대 중국이 지금은 모두를 중화로 파악하려 한다. 어떻게 된 것일까?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이 책 ?반역의 책 - 옹정제와 사상통제?를 통해 구할수 있을 듯하다. 부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전근대 마지막 왕조였던 청조의 옹정제 시대이다. 옹정제 때 과연 어떠한 일이 일어났기에 중국에서 화이론에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 보도록 하자.2.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알아보자. 후난 성 융싱 현의 산골마을 출신 하급 지식인 쩡징은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사상가 뤼류량의 반청사상에 공감하고 백성이 겪는 고초에 분개하여 촨산총독(川陜總督)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웨중치는 남송의 민족적 영웅 웨페이(岳飛)의 후손으로 당시 청조를 뒤엎고 한족 왕실을 재건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중치는 쩡징의 편지를 가져온 장시를 투옥하고 고문하며 모반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해버렸다. 동생의 제위를 훔친자, 술고래, 색광, 살인마 따위의 노골적인 비난과 이적은 중화를 다스릴 수 없다는 화이론으로 가득 찬 편지내용을 보고받은 옹정제는 이런 생각이 쩡징뿐 아니라 한인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역모 관련자를 색출하여 가차 없이 처벌했지만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사면하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관용’을 베풀었다. 나아가 옹정제는 쏟아지는 비난을 잠재우고 화이론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의각미록?를 간행하여 쩡징과 비슷한 생각을 품은 다수의 한인을 설복하고 교화하려 했다.)옹정제의 논리는 이러했다. 옹정은 ?서경?의 “하늘은 침함이 없이 오직 덕 있는 자를 도우신다”(皇天無親 惟德是輔)는 구절을 인용하여 선정의 핵심은 결코 출신지역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옹정은 말했다. 만주인이 중국과 주변지역에 성공적으로 평화와 통일을 가져왔을 때 왜 한인들은 ‘내’와 ‘외’라며 불공평한 비교를 해대고 ‘이’나 ‘적’으라고 부르는 민족들을 적재시하여 자기를 ‘화’로 칭하는가? 단지 그들의 의관이 다르고 전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것은 천하를 다르시는 道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금 ‘한인’으로 숭앙하는 과거의 성군 중 몇몇은 사실 ‘이’나 ‘적’이었다. 반면에 가장 포악한 폭군은 ‘한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출신지 때문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 공자도 자기가 살던 혼란과 분열의 시대에 대해 “이적에게도 군주가 있으니 제하에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고 했다. 경계는 물론이고 언어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오늘날 후난·후베이·산시 성은 모두 한때 ‘이’의 영토였다.)이민족 치하에 살던 한족은 언제나 화이론을 들먹거리며 이민족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반발에 대해 이민족 지배자들의 반응은 거의 언제나 관련자를 색출하여 혹독하게 처벌하는, 사상탄압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강희제나 건륭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옹정제는 달랐다. 몰론 그도 여느 이민족 지배자 못지않게 철저한 사상탄압에 나선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한족의 화이론을 변형시키고자 했다.이후 기존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책들은 모두 금서에 되어 청조가 말할 때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음 황제인 건륭제 때에 옹정의 논리가 담겨져 있는 ?대의각미록? 역시 금서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3.현대 중국에서 만약 옹정제 이전의 화이사상을 기반으로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다면 저 수많은 소수민족은 독립된 국가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역대 중국 왕조가 중국 전역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이 중화가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통합이 되더라도 영토적인 통합에 불과했을 뿐,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통합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화이의 극명한 구분은 옹정제의 노력으로 서서히 변하게 되었고, 중화는 어떤 특정한 개념이 아닌 것이 되었다. 즉, 평화를 공존하는 질서에 속에서 덕의 통치가 행해진다면 곧 중화가 된다는 옹정의 논리가 아니었다면 현대 중국의 수많은 소수민족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2006-1 중앙박물관 인턴쉽朝鮮時代 宮闕 建築의 性格)- 景福宮을 中心으로 -慶 碩 顯)目 次Ⅰ. 머리말Ⅱ. 景福宮의 創建Ⅲ. 景福宮 殿閣의 配置形態와 그 名稱의 意味 考察1. 景福宮 殿閣의 配置形態2. 景福宮 각 殿閣의 名稱과 그 意味Ⅳ. 宮闕 建築으로써 景福宮의 性格Ⅴ. 맺음말Ⅰ. 머리말도성의 궁궐은 국가의 권력이 집중된 곳으로 厚德과 威嚴이 내포된 곳이다. 국왕이 머물며 政令으로 국사를 담당하는 곳이며 동시에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人情을 베푸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일찍이 정도전은 궁궐에 대해 “신은 상고하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라 하였다.景福宮은 조선의 중심 궁궐[法宮, 正宮]로 조선왕조 국가권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경복궁을 재건함으로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궁궐은 왜곡된 근대화로 인해 그 규모와 형태가 많이 훼손?변질된 상태이다. 이런 이유로 문화재청은 지난 1990년부터 오는 2009년까지 20년간 총액 1789억원을 투자하여 침전, 동궁전, 흥례문, 태원전, 기타권역 등 5개 권역으로 나눠 복원사업을 추진, 지난 95년에는 침전, 99년에는 동궁전, 2001년에는 흥례문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역시도 高宗代 재건한 경복궁 규모의 40% 밖에는 되지 않는다.)21세기 문화 선진국을 지향하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봤을 때, 전통문화의 올바른 계승은 21세기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始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경복궁에 대한 이해는 조선왕조의 건축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아니라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문화를 계승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의의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에 대한 연구는 다른 사학이나 고고학 분야에 비하면 그렇게 활발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房)이 5간이고, 남쪽으로 뚫린 행랑이 5간, 동쪽의 소침(小寢)이 3간이다.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 행랑에 닿았고,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동쪽 행랑에 닿았으며, 서쪽 소침(小寢) 3간과 통하는 행랑 7간은 연침의 남쪽 통하는 행랑에 닿았다. 또 통하는 행랑 5간은 연침의 서쪽 행랑에 닿았고, 보평청(報平廳)이 5간, 정사를 보는 곳은 연침(燕寢)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에 이방(耳房)이 각각 1간씩이며, 남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7간, 동쪽으로 통하는 행랑이 15간이다. 처음 남쪽에서 통행하는 행랑 5간이 동쪽 행랑에 닿고, 서쪽으로 통하는 행랑 15간도 역시 남쪽 행랑 5간에서 서쪽 행랑에 닿고, 연침 북쪽 행랑 동쪽 구석에서 정전(正殿)에 그치고 북쪽 행랑의 동쪽 23간이 동쪽 행랑, 서루(西樓)에서 정전(正殿)까지 가는 북쪽 행랑 서쪽 20간이 서쪽 행랑이 되어, 이상이 내전(內殿)과 정전(正殿)이다. 5간의 조회받는 곳은 보평청 남쪽에 있는데, 상·하층의 월대(越臺)가 있어서 들어가는 깊이가 50척, 넓이가 1백 12척 5촌(寸), 동계(東階)·서계(西階)·북계(北階)의 넓이가 각각 15척이다. 윗층계[上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石橋)가 5층[五級]인데 중계(中階)의 사면 넓이가 각각 15척, 아랫층계[下層階]의 높이는 4척, 석교가 5층이다. 북쪽 행랑 29간을 통하는 행랑은 북행랑에서 정전(正殿)의 북쪽에 닿았고, 수라간(水刺間) 4간과 동루(東樓) 3간은 상하층이 있다.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동쪽에 닿아서 내전의 동쪽 행랑과 연했으며, 그 남쪽 9간은 전문의 동각루(東角樓)에 닿았다. 서루(西樓) 3간도 상·하층이 있는데, 그 북쪽 행랑 19간은 정전의 북쪽 행랑 서쪽 구석에 닿아서 내전의 서쪽 행랑과 연하고, 그 남쪽 9간은 전문(殿門)의 서각루(西角樓) 전정(殿庭)에 닿았다. 넓이는 동서(東西)가 각각 80척, 남쪽이 1백 78척, 북쪽이 43척이며, 전문 3간은 전(殿)의 남쪽에 있로 東·西가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경복궁의 배치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용된 명칭을 살펴 보면 더욱 자명하게 알 수 있다. 근정문 좌우에는 日華門·月華門, 근정전의 좌·우 문루에는 隆文樓·隆武樓 등 의도적으로 상대적인 쌍을 이루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중심축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승정원을 비롯한 홍문관, 예문관 등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서문인 迎秋門에는 승지들이 주로 다녔다고 한다.) 근정전의 동쪽에는 세자가 지내는 동궁이 있었다.경복궁의 배치 상에는 이런 대칭적 요소뿐 아니라 사방위와 중심의 요소도 여러 곳에서 보인다. 즉,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위적 요소이다.北, 水, 冬, 知, 墨西, 金, 秋, 義, 白中, 土, 信, 黃東, 木, 春, 仁, 靑南, 火, 夏, 禮, 朱표 1 동양의 전통적 오방개념오방위의 개념은 오행과 오상의 개념과 합치되어 사용되었다. 즉, 동쪽은 목·춘·인·청룡에 해당하고, 서쪽은 금·추·의·백호, 남쪽은 화·하·예·주작, 북쪽은 수·동·지·현무, 중앙은 토·신·황룡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봄에 비유되는 세자의 세자궁이 동쪽에 있는 것이고, 동쪽의 문이 건춘이다. 서쪽의 문이 영추문인 이유도 그러하다. 남문인 광화문의 천정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중앙의 어도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한양의 四大門인 興仁之門, 敦義門, 崇禮門, 弘知門도 이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이상을 종합해 보면, 경복궁의 정전에 도달하려면 세 문을 지나야 하고 이는 離宮인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周禮考工記?의 ?궁실제도?의 규정중 “三門三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복궁의 전각 배치는 그 기능적인 측면에서 몇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먼저, 외전인 근정전과 사정전이 있고,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다. 그리고 중앙의 축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궐내각사가 있고, 동쪽에는 동궁이 있다. 중앙의 축을 기준으로 좌·우를 의도적으로 대칭시킨 것이 경복궁 배치형태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의 궁궐 배치 상에서 오방위적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4)勤政殿과 勤政門정도전의 정치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그가 외전의 이름을 근정전이라 지은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 일이겠습니까? 《서경》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한 것만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먹하여 정문을 통해 정령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려 했다.)이상 정도전이 칭한 각 전각의 명칭의 의미에 대해 살펴 본 것을 정리하면, 정도전은 조선개국의 주체세력으로 그의 정치적 이념을 각 전각의 명칭을 정한 이유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인정론이나 재상중심정치론 등이 그것이다. 또한 성리학적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Ⅳ. 宮闕 建築으로써 景福宮의 性格궁궐은 그 자체의 성격 및 용도 등에 따라 法宮 또는 正宮, 離宮, 別宮, 行宮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의 궁궐체제를 “법궁-이궁”의 양궐체제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궁에 대한 인식은 개국 초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국 초에는 한양에 경복궁이 유일하여 “법궁-이궁”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정종대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고, 태종대 또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이궁에 대한 언급이 많아진다. 이는 제1,2차 왕자의 난 등 경복궁에서 어려움을 겪은 연유로 경복궁 이외의 궁을 필요로 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축조되는 궁이 昌德宮이다.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은 법궁, 창덕궁은 이궁으로써 양궐체제로 궁궐이 운영되었다.법궁은 국왕이 상시 거처하는 중심 궁궐, 즉 궁궐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을 일컫는다. 제1의 궁궐이 법궁이다. 이러한 법궁에 변고가 생기거나 화재를 당했을 때 국왕이 옮겨 머무는 궁이 제2궁인 이궁이다. 궁궐의 제도나 격식이 법궁에는 못 미치지만, 이궁이라고 해서 국왕의 사적 생활 및 공적 활동에 필요한 제반시설을 갖추지 않는 것은 아니다.)앞서 살펴봤듯이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는 조선왕조의 건국 주체 세력의 정치유신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이 경복궁의 축조이며, 여기에는 자연히 당시 주체세력의 이념과 사상이 농후하게 깔려 있었다. 즉, 주자학적 지배질서의 구현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경복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전각의 배치형태 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음양오행적 요소)나 『周禮』적인 요소 등이 근거라 할 4.
총론: 무신집권기 농민항쟁과 고려 후기 사회변동사학과 3학년 慶 碩 顯목 차Ⅰ. 머리말Ⅱ.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의 원인1. 정치적 원인 - 12세기에 나타난 대민책을 중심으로2. 경제적 원인3. 사회적 원인Ⅲ.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의 전개 - 최씨정권기를 중심으로1. 천민들의 항쟁2. 경상도 지역의 신라부흥운동3. 강화도정부 시절의 농민항쟁Ⅳ. 고려 후기 사회변동과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의 역사적 의의1. 고려 후기의 사회변동 - 사회경제적 측면을 중심으로2.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의 역사적 의의Ⅴ. 맺음말Ⅰ. 머리말일반적으로 의종 24년(1170)에 발생한 武臣政變을 기점으로 고려의 전기와 후기를 구분한다. 이렇게 고려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武臣政權의 성립 이후 고려 사회가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무신정변으로 고려 사회가 변하게 된 것이 아니라 무신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나타나는 일련의 현상 때문에 고려 사회가 질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武臣執權期의 대규모 農民抗爭이다.고려 사회가 갖고 있던 기존의 모순구조에 대한 위로부터의 대응이 무신정변이었다고 하면, 무신집권기의 농민항쟁은 아래로부터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이 기존의 모순구조 속에서 파생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고려사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 사회의 모순구조와 고려 후기의 사회변동에 대해 고찰하고자 할 때 반드시 규명해야 할 부분이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이다.이 때문에 그 동안 학계에서는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에 대해 꾸준히 주목하였고 그 결과 지금은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되었다.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에 관한 연구는 일제시기 旗田巍)와 白南雲)에 의해 시작된 이래,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金錫亨의 연구), 남한에서는 邊太燮의 연구)를 거치면서 무신집권기 농민항쟁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일제시대의 연구가 맑스주의의 기를, “庚寅ㆍ癸巳年의 정변 이후로, 市井에서 짐승 잡고 술 팔던 무리와 활을 당기던 군사 중에 부당하게 외직의 수령에 참여한 자가 많았다. ……하루아침에 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주고 빼앗는 권한을 가지게 되면, 그들이 재물을 몹시 탐내고 이익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하였다.(?高麗史節要?卷13 明宗 16年 8月)B-3. “어찌하여 백성을 맡은 관리들이 나라일 보다 자기 利를 앞세우며 남에게 손해를 주면서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백성의 膏血을 짜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며……”(?高麗史?卷20 世家20 明宗 20年 9月 丙辰)사료 B-1, 2, 3은 무신정변 이후 권세가들의 수탈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武官을 지방관으로 파견하는 한편. 지방의 수령으로 파견된 무관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 하기 위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B-2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신정변 이후 지방관으로 파견된 무관들 중에는 신분이 급상승한 이들도 있었다. 아울러 B-3에서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서 수탈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대해 정부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대책의 일환으로 명종 18년 3월에 敎書가 내려지는데, 다음의 기록을 보자.C-1. “모든 주, 현들에는 각각 서울과 지방의 양반, 군인들의 家田, 영업전이 있는바 간사한 吏民들이 권세 있는 자들에게 의탁하려는 생각으로 이 토지들을 거짓말로 閑地라고 하여 (권세 있는 자의) 이름으로 써 넣고 또 권세 있는 자들도 그것이 자기 집의 토지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公牒을 얻어 내리고…… 租를 징수해 내니 한 토지에서 받는 전조가 1년에 두세 번씩 되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高麗史?卷78 志32 食貨1 田制 田柴科條 明宗 18年 3月)C-2. “각지의 부강한 양반들이 빈약한 백성들에게 긴 기간으로 꾸어 주고 그들이였더니 왕이 명령하기를 “좋다”고 하였다.(?高麗史?卷80 志34 食貨3 賑恤 災免之制 肅宗 7年 3月)E-5. 睿宗 3년 2월 … 동, 서계의 州鎭들 및 여러 주, 현, 鄕, 部曲 등에 있는 雜所의 長吏들이 분실한 여러 문건들로 그 배상을 징수하게 된 것과 부역세를 받지 못한 부분은 乙酉年(肅宗 10年, 1105) 이전의 것에 한하여, 그리고 은과 금은 癸卯年(文宗 17年, 1063) 이전에 받지 못한 것에 한하여 모두 면제해 주었다.(?高麗史?卷80 志34 食貨3 賑恤 恩免之制 睿宗 3年 2月)E-6. 이제 살펴 보건대, 신라에서 州郡을 建置할 때, 그 田丁 戶口가 현이 되지 못할 것은, 혹 鄕을 두거나 혹 部曲을 두어 所在의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 또 所라고 칭하는 것이 있었는데, 金所ㆍ銀所ㆍ銅所ㆍ鐵所ㆍ絲所ㆍ紬所ㆍ紙所ㆍ瓦所ㆍ炭所ㆍ鹽所ㆍ墨所ㆍ藿所ㆍ瓷器所ㆍ魚梁所ㆍ薑所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물건을 공급하였다. 또 處로 칭하는 것이 있었고, 또 莊으로 칭하는 것도 있어, 각 宮殿ㆍ寺院 및 內莊宅에 분속되어 그 세를 바쳤다.(?新增東國輿地勝覽?卷7 京畿 驪州牧)E-1~5는 향·소·부곡민들이 일반 군현인들과 같이 삼세의 조세부담이 있음을 알려주는 사료이다. 삼세로부터 면제되는 계층을 천민층이라 할 때 부곡민들은 천민층은 아닌 것이다. 즉, 신분적으로 양인신분이다. E-6에 따르면 향과 부곡은 이미 신라 때부터 존재하였으며 현이 될 수 없는 곳을 향, 부곡이라 칭하여 군현에 소속시켰다고 한다. 소는 고려 때 생긴 것으로 금·은·동과 같은 물품을 생산하여 공납하던 곳이었으며 처와 장은 궁전·사원·내장택에 예속되어 세를 납부하였다. 즉, 부곡민들은 일반 군현인보다 추가적으로 더 많은 세를 내고 특정 물품을 조달하며 또한 역을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별적인 군현 편성은 고려 전기 지역간 발전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고려 전기 민 사이의 사회경제적인 불균형과 편차를 초래하였다. 이런 근본적인 사회 모순이 축적되어 농민항쟁으로 확산--14계*************49215849표 1특히 표 1)을 보면 경남 지역에 부곡제지역이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농민항쟁의 발생이 일반 군현지역보다 향·소·부곡의 부곡제지역에서 더 빈번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상도 지역의 항쟁은 당시 농민항쟁 가운데 최대 규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최대 규모의 농민항쟁이 반국가적 입장을 취했다면 최충헌정권에도 상당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최충헌정권은 1204년 6월 대대적인 경상도 개편작업을 단행하였다. 東京留守를 知慶州事로 강등시키고, 그 관내의 주·부·군·현과 향·부곡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켰다. 또한 경상도의 명칭을 尙晉安東道로 개칭하였다. 이는 당시의 중앙정부가 영역 간의 갈등을 최대한 이용하여 지방 세력의 발호 및 체제도전적인 항쟁을 막고자 한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3. 강화도정부 시절의 농민항쟁高宗 18년 6월(1231년)에 몽고군이 鐵州를 점령하자) 고려 정부는 三軍을 파견하여 몽고군에 항전을 시작하였다.) 그 후로 고려는 약 30년 간 6차례에 걸쳐 몽고와 전쟁을 치르게 된다.) 1232년 6월에 당시 최고집권자였던 최우는 강화천도를 주장하였고 반대하던 金世沖의 목을 베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달에 고종을 위협하여 천도를 단행케 하였다. 이후 약 30년 간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로 존재하게 되었다.)고려가 몽고와 총 6차례에 걸쳐 전쟁을 치르는 동안 고려 정부는 제 1차 침략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강화천도 이후 본토에서 몽고에 맞선 항전의 주체는 오히려 농민·천민군이었다.) 고종 19년 12월 撒禮塔을 사살한 것도 정규군이 아닌 處仁部曲民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몽항쟁기에 전쟁물자의 조달과 국가의 제반행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본토의 민에 대한 수탈은 여전히 자행하였으리라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다음의 사료가 관심을 끈다.I. 이달에 몽고 병란과 관련하여 6도에 宣旨使를 파견하지 않고 별감심히 고통으로 여기고 있다.(?高麗史?卷32 世家32 忠烈王 27年 4月)K-2. (江華縣이) 충렬왕 때에 仁州에 병합되었다가 얼마 후에 복구되었다.(?高麗史?卷56 志10 地理1 陽廣道 江華縣條)K-3. (義城縣이) 충렬왕 때에 大丘에 병합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원래대로 고쳤다.(?高麗史?卷57 志11 地理2 尙州牧 安東府 義城縣條)K-4. 원나라 中書省에서 우리 나라의 고을(官)이 번잡하여 백성들의 폐단으로 된다고 하므로 密城에 합쳤다. 그러나 본 주, 현의 지방 관리들이 중앙에 명령 받으려 왕래하게 되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해졌다. 그러므로 충렬왕 30년에 와서 다시 원래대로 고쳤다.(?高麗史?卷57 志11 地理2 慶尙道 梁州牧條)K-5. (燕山郡이) 충렬왕 때에 嘉林縣에 병합되었다가 얼마 후에 복구하였다.(?高麗史?卷56 志10 地理1 淸州牧條)고려 정부에서 지방사회의 피폐함의 원인을 官多民少 즉, 군현의 수는 많으나 주민의 수가 적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군현병합책을 통하여 군현의 수를 줄여나가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K-2, 3, 4, 5는 忠烈王代에 실시된 군현병합책 가운데 일부이다.) K-1은 충렬왕 27년 4월에 闊里吉思가 올린 ?錄連事目?의 일부이다. K-1에서 백성들의 폐단의 원인으로 파악한 것이 관다민소 였다. 따라서 충렬왕은 K-2, 3, 4, 5와 같은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곧 복구되는 것으로 보아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은 군현의 통합이 무원칙적이면서 무리한 병합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주현과 주현이 병합되는가 하면(강화, 양주, 고성현, 고부군), 속현과 속현이(의성현), 속현이 주현에(연산군, 금양현), 주현이 속현에(거제현) 병합되었다. 이는 군현체제 모순의 근본적 원인을 간과한 결과였다. 군현병합책의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고려 정부는 14세기 후반에 들어 토지나 인구가 적은 영세한 속현이나 부곡제지역을 주현에 폐합시켜 군현의 수를 줄여가는 현실적인 군93.